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 전사> 책이 쓰여지기까지 이어져온 인연들....
1. 매그놀리아 - 혼돈으로부터의 창조(creation in chaos)
이 글을 위한 원고 청탁을 받기 전날 밤 <매그놀리아>라는 영화를 보았다.(나는 원고청탁을 받거나 무슨 글을 쓸 때는 늘 쓰기 직전에 읽은 책이나 영화로 글을 시작하는 버릇이 있다)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던 날, 감독상와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마스터>의 영화감독인 ‘폴 토마스 앤더슨’이 29세에 만들었다는 영화 <매그놀리아>.
아내와 아들을 버린 한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다.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그를 돌보던 여인 또한 이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약을 먹고 죽어가는 시간, 잊은 듯 멀리 사라졌던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다른 곳에서는 딸을 추행한 괴로움에 시달리던 남자가 있다. 퀴즈쇼로 유명한 방송인인 이 남자 역시 암선고를 받고 두 달 남은 인생을 정리하고 있는 마당인데, 삶의 끝자락에 서서 자신의 생을 돌아보고 있다. 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잊으려 마약 속에서 살아가던 딸과 지금 그를 막 사랑하려는 외로운 경찰관도 이 영화의 한 축이다. 어린 시절 퀴즈왕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삼류로 전락한 어느 남자와 어린이로서 퀴즈의 천재이면서 촬영 중 화장실에 가지 못해 어른들의 무심함에 분노를 느끼는 아이 이야기도 나온다. 전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인간 군상의 모습이 종횡무진으로 얽히는 가운데 영화 말미, 하늘에서 개구리 비가 내리고 수많은 인간들의 온갖 인연과 상처는 잔잔한 음악 속에서 구원 혹은 위로를 받는다. 무슨 영화의 내용이 이러한가...
그린과 베리와 힐이라는 각각 다른 세 사람이 한 사람을 살해하는 뉴스로 시작하는 이 영화 속의 두어 번 등장하는 명대사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과거는 우리를 기억한다!>
초인을 외치던 철학자 니체는 ‘우리가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도 우리를 바라본다’ 했건만,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삶을 바라보지 않아도 삶은 우리를 놓치지 않고 바라본다는 뜻인듯 싶다.
수많은 우연(이라는 착각의 인연) 속에서 우리는 산다. 과연 지금, 내 앞에 벌어지는 일들은 우연의 산물일까, 단순하기만 한?
책을 써온 내력을 이야기하는 첫 머리 왜 ‘매그놀리아라’는 낯선 영화 이야기를 꺼내는가?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하려는 바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자신은 없지만, 하나는 다가온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과거는 우리를 기억한다! 삶은 우연인 듯 오지만 실은 무수한 인연의 산물이라는 것,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독자인 선생님들을 만나듯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토론의 전사>라는 한 권의 내 책도 과거 수많은 인연이 빚어낸 혼돈의 창조물이라는 뜻..
자 그럼 우리도 함께, ‘매그놀리아’의 세계로 걸어들어가 보자 천천히....
2. 글, 쓰기의 첫 경험과 교사의 삶을 열어가는...
1988년. 11월의 쌀쌀한 가을 바람이 부는 보리수 나무 아래를 지나며 국어교사로서의 삶에 설렜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자 했을까....
1988에서 1989년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사람들은... 88올림픽이 끝난 뒤의 사회적 고요. 소설가 김연수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보여준, 민족과 계급과 사랑과 성과 낭만같은 거창한 사회적 열병은 아니었지만, 국어교사로서 첫 걸음을 하는 내게 전국국어교사모임과 전교조의 탄생이라는 교육-사회적 현상 앞에서 학교는 들썩이고 있었다. 음이든 양이든, 일년이든 십년이든 인연이 없지 않았던 두 단체는 지금도 나를 바라보는 과거이자 현재이다.
당시, 내 삶은 그 속에 있지 않았다. 내가 대학 졸업 후 만난 최초의 사회적 인물은 이오덕, 윤구병 선생님이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의 큰 선생님. 거기서 최초의 글쓰기를 배웠다.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이들이 써온 재미나고 감동적인 생활시를 보여주면서 글쓰기의 자세와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단순하고 어렵지만 변함 없는 진리. 그러니까,
“글은 말하듯이 써라. 말은 삶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글은 삶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받아쓰면 된다. 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삶이니 바르게, 착하게 살아라!”
이것이 그분들이 주신 교훈이다. 물론 나는 바르거나 착하게 살지 않았다. 그분들의 말에 위배되는 거짓된 말과 글도 많이 하였다. 세상에는 성자의 진리가 있는가 하면 악마의 진리도 있다. 대가의 철학이 있는가 하면 범인의 철학도 있다. 그분들의 말은 거짓이 없었지만, 그게 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었던 셈이다.
1989년의 학교는 격동이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담임으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세상에서 건네는 책까지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삶의 울타리는 학교 담장 밖을 넘지 못했다.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가던 시절. 학생들과 모둠 일기를 쓰고 수업 시간에는 생활시쓰기 수업을 했다. 물론 나는 당시까지 한 편도 내 삶이 담긴 글을 써 본 적 없는 교사였다.
중학교 1학년 2반 담임을 맡았는데, 우리 반 교실 뒤편 환경미화란에는 김지하의 ‘밥’이라는 책 표지에 그려진, 달마대사가 밥 한 그릇 앞에서 기도하는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밥은 나의 하느님(내 아이디는 bobsky-밥이 하늘)이다.
당시에는 아이들이 나의 밥이었고 하느님이었다. 그 아이들에게 매를 댄 사건이 최초로 내가 글을 쓰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학급 문집을 만들면서 ‘처음 든 매’라는 글을 쓴 것이 나에게는 최초의 글쓰기 사건이었다. 내가 내 삶을 말하듯이 써본 최초의 경험. 아픈 듯이 썼으나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첫 경험.
교생이 왔다. 교내 합창대회가 열렸다. 당시 우리반 아이들이 선택한 노래는 신형원의 ‘터’. 입상은 당연히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노래책 한 권을 만들었다. ‘시대의 아픔을 담은 노래가 좋은 노래’라는 취지의 후기가 내가 써 본 두 번째 글이 되었다. 글이라야 둘 다 한 쪽을 넘기지 못하는 짧고 가볍고 단순한 글. 그래도 이런 최초의 경험이 중요하다. 나도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내 생각과 경험을 써볼 수 있다는.
그 해 가을, 학교에서 작은 사건이 있었다. 내 삶은 휘청거렸고, 다음 해 나는 고등학교로 옮겨갔다. 지금 근무하는 사립학교인 영동일고등학교. 당시에는 여학교라서 영동여자고등학교였다. 내 삶의 글쓰기는 영동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아주 가끔 그러나 지금까지도 꾸준히....
책은 쓰는 행위의 산물이다. 내가 <토론의 전사>라는 책을 쓸 수 있게 된 최초의 고마움을 표한다면 이오덕, 윤구병 선생님이다. 그분들은 글이 무엇인지, 어떻게 쓰는 것인지에 대한 철학과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들이시다. 물론 그 가르침을 얼마나 배우고 따랐는지 나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3. 책, 어떻게 만나고 헤어졌는가
어린 시절 책을 좋아했던가.. 기억이 별로 없다. 계몽사 위인전, 학교에서 권하는 어린이 권장도서나 삼국지, 루팡이나 홈즈 등의 탐정물까지는 재미나게 읽었지만, 한국단편소설집은 늘 책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렸다. 삶의 단면을 깊고 아프게 그려낸 작품들의 세계가 너무 낯설고 멀어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책들은 읽고 싶지도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그래도 열심히 읽어보려 했던 책은 성경이었는데, 통독을 한답시고 지겨운 책을 건성으로 한 번 읽어넘긴 기억이 새롭다. 당근, 이해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에서 만난 책은 대학가 풍경만큼이나 새롭고 낯설었다. 세미나라는 이름의 공부는 이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시절. 1학년 겨울 무렵 내 삶의 클리나멘(변곡선)이 될 두 선배를 만났다. 대학 1년 선배인 그들은 친한 듯 달랐다.
두 선배와의 모임이 내게 김지하라는 시인을 연결시켜주었고-김지하를 통해 ‘밥, 애린, 생명과 살림, 기우뚱한 균형, 중심의 괴로움’ 등이라는 철학과 화두를 안게 되었으니 내게는 커도 너무 크고 고마운 인연이었다. 학교 근처에 살았던 한 선배의 집이 당시 우리 모임 아지트였는데, 책장의 정말 많은 책들이 내 삶을 자극했다.
당시에는 책을 읽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읽으려고 애는 썼던 걸로 기억한다. 기독교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써의 신학책들. 김용옥과 동양학. 현대물리학과 새로운 문명. 신과학과 여성운동 등등. <토론의 전사> 책을 쓰면서 그 밑바탕에 두고자 했던 내 삶의 철학이나 세계관 같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대부분 이 시절에 형성된 것들이지 싶다. 이렇게 내 사상의 요람은 대학과 그 이후의 시절에 만들어졌다.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그냥 사회적 관심 속에서 이것저것. 수업도 그렇게 흘러가던 90년대 중반, 1차 권태기가 왔다. 원인모를 안개처럼 다가온 일상의 불안과 무기력. 무진기행 주인공처럼 답답하고 어지러웠다. 숨통이 필요했다. 다시 우연처럼 찾아온 인연은 전국국어교사모임의 연수. 주제는 ‘독서와 매체’였다. 주요 강사는 송승훈, 허병두 선생님. 그저 듣기만 해도 무협지처럼 신나고 신선한 독서교육 경험과 도서실 개혁 사례는 잠든 나를 깨워주었다.
다음 해 내 삶의 자리는 도서관이었다. 교실에서는 그 전에도 학급 문고 운영을 시도해보곤 했지만 체계적이지는 못했는데, 아침독서나 학급별 윤독 등을 시행하면서 책과 가까워졌다. 도서관에서는 전산화 작업 등 도서실 활성화에 매달렸다. 책 속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 자신도 책을 가장 가까이 하던 시절이었다.
도서관이 아닌 개인으로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 문학동네, 상상, 리뷰, 철학과 현실, 작가 세계, 세계의 문학, 한겨레21과 씨네21 등 잡지만 10여종을 구독했다. 물론 이 당시에는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학교 교지에 장안의 귀가시간을 서두르게 만들었던 최민수, 박상원, 고현정, 이정재 주연의 드라마 <모래시계>에 대한 긴 글을 쓴 게 유일한 기억). 독서교육을 찾아나선 계기 자체가 고등학교에서의 입시수업에 대한 도피와 글로써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능력의 한계에서 나온 몸부림이었으니까.
이렇게 책과 만나면서 이런저런 시간을 보낸 것은 2000년 여름 ‘원탁토론’을 매개로 한 토론의 세계를 만나기 전까지의 일이다. 사람이든 책이든, 허공을 향해 쏘아진 화살이 결국 나를 향해 날아오듯, 인연은 가고 오는 것! 혹은 오고 가는 것!
대학시절부터 2003년까지 모여진 2천 여권 정도의 책은 토론공부를 하는 모임 사무실에 기증되었다가 사무실이 사라지는 바람에 같이 사라졌다. 내 삶에 깊은 영향과 영감을 주었던 김지하의 ‘밥’과 ‘애린’을 비롯하여 수많은 종류의 책들이 인연을 다한 시절이었다. 이후, 책과의 인연을 끊고 한 동안 책을 멀리 했다 다시 2007년 무렵부터 책을 읽고 사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책 읽기를 ‘잘’ 하는 사람은 아니다. 가볍게, 바람이 꽃잎을 스치듯 살짝, 읽어나가는 편이다. 손에 오는대로, 읽다가 다른 책이 오면 또 그냥 그 책으로, 제목이나 서문만, 혹은 중간까지 읽다가 가볍게 건너 뛰고 다시 집어들고, 되는대로 그냥, 읽고 잊어버린다.
만나고 헤어진 무수한 책들이 나의 무의식과 기억 속에서 떠올렸다 사라진다. 토론의 전사 책에 인용된 시의 구절들이나 영화의 장면들 등이 그런 것들이다. 책을 쓰는 사람의 대부분이 8할은 자기가 읽은 책(영상을 포함)이 아닐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8할 이상, 그 이상이다...
4. 토론, 인생의 전환점
2000년 8월 생의 전환점이 왔다. ‘토론’이 찾아온 것이다.
<토론의 전사> 서문에 가장 먼저 언급된 강치원 교수님이 내게는 세례요한 같은 분이다. 광야에서 토론을 외치는 자의 소리. 그 복음은 이것이다.
“한 사람이 열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열 사람이 같은 한 권의 책을 읽고 문답, 대화, 토의, 토론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효과적이다.”
예수를 만난 베드로나 바울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아! 세상에는 토론이라는 낯선-그러나 현실적이고 매력적인- 세계가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활의 발견~*
계기는 2000년8월 역사문화아카데미 주최 제 8회 전국 고등학생 원탁토론 광장. 주제는 ‘세계화, 미국, 신자유주의,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였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하던 시기였다. 아니 그런데 고등학생들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토론해? 주제가 일단 확 끌렸다. 그 대회의 존재를 알려준 당시 우리반 학생은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회는 3박4일에 걸쳐,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말이 대회지 실상은 연수에 가까운 행사였다. 개구리의 본격적인 첫 나들이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교실 수업의 변화를 목말라 하던 내게 원탁토론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였다.
총 6박 8일의 연수는 길었지만, 달콤했다. 모든 사람들이 직접 앞에 나와서 한 번씩 토론을 해보는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 깨달음을 주는지 그때 느껴보았다. 그리고 교실에서 학생들 모두가 주체가 되어서 토론을 한다면 무언가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형성되었다. 마침, 행사를 진행했던 강치원교수님이 운영하는 역사문화아카데미 사무실이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콜로퀴움’이라는 형태의 강사초청 토론회가 일주일에 한번 꼴로 진행되었는데, 그 공부모임도 토론을 이해하고 익히는데 작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교사 스스로가 학생이 되어서 몸으로 공부를 할 때, 그 기운과 방법과 철학이 학생들에게 전달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몸소 깨달아가는 시간이었다.
이때, 이오덕 선생님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와 ‘온몸으로 하는 토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다리가 놓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데카르트의 관념 철학을 넘어서 메를르 퐁티 등이 주장하는 몸, 그 몸의 감각의 실천적 중요성이 바로 삶의 글쓰기와 온몸으로서의 토론이 아닐까 싶었다. 김용옥의 ‘공부(工夫)론’과 고미숙의 ‘호모 쿵푸스’를 사색하던 중에 이소룡이 등장하는 지식채널을 보았다. 쿵푸의 대가였던 이소룡이 철학을 전공하고 절권도를 통해 온몸으로 자기 삶을 이루고자 했던 치열함의 기록이 신선했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그의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정무문, 당산대형, 용쟁호투, 사망유희’ 등의 영화와 다큐멘터리도 재미나게 보았다. 원탁토론의 취지도 좋았지만, 토론 자체가 새로운 공부로서 뜻깊게 자리매김 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2007년 이후 뒤늦게 형성된 것들이다. 다시 원탁토론으로 돌아가보자.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강조하는 원탁토론의 매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2000년 당시 우리사회에는 토론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었다. 100분 토론을 필두로 100인 토론, 시사토론, 쟁점 토론 등 다양한 토론 프로그램이 시청자에게 말을 거는 시대였지만,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토론은 일상의 현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물며 그 당신 학교 현실에서 아이들이 토론을 한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토론이 없는 시대, 그래서 더욱 토론의 매력에 끌렸을까? 원탁토론과의 첫 만남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간 나는 내내 원탁토론에 매달렸다. 토론 수업을 위해 필요한 준비 단계는 단순했다. 요즘 많이 보급된 대립형토론(디베이트)와 달리 원탁토론은 형식이 고정되어 있고 단순한 편이라 토론 수업은 늘 원탁토론으로만 진행하였다.
진도의 어려움과 교실 여건 등이 따르지 않는 현실 속에서 토론 수업이 가능한지를 묻는 분들이 많다. 거기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물론 할 수 없다. 각자가 자기의 처지와 현실 속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가나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학년을 혼자서 맡아 수업을 진행하거나, 국어과의 특성을 살려서 선택과목으로 화법을 정해서 말하기 수업을 주로 진행하기도 하였다. 물론 동료교사와 호흡이 잘 맡는다면, 기획부터 운영까지 협의 하에 같이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00년부터 3년 동안은 원탁토론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토론 수업을 운영해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2002년에는 역사문화아카데미라는 단체를 아예 맡아서 운영을 하기도 했다. 교사로서는 많이 버거운 일이라 그 일이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2004년 무렵 토론은 내게서 멀어져갔다. 같은 방식 수업의 지속 속에서 약간의 권태로움을 느끼던 시절이었고 새로운 관심사가 생긴 까닭이기도 했다. 그 새로운 관심사는 매그놀리아의 인연과 약간의 거리가 있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관계의 벽과 소통의 중요성을 삶에서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점만은 이야기하고 싶다.
5. 논술과 살림의 트라이앵글
물이 갇혀 있네, 물방울 속에
퍼져라 물, 솟아라 물, 흘러넘쳐라 물
가자, 숱한 고기떼 함께
바다로! 바다로! 바다로!
(김지하, 살림)
2007년까지 삼 년 동안은 열정과 방황이었다. 마치 물방울 속에 갇힌 물처럼 답답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교육 연수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때는 논술교육이 열풍처럼 불어오던 시기였는데, 논술교육에는 토론이 필요하니 토론꼭지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른 바 논술과 토론이 만나는 자리의 시작이었다.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논술 열풍은 잠자던 토론을 깨우기 시작했다. 우선 논술에 대한 교사들의 입장이 여럿으로 나누어 논쟁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스스로 읽고 쓰는 교육의 시작으로 보고 적극적인 참여를 주장하는 분도 계셨고, 대학입시를 위한 상업적 글쓰기로 아이들이 주체적인 사고를 하도록 돕는 교육은 아니라는 비판론도 적지 않았다. 내신, 수능에 이어 논술까지 가세하면서 학생들은 더욱 힘들게 만든다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원론적으로 이야기하면 토론과 논술은 일란성쌍둥이 같은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읽고 주제를 잡아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 그 수단이 글인가 말인가의 차이는 있지만, 그 근본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이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그 동안 관심을 가지고 해온 교육의 의미 있는 종합 그것은 글쓰기와 독서와 말하기의 결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실현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이른바 독서와 논술과 토론이 어우러지는 ‘살림의 트라이앵글!’ 물론 이상적인 이야기이고, 당장은 그 하나도 우리 교육 속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과정이지만, 그런 꿈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희망으로 다가왔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토론의 길은 시작되었다. 다시 개구리의 도약이 시작된 느낌. 논술은 누군가를 가르치고 토론을 나누는 과정보다 내 자신이 새로운 배움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몰랐던 연수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당시 연수원에 출강하던 여러 선생님들의 강의를 틈틈이 듣고 자극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논술 수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선생님들이 그 동안 현장에서 해온 교육의 방법이나 철학을 듣는 일은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다. 그것이 내 삶을 틔워주고 살려주는, 갇힌 물방울 속에서 나와 더 넓은 물을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연수 과정에서 토론에 관심이 있는 다른 선생님들을 만났다. 선생님들 가운데는 연수 매니아들이 많아서 연수원 외에도 다양한 교사연수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과정에서, 선관위 연수원 주관 ‘참여형 토론’을 처음 만났다. 재미나고 신나고 가벼운 토론 경험. 인연의 싹이 터서 거기서 만나 선생님들과 같이 토론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소모임으로 토론 공부를 했을 뿐 아니라, 예전에 진행했던 전국 학생 토론대회 운영도 해보고, 코칭 같은 새로운 영역의 공부도 하게 되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교내 토론대회가 열려 2005년 처음으로 원탁 토론광장을 실시하였다. 지금까지 7년동안 쉬지 않고 진행해온 행사다. 서울시 교육청이 주최했던 대회는 작년 3회를 끝으로 잠시 쉬는 중이지만, 교내 행사로 토론 대회를 여는 학교가 많아졌다. 수상 실적 여부를 떠나서 토론을 만나본 학생들은 토론의 재미와 교육적 가치를 쉬이 잊지 못한다. 자기가 주인된 경험, 부족하지만 친구를 통해서 배우는 경험, 생각해보지 못했던 다른 사고와의 충돌 등은 다른 수업 방법에서 쉽게 얻기 힘든 토론의 묘미다.
토론 대회와 연수 과정에서 비슷한 고민을 지닌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토론의 동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토론의 전사> 책 서두에 쓴 이혜원, 정경화, 류선옥 샘 등이 그런 분들이다. 토론은 토론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관계와 의미망을 내게 만들어준 소중한 스승과 같다.
6. 전사의 길
2009년은 <토론의 전사>라는 책의 운명이 시작된 해다. 발단은 전국국어교사모임의 토론 연수 요청이었다. 숙명여대에서 새 학기를 준비하는 새내기 교사 연수를 하는 자리에 참가했는데, 전국모 사무총장 선생님이 토론 연수를 시리즈로 기획해서 해볼 생각이 없냐고 제안을 해왔다. 횟수와 내용을 자유롭게 해서 국어교사모임 선생님들과 함께 토론 공부를 해보라는 취지였다.
2000년에 만난 원탁 토론, 그 뒤에 새롭게 알게 된 참여형 토론과 교차질문식 세다 토론, 그리고 모의재판과 배심원, 터부 토론 등을 하나의 꼭지로 해서 운영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에 앞서 토론의 중요성과 의의를 공부하는 것도 꼭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프로그램을 짜다보니 무려 12회에 걸친 대형 공부 계획이 되었다. 실질적인 운영 속에서는 연수진행 기간이 너무 길어 8회 정도로 축소하였는데, 이렇게 ‘토론의 전사’라는 토론교육 프로그램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2009년 4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름도 무시무시한 전사인가? 이쯤에서 전사라는 말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지난 여름 김천에 토론연수를 하러 갔다. 오후 4시부터 2시간 공부를 하고 저녁 식사 후에 다시 2시간 정도 공부를 하는 긴 연수였는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연수장의 입구에 계신 선생님 한 분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왜 ‘토론의 전사’라는 이름을 붙이셨나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토론의 성자’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헉!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전사(戰士)도 버거워 죽겠는데, 성자(聖者)라니... 정녕코 토론의 길에서 순교(殉敎)하라 그 말씀이신가요?’ 하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안 그래도 얼마 전 <토론의 전사> 카페에서 어떤 분이 이런 글을 남긴 것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토론의 목표는 남을 이기는 능력을 키우데 있는 것이 아니라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세계와 소통하고 자아를 성찰하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런 생각이 이 땅에서 풍성해지길... 샘의 사명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토론의 사도(司徒)”
십여 년의 세월을 운명처럼, 외롭게 토론의 길을 걸어오긴 했지만, 결단코 사도나 성자의 길을 고민하거나 꿈꾸어 본 적은 없었다. 감히 그럴만한 자격도 없고. 다만 그런 말씀을 하신 분의 고민만큼은 절실하게 와 닿는다. 예전에 그분을 만났을 때, 첫마디가 대뜸, 전사는 싸움꾼 아니냐, 왜 토론으로 아이들을 싸움꾼 만드냐 하는 말씀이셨으니까. 그래서 김천에서 만난 그 분도 전사를 능가하여 진정한 토론의 성인, 토론의 성자를 권유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예수나 소크라테스, 공자나 간디 등등의 성인들은 모두 진정한 토론의 성자들이다. 과연 우리는 자기 욕망을 초월하여 시대의 억압과 불의에 맞서는 토론의 성자들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욕망 덩어리 그 자체로 살아가는 나의 몸과 마음을 두루 살폈을 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론의 성자는 어불성설이요 우리는 그나마 전사로서 현실 속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을 뿐이다.
전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신윤복의 쌍검대무로 전사를 은유한 분이 있어 그 글을 간단히 소개한다.
신윤복의 그림 ‘쌍검대무’를 보면서
예전 같으면 아,,, 색이 곱다.... 역동적인 힘... 뭐 이 정도였을 텐데
이번에 이 그림을 보면서는 ‘토론의 전사’가 떠올랐답니다. ㅎ ㅎ
자의적인 해석이겠지만... 검을 든 두 여인에게서 토론의 장에서의 우리 모습이...
그녀들을 둘러싼 사람들 또한 토론에 몰입하는 우리 모습이... 떠올랐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그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는 거에요...
칼을 들었지만... 그 칼은 살생이 아닌 '어울림’을 위한 것이었고
그 칼을 들고 ‘춤’을 추면서 그림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즐거운 흥에 싸여 있다는 건 우리 토론의 장에서 빚은... 빚어져야... 할 모습인 듯했어요..
토론의 전사 연수를 들으신 선생님의 소감인데, 살생 아닌 어울림과 춤의 검. 그게 전사를 잘 나타내는 표현인 듯 싶어 소개한 것이다.
참고로 ‘전사’라는 말의 오해를 풀기 위해 소개하고 싶은 책이 있다. 성공회대 김용호님이 쓴 ‘신화, 이야기를 창조하다’와 ‘신화, 전사를 만들다’(휴머니스트)란 책이 그것이다. 전사 연수를 시작할 당시 내가 감명 깊게 읽던 책이 바로 ‘신화 전사를 만들다’였다. 여기서 말하는 전사는 단순한 싸움꾼이 아니다. 자기 삶의 외벽과 내벽에 부딪치는 우리 인간들이 결국 자기의 업을 뚫고 의미있는 삶을 추구할 때 만나는 고통과 시련, 그 고통과 시련을 넘어선 수많은 신화속의 주인공들이 바로 전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전사의 목표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다. 지혜와 자비가 전사가 바라는 궁극적인 세계이므로, 전사는 끝없는 수행과 노력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전사가 성장해서 성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나, 나같은 범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헤라클레스같은 전사를 꿈꾸지만 그건 너무 요원한 일이고 그저 헤르메스의 운명이 부르는 그 길을 소리 없이 걸어갈 뿐이다.
7. 좋은 이웃과 <토론의 전사>
2009년 4월 ‘토론의 전사 연수’가 시작되었다. 1기 신청자는 16분, 모두가 여성이었다(전사의 신청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 이후 연수에도 남자가 참여하는 경우는 가뭄에 콩나듯 가물었다. 후천개벽의 시작을 전사 연수에서 느끼는 이 기이함...) 그리고 이어진 연수는 3년 6개월동안 19기에 이르렀다. 거쳐간 연 인원은 약 250여명에 이른다. 두 번 연수를 받으신 분들도 몇 분되는데, 전사를 과정에 있었던 사연들은 여기서는 생략하고 책이 만들어진 사연만 간단히 말해보기로 하자.
책을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전사의 서문에는 긴 감사의 글이 실려 있다. 전사의 인연을 함께 해오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글이다.
바람과 물처럼 여기저기 떠도는 성격의 내가 한 권의 책을 기획 출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정도의 규제와 압박이 필요했다. 압박이 온라인연수 프로그램이었다.
‘소통을 꿈꾸는 교사들의 토론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직무연수 2학점 짜리 온라인 토론교육 프로그램이 교원캠퍼스에서 만들어졌다. 30강에 해당하는 원고를 써야하는 부담이 생겼다. 그 부담 속에서 써내려간 원고가 <토론의 전사>의 뼈대가 되었다.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것이었다.
원고를 쓰고 촬영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전사 연수 과정과 후속 모임에서 공부한 내용들이 전사 책 속에 녹아들었다. 실로 전사 연수의 길을 같이 걸어주신 분들이 아니었다면 <토론의 전사>는 나올 수 없는 책이었다.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좋은 이웃이 있었기에 <토론의 전사>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매그놀리아’를 통해 새로이 깨달았다.
나의 과거는 나만의 과거가 아니라는 것!
나는 잊었는지 모르지만, 무수한 과거들이 나를 지금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첫댓글 ㅎㅎ 짝짝짝! 보지 않아도 만나지 않아도 늘 든든한 동지입니다, 제겐. 토론이 연약한 우리들의 자연스럽고 든든한 삶의 방식이 되는 날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화 이 팅...
'우리'의 인연에 깊이 감사드려요. 좋은 스승, 좋은 선배, 좋은 이웃님^^
오늘은 야자도 아니고 상담도 잡아 놓지 않았는데 남았어요.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마음은 급하고 오래 걸리는 일이라...이상하게 더 도망가고 싶어져 시작하기가 두려워지는 일 있잖아요? 지금이 '딱'그래요! ㅎㅎㅎ 그래서 파일 저장만 해 놓았던 족장님의 글을 읽었답니다. 인연의 역사...글은 편안하게 읽혔지만 그 속의 고민과 변곡점들을 보면서 제 삶에도 적용해서 한 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하려던 일 해야겠어요. 그 변곡점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앞으로 기억될 일이거든요. ㅎㅎㅎ 다시 마음 다잡고 갑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