오늘~ 12/15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소설 '제인 에어' 작가 샬럿 브론테 미출간 원고 경매서 12억원 소설 ‘제인 에어’의 작가 샬럿 브론테(1816~1855)의 미출간 필사본이 15일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69만850파운드(약 12억4100만원)에 팔렸다. 이한수 기자 /조선일보 2011.12.17 00:5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17/2011121700063.html 2010 - 潘총장, "난 사각팬티를 입는다. 숨기는 것이 없다" 유엔기자단 만찬서 슈워제네거 외계인 전권대사 가상극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0/12/17/0601090100AKR20101217002800072.HTML
2009 - 만해 한용운 탄생 130주년 기념우표전시회 만해 한용운 탄생 130주년 기념우표전시회 * 기간 : 12월 15일 ~ 17일 (3일간) * 시간 : 오전 10시 - 오후 5시 * 장소 :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특별전시실 * 주최 : 동국대학교 불자교수회 * 후원 : (사)한국우취연합, 한국테마클럽
- 'The holy Face'
- 'Love' and 'The Blind...' from 'Miserere' 2009 - 색채의 연금술사 루오 전 개막 □ 색채의 연금술사 루오 전 12. 15 - 3. 28 / 예술의전당 /미술 기행-우진문화재단 http://woojin.or.kr/sub/05_sub_04.html?class_name= 5&action=read&bbs_seq=26&div=&page=1
오늘의 역사 (12월 15일)[2000년] SK텔레콤과 한국통신 컨소시엄이 IMT-2000(3세대 이동통신)의 비동기 사업권을 획득했다. LG글로콤과 동기식으로 사업신청서를 냈던 하나로통신 컨소시엄은 탈락했다. 안병엽 정보통신부 장관은 2000년 12월 15일 `2000년 하반기 기간통신사업자` 심사결과를 발표, SK텔레콤-한국통신 컨소시엄을 IMT-2000 사업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비동기 사업자 중 SK텔레콤은 84.018점(총점 102점), 한국통신은 81.860점을 받았으며, LG글로콤은 80.880점을 받아 0.980점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탈락했다. 동기식의 하나로통신은 56.412점을 받아 과락(총점 70점 미만)으로 탈락했다. IMT-2000 사업권 획득으로 국내 통신시장은 SK텔레콤과 한국통신 `2강` 체제로 굳어질 것이고 탈락한 LG는 통신사업의 장기전략을 전면 수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전문가들은 예상했다. 한편 2000년 한해동안 통신업계를 달구었던 사업자 선정작업은 국내 통신업계의 밑천을 드러낸 `루머대전`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130_0038
2000 -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영구 폐쇄 오늘의 역사 (12월 15일)[2000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영구 폐쇄 지난 1986년 사상 최악의 원전 폭발사고로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던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사고 발생 14년 만에 영구 폐쇄됐다. 레오니트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00년 12월 15일 빌 리처드슨 미 에너지 장관, 미하일 카샤노프 러시아 총리 등 20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전소내 4개의 원자로 중 유일하게 가동해온 제3기의 가동을 중단하는 버튼을 눌렀다. 3기 원자로에는 1661개의 발열부품(핵연료)이 내장돼 있으며 이미 가동이 중단된 나머지 3개 원자로 내에도 이 같은 핵연료들이 남아 있어 방사능 유출 위험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2008년 3기 원자로내 모든 연료가 해체되면 발전소 전체에 대한 해체작업이 진행될 것으로 알려졌다. 4기 원자로는 사고 직후 가동을 중단했으며 2기 원자로(1991년), 1기 원자로 (1996년)가 차례로 폐기됐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130_0039 1991 - 소련의 전설적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Zaytsev, Vasily) 사망 자이체프 [Zaytsev, Vasily Grigoryevich, 1915.3.23~1991.12.15] [역사 속의 인물] 전설적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 평범한 병사로 보였던 바실리 자이체프가 800m쯤 떨어진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쓰러진 적 주위에 두 명의 적군이 나타나자 그는 다시 한 번 겨냥한 뒤 차례로 쓰러뜨렸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의 전설적 저격수였던 자이체프의 활약은 이렇게 시작됐다. 1915년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자이체프는 우랄산맥 일대에서 자라며 사냥 사격술을 배웠다. 태평양 함대에서 근무하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그는 1942년 10월부터 한 달여간 225명의 적을 저격해 죽였다. 이 기간을 전후해서 수십 명의 적들을 저격 사격으로 더 제거한 그는 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저격부대 책임자가 되어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세 곳의 지점을 옮겨가며 넓은 목표 지역 내의 적들을 저격하는 전술을 전수했다. 자이체프가 양성한 저격수들은 2차 대전 동안 6천 명의 적들을 사살했고 그의 저격 전술은 현대전의 교범으로 자리 잡았다. 종전 뒤 자이체프는 키예프에서 섬유업에 종사하다 1991년 오늘, 76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를 모델로 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2001년 작)에서 주드 로가 주인공인 그의 역할을 맡았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12월 1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2230&yy=2011 디즈니 [Disney, Walt, 1901.12.5~1966.12.15] 오늘의 역사 (12월 15일)[1966년] 월트 디즈니 사망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만화가이며 헐리우드 최고의 영화제작자였던 월트 디즈니가 1966년 12월 15일 6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04_0410
오늘의 역사 (12월 15일)[1965년] 제미니 6호ㆍ7호, 첫 랑데부 성공 미국의 유인우주선 제미니6호와 7호가 1965년 12월 15일 미국사상 처음으로 우주 랑데부에 성공했다. 이로써 인간의 우주개척사상 거대한 신기원을 이룩하게 됐다. 우주실험에서 로켓발사, 랑데부, 도킹 등은 필수 불가결한 고난도 기술이다. 랑데부는 두 우주선이 우주에서 나란히 비행하는 것이다. 미소 양국은 당시 로켓발사를 해결한 상태에서 랑데부와 도킹을 경쟁 대상으로 삼았다. 미국의 이 랑데부실험은 미국이 달정복계획의 제2단계인 제미니계획 발사초기부터 시도했으나 실패를 거듭했었다. 그러나 이 랑데부 실험은 우주정복에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으로 미국의 이번 성공은 큰 의의를 가졌다. 또 이번 랑데부의 성공은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1호(최초 인공위성)로 시작된 미-소간의 우주경쟁에서 미국을 소련보다 앞서게 한 것이었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04_0407 역도산(力道山, りきどうざん, 1924년 11월 14일 ~ 1963년 12월 15일)은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이다. 1924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나가사키 현 오무라 시의 부농에게 양자로 들어가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 ももた みつひろ)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스모 선수가 되면서 역도산(리키도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50년 스모를 중단하고, 1951년부터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다. 안토니오 이노키, 김일, 자이언트 바바 등의 여러 프로레슬링 선수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1963년 12월 8일, 폭력단 스미요시일가(住吉一家)와의 말다툼이 원인이 되어 칼로 배를 찔렸다. 이 상처가 화농성 복막염의 원인이 되어 12월 15일 사망하였다. /위키백과
오늘의 역사 (12월 15일)[1961년] 유태인 학살범 아이히만, 이스라엘 법정에서 사형 선고 전직 나치스 친위대 장교 '마지막 해결사' 아돌프 아이히만이 1961년 12월 15일 이스라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906년생인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중에 독일과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살고 있던 유태인의 체포-강제이주-살해를 계획하고 지휘했다. 1941년 1월 20일 베를린 근교 반제에서 열린 이른바 '반제회의'에도 참석, 유대인 절멸을 의미하는 '최종 해결책'을 결정한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독일이 패전한 뒤 미군에 잡혔으나 이듬해 수용소를 탈출하여 이탈리아와 중동 등지에서 머물다가, 1950년 가족을 데리고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로 도망가 그곳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아르헨티나 시민권을 얻은 뒤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의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은신해 있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비밀정보부 모사드의 끈질긴 추적끝에 1960년 5월에 아르헨티나에서 납치돼 이스라엘로 비밀리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됐다. 1961년 4월 11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모사드의 아이히만 납치가 국제법을 위반했고, 나치 전범을 처벌하기 위한 1950년 법률이 사후입법이므로 형벌 불소급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는 점 등을 둘러싼 이스라엘 검사와 독일 변호사간의 법정공방이 뜨거웠으나 이스라엘 법정은 검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아이히만은 1962년 5월 31일 자정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04_0403 1958 -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파울리(Pauli, Wolfgang) 사망 파울리 [Pauli, Wolfgang, 1900.4.25~1958.12.15] 빈 출생. 뮌헨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A.조머펠트의 지도를 받았다. 괴팅겐에서 M.보른의 조수로 있다가, 코펜하겐으로 가서 N.H.D.보어 밑에서 연구하였다. 1923년 함부르크대학 강사, 1928년 취리히공업대학 교수, 1935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객원교수(客員敎授), 뉴저지대학 ·미시간대학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취리히공업대학 교수로 돌아갔다. 상대성이론을 전개하는 데 공헌하는 한편, 양자론(量子論)의 체계화에 힘썼으며 1924년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원자구조론에 크게 공헌함과 동시에, 전자의 스핀을 해명하는 데 기여하였다. β붕괴의 연구에서는 중성미자(中性微子:neutrino)의 존재를 제창하였으며, W.K.하이젠베르크와 더불어 장(場)의 양자론의 정식화(定式化)를 추진하여 그 기초를 확립, 스핀과 통계의 관계를 발견하고, 중간자론에서는 강결합(强結合) 이론을 제출하는 등, 이론물리학에서 크게 공헌했다. <현대물리학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194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naver
유엔기념공원(UNMCK,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은 부산광역시 大淵4동에 있는 묘지공원이다. UNMCK는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했던 16개국과 의료를 지원한 6개국의 전몰용사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1951년 1월 18일 UN군 사령부가 개성, 인천, 대전, 마산 등지에 흩어져 있던 묘지로부터 유해를 이장, 이곳에 안치하였다.
[어제의 오늘]1928년 구세군 냄비 국내 첫 등장 각 계절에는 저마다 그것의 풍광을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상징물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봄날에는 먼산 아지랑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진달래와 개나리꽃 따위가 될 터이다. 여름과 가을은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 기대보자. 박인환은 “여름날의 호숫가와 가을의 공원”을 지목했다. 시인은 특히 가을을 ‘공원 벤치 위에 떨어진 나뭇잎에 덮여 우리들 사랑이 사라지는’ 쓸쓸하고 슬픈 계절이라고 노래했다. 겨울의 여러 모습 가운데서도 세밑 풍경을 빼놓을 순 없겠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울긋불긋한 불이 켜지고, 외투깃을 세운 채 종종걸음을 옮기는 인파 속에서 또 한해를 덧없이 보냈다는 아쉬움과 자괴스러움을 느낄 때, 주위를 둘러보면 언제나처럼 그것이 옆에 있다. 구세군 자선냄비이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1928년 12월15일 명동 거리에서 국내 최초로 등장했다. 당시 구세군 한국 사령관이었던 스웨덴 선교사 조지프 바이(한국명 박준섭) 사관이 구세군 운영자금과 불우이웃돕기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했다. 그 해 구세군은 명동, 종로, 충정로 등 서울 시내에 20여개의 자선냄비를 설치해 당시 화폐로 812원을 모았다. 그 시절에는 나무막대 지지대에 가마솥을 매달았다고 한다. 그 이후 구세군 자선냄비는 전국 곳곳에 설치됐고, 겨울철 세밑풍경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손동우 사회에디터 /경향신문 2008-12-14 18:32:4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2141832445&code=
- 'Night of the Drinker' - 'The Spiral Tree'
- 'Window Right' - 'Peace Treaty with Nature'
- 'Hundertwasser House' - 'Black Hatter'
- '99 Heads' - 'Fragrance of Humus'
1928 - 오스트리아 화가, 건축가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 Friedensreich) 출생 훈데르트바서 [Hundertwasser, Friedensreich, 1928.12.15~2000.2.19] 오스트리아의 화가이며 건축가. 본명은 프리드리히 스토바서(Friedrich Stowasser). 19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1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대인인 어머니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으로 외가 친척 69명이 몰살당했으며, 그와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 거주지구(게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전 생애에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와 신념을 갖도록 했다. 그 스스로 개명한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라는 이름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이라는 뜻으로 그의 삶과 예술에 흐르는 정신을 일깨워준다. 훈데르트바서는 일찍이 색채와 형태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지녀 미술에 두각을 나타냈다. 전쟁 후 빈 미술아카데미에서 3개월 동안 공부했으며, 이후에는 유럽 전 지역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는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집과 야외, 레스토랑, 기차나 비행기 등 자신이 머무르는 곳은 어디에서든 그림을 그렸다. 또한 이젤을 사용하는 대신 캔버스나 종이를 펼쳐놓고 작업했다. 하나의 작품에 수채 물감, 유화 물감, 유성 펜, 아크릴, 템페라, 오일, 금속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으며, 종이와 캔버스는 물론 프린트지, 포장지, 나무판, 천 조각, 버려진 종이 등 다양한 곳에 그림을 그렸다. 물감의 대부분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훈데르트바서의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나선’의 형태이다. 그에게 나선은 생명과 죽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고 끝없이 돌고 있는 나선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가장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색채의 마술사’라고 불릴 정도로 색을 조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색의 조합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대담한 컬러를 사용했다. 그의 특유의 색감은 회화에서 주제를 드러내는 데 주조적인 역할을 했으며, 생명의 다양함과 무한함을 색채를 통해 표현했다. 1983년 훈데르트바서는 빈의 시의회가 의뢰한 공공주택 리모델링 작업에 착수했다. ‘건축은 네모다’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탄생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는 건축을 통해 지상낙원을 실현하려는 그의 꿈이 녹아 있다. 그는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며,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건축 안에 쏟아 부었다. 빈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쿤스트하우스 빈》 역시 그의 이러한 철학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는 도시의 메마른 건축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건축 치료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훈데르트바서는 자연보호, 산림운동, 반핵운동 등 예술 밖에서도 활발한 운동을 실천한 환경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생태주의 복음을 설파하며 캠페인 포스터를 제작하고 시위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피력했다. 일생을 환경보호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한 그는 2000년 태평양을 항해하던 엘리자베스 2호 갑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그는 유언에 따라 뉴질랜드에 있는 그의 땅 ‘행복한 죽음의 정원’ 안에 있는 튤립나무 아래 자연과 어우러져 영원히 잠들었다. 주요 작품에는 《대성당 1 Cathedral 1》(1951), 《노란 집들-질투 Yellow Houses-Jealousy》(1966), 《작은 길 The Small Way》(1991) 등의 회화 작품과 《쿤데르트바서 하우스 Hundertwasserhaus》(1983~1986, 오스트리아 빈),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Wien, 오스트리아 빈》(1991), 《블루마우 온천마을 Blumau》(1993~1997,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주) 등의 건축물이 있다. /네이버
윌킨스 [Wilkins, Maurice Hugh Frederick, 1916.12.15~2004.10.5] 1940년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원자력연구에 종사하였다. 1946년 런던대학 킹스 칼리지로 돌아가 DNA의 구조 결정과 RNA의 결정화를 연구하였다. 1962년 핵산의 구조 결정의 업적으로 F.H.C.크릭, J.D.?m슨과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naver
1909 - 스페인의 기타리스트, 작곡가 타레가(Tárrega, Francisco) 사망 타레가 [Tárrega Eixea, Francisco, 1852.11.21~1909.12.15] [오늘<1290>(12월15일)] 타레가 타레가는 작곡과 편곡에도 욕심을 내 적잖은 양의 기타독주곡과 연습곡을 남겼고, 바하와 모차르트에서 하이든과 슈베르트를 거쳐 쇼팽과 바그너에 이르는 많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기타 연주용으로 손질했다. 타레가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일 것이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그라나다에 자리잡은 알람브라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가운데 하나일 터인데, 타레가가 이 궁전에 헌정한 곡 역시 그 못지않게 아름답다.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의 아름다움 밑에는 슬픔이 깔려있는 듯하다.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 슬픔은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기독교도들에게 내주고 지중해 건너편으로 달아나야 했던 이슬람교도들의 슬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기독교인 타레가가 중세 이슬람인의 마음을 자신에게 투입해 곡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지기 시작해 14세기에 완성된 알람브라궁전은 한 때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 화려하게 꽃피었던 이슬람문명의 위대함을 뽐내고 있다. 그 시절의 시인 이븐 잠락은 알람브라와 그라나다를 다로강(江)에 허리가 감싸인 귀부인에 비유한 바 있다. 지난 달 말, 기자는 열두 해 만에 알람브라를 다시 찾았다. 알람브라는 여전히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불멸과 초월에 대한 욕망으로, 마침내 미(美)에 대한 치명적 욕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412/h2004121414074125340.htm&ver=v002
- Itamaraty Palace, Brasilia - Congress Building, Brasilia 니마이어 [Niemeyer, (Soares Filho) Oscar, 1907.12.15~ ]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났다. 리우의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L.코스타의 조수로 일하였다. 1936년 C.E.J.르코르뷔지에가 브라질에 초빙되어 교육보건성의 설계에 관여하였을 때에 그에게 협력하면서 신진 건축가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어 1947년에 르코르뷔지에와 함께 국제연합 빌딩의 설계팀에 참가하였으며, 1951년부터는 상파울루시(市) 400주년 기념 박람회의 종합계획과 건축을 담당하였다. 1957년 정식으로 새 수도인 브라질리아의 건축주임설계자가 되어, 이후 코스타의 전체 계획하에 대통령관저 ·국회의사당 ·최고재판소 ·극장 ·호텔 ·교회 등 중요 건축의 대부분을 설계하였다. 그의 특징은 근대건축의 기하학적인 공간이념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처럼 만들었다는 데 있다. /naver
1897 - 라트비아 작가 첸타 마우리나(Maurina, Zenta) 출생 마우리나 [Maurina, Zenta, 1897.12.15~1978.4.25] Zenta Maurina, a well known personality in Latvian humanities, author and essay writer, literary critic who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German-Latvian dialogue of cultures. http://www.philatelia.net/classik/plots/?id=2840
1978년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작가 첸타 마우리나가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는 이 작가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책을 보니까 이 작가는 독자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던 사람이고, 특히 자신의 삶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저리 배회하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던 작가라고 한다. 이 작가는 장애인으로 태어나 삶의 처음부터 휠체어의 신세를 져야만 했고 장애자의 신세와 또 이 때문에 덤으로 겪는 사람들의 불친절과 차가운 시선을 그녀는 자신의 신앙으로 극복한 훌륭한 신앙인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훌륭한 신앙으로 살았던 작가는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작은 책자를 펴냈다. 그 책의 제목은 <나의 뿌리는 하늘에 있다.>였다. 책의 제목에서 우리는 그녀의 철저한 신앙의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고통스런 삶 전체를 하느님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고, 자기 자신의 삶을 하늘에서 뿌리내리게 하여 성장시키려 했다. "나의 뿌리는 하늘에 있다."는 이 말은 이 세상에 아직 살면서도 세상의 공기로 숨쉬지 아니하고, 세상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공기로 숨쉬고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킨다. 영원의 상태가 아니라 세상의 시간 안에 살면서도, 이 세상의 공기가 아닌, 하느님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의해 살아가지 않고 하늘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 하늘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 삶이 위에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에서 밝은 빛을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낙담하여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늘에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 무엇으로부터 그 어려운 시간을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삶이 온통 뒤죽박죽 되었을 경우 하느님의 사랑에서가 아니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어디에서 되찾을 수 있겠는가? 첸타 마우리나가 말하는 "하늘에 자기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일"은 우리 안에 하나의 법칙을 상기시켜 준다. 그 법칙은 우리의 삶에 새겨져 있는 법칙이다. 즉 우리가 시선을 두는 곳을 향하여 우리는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법칙을 말한다. 아래를 자꾸만 바라보는 사람은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고 위를 자꾸만 바라보는 사람은 그 위를 향하여 살아가게 되어 있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과 그 방향이 달라지는 법이다. 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8hRJ&articleno= 15972709&admin=#ajax_history_home
"타인을 거울로 삼아야 자기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 첸타 마우리나
1896 - 체코 출생의 미국 생리학자, 생화학자 코리(Cori, Carl) 출생 코리[Cori, Carl Ferdinand, 1896.12.15~1984.10.20] 1896년 12월 15일 체코 프라하에서 출생하였다. 1914년에 프라하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였다. 부인인 G.T.코리(Cori, Gerty Theresa, 1896∼1957)도 프라하에서 태어나, 1914년에 프라하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면역학을 협동연구하고, 1920년에 같이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예나대학교 등에서 의학과 약물학 조수로, 그의 아내는 소아과 병원에 각각 근무하다가, 1922년에 미국에 건너가 함께 뉴욕시의 버펄로대학교 등에서 악성종양을 연구하였다. 1931년에 함께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으로 옮겨, 그는 약물학 교수를 거쳐 주임교수가 되었고, 1942년에는 생화학 교수가 되었다. 한편, 그의 아내는 1931∼1943년 약학과 연구원으로 있다가, 1947년에 생화학 교수가 되었다. 그들은 워싱턴대학교에서 악성종양의 탄수화물대사의 연구에서 인체에서의 당(糖) 대사로 연구를 진행시켜서, 1936년 근육조직에서 글루코스-1-인산염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코리에스테르이며, 1939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학회에서 코리 부처는 이 물질의 존재하에서의 글리코겐의 시험관 내 생성에 관해 발표하였다. 이러한 연구업적으로 코리 부부는 아르헨티나의 B.A.우사이와 함께 194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naver
오늘의 역사 (1893.12.15) 드보르자크 '신세계 교향곡' 초연 1893년 12월 15일 안토닌 드보르자크(Dvořák, Antonín, 1841∼1904)의 대표작인 교향곡 9번(작품 95) <신세계 교향곡>이 뉴욕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되었다. 4악장 가운데 잉글리시 호른이 연주하는 제2악장의 라르고 주제 선율, '개벽'을 알리는 듯한 제4악장의 웅장한 선율은 그의 <유모레스크>(작품 101-7번, 1894)와 함께 대중적으로 퍽 친숙하다. 그는 보헤미아(지금의 체크) 출신으로 30대 중반에 비로소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 궁핍을 면했다. 1892년 뉴욕 국립음악원장으로 초빙되어 '신세계' 미국으로 갔다. 그때 그를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도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요와 흑인 영가의 선율이었다. <신세계 교향곡>은 드보르자크가 미국 생활에서 받았던 자극들과 보헤미아 특유의 감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http://preview.britannica.co.kr/history/default.asp?num=666
게티 [Getty, (Jean) Paul, 1892.12.15~1976.6.6] [역사 속의 인물] 미술관 세운 구두쇠, 폴 게티 지독한 구두쇠이자 악질 기업가였다. 세계 최고 부자였지만 무척 인색했다. 부하 직원들이 전화를 걸지 못하도록 자물쇠로 잠가놓았고 손님에게도 공중전화를 쓰라고 할 정도였다. 폴 게티(1892~1976)는 1892년 오늘, 미국 미네소타에서 석유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찌감치 석유사업에 뛰어들어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다. '남의 불행'을 틈타 사업을 키우는 스타일이었다. 직원들을 모두 해고하고 저임금으로 재고용하거나 나치에 박해받는 유대인 재벌의 고가구를 헐값에 싹쓸이하기도 했다. 여자를 수시로 바꾸는 바람둥이였다. 5번을 결혼하고 모두 2, 3년 안에 이혼했는데 원인은 돈 때문으로 추정된다. '부자가 되는 법'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썼는데 괴팍한 바람둥이답게 '플레이보이' 잡지에 기고한 글을 모은 것이다. 그의 충고는 "부자가 되고 싶으면 부자가 하는대로 따라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죽어서는 아름답게 이름을 남겼다. LA 산타모니카산 정상에 미국 5대 미술관인 '폴 게티 미술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색하게 굴었지만 재산의 절반을 미술관에 투자했다. 공짜로 모노레일을 타고 미술관을 둘러보고 나면 칭송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박병선(사회1부장) /매일신문 2010년 12월 1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0480&yy=2010
제임스 네이스미스(James Naismith, 1861년 11월 6일 - 1939년 11월 28일)는 농구 경기를 고안한 캐나다 출신의 미국인이다. /위키백과 농구-역사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비나 눈이 오거나 추운 겨울에도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스포츠 연구에 골몰하였다. 그리하여 1891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스프링필드 소재의 YMCA 체육학교 대학부 교사인 캐나다인 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가 농구를 고안하였고, 이때 정한 규칙이 현재의 농구의 원형이 되었다. 네이스미스는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겨울이 길어 야외에서 미식 축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실내에서 격렬하게 몸을 부딪힐 수 있는 경기를 만들고자 하였다. 처음의 농구는 실내 벽에 빈 복숭아 바구니를 달아 놓고 축구공을 던져 넣었다가 꺼내곤 하는 방식이었다. 인원 제한을 정하지 않아 100명 가까이 참가하는 경기를 가진 고등학교도 있었고, 바구니를 걸어놓은 2층에 있던 관객이 골을 방해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1892년 1월 20일에 한 팀에 9명씩, 전후반 15분씩을 뛰는 농구 경기가 열렸고, 1904년 제1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때 미국 선수들에 의해 시범 경기가 펼쳐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에는 여자 농구도 정식 종목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07년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초대 총무 질레트가 처음으로 소개하게 된 이래 해를 거듭하면서 발전해 왔다. 1920년 3월 20일에 일본 도쿄에서 처음으로 국제 경기를 치렀다. 한국 내의 농구는 1983년 농구대잔치가 출범하자 크게 인기를 끌며 농구 인구의 저변 확대에 기여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 2월 프로농구가 출범함으로써 농구대잔치는 순수 아마추어경기로 남게 되었다. /위키백과
- Chief Sitting Bull (Phone Card) 1890 - 인디언 수우족(다코타족) 대추장 시팅불(Sitting Bull) 피살 시팅불 [Sitting Bull, 1831?~1890.12.15] 다코타 그랜드강 근처 출생. 본명 타탕카 이요다케. 헝크파파 수족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탁월한 지도력으로 전사집단 스트롱하트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 뒤 수족의 복지를 관장하는 사일런트 이터(Silent Eater)의 일원이 되었다. 1860년대부터 미국 육군을 상대로 한 각지의 전투에서 명성을 떨쳤고, 1867년 수족 전체의 최고 추장이 되었다.
벅 [Buck, Peter (Henry), 1880.12.15~1951.12.1] 본명은 Te Rangi Hiroa. 마오리족 출신의 인류학자·의사·정치가. 마오리족의 공중보건상태를 개선하는 데 공헌했으며 세계의 주요 폴리네시아 연구자로 손꼽힌다. 윌리엄 헨리 벅과 응근티 무퉁가 마오리족 여자인 응가롱고 키 투아의 아들로 태어난 벅은 뉴질랜드 보건국의 마오리족 보건담당관을 지냈다(1905~08). 1905~14년 마오리 청년당의 동료 마우이 포마레 경(卿)과 함께 마오리족에 대한 의료활동을 개선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1909~14년 북부의 마오리족 유권자를 대표하여 의회에서 활동했으며 1912~14년에는 장관을 지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뉴질랜드 의무대 소속으로 참전하고 돌아온 뒤 뉴질랜드 보건국 마오리족 위생담당부 책임자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1922~27년 마오리족의 생활을 주제로 과학적인 논문들을 계속 발표했으며 1927년 호놀룰루에 있는 버니스 P. 비숍 박물관 폴리네시아 민족학 연구원이 되었다. 그뒤 25년 동안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의 문화에 대한 연구와 글쓰기를 계속했으며 비숍 박물관 관장과 예일대학교 인류학과 객원교수를 지냈다(1932~34, 1936, 1939). 1946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주요저서로는 폴리네시아인들의 생활을 연구한 〈초기 바이킹들 Vikings of the Sunrise〉(1938)과 마오리족에 대한 마지막 연구서인 〈마오리족의 도래 The Coming of the Maori〉(1947)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 Josef Hoffmann - Stoclet House, Brussels - Hall with Marble Fountain - View of House from Garden 호프만 [Hoffmann, Josef, 1870.12.15~1956.5.7] 필니츠 출생. 빈의 응용미술학교에서 O.바그너의 지도를 받은 후 학우인 J.M.올브리히 등과 함께 젊은 예술가를 규합하여 과거양식으로부터의 탈피를 목표로 제체시온(Sezession:分離)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얼마 뒤 이 그룹에서 손을 떼고 영국의 러스킨과 모리스의 공예운동에 자극받아, 1903년 빈공방을 창설, '유겐트 슈틸(젊은 양식)'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이 공방에서 가구·공예품 등의 설계 지도를 담당하였으나 1933년 후원자가 원조를 중단하였기 때문에 공방을 폐쇄하였다. 그 동안 1914년 독일공작연맹이 쾰른에서 개최한 박람회의 오스트리아관에서는 제체시온 이래의 성과를 전시해보였고, 그 밖에 브뤼셀에 있는 슈토클레트 저택(1905∼1911) 설계에서는 근대건축의 기능주의적 발전을 시사하였다. /naver
스빈후부드 [Svinhufvud, Pehr Evind, 1861.12.15~1944.2.29] 사크스메키 출생. 선장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관계의 여러 직업을 가졌다. 제1차러시아화정책 때에는 자치국헌법을 수호하려다가 법원에서 해직된 뒤, 지하조직 지도부에서 활동하였다. 제2차러시아화정책 때에는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뒤 해방되어 최고지도자로서 대표단을 이끌었고, 레닌정권으로부터 핀란드 독립 승인을 획득하였다. 이듬해인 1918년 러시아내전에서는 백군(반혁명군) 정부를 지휘하였으며 백군의 승리 뒤 독일로부터의 왕에 의한 군주제를 지지했으나, 독일의 패배와 함께 이 안은 소멸되었다. 뒷날 정계에서 물러나 민간 요직을 맡고 있다가 극우운동 고양기(高揚期)에 복귀하여 1930년 총리, 1931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파를 지지기반으로 하였으나 극우에 의한 쿠데타계획 등에는 엄하게 대처해 신망을 높였다. 국제연맹의 약화에 따라 북유럽 3국이 중립연합(中立聯合)을 지향하게 되면서 이에 동조하는 노선을 택하였다. 사회민주당 입각을 거부하여 1937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재선되지 못했다. 제1차소비에트-핀란드전쟁(겨울전쟁) 끝 무렵 추축국을 차례로 방문했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yahoo
두리에이 [Duryea, Charles Edgar, 1861.12.15~1938.9.28] 두리에이 형제[Charles Edgar and J(ames) Frank Duryea ] 1861. 12. 15 미국 일리노이 캔턴~1938. 9. 28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C. E. 두리에이) 미국의 발명가. 찰스는 빠른 성장을 하고 있던 자전거사업에 뛰어들어 발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86년 오하이오 주 박람회에 전시된 가솔린 기관을 보고 이 기관의 크기가 마차나 짐차에 동력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경제적이라고 생각했다. 1891년까지 설계를 마치고, 동생과 함께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에서 창고를 빌려 자동차와 기관을 제작했다. 몇 년 뒤 형 찰스는 자신의 지도로 모형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고, 동생 프랭크는 찰스가 일리노이에 있는 동안 자신이 기관과 전동장치를 완성했다고 주장하여 형제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나 1893년 9월 22일 이 차는 스프링필드의 도로를 성공적으로 달렸다. 1895년 주로 동생이 개량한 차가 몇몇 자동차경주에서 우승했다. 이 차는 13대가 제작·판매되었다. 회사가 파산하여 형제는 흩어졌으나, 형은 3륜차를 포함하여 많은 차를 만들었다. 동생은 스티븐스-두리에이를 개발했는데, 이 차는 초기의 표준형으로 알려진 것으로서 1920년대까지 계속 생산된 가격이 비싼 리무진이었다. /브리태니커
핀센 [Finsen, Niels Ryberg, 1860.12.15~1904.9.24] 토르스하운 출생. 1890년 코펜하겐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한 뒤, 해부학교실 조수가 되었다. 학생시절부터 생활체에 미치는 광선의 영향에 관심을 가졌고, 1893년 천연두에 대한 적외선요법의 효과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1896년 코펜하겐에 핀센광선연구소를 설립하고, 광선의 생물학적·치료적 효과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그 결과 피부결핵인 심상성 낭창(尋常性狼瘡)에 대한 특수광선의 치료효과를 확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연구의 공적으로 190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naver
- 국제어에스페란토 발표 100주년 기념 (1987.7.25 발행) 자멘호프 [Zamenhof, Lazarus Ludwig, 1859.12.15~1917.4.14] [오늘속으로(12월15일)] 자멘호프 1859년 12월15일 폴란드의 안과의사 라자루스 루드비히 자멘호프가 태어났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1/12/14 18:05
베크렐 [Becquerel, (Antoine-)Henri, 1852.12.15~1908.8.25] 파리 출생. 아버지 알렉산드르(1820∼1891)와 할아버지 앙투안(1788∼1878)도 물리학자이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하고, 토목국 기사장을 거쳐 1895년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수가 되었다. 초기에는 편광(偏光) 현상과 인광(燐光), 결정(結晶)에 의한 빛의 흡수 등을 연구하였으며, 지구자기(地球磁氣) 연구도 하였다. 1895년 뢴트겐의 X선 발견을 프랑스에 소개한 푸앵카레와 토론을 벌인 것을 계기로, 형광(螢光)과 방사선(복사선)의 관계를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자연적으로 형광작용을 가지는 물질들을 조사한 결과 우라늄염(鹽)에서 모종의 방사선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1896). 이것이 베크렐선이며, 이 방사선이 기체를 이온화한다는 것, X선과는 달리 전기장이나 자기장에 의해 굽어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1903년 퀴리 부부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아들 장(1878∼1953)도 물리학자이다. /naver
에펠 [Eiffel, (Alexandre-)Gustave, 1832.12.15~1923.12.28] [책갈피 속의 오늘]1832년 佛건축가 에펠 출생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에 질투를 느낍니다. 저보다 더 유명하기 때문이죠.” 프랑스의 철제 건축기술자 구스타브 에펠(1832∼1923). 그는 “질투를 느낀다”고 했지만 그건 “감사하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자유의 여신상은 특히 그렇다. 철제 건축기술자로서 그의 진정한 명성은 자유의 여신상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1832년 12월 15일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난 에펠의 꿈은 화학자였다. 하지만 20대에 우연히 철도 건설 기술자를 만나 철도회사에 취업하면서 꿈이 바뀌었다. 그건 ‘철(鐵)’과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에펠이 처음 맡은 일은 보르도 근교의 갈론 강에 22m짜리 철교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타고난 감각 때문이었을까. 철교 건설은 그의 전공이 아니었지만 에펠은 멋지고 튼튼한 교량을 만들어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34세 때인 1866년 아예 회사를 세워 독립했다. 1877년 포르투갈의 도루 강에 길이 160m의 아치형 철교를 건설하는 등 철제 건축가로서 명성을 쌓아 갔다. 1880년대는 그의 전성기였다. 첫 작업은 자유의 여신상 내부 설계였다. 자유의 여신상 건립 작업은 1870년대 초에 시작됐지만 그때까지 지지부진했다. 45m 높이의 받침대 위에 47m 높이의 여신상을 세우기로 큰 틀만 정했을 뿐, 해풍이 거센 뉴욕의 바닷가에 그 높은 조형물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묘안을 찾지 못했다. 건립위원회는 고민 끝에 에펠을 선택했다. 에펠은 1881년 내부 설계에 들어갔다. 관건은 강한 바닷바람에도 조형물이 안전하게 버틸 수 있도록 하는 점이었다. 에펠은 유연한 동판(銅板) 300여 개를 철제 버팀대와 연결하는 식으로 작업해 바람의 충격을 최소화했다. 비가 올 경우 감전사고가 발생하는 것에 대비해 절연 장치까지 설치했다. 내부 철골 작업은 1884년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의 이름은 유럽을 넘어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이어 1885년엔 프랑스 남부 트뤼에르를 가로지르는 높이 122m, 길이 564m의 철제 아치교(가리비 고가철교)를 세웠고 1889년 그 유명한 높이 300m의 에펠탑을 완성해 ‘철의 마술사’라는 명성을 확고히 굳혔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동아닷컴 2005-12-15 03:1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51215/8257128/1 - 'Portrait of Mrs. Greer' - 'Portrait of a Young Man' - 'Sir William Lemon' 1734 - 영국의 초상화가 롬니(Romney, George) 출생 롬니 [Romney, George, 1734.12.15~1802.11.15] 영국의 초상화가. 랭커셔 출생. 18세 때 켄덜의 풍속화가 Ch.스틸에게 그림을 배웠다. 1762년 런던에 가서 초상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초상화가로 명성이 높던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 등에 비해 질적인 면에서는 떨어졌지만 교묘한 묘사와 통속적인 의사고전(擬似古典) 양식으로 인기를 얻었다. 장중한 역사화를 그리는 데에 흥미를 가졌지만,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의 연구와 노력의 보람도 없이 완성하지 못하고 초상화가로서만 이름을 남겼다. 주요작품으로 런던초상화미술관 소장의 《자화상》(1780), 그리니치국립해양박물관 소장의 《아리아도네》(1785), 런던내셔널갤러리 소장의 《해밀턴 부인》(1786) 등이 있다. /네이버
1732 - 독일의 건축가 랑간스(Langhans, Carl Gotthard) 출생 랑간스(랑한스) [Langhans, Carl Gotthard, 1732.12.15~1808.10.1] 독일의 건축가. 수학을 배웠으나 건축가로 전향하여 1775년 이래 베를린에서 궁전건축국장으로 근무하면서 교회당 ·궁전 ·극장 등을 설계하였다. 특히 브란덴부르크문(1788∼1791)의 설계자로 유명하며, 그 밖에 주요 작품으로는 하츠펠트궁 ·프로테스탄트교회 등이 있다. 아들 C.페르디난트도 건축가로, 특히 극장건축에 관계하였다. /naver
- 'The Lacemaker
- 'Lady writing a Letter', 'The Love Letter', 'A Woman in Blue reading a Letter'
1675 -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Vermeer, Jan) 사망 베르메르(페르메이르) [Vermeer, Jan, 1632.10.31~1675.12.15] 네덜란드의 화가. 1632년 10월 31일 네덜란드의 델프트에서 출생하였다.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평가도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19세기 중반에야 겨우 진가를 인정받았다.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1655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직업을 계승하였다. 화가로서는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사제관계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653년 델프트의 화가조합에 등록되었고 같은 해에 카타리나 포르네스와 결혼하였다. 매우 둔필이었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40점 정도이고 거의 소품들로서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가정생활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그 밖에 종교를 제재로 한 것도 있다. 불과 2점이지만 풍경화도 있으며, 《델프트풍경》(헤이그국립미술관 소장)은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색조(色調)가 아주 뛰어났으며 적·청·황 등의 정묘한 대비로 그린 실내정경은 마치 개인 날 북구의 새벽 대기(大氣)를 생각나게 한다. 맑고,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조화로 조용한 정취와 정밀감(靜密感)이 넘친다. 초기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뚜렷한 대비는 만년이 될수록 완화되었다. 그 밖에 《편지를 읽는 여성》(드레스덴미술관) 《우유 따르는 하녀》(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터번을 쓴 소녀》(헤이그국립미술관) 《레이스를 뜨는 여인》(루브르미술관) 등이 있다. /네이버
- 'The Smoker' - 'Self-portrait'
- 'Dancers' - 'Bowlers' - 'Medicul' 테니르스 [Teniers the Younger, David, 1610.12.15~1690.4.25] 안트베르펜 출생. 아버지 D.테니르스 1세(1582∼1649)와 A.브로워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1651년 브뤼셀로 가서 레오폴드 빌헬름 대공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1663년 아카데미를 창설하였으며, 풍속화에 뛰어나 당시의 시민생활을 시장 ·가두(街頭) ·선술집에서 찾았고 작품수는 700점이 넘는다. 또 실내묘사에도 뛰어나 속필이면서도 극명하며, 종종 유머를 무기로 삼았다. 아들과 손자도 같은 이름의 화가이다. 대표작으로 《빌헬름 대공의 브뤼셀 회화관》(브뤼셀 왕립미술관 소장) 《음악을 연주하는 농부들》(뮌헨 알테피나코테크 소장) 그리고 《마을 축제》 등이 있다. /naver
네로 [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AD 37.12.15~68.6.9]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둘째 아내인 소(小) 아그리피나비(妃)의 전 남편(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54년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고 근위병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을 때 불과 16세였다. 치세의 초기 약 5년 동안은 근위장관 브루투스, 철학자이며 그의 스승인 세네카의 후원으로 해방노예의 중용, 감세, 원로원 존중, 매관매직의 폐단을 시정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점차 잔인·포악한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 어머니, 비(妃) 옥타비아를 차례로 살해하였다. 특히 브루투스의 병사(病死)와 세네카의 은퇴는 그의 난행의 도를 심화시켜 치정(治政)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64년에는 로마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전가시켜 대학살을 감행하였으며, 그 폐허 위에 화려한 황금궁전을 세웠다. 또 원로원의원 피소 일파의 음모가 발각되었을 때는 세네카 ·루카누스를 포함한 고위 측근을 처형하였다. 한편, 그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 예술의 애호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체육 ·예술콩쿠르를 로마에 도입하고 스스로 극장무대에 서기도 하였으며, 그리스를 여행하며 사대제전(四大祭典)을 개최하고 경기에도 출전하였다. 68년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것이 각지로 퍼지자, 히스파니아(에스파냐)의 총독 갈바가 로마시로 진군하였을 때 그를 미워한 원로원,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그의 근위군까지 이들에게 합세함으로써 네로는 로마시를 탈출, 자살하였다. 이로써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폭군의 전형으로서 네로의 전설이 형성되었는데, 재위시에는 오히려 그의 활달한 성격 때문에 인기 있는 황제로 알려져 죽은 뒤에도 제2 ·제3의 네로라고 일컫는 자가 나타났을 정도라고 한다. /naver
쿠오바디스[Quo Vadis] 폴란드 작가 솅키에비치의 대표적 장편소설. 1896년에 발표. 제명은 라틴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뜻으로서 사도 베드로가 십자가로 끌려가는 그리스도에게 한 말이다. ‘네로 시대의 이야기’란 부제가 말해주듯이 1세기의 로마에서의 고대적 세계관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투쟁이라는 흥미있는 역사적 대사건이 배경이다. 광기와 음란으로 세월을 보내는 네로, 그리스도의 신앙을 전파하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청년 귀족 비니키우스는 열렬한 그리스도 신자인 소녀 리기아를 사랑한다. 로마 귀족의 이상형이라고 할 총신(寵臣) 페트로니우스는 조카 비니키우스를 위하여 네로에게 더욱 밀착하려 한다. 네로는 몰래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 죄를 그리스도교도에게 씌우려 한다. 신자의 대학살이 시작되고 리기아도 붙잡혀 결박되어 물소에게 죽게 되나 충복 우르수스가 괴력으로 물소를 죽이자 감동한 신하들의 간청으로 리기아는 목숨을 구한다. 베드로와 바울로도 모두 순교하고 페트로니우스도 죽음으로 몰리게 되지만, 군대의 반란이 일어나 모든 신하에게 버림을 받은 네로는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는다. 정의와 진리는 승리한다는 것을 호소하여 박해받는 폴란드 민족의 운명에 희망의 불길을 밝혀준 애국적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으로 190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에서도 여러 출판사가 번역 ·출간하였으며 영화도 수입·상영되었다. /naver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