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20 (수)
“누구도 아이에게 ‘이것을 잘하면 상을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떤 것을 잘 해내는 것 자체가 큰 보상이며, 물질로 그것을 대신하려는 것은 아이의 마음속에 불건전한 생각을 심어주는 일에 다름 아니다.”
-수우족 인디언 ‘서 있는 곰’의 말
여섯번째 날. 아내와 난 신발끈을 동여매고 모텔을 나선다.(모텔옆 가든과 단란주점은 2년 전부터 폐업 중이다. 시골의 불황을 짐작케 한다)
우리야말로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잘 해내는 것 자체가 보상인 어린아이가 된 심정이다.
장성댐.
왼쪽의 흰구조물 앞쪽 물 아래에 조선시대 삼남대로의 단암역 자리가 있다. 따지고 보면 삼남대로를 걷는 우리로선 옛 단암역 근처에서 잔 셈이다.
비가 왔었나? 지렁이들이 여러 마리 나와있다.
걸어다니니 자동차나 자전거로 보지 못할 작은 것들이 자꾸만 눈에 띈다.
장성군 북일면을 향해 가는 길.
전형적인 시골 면소재지 모습을 갖춘 북일면.
'주시회사 장성 재창조'
북일면에서 정읍 방향으로.
11번 도로로 북이면 가는 길. 아내는 참 볼 것도 많고 관심도 많다.
북이면 가는 길에 있는 효자 서능의 비각.
서능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벼슬하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모친이 큰 종기가 나서 죽어가는데 의원 왈 "산 개구리가 없으면 백약이 무효" 라 하더라. 이에 한겨울에 산개구리를 구할길 없음을 한탄하며 슬피 울다가 개구리가 없더라도 약을 지어보자며 약을 볶는데 하늘에서 개구리가 떨어져 약탕기 안으로 들어가 그 약을 붙이니 모친이 회생하였다는 이야기.
비각은 17세기에 지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13년에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이제 제법 날씨가 가을 티를 내는데 따가운 햇살만은 여름의 기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지치고 배고픈데 비상식량으로 넣고 다니던 과자 몇 조각은 이미 동났고 물 마저 없는 상황.
아내가 그늘로 스며들어 무언가를 마시고 있다.
어제 숙소에서 못 먹고 아침에 챙겨온 맥주.
아직 냉기가 남아있고 보기에도 시원한데 애통하게도 나는 술을 입에 대지 못하는 문열이.
아내는 약 올리며 자꾸만 권하는데 그림의 떡이다.
드디어 장성군 북이면 도착. 보통은 백양사역이나 백양사 IC로 잘 알려진 곳이다.
원래 이곳의 지명이 사가리(四街里)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동으로는 담양, 서로는 고창, 남북으로는 삼남대로로 갈리는 교통의 요지이다. 그래서 원래는 북이면의 역 이름도 사가리역이었는데 관광상 지명도가 있는 백양사역으로 바뀐 것이다.
자구만 눈에 띄는 '주식회사 장성 재창조'
상대적으로 어려운 시골의 경제를 회생시켜보겠다는 가상한 취지는 백번 이해하지만, 관에서 사기업을 표방하며 '이(利)'에 집착하는 모습이 다소 부담스럽다.
치국의 도를 묻는 경덕왕에게 '구물거리며 사는 백성을 먹여 살린다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꼬 하나이다' 고한 충담사의 마음이 떠오르기도 하고 '우리 나라에 이익이 될 방도를 챙겨오셨습니까' 하고 묻는 양혜왕에게 '왕이 나라의 이익을 말하면 대부는 가문의 이익을 말할 것이고 선비나 서인은 개인의 이익을 말할 것이니 필경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꾸짖은 맹자의 마음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내 무게 중심은 맹자가 양혜왕에게 말한 인(仁),의(義)에 있다. 충담사 역시 안민가 말미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를 강조햇던 것처럼.
1,6일에 열리는 오일장 '사남시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냉콩국수를 찾는 아내를 위해 면집에 들어가 바지락 칼국수와 함께 시켰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전라도의 손맛이다.
누군가는 내 몸무게가 4~5Kg은 빠졌을 거라 축하해 주는데 모르긴 몰라도 4~5kg 찌면 쪘지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쉼 없이 먹는 물과 음료에 매 끼니 성찬을 찾아 배를 불리다 보니 그렇게 걸어도 미처 빠져나갈 새가 없다.
정읍을 바라고 그 중간 기착지인 입암을 향해 출발.
옛 삼남대로의 길은 장성갈재까지는 지금의 1번도로와 다르게 가는 지라 다시 샛길로 들어선다. 이럴 때가 기대되면서도 무섭다. 자동차들이 막 내달리는 삭막한 길이 아니어서 좋긴 한데 길 상태가 안 좋아 풀로 가려있거나 몇 갈래 헛갈리는 길이 있거나 하기 일쑤다.
이렇게 옛 삼남대로 길을 찾아 (내가 처음 찾는 것은 아니고 이미 고지도와 구한말 지도 등을 통해 이런 길들을 확인해 놓은 저자들이 몇 있다) 움직이다 보니 마냥 앞만 보고 걷는 것보다 속도가 더디고 어렵다. 게다가 옛 길인 고로 군데군데 눈여겨 볼 동리나 유적도 많아 자주 옆으로 빠지는 일이 생기니 삼남대로 걷기 여행은 여느 도보 순례자들의 진행속도와는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장성 갈재로 가는 옛 삼남대로길. 멀리 장성 갈재, 즉 노령의 산맥이 보인다.
더욱 확연히 보이는 장성 갈재.
옛 사람들이 "노령(장성 갈재)를 넘는다"라는 표현을 쓰면 그건 대개 유배간다는 뜻이다. 전라남도가 유배지로 애용(?)되던 시절의 속어다.
갈애바위 근처 원덕리 미륵석불. 원덕리는 조선시대 '미륵원'이 있던 곳이다. 아마 이 미륵불 때문에 생긴 이름이겠지?
큰 돌기동 두 개를 포개어 조형하였고 머리 위에 팔각의 보관이 얹힌 모습인데 눈이 부리부리한 것이 언뜻 돌장승을 떠오르게하는 해학적인 모습이다. 이래뵈도 키가 5m 장신인데 무섭고 근엄하다기 보단 친근하고 재미있어보인다.
이런 조각도 3백 년쯤 지나면 문화재가 될까? 도재질과 깎아낸 선이 중국에서 들여온 것 같기도 하고...
국내에서 캐내는 원석의 수량도 많지 않을 뿐더러 값싼 중국산 원석이나 완제품 때문에 현재의 석공예 시장은 마데 차이나가 석권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예전의 자그만 암자는 소실되었다 하며 지금은 전원주택구조의 암자가 들어서 있다.
이게 뭐냐고?
갈애바위다.
철로의 전선 때문에 각이 잘 안 나오는데 입지 좋은 곳에서 보면 영락없이 눈웃음치는 여인네 상이다. 하회탈 중 부네 같은 모습이다. 어재 저 거대한 바위가 저리 모양을 띌 수 있는지...
사연인즉 이렇다.
여기 갈재 밑 목란마을 주막에 갈애라는 처녀가 살았는데 본디 미색인데다 춤 잘하고 노래 잘하고 악기 잘하니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오르던 선비들이 다 갈애에게 녹아나 길 가기를 멈추고 여기서 노는 것이라. 이에 나라의 인재가 씨가 마르겠다며 이 요망한 계집을 쳐 없애라 장수를 보냈거늘, 아 이 장수마저 갈애에게 홀딱 반해 놀아나고 급기야 다른 장수가 들이닥쳐 먼저 장수를 죽이고 갈애를 칼로 치니 핏자국만 남고 사라져 저리 바위가 되었단다.
내 얘기를 들은 아내는 참말 신기하게도 닮았다며 연신 고개를 든다. 그러나 이런 행운도 걷는 이나 누릴 뿐 1번 국도의 호남터널 바로 오른쪽에 있어서 차를 운전하면서는 여간해서 각이 안 나오지 싶다.
차 타고 가면서 이 정도는 볼 수 있으려나....
짐 무게를 줄이기 위해 신혼 때 쓰던 아기 손바닥만한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니 먼 거리에서 저 바위의 재현이 어렵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장성 갈재를 오르는 시간.
결코 만만하게 볼 고개가 아니다. 등줄기에 땀이 바짝바짝 난다.
워매~ 오늘의 목적지가 아직도 18Km
장성 갈재는 아직도 이어지고.
왜 그렇게 옛부터 장성 갈재, 장성 갈재 했는지 알 것 같다.
드디어 갈재 정상.
숨 깔딱이며 올라온 우리의 마음을 아는 걸까. 친절하게 정상이라는 안내 표지도 있다. 그런데 뭐야? GPS엔 고도가 269와 270을 왔다갔다 표시되는데 표지엔 220이라네. 우리의 노력이 50m 평가절하 되는 것 같아 괜히 억울하다.
갈재 정상을 기점으로 전라남도를 벗어나 전라북도에 들어서게 된다. 이제 부터 장성군을 벗어나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꿈만 같다. 해남 남창 이진포에서 여기까지 꼬박 엿새(엄밀히는 첫날 오후부터 시작했고 이제 오후이니 꼬박 닷새라는 표현이 맞나?), 162Km(이것도 강진 들어갈 때 자동차를 얻어탄 구간이 있고 GPS가 꺼진 채 걸은 구간이 있으니 신뢰할 만한 정보는 아닌가?^^)를 걸었다.
여하튼 이로서 도 하나를 넘게 되었다.
드디어 입암면. 예전에 천원역이 있던 자리에 입암면사무소가 드어서 있다.
입암면 소재지 전경.
입암산 정상에 삿갓바위가 보인다. 산 이름이 왜 입암(笠岩)인지 알게 하는 대목.(그 왼쪽 산이 삿갓바위이고 눈에 보이는 저 곳은 갓바위라 말하는 설도 있음)
텃밭에 비료를 주고 계신 분께 입암산 정상 능선에 15Km가까이 축성되어 있던 입암산성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들을 여주었다. 동학 때 태인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이 농민군을 해산하고 수하 몇 사람과 피신하던 중에 산성별장 이중록과의 친분으로 하룻밤 묵어간 일이 있는 걸 아는 지 물었더니 그 별장이 여기 입암 사람인데 그 일로 역적으로 몰려 처벌을 받았고 집안이 구몰하여 흩어졌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 후손 중 하나가 자기 친구인데 조상이 이중록이었단 사실을 안 게 얼마 되지 않는다 한다.
지금이야 동학이 관관상품으로까지 둔갑하였지만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함부로 입에 담을 수나 있던 일이냐며 표정이 굳어지신다. 동학은 6.25때까지도 악몽으로 따라붙었다며 조상 중에 동학한 이가 있거나 젊었을 적 동학과 관련된 사실이 있는 이는 좌익으로 엮이기 일쑤였다 한다.
그 외 입암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과 정읍, 입암, 고창 지역에서의 좌우익 갈등 등 지역과 관련한 사실들을 풍부하게 알고 계셔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1시간인지 얼마인지 모를 시간을 이야기에 빠져있다가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수퍼 앞으로 돌아오니 아내는 어느새 잠에 빠져있다. 몹시도 피곤한 지 등 붙일 공간이 생기면 쓰러진다. 나도 녹녹치 않은 길을 저 연약한 모이 얼매나 힘들꼬.
아내를 깨우고 정읍까지의 마지막 행진을 위해 찐빵집에서 배를 채운다. 저녁이냐고? 큰일 날 소리. 이건 순전히 간식이다. 늦어질 저녁을 위한.
저장했다가 쪄주는 찐빵맛이야 그냥 찐빵맛이지만 푸근하게 대하는 아주머니 인심이 고맙다. 살얼음이 낀 시원한 보릿물은 가히 천상의 맛이다. 달랑 찐빵 1인분에 커피가 공짜다.
이제 출발. 정읍까지의 거리 12Km.
바삐 가면 두 시간 반이요, 보통 속도라면 세 시간이 걸릴 거리다. 분명 해는 질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옛 삼남대로는 입암면에서 입암육교가지는 1번 도로를 비껴나 가리대 마을쪽으로 가야한다는 거,
그 중 일부 길은 이렇다는 거,
때문에 보통 예상한 시간을 넘고 기어이 어둠을 맞게 된다는 거.
어두워질 무렵 걷기 수칙 1조. 반드시 차를 마주보며 진행할 것. 나라도 위험요소를 감지하는 게 낫고 운전자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서로에게 덜 부담스럽다.
2조. 꼭 랜턴을 켤 것.별 것 아닌 LED 등이라도 상대에게 나를 인지시키는 데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완전히 어두워지니 더욱 히들다. 이제까지 30Km가 넘게 걸었는데 몹시지쳤다. 배낭끈이 삶의 무게만큼이나 고통스럽게 어깨를 파고든다. 어떤 땐 한 몸과 같이 착 달라붙어 존재감이 없다가도 이렇게 한 번 괴롭히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생각 뿐이다
드디어 정읍.
정읍 초입의 과교교는 괘다리라고도 불렀는데 옛날에 이 다리를 건너서 과거보러 가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물론 지금의 콘크리트 다리는 아니었고. 그런데 저 붉은 표시는 뭐랴? 설마 특정 종교를 상징해 저러지는 않았를 거고...무슨 공사 표진가? 에고 밤에 보니 무섭당.
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 늦은 저녁을 먹는다. 청국장과 뼈다귀 해장국을 사이에 두고.
그런데 아내와의 동행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정읍까지 기를 쓰고 오려했던 것도 다 내일 새벽기차 때문이다. 애초 첫 3일만 동행하려 했지만 남편이 안 돼 보였는지, 걷기 여행의 묘미를 느꼈는지 일 보고 내려와 이틀을 더 동행해 주었다. 그러나 내일부터는 출근. 같이 있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처지.
썬크림은 배를 갈라서 마저 써요. 양치질 빼먹지 말고. 풀 밭은 조금해서 지나요, 가렵게 되니까. 늘 차조심하고...
자기 없는 걷기 여행이 미덥지 못한지 이것저것 챙기는 말에 콧날 시큰하다. 에이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 할 것을.....이렇게 있다 떠나면......
오늘 거리 35Km, 누적거리 184Km
첫댓글 돌쇠님~~~홧팅!!!!!!!!!!!!!!!!
녹초가 되어 쓰러질 상황에 귀절귀절 정신이베어있어 대단하단생각뿐 .. 늘 그랬지만 자랑스럽다....
개학이 언제닝지는 모르겟으나~ 우야든동 열심히 걸어보이소~ 화이팅~~
돌쇠님 힘 내라 힘~!!! 대단합니다....홧팅
인생에 멋진 그림을 그리셨군요 ^^ 파이팅!!!!
글을 보면서 늘 느끼는한가지.. 참 조목조목 아는것도 많타......^^ 우리네들은 그냥 보고 스쳐지나갈것들도 하나 빠짐없이 그 유래나 뜻까지 꼼꼼히 적어주시니 보는이로 하여금 많은 공부를 하게 합니다 벌써 일주일이 다되어 가는군요 그동안 걸어온 거리가 총 184키로라니 조상님들의 행보가 그려질듯 합니다 요즈음 문명의 이기를 동원한다면 불과 한시간정도 걸릴 거리를 7주일동안 걸오오신샘이니....
정읍 입성을 축하합니다. 돌쇠님 참 장하다.
돌쇠님은 조목조목 아는것도 참 많네, 언제 저많은곳의 유래,사연들을 습득 하였을까? 약 20년 전 나라가 혼란하던 시절 장성에서 약 20일간 숙영 하면서 광주로 출동다니던 기억이 아련 하네요...
하루 여정의 마무리는 역시,,, 남도의 만찬,,, 여행의 기쁨이 더욱 느껴질 것 같습니다 ㅎㅎ
이렇게 멋진여행 나도 해보고 싶어서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