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5 편
오순절 이후
. 중도자 위원회
. 1935년
195:0.1 오순절에 베드로가 설교한 결과는 사도들 대다수의 미래의 방향을 확정할 만큼 대단했다. 베드로는 기독교회의 진정한 창시자였다. 바울은 기독교의 소식을 이방인에게 가져갔고, 그리스인 신자들은 이를 온 로마 제국으로 가져갔다.
히브리인은 하나님은 아버지요 사람은 서로 형제라는 예수의 복음을 믿지 않았어도, 로마 제국의 나머지는 생성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좋게 받아들였다. 그리스 문화를 물려받은 서양 세계의 민족들에게는 마음에 흡족한 종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인간 사회에 기독교에 담겨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 밀어닥쳤다. 이것은 기존의 종교 관습과 예수의 새로운 말씀은 갈등에 이어 투쟁과 타협으로 끝났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너무 많은 것을 주제넘게 포섭하려 해서 모든 세계에 쉽게 동화(同化)할 수 없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한 영적 호소를 너머 종교 예식, 교육, 마술, 의술, 예술, 문학, 법률, 정부, 도덕, 성(性) 규제, 일부다처제, 그리고 어느 정도로 노예 제도에 대해서도 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기독교는 새로운 종교가 아닌 인간 사회의 새로운 체제였다. 그러한 허세로서, 기독교는 오랜 세월에 걸친 사회적ㆍ도덕적 충돌을 급히 재촉하였다.
처음 기독교는 낮은 사회ㆍ경제 계층만 개종시켰다. 그러나 2세기 초가 되자 그리스ㆍ로마 사회 전체에 침투하였다.
195:0.5 유대 땅에서 이 새 가르침은 거의 실패했지만, 기독교가 급속히 로마 제국의 일류 지성인들을 설득한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었다:
1. 조직. 바울은 위대한 조직가였고 그 후계자들은 그가 시작한 속도를 유지했다.
2. 기독교는 철저히 헬라화 되었다. 히브리 신학의 정수와 그리스 철학의 최선을 담았다.
3. 기독교는 새롭고 위대한 이상을 담았고, 온 인류를 구원하는 그의 말씀이 반영된 것이다.
4.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미트라교와 타협해서, 미트라교 상급 추종자 절반이 설득되었다.
5. 후일 기독교 지도자들은 더 이교도와 타협하여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까지도 설득되었다.
195:0.11 그러나 기독교인은 이교도의 예식 행사를 수용했지만 페르시아 신비교의 상스러운 부도덕과 비난받을 수많은 다른 풍습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니, 정복자가 되고도 남았다.
기독교의 초기 지도자들은 예수의 많은 개념을 구하고 촉진하려는 노력으로 계획하여 예수의 이상에 상처를 냈고, 그들은 뛰어나게 성공했다. 그러나 이렇게 상처 입은 주(主)의 이상은 아직도 복음 속에 잠자고 있다.
이렇게 기독교가 이교화 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의식적 성격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다음 이유로 주도권을 얻었다:
1. 인간의 도덕 면에서 새롭고 엄청나게 높은 기준을 부르짖었다.
2. 새롭고 크게 확대된 하나님 개념을 세상에 주었다.
3. 불멸의 희망은 세상에 인정받는 종교가 보장하는 것의 일부가 되었다.
4. 기독교는 사람의 갈급한 영혼에게 나사렛 예수를 보여주었다.
195:0.18 예수가 가르친 큰 진리 중에서 많은 것이 이 초기의 타협에서 분실되어 이교화된 바울판 해석인 기독교의 종교 안에 아직도 잠자고 있다. 기독교는 그리스인에게 많이, 듬뿍 빚을 졌다. 이집트에서 온 그리스인,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집회에서 예수의 수여에 관한 참 진실을 외쳤고, 그가 아니었다면 아리우스 신조가 승리했을 것이다.
1. 그리스인의 영향
195:1.1 그리스인의 철학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는 비슷한 무엇이 있었다. 그리스인은 정치적 자유로 이끄는 지적 자유주의를 가르쳤고, 예수는 종교적 해방으로 인도하는 영적 자유주의를 가르쳤다. 이 두 관념이 한데 모여 인간의 자유를 위한 새롭고 강력한 헌장이 되었고, 사람의 사회ㆍ정치ㆍ영적 해방을 알리는 전조가 되었다.
기독교는 주로 두 가지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고, 경쟁하는 모든 다른 종교를 이겼다.
1. 그리스의 지성인은 유대인한테서도 새롭고 좋은 관념을 기꺼이 빌렸다.
2. 바울과 그 후계자들은 경쟁하는 종파들과 현명하게 타협하였다. 신학을 파는 민첩한 상인이었다.
아데네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전했을 때, 그리스인은 영적으로 갈급했다. 그리스인은 영적 진리를 찾고 있었다. 로마인은 처음에 기독교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그리스인은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로마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195:1.6 그리스인은 아름다움, 유대인은 거룩함을 존중했지만, 두 민족이 진리를 사랑하였다.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인은 종교 외에 사회ㆍ경제ㆍ정치ㆍ철학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토론했다.
작은 도시 국가에서 사는 한, 그리스인은 정치를 잘 했으나, 그리스가 큰 제국이 되자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은 커져 가는 제국을 위하여 충분히 좋았지만, 정치와 종교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 종교의 기독교판이 다가왔을 때, 그리스인은 정말로 유일한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헬라 문화는 그런 상태로 오래 갈 수 없었다. (그리스) 문화의 지배가 계속되었지만, 로마로부터 정치적 수완을 얻은 뒤에, 그리고 동방으로부터 기독교를 얻은 뒤에 오래 견디었다. 그 종교의 유일한 하나님은 제국의 품위를 갖추었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헬라 문화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학문이 진보되고 있었지만 천재가 줄어들고 있었다. 바로 이때, 기독교에 담긴 예수의 개념과 가르침이 그리스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문화로 동방으로 진격했지만, 바울은 기독교로 서방을 공략했다. 서방 세계 어디에나 그리스 문화가 지배한 곳에, 헬라화된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다.
195:1.11 예수의 말씀의 동방판은 아브너가 충실히 유지했어도, 헬라화된 기독교처럼 진보하지 못했고, 궁극에 이슬람 운동에 파묻혀 사라졌다.
2. 로마인의 영향
195:2.1 로마인은 그리스 문화를 통째로 이어받았고, 새로운 언어와 민족,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한 태도를 온 서양 세계로 가져왔으므로, 이 변화는 기독교에 유리했다.
초기에 로마가 기독교인을 박해한 것은 불행하게도 그들이 ‘나라’ 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은 어떤 종교에도 관대했지만,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티가 나는 것은 무엇이나 대단히 분개했다. 오해 때문에 생긴 이 초기의 박해가 사라졌을 때, 종교의 선전을 위하여 무대가 활짝 열렸다.
동방의 율법은 엄격하고 원칙이 없었다. 그리스의 율법은 유연하고 예술적이었다. 로마의 법은 기품이 있고 존경심을 일으켰다. 로마인은 정직하고 이상에 헌신했지만, 그 이름에 어울리는 종교가 없었다. 바울의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그리스인 선생들이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로마인은 위대한 민족이었고, 자신을 다스렸기 때문에 서양을 다스릴 수 있었다. 정직, 헌신, 굳센 자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장시키는 데 이상적 토양이었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자기 것으로 이어 받았고, 그리스도를 자체의 도덕 철학으로 채용했다. 기독교가 로마의 도덕적 문화가 되었지만, 그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종교가 되지는 않았다. 많은 개인이 정말로 이 모든 국가 종교의 표면 밑으로 파고들었고, 혼을 살리는 영양을 얻으려고, 헬라화되고 이교화된 기독교에 잠재하는 진리 속에, 숨은 의미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것은 참말이다.
195:2.6 로마인은 성품과 훈련으로 보면 법률가였고, 자연 법칙까지도 존경했다. 이제, 기독교 안에서, 로마인은 자연 법칙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헤아렸다. 시세로와 버질을 낳을 수 있는 민족은 바울의 헬라화된 기독교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했다.
이 로마화된 그리스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자기들의 종교를 철학화하고, 체계화하며, 종교 관습을 생활의 기존 흐름에 적응하기를 강요하였다.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고, 후일에 신약이 그리스어로 기록됨으로 엄청나게 도움을 받았다.
유대인과 달리, 그리스인은 어떤 종류의 불멸을 조금이라도 믿었고,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리스인에게 강하게 호소했다.
그리스 문화와 로마의 정치가 연속된 것은 지중해의 땅을 한 언어와 한 문화를 가진 제국으로 통합하였고, 서양 세계가 유일한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다. 기독교는 상급의 유일한 하나님 개념을 제시했고, 그리스인은 이를 쉽게 받아들였다.
3. 로마 제국 밑에서
195:3.1 로마의 정치적 지배가 자리 잡히고 기독교가 널리 퍼진 뒤에, 기독교인은 유일한 하나님을 가졌지만 제국이 없었다. 그리스인 및 로마인은 큰 제국이 있었으나 그에 어울리는 하나님 개념이 없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제국을 받아들였고, 제국은 기독교를 채택하였다. 이처럼 로마인은 통일된 정부, 그리스인은 통일된 문화, 그리고 기독교는 통일된 종교 사상을 마련해 주었다.
로마는 제국을 보편화함으로 민족주의 전통을 극복하였고, 역사에서 처음으로 다른 종족과 나라들이, 적어도 명칭으로는 하나의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신비종파의 약속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을 때, 기독교는 로마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사심 없다”는 낱말이 없는 언어를 가진 민족, 영적으로 갈급한 민족에게, 기독교는 신선하게 위로하는 말씀과 사람을 해방하는 힘을 가지고 다가왔다.
기독교가 박해 당하던 초기에 신자들이 죽을 때 취한 (의연한) 태도도 기독교에 대단히 큰 힘을 주었다.
예수가 아이들을 사랑했다는 가르침 때문에, 아기, 특히 여자 아이를 내버려 죽게 하는 관습이 없어지게 되었다.
195:3.6 기독교의 예배 방식은 유대인 회당에서 이어받았고, 이에 미트라 및 이교도의 의식이 가미되었다. 초대 기독교 교회의 뼈대는 유대교로 전향하고 기독교인이 된 그리스인들로 구성되었다.
서기 2세기는 세계 역사에서 좋은 종교가 서양 세계에서 발전하기에 좋은 때였다. 기독교는 황제를 받아들이고, 황제는 기독교를 채택하였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사람들이 많이 여행하였으며, 사상은 어디에 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를 채택하여 얻은 영적 추진력은 로마에서 도덕과 종족의 쇠퇴를 막을 수 없었다. 이 새 종교는 제국 로마에게 문화적 필수품이었고, 더 큰 의미에서 영적 구원을 얻는 수단이 되지 못한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무거운 세금, 무역 적자로 인하여 레반트로 금이 유출된 것, 여자 지위의 격하, 제도화된 교회의 폐단으로 인하여, 제도화된 국가 교회로부터는 좋은 종교조차 큰 제국을 구원할 수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조건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초기의 학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많이 유지했다. 예수의 이상의 얼마큼은 기독교의 발전에 희생되었어도, 2세기 말이 되자, 그리스ㆍ로마 세계의 거의 모든 위대한 지성인은 기독교인이었다. 거의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195:3.11 그리스인의 기독교 대신에 하늘나라 복음을 받아들였더라면, 로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때때로 추측해 본다.
4. 유럽의 암흑 시대
195:4.1 유럽의 암흑 시대에, 교회는 정치와 같은 편으로 지적ㆍ영적 쇠퇴를 함께 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대에 종교는 수도원 중심이 되었고, 금욕이 중시되고, 세속화된 이 종교와 나란히 신비주의의 흐름이 있었고, 이것은 범신주의와 비슷한, 환상 같은 영적 체험이었다.
어둡고 절망에 빠진 이 여러 세기 동안, 종교는 실질적으로, 다시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 되었다. 개인은 교회의 압도적 권한ㆍ전통ㆍ명령 앞에서 길을 잃었다. 신들 앞에서 사람을 위하여 좋게 말해줄 수 있는 ‘성인(聖人)’ 집단이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영적 위험이 생겼다.
그러나 기독교는 충분히 사회에 퍼지고 이교화되어서, 다가오는 암흑 시대를 막을 힘은 없었지만, 도덕적으로 어둡고 영적으로 침체된 이 오랜 기간에 살아남기 위하여 더 준비가 잘 되었다. 긴 겨울밤을 통해서 버티었고, 르네상스가 밝아오자, 기독교는 수많은 종파로 갈라졌다. 이 종파들의 다수가 이 발표문을 작성할 때 아직도 지속한다.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를 예수에 관한 종교로 뜻하지 않게 변질됨으로 시작된다. 헬라화, 이교화, 세속화, 제도화, 지적 쇠퇴, 영적 타락을 겪고, 도덕적 겨울잠을 자다가 절멸의 위협을 겪고, 그 뒤에 회생하고 분열되었으며, 최근에 비교적 회복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 기독교는 서양 민족들 사이에서 지난날에 겪었던 여러 위기보다 훨씬 더 불길한 존재를 위한 투쟁에 직면하고 있다.
종교는 과학과 유물론적 시대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벌어지는 이 거대한 싸움에서 예수의 종교는 궁극에 승리할 것이다.
5. 현대의 문제
195:5.1 20세기는 기독교와 모든 다른 종교가 풀어야 할 새로운 문제를 가져왔다. 문명이 높아지고, 사회가 안정되고, 물질적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하면서, “먼저 하늘에 있는 실체들을 찾는” 의무가 더욱 필요하게 된다.
진리를 토막토막 자르고, 격리하고, 고립시키고, 지나치게 분석했을 때 혼란스럽고 잘못 인도 되기도 한다. 살아 있는 진리는 살아 있는 영적 실체로서, 통째로 받아들일 때에야 진리 추구자를 바르게 가르친다.
종교는 사람에게 그의 신성한 영원한 운명을 계시하는 것이다. 종교는 순전히 직접 겪는 영적 체험이며, 다음의 다른 높은 형태의 생각과 구별되어야 한다.
1. 물질적 실체인 사물에 대한 사람의 논리적 태도.
2. 추한 것과 반대되는 아름다움을 미학적으로 이해하는 것.
3. 사회에 대한 책임과 정치적 의무를 윤리적으로 인식하는 것.
4. 인간의 도덕성을 느끼는 감각, 그 자체만으로는 종교가 아니다.
195:5.8 종교는 우주에서 믿음ㆍ신뢰ㆍ확신을 요구하는 가치를 찾아내도록 고안되어 있고, 종교는 결국 예배가 된다. 종교는 인간의 혼을 위하여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낸다. 초인간적 통찰력은 종교적 체험을 통해야 얻을 수 있다.
영적 실체에 근거한 도덕성 없는 사회 체계는 중력이 없는 태양계 보다 더 유지될 수 없다.
육체를 입고서 잠시 사는 일생에, 호기심을 채우려고 애쓰지 말라. 참아라! 값싸고 더러운 유혹에 빠지지 말라. 너의 에너지를 활용하고 정열에 고삐를 쥐라. 차분하고 진보하는 모험과 가슴 떨리는 발견이 가득한 생애, 끝없는 생애가 장엄하게 펼쳐지기를 기다리라.
195:5.11 사람의 기원이 어디 있든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바라보라. 예수가 어린아이들조차 사랑했다는 것, 성격이 큰 가치가 있음을 언제까지나 잊지 말라.
세상을 볼 때, 너희가 보는 악한 검은 조각들은 궁극에 선한 하얀 배경과 대조해서 나타나는 것을 기억하라. 너희는 단지, 까만 악의 배경에 초라하게 보이는, 하얀 선의 조각들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널리 퍼뜨리고 선포할 좋은 진리가 그렇게 많이 있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악에 골몰해야 하는가? 진리의 아름다운 영적 가치는 악의 현상보다도 더욱 유쾌하고 사람의 정신을 높여준다.
우리는 영적 통찰력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의무에 충성하고, 선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이러한 통찰력에 가까이 간다. 이 모든 가치 있는 것 중에서 사랑은 진정한 통찰력으로 이끄는 참된 안내자이다.
6. 유물론
195:6.1 과학자는 뜻하지 않게 인류를 유물론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유물론적이고 세속적인 공포가 끝날 때, 예수의 종교가 파산되지 않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하늘나라의 영적 은행은 “예수의 이름으로” 꺼내 쓰는 모든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을 주고, 도덕적 보장을 줄 것이다.
유물론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 어떤 명백한 갈등이 있든지 상관없이, 여러분은 다가오는 시대에, 주의 가르침이 완전히 승리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참 종교는 과학과 어떤 논쟁에도 말려들 수 없고, 어떤 면에서도 물질적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종교적 체험의 영적 통찰력과 지혜로운 해석이 없이 지식만 추구하는 것은 궁극에 비관과 인간의 절망으로 이끈다. 얄팍한 지식은 참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이 책을 기록할 때, 유물론 시대의 최악의 고비는 지나갔다. 물리적 현실주의 시대는 땅에서 사람의 일생에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현대 과학은 참 종교를―예수를 믿는 사람의 인생에서 풀이된 예수의 가르침을―다치지 않고 두었다. 과학이 이룩한 업적은, 인생을 그릇되게 풀이한 유치한 환상을 깨뜨렸을 뿐이다.
땅에서 사는 인생에 관하여 말하면, 과학은 양적 체험이요, 종교는 질적 체험이다.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려고 원인을 어디에 돌리는 것은 궁극의 것을 모른다는 고백이요, 끝에는 과학자를 시초의 큰 원인―파라다이스에 계신 우주의 아버지―까지 곧장 거슬러 올라가도록 인도할 뿐이다.
195:6.6 기적이 일어나던 시대로부터 기계 시대로 맹렬히 방향을 바꾼 것은 사람을 온통 불안하게 만든 것이 드러났다. 우주를 기계로 보는 거짓 철학의 영리함과 교묘함은 바로 그들의 기계론적 주장이 거짓임을 나타낸다.
기계론적 자연주의, 지각없는 세속주의는 순전히 물질에 흥미를 가진다. 이런 사상은 믿음과 희망과 영원한 보장이 빠져 있다. 현대 생활에서 하나의 큰 문제는 사람이 너무 바빠서 영적 명상과 종교적 경배를 위하여 틈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큰 수학자가 없다면, 수학적 우주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과학은 물질이 보존됨을 길게 논할지 모르지만, 종교는 사람의 혼이 보존되는 것을 입증한다―종교는 사람이 영적 실체와 영원한 가치를 체험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오늘날 유물론을 믿는 사회학자는 한 공동체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쓰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버려둔다. 반대로, 1천9백 년 전에, 배우지 못한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를 살펴보았고, 다음에 로마 제국 전체를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중세의 나팔 소리에 맞추어 영적 전투에 나서라고 현대인을 부르려는 종교 지도자들은 잘못을 저지른다. 거짓 종교는 현실로부터 도피를 의미할지 모르지만, 예수의 복음은 영적 진보가 있는 영원한 현실의 바로 그 문 앞까지 필사 인간을 데려갔다.
195:6.11 지성이 물질에서 "솟아났다"는 논리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 개념은 물리학이나 화학에 본래부터 있지 않다. 기계는 진리를 알기는커녕, 아는 능력도 없고, 의를 간절히 찾고 선을 소중히 간직할 능력이 없다.
과학은 물리적일지 모르지만, 진리를 헤아리는 과학자의 지성은 당장에 물질을 초월한다. 물질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자비를 사랑하거나 영적 실체를 보고 기뻐할 수도 없다.
사람이 (혼이 없고) 겨우 기계라면, 물질 우주에 대하여 획일적으로 반응할 것이요, 성격은 커녕 개성이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우주에는 기계적 작용이 있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고, 결정하는 작용이 있어도 그것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지성과 영이 함께 있지 않다면, 물질로 이루어진 유한한 우주는 궁극에 획일적이 될 것이다. 우주 지성은 물질 세계에서도 항상 자발성을 주입한다. (따라서 서로 다른 반응을 낳는다.)
195:6.16 어떤 존재의 어떤 영역에서도, 자유(창의성)는 영적 영향과 지성의 통제(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정도)에 정비례하여 커진다. 그래서 일단 네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길을 떠나면, 이는 하나님이 너를 이미 찾았다는 확고한 증명이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모든 과학적 발견은 우주에 자유와 획일성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발견된 물건은 실재하며, 획일적인 듯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사물로서 규명될 수 없다.
7. 유물론의 취약성
195:7.1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기계론적 우주론(영이 없고 우주가 기계처럼 작용한다는 이론)과 같이 허약한 이론에 넘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과학은 종교적 믿음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다 미신을 퇴치하는 것에 전념하는 것이 좋다.
종교가 영적 면에서 사람을 돕는 것 같이, 과학은 물질 면에서 사람을 도와야 한다. 참된 과학은 참된 종교와 오래 다툴 일이 없다. “과학적 방법”은 물질적 성과를 재는 척도일 뿐이요, 영적 실체와 종교적 체험의 평가에는 쓸모없는 도구이다.
현대 기계론자의 모순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단지 물질적 우주이고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기계 인간은 자신이 기계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기계과학이 물질적 혼란과 절망을 낳은 것, 과학자들의 잘못된 초물질적인 통찰력과 모순되는 유물론적 우주 개념들은 자신들의 지성에 영이 깃드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영원하고 무한한 파라다이스 가치, 곧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가치는 여러 시공 우주에서 현상의 사실 안에 숨겨져 있다. 영적으로 태어난 필사자의 믿음의 눈은 이러한 영적 가치를 감지하고 분별해야 한다.
영적으로 진보하는 실체와 가치는 깃드는 조절자, 사람의 지성 속에 사는 하나님 영의 영적 예측이다. 희미하게 본 "상대성"의 발견을 집적거리다가 하나님이 영원ㆍ무한하다는 너희의 개념을 잃지 말라.
195:7.6 이것이 물질적 우주일 뿐이라면, 물질적 인간은 결코 기계적 성격의 개념에 도달할 수 없다. 우주에 대한 바로 이 기계론 개념은 지성의 비물질 현상이다.
필사 인간이 가진 얼마큼 진화된 지성 작용은 일관성이나 지혜를 지나치게 부여받지 않는다. 사람의 자만은 가끔 이성을 뛰어넘고 자신의 논리를 벗어난다.
가장 비관적인 유물론자의 바로 그 비관주의 자체가, 우주가 전적으로 물질이 아닌 것을 증명한다. 우주가 참으로 유물론자가 보는 바와 같은 우주라면, 기계적 인간은 바로 그 사실을 도무지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의 기계는 다른 기계의 성질이나 가치를 의식할 수 없다.
생명과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철학은 과학일 수 없으니, 과학은 오직 물질과 사실만 다루기 때문이다. 철학은 불가피하게 과학을 초월한다. 사람은 자연 속에 있는 물질적 사실이지만, 사람의 생명은 지성의 통제 속성과 영의 창조 성질을 나타내기 때문에 물질 수준을 뛰어넘는다.
사람이 기계론자가 되려는 노력은 지능과 도덕 면에서 자살하려고 쓸데없이 노력하는 비참한 현상을 나타낸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195:7.11 우주가 단지 물질이고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이런 우주의 기계 작용을 가정하는 과학자에게 용기를 줄 아무런 과학이 없을 것이다. 오직 기계를 초월하는 지위를 가진 어떤 개체가 그러한 과학적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우주 실체가 겨우 하나의 광대한 기계라면,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평가하기 위해서, 그 우주 바깥에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사람이 겨우 기계라면, 이 사람이 자기가 기계라는 것을 어떻게 안다고 주장하는가? 사람이 스스로 의식하여 자신을 평가하는 체험은 결코 단순한 기계의 속성이 아니다. 사람이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기 전에, 먼저 도덕을 아는 성격이어야 한다는 것이 참말이다.
유물론의 바로 그 주장은 그러한 독단을 주제넘게 부르짖는 지성이 초물질 의식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에게 봉사하고, 영원히 진보할 목표로서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와 같이 되려고 애쓰는 숭고한 과제를 택하려고 정열을 가지고 자기의 일생을 자극하지 않는다. 기계는 결코 지능도 감정도, 미학도 윤리도, 도덕도 영적 성향도 없다.
예술은 사람이 기계론적 존재가 아닌 것을 증명하지만, 사람이 영적으로 불멸함을 증명하지 못한다. 예술은 필사자의 상물질이요, 물질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에 있는 분야이다. 시는 물질적 현실을 벗어나 영적 가치들을 향하려는 노력이다.
195:7.16 높은 문명에서는 예술이 과학을 인간답게 만들고, 참 종교는 예술을 영적으로 변화시킨다. 참된 예술은 인생에서 물질인 것을 효과 있게 조종한다. 종교는 인생에서 물질적 사실을 고상하게 변화시키고, 예술의 영적 평가를 멈추지 않는다.
자동 인형이 자동 기계론라는 철학을 상상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다른 동료 자동 인형에 대하여 그런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제넘게 생각하다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
과학자를 인식하지 않으면 물질 우주에 대한 어떤 과학적 해석도 가치가 없다. 예술가를 인식하지 않으면, 예술에 대한 어떤 평가도 진정한 평가가 아니다. 신자의 실체 체험이 없이는 종교가 존재할 수 없다. 온 우주는 스스로 계시는 이, 그 우주를 만들고 관리하는 하나님이 없이는 의미가 없다.
기계론자―인본주의자―는 물질의 흐름과 함께 떠내려가는 성향이 있다. 유심론자와 심령주의자는 에너지 흐름의 과정, 겉보기에 순전히 물질적 과정을 수정하려고 지능과 활력을 가지고 감히 노를 젓는다.
과학은 지성이 가진 수학으로; 음악은 감정의 박자를; 종교는 무한자 상급 멜로디가 시-공간에서 조화를 이룬 혼의 영적 리듬이다.
195:7.21 언어에서 알파벳은 유물론적 메카니즘이지만, 성격자의 천 가지 다른 생각을 담는다.
우주는 과학자가 발견하고 과학으로 여기는, 불변하는메카니즘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러한 우주 현상을 지켜보는 과학자와 같다. 우주는 예술가의 작품, 생명 없는 작품이 아니라, 물질세계를 초월하려고 애쓰는 예술가와 같다.
과학이 아니라 과학자가 진화하고 살아 있는 우주를 깨닫는다. 예술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가 모론시아 세계의 존재를 보여준다.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실천하는 자가 영원히 진보하면서 마주치게 될 영 실체가 존재함을 입증한다.
8. 세속적 전체주의
195:8.1 사람이 유물론과 기계론을 대체로 정복한 뒤에도, 20세기의 세속주의(비종교주의)의 지독한 영향은 수많은 사람이 영적 체험을 무시하게 만들 수 있다.
세속주의의 아버지는 19세기와 20세기의 무신론적 과학의 태도였다. 현대 세속주의의 어머니는 중세의 전체주의적 기독교회였다. 세속주의는 제도화된 기독교회가 서양 문명을 완전히 지배한 것에 대한 반발로 비롯되었다.
이 계시가 있을 때, 유럽과 아메리카의 생활에서 지배하는 지적ㆍ철학적 풍토는 명백히 세속적이다―인본주의이다. 3백 년 동안, 서양 사상은 차츰 세속화되었고, 종교는 대체로 예식을 치르는 행사가 되었다.
전체주의적 교회의 압박으로부터 서양 민족의 생각을 해방하는 데는 세속주의의 막강한 영향력이 필요했지만, 세속주의는 현대인 사이에서 신을 모르는 세력을 굳히려고 위협한다. 독재 정치를 행하는 국가는 과학적 유물론과 세속주의 철학의 산물이다. 제도화된 교회의 압제에서 사람을 해방하자마자, (공산 국가에서) 세속주의는 사람을 전체주의 국가의 노예로 만들었고 (서양 국가에서) 정치ㆍ경제적 노예가 되는 처지로 팔아넘길 뿐이다.
유물론은 하나님이 계심을 부인하고, 세속주의는 아예 하나님을 무시한다. 20세기의 세속주의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심하라! 인간 사회에서 신이 없는 이 세속주의 철학은 오직 불안, 전쟁, 세계적 재난을 일으킬 뿐이다.
195:8.6 세속주의는 결코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서양 문명은 세속주의로 저항한 결과로서 오늘날 많은 자유를 누린다. 세속주의의 큰 잘못은 이것이다: 교회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뒤에, 세속주의자들은, 때때로 말없이, 때로는 드러내놓고, 하나님에게 반란을 시작하였다.
서양 문의 전례 없던 물질적 진보는 세속주의의 반란 덕분이다. 이 반란이 지나쳐 하나님과 참 종교를 놓쳤기 때문에, 세계 대전과 국제적 불안이라는 수확을 거두었다.
세속주의 반란이 가져온 축복, 즉 민주 정치와 시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 안에서 가진 믿음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세속주의자는 과학을 촉진하고 교육을 향상하기 위하여 참 종교를 적대할 필요가 없었다.
20세기에 얻은 이익 뒤에는 과학과 세속주의 뿐 아니라, 또한 인식되지 않고 인정받지 않은, 나사렛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의 영적 작용이 있다.
이 세속주의적 인간 사회는 비할 데 없는 물질적 업적을 이루었어도,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하나님 적대주의가 이렇게 붕괴하는 데 저항하는 주요 응집 세력은 민족주의이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세계 평화에 으뜸가는 장벽이다.
195:8.11 세속주의가 본래부터 가진 약점은 세속주의가 정치와 권력을 위하여 윤리와 종교를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면서 사람의 형제 정신을 이룩할 수 없다.
세속주의의 앞날이 밝으리라는 사회적ㆍ정치적 낙관은 망상이다. 하나님 없이는 자유와 해방도, 재산과 재물도, 평화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ㆍ교육ㆍ산업ㆍ사회의 완벽한 세속화는 오직 재난을 불러올 뿐이다. 20세기의 첫 30년 동안에 유란시아는 기독교 시대를 통틀어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인간을 죽였다. 아직도 더 끔찍한 파괴(*2차 대전)가 다가올 것이다.
9. 기독교의 문제
195:9.1 여러 세기를 통해서 유물론과 세속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흘러내려온 진리의 흐름을 간과하지 말라. 미신에 저항하는 현재의 반란이 끝났을 때, 예수의 복음에 담긴 진리는 더 좋은 길을 밝게 비쳐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계시하는 것은 유물론적 세속주의 제국의 세계 지배를 뒤엎을 운명을 가지고 있다. 유란시아는 도덕적 각성과 영적 깨우침이 있는 시대의 직전에 지금 부르르 떨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수정되기는 했어도, 태어날 때의 신비 종파, 암흑 시대의 무지와 미신을 견디고 살아남았고, 지금도 20세기의 유물론ㆍ기계론ㆍ세속주의를 천천히 이기고 있다.
종교는 새로운 지도자, 예수의 가르침만 따를 영적인 남녀가 필요하다. 기독교가 사회 및 물질 문제에 분주하고 영적 사명을 소홀히 하면, 새 선생들이 나타날 때까지 영적 부흥은 오래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영에게서 태어난 이 사람들은 사회ㆍ도덕ㆍ경제ㆍ정치 면에서 세계를 다시 조직하는 데 필요한 지도력과 영감을 재빨리 공급할 것이다.
왜곡되고 때묻은 현대 기독교의 참된 최초의 기초를―예수의 참 일생과 가르침을―다시 발견할 때가 왔다.
195:9.6 현대의 개화된 사람들은 강한 종교적 확신에 지배받기를 두려워한다. 현대의 총명한 남녀는 예수의 종교가 그들에게 무슨 변화를 일으킬까 두려워 피한다. 예수의 종교는 신자를 변화시키며, 아버지의 뜻을 알고 행하는 데 일생을 바치고, 형제를 위하여 사심 없이 봉사하기를 요구한다.
형식이 된 종교가 열매 없는 것을 알아차린 뒤에야, 사람은 하늘나라 복음으로 향할 생각을 가질 것이다.
세상은 직접 체험하는 종교가 더욱 필요하다. 기독교조차 예수에 관한 종교일 뿐 아니라, 대체로 남(사제)의 손을 빌려서 맛보는 종교이다. 땅에서 사신 그대로 예수를 보고,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그의 가르침을 알 수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큰 깨우침을 얻을 것인가!
기독교는 인간의 욕심의 도전 앞에서 감히 이상을 낮춰 버렸다. 기독교는 지나친 형식 치중, 지나친 조직, 그리고 다른 비영적 경향 때문에 천천히 죽을 위협을 받는다.
기독교는 형식 치중, 지나친 조직, 지성의 중시, 그리고 다른 비영적 경향 때문에 천천히 죽을 위협을 받는다.
195:9.11 이른바 기독교는 종교적 관념과 관습 뿐 아니라 사회 및 문화 운동이 되어 버렸다. 현대 기독교의 흐름은 여러 고대 이교도의 늪과 많은 야만인의 수렁에서 물을 받고 있다.
10. 앞날
195:10.1 기독교는 정말로 이 세상에 크게 기여했지만, 이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이다. 원시 기독교의 부흥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익하다. 너희가 있는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대 문화는 예수의 일생의 새로운 계시로 영적 세례를 받고, 영원한 구원을 주는 복음을 새로 이해함으로 빛을 받아야 한다.
예수의 일생의 아름다움과 숭고함, 인간성과 신성은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놀라운 그림이었다. 사람 모습을 입었던 하나님의 일생으로부터 감히 영적으로 사람을 묶어놓는 신조나 신학 체계를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항상 기억하라―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필요하다. 우주의 최종에 이르는 신성한 운명을 얻는 체험, 영원한 성격 체험을 완전히 마침내 성취하는 데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필요하다.
“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살아 계신, 사랑의 영이라는 선언 다음으로, 예수가 일찍이 말씀한 가장 위대한 선언이었다.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강제나, 의무, 관습으로 처음 십리를 가는 것이 아니다. 아낌없이 봉사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헌신적 태도로 십리를 더 가는 것이다. 사랑으로 형제를 붙잡고 필사 존재에서 상급의 신성한 목표를 향하여 영적 안내를 받도록 형제를 계속 설득하려고, 예수처럼 손 뻗는 것을 나타낸다. 기독교는 진정하게 십리를 더 가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인류는 시들고, 도덕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넘어진다.
195:10.6 예수의 하늘나라 형제애가 영적으로 거듭남으로, 새롭고 변화된 인간 사회를 건설하려는 모험에 대한 부르심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기쁨에 떨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예수의 친구로서 땅에서 돌아다니던 시절 이후로 이처럼 감동받은 적이 없다.
하나님이 존재를 부인하는 어떤 사회 체계도 인간 문명이 진보하는 데 이바지할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는 세분되고 세속화되어 자체가 더욱 진보하는 데 가장 큰 단일 장애물이 된다. 이것은 특히 동양의 경우에 참말이다.
교회 중심주의는 하늘나라의 영적 관계에서, 사람의 형제 정신에 담긴, 예수의 신앙 친구들의 생생한 믿음, 성장하는 정신, 직접 겪는 체험과 공존할 수 없다. 20세기의 기독교회는 진정한 복음―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즉시 진전시키는 길에 큰 장애가 되지만,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이른바 기독교회를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성품과 일치되는 모든 면에서, 땅에서 일생에 그가 한 일의 대변자, 현존하는 최선의 대변자로서 교회를 육성해 왔다.
기독교회가 오직 주의 계획을 감히 지지하려고 한다면, 무관심한 듯이 보이는 수많은 젊은이가 그러한 영적 사업에 지원하려고 앞으로 달려 나오고, 이 큰 모험을 서슴지 않고 끝까지 마칠 것이다.
195:10.11 기독교는 자체의 표어에 담긴 운명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갈라져 서로 싸우는 집은 버틸 수 없다.” 비기독교 세계는 여러 종파로 갈라진 기독교 세계에 도저히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교회―예수의 형제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영적이며, 단결된 통합을 특징으로 한다. 영적 연합은 살아 계신 예수와 믿음의 연합의 열매이다.
그러나 20세기의 기독교조차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타고난 결함과 얻은 결함이 있어도, 기독교는 힘찬 도덕적 감정을 가진,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성을 움직이려고 아직도 궁리한다.
그러나 교회가 상업과 정치에 말려드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진심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제도화된 강력한 교회가 새로 태어난 종파의 숨통을 때때로 감히 틀어막고 어쩌다 정통 아닌 옷을 걸친 듯이 보이는 진리를 지닌 사람들을 박해하려고 한 것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영적으로 게으른 많은 사람이 예식과 성스러운 전통의 권위있는 종교를 갈망한다. 아직 인간의 진화와 영적 진보가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분열은 예수의 복음을 동양 민족들에게 가지고 가려고 할 때, 심각한 약점을 드러낸다. 이 민족들은 기독교와 얼마큼 달리 예수의 종교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기독교는 갈수록 더 예수에 관한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195:10.16 유란시아의 큰 희망은 예수의 유익한 말씀을 새로 확대하여 발표함으로 예수를 새로이 드러내는 것에 있다. 수많은 신자들이 사랑의 봉사로 영적 연합을 이룰 것이다.
모든 교육의 목적은 인생 최대의 목적, 즉 훌륭하고 잘 균형된 성격의 발달을 촉진하고 육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기초 위에 종교는 필사인의 일생을 더 충만하고 보람 있게 만들며,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향상하는 데도 영적 자극을 줄 수 있다.
기독교는 즉석에서 만들어진 종교이며, 따라서 저속 기어에서 작용해야 한다. 고속 기어의 성과는 예수의 종교가 드러나고 널리 퍼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한 목수의 평범한 제자들이 3백 년 안에 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인들을 설득한 것을 보면, 기독교는 막강한 종교이다.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을 잘 깨달을 수 있기만 하면, 현대인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기독교가 큰 장애를 겪는 것은 온 세상의 지성인들이 보기에 기독교가 서양 문명의 사회 체계, 산업 생활, 도덕 기준의 일부라고 그 정체성이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195:10.21 현대 기독교의 희망은 서구 문명의 사회 체계와 산업 정책을 높이는 것을 중단하고,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은 형제라는 복음을 다시 배우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