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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34)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3구간 (왜관→대구) ③ [육신사→ 강정·고령보]
2020년 10월 30일 (금요일) ☆ [ 33km]▶ 백파 - 이상배 대장
[1] * [왜관]→ 호국의 다리→ 왜관나루터비→ 제2왜관교→ 동정천→ 직선의 제방 길→ 금산교→ 직선의 제방 길→ (낙산초/ 칠곡왜관2산업단지)→ (가실성당)→ 직선의 제방 길→ [하빈 지하차도]→
[2] [삼가헌]→ [낙빈서원]→ (고개)→ 도곡재→ [육신사]→ 충효당→ [하빈 지하차도]→
[3] * [하빈 지하차도]→ 낙동강 강안, 직선의 바이크로드→ [하목정]→ 성주대교→ 하빈 강변야구장→ 하빈 수변생태공원→ [성주의 인물]→ 문산정수사업소→ [영벽정]→ 매곡제(提)→ [강정고령보]→ 오세창 교수(낙동강사랑회 회원) 환영→ 강정보 대구식당 환영만찬→ (택시)→ 대실역(대구 지하철 2호선)→ 성서산업단지역→ TOP 호텔
* [성주군 용암면 동락리] ← 서쪽에서 백천 합류(백미산에서 발원, 성주 경유)
* [성주군 용암면 동락리] ← 서쪽에서 신천 합류(거산에서 발원, 용암면 경유)
다시 낙동강 제방 길, 종주 (3) ; 하빈고개→ 하목정→ [강정-고령보]
☆… 오후 1시 30분, 다시 낙동강 강변의 바이크로드로 나와서 종주를 계속했다. 하빈고개 굴다리 앞에서 오늘의 제2포인트인 하빈의 하목정까지 가는 길이다. 제방 길을 따라 3.1km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호수같이 고요한 낙동강 강물이 강안까지 들어와 찰싹인다. 이 길의 강안에는 둔치가 넓지 않아 곳곳에 습지가 보인다. 강 건너는 성주군의 영역이다. 가을날 오후의 고즈넉한 강변 길이 아주 쾌적하다.
달성 하목정(霞鶩亭)
오후 2시 10분, 하목정에 입구에 이르렀다. ‘성주대교’ 못 미쳐 하빈 쪽 언덕에 ‘하목정(霞鶩亭)’이 있다. 달성 하목정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에 있다. 하목정은 1604년(선조 37년) 전의 이씨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 1566~ 미상)이 지었다. 정자의 앞쪽에서 낙동강이 흐른다.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
이종문(李宗文)은 1588년(선조 21) 생원시에 합격한 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지역의 선비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등과 함께 팔공산 지역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서면 대장(西面大將)으로 활약했다.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표창을 받고, 또 그의 추천으로 세 고을의 수령이 됐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도 팔을 걷고 나섰다. 특히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을 지켜 원종공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 1550년(명종 5)~1615년(광해군 7)
서사원은 주자학 및 이황(李滉)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는 후진을 가르쳤다. 선조 때 학행으로 감역·찰방을 지내고, 1595년(선조 28) 청안현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 뒤 1597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사임하였다. 1602년에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형조·호조 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청안(菁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 1553년(명종 8)∼1634년(인조 12).
손처눌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장현광(張顯光)·서사원(徐思遠)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군과 투쟁하려다가 친상을 연이어 당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난 후 향교의 재건에 앞장서서 후진양성에 노력하였고, 정인홍(鄭仁弘)의 이황(李滉) 배척에 대항하여 척사부정(斥邪扶正: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르고 옳은 것을 세움)의 글을 지어 도내사림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하목정의 풍경
노후(老後)에 낙포(洛浦)는 여기 낙동강 가에 ‘하목정(霞鶩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霞鶩亭’(하목정) 이름은 초당사걸(初唐四傑)로 오언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났던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의 시 ‘등왕각서(滕王閣序)’ 중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아가고(落霞與孤鶩齊飛) / 가을 물은 먼 하늘색과 한 빛이네(秋水共長天一 色)’라는 시구에서 따왔다. …
‘붉게 물든 노을 속으로 검은 점으로 날아가는 따오기(霞鶩)!’ … 정자 이름에서 한 폭의 수채화를 본다. 정자에 앉으면 서쪽의 창문 너머로 저만큼 낙동강물이 보인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물은 주변의 산수와 어울려 그림처럼 아름답다. 특히 해질녘 하목정(霞鶩亭)에서 바라보는 강변 풍경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을 받아 금빛 여울이 눈부시다. 아름답고 그윽하여 때로는 황홀하다고 한다.
그리고 정자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푸른 대숲, 그 대숲을 스쳐오는 바람소리는 맑고 청아하여, 정자의 난간에 앉아 대숲이 쏟아내는 바람을 맞으면, 그 맑은 바람은 마음을 씻어내고 영혼까지 씻어지는 느낌이 든다. 강과 어우러진 주변의 풍광이 참으로 맑고 깨끗하다. 정자의 앞뒤의 뜰에는 목백일홍이 여러 그루 있다. 여름철이면 선홍빛 백일홍이 활짝 피어, 그 아름다운 풍경이 극치를 이룬다.
하목정(霞鶩亭)은 ‘T’자형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정자다. 건물은 원래 정면 4칸 측면 2칸이었으나 방으로 사용하는 정면의 동쪽 한 칸은 측면 4칸으로 만들어 전체적으로는 ‘T’자형 구조를 이뤘다. ‘ㅡ’자형 정면 3칸, 측면 2칸 마루에, 정면 1칸 측면 4칸짜리 ‘l’형 방을 덧대어 붙여놓은 형태다. ‘ㅡ‘자형 마루는 팔작지붕으로 ’l’형방은 맛배지붕으로 세워 한 건물인데도 블록으로 짜 맞춘 듯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하목정의 불천위 사당
정자의 전체의 배치를 보면, 강을 바라보는 하목정이 중심에 있고, 그 오른쪽이 안채, 맨 뒤의 높은 곳이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전양군(全陽君) 이익필(李益馝)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이다. 사당 앞에는 400백년된 목백일홍이 지키고 있다. 불천위(不遷位)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를 말한다. 불천지위(不遷之位) 또는 부조위(不祧位) 라고도 한다.
* 하옹(霞翁) 이익필(李益馝) ; 1674년(현종 15)~1751년(영조 27)
이익필(李益馝)은 하목정 주인 낙포 이종문(李宗文, 1566~ 미상)의 후손으로, 전의 이씨이다. 어려서부터 골격이 특수하고 기이하며 성격이 호탕하여, 귀신의 허실과 유무를 알기 위하여 늦은 밤에 사당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1703년(숙종 29) 무과에 급제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과 함께 금위우별장(禁衛右別將)에 제수되어 토벌에 임하게 되었다. 토벌시 양난 이후 계속된 태평세월로 인하여 병사들이 적진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자 항상 선봉에 나서서 독전하였다. 특히, 죽산전투(竹山戰鬪)에서는 금위좌별장 이수량(李遂良)과 더불어 용맹하게 싸워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적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전라병사를 거쳐 1730년 평안병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문집으로 『하옹집(霞翁集)』이 전한다.
하목정 편액 ; 인조의 친필
하목정 편액은 인조(仁祖)가 쓴 친필이다. 하목정은 인조가 능양군 시절 정자의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 유숙했던 곳이다. … 인조가 능양군 시절의 일이다. 왕(王)은 아버지 정원군의 배다른 형제 광해군(光海君)이었다. 광해는 미쳐가고 있었다. 자신의 동생 능창군이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 정원군도 이 일 때문에 홧병으로 죽었다. 능양군에게는 분노와 치욕, 불안이 덮쳐오는 암울한 시기였다. 광해군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일까. 능양군은 경상도로 발걸음을 했다.
한양과 경상도를 잇는 영남대로는 세 갈래다. 좌도는 울산-경주-영천-의성-안동-죽령-단양을 잇는 보름길이었다. 중도는 부산-밀양-청도-대구-선산-상주-조령-충주-이천-광주 등을 지나 한양에 이르는 열나흘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도는 김해-현풍-성주-김천-추풍령-영동-청주-죽산-양재를 지나 한양에 이르는 열엿새 길이었다.
능양군은 충주에서 문경새재를 넘어오는 중도로 길을 잡았던 모양이다. 상주에서 배를 타고 하목정 나루터에 내렸는데 하목정의 아름다운 풍광에 눈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목정은 석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지고 해질 녘 낙동강에 내려앉거나 강에서 하늘로 치솟아 날아오르는 철새가 장관인 곳이다. 하목정에서 그 광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능양군은 아름다운 이 정자에서 유숙했다. 하루라는 말도 있고 제법 머물렀다는 말도 있다. 선조의 손자이기는 하지만 절대 권력자, 광해의 눈총을 받고 있는 왕손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조는 그때 일이 오래 가슴에 남았을까?
인조가 ‘하목정의 추억’을 떠올린 것은 이종문(李宗文)의 아들 수월당(水月堂) 이지영(李之英)이 벼슬자리에 올라 경연관으로 대궐에 나타났을 때였다. 인조가 지영을 알아보고 옛일을 회상하며 물었다.
“너의 집 하목정은 풍광이 아름다운 정자인데 왜 부연 달지 않았느냐?” 부연(附椽)은 처마에서 덧대어 낸 서까래 지붕을 말한다. 지영은 “사서인(士庶人)의 사가(私家)에는 부연을 달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인조는 “이 같은 강산경치가 좋은 정자는 사가(私家)와는 다르니 지붕을 고치고 부연을 다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저 황송하기만 한 지영이 “ 부연을 달겠지만 임금이 유숙하던 곳이니 앞으로는 출입을 금하고 사사로이 거처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엎드려 말했다. 인조가 말했다. “그럴 것 까지는 없고 내가 유숙했다는 표적을 남기면 되지 않겠느냐”며 친필로 ‘霞鶩亭“(하목정) 편액까지 친히 써서 내려줬다. 인조의 명으로 만든 부연. 부연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은 내탕금에서 은 200냥을 내렸다. 이는 하목정 창수전말 기록을 재구성한 것이다. ☜ [경북일보, 김동완]
부연(附椽)은 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를 말하는데 왕궁에서나 할 수 있는 건축 기법이다. 이후, 하목정은 조선의 내로라는 시인묵객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체제공, 현종 때 문인인 정두경과 남용익, 한음 이덕형 등의 시판 14개가 걸려 있다.
강 물줄기와 산세가 길게 뻗었는데
멀리 펼쳐진 들판의 아름다움 그리기도 어렵구나
새벽 안개와 연기와 섞여 물가에 잠겨 있고
저녁 석양빛은 강물 위에 출렁이네
서산의 가랑비에 주렴 안도 시원하고
남포 노을은 새 등에 반짝이네
애석하구나! 황자안이 아무 말 남기지 않았으니
좋은 경치 감상하며 술과 벗하네
— 한음 이덕형의 시 ‘하목정’
하목정을 그린 시는 18수다. 이 가운데 10수는 이종문 일가의 문집인 ‘전성세고’ 중 이종문의 문집인 ‘낙포집’에 수록돼 있다. 그런데 체재공의 ‘하목정 원운’시판이 이곳에 걸려 있는 점이 석연치 않다.
채제공(蔡濟恭)은 1782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파면돼 한동안 마포에 있는 김씨 정자에서 우거 했는데 이 정자 이름이 ‘하목정’이다. 따라서 달성 하목정에 있는 체제공의 시 하목정은 마포의 하목정을 보고 지은 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의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하목정의 후손들
이종문(李宗文)이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뒤 자손들이 승승장구했다. 첫째 아들 수월당 이지영은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 여헌 장현광 등에게서 공부를 한 뒤 문과 병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 직강 예조좌랑을 거쳤으며 광해군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오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지영은 이이첨의 전횡이 극에 달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울진현령을 맡았다. 미수 허목은 이지영의 묘갈명에 “광해군 말년에 조정의 정치가 극도로 혼란하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하빈(河濱)으로 돌아가 강위에 노닐며 세상일을 잊고 지낸 지가 5년이었다.(중략) 공이 관직을 맡아 백성을 잘 보살폈는데, 과거에 급제를 한 지 30년에 벼슬이 현령에 지나지 않았다. 공은 평생 명예와 형세를 피하였고 구차한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서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떠나가 시골에 탁락(拓落)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름이 드날려지지는 않았으나 행실은 더욱 완전하였다.”라고 썼다.
둘째 아들 다포(茶圃) 이지화(李之華)는 형 지영과 함께 서사원에게서 수학했다. 광해군때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세자시강원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인조반정 이후 호조정랑 군수 목사를 거쳐 병의 참의에 이르렀다. 정묘재란 때에는 의병장 여헌 장현광의 막하에 들어가 군량미 조달에 힘썼고 병자호란때는 호소사의 종사관으로 의병을 지휘했다.
하목정 뒤에 있는 사당은 이지영의 증손인 전양군 이익필을 제향하는 곳이다. 무인이었던 이익필은 영조 4년(1728년)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과 토벌에 나서 분무 3등공신이 됐다. 나라에서 불천위(不遷位)로 정했다. 사당 앞뜰에는 400년 된 목백일홍 5그루가 있는데, 여름에는 눈부신 장관을 이룬다. ☜ [김동완, 「정자(亭子)」 경북일보]
하목정(성주대교)→ 강정-고령보
☆… 오늘 따라 인적이 없는 하목정에 주인이 된 양, 정자에 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주변의 풍광을 음미하고 또 정자 주위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낙동강 물길에 들어섰다. 하목정 바로 아래 현대식 콘크리트 교량 ‘성주대교’가 강폭이 넓은 낙동강을 가로질러 간다. 성주대교는 이쪽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하빈에서 서쪽 성주군 선남(면)-성주(읍)으로 연결되는 30번 국도가 지나는 다리이다. … 하목정에서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대구의 강정-고령보까지는 11.6km이다. 하늘은 맑고 오후의 가을 햇살은 따사롭고 화사하다. 길목에 '↑낙동강 하구둑 192km'를 가리키는 원주의 이정표가 있다.
하빈체육공원
☆… 성주대교 다리 아래를 지나면, 하빈야구장이 있고 그리고 낙동강의 너른 둔치를 따라 내려가는 길이 이어진다. 둔치(습지)에는 온통 억새밭이어서 가을햇살을 받은 억새꽃이 눈부시게 일렁이고 있었다. 조금 내려가니 둔치의 공원에 조성된 체육시설이 있다. 낙동강변에 야구장-축구장-야구장2을 시설해 놓았다. 길에서 강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둔치의 공간이 넓어서 강물은 보이지 않는다. 길가에는 온통 억새꽃이 눈부시게 피어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겨온다. 널따란 잔디공원 파크골프를 치고 있는 사람들, 한가롭고 여유있는 강변의 풍경이다. 여기저기 주변에 눈길을 주면서 천천히 걷는다. 저만큼 앞에서 이 대장이 순례길의 성자처럼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하빈지구 수변생태공원
☆… 한참을 내려오다 하빈면 봉촌리 자연생태공원이 시작된다. 안내판이 있다. 아스콘 포장의 바이크로드를 버리고 강안 가까에 있는 길로 들어섰다. 발. 아래 강물이 찰랑대는 습지의 오솔길이다. 강안은 여름철 홍수의 잔해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강물과 벗하여 걷는 맛이 호젓하다. 강안의 습지와 함께 이곳 자연생태공원은 버드나무 군락지가 특징이다. 여름철 싱그러운 버드나무, 떡버들 나무들이 계절의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강안은 물에 잠긴 나무, 수초가 어우러진 물 깊은 습지로 이어져 있다. 강은 거대한 호수처럼 머물러 있다. 저 아래 강정-고령보가 있기 때문이다. 강가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억새꽃이 아름답다.
☆… 남진하던 낙동강 물줄기가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습지의 강가에서 잡초를 헤치고 바이크로드로 올라섰다. 조금 아래로 내려오니 왼쪽의 숲속의 위로 십자가를 세운 아담한 교회가 보인다. 봉촌2리 세예루살렘교회이다. 바이크로드는 둔치공원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산뜻한 직선의 주로이다. 길은 멀고 멀었다. 가을의 색으로 갈아입은 나무와 잔디 잘 어우러진 풍경은 가도가도 거의 변함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군락을 이룬 뽀얀 억새가 부드럽게 하늘거린다. 그렇게 오랫동안 걸었다. 진행한 방향이 동쪽이었다. 남으로 내려오던 강이 방향을 왼쪽으로 잡은 것이다.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 둔치의 길이다. 하목정 아래 성주대교에서 이곳까지는 하빈지구 수변공원이었다.
성주군 백천 ; (낙동강 건너 성주군 용암면)
우리가 종주하고 있는 낙동강 건너편은 성주군(星州郡)이다. 하빈지구 수변공원 건너편에는 성주의 ‘백천’과 ‘신천’이 낙동강에 유입된다. … 백두대간 대덕산-초점산에서 분기한 수도산(합천)지맥이 가야산을 경유하여 합천의 황강으로 남하하는데, 수도산에서 북동쪽으로 분기하여 나간 금오지맥이 김천시 증산의 삼방산-농소면의 백마산을 경유하여 구미의 금오산에 이른다. 이 금오지맥(남)과 백두대간(북) 사이의 산곡에서 발원한 계류가 김천을 경유하여 낙동강에 유입되는 감천이 되고, 이 금오지맥의 연봉산-빌무산-백미산 남쪽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성주읍(星州邑)을 지나온 ‘이천’이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서 백미산-영암산 남쪽의 산곡에서 발원한 ‘백천’에 합류하여 낙동강에 유입된다. 그러므로 백천의 지류인 이천이 성주읍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용암면에서 ‘백천’에 합류하는 것이다.
성주군 신천 ; (낙동강 건너 성주군 용암면)
금오지맥 연봉산에서 성주읍의 남쪽으로 분기하여 칠봉산-거산-추산-태봉재를 경유하여 외곡산으로 이어져 낙동강 앞에서 그 맥을 다하는 것이 성주지맥인데, 신천은 이 성주지맥의 칠봉산-태봉재-의곡산 사이의 산곡에 발원한 물줄기들이 성주군 용암면에서 모두 합류하여 낙동강에 유입되는 하천이다. 성주군에서 낙동강에 유입되는 백천(위쪽)과 신천(아래쪽)은 낙동강 강안에서 0.7km정도 떨어져 있다. 두 하천 하구 유역의 낙동강 서안은 습지를 이루고 있다.
성 주(星州)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는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백두대간 초점산에서 분기한 수도산지맥의 가야산과 수도산에서 동쪽으로 분기한 금오산 지맥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성주군의 동쪽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서쪽은 김천시와 경상남도 거창군, 남쪽은 고령군과 경상남도 합천군, 북쪽은 김천시 일부와 칠곡군과 맞닿아 있다. 성주(星州)는 말 그대로 별 모양을 하고 있는 별고을이다. 성주를 품고 있는 가야산(伽倻山)은 산세가 변화무쌍하게 펼쳐져 ‘조선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영남의 명산이다. 사시사철 아름다움을 뽐내는 가야산의 풍광과 더불어 한반도의 형상을 연출하고 있는 위천의 상류에 있는 ‘성주호’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 절경을 연출한다. 고대로부터 길지(吉地)로 이름 나 왕실의 찬란한 생명문화를 꽃피우는 곳,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했던 선비의 기개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이 바로 성주다.
▶ 옛날에는 고대 가야 연맹 중 하나이자 성산가야(星山伽倻)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벽진국’이 있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여러 호족들이 할거했는데, 이 중 벽진의 호족인 이총언(李悤言)이 후백제를 치는 왕건을 도와 큰 공을 세움으로써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고려 개국공신 벽진장군 이총언(李悤言)
신라 헌강왕 2년(858) 벽진군에서 태어나 후일 벽진 이씨 시조가 된 이총언(李悤言)은 고려 개국의 일등공신이다. … 왕건이 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건국하기까지 숱한 전투를 치르는 동안 항상 곁에서 큰 힘이 돼 준 인물이 바로 이총언(李悤言)이다. 후백제가 신라를 침략했을 때 수차례 백제 대군을 격파해 대승을 거뒀고 왕건이 견훤에게 쫓겨 공산전투에서 완전 포위되어 대패하여 도주할 당시에도 이총언이 있었다. 왕건이 외로이 혼자 말을 타고 청천강, 반야월, 해안, 대구 앞산 은적사, 월배를 거쳐 벽진군에 도착할 때까지 이총언은 사지에서 태조 왕건의 생명을 구출하였다. 그 후 자신의 아들 영(永)에게 태조를 호위하여 황도 개경까지 무사히 안착하도록 하여 통일대업과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도록 뒷받침한 개국 원훈(元勳)이 바로 이총언(李悤言)이다.
이총언(李悤言)의 공(功)을 인정한 고려 태조는 자자손손에 이르도록 마음 변치 않겠다는 맹약을 담은 친서를 보내 신의를 표시하였고, 이총언에게 국빈예우로 각별히 대했다. 고려 태조는 은공을 갚기 위해 공주인 사도(思道)를 이총언의 아들 영(永)에게 출가시켜 부마로 삼았고, 이총언에게는 고려 정일품의 삼중대광(三重大匡) 벽진장군으로 봉하였다. 성주군 벽진면에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넘어 청렴과 충직으로 큰 뜻을 이룬 벽진장군 이총언의 공덕을 기리는 경수당(敬收堂)이 있다. 벽진장군의 위업을 아로새긴 사적비가 울창한 솔숲에 우뚝 서 있다.
고려 말의 대문장가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고려 말 대문장가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7년(충목왕 3)~1392년(태조 1))은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이름을 떨친 고려 말 대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성주가 낳은 역사적 인물이다. 이숭인(李崇仁)은 1346년 성주에서 출생해 1360년(공민왕 9) 14세의 나이로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이색(李穡)의 제자로 학문을 익혔다. 16세 때 숙옹부승에 임명 되었고, 승진을 계속해 장흥고사 겸 진덕박사가 되었다. 예의산랑, 예문응교, 문하사인등 관직을 두루 지내고 21세 때 성균관 생원이 되면서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과 깊은 교우관계를 가졌다.
고려에서 명나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관리를 선발했을 때 이숭인은 수석으로 뽑혔지만 25살이 되지 않아 보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대문장가로서 자질을 잘 보여준다. 이숭인은 재능이 뛰어나고 문장력이 탁월해 원나라와 명나라의 복잡한 국제 관계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을 뿐만 아니라 주옥같은 글이 담긴 『도은집(陶隱集)』을 남겼다. 스승 목은 이색은 ‘중국에서 찾아도 구하기 힘든 문장들’이라 칭찬했으며, 멀리 중국에까지 문사로 그 이름을 떨쳤다.
이숭인이 살았던 시대 상황은 고려 말 정치적 격변기였다. 그는 명나라를 지지하는 친명파로서 친원파에 의해 배척되어 자주 유배 길에 올랐다. 설상가상으로 친명파의 대표적 인물인 정몽주가 피살되자, 정몽주파로 몰려 정도전 등에 의해 44세의 젊은 나이로 죽임을 당했다. 자기와 뜻을 같이 하지 않은 데 앙심을 품고 정도전이 보낸 심복 황거정(黃巨正)에 의하여 유배소에서 장살(杖殺)되었다. 이방원이 즉위한 후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군 벽진면 안산영당에는 이숭인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이숭인은 고려를 지키려 했던 절의의 충신이었고 성리학의 깊이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던 문인이었다. 당대 최고의 시문만을 엄선한 『동문선』에 실린 시문 75수는 그의 문학관을 잘 말해준다. 특히 그가 남긴 주옥 같은 차시(茶詩)는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 [대구신문]
성주군 수륜면에 있는 청휘당(晴暉堂)은 1375년 도은 이숭인이 성주로 유배되었을 때 후학 양성을 위해 세운 사우로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었다 600년 세월이 흐르면서 퇴락된 곳을 여러 번 중건 중수하다, 2018년 이숭인 선생 숭모사업 추진 위원회에서 국비와 지방비의 지원을 받아 역사 충절 현창 사업으로 중건 사업이 추진되었다. 현재 사당인 문충사, 강당인 도은재, 거경재, 명의재 등을 중건하였으며, 도은 기념관을 건립해 충절과 학문을 접할 수 있는 역사 문화체험과 교육의 장 그리고 숙박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 조선 태종 때 성주목(牧)으로 승격되면서 가리현·팔거현·화원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때 성주는 경상도에서 개간된 농토가 가장 넓었고, 제방이 많아 물이 풍부해 생산량이 많은 풍요로운 곳이었고, 대구에서 조령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성주 이씨와 성산 이씨, 성주 배씨와 성주 도씨는 이 지역을 본관으로 하며, 집성촌도 있다. 조선 개국 공신 배극렴(裵克廉)도 성주 배씨이며, 역시 이곳 출신이다.
청빈한 선비 한강(寒岡) 정구(鄭逑)
조선 중기에는 남인과 북인(동인)의 대학자로, 이황, 조식에게서 수제자로 수학한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년(중종 38)~1620년(광해군 12))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었고, 성주는 1558년(명종 13) 천곡서원(川谷書院)이 세워지는 등 영남학파의 한 중요한 근거지 중의 하나였다. (* 심산 김창숙은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동강 김우옹(金宇顒)의 13대손이다)
정구(鄭逑)는 1543년(중종 38) 성주 대가면에서 태어나 호를 ‘한강(寒岡)’이라 하고 1620년(광해군 12)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학문에 매진한 대유학자이며 문신이다. 정구는 외증조인 성리학의 대가 김굉필(金宏弼)로부터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래서일까. 체질적으로 남명의 명행(名行)과 출처의리(出處義理)를 본받았고, 학문 태도는 퇴계의 학풍을 이어 받아 자신의 학풍을 일으켰다. 그의 학문을 연원(淵源)으로 하여 근기학통(近畿學統)이 이루어지고,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로 이어졌다.
정구(鄭逑)는 젊은 날 향시에 합격한 후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갔다가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시험을 치지 않고 바로 돌아올 정도로 강직하고 청빈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평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할 때는 주로 외직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고, 내직으로 우승지, 공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는 ‘문목’이라는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성주군 수륜면에는 한강 정구(鄭逑)가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회연서당(檜淵書堂) 자리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유학 교육을 위하여 1627년(인조 5)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회연서원이 있다. 그가 심은 100그루의 매화나무가 봄이 되면 지천으로 피어 그 향기를 뿜는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서원이다. 1622년(광해군 14)에 창건되었으며, 정구(鄭逑)와 이윤우(李潤雨)의 위패를 모셨다. 1690년(숙종 16)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4년에 복원되었다.
정구가 남긴 또 하나의 업적은 ‘무흘구곡(武屹九曲)’의 시편이다. 성주군 수륜면에서 김천 증산면 수도리까지 약 35킬로미터 대가천에 이르는 기암절벽과 아름다운 절경을 무흘구곡이라 이름하고 7언 절구의 시로 남겼다. 중국 남송시대 성리학을 이룬 주희가 지은 무이구곡(武夷九谷)을 본떠 봉비암, 한강대, 배바위, 선바위, 사인암, 옥류동, 만월담, 와룡암, 용추라는 자연과 어우러진 이름을 짓고 도학의 근원을 찾아가는 수행과정을 산수의 아름다움에 빗대어 노래했다. 아름다운 100리길에 선정된 무흘구곡은 성주군 30번 국도를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무흘구곡을 따라가다 보면 아름다운 풍광에 절로 발길이 멈추어진다.
[한강 정구 학문의 사상사적 의의] ▶ 한강 정구는 수학기, 출사기, 은퇴기를 거치는 가운데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외직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많은 서적을 저술 출판하고 340명이나 되는 수많은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중쇠의 기운을 맞은 조선에 청신한 학풍(學風)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는 심학과 예학에 바탕으로 실천적 실용주의 노선을 굳건히 하였는데 이는 16세기 이후 낙동강 연안 지역의 학문인 강안학(江岸學)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였다. 한강의 이와 같은 학문은 퇴계와 남명의 학문을 발전적으로 성취한 것으로서, 장현광(張顯光)과 허목(許穆)을 통해 영남 및 근기지방으로 계승되게 했다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의의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주 ‘한개마을’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에 위치한 ‘한개[大浦]마을’은 고려 개국공신 이능일을 시조로 하는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이능일의 15대손 이우가 처음 들어온 이래 마을을 형성해 영남 지역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에 이어 세 번째 민속마을(국가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된 곳이다. 600년이 넘는 역사와 함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통 한옥과 초가, 강학을 펼치던 강당 등 75채의 가옥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어 옛 정취를 감상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마을을 둘러싼 아담한 산과 노송 등 자연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우러져 고풍스럽게 다가온다. 해질녘 고즈넉한 돌담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 [대구신문]
▶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이 성주성을 점령하자, 성주 목사였던 제말과 임진왜란 3대 의병장 중 하나인 김면, 역시 유명한 의병장인 정인홍 등이 성주성 전투에서 세 차례의 격전 끝에 성주성을 탈환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특히 난중에는 일시 경상도 감영이 성주목 팔거(현재 칠곡)에 있었다.
성주군은 경상북도에서는 남부에 속했지만, 경북 남부에서는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지역들이 발달되었기 때문에, 이 두 교통로가 지나지 않아서 주변의 김천시-구미시-칠곡군(왜관)에 비하면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지금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성주읍을 통과하고 있다. 특산물로는 참외가 있다. 전국 참외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 그래서 군 자체에서 참외를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 선비 정신이 살아 있는 성주 ―☆
조선 후기에도 성주에서는 많은 서원이 설립되고 영남학파를 계승한 성리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는데, 특히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은 그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조선 후기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성주를 “산천이 밝고 수려해 일찍이 문명이 뛰어난 사람들과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논은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서 씨를 조금만 뿌려도 수확이 많다.”고 평가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선비가 많았던 지역답게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년) 등을 필두로 많은 독립운동이 이루어졌으며 1919년 4월 2일에 성주 시장에서 만세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여뢰(汝雷), 호는 한주(寒洲)이다. 아버지는 이원호(李源祜)이며, 경상도 성주 한개[大浦]마을에서 출생하였다. 8세 때 아버지로부터 『통감절요(通鑑節要)』를 배웠고, 13세 무렵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고 경사(經史)·정무(政務)·문장(文章)·제도(制度)로부터 성력(星曆)·산수(算數)·의방(醫方)·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다 알려 했다 한다. 그러나 17세 때에 숙부 원조(源祚)의 교훈으로 성리학에 전념해 『성리대전(性理大全)』에 몰두하였다. 이후 성리학에 정진하여,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변 이후의 논란이 되어온 이기론을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자신의 일가를 이룬 대학자이다.
1849년(헌종 15)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생원이 되었으나 대과는 포기하였다. 1871년에는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으며, 1876년에는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의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려고 계획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그만두었다. 그리고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져오자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뜻으로 글을 지어 고을[☞ 산양의 만인소]에 돌리기도 하였다. 명성이 날로 높아지자 67세에 나라에서 유일(遺逸)로서 의금부도사를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 [註]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학덕이 있는 인물
이진상(李震相)의 이기론(理氣論)
한주 이진상이 주장한 주리설(主理說)에 의하면, 천지간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모두 음양(陰陽)의 기(氣)이지만, 기(氣)가 변하는 까닭은 태극(太極)의 이(理)가 주재(主宰)하기 때문이다. 태극은 형체가 없지만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에 존재해 유형(有形)의 기(氣)가 존재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나, 무위(無爲)가 아니라 모든 변화의 근본이며 만물의 근저(根柢)이다.
이미 태극이 있으면 동정(動靜)이 있게 되고 동정이 있자마자 곧 음양(陰陽)이 나누어진다. 태극의 동정은 음양이 생겨나는 기(機)이어서 동(動)은 양(陽)이 생겨나는 기(氣)이고, 정(靜)은 음(陰)이 생겨나는 기(氣)이다. 일단 이(理)가 기(氣)를 생(生)하면 이는 기 속에 있어 동(動)해도 함께 동하고 정(靜)해도 함께 정하지만 이(理)가 동정의 주(主)이고 기(氣)는 동정의 자(資)이다.
이(理)는 마치 사람이 말[馬]을 타고 출입함과 같아서, 사람과 말이 함께 출입하지만 사람이 출입의 주(主)이고 말은 출입의 자(資)임과 같다. 만약, 기(氣)에만 동정이 있고 이(理)에는 동정이 없다면, “졸고 있는 사람을 배로 비유한다면, 없는 배를 빌려 타고 배가 가는 대로 방임해 간섭하지 않음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기가 함께 동하고 정하지만 기(氣)는 동하면 정하지 못하고 정하면 동하지 못하는 데 대해, 이(理)는 동중(動中)에도 정이 있고 정중(靜中)에도 동이 있어서 동하다가도 능히 정하고 정하다가도 능히 동한다. 이(理)는 선후(先後)나 생멸(生滅)이 없지만, 기(氣)는 선후가 있고 생멸이 있다. 이는 통(通)해 있고 기는 국(局)해 있다. 이는 무형하지만 기를 생하여 기에 의탁해 있다. 따라서 이가 먼저 있고 기가 뒤에 있는 것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하늘에 있으면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였다. 하늘이 음양오행의 기(氣)로써 만물을 화생(化生)해 이(理)를 부여하니 이 이(理)가 만물의 성(性)이다. 따라서 성은 곧 이이며 만물이 모두 인의예지의 성(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맹자(孟子)가 말한 성선설(性善說)의 성(性)이고, 송대(宋代)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이다. 성(性)이 발(發)하지 않고서는 기(氣)가 용사하지 아니해, 일리(一理)의 성(性)이 순수지선(純粹至善)하지만 이발(已發)의 즈음에 기질(氣質)이 용사해 기질의 청탁수박(淸濁粹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본연지성(本然之性)이 기질의 청탁편전의 작용으로 기품(氣稟)에 따라서 달리 나타나는 것이 기질지성(氣質之性)이다. 본연지성은 기질의 우리[囿]안에 있고, 그 용사함을 타고서 발한다. 본연지성은 기질을 떠나지 못하지만 또한 기(氣)와 섞이지도 아니한다. 본연지성은 미발(未發)의 체(體)이고 기질지성은 이발의 객용(客用)이다. 정(情)은 이발(已發)의 성(性)이다. 성(性)은 미발(未發)의 이(理)이고, 정(情)은 이발의 이(理)이다. 성이 발해 정이 되지만 단지 일리(一理)일 뿐이다. 마치 주인이 나가면 손님이 되지만 단지 일인(一人)일 뿐이다. 따라서 이발(理發)은 있어도 기발(氣發)은 없다.
대개 사람이 형기(形氣)가 있는 한 사(私)가 없을 수 없으니, 귀의 사(私)는 소리이고 눈의 사(私)는 색(色)이고 코의 사(私)는 냄새이고 입의 사(私)는 맛이고 사체(四體)의 사(私)는 안일이다. 성(聲)·색(色)·취(臭)·미(味)·궁실(宮室)·여마(輿馬)·복용(服用) 등 형기의 사(私)에 속한 것이 밖에서 닥치면 심(心)의 영(靈)이 동하는데, 지각(知覺)이 형기에 따라가면 인심(人心)이다. 그러나 군신(君臣)·부자(父子)·장유(長幼)·부부(夫婦)·붕우(朋友) 등 천성에 속한 일이 밖에서 닥치면 심(心)의 영(靈)이 동하는데 지각이 의리(義理)를 따라가면 도심(道心)이다.
이진상의 문집으로는 1895년(고종 32) 거창의 정천(井泉)에서 간행한 49권 25책의 목주자본(木鑄字本)과, 1902년 성주의 삼봉서당(三峯書堂)에서 간행한 22책의 개정판의 양본이 있다. 문집 이외에 별저로서는 『이학종요(理學綜要)』 22편 10책, 『사례집요(四禮輯要)』 16편 9책, 『묘충록』 2책, 『춘추집전(春秋集傳)』 20편 10책, 『춘추익전(春秋翼傳)』 3편 3책, 『천고심형(千古心衡)』 상하 2책, 『직자심결(直字心訣)』 상하편 1책, 『구지록(求志錄)』 23책, 『변지록(辨志錄)』 4책이 있어 문집까지 합하면 총 저서는 85책이나 된다. 문인으로는 곽종석(郭鍾錫)·허유(許愈)·이정모(李正模)·윤주하(尹胄夏)·장석영(張錫英)·이두훈(李斗勳)·김진호(金鎭祜) 등이 유명하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김창숙(金昌淑, 1879.7.10~1962.5.10)은 본관 의성(義城)이요,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躄翁)이다. 경상북도 성주 대가면 사월리에서 태어났다. 영남의 유학자 집안 출신이다. 선조 때의 정승이었던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2대손인 칠봉(七峰) 김호림(金頀林)과 인동 장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당시 이름이 높던 유학자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학 혁명이 발생했을 때 아버지 김호림은 서당에서 친구들과 학습 중이던 김창숙과 학동들을 불러내 농부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농사일을 도울 것을 지시하였다. 이날부터 아버지 김호림은 귀천(貴賤)을 따질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농업에 동참하게 하였다. 또한 여자아이를 시켜서 밥을 보냈는데, 장유유서(長幼有序)로써 늙은 종과 일꾼들에게 먼저 주고 그와 학동들에게는 나중에 주었다.
어려서 유학을 배웠고 문장에 능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성토하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9년(융희 3)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창립, 육영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儒林團陳情書)를 휴대하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 해 4월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申采浩)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쑨원[孫文]과 교섭,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회장 및 성균관장을 역임하였고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6·25전쟁 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하야(下野)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李始榮)·김성수(金性洙)·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하여 권력비호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며, 그 해 5월 10일 노환으로 별세한 뒤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러졌다.
다시 낙동강 종주 길, — 달성 ‘문산정수장’
☆… 낙동강 하빈의 수변생태공원을 지나, 하빈천의 봉촌교를 건넜다. 지금부터는 달성군 다사읍 문산리이다. 다리를 건너 하빈천을 따라 내려오다가 좌측으로 산을 끼고 돌아서니 저 아래 낙동강 풍경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광활한 수면 위로 멀리 대구의 하얀 아파트군이 보이고, 그 어름에 어렴풋이 강정보가 보이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왼쪽을 올려다보니 ‘문산정수장’이 건물이 보인다. 이곳에서 낙동강 물을 퍼 올려서 정수하여 대구시민에게 공급하는 곳이다. 그 취수장 고갯마루를 넘기 위해서 산 밑으로 한참 들어가야 한다. 산곡에는 태양열 집광판이 골짜기 밭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낙동강 강물을 퍼 올려 대구시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문산정수장’ 건물이 있는 고갯마루를 넘었다. 2009년 9월 1일 가장 최근에 새로 건설된 정수장이다. 문산정수장에 이어 낙동강 물을 취수하는 정수하여 대구시 수돗물의 반 정도를 공급하는 최대 규모의 ‘매곡정수장’, ‘죽곡정수장’ 등이 있다. 정수장 고개를 넘어서 몇 채의 집이 있는 강가로 내려왔다. 강변에 아담한 카페가 있고, 강안의 난간에 나무테크 쉼터가 있다. 옛날 ‘문산나루터’ 자리이다.
문산(汶山) 나루터
문산(汶山)나루터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16세기 아암(牙巖) 윤인협(尹仁浹, 1541~1597) 선생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중기 정자문화가 성행하면서 낙동강변 경치가 빼어난 이곳에 영벽정(映碧亭)이 건립된 후, 영남 사림의 선비들이 금호강과 낙동강벼의 정자를 오가며 풍류가 넘치는 선유(船遊, 뱃놀이) 문화를 즐기기 위해 나루터을 이용하였으며, 고령 다산과 달성 다사를 왕래하는 길목으로 문산나루터가 수상운송 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다하였다.
예전 문산나루터 주변에는 넓은 농경지와 광활한 백사장, 갈대숲이 어우러져 다사 팔경 중 ‘낙강모범(洛江暮帆, 낙동강 해질 무렵의 배)’, ‘영벽정(映碧亭)’ 등 2경 포함될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였다. / 근래에 이르러, 낙동강 교량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5일장인 고령장, 다까장(고령 다산면), 동곡장, 왜관장, 서남장 등으로 농축산물 운반과 고령 다산면과 대구를 오가는 주민들의 왕래를 위해 이곳 문산나루터가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사문진, 박석진나루터와 함께, 나루터마다 현대식 교량이 건설되는 등 육상교통의 발달로 사라지게 되었고, 4대강 사업으로 광활한 금빛 모래사장과 철새떼를 볼수 없게 되었다.
달성 영벽정(暎碧亭)
☆… 강물이 발아래 다가와 있는 강안의 포장도로를 따라서 내려오면, 길 왼쪽 높은 축대 위에 영벽정(映碧亭)이 있다. 영벽정은, 달성군 다사읍 소재지를 가로지르는 달구벌대로의 다사읍사무소 삼거리에서 성주 방면으로 약 1.6㎞ 낙동강 변, 문산리 나루터 마을, 낙동강을 굽어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영벽정(映碧亭)은 파평 윤씨(坡平尹氏) 입향조인 아암(牙巖) 윤인협(尹仁浹, 1541~1597)이 1571년(선조 4)에 건립하였다. 고려시대 여진(女眞)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대원수 윤관(尹瓘) 장군은 아암(牙巖)의 현손(玄孫, 증손자)이다. 15세(世)인 윤곤(尹坤)은 추충익대좌명공신 파평군으로 이조판서를 지냈고 파평 윤씨 중시조이다. 아암의 조부 윤탕(尹宕)은 과거 급제 후 상주목사 재직 시에 ‘탕건(宕巾)’을 만들었다. 영벽정 정원에 탕건비(宕巾碑)가 있다.
영벽정(暎碧亭)은 낙동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있다. 전면의 삼문(三門)을 들어서면 마당을 향하여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토석 담장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이루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그 구성은 중앙의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온돌방 1칸과 왼쪽에 온돌방 1칸을 둔 중당 협실형(中堂挾室形)이며,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온돌방 전면의 툇마루는 대청보다 단을 약간 높이고 헌함(軒檻)을 설치하였다. 다소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주초를 놓고 정면만 원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는 초익공 양식으로 꾸몄는데, 살미의 형상은 단부(端部)가 올라간 앙서형이며 살미 하부는 연봉을 상부는 연화로 조각하였다. 상부 구조는 종량(宗樑) 위에 원형 판대공(圓形板臺工)을 세워 종도리(宗道里)를 받도록 한 오량가(五樑架)이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임하 정사철, 송계 권응인 등과 더불어 낙강[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함께하며 시를 읊던 정자라고 전한다.
영벽정→ (매곡제)→ 강정보(江亭洑)
문산리 문산나루터-영벽정에서 이어지는 제방 길은 매곡제이다.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 제방 길이다. 가을 오후의 밝은 햇살이 따사롭고 청정하고 신선한 낙동강 바람이 부드럽게 스며든다. 매곡제는 일직선 긴 제방인데 오른쪽 낙동강은 거대한 호수처럼 고여 있다. 저 아래 강정-고령보의 모습과 대구의 아파트군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 다리는 딱딱하게 굳어서 무겁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 장장 30km 이상을 걷고 있는 것이다. 아직 강정보까지는 3km 정도 더 걸어야 한다. 따뜻하고 평화스러운 제방 길은 쾌적하기 이를 데 없다. 대구에서 가까운 곳이라 산책과 도보,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 … 매곡제가 끝나고 난 뒤 바이크로드는 강안의 절벽을 따라 나무테크를 시설하여 수상탐방로를 조성해 놓았다.
낙동강 강정-고령보
오후 6시, 해가 강 건너 서산으로 기울어지면서, 낙동강에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 오늘의 목적지인 강정보에 도착했다. 오늘 아침 왜관교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동안(東岸)의 강변길을 걸어서 내려왔다. 여정의 중간, 하빈의 묘골마을에 들러 육신사(六臣祠)를 탐방하고 또 낙동강 하목정(霞鶩亭)을 찾는 등 장장 33km 이상을 걸었다. … 참으로 멀고 고단한 길이었다.
낙동강 지킴이 대부, 오세창(吳世昌) 박사
그런데 이상배 대장과 함께 대구의 강정·고령보에 도착하니, 거기에 ‘낙동강 1300리 사랑회’ 회장 오세창 교수(대구대 지리학과 명예교수)가 중심이 되어, ‘낙동강사랑회’, ‘낙동강 물포럼’, ‘낙동강 환경지킴이 봉사단’ 등 환경연합 회원 12분이, 우리를 환영하는 카드를 한 장씩 들고, … 성원의 구호를 외치며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 오세창(吳世昌) 교수는 대구대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찍이 낙동강의 시원(始原)을 밝히고 낙동강이 700리가 아니라 1300리임을 확인한 장본인으로서, 평생 낙동강 사랑에 헌신한 분이다. 특히 1991년 3월 낙동강 페놀사건을 계기로 낙동강을 깨끗하게 보존하는 환경운동(環境運動)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분이다.
¶ … 낙동강 페놀오염사건은 구미 공업단지에 있던 두산전자가 1991년3월 14일, 4월22일 두 차례에 걸쳐 페놀 30톤과 1.3톤을 낙동강에 유출한 사건이다. 유출된 페놀은 대구 지역의 상수원으로 사용되는 ‘다사취사장’으로 유입되었고 상수원에서 염소를 이용한 정수처리 과정에서 유입된 페놀은 클로로페놀로 변하여 악취를 유발하였다. …
이 페놀오염 사건을 당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야기된 환경오염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낙동강 오염은 당시 낙동강 물을 식수로 쓰는 250만 대구시민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특히 고전을 아우르는 지리학을 전공하며 ‘낙동강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오세창 박사에게 있어서는 경악 그 자체였다. 이후 오세창 박사는 더욱 뜨거운 열정으로 낙동강 정화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1996년 11월 20일(수요일) <영남일보>에 「맹물의 꿈」이라는 제하의 글을 실었다.
‘… 우리의 영혼(Soul)과 토양(Soil)은 어원이 같다.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빚어 거기에 영혼이 깃들어 만들어졌으니, 사람은 영육이 합쳐야만 생명체가 되며 분리되는 순간 귀신과 시체로 변하여 원점으로 돌아간다. / 한번 파괴된 자연은 원상회복이 불가능한데, 서양의 과학문명과 황금만능주의는 사후약방문에 불과하고 동양의 정신문명으로 사전 예방 차원에서 수질오염의 68%인 생활하수를 치유해야 한다. / 흔히 경상도에서는 ‘맹물’을 찾는데 이는 맑고 티없는 순수한 물을 의미한다. 근래 비싼 생수를 사 먹으며 수십년 전 무공해 시절이 더욱 그리워짐은 나 혼자만의 병일까. 우리 고장 대구는 수질, 대기와 토양오염이 지구촌에서 최악에 가깝다. / ‘지강(志江)’이라는 나의 아호가 어느 날 ‘맹물’로 바뀌고, ‘나부터 지금부터’ 아름답던 추억의 옛강으로 우리 곁에 다가가는 낙동강을 그리며, 오늘도 ‘맹물’은 1천 3백리 쉬지 않고 달리고 싶다. 달리고 싶다. …’
그리하여 1991년 '자연사랑-낙동강 1300리 사랑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3년 6월 세계환경의 날 국민훈장을 수상하였으며 1993년 9월에 낙동강 환경연구소장, 1996년 3월에는 환경부 중앙홍보자문위원, 사) 녹색환경협회 명예회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2018년 12월 3일,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낙동강에서, ‘맑은 물 사랑’ 「대구선언문」을 발표했다.
‘맑은 물 사랑’ —「대구선언문」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강, 우리의 물에게 용서를 구하려 여기에 섰다. 좀더 배불리 먹고, 편리하게 살고, 즐기기 위해, 우리의 강, 우리의 물을 몹시도 괴롭혀 왔음을 뼈저리게 뉘우친다.
보라, 저 강, 저 물은 저토록 신음함에도 민족의 젖줄로서 의연히 흐르는 모습, 참으로 눈물겹지 아니한가. 오늘 우리는 세 가지 악업을 버리려 여기에 섰다
우리의 강이 죽어가고 우리의 물이 썩어가는 책임을 나 아닌 누구에게 탓하려는 비겁함, 인내와 화합이 필요한 시간들을 편리와 대립을 허송하는 우둔함과 이상만으로 굴복시키려는 무모함을 티끌 한 점없이 청산하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슴 속에 ‘맑은 물 사랑’을 확실하게 심으려 이곳에 섰다. 강물을 더럽히는 일은 가장 두려운 죄로 여길 것이며, 강이 살아야 우리가 살 수 있음을 잊지 않을 것이며, 마실 때마다 물 한 모금의 고마움을 가슴 깊이 되새길 것이다.
오늘 우리는 다시 저 강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두 손을 오므려 목을 축일 날이, 우리가 떠나고 우리 아들딸까지 떠나고 난 그 이후에야 올지라도 ‘맑은 물 사랑’에 온 정성을 바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 오세창 교수가 스스로 아호를 ‘맹물’이라고 한 것은 ‘낙동강 1300리 물이 언제나 맑은 물이 되어 후대에까지 보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맹물박사 오세창 교수는 지금도 <대구환경대학>을 운영하면서 낙동강을 비롯하여 우리의 자연환경을 정화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낙동강 1300리 종주 … 열렬한 환영(歡迎)
☆… 오늘 오세창 교수는 이상배 대장과 나를 강정보 앞, 대구식당(민물매운탕)으로 초대하여 성대하게 환영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낙동강 1300리 머나 먼 여정에서, 대구 강정보에 이르러 낙동강을 아끼고 사랑하는 오세창 교수를 비롯한 낙동강사랑회 회원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무엇보다 낙동강을 매개로 하여 모두 한마음이 된 동지를 만나게 된 것이 여간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낙동강 환경지킴이 봉사단의 금별 단장님을 비롯하여, 김학연 총무님, 김진희 님, 박나경 님, 남재안 님, 홍성자 님, 김상육 님 등의 따뜻한 마음을 만나게 되어, 낙동강 대장정의 누적된 피로도 모두 날아간 듯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낙동강을 만들기 위해 하나가 된 뜨거운 사랑, 그 순정한 마음으로 환영하고 성원해 준 분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대구에 사는, 우리 해주 오씨 벽성군파 옥산지파의 주손(冑孫) 오천석(吳天錫)의 따뜻한 격려 전화도 큰 위로가 되었다. 오세창 교수 일행과 회동을 마치고, 대구 시내로 들어와 성서산업단지역 부근의 TOP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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