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선 서산 방문기(訪問記)
8월 20일. 날은 화창하고 구름은 뭉게뭉게 내 맘도 두둥실 여행을 떠나기 제격인 날이다. 동선이를 만나러 막 집을 나서려는 차에 현숙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현충원 앞길에서 현숙이를 만나 이미 장만해 놓고 보관만 해 왔다는 동선이 딸 율이 옷을 건네 받았다. 내일이 개학날이라며 함께 못 가는 걸 아쉬워 하는 현숙이와 배웅 겸 작별 인사를 했다. 대전에서 공주,유구,예산을 거쳐 서산을 향해 가는 32번,45번 국도. 청양을 거쳐 홍성으로 가는 39번 국도에 비해 그다지 볼만한 풍경은 없지만 그래도 이 길이 가장 빠르다. 혼잣몸이라면 일부러라도 그 길을 가겠는데 몸이 불편한 아내와 애들과 함께 가니 내 욕심대로만 하기도 뭐하다. 예산 지나 삽교에서 덕산 가는 새로 난 길은 고속도로처럼 포장이 잘 되어 있다. 옛날 같으면 구불구불 엿가락처럼 늘어져 30분 이상 넘어야 했던 가야산 고갯길도 이제는 시원하게 뚫린 터널을 지나 10분이면 달릴 수 있으니 세상 참 좋아졌다. 하지만 이것도 내년 4월쯤 완공되는 당진-대전간 고속도로가 생기면 당진-대전간을 2시간에서 1시간으로 당길 수 있다니 별 내세울 일도 아니게 생겼다. 그런데 편하게 달리는 차 안에서도 멀쩡한 산을 깎아내리고 구멍을 뻥뻥 뚫어대서라도 닥치는 대로 길을 만들어내는 우리네 인간의 탐욕을 생각하면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그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져갔을 것인가.
해미읍성 앞길은 한 달전에도 하던 뭔 놈의 도로공사를 여태껏 하느라 어수선하다. 예전 같으면 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읍성 성벽에 올라 한 바퀴 휘- 돌아 내려왔건만 이것도 일행의 상태를 보니 난망하다. 아내와 아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고 날은 뜨거워 차를 마땅히 세우기도 어렵겠다. 그래, 벗들이 눈 빠져라 기다리는 목적지에 한시라도 빨리 가는 게 도리겠다 생각하니 아쉬움이 조금은 달래지며 페달을 밟는 발 끝에 힘이 들어간다. 문득 떠오르는 공자님 말씀. ‘有朋而自遠方來하면 不亦樂乎’ 유붕이 자원방래니 불역낙호라 하지 아니했는가.
서산에는 동선이 말고도 알고 지내는 지기들이 몇몇 더 있지만 목원대 국어교육과 다닌 이희영이란 친구랑 막역한 사이다. 동선이랑 음암면 부장리에서 함께 자란 부랄 친군데 대학 다닐 때 동선이 통해 알고서는 여지껏 가족까지 모두 가깝게 지내고 있다. 이른바 현장일로 잔뼈가 굵어서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지만 얼마 전에는 중동 두바이까지 갔다 오고 지금은 당진 화력발전소에 다니면서 부업으로도 이것저것을 하는 모양이다. 우리 친구들이 농 쳐서 ‘이구라’라고 부를 만큼 입담이 걸죽하고 무궁무진한 친구다. 입을 열면 한 번에 한 명씩 고은 선생의 ‘만인보’를 연상케 하는 사람이야기이며 세상사가 끝도 없이 나오는데 너무도 구구절절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농인지 나는 20년을 넘게 만났어도 여지껏 가늠하기 어렵다. 이 친구가 아침부터 전화를 해서 울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묻길래 아무 음식이나 집에서 먹는 대로 그냥 먹으면 되지 됐다고 했는데 오는 길에 또 전화가 왔다. 뭔 재주로 직장에서 나왔는지 대낮부터 아내랑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단다. 근데 곤란한 일이 생겼다. 동선이한테서도 다시 전화가 와서 명신이가 저녁을 준비하니까 자기집에서 꼭 저녁을 먹잖다. 이런 낭패다.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온 친구 면목도 있어서 동선이네는 잠깐 들러 명신이랑 애기 율이한테 얼굴도장 박고 희영이네로 동선이랑 함께 가서 저녁을 먹을 요령이었는데 말이다. 명신이가 애기 율이까지 데리고 움직이기도 뭐하고, 거기서 음주를 거나하게 한 뒤에 잠은 다시 동선이네로 넘어가서 자면 되니까. 하하 여기서도 이놈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서 탈이다. 다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랑 가족에게 밥 한 끼 직접 지어 대접하고 싶은 그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아내와 의논 끝에 일단은 우리 서산 방문의 일차 목적인 율이 아빠 엄마네서 저녁을 먹고 희영이네서는 음주를 하기로 결정하고 전화를 했다. “그려,그렇게 혀.”라고 말했지만 못내 서운한 듯한 친구의 헛헛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느껴졌다. 허나 어쩌랴.
명신이가 율이를 안고 마당까지 나와 반겼다. 이름처럼 예쁘고 지혜롭게 생긴 ‘율’이가 낯선 손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기의 눈매가 서늘하고 깊었다. 한자로 빛날 율燏자를 생각했는데 인명용 한자가 아니라 그냥 한글 이름으로 올렸단다. 어느 쪽이든 예쁘고 흔치 않은 이름이라 기억에 오래 남는다. 우리 애들은 율이가 예뻐 죽겠다며 서로 안아보겠다고 지들끼리 싸우고 난리를 편다. 율이는 생각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전화로 동선이가 율이가 잘 아프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엄살이었나 보다. 마음이 놓였다. 작년 여름에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태안 장례식장에서 이 부부를 잠깐 보았는데 웬일인지 동선이만 안에 들어오고 명신이는 차 안에서 기다리더라니 그게 다 율이가 생기고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느라 그랬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20년 가까이 오직 둘이서만 살아 온 동선이, 명신이 부부에게 율이가 얼마만큼 크고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말해서 무엇하리. 마흔을 훌쩍 넘어 가졌지만 이토록 건강하고 예쁘게 태어난 율이. 남들이 모두 염려하고 망설일 때 무엇이 이 부부에게 모든 이의 염려를 기우로 만들고 이토록 건강하고 예쁜 아기를 태어나게 할 힘과 용기를 주었을까. 다 지나간 일이지만 10여년전 불의에 당한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서 20여일 동안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모두가 마음을 거두려 할 때 기적적으로 살아나 지금에 이른 동선이의 신산하고 파란만장한 삶. 그 충격과 절망의 끝에서 모든 아픔을 삭이며 묵묵하게 자리를 지켜낸 명신이의 인내와 용기가 또다시 율이를 낳게 한 힘이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는 마흔 넘어 아이를 낳는 결심조차도 쉽지 않았을 텐데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오직 자연 분만과 모유 수유만을 생각했다는 명신이의 말이 그걸 담담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율이를 낳고 제대로 몸조리를 못 해서인지 명신이는 몸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출산 무렵 친정 어머니까지 몸이 많이 편찮으셨고 주변에서 마땅히 제대로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 그랬다는데, 요즘 한약을 지어 먹고 조금씩 원기를 회복하고 있는 중이란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충분하게 휴식을 취하면서 영양을 섭취하면 좋겠지만 어디 우리네 생활이 그렇게 넉넉하게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아무쪼록 산후 조리 때문에 나중에 몸이 힘들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텐데 동선이 어깨가 무겁다.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 온 동선이와 반가운 해후를 하였다. 아내가 서울 병원에 있을 때 올라와서 본 이후로 한 두어 달 된 것 같다. 동선이네는 서산 시내에서 좀 벗어난 호숫가에 자리잡아 호젓한데다가 예전에 가든을 하던 집이라 건물과 마당이 모두 넓고 큼지막하여 시원하다. 대신에 시꺼멓고 손가락만하게 큰 산(山)모기의 위세가 대단하다. 나도 집안에서 한 방을 물렸는데 크게 부풀어 올라 놀랐다가 생각보단 가려움이 오래 가지 않아 혼자 속으로 웃었다. 100평도 훨씬 더 넘어 보이는 마당에 잡초가 무성해 모기가 많다고 명신이가 동선이더러 풀 좀 뽑으라고 성환데 동선이 대답이 걸작이었다. “허, 이걸 혼자 뿝으면 무슨 재민겨. 사람들 모아서 막걸리라도 마시며 같이 뿝아야 재미지.” 이참에 마당의 풀을 다 뽑아 버리자고 아들 민규를 불러 장갑까지 끼고 마당으로 나섰다. 풀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지 않아 쑥쑥 뽑히는 게 설렁설렁 해도 반나절이면 끝날 일 같았다. 그런데 날이 어둑해지면서 모기 때문에 더 못 한다고 들어가자며 동선이가 연신 만류하고 나선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 집을 아예 세 놓고 시내 쪽으로 이사를 갈 지 모른다는 속내를 넌지시 비친다. 한가하게 집에 들어 앉아 있는 것도 아닌데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를 집 마당에 잡초 뽑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랴. 마당 한 켠에는 지인이 찾아와 커다란 다라를 땅에 묻고 수련까지 근사하게 심어 만들어 줬다는 작은 연못이 수줍게 숨어 있었다. 무성한 풀더미에 가려있어 미처 몰라볼 뻔 했다. 문득 떠오르는 옛 기억 하나. 그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건네준 공책 한 켠에 그림과 함께 적혀 있던 쌩떽쥐베리 <어린 왕자>의 한 구절.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 마당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연못이 숨어 있기 때문인 거야. 그 땐 그게 무슨 말인 줄 알 길이 없었는데 이렇듯 살아가며 조금씩 그 뜻을 헤아려 가게 된다.
명신이 음식 솜씨는 정갈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맛깔스러워 사람을 상에서 쉽게 떨어지지 못 하게 한다. 아내 때문에도 굉장히 싱겁게 먹는 우리 집 음식맛을 생각하면 간이 다소 강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멸치와 다시마를 끓여 우려낸 육수에 동선이네 본가에서 담근 재래식 된장을 풀어 간을 낸 콩나물 두부 된장국의 시원함과 맛깔스러움은 일품이었다. 아내는 육수를 부어 잘 익힌 열무김치 맛에 연신 탄복한다. 이젠 조미료 쓰지 않고 만들어 내는 음식 아니면 어디서든 쉽게 음식에 손이 가지 않는 내 입맛도 제법 까탈스러운데 나는 명신이 손맛이 마냥 정겹고 편하다.
저녁을 먹은 뒤 우리집 식구 모두 동선이랑 시내에 있는 희영이네로 찾아갔다.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길로 부부가 함께 밤 늦은 먼 길을 달려와 위로해 주던 고마운 친구. 이희영. 이번에도 먼 곳에서 찾아 온 친구를 위해 비장의 무기를 내놓는다. 들어나 봤는가. 산삼주. 인삼주도 아니고 장뇌삼도 아닌 진짜 산삼주란다. 세 줄기로 뻗은 것이 진짜 상품가치가 있는 거라는데 비록 줄기가 두 줄기 뿐이라지만 산삼주라는 말만으로도 잔을 잡은 손이 다 떨렸다. 하하. 원래 몸에 열이 많아 한 겨울에도 별로 춥지 않은 나인지라 인삼 쪽에는 별로 애정이 없었는데 산삼주의 당당한 풍모에는 나도 모르게 움츠려든다. 인삼주에 비해 훨씬 은은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이 과연 산삼주다. 뒤끝에 남는 향기의 그윽함은 구증구포하여 덖어낸 작설차의 그것에 못지 않다. 희영이 아내가 렌지에 구워 낸 서산 육종마늘까지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다만 이 기막힌 맛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다른 벗들의 얼굴이 어른거려 자꾸 마음에 걸려온다. 함께 올 뻔했던 현숙이며 술 좋아하는 희제, 태관이, 주형이, 그리고 모든 친구들이 이 자리를 함께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서도 아들 성재 숙제 도와주다 얼떨결에 전화 받은 양동철이한테 산삼주 타령을 하며 약을 올리고 김포 사는 최희도한테 전화 걸어 돌아가며 애들마다 한마디씩 또 산삼주 타령을 늘어 놓게 했으니 내 심성이 가히 고약하다. 밤이 깊어 가는데 내일 아침 출근이 염려됐는지 서둘러 대리운전을 부르러 일어서는 동선이가 희영이는 내심 야속해 보인다. 나도 오늘밤은 동선이네서 묵기로 한지라 어쩔 수 없이 함께 파해야 하는데 집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일어나는 마음이 아내나 나나 희영이 내외에게 못내 서운하고 미안했다.
동선이네로 돌아오니 명신이는 벌써 잠자리를 다 마련해 놓고 율이랑 잠이 들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뭔가. 그 추억의 모기장이다.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놀러 간 할머니댁에서 으레 올망졸망한 사촌들 대여섯과 낄낄거리며 뒤엉켜 잠자던 모기장 속의 추억, 운 나쁘게 모기장 쪽에 바짝 붙어 잠을 자고 나면 모기장이 다 소용없다. 아침 내내 여기저기 퉁퉁 부풀어오른 몸뚱이를 긁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시골만 다녀오면 온통 모기 물린 자국에 부스럼 투성이 되지만 그래도 여름방학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며 꿈꿨었던가. 그 고색창연한 추억의 모기장을 예서 보다니 가슴이 슬쩍 아려온다.
아내와 아이들을 재워 놓고 동선이랑 둘이 동네 슈퍼 앞 파라솔에 앉아 캔맥주에 오징어구이로 조촐한 2차를 벌였다. 동선이가 사람들의 이상(理想), 친구들의 이상과 변화, 그리고 자신의 이상에 대해 말했다. 정당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 친구에 대해 말하며 머릿속의 생각만이 뭐가 중요하냐며 언성을 높였고 이 놈의 자본주의가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그걸 넘어설 수 있고 넘어서야 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나는 자신을 좀더 낮추고 위에서 내려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야 좀더 많은 사람이 함께 그 길을 가지 않겠냐고 말했다. 결코 위에서 그대로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얼마 전 사회당 일을 하는 오래 된 친구를 만나 나눴던 얘기들이 떠올랐다. “어떻게 할 거니? 너희 사회당은 어떻게 되는 거야? 통합은 안 하는 거야?” 집행부를 비롯한 상당수가 진보신당으로 옮겨 간 사정을 알고 물어본 말인데 “그쪽에서 관심이 있남? 그냥 이대로 끝까지 가는 거지 뭐.” “......” 경우가 다르지만 이 친구의 삶과 동선이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다가왔다. 사고가 나기 전 늘 견결하고도 원칙적이면서 과격하기(?)까지 했던 동선이의 삶을 알기에 그토록 큰 사고가 나고서도 이렇게 거뜬하게 회복된 동선이의 정신적(!) 건강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총과 총이 맞서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동선이의 믿음에 대해 적지 않은 염려도 생기는 것이다. 80년대라면 지금 동선이가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진보신당>이라는 것조차 가당하기나 했을까? 시간은 흐르고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다. 물론 큰 눈으로 보면 그 안에서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변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길에서 자신의 신념을 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기 위해 최선을 다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사이에서 쉴 새 없이 흔들리며 묵묵히 현실을 견뎌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일신의 영달을 위해 신념을 헌신짝처럼 내팽겨치고 자본과 권력에 기생하는 <김문수>,<이재오>류 따위는 논외로 치더라도 누가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이 신념을 지키는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정녕 견결한 신념을 지켜가는 이들과 현실을 묵묵하게 따라가는 이들이 행복하게 만나서 서로를 함께 이끌어 갈 수 있는 길은 없단 말인가? 우리 사회에서 진보신당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뿌리내리는 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 쪽을 외면하고 나머지 한 쪽만으로 어떻게 대중정당을 한단 말인가? 정당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 친구의 아픔과 고민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애정으로 끌어안고 함께 갔을 때 동선이의 견결한 신념도 한층 빛을 발하고 무르익은 성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내 자신의 삶이 변변찮고 부끄러우니 이 얘기는 이만 여기서 접을 수밖에.
다음날 아침을 먹고 동선이는 출근을 하고 명신이랑 율이를 보건소에서 하는 아기 경혈 맛사지 강좌 에 태워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이 조용하고 쓸쓸하다. 정작 주인들은 다 밖에 나가고 우리 식구가 주인인 것처럼 집에 있는 게 겸연쩍고 우습다. 인터넷을 켜고 까페에 들어가 보니 대전 번개모임에서 찍은 사진들이 올라와 찬찬히 들여다 보며 한동안 댓글을 달았다. 비록 서로가 자리한 곳이 다를지라도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를 감싸 안고 이해하고 북돋아 주기 위해 애쓰는 친구들이 이렇게나 많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행복해진다. 이제껏 잘 해왔지만 앞으로 더 잘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친구들 만남은 이해관계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여럿이 하는 것이다 보니 반드시 모두를 위해 묵묵하게 자기를 희생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누군가가 그것을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만남은 오래 갈 수 없다. 그런 생각만 하면서 아무도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임이 이렇게 발전해온 데는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희생해 온 재찬이,한국이,희제 같은 친구들의 공이 큰 것이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사랑이다. 잘난 친구여서가 아니라 비록 아무리 못났을지라도 ‘친구의 아픔과 슬픔까지도 등에 짊어지고 가는 자’ 그것이 친구가 아니겠는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상처 난 내 영혼이 쉬어가게끔 마련된 두 자리, 그 중에 하나가 가족이며 하나가 바로 친구이다.
명신이가 돌아와 잘 익은 수박 한 덩어리를 쪼개먹은 뒤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다. 며칠 더 쉬다 가지 왜 벌써 가냐며 붙잡는 명신이 손길이 애틋했지만 저녁에 대전에서 학원 회의가 잡혀 있는지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오후에 잡혀진 율이 백일사진 찍는 것 아니라면 어제 아쉽게 헤어진 희영이네 애들이랑 해서 다 같이 개심사나 용현계곡으로 바람이라도 쐬러 갈 텐데 그도 여의치 않아 그냥 우리 가족만 나오게 되었다. 나오는 길에 동선이가 일하는 장애인심부름센터를 찾아가서 동선이와도 작별인사를 나눴다. 9월 4일경에 논산에서 충남도 장애인 체육대회가 있어 논산에 온다고 하는 데 잘하면 그때 다시 한번 볼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율이가 건강하고 슬기롭게 무럭무럭 잘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명신이도 하루빨리 예전같이 순수 자연미를 자랑하던 옥같은 피부, 건강미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와 동선이랑 율이랑 세 식구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기를 마음으로 빌고 또 빌며 서산을 떠났다.
해가 벌써 중천을 넘어서고 점심을 먹지 않고 출발한지라 어디 점심을 해결할 만한 데를 먼저 찾아야 했다. 개심사 쪽으로 갈까 마애삼존불 있는 용현계곡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운전대 잡은 내가 개심사쪽으로 밀어 부쳤다. 용현계곡의 번듯한 음식점들보다는 옛날 할머니댁문을 들어서듯 소박하고 단촐한 음식점들 뿐인 개심사가 나는 더 정겹고 마음에 끌린다. 민규랑 민서는 용현계곡으로 가서 신나게 물놀이하는 걸 오매불망 꿈꿨을 텐데 매정한 아빠가 개심사를 들러 그리로 가자고 협상안을 내놓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개심사는 내가 혼자 마음 속으로 꼽는 전국의 절 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절이다. 숱하게 드나들어 이제는 몇 번을 왔는지조차 헤아려지지 않는다. 내 고향 서산에 이러한 절이 있다는 게 한없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개심사 가는 길목에는 도로 양옆으로 야트막한 구릉이 끝없이 이어지는 삼화목장의 드넓은 초지가 이국적인 장관을 이루며 펼쳐져 있다. 게다가 길 옆에 군데군데 무리져 심어진 수많은 벚꽃나무들로 하여 봄이면 축제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지만 개심사 입구에 닿으려면 큰길에서 빠져 나오고도 저수지를 길게 돌아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한참을 더 들어 가야 한다. 벚꽃의 행락은 화려해도 절은 속세의 인연들에게 속내를 쉽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개심사 입구에는 유명사찰이나 국립공원마다 떠들썩하게 차려져 성황을 이루는 음식점들을 찾아볼 수 없어 늘 고즈넉하고 한가하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아름다운 대웅전 건물을 두고있는 수덕사를 마다하고 한결같이 개심사를 찾아오는 첫째 이유이다. 그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영주 부석사나 계룡산 동학사가 그러하듯 사하촌으로 망가진 절들의 운명이 못내 안쓰럽다. 절 밑에 제대로 된 식당이라곤 가야산장과 고목나무 가든이 유이(唯二)한 음식점인데 두 곳 다 가봤지만 우리 돌아가신 둘째 외숙모를 닮은 할머님이 시어머님을 모시고 아들과 함께 운영하는 가야산장으로 발길이 자연스레 가곤 한다. 식당 밖 나무그늘 아래 앉아 산채비빔밥을 시키고 가만히 안쪽을 들여다 보니 할머니는 보이는 데 큰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웬 걸 작년에 그만 돌아가셨단다. 작년 여름에 오고 못 와 봤으니 그 사이 큰일을 치른 것이다. 10여 년전 아내랑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지금 우리가 앉은 바로 이 자리에 놓여있던 널찍한 평상에 앉아 어죽을 시켜 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너무도 맛있게 어죽을 드시던 기억은 선연한데 그리운 어머니는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 세월이란 것이 다 그렇다.
개심사 아래 사하촌이 보잘 것 없고 소박한 것은 절의 모습과 상관이 있어 보인다. 개심사는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이고 인위적인 것이 별로 없다. 절로 올라가는 소나무숲 사이로 난 돌계단길은 S자형으로 굽어 돌며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게 비스듬히 절을 향해 상승하는 데 홍송의 진한 향기와 바람소리가 이름처럼 찾는 이의 마음을 저절로 열게 만든다. 절 입구에 들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긴네모 모양의 연못에 가로놓인 외나무 다리는 절로 들어가는 일주문처럼 의젓하다. 최근에 세운 산 아래 일주문이 생기기 전까지 외나무 다리가 홀로 그 역할을 다 했는데 지금 것은 얼마 전에 썩어서 부러진 다리를 치우고 새로 걸쳐놓은 듯싶다. 자연석을 깎아 만든 층층계단을 올라 안양루를 마주보며 오른쪽으로 돌아 해탈문으로 들어가면 절 경내로 들어선다. 대웅보전 한 켠에 서있는 이 절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인 심검당(요사채)이나 안양루 앞 종각에 쓰인 기둥의 생김새를 보면 휘어진 나무의 굴곡을 그대로 살려 쓴 파격적인 미감이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절을 한 바퀴 돌아보면 절 앞뜰과 여러 부속건물을 잇는 동선 또한 자연스런 굴곡과 높낮이로 이어져 있어 절 전체가 여염집처럼 편안하고 따뜻하다. 안양루 큰 마루엔 절 뒤편에 있는 허름한 요사채 건물을 다시 지으려고 한다며 기왓장을 수북히 쌓아놓고 한창 기와시주를 받는 중이다. 아무쪼록 이 절의 아름다움을 가리는 황당하고 어리석은 불사가 되지 않기를! 안양루 왼편으로 난 길 끝에는 해우소가 있다. 제대로 된 해우소가 그러하듯 일어서면 허리 아래밖에 가려지지 않는 칸막이는 그 유명한 선암사 해우소만은 못하지만 절집 뒷간만이 간직한 개방과 해탈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그것이 절집을 찾는 중생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불가의 보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정호승이 ‘선암사’라는 시에서 절창했듯이 우리도 그럴 수 있는 것 아닐까.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개심사를 나와 용현계곡을 가려했지만 날이 구물구물하고 어두워지는지라 아이들을 간신히 달래서 물놀이를 다음으로 미루고 대신 돌아오는 길에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 앞에 사시는 처 작은아버지댁에 들러 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 작은아버지는 인천에서 사시다가 7년 전에 이곳 예산에 내려와 지금은 청양 가는 신양면에서 양계장을 크게 하고 계신다. 추사고택 바로 앞 용궁리에 허름한 전통기와집을 옮겨 복원한 뒤에 그 옆에 현대식으로 집을 짓고 사시는데 전통기와집이나 현대식 집이나 한여름에도 서늘하여 올 무더위에도 거뜬하셨다고 자랑이 대단하시다. 아내나 애들이나 잘 가꾼 마당의 잔디며 나무들이 우거진 작은아버님댁이 너무 좋다고 다들 부러워하고 야단이라 내가 “좀만 기다려봐. 우리도 이런 집 짓고 살자구.”하면서 큰소리를 쳤는데 영 반응이 싸늘하여 쓸쓸했다. 사실 내가 정작 부러운 것은 집 앞에서 5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추사고택이다. 늘 수시로 추사고택을 드나들며 그를 추모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행복한 일 아닌가. 이태관이 논산에 있는 윤증고택 옆에 산다하니 그 또한 부러운 일이다. 몇 년전 친구들과 추사고택에 들렀을 때 추사기념관에서 양동철이랑 내가 김정희 선생 글씨 탁본을 한 점씩 골라 사온 일이 있었는데 동철이는 사무실 한복판에 표구를 하여 걸어 놓았고 나는 이것을 내 책상 유리 밑에 깔아두고 아침저녁으로 보고 또 본다. ‘세한도’, 비록 아우라가 상실된 복제품이라 하나 내겐 이보다 더 지극한 일이 없으니 모든 게 내가 주고 받기 나름 아니겠는가.
작은어머님이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주시는 것을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흐뭇하고 든든하다. 오는 길에 간간이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데 졸음이 쏟아지는 게 도저히 운전을 못할 지경이라 차를 휴게소에 세우고 한 10분쯤 눈 붙였을까. 다시 몸과 머리가 맑아지고 개운하여 운전하는 것이 즐겁고 상쾌해졌다. 모든 길이 그러하다. 떠날 때와 돌아올 때 몸과 마음의 상태가 다른 것이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이렇듯 몸이 지치고 정신이 나른할 때 잠깐이라도 쉬어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도리다. 졸음이 쏟아지는 데 무리하게 깨어있으려고 눈을 부라리고 소리를 지르고 뺨까지 철썩 때리며 운전해 본 일이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행복하던가. 돌이켜 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절박했던 것이었나. 천천히 가자. 주위도 둘러보고 살피며 가다가 힘들면 쉬었다 가는 게 잘 사는 길이다. 서산으로 동선이를 만나러 간 이번 여행은 내겐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정호승 시인이 용서한다면, 시인의 절창은 내게 이렇게 다가온다. 내게는 절집 뒷간이 친구고 친구야말로 절집 뒷간이다.
눈물이 나면 차를 타고 친구에게 가라
친구에게 가서 실컷 울어라
친구와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친구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친구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친구에게로 가라
어느 곳에 있든 친구를 만나면
친구의 굽은 등에 기대어 통곡하라
첫댓글 난 이런 주옥같은 글을 일고 나면 꼭 이렇게 외치고 싶어." 심봤다!!" 석영, 고맙다. 날 감동시켜줘서.과연 삼장이다..님! 짱이어요~ 맘속의 좋은 추억으로 한 1년은 거뜬히 살겠구나..
개심사를 꼭 가 봐야겠다. 석영이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글이었다. 고맙다. 친구. 여러 가지로
나도 개심사에 가고프다. 나 또한 추사고택은 정말 아낀다. 한용운 생가, 김좌진 생가 유관순 생가에 가보면 독립기념관이 충청도에 있는 이유를 알 수있지. 석영이 좋은 여행을 했네....석영의 고운정이 새록새록 느껴지누만.
석영아!동선에게 친구요,니 친구가 동선이구나.가슴이 절절허다. 개심사 안마당에 한자락 아까운 가을 햇쌀이 긴 그림자를 만들 때 탑보다도 아름다운 그 그림자가 길어질 때 몇몇 친구랑 걷고 싶은 곳이지.
그래 경유야..친구들과 함께 걷고 싶구나...
개심사에 해탈의 바람 뿌린지 몇 년이던가?네 목소리 쟁쟁하다.철하형,희도,동철이,희영...찌그러진(?)모습으로 오랜 친구,동지들 가슴으로 고마움 심었었다.이제, 가을 바람이다.
동선아..정말 겉모습이 찌그러진(?) 건 아무 것도 아니다. 부디 우리 모두..마음만은 찌그러지지 않게 되기를...
감동이다. 네 발걸음 하나 하나가 보석 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찐하게 만남을 즐기고 글을 올릴 수 있는 이는 석영이 아님 불가능할 것 같다.
불혹의 나이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글이네~~^^벗을 만나 함께 개심사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네 그려~~
고맙다.친구
개심사의 아름다움은 소박하고 단촐한 자연스러움에 있다. 절마다 다 자기 색깔을 지니고 있는 거지만 혹 부석사나 통도사,송광사에서 느꼈을 아름다움을 기대한다면 부질없는 일이다. 요맘때 찾아가면 볼 수 있는 연못의 연꽃도 별 대단스럽지 않고 보통이라면 붉은 꽃잎이 정신을 잃게 만들 배롱나무(백일홍)도 몇 그루 되지 않아 조촐하다.가을철이래도 경유 말대로 가을 햇살이 만드는 긴 탑그림자가 아슬할 뿐 눈을 어지럽히는 현란한 단풍을 보기 어려워 행락객들이 부러 찾을만한 곳이 아니다.오히려 개심사는 그런 행락철이 더 호젓하고 쓸쓸하다. 다만 바람이 불면 절 뒤 산신각으로 오르는 산길에 떨어져 날리는 은행잎이 볼 만하다.
겨울철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다만 봄날에 흐드러지는 개심사의 꽃잔치는 단연 압권이다. 큰길가에 피어대던 얄싸한 벚꽃들이 다 떨어져 아쉬울 무렵 4월 20일경이면 개심사에는 왕(겹)벚꽃이 절정을 이룬다. 어디 한데도 일부러 식목하지 않아 아주 오래전부터 그저 거기에 있었을 법한 숱한 왕벚꽃나무마다 갖가지 색깔의 꽃들이 사태를 이룬다. 숨이 막힌다. 친구들 개심사 왕벚꽃을 꼭 한 번 찾아 보게나..인생에 언제든 한번쯤은 그 순간 거기에 있어 봐야 마땅할 격조가 있다네.
참 >>>>당신의 글도 정말 맛깔스럽네요...수고 하셨습니다...
앗따~~석영아!!!
세한도 근사하다. 오롯한 절개가 느껴지는 그 그림 나도 좋아 한다네. 글구 다리는 나무다리인가 정말 운치 있다. 아이가 서 있어서 그런가?
멋지네. 개심사에 꼭 가봐야겠네. 아버님 댁이 예산이라 한 달 간격으로 가는데 담 달에는 서산까지 내리 달려야겠군. 예산에 오면 윤봉길 생가, 추사고택 꼭 보고 가세요.그리고 수덕사 산채정식.정말 맛있어요.
아들이 나무다리를 건너는 사진 참 좋다. 가을에는 네 글에 나와있는 길로 나서봐야겠다 싶은데, 또 말만 앞설까봐.....
가을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글이네...방가..
내 이글보고 친구들 허물없이 즐겁게 지낸것이 눈에 밟힌다. 석영 고생했다. 그래도 동선이 부부 찾아서 댕겨오니라. 내 한국가면 삼장한티는 정말 술한잔 사주어야겠다. 전에 마고랑 미경이랑 스산 쭈꾸미 축제 할때 한번 댕겨 오자고 한것이 계절이 두번 바뀌었는데 내는 이모양인디. 너무 잘했다. 고마우이 삼장.
서산오면 연락도 하고 그려.늘 소주가 기다리고 있음,물론 친구가 보고 싶지...
친구들 잘 지내고 있겠지.딸 이름 바꿨어.민재로...민중의 재주꾼.김민재
그려..아명은 율이고 본명이 민재가 되겠구먼..ㅎ
새해 첫날 석영의 글을 다시 읽노라니 올해에는 친구덜좀 챙겨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드네...
코드가 통한다는 생각이 드네, 작고 눈에 안 뜨이는것을 찿아내고...그리고 , 소중하게 제 위치를 찿아주는, 국문과 나온 중년 남자의 그...따스하고 .....에, 또....가녀린온기, 미세한 떨림으로 그 세심함이 , 흐르는 음악과 함께 ~~~넘~~`넘 좋다..고맙고 또, 두가정의 우정이 보기좋터이다,애 안고 손 흔들었을 명신네모습도 아련타....
과분하신 말씀..^^ 성희도 언제 한 번 서산 동선네 가게 <본조 묵집>에 찾아 가 보드라구..명신이 음식 솜씨가 갈수록 깊어지고 그윽해지고 있다네..묵탕, 묵보쌈, 묵전골, 묵냉면,묵 전 등등 묵 요리의 정수가 파노라마 같고 일어서려는 우리네 발모가지마정 성할 일이 없을 테니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