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하대의 구산선문(九山禪門)>
장흥 보림사 대웅전
선종(禪宗)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해, 경전에 의하지 않고 자기 안에 존재하는 불성(佛性)을 깨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밖으로부터의 모든 인연을 끊고[외식제연(外息諸緣)], 깊숙한 산간에 파묻혀 수행하는, 이른바 참선을 행하는 것이다[內心無喘]. 절대적인 불타(佛陀)에 귀의하려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불성을 개발함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선종사상은, 신라 말 지방호족들이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녀, 중앙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지방에 웅거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의식구조와 부합했다.
*선사(禪師)들은 주로 중앙의 지배층에서 몰락한 6두품 이하의 하급 귀족 출신이거나 중앙 진출이 불가능한 지방호족 출신이었다.
장보고(張保皐)가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서해를 지배하며 활동했던 시기(828~841)와도 무관하지 않다.
통일신라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사찰들 일부가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세워졌고, 9산선문 중에서 특히 사세가 드높던 장흥의 가지산문(迦智山門), 곡성의 동리산문(桐裏山門), 남원의 실상산문(實相山門)이 호남지방에서 일어났다. 특히 신라 말, 고려 초에 흥기한 지방 호족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기풍인 선법을 획기적으로 진작시킨 아홉 사찰(구산선문)은 아래와 같다.
구산문명 개창자 중심 사찰
1. 가지산문(迦智山門) ― 도의(道義) ― 장흥 보림사 2. 실상산문(實相山門) ― 홍척(洪陟) ― 남원 실상사 3. 동리산문(桐裏山門) ― 혜철(慧徹) ― 곡성 태안사 4. 봉림산문(鳳林山門) ― 현욱(玄昱) ― 창원 봉림사 5. 사자산문(獅子山門) ― 도윤(道允) ― 영월 법흥사 6. 성주산문(聖住山門) ― 낭혜(朗慧) ― 보령 성주사 7. 사굴산문(闍崛山門) ― 범일(梵日) ― 강릉 굴산사 8. 희양산문(曦陽山門) ― 도헌(道憲) ― 문경 봉암사 9. 수미산문(須彌山門) ― 이엄(利嚴) ― 해주 광조사
1. 가지산문(迦智山門)
9산 선문 중에서 으뜸사찰은 장흥에 있는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였다 달마 선종의 정맥을 잇는 육조 혜능(慧能) 대사는 불립문자 직지인심(不立文字 直指人心)을 종지로 내걸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남중국 전역에 전파했다.
2. 실상산문(實相山門)
실상산문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 산문이다. 9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창한 개조 홍척(洪陟) 선사의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그 역시 마조 계통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2~813) 선사의 법을 이었다.
3. 동리산문(桐裏山門)
서당(西堂智藏)의 법을 받아 개창한 나머지 하나는 동리산문이었다. 개조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徹, 785~861)은 839년(신무왕 1)에 중국에서 돌아와서 근본 도량(道埸)을 전남 곡성에 있는 태안사(泰安寺)로 했는데, 처음에는 왕실과 연결돼있었다. 혜철의 문하(門下)에 도선(道詵)ㆍ여대사(如大師) 등 수백 명을 배출해 각각 종풍(宗風)을 선양함으로써 동리산파를 형성했다. 문하의 제자 가운데 여선사(如禪師)가 혜철의 선풍을 계승했고, 이어 광자 윤다(廣慈允多, 864~945)가 출현해 신라 효공왕과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산문이 더욱 확산됐다. 한편, 혜철의 문하에는 도선(道詵)을 중심으로 한 계열이 전라남도 광양의 옥룡사(玉龍寺)를 중심으로 존재했다.
4. 봉림산문(鳳林山門)
봉림산문의 개창자는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 788~869)이다. 현욱은 강릉 출신으로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병부시랑 염균(廉均)의 아들이다.
5. 사자산문(獅子山門)
사자산문은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 798~868)과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 826~900)에 의해서 형성됐다. 도윤은 825년(헌덕왕 17)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법제자인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4)의 법을 받아 847년(문성왕 9)에 귀국했다. 한때 금강산에 한동안 머물다가 경문왕의 귀의를 받았는데, 이때에 화순의 쌍봉사(雙峯寺)로 옮겨 주석하다가 71세로 입적했다.
보령 성주사지 6. 성주산문(聖住山門)
성주산문은 낭혜(朗慧, 800년~888)에 의해 개창됐다. 낭혜는 821년(헌덕왕 13)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마곡 보철(麻谷寶徹)의 법을 받아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해서, 같은 무열왕계의 후손으로서 보령 지역의 호족인 김흔(金昕, 803~849)과 결합해 성주산문을 열었다. 보령은 김인문(金仁問)의 수봉지(受封地: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로서, 그 후손인 김흔(金昕)의 세력 근거지였으며, 그가 성주사를 건립하고 낭혜를 머물게끔 했다.
7. 사굴산문(闍崛山門)
사굴산문은 범일(梵日, 810∼889)국사가 문성왕 8년(846)에 개산했으며 번창했다. 그 옛 자리는 현재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있다. 범일은 831년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 제안(鹽官齊安, ?~842)의 법을 받아, 846년(문성왕 8)에 귀국했다. 개산조 범일은 품일(品日)이라고도 하며, 속성은 김씨로, 명주(溟州)도독 김술원(金述元)의 손자이다.
8. 희양산문(曦陽山門)
희양산문의 개창자는 도헌(道憲, 824~882) 국사, 곧 지증(智證)대사이다. 지증의 호가 도헌이다. 지증은 9산선문 중 유일하게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산문을 성립시켰다.
9. 수미산문(須彌山門)
황해도 해주 수미산 광조사(廣照寺)가 수미산문의 본산이었다. 9산 중에서 최후에 개산됐으며, 고려 태조 15년(932)에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 870~936)이 개산했다. 이엄(利嚴)은 896년 중국에 들어가, 석두 희천(石頭希遷)의 계열인 운거 도응(雲居道膺, ?-902)의 법을 이어받아 911년(효공왕 15)에 귀국했다. 그는 처음 호족 소율희(蘇律熙)의 후원을 받으며 김해 지역에 머물렀으나 뒤에 왕건의 소청으로 태조 왕건의 왕사로서 해주의 광조사(廣照寺)에 거주했다. 이엄의 재가 제자로 황보제공(皇甫悌恭)과 왕유(王儒)⋅이척량(李陟良) 등 전직과 현직 고관과 박수문(朴守文)을 비롯한 개국공신 세력의 후원을 받았다.
위와 같이 산문(山門)은 아홉군 데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모두 조계(曹溪) 혜능(慧能)을 조(祖)로 삼고 그 선법인 조계선(曹溪禪)을 참구했으므로, 고려 초에 확립된 조계(曹溪)를 조(祖)로 하는 해동(海東)의 선종(禪宗)이라 했다.
신라 하대에 선종의 등장은 단순히 중국의 선불교를 옮긴 차원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정치적 격변 시기에 우리 민족과 한국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선종은 고려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며, 오교양종(五敎兩宗)으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 기타 산문
9산선문 외에 혜소(慧昭, 774~850)는 전주 출신이며 시호는 진감(眞鑑)국사, 속성은 최씨이다. 도의(道義)나 홍척(洪陟)과 비슷한 시기에, 하동의 쌍계사(雙磎寺)에서 산문을 이루어 번창하고 있었다. 혜소는 804년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 신감(神鑑) 선사의 법을 받아 830년(흥덕왕 5)에 귀국했으며, 불교 음악인 범패(梵唄)를 배워 우리나라에 최초로 범패를 전하기도 했다. 특히, 쌍계사에는 6조의 영당(影堂)이 있는데, 혜능의 머리를 취해 오는 연기설화와 연고가 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는 국보 제47호이다.
고려 왕건의 선대 세력과 연결을 가진 순지(順之)는 개경에서 가까운(30리) 오관산(五冠山) 서운사(瑞雲寺)에서 위앙선풍을 펴고 있었다.
왕건과 연결된 보양(寶壤, ?~?)은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전해 받고 청도의 운문사(雲門寺)에서 산문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의 선풍은 운문종 계통이었다. 이들 외에도 9산선문 중에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산문을 이루고 있었던 자들이 많았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