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장군
김좌진은 1889년 음력 11월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金衡圭) 선생과 오숙근 여사 사이의 둘째로 태어났다.
김좌진은 유년시절 글공부보다는 활쏘기ㆍ말타기ㆍ전쟁놀이 등을 즐겨했으며, 삼국지와 수호지 및 군사학에 관련된 책자를 탐독하였고 무술연마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또한 계몽운동가인 김광호(金光浩)와 홍주의병장 김복한(金福漢)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김복한으로부터 구한말의병의 기본정신이라 할 의리정신과 민족수호정신을 배웠는데, 이것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앞서 국권회복운동에 노력하였다.
즉 김좌진은 집안에서 거느리고 있던 30여 명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에게 전답을 무상으로 분배한 이후 상경하여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군사교육을 배웠다.
1905년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홍성으로 귀향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는 한편으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홍주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등 교육운동과 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군자금 모금과 대한광복회 활동 등 직접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좌진은 1910년 전후하여 이창양행(怡昌洋行)과 염직회사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와 해외 독립운동단체와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서간도지역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독립운동군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하던 중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김좌진은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 확보에 전념하다가 1917년 만주로 향하였다.
대한광복회의 독립군 양성을 실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김좌진은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와 길림군정사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길림 등 만주와 노령지역 독립지도자들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도 서명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일제와의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강조하였다.
김좌진은 길림군정사를 1919년 대한정의단의 총재 서일(徐一)의 연합제의에 따라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로 통합하여 총사령관으로 사관양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의 중책을 맡는 등 군사부분을 책임지게 되었다.
또한 만주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등 일제와의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일제는 1920년 10월 만주지역 무장독립군을‘진압’하기 위한 목적에서 훈춘사건을 야기하고 이어서 만주로 진입하자, 김좌진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催振東)의 군무도독부, 안무(安武)의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백두산록의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을 대패시켜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일제의 독립군단과 한인사회에 대한 보복으로 독립군부대들은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또 다시 북만지역으로 돌아 온 김좌진은 이범윤(李範允)이 이끄는 독립군부대와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총사령관을 맡아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의 양성에 몰두하면서 계속하여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준비하였다. 또 한편으로 북만지역 무장독립군단의 통합을 목적으로 1925년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신민부는 무장활동, 교육 및 홍보활동, 산업활동 등 자치활동을 통해 북만지역 한인 동포들의 생활향상에도 주력하였다.
김좌진은 신민부의 총사령관 및 군사위원장을 역임하며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둔전제ㆍ징병제ㆍ군구제를 실시하는 등 신민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신민부가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 양분되자, 김좌진은 1927년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고 만주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고 만주한인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한 차원에서 무정부주의를 수용하여 지속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한인사회의 생활안정 도모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 국내와의 연락을 통해 군자금을 모집과 조선총독 처단 계획을 수립하고, 일부 대원을 국내에 파견하여 군사작전에 필요한 지도를 작성하도록 하는 등 국내 진격작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청산리대첩 이후 계속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좌진은 만주지역 한인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해림현 산시역 부근에 설치한 금성정미소에서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당 청년회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순국하였다.
경신참변사건
경신참변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서·북간도지역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한인 학살 사건이다.
1920년 6월 북간도의 봉오동에서 독립군에게 대패당한 일제의 조선군(朝鮮軍)은 그 보복으로 서북간도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항일전을 펼치고 있는 독립군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웠다. 이 계획에 의거 대병력을 간도지방에 침입시켜 수많은 한인을 학살함은 물론 학교 · 교회 및 가옥을 파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서북간도 곳곳의 독립군 근거지는 물론이고 한인사회 마저 철저히 수색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죽이고, 가옥은 방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군도 가만히 앉아 일본군의 공격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전에 일본군의 습격을 감지한 독립군들은 그들의 근거지를 떠나 러시아의 연해주로 병력을 이동시킨 후 후일을 기약하고자 하였다.
그 리하여 김좌진이 이끈 북로군정서 ·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 · 지청천이 이끈 서로군정서 등은 각기 자신들의 군단을 이끌고 근거지를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1920년 10월 20일부터 약 10여 일간에 걸쳐 전개된 청산리대첩이었다.
청산리대첩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들은 더욱 광분하여 서북간도의 한인들에게 보복을 가하였다.
일본군들이 행한 대표적인 만행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0년 10월 말 일본군 제14사단 제15연대 제3대 대장 오오카가 이끈 77명의 병력이 간도의 용정촌(龍井村) 동북 25리 지점에 위치한 한인마을인 장암동을 포위하여 마을 주민 전체를 교회당에 집결시켰다.
이 중 40대 이상의 남자 33명을 포박해 꿇어앉힌 후 일본군들은 짚단으로 교회 안을 가득 채운 후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곧 화염에 충전하였으며, 불길에 휩싸인 한인들은 아우성을 치며 탈출구를 찾으려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이들을 총검으로 찔러 결국 모두를 몰살시켰다.
가족들이 넋을 잃고 울부짖다가 일본군들이 돌아간 뒤 숯덩이로 변해 버린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 지냈다.
그런데 유족들의 비통이 채 가시기도 전인 5·6일 후 다시 일본군들이 이 마을에 찾아와 모든 유족들을 모아 놓고 무덤을 파 시체를 한곳에 모으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유족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언 땅을 파 시체를 꺼내 모았다.
일본군들은 이미 숯덩이 같이 검게 탄 그 시체들 위에 다시 짚단을 올려놓고 석유를 뿌린 뒤 불을 붙여 뼈만 남을 때까지 완전히 소각하였다.
이들 33인은 누가 누구인지를 분간할 수 없어 결국 가족들은 그 뼈로 합장 무덤을 만들어야만 하였다.
장암동의 이 같은 참변 외에도 한인의 참변은 허다하다. 그
중에 옌지시엔 의란구 남동이란 곳은 30여호의 이씨 성을 가진 한인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중국 성으로 변성한 3명을 제외하고 모든 촌민이 몰살당하는 참변을 겪어야 했다.
이 중 어느 4형제는 불타는 가옥 속에 한꺼번에 던져져 죽어 갔다.
또한 1920년 12월 6일에는 일본군 수십 명이 옌지시엔 와룡동에 살고 있던 교사 정기선(鄭基善)을 다른 곳으로 끌고 가 심문하면서 고문을 가했는데, 정기선이 얼굴 가죽을 몽땅 벗겨도 말을 듣지 않자 두 눈을 칼로 도려내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또 옌지시엔 팔도구에서는 어린아이 4명을 칼로 사살하였으며, 옌지시엔 약수동에서 살해한 시신을 다시 불에 태운 후 강물에 던졌다.
어느 지역에서는 부녀자를 잡으면 강간한 후 살해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2·3세 되는 유아를 창끝에 꿰어 들고 울부짖는 비명을 들으며 쾌재를 부르는 사례조차 있었다. 일본군들은 이와 같이 한인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가옥을 방화하여 태우고, 곡식과 가축에까지도 불을 질러 이후 한인의 살길을 완전히 박탈하였다.
국치전후부터 민족주의교육기관으로 수많은 항일 민족운동자와 독립군을 양성하였던 명동학교도 일본군들에 의해 교사는 물론 기밀서류 및 도서가 소각되었다. 구전(臼田) 중위가 인솔하는 22명의 일본군은 1920년 10월 20일 명동촌을 습격하여 마을을 폐쇄한 후 모든 주민을 명동학교 교정에 모아놓고 이 학교의 교장 김약연(金躍淵)은 항일의식이 강한 자로 이 학교를 통해 많은 독립군을 길러내고 있다고 으름장을 놓은 후 학교 전체를 불길에 휩싸이게 하였던 것이다.
명동학교에 이어 명동교회 역시 일본군의 방화로 소각되고 말았다. 일제의 이 같은 잔인한 한인사회 말살작전은 해가 바뀐 1921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약 6개월 동안 계속된 악랄한 만행 끝에 살아남은 한인들은 산간오지로 피신하여 그들의 만행대상이 없어지자 일본군은 간도지역에 일부 잔여부대만 남기고 1921년 4월초부터 주력부대들은 철수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