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생 마음의 짐 벗으면 편안. 36년생 지갑에 돈 들어올 듯. 48년생 명성이 오르니 남들이 우러러본다. 60년생 매매관계 이로움 따른다. 72년생 직장에서 인정받고 칭송이 자자. 84년생 처음은 나쁘지만 뒤에는 좋게 된다.
25년생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37년생 기회 되면 지갑 열도록. 49년생 재물은 길하나 명예 손상 조심. 61년생 한 가지 어려움은 있는 것. 73년생 남 탓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볼 것. 85년생 꾀꼬리가 짝 찾는 형상.
26년생 어려운 고비는 지나갈 듯. 38년생 재물 운 움직이니 재물 들어온다. 50년생 재물 운 좋으나 사고 조심. 62년생 노력은 많으나 대가 적을 듯. 74년생 주변 상황 좋으니 사람 따른다. 86년생 상사에 대한 불만 갖지 말라.
27년생 주변 사람과 마찰 조심. 39년생 복록이 창성하니 어려움이 없다. 51년생 이빨 빠진 호랑이도 호랑이. 63년생 문서가 움직이니 문서성사 좋다. 75년생 직장 어려움 있으나 견뎌야 한다. 87년생 구직에 이로운 날.
28년생 밖에 나가면 곤란 안에서는 안정. 40년생 좋은 일이 밖에 있으니 나가면 좋다. 52년생 즐겁고 좋은 일 있는 하루. 64년생 하늘의 별도 딸 만큼 용기백배. 76년생 성실로 밀고 나가라. 88년생 기쁨 중에 마음에 근심.
29년생 돈이 생기게 될 듯. 41년생 마음을 비우면 원하는 것 들어온다. 53년생 동남방으로 출행하면 소득 있다. 65년생 궁하면 통한다. 77년생 부부가 화목하니 웃음꽃이 활짝. 89년생 먼 길 왔으니 끝이 보인다.
30년생 몸을 따뜻하게 할 것. 42년생 타인을 믿으면 손재 따른다. 54년생 산꼭대기 외로운 소나무 같은 상. 66년생 사고수 발동하니 교통사고 조심. 78년생 다른 마음먹으면 손해 따른다. 90년생 달콤한 말에 현혹되지 마라.
31년생 외로움 달래는 힘이 필요. 43년생 태풍은 지나가고 평온한 날. 55년생 가정 화목하고 사업 역시 무난. 67년생 구름 지나가고 맑은 하늘. 79년생 어리석은 행동 말라. 91년생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터득하라.
32년생 생각지 않은 좋은 소식 있다. 44년생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사. 56년생 까치가 문 앞에서 짖으니 기쁜 소식. 68년생 영업에 길하여 수입 늘어난다. 80년생 재물과 명예에 길한 날. 92년생 좋은 소식은 남쪽에서 온다.
33년생 어려움 없어서 마음이 흡족. 45년생 정상에 오르면 내려가는 법. 57년생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니 신중할 것. 69년생 너무 욕심내면 불리. 81년생 운기가 좋을 때 태만하지 마라. 93년생 공부 운 좋으니 열공하라.
34년생 자식의 행복이 나의 행복. 46년생 자손에게서 소식 올 듯. 58년생 원하는 것 성취하니 화색이 좋다. 70년생 나가면 유쾌하나 들어오면 답답. 82년생 달 밝은 밤 창밖 보니 임 생각. 94년생 노력하면 성과가 좋은 날.
23년생 기다리던 사람 찾아오는 날. 35년생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킬 것. 47년생 조상 덕이 있으니 정성스런 마음 내도록. 59년생 흑백을 너무 따지지 말 것. 71년생 일에 끝마무리를 잘하라. 83년생 기회를 잘 살릴 것.
운관철학관 김재근 (051) 553-6958
3월 25일 오늘의 역사
1704 (조선 숙종 30) 한양도성 수축공사 시작
1864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남강 이승훈(1864-1930) 태어남
1871 군포제 페지 .호포제 실시
1874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출생
1881 이만손 등 만인소 상소
1894 독립운동가 임국정(林國貞) 출생
1895 을미개혁 추진
1899 한국 최초의 여성 체육전문가 김신실(金信實) 출생
1909 창경원 동식물원 준공
1922 국문학자 정병욱(鄭炳昱) 출생
1926 항일투사 박열 사형선고
1926 무용가 송범(宋范) 출생
1927 독문학자 강두식(姜斗植) 출생
1928 안창호, 김구 등 중국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1929 경성제대 (서울대 전신) 제1회 졸업식
1946 해방 뒤 최초의 경평(서울-평양) 축구전, 서울운동장에서 열림
1949 초대 주미 대사에 장면 취임
1951 국군 동해안 38선 돌파
1954 제1회 -예술원 회원 선거
1961 인기 영화인 시상식
1968 주한미군 팬텀기대대 창설
1969 우리 나라 처음으로 카톨릭의대서 콩팥이식 수술 성공
1980 국방부, 국방정책자문위와 조사정책자문위 설치 발표
1981 내무부 연좌제 폐지
1981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 이갑성 세상 떠남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1987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게 정국 주도권 부여
1989 문익환 목사 평양 방문, 김일성 면담
1991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 대회 남북단일팀 참가
1994 조용필. 재미교포 사업가와 결혼
1995 경수로 제공문제 관련 북한-미국 전문가 회담(베를린, 3.25-27) 한국형 경수로 문제 둘러싸고 의견 대립 결렬
1998 베이징에서 남북적십자 대표 3차 실무 접촉(-3.27까지)
2002 정부 교육정보 시스템 구축 추진발표
2003 소설가 이문구씨 별세
2007 오 박태환! 세계물살 갈랐다
2008 안중근 유해발굴조사 25일부터
2008 T-50 최종호기 초도양산 완료
2009 이미자. 가수 최초로 은관 문화훈장 수상
2010 안중근 순국 100주년 '추모제향' 엄수
해 외
708 콘스탄티노, 제88대 교황으로 즉위.
1655 호이겐스, 토성위성 타이탄 발견
1801 독일 시인 노발리스 사망
1829 그리스 독립
1867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꼽히는 토스카니니(1867-1957,이탈리아) 태어남
1867 미국의 조각가 보글럼(Borglum, John Gutzon de la Mothe) 출생
1881 작곡가 바르톡 태어남
1895 이탈리아군, 이디오피아 침공 개시
1918 인상파 음악의 선구자 드빗시 세상 떠남
1919 독일의 조각가 렘브루크 사망
1921 프랑스의 연극, 영화 배우 시뇨레(Signoret, Simone, 1921~1985) 출생
1925 미국 작가 오코너(O'Connor, Mary Flannery) 출생
1928 미국의 우주 비행사 -1970년 아폴로 13호 비행사령관 -제임스 러벨 출생
1934 미국의 여성운동가·정치운동가·편집인 스타이넘(Gloria Steinem) 출생
1946 제1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열림
1949 중국, 북경으로 수도를 옮김
1951 이라크 석유국유화 법안 결정
1957 유럽경제공동체(EEC) 조약
1958 서독 하원 국방국의 핵무장 결의안 가결
1964 미국 일본간 TV 우주중계 실험에 성공
1969 파키스탄 아유브칸 대통령 하야
1971 중국, 미국 탁구팀 초청
1975 사우디 아라비아 파이잘 국왕 피살
1976 독일의 화가 요제프 알버스(1888-1976) 세상 떠남
1981 미국 보스턴의대 사상초유의 암면역동물 생산에 성공
1982 영국 의회, 캐나다 헌법 승인
1983 인류 최초로 인공심장을 이식 받은 바니 클라크 세상 떠남
1992 우주미아 세르게이 크리칼료프 등 313일 만에 귀한
1995 미국하원, 복지법 개혁안 통과
2002 아프가니스탄 북부 강진 .최소 2000명 사망
2003 미국 LA법원 스펨메일에 첫 실형 선고
2005 2005년 일본 국제 박람회가 개막되다.
2007 유럽연합(EU) 탄생 50주년 기념
2010 덴마크 `인어공주'像, 생애 첫 해외여행 나서
2010 - 안중근 순국 100주년 '추모제향' 엄수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오늘 저녁 서울 백범기념관에서는 안 의사의 넋을 기리는 '추모제향'이 거행됐습니다.
행사는 안 의사 유족과 광복회원 등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 의사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는 전통 방식의 제사로 치러졌습니다.
광복회측은 "100년만에 처음으로 국민을 대신해 제사를 올리는 의미가 크다"면서 "하루빨리 안 의사 유해가 발굴되길 염원한다"고 밝혔습니다.
권순표 앵커 kspja@imbc.com /MBC 뉴스 20100325
2010 - UNHRC '북한인권 규탄' 결의안 채택
47개 회권국 중 28개국 찬성…북 "나쁜 정치적 의도, 거부"
제13차 유엔인권이사회(UNHRC)는 25일(현지시간) 북한의 인권개선을 촉구하고 북한인권 특별보고관 제도의 연장을 골자로 하는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에서는 '고문과 정치범수용소 등 북한의 광범위한 인권침해를 규탄하고 식량원조는 주민들에게 배급해야 한다'며 유럽연합(EU)과 일본이 상정한 결의안이 UNHRC 47개 회원국 가운데 28개국의 지지를 얻어 통과됐다.
결의안에 반대한 국가는 5개국, 13개국은 기권했다. 지난해는 찬성 26개국, 반대 6개국, 기권 15개국으로 찬성은 2개국이 늘고 반대는 1개국이 줄었다.
유럽연합과 일본이 공동 상정한 이번 결의에 한국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했으며 이사국 12개국(한국포함), 비이사국 31개국 등 총 43개국도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했다.
정부는 "인권은 인류보편적 가치이므로 여타 사안과 분리하여 인권문제 그 자체로 다루어야 한다“며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북한인권결의안에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채택된 결의안은 "북한이 비팃 문타폰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의 방북을 허가하지 않고 그의 조사 활동에 협조하지 않은 점에 대해 유감"이라면서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의 임무를 1년 더 연장하도록 하고 북한 당국에 대해 보고관의 방북을 허용하고 인권 상황 조사활동에 전면 협조할 것"을 촉구했다.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의 임무는 2004년 이래 매년 1년씩 연장되어 왔으며, 이번 결의안 채택으로 올해 6월말 임기(최장 6년)가 만료되는 문타폰 현 특별보고관의 후임자는 올 6월 제 14차 인권이사회에서 임명될 예정이다.
한편 이번 결의안에 대해 주제네바 북한대표부의 최명남 참사는 "나쁜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며 "틀에 박힌 결의안 초안을 단호히 거부한다"고 반발했다. 또 "미국과 일본, EU는 북한을 제거하기 위해 인권을 악용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동안 북한인권결의안은 유엔인권위원회(현 인권이사회)에서 3년 연속(2003-2005년) 채택됐으며, 유엔총회에서는 5년 연속(2005-2009년), 유엔인권이사회에서는 2년 연속(2008-2009년) 채택된 바 있다.
김용훈 기자 /데일리NK 2010-03-26 09:15
2010 - 덴마크 `인어공주'像, 생애 첫 해외여행 나서
상하이 엑스포 덴마크관 홍보 전시 위해
덴마크의 관광명물인 '인어공주'상이 '2010 상하이 세계무역박람회(EXPO)' 덴마크관에 전시되기 위해 25일 코펜하겐 항을 떠났다. 96세 생애에서 첫 해외여행이다.
덴마크 조각가인 에드바르트 에릭슨이 덴마크의 동화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을 기리고자 만든 인어공주상은 환송 행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트럭에 실렸다.
정확한 수송경로는 보안상의 이유로 비밀이지만 이 1.5m짜리 동상은 상하이 EXPO 개막(5월1일) 1주일 전쯤 덴마크관의 인어 연못에 놓일 예정이다.
그러나 인어공주의 외출은 덴마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화재를 홍보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 보내는 것은 무례한 처사이므로 복제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지만, 크리스토퍼 보 브람센 덴마크 측 EXPO 준비위원장은 "실물을 보낼 수 있는데 왜 복제품을 보내야 하느냐"며 일축했다.
이날 행사 관중 가운데 사라 아메드(16)는 "인어공주는 21세기 덴마크인들의 삶을 상징할 수 없으니 다른 것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앤 마리 헤닝(92)은 "근처에 살아서 오랜 세월 인어공주를 봐왔는데 인어상이 없으면 허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어공주가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11월까지 인어공주상 자리에는 세계적인 중국 예술가 아이 웨이웨이의 비디오 작품이 전시된다. 이를 통해 상하이에 있는 인어공주의 전시 모습이 생중계될 예정이다.
인어공주는 1913년 처음 자리 잡은 후 수리할 때를 빼면 한 번도 자리를 떠난 적이 없으나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인어공주는 1964년 목이 잘려 없어지는 바람에 국제적으로 더 유명해졌다. 끝내 잘린 목을 찾지 못해 원본 틀로 새 목을 만들어 붙였으나, 그 후에도 팔이 잘리거나 페인트를 뒤집어쓰거나 폭발물로 인해 나뒹굴기도 했다.
지난 2004년엔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 반대론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이슬람 여성용 부르카를 입힌 일도 있다.
(코펜하겐 AP=연합뉴스) damia0511@yna.co.kr /연합뉴스 2010/03/26 10:56
2009 - 이미자, 가수 최초로 은관문화훈장 수상
이미자(李美子, 1941년 10월 30일~)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서울 한남동에서 2남4녀 중 장녀로 출생하였고 문성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59년 데뷔하였으며 《열아홉순정》으로 처음 알려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2천여 곡을 불렀으며 대표곡으로는 《섬마을 선생님》,《동백아가씨》등이 있다. 대한민국 대중문화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 가수 이며 엘레지의 여왕 (Queen of Elegy)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MBC 10대 가수상을 11년 연속 수상하였고 1967년〈무궁화훈장〉, 1995년〈화관문화훈장〉(5등급), 1999년〈보관문화훈장〉(3등급), 2009년〈은관문화훈장〉(2등급)을 수훈하였다. 흔히 그녀가 노래하는 장르를 트로트로 분류하고 트로트의 여왕이라고 부르지만 본인은 자신의 노래들이 트로트보다는 전통가요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까지도 뛰어난 가창력과 대중을 사로잡는 무대로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데뷔 /위키백과
2008 - T-50 최종호기 초도양산 완료
한국항공우주산업은 오늘 오전 경남 사천시 사남면에 위치한 본사에서 공군과 방위사업청 등 관계자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산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 최종호기 납품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은 지난 2005년 8월부터 1호기를 양산해 공군에 인도해 왔으며 이번에 모두 25대의 납품을 마쳤습니다.
T-50 고등훈련기는 지난 1997년부터 한국항공우주산업과 미국의 록히드마틴사가 공동으로 개발에 착수해 만든 국내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로 현재 아랍에미리트와 싱가포르를 상대로 수출 협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박종혁 [johnpark@ytn.co.kr] /YTN 2008-03-25 13:25
훈련용 'T- 50"기 양산...'예산 절감'등 전력증강 '톡톡'
방위사업청, "향후 대형 전력증강 사업에 있어 협상력 증대 기대"
금일(25일) 방위사업청(청장 양치규)은 공군·국방기술품질원·한국항공우주산업(주) 등과 함께 국내 최초의 초음속 고등훈련기인 T-50 초도양산 사업의 마지막 훈련기의 출하 기념식을 가졌다.
방위사업청은 "T-50 초도양산 사업을 통해 확보된 사업관리 노하우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항공무기체계를 국내 연구개발로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으며, 향후 대형 전력증강 획득사업에 있어 전반적인 협상력 증대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2005년 12월 첫 양산 1호기를 생산한 이후 마지막 25호까지 출하를 하는 동안 철저한 사업 관리와 성과 관리체계 구축 등을 통해 사업예산의 절감, 생산 및 기술 관리를 통한 항공기 적기 납품을 수행해, 공군의 전력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방위사업청의 관계자는 "초도양산으로 생산된 훈련기는 교육용으로 배치되어 사용 되어 있다"고 전하며 "이후 후속양산도 예정되어 있다"고 밝혔다.
[사천=뉴스웨이 홍세기 기자] /뉴스웨이 2008년 03월 25일 (화) 18:30:11
2008 - 안중근 유해발굴조사 25일부터
중국 뤼순의 안중근 의사 유해 매장 추정지에 대한 정부 발굴 조사가 25일 시작된다.
국가보훈처는 남쪽의 민·관 전문가 17명으로 구성된 유해발굴조사단이 25일 출국해 5월24일까지 두 달 동안 뤼순 현지에서 조사를 벌인다고 23일 밝혔다. 보훈처 관계자는 “최근 안중근 의사 유해 매장 추정지 일대가 아파트 공사로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 등에 따라 12일 북쪽에 남북 공동 조사단 구성을 제의했지만, 북쪽이 17일 ‘남쪽이 단독으로 가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답해와 남쪽 단독으로 조사단을 보내게 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이번 조사 지역은 북쪽에서 이미 여러 차례 발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지역이어서 실제 발굴에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사안의 시급성을 고려해 발굴에 들어간다”며 “유해를 찾으면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확인한 뒤 어디에 안장할지는 남북 간에 추후 협의해 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한겨레 2008-03-23 오후 08:29:05
2007 - 오 박태환! 세계물살 갈랐다
2007 - 오 박태환! 세계물살 갈랐다
세계선수권 자유형 400m 첫 금…수영한국 ‘새역사’ 활짝
아시아신기록은 ‘덤’…‘우상’ 호주 그랜트해킷마저 제쳐
“올림픽 가는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그 다음에 그냥 물에 ‘퐁당’ 했잖아요. 속상하기야 본인만 했겠어요?”
박태환(18·경기고3)의 어머니 유성미(50)씨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안타깝게 기억한다. 당시 한국선수단 최연소 선수(14)였던 박태환은 수영 남자 자유형 400m 예선에서 부정출발로 발길질 한번 해보지 못하고 실격당했다. 국제대회 경험이 거의 없던 중학교 3학년이 올림픽이라는 큰 대회에 나섰으니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속이 상한 박태환은 감독이었던 김봉조씨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서 2시간 가까이 숨어 눈물을 훔쳐야 했다.
그 뒤 2년6개월. 1m75·58㎏의 깡마른 중3 소년이 1m83·75㎏의 듬직한 청년으로 자라는 동안 ‘박태환’이란 이름은 한국 수영의 ‘최초’였다. ‘세계대회 첫 메달’(2006년 4월), ‘정규코스 국제대회 첫 우승’(2006년 8월), 아시아경기대회 남자수영 첫 3관왕(2006년 12월). 그리고 2007년 3월 그는 또 한번 한국 수영 최초로 세계 ‘최고’가 됐다.
박태환은 25일(한국시각)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2007 국제수영연맹(FINA)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400m에서 3분44초30의 아시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수영 사상 최초의 세계선수권대회 메달이자 첫 우승이다. 불과 한달 전 자신의 ‘우상’이라고 밝혔던 호주의 그랜트 해킷(27·세계 3위)마저 눌렀다. 해킷은 2004년 올림픽 당시 남자 자유형 400m 은메달리스트이자 2005년 캐나다 몬트리올 세계선수권대회 이 종목 우승자였다. 경기 뒤 “함께 경기를 한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박태환에게 해킷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천식을 앓던 7살 때 치료에 좋다는 의사의 권유로 수영을 시작한 박태환의 수영인생은 시련과 극복의 연속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소년체전에 처음 나가 또래 선수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확인하고, 중3 때 국가대표로 뽑혀 올림픽 무대를 밟을 때까진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이없는 실격을 당한 뒤,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말없이 지내기도 했다.
지난해 4월, 세계쇼트코스수영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에서 한국 수영 사상 최초로 은메달을 땄을 때도, 대회 두달 전 맹장수술을 받아 훈련량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번 대회도 마찬가지. 발바닥 티눈 수술과 코치 교체 등으로 준비기간이 2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10년 동안 자신을 가르쳐온 노민상 감독과 결별하면서 마음고생도 겪었다. “아시아경기대회 이후 정신적으로 힘들기도 했다”는 박태환이지만 겉으론 여유만만했다. 자신의 미니홈피에서 밝혔듯이 “마음껏 편하게 즐기는” 법을 그 스스로 터득한 결과다.
아시아경기대회와 세계선수권마저 제패한 박태환의 최종 목표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다. “올림픽은 먼 이후의 이야기”라고 말해왔던 박태환도 우승 뒤 “이번 대회는 올림픽 전초전”이라며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박태환의 나이 만 18살. 그는 도하 아시아경기대회 이후에도 2㎝가 더 자랐고, 대회 직후 65㎏이던 몸무게는 10㎏ 가까이 늘었다. 언제나 ‘최초’를 새겨왔던 그에게 올림픽 챔피언의 꿈은 더 이상 헛되지 않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한겨레 2007-03-25 오후 06:28:27
2007 - 유럽연합(EU) 탄생 50주년 기념
유럽연합 회원국 정상들이 유럽연합 50돌인 25일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베를린/로이터 연합
시민들 ‘화합의 축배’ 정상들 ‘베를린 선언’ 화답 로마조약 서명한 날 기념…27개 회원국 문화 앙상블 펼쳐
광장에선 공연·클럽에선 밤새 음악·박물관에선 술도 제공
25일 오전(현지시각) 독일 베를린 시내 역사박물관. 유럽연합 공식 주제가인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유럽연합 27개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정상들은 유럽연합 출발점이 된 로마조약 서명 50돌을 맞아 역사적인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이 낭독되는 가운데 유럽연합 의장국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조제 마누엘 두랑 바호주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한스게르트 푀테링 유럽의회 의장이 나란히 앉아 서명을 했다.
‘선언’은 “유럽의 통합이 평화와 번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며 “유럽연합은 국경을 넘어 민주주의, 안정, 번영을 지속적으로 증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언은 또 “우리는 국경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며 “유럽연합은 이런 도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라고 밝혔다. 논란이 됐던 유럽연합 헌법 문제를 두고서는 “2009년 유럽연합 의회 선거 전까지 유럽연합의 새로운 공동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하자”는 선에서 언급됐다. 정상들은 서명식 뒤 기념행사가 펼쳐진 바로 옆 브란덴부르크문 앞까지 나란히 걸어가며 우의를 과시했다.
정상회의를 맞은 베를린은 온통 문화의 앙상블에 젖어 있었다. 27개 회원국 수만큼이나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지는 축제의 한마당이 펼쳐졌다. 앞서 24일 오후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는 이탈리아 가수 잔나 난니니, 영국 록의 전설 조 워커, 독일의 여성그룹 몬트로즈, 스페인 출신 라시카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공연장 주변에는 27개 나라의 전통 방식대로 만들어진 사탕과 케이크가 거리에 몰려나온 참가자들의 입맛을 돋우었다. 운터덴린덴 거리에서는 27개 회원국을 상징하는 27개의 기둥이 세워졌고, 1957년 로마조약 서명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유럽 모습을 담은 전시회가 열렸다.
‘유럽 아름다움의 밤’ 행사가 열린 16개 박물관과 화랑은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넘쳐났다. 컬처 포럼 박물관에서는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이 내걸렸다. 박물관은 특별히 축제에 어울리는 술도 팔았다. 고대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의 ‘뮤지엄 아일랜드’는 화려한 조명에 빛났고, 조명 아래서 연인들은 서로 껴안았다. 베를린의 35개 클럽도 ‘유럽 클럽의 밤’을 맞아 각 나라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이 넘쳐났다. 스페인에서 온 마리아 아벤다놀은 “유럽연합이어서 어디든 갈 수 있고, 살기도 좋아졌다”며 “마치 꿈이 실현된 것 같다”고 말했다.
베를린/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한겨레 2007-03-25 오후 06:53:13
유럽통합 50년주년과 아세안+3
50년 전 오늘 유럽인들은 본격적인 유럽통합의 시작을 알리는 로마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근거해 이듬해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3국 등 6개국으로 출범한 유럽경제공동체는 지난 50년간 심화와 확대를 거듭해 27개 회원국에, 4억9천만명의 인구, 그리고 11조유로(약 1경4000조원)의 국내총생산을 자랑하는 지금의 유럽연합으로 성장했다. 경제적 통합의 상징인 단일통화 유로가 도입됐고, 공통의 통상정책은 물론 외교·안보정책 등에서도 공통의 정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활발하다. 회원국 시민들은 자유로운 이동과 취업이 가능해지면서 개별 국가의 시민이란 정체성을 넘어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렇다고 하여 유럽연합의 현재와 미래가 장밋빛만은 아니다. 국가 간 수준의 차이가 통합을 심화하려는 노력에 걸림돌이 되고 있고, 그 결과 일부 나라들에서 유럽헌법이 부결된 것처럼 유럽통합에 대한 환멸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통합을 이끌어온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역내 강대국들의 내부경쟁 역시 때로는 불협화음을 빚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난 50년간 유럽인들이 추구해온 통합을 위한 노력은 인류 역사에서 비견하기 힘든 귀중한 실험이었다. 전쟁으로 점철됐던 과거를 극복하고, 관용과 협력과 연대에 바탕한 국가 간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추구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의 또다른 중요성은 냉전 해체 이후 유일한 초강국으로 등장해 세계를 농단하고 있는 미국을 견제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점이다. 유럽연합은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패권적 세계질서에 맞서 다른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해왔으며 베를린선언에 포함될 온난화 방지를 위한 야심적 목표 설정처럼 에너지·환경 등 전지구적 문제 해결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자임했다.
아직도 냉전의 잔재가 가시지 않은 동북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도 아세안+3라는 협력의 틀이 있다. 한·중·일과 아세안이 협력의 내용을 심화하면서 북한 등 역외 지역까지 포괄할 수 있도록 이를 확대해나간다면, 동아시아에서도 화해와 관용 그리고 연대의 새 역사가 가능해질 수 있다. 분단의 고통 속에서 중급국가로 성장한 한국은 이 과정에서 민족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한겨레 (사설) 2007-03-25 오후 05:56:08
2005 - 2005년 일본 국제 박람회가 개막되다.
2005년 세계 박람회는 2005년 3월 25일부터 9월 25일까지 일본 아이치 현(현청 소재지인 나고야 시를 포함)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이다. 행사 당시 공식 명칭은 2005년 일본 국제 박람회 (2005年 日本國際博覽會, The 2005 World Exposition, Aichi, Japan)였으며, 줄여서 ‘아이치 만박(愛知万博, 아이치엑스포)’이라고 했다. 애칭은 ‘사랑·지구박(愛・地球博)’이다.
개요
* 개최기간 : 2005년 3월 25일 ~ 9월 25일 (6개월, 185일간)
* 주최 : 재단법인 2005년 일본 국제 박람회 협회
* 면적 : 약 173ha
* 총 사업비 : 약 1900억 엔(건설비 1350억 엔, 운영비 550억 엔)
* 입장객 수 : 2,204만 9,544명(목표는 1,500만 명)
주제 /위키백과
2003 - 소설가 이문구씨 별세
- 소설가 이문구씨 별세
한국말의 말맛을 가장 잘 간직하고 표현한 소설가 중 한사람으로 꼽혀왔던 이문구씨가 2003년 3월 25일 타계했다. 충남 보령 출생인 이씨는 ‘관촌수필’ ‘우리동네’ ‘산넘어 남촌’ 등을 통해 충청도 고유의 토속어를 가장 정확하게 구사하는 작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196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이후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같은 진보적 문학인 단체에 몸담았으며, 문예계간지 ‘실천문학’을 맡아 발행하기도 했다. 그는 1998년부터 경기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쳐 왔으며, 1999년 말부터 2001년 2월말까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직을 맡았다. 평소 이씨는 “항상 문단에서 말없이 실천에 앞서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는 “문단 후배들에게도 자상한 선배이자 스승”으로 존경을 받아왔으며,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농담과 여유를 잃지 않았던 대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위암 수술 직후인 2001년 4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 선배 문인들은 색깔을 구분하거나 무리를 질 경우에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며 문학 판의 편가르기와 분열이 궁극적으로 “안으로는 문학을 잃고 바깥으로는 독자를 잃는다”고 걱정했다. 이씨는 2001년 봄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은 후 평소와 같은 문단 활동을 펴 왔으나, 2002년 말 여러 문학상 심사와 시상식 등에도 몸을 아끼지 않는 등 무리를 하다 지병이 악화돼 재입원했다.
그 후 지인과 후배들을 불러 마지막 만남으로 이승의 연을 정리하며 “나를 화장해 뼛가루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고향 관촌 뒷산에 뿌려라. 내 이름으로 된 문학상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으로 이승에의 미련도 거두었다. /조선
소설가 이문구씨 별세
소설가 이문구씨가 25일 밤 10시40분 지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62.
이문구씨는 충남 보령 출신으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1966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전쟁과 이데올로기 투쟁에 연루되어 파괴된 가족과 고향을 소재로 삼은 연작소설집 <관촌수필>, 1970, 80년대 농촌의 현실을 여실하게 재현한 연작소설집 <우리동네> 등으로 문명을 날렸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냈으며, 한국문학작가상,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임경숙(50)씨와 아들 산복(26)·딸 자숙(24)씨가 있다. 장례식은 28일 오전 8시 서울대 병원에서 문인장으로 열린다. (02)760-2022.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2003.02.26(수) 21:50
그 유명한 만연체 문장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글을 말없음표로 처리하고 싶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선대이든 후대이든, 과거거나 미래거나 도저히 손대지 못할 것 중의 으뜸이 죽음인데요, 그 무서운 죽음이 적나라하게 눈앞에 다가와 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언제였던가요. 벌써 십오 년쯤 되었을 겁니다. 선생님께서 보령 시골집에 내려와 계실 때였습니다. 멀리서 흠모하다가 한번 뵈러 간 적이 있었지요. 흙벽 도배된 자그마한 골방에서 선생님은 이벌식 구식 타자기를 두고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일년 열두 달이 일목요연하게 박혀 있는 한 장짜리 국회의원 달력이 유일한 장식이었습니다. 직접 가꾸고 수확하여 드시는 결명자차도 기억이 새롭습니다.
가갸거겨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외로운 곳에서 거대한 산처럼 말없이 계시는 모습 하나로 작가의 자세를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설은 어떤 곳에서 어떤 가꿈을 필요로 하는가. 소설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공급되고 투여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 답을 저는 그곳에서 얻었습니다.
가십니까, 선생님.
며칠 전 병상에서 뵈었을 때 저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장대한 체구. 꿈틀거리는 굵은 눈썹. 인자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 억센 손마디. 그 어디에도 죽음이 깃들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가십니까. 도대체 무어가 그리 급하십니까.
선생님은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태어나셨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의 노동으로 해결하셨습니다. 풍요와 과잉의 자본주의 속에서 단 한번도 부자가 되어보지 못하셨습니다. 무시무시했던 저 총칼의 시대 폭력과 야만에 맞서 정면에서 대항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부와 항거의 일상에서 화려한 공간은 애써 피하시고 질고 궂은 자리를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뛰어난 작품들을 흔한 작업실 하나 없이 사무실에서, 거실에서, 시골 골방에서 써오셨습니다.
선생님의 그 유명한 만연체 문장은, 평지를 달리다가 문득 고개를 넘고 고개 넘어 쉬는 듯하다가 휘어지고 휘어진 끝에 끊어질 듯하다가도 다시 긴 숨으로 이어나가는 그 문장은 인간에 대한 애정말고 무엇으로 해석이 가능할까요. 매몰차게 끊지 못하는 그 부드러운 마음말고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더디긴 하지만 이제 희망을 가질 때가 왔다고들 합니다. 그러니 자식 결혼시키고 손주도 보면서 편히 쉬셔도 될 듯하지 않습니까 아니 오래도록 꿈꾸어 오셨던 작가들의 복지문제에 대해 하실 일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치 오래 걸린 과제 하나 끝난 것처럼, 붉은 동백꽃 수직으로 낙하하듯, 이렇게 가시는군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이 냉혹한 이별 앞에서 저희는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굳이 가시겠다면 부디 평안하고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조아려 빌 뿐입니다.
한창훈/소설가 /한겨레 2003.02.26(수) 22:40
소설가 이문구씨 별세
이문구(李文求, 1941년 4월 12일 ~ 2003년 3월 25일)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충청남도 대천(大川)에서 출생하였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66년 《현대문학(現代文學)》에 소설이 추천 완료되면서 문단에 나왔고 《월간문학》,《한국문학》 등의 편집장을 지냈다. 원래 명쾌한 문장으로 사회 풍자소설에 능했는데 1970년대 초부터 토속어(土俗語)를 짙게 쓰면서 농촌사회의 현실을 주로 그렸다. 주요 작품에 《우리 동네》,《관촌수필》 등이 있으며, 저서로 창작집 《해벽(海壁)》, 장편소설 《장한몽(長恨夢)》 등이 있다. 2000년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위키백과
2003 - 미국 LA법원, 스팸메일에 첫 실형 선고
미국 LA법원, 스팸메일에 첫 실형 선고 스팸-스팸메일
스팸의 대부분은 음란사이트의 선전이나 특정제품의 광고 및 홍보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스팸을 보내는 스패머들은 인터넷상의 메일링 리스트를 가로채거나 뉴즈넷에 포스팅되는 헤더를 스캔하는 방법 등으로 예비고객 명단을 확보한 후 유즈넷 뉴스그룹, 인터넷 포털사이트나 전자우편 사용자를 대상으로 무분별하게 기사를 포스팅하거나 메일을 보내고 있다. 스패머들이 합법적인 메일링리스트 개설 등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 이러한 편법을 사용하는 것은 이런 스팸의 대부분은 내용 면에서 폰팅이나 음란사이트 유인 등의 불법성을 띠거나, 사기성을 띤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3월에는 악성코드로 도용한 다른 사람의 개인정보로 도박사이트를 광고하는 스팸메일과 스팸성 게시물을 유포하던 일당이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에 의해 적발된 사례가 있다. /위키백과
2002 - 아프가니스탄 북부 강진. 최소 2000명 사망
지진으로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 나린시에서 한 아이가 울부짖고 있다. /조선
아프가니스탄 북부 강진. 최소 2000명 사망
아프가니스탄 북부 바글란주의 수도 나린시에서 2002년 3월 25일 리히터 규모 6.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이어 26일에도 여진이 계속돼 2000명 이상이 숨지는 등 6000여명의 사상자와 2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카불 북쪽 140km에 위치하고 있는 나린시는 이번 지진으로 90% 이상이 완전히 파괴됐다.
피해 지역에서는 유엔 구호대가 음식과 옷, 수천장의 담요와 텐트 등 지원에 나선 가운데 영국이 이끄는 국제안전지원대는 피해 규모 파악을 위한 정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지형이 험하고 도로가 지진으로 파괴돼 현장 접근에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수도 카불에서 피해 지역에 이르는 길 곳곳에 최근 탈레반과 전투 과정에서 뿌려진 지뢰 때문에 구조활동이 난항을 겪었다.
사고가 난 힌두 쿠시 산악 지대는 지진이 잦은 곳으로, 같은 해 3월 3일에도 리히터 규모 7.2의 강진이 발생, 100명 이상이 숨졌으며 1998년에도 2차례 강진으로 약 9000명이 사망했다. /조선
1992년] 우주미아, 세르게이 크리칼료프 등 313일 만에 귀환 우주정거장 미르호(Mir)에서 우주 탐사임무를 수행하다가 구 연방의 해체로 지구귀환이 늦추어진 세르게이 크리칼료프와 알렉산데르 볼코프 등 우주비행사 3명이 우주선 소유즈 TM-13호를 타고 우주미아생활 313일 만인 1992년 3월 25일 귀환했다.
1991년 5월 18일 구 소련 우주정거장계획의 하나로 미르호에 탄 크리칼료프는 만10개월 열흘간을 우주에 머물며 각종 측량과 기계실험을 해왔다. 크리칼료프가 우주미아가 된 것은 러시아가 돈이 없어서 그의 귀환을 위한 우주선을 발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그가 돌아오게 된 것은 독일이 2천4백만달러를 지원해 귀환을 위한 우주선 발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313일 만에 지구로 귀환한 소련 우주비행사 세르게이 크리칼료프. /조선
1991 -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 대회 남북단일팀 참가
남북탁구단일팀 첫 해후
[어제의 오늘]1991년 남북탁구단일팀 첫 해후ㆍ46일간의 ‘작은통일’
어언 18년 전의 일인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1991년 3월25일 오후,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할 남북단일팀 ‘코리아’가 한 달간의 합동전지훈련을 위해 일본에서 해후했다. 취재차 남측선수단과 같은 비행기를 탔던 기자가 입국수속을 마치자마자 역시 막 도착한 북측선수단을 만나러 무거운 짐을 끈 채 마구 뛰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분단 46년 만의 첫 만남. 한반도를 그린 ‘파란 단기’의 기치 아래 남북의 젊은이들은 전지훈련 도중 금방 ‘작은 통일’을 이뤘다.
남은 북을, 북은 남을 모방했다. 북한 리분희는 저도 모르게 ‘앗싸’ 대신 ‘파이팅’을 외쳤고, 현정화는 ‘기랬지. 이 동무들’하면서 북측 말을 흉내냈다. 4월24일 개막된 대회에서 현정화·홍차옥(이상 남측)·리분희·유순복(이상 북측)으로 구성된 여자팀은 10전승으로 결승에 올랐다. 결승진출까지는 남측의 현정화가 팀을 이끌었다. 특히 난적 헝가리와의 준결승에서 리분희·유순복의 부진 속에 현정화가 2단1복을 따냈다. 코리아의 결승상대는 중국. 누구도 중국의 우승을 의심치 않았다.
이번에는 북측의 유순복이 나섰다. 유순복은 첫 단식에서 ‘핑퐁마녀’ 덩야핑을 2-1로 침몰시킨 뒤, 종합스코어 2-2로 맞선 마지막 단식경기에서 가오쥔을 2-0으로 꺾었다. 덩야핑·차오훙·가오쥔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지금도 떠오른다. 전문가들은 “북측 유순복의 우직한 스카이 서브와 백핸드 푸시에, 남측의 전진속공과 강한 회전 드라이브를 접목시킨 게 주효했다”고 입을 모았다. 1973년 사라예보대회 우승 이후 18년 만의 여자단체전 우승. 약 한 달간의 ‘통일연습’만으로도 코리아 단일팀은 ‘세계최강’이 된 것이다. 남북통일의 시너지 효과가 얼마나 큰지를 확인시켜준 ‘46일간의 통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 5월7일 눈물 속에 헤어진 남북탁구 ‘코리아’는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대결 속에 더는 구성되지 못했다. 기자와 스스럼없이 농을 나눴던 북한선수들이 떠오른다. 대회 이후 연인사이였던 김성희와 리분희는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단다. 우승의 주역 유순복과 남자 에이스였던 리근상은 지금 주니어 선수들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되었다. 이후에도 단일팀 선수들은 해외 대회에 출전해서는 ‘이산가족의 상봉’을 즐겼다. 요즘도 역시….
이기환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3-24 18:07:55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방북한 문익환 목사(왼쪽)와 김일성 주석이 포옹하고 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인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청으로 1989년 3월 25일 평양을 방문했다. 문목사의 방북에는 재일동포 정경모씨가 동행했으며 일본과 중국을 경유했다. 문목사는 평양도착 성명을 통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조국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평양에 왔다고 밝혔다.
문목사는 27일 다른 행로로 북한에 간 소설가 황석영씨와 정경모씨와 함께 김일성 주석을 면담했다. 4월 2일에는 평양에서 문목사와 북측의 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의 공동명의로 ‘4.2 남북공동성명서’가 발표됐다. 문목사는 열흘간의 북한 방문을 마치고 4월 3일 북한을 떠나 중국과 일본을 경유해 4월 13일 귀국했다.
정부는 당국과의 사전협의 및 허가 없이 평양을 방문한 문목사의 행위가 명백한 실정법위반이라고 규정, 귀국하자마자 구속했다.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그의 행동을 ‘감상주의적,이상주의적’으로 규정, 7년 징역형을 확정했으나 다분히 정치적인 고려로 1990년 10월 20일 1년6개월여 만에 형집행 정지로 석방했다.
문익환 목사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에 김대중, 이문영씨 등과 함께 구속돼 20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1977년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 뒤에도 국민연합선언서사건(1978년), 내란예비음모죄(1980년), 집시법위반(1986년), 국가보안법위반(1989년)등 모두 6차례에 걸쳐 10여년간 영어의 생활을 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채 반정부 활동을 계속해왔다. 1994년 1월 18일 별세했다. /조선
1983 인류 최초로 인공심장을 이식 받은 바니 클라크 세상 떠남
미국 유타 대학 병원에서 인공 심장을 이식 받았던 클라크 박사는 수술 112일만에 사망하였다. 이 수술에는 10만 달러가 넘는 비용
이 들었다. 이 인공심장은 그 이전에 송아지나 양에 이식되어 생명을 유지시켜 주었다.
스스로 인공심장의 실험용이 되겠음을 밝힌 클라크 박사는 간질병 증세가 나타나기도 했고, 10일 동안 코에서 피가 나는 등 3번이
나 가슴을 절개하고 7번이나 사경을 헤매면서도 초인간적으로 인내하였다.
1982년] 영국 의회, 캐나다 헌법 승인
1982년 3월 25일 영국 의회가 캐나다 헌법을 승인했다. 이어 4월 17일에 엘리자베스 2세가 개정된 새 헌법을 공포함으로써 캐나다는 완전 독립을 이루었다. 1867년 빅토리아 여왕이 노바스코샤·뉴브런즈윅·캐나다를 하나의 자치령으로 합병하고,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와 영토가 이 자치령에 가입할 수 있도록 규정한 영국령북미법을 승인한 지 115년 만의 일이었다. 새로운 헌법은 "캐나다의 공식 언어는 2개이다"라는 피에르 엘리오트 트뤼도 총리의 관점과 각 주의 특별한 문제간의 타협점을 제시했다. 권리와 자유의 헌장에서는 캐나다에서 준수되어야 할 34가지 권리, 즉 종교의 자유에서부터 인구조사에 근거한 언어와 교육의 권리 등을 규정했다. 한편 강력한 분리입장을 취했던 퀘벡 주정부는 헌법개정에 반대해 법원에 제소했으나 캐나다 연방대법원은 헌법거부청구에 대한 기각판결을 내렸다./브리태니커
1981년]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 이갑성(李甲成, 1889~1981) 사망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마지막 생존자였던 연당(硏堂) 이갑성 선생! 1981년 오늘 아흔두 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연당은 3.1운동 당시 서른 살의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이갑성 선생은 1933년 신간회 사건 때문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처럼 8.15광복 전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아홉 차례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과도 입법의원과 민의원,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연당의 유해는 국립묘지의 제1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총선거
11대 국회의원 후보들의 선전 벽보 /조선
제11대 국회의원 총선거
제1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1981년 오늘 실시됐다.
이번 총선에는 민정당과 민한당을 비롯한 12개 정당과 무소속 후보들이 대거 입후보해 정당 난립현상을 보였다.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과 언론통폐합을 거쳐 수립된 제5공화국은 언론통제와 정치인 활동 규제,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어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여당인 민정당이 지역구와 전국구를 포함해 151석을 차지해 압승을 차지했다.
11대 총선은 신임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공고화하는 계기가 됐다. /YTN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1981년 3월 25일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약 80%에 이르는 초선 의원이 원내로 진출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제정된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등 각종 법적 조치에 의해 상당수 정치인들이 정치활동 구제를 받거나 정치적 이유로 처벌됨으로써 기존 정당이 와해되고 재편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야권 정치인을 중심으로 민주한국당이,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등 구여권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이 만들어졌으며, 그밖에 민권당, 신정당, 민주사회당 등이 창당되면서 정치권은 외형상 다당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총선결과 전체의석 276석(전국구 92석 포함) 가운데 민주정의당 151석(전국구 61석), 민주한국당 82석(전국구 24석), 한국국민당 25석(전국구 7석), 무소속 10석, 민권당 2석, 신정당 2석, 민주사회당 2석, 민주농민당 1석, 안민당 1석을 차지했다. /조선
1981년] | 내무부, 연좌제 폐지 | ||
1981년 3월 25일부터 연좌제가 폐지됐다. 내무부는 새 헌법 규정에 따라 8.15직후의 혼란과 6.25 등 특수한 정치상황아래 발생한 신원특이자들에 대한 기록을 일제히 정리했으며, 形 실효에 관한 법률시행에 따라 전과기록도 정리, 말소해야할 전과자의 기록을 모두 말소했다고 발표했다. 신원특이자 기록정리작업에서는 월북자나 반국가사건관련 당사자의 일부 중요기록만을 선별 정리하고, 당사자 이외의 직계비속, 형제자매, 배우자, 부모를 비롯한 모든 연고자의 기록은 완전히 정리하여 이들이 신원조사과정에서 일반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했다. 이번 정리로 과거와 같이 반국가사건 등에 관련이 있었던 연고자는 앞으로 해외여행, 취업 및 공무원 국영기업체임직원으로 임용되려 할 경우 아무런 불이익처분을 받지않게 됐으며 신원조회처리기간도 크게 단축되게 됐다. 연좌제 폐지 및 전과말소에 관한 이같은 조치는 1980년 8월 그 기본방향이 마련되었으며, 새 헌법과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그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었다. 치안본부 관계자는 이 조치에 따라 본가는 물론 처가쪽의 그 어느 누구가 부역 등 반국가 행위를 한 일이 있어도 신원조사과정에서 아무런 차별취급을 받지 않으며 또 신원조사과정에서 적-부적판정을 보유하는 일도 없게 돼 일반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고 밝혔다. |
1976 독일의 화가 요제프 알버스(1888-1976) 세상 떠남
요제프 알버스는 색깔이 대비되는 그림과 같은 일련의 사각형 도형을 그렸다. 그는 끊임없이 변하는 색채로 사각형을 그렸고
자신이 의도하는 색채 실험의 대상으로 사각형을 이용했다. 색채 조합이 얼마나 무한히 가능한가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나는 80 종류의 노랑과 40 종류의 회색을 사용하고 있다."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이잘(Faisal ibn Abdul Al Saud, 1906~1975) 피살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이 1975년 3월 25일 조카에게 피살돼 오후 2시13분 사망했다. 향년 68세였다. 조카는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리야드 궁전에서의 암살 사건은 국민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왕실은 정신이상인 조카의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표했지만 나중에 파이잘 국왕에 대한 사적인 감정과 절대왕정에 대한 사상적 비판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단두형에 처해졌다.
1964년 11월 국왕에 즉위한 파이잘은 곧 국가재정을 건전히 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해 국민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제3차-4차 중동전 때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국가들에게 석유금수라는 강한 태도를 보였으나 중동평화에 대해서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함께 평화추진을 위해 노력했다.
사우드 알 파이잘 사우디아라비아 전 국왕. /조선
1969 - 우리 나라 처음으로 카톨릭의대서 콩팥이식 수술 성공
국내 첫 장기이식 성공
[어제의 오늘]1969년 국내 첫 장기이식 성공ㆍ세계 정상 ‘한국 이식 의학’ 밑거름
1969년 3월25일 오후 서울 명동의 성모병원(가톨릭대 성모병원의 전신). 가톨릭대 의대 성모병원 외과 이용각, 내과 전종휘·민병석, 비뇨기과 임수길, 마취과 정운혁, 임상병리과 이종무, 면역학의 기용숙·이종훈 교수 등 15명의 의사와 간호사 등 수십명의 의료진이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3시간8분. 이들이 콩팥 이식에 성공하면서 우리나라 의학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시작됐다. 바로 국내 첫 장기이식이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날의 개가는 의료진이 연구를 하다가 치료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내 몸을 떼어서라도 아들을 살리겠다’는 모성애가 이뤄낸 것이었다.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환갑이었던 어머니는 미국에 있던 둘째아들이 만성신장염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두 달 전에야 들었다. 어머니는 전재산인 집을 팔아 치료비로 보냈지만 아들의 병세는 심해져만 갔다. 결국 아들은 3월14일 콩팥염증으로 보통사람의 3배나 되게 퉁퉁 부은 몸으로 들것에 실려 귀국했다. 어머니 곁에서 임종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형은 동생을 하루라도 더 살리기 위해 유명하다는 국내의 병원들을 모두 다니며 마지막 방안을 찾았고, 결국 성모병원에서 수술을 승낙했다.
형이 콩팥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성한 아들마저 죽일 수 없다며 수술대에 올랐다. 지금이야 장기이식이 일반적인 치료법으로 정착됐지만 당시엔 목숨을 내건 수술이었다. 수술 성공 후 의료진은 물론 주인공들도 한동안 화제가 됐다. 수술을 마친 아들은 건강한 몸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직장생활을 계속하며,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한·미 신장이식재단을 창립하기도 했다.
이날의 수술 성공은 현재 세계 정상급에 오른 우리나라 이식 의학의 바탕이 됐고 신장학과 면역학 등도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첫 수술은 콩팥이었지만 이식 범위도 간장·췌장·심장·폐·소장 등 장기 전반으로 넓어졌다. 수술을 주도했던 의료진은 이후에도 활발한 연구성과를 이뤄내며 국내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날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장기이식 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지만, 정작 장기기증이 활발하지 않다보니 외국에 원정수술을 떠나는 환자도 적지 않다고 한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 기증을 계기로 장기기증 문화가 크게 확산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장기기증을 기다리는 대기자가 1만명을 넘는다.
송현숙 기자 song@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3-24 21:50:37
1961 - 인기 영화인 시상식
국제 영화사가 주최하는 제5회 인기 영화인 시상식이 1961년 오늘 열렸다.
여우주연상은 1957년 '황혼 열차'로 데뷔해 일약 스타가 된 김지미 씨가 받았다.
남우조연상은 액션과 코믹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황해 씨가 수상했다.
이 밖에 여러 영화인들이 공로상과 신인상, 기술상 등을 수상했다. /YTN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 출범 유럽은 작은 땅에 여러 나라가 얽혀 있는 탓에 역사적으로 늘 경쟁과 대립, 그리고 이로 인한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는 중국과 이슬람 세력에 뒤져 있던 유럽이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동인(動因)이 되기도 했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인들은 반복되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오랜 꿈인 유럽통합을 모색한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석탄과 철강산업의 통합을 제창하며 꿈의 실현에 나섰다. 이 제안은 유럽연합이 이 날을 ‘유럽의 날(Europe Day)’로 기념할 만큼 유럽통합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듬해 4월 프랑스·서독·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발족시키면서 ‘유럽 합중국’을 향한 유럽인들의 먼 여정이 시작됐다.
1957년 3월 25일에는 6개국 대표가 로마에 모여 회원국 간 자본·상품·노동력·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표로 한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창설에 조인함으로써 유럽통합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굳어졌다.
1957년 3월 25일, 유럽 6개국 대표가 로마에 모여 유럽경제공동체(EEC) 창설에 조인했다. /조선
1954년] 제1회 학-예술원 회원 선거
대한민국학술원은 학술발전에 공적이 있는 과학자를 우대·지원하여 학술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과학자들의 대표기관이다. 1952년 제정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3월 25일 초대 학술원회원 50명을 선출하고 같은 해 7월 17일 개원하였다. 1985년 8월 12일 대한민국학술원 사무국과 대한민국예술원 사무국이 통합되었으며, 1988년 12월 31일 대한민국학술원법이 제정되면서 문화보호법은 폐지되었다. 1990년 1월 3일에는 대한민국학술원 사무국과 대한민국예술원 사무국이 다시 분리되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우리나라 예술가의 실질적인 대표기관이다. 1952년 8월 7일 법률 제248호 문화보호법에 따라 설치되어 1954년 7월 17일 443명의 문화인 대표들이 뽑은 25명의 일반회원과 이들이 추천한 10명의 추천회원 그리고 대통령이 임명한 4명의 임원회원 등 총 39명의 회원으로 개원하였다. 초대회장은 고희동(高羲東)이다. 1955년 4월 9일 예술원상 수상규정을 제정하고, 1988년 12월 31일 대한민국예술원법을 제정하였다. /naver
1949년] 주미대사관 창설, 초대 주미대사 장면 ← 장면 초대 주미대사가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정한 신임장
1949년 3월25일, 장면(張勉) 초대 주미대사가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함으로써 한미 양국의 대등한 동반자 관계가 시작됐다. 장면은 주로 정치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막 건국된 대한민국을 세계속에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으로서 우리나라 외교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이다.
그의 첫 외교활동은 1948년 9월 파리에서 열린 제3회 유엔총회에 수석 대표로 파견되면서 시작됐다. 각국 대표를 상대로 한 3개월간의 노력은 마침내 대한민국이 유엔의 승인(12월12일)을 받는 결실을 맺도록 한다. 장면은 그해 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을 승인(1949년1월1일)한 미국과 양국간의 현안을 논의하던 중 1월5일 주미대사 발령 소식을 접한다. 그는 곧 일제 때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가 들어있던 빌딩을 임시 청사로 정한 뒤 1시간 당 5달러의 렌트카(곧 ‘뷰익’을 구입)를 빌려타고 각국 대사를 만나 신생국의 존재를 알려나갔다.
장면의 활약상은 6ㆍ25때 두드러진다. 6월24일 오후 5시경(미국 시각)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쟁소식을 전해들은 장면은 즉각 미 국무성으로 달려가 유엔 안보리 소집을 협의한다. 25일과 27일 유엔 안보리가 소집되자 장면은 북한의 즉각철수와 군사행동 결의안이 통과되도록 국제사회를 설득하고, 라디도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미국인들의 지지를 호소했다./조선
1946 해방 뒤 최초의 경평(서울-평양) 축구전[京平蹴球戰], 서울운동장에서 열림
*1929년부터 경성(京城) 축구단과 평양(平壤) 축구단이 서로 장소를 바꾸어 가며 가졌던 친선경기. 첫 대회는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3차전으로 진행되었는데 평양팀이 이겼고, 30년 경성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 2 회대회에서는 경성팀이 승리했다. 그러나 31·32년에는 주최측인 조선일보사의 사정으로 중단되었다가, 33년 경성축구단·평양축구단이 정식으로 창단되어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제 3 회대회가 재개되었는데, 이 대회 마지막 경기에서 심판판정시비가 지역감정으로 비화되면서 또다시 중단되었다. 그 후 ★1946년 자유신문사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2차전으로 어렵게 재개된 경평축구는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38선으로 남북통행이 제한됨으로써 또다시 중단되었다가 국민들의 호응속에 90년 10월 11일에는 평양에서, 10월 23일에는 서울에서 경평축구전이 다시 열렸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46 제1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UN安全保障理事會,UN Security Council] 열림,
*국제연합의 주요 기관 가운데 하나. 국제평화와 안전유지에 대하여 주요한 책임을 지고 있다. 주요 임무는 평화를 파괴할 우려가 있는 분쟁 또는 사태를 평화적으로 처리하며,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또는 침략행위 등에 대한 중지·권고 또는 강제조치를 결정한다. 이에 관련된 군비규제계획의 작성,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사항 이행, 지방적 분쟁에 대한 지역적 처리 장려, 지역적 강제행동의 허가, 전략지구의 감독 등을 한다. 또한 총회와 공동으로 가맹승인·제명·권리정지 및 사무총장의 임명 등을 관장한다. 5개 상임이사국과 10개 비상임이사국 등 15개국으로 구성된다. 상임이사국은 미국·중국·프랑스·러시아연방·영국 등 5개국이며 비상임이사국은 총회에서 해마다 반수를 선출하는데, 임기는 2년이며 재선을 허용하지 않는다. 총회에서의 선출기준은 ① 국제연합 목적에 대한 공헌도 ② 형평한 지리적 배분으로, 실제로는 두번째 기준에 비중을 두고 있다. 표결은 절차사항에 대하여는 9개 이사국의 찬성투표가 필요하며, 비절차사항은 상임이사국의 동의투표를 포함하는 9개 이사국 찬성투표에 따라 결정한다. 비절차사항의 경우 상임이사국이 반대투표를 하면 결의가 성립하지 않아 이를 거부권이라 하지만, 반대로 유효하게 결정(강제조치를 포함)되면 모든 가맹국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진다. 안전보장이사회는 강제조치 결정 등 강력한 권한이 있으나, 그 실효성은 결국 상임이사국의 의사와 관계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34년] 미국의 여성운동가·정치운동가·편집인 스타이넘(Gloria Steinem) 출생 ← Gloria Steinem at news conference, Women's Action Alliance, January 12, 1972
1934년 3월 25일 Toledo, Ohio, USA ~ .
"신발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꼭 발을 바꿔야만 하는가? " - 글로리아 스타이넘
스타이넘은 20세기 후반 여성운동을 이끈 미국의 언론인이다. 1960년대에 뉴욕에서 자유기고가로 일하면서 여러 자유주의적 급진운동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민권운동,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 등과 더불어 수십 년 만에 새로이 부각된 페미니즘 운동으로 곧장 이어졌다. 그녀는 1971년 여성의 정치 참여를 촉구하는 전국여성정치간부회의를 소집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뒤이어 베티 프리던 등과 함께 미국 최초의 페미니즘 잡지 <미즈 Ms.>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초판부터 매진되었고, 5년이 채 못 되어 50만 부 발간을 기록하는 등 선풍을 일으키면서 여성 문제의 중요한 발언대가 되었다. 그녀는 잡지 편집과 정치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성난 행동과 매일의 반란 Outrageous Acts and Everyday Rebellions>(1983)·<내부로부터의 혁명 Revolution From Within>(1992) 등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을 써내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928년] 안창호, 김구 등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1924년 중국국민당이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국공합작(國共合作)’으로 국민당의 단일정당으로 결속된 것을 계기로 중국·만주 등지에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한인들 사이에 ‘유일당(唯一黨)’ 촉성운동(促成運動)이 일기 시작하였다. 사상과 주의 ·주장을 초월하여 독립운동자들이 하나의 정치조직 아래 결속해야 한다는 데 그 명분을 두었다. 1927년 임정요인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을 개정하여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정당이 완성될 때 최고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고 헌법에 밝힘으로써 유일정당이 최고헌법기관임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분열 ·대립되자 유일당에 참여하려던 좌익계 독립운동자들이 이를 외면하게 되어 결국 유일당 결성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정당조직의 의욕을 북돋아준 결과가 되어 각지에서 여러 정당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그 하나가 1930년(1928년이라는 설도 있음) 상하이[上海]에서 민족주의 민주주의 신봉자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치세력으로서 조직된 한국독립당(한독당이라 약칭함)이었다.
여기에는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 등이 참여하였다.
1927년] 독문학자 강두식(姜斗植) 출생
1927. 3. 25 서울~.
195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독문과를 거쳐 195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73년에 서울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9년 중앙대 교수, 1962년 서울대 교수, 1964년과 1971년에 한국·독일 문학회 회장, 1980년에 서울대 인문대학장 등을 지냈다. 현재(1990) 서울대 독문과 교수이며 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1965년〈파우스트〉를 번역하여 한국 펜클럽 번역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괴테평전〉·〈독한사전〉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26 항일투사 박열 사형선고
박렬의 초명(初名)은 준식(準植)으로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운동에 투신하였으며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그의 애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협조를 얻어 천황 암살을 실행하려던 직전에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천황 암살을 위해 해외에서 폭탄을 수입하려 했다는 것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으므로 1926년 3월 25일에 가네코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4월 5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두 사람이 일본검찰의 문초를 받을 때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일본 판사가 촬영, 사진이 사회에 누출되자, 정부에서 국사범(國事犯)을 우대한다고 야당에서 들고 일어나는 등, 일본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두 사람이 복역 중 가네코는 형무소에서 자살하였다. 1945년 8·15광복으로 박렬은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저서에 《신조선혁명론(新朝鮮革命論)》이 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26년] 무용가 송범(宋范) 출생
1926. 3. 25 충북 청주~.
본명은 철교(喆敎). 17세 때 신무용의 대가인 조택원(趙澤元)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춤에 뜻을 두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한동인(韓東人)에게 1년간 발레를 배웠다. 또 장추화(張秋華)무용연구소에서 거의 독학으로 인도춤과 마리비그만 등 표현주의 경향의 모던 댄스를 익혔다. 1948년 현대춤 계열의 작품 〈습작 習作〉으로 첫 선을 보인 뒤 1949년 〈출진 出陣〉·〈인도의 연가〉, 1950년 〈수련몽 睡蓮夢〉을 내놓아 주목받았다. 6·25전쟁 때 피난지에서도 〈망향〉·〈양자강〉 등을 발표했고, 1956년에는 〈패배자〉·〈죽음의 승리〉·〈항거〉 등을 발표하여 현대인의 삶의 고뇌를 표현했다.
1957년부터는 발레 계열 작품으로 〈환상교향곡〉·〈유쾌한 휴일〉·〈무도회의 권유〉 등을 해마다 발표하면서 방향전환을 시도했다. 1961년 한국발레단을 창단하고 1962년부터 13년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지내면서 한국춤계를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서울예술고등학교·서라벌예술대학 등에서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그 뒤에도 창작춤 〈강강술래〉·〈우물가에서〉·〈전원풍경〉·〈봄의 찬미〉 등으로 일본·방콕·유럽 등지로 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리나라 창작춤 활동의 토대를 세웠다. 1972년 국립무용단 초대 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별의 전설〉·〈왕자 호동〉·〈사의 승무〉·〈춘향전〉·〈도미부인〉 등을 발표했다. 중앙대학교 무용과교수,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 예술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상했다./브리태니커
1925년] 미국 작가 오코너(O'Connor, Mary Flannery) 출생
1925. 3. 25 미국 조지아 서배너~1964. 8. 3 조지아 밀리지빌.
미국의 소설가·단편작가.
주로 남부의 시골을 배경으로 인간의 소외를 다루었으며, 인간과 신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밀리지빌에 있는 조지아주립여자대학을 졸업한 뒤 아이오와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1946년 〈악센트 Accent〉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해 문단에 등단했다. 첫 장편소설 〈현명한 피 Wise Blood〉(1952)는 자신이 '종교를 갖지 않은 신앙심'을 탐구했다고 표현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그녀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적인 대화에 대한 예민한 감식력, 날카로운 종교적 상상력, 이후의 작품을 특징짓게 된 부조리 성향 등이 결합되어 있다. 그뒤 발표한 단편들을 모아 출판한 첫 단편집 〈착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외(外) A Good Man Is Hard To Find, and Other Stories〉(1955)로 형식의 거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밖의 작품으로 장편소설 〈끝까지 공격하는 자는 그것을 얻는다 The Violent Bear It Away〉(1960)와 단편집 〈오르다 보면 모든 것은 한 곳에 모이게 마련 Everything That Rises Must Converge〉(1965)이 있다. 특별한 행사 때 쓴 산문들을 모은 〈신비와 풍습 Mystery and Manners〉은 1969년에 나왔다. 1971년 유고집으로 출판된 〈단편집 Complete Stories〉에는 이전에 책으로 출판되지 않은 여러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홍반성낭창으로 10년 이상 불구로 지내다가 결국 이 병으로 죽을 때까지 어머니가 물려받은 농장에서 작품을 쓰고 공작을 키우며 수수하게 살았다. 그녀가 죽은 뒤 출판된 서간집 〈존재의 습관 The Habit of Being〉(1979)은 인습적인 규격화를 거부한 한 작가의 삶과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1922년] 국문학자 정병욱(鄭炳昱) 출생 1922. 3. 25 경남 하동~1982.
호는 백영(白影).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1948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48~52년 부산대학교 조교수, 1952~58년 연세대학교 조교수, 1958~85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73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판소리학회를 조직하여 판소리감상회를 열기도 했다. 학술원 정회원이었고, 하버드대학교 초빙교수로서 한국고전시가와 문학에 대한 논문발표 및 강의, 미국·프랑스·일본 등의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했다. 1952년 〈자유문학〉에 〈국문학의 개념규정에의 신제언(新提言)〉을 발표한 뒤, 〈시조부흥운동 비판〉(신태양, 1956. 6)·〈고전문학의 순화문제〉(자유문학, 1959. 2) 등을 발표했다. 낙선재문고(樂善齎文庫)를 정리·해제했고, 낙선재 소설의 사회사적·문화사적 의의를 밝힌 논문 〈이조 말기 소설의 유형적 특징〉을 발표했다.
주요저서로는 〈국문학산고〉(1959)·〈한국고전시가론〉(1976)·〈한국고전의 재인식〉(1979)·〈한국의 판소리〉(1981) 등이 있다. 특히 시조 2,276수를 가나다순으로 정리하여 출전과 해제를 붙인 〈시조문학사전〉(1966)은 이 분야에서 뛰어난 책이다. 1967년 한국출판문화상, 1979년 외솔상, 1980년 3·1문화상 등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21년] 프랑스의 연극, 영화 배우 시뇨레(Signoret, Simone, 1921~1985) 출생
본명은 Simone Kaminker.
1921. 3. 25 독일 비스바덴~1985. 9. 30 프랑스 외르.
따뜻하고 용감한 여성역을 훌륭하게 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에서 프랑스 국적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자랐다. 소르본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좌익 운동에 참가했으며, 여러 편의 연극에 출연한 뒤 영화 〈금투구 Casque d'or〉(1951)로 스타가 되었다. 〈꼭대기에 있는 방 Room at the Top〉(1958)으로 영국과 미국의 영화협회 및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배우로 상을 받았으며, 1965년에는 〈바보들이 탄 배 Ship of Fools〉로 다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51년 첫 남편인 영화감독 이브 알레그레와 이혼한 뒤 가수이며 배우인 이브 몽탕과 결혼했다. 그들 부부는 함께 로젠버그 처형과 베트남 전쟁,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 프랑스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56년의 헝가리 사태로 그들은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녀가 자신의 자서전 〈그리움은 옛날의 그리움이 아니다 La Nostalgie n'est plus ce qu'elle était〉(1976)에서 적고 있듯이 그들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에게 그들의 느낌을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그녀는 몇 편의 텔레비전 연속극에도 출연하여 성공했으며, 1985년 출판한 2번째 소설 〈안녕, 볼로디아 Adieu, Volodia〉를 비롯한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출판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19 독일 조각가. 판화가 빌헬름 렘브루크[Lehmbruck, Wilhelm, 1881.1.4∼1919.3.25]사망,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장학금으로 1901∼1907년 뒤셀도르프미술학교에서 배웠다. 1910∼1914년 파리에 머물면서 A.로댕, C.브랑쿠시, 특히 A.마욜의 영향을 받고, 1914년부터 베를린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부터 마욜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풍만한 완결성과 선을 강조하는 가느다란 고딕적 지체(肢體)를 융합하고, 공간과 매스의 독특한 긴장표현에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고뇌와 애수로 가득한 청년상이 많다. 주요작품으로 《엎드린 남자》(1915∼16:슈투트가르트 미술관 소장) 《앉아 있는 청년》 등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1918년]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 사망 ←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1909년)
‘방탕한 아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유희’ ‘아라베스크’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근대 작곡가 드뷔시가 1918년 3월 25일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드뷔시는 근대음악에서 제일 처음으로 낭만음악에 반대하여 인상주의를 개척한 인상파 음악의 원조이다.
드뷔시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아 11살 되던 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22살 때에는 칸타타(방탕한 아들)로 로마 대상을 받아 로마로 유학했다. 그러나 유학생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러시아와 유럽을 여행하며 경험과 감수성을 풍부히 하기도 했다.
드뷔시의 작품을 보면 초기에는 후기 낭만주의의 경향을 보였으나 무소르크스키의 음악을 접하고 바그너로부터 멀어지며 점점 인상주의 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눈에 띤다. 드뷔시의 인상주의 음악은 미술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섬세하고 감각적인 음색으로 표현해 낸다. 문학에서의 상징주의를 음악에 표현하기도 했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인상주의 음악을 창시한 첫 작품이다. 드뷔시는 관현악곡, 성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 많은 작품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조선
1909 창경원 동식물원 준공
1899년] 한국 최초의 여성 체육전문가 김신실(金信實) 출생
1899. 3. 25 서울~1993. 11.17 서울.
국내에서 영신소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하와이로 이주, 이승만 박사가 교장으로 있던 한국기독교학교에서 6년 동안 공부했다. 그뒤 미국 오하이오 주 오버린(Oberlin)에서 고등학교를 마쳤고, 오버린대학 체육학과, 미시간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30년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여전에 교수로 부임하여 한국 전통을 살리는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다채로운 운동경기를 소개·보급시켰다. 당시 처음 소개된 운동으로는 6인제 여자 농구와 여자 연식야구, 배드민턴·포크댄스·현대무용·필드하키·기계체조·크리켓·등산·탁구·펜싱·수영 등이 있다. 또한 처음으로 여러 가지의 응원복을 입고 응원가를 부르는 응원도 시작했다. 체육과 주임으로 있던 1938년 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신사참배와 창씨개명령이 내려지자 이를 거부해 1939년 9월 학교를 떠났다. 이때 중앙여자고등학교의 박순천 등이 교직을 떠났다. 8·15해방 이후 복직되어 1955년까지 이화여대 교수 겸 체육학부 부장을 역임했고, 1961년에는 같은 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해 정년퇴직했으나 1975년 까지 강사로 출강했다.
특히 사회 및 단체활동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는데, 1930~60년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연합위원과 학생부 위원장, 국제친선부 위원장·부회장을 역임했고, 동연합회 회장·위원장을 거친 후 명예 연합회원으로 활동했다. 그외에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1954~60)·부총재(1962~71)를 역임했고, 대한여성체육학회 회장(1948~58), 대한올림픽위원회 이사 및 위원(1954~56, 1964~67),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부회장(1964~73), 대한가족계획협회 부회장(1971~75) 등을 역임했다. 한편 대한민국문화표창상(1962)을 비롯하여 대한민국국민훈장 동백장, 한국 걸스카우트연맹 공로상(25주년), YWCA 공로표창(50주년), 여성체육공로자 표창장(1972), 대한적십자사 적십자인도(금)장(1976) 등을 받기도 했다. 한국여성체육학회 설립의 주춧돌 구실을 했으며 여성 체육지도자 양성과 프로그램 제공 등 여성 체육의 저변 확대와 보급에 기여한 바 크다./브리태니커
1895 을미개혁 추진
1월 1일을 기하여 양력을 채용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고종이 먼저 서양식으로 머리를 깎았으며, 내부대신(內部大
臣) 유길준(兪吉濬)은 고시(告示)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였
다. 한국에는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것이다.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
는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더구나 김홍집 내각은 이른바 친일내각이라는 소리를
듣는 형편이었으므로, 음력폐지·단발령 등은 모두 배후에서 일인(日人)이 조종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아니라 의병을 일으켜서 정부시책에 대항하였다. 정부에서는 친위대(親衛隊)를 파견하여 의병활동을 진압시켰으나, 김홍집 내
각은 무너졌고 김홍집도 피살되었다.
null /조선
을미개혁 추진
을미개혁은 을미사변(1895.10.8) 직후 새로 입각한 김홍집내각에 의해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으로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초까지 약 19개월 동안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을 광의(廣義)의 갑오개혁이라고 한다. 이 중 제3차 갑오의 개혁은 1895년 8월 하순부터 1896년 2월 초순까지 추진된 개혁을 가리킨다.
그런데 제3차 갑오의 개혁기간 중 을미사변이 발생하였고 이를 전후하여 내각의 교체가 있다. 이에 논자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을미사변 직후 새로 개편된 김홍집내각이 추진한 일련의 개혁을 별도로 구분하여 을미개혁으로도 부른다.
을미개혁은 전년도에 시작된 갑오개혁의 연장으로서,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근대화에 중요한 관건을 이루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하겠다. /조선
1881 영남 만인소 상소
1881년(고종 16) 이만손(李萬孫)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유생들이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해서 올린 상소문입니다. 1880년 8월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국왕에게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올렸다. 〈조선책략〉은
국왕과 중신들이 미국과의 수교에 관심을 갖게 했으나, 위정척사론자들에게는 김홍집 개인에 대한 공격과 아울러 개항 이후 무분
별한 문호개방정책을 추진한 정부의 실정(失政)을 규탄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에 김홍집의 귀국 1개월 뒤인 1880년 10월 1일 병조
정랑 유원식(劉元植)은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철산부로 유배당했다. 그후
1881년 2월 26일 경상도 예안유생(禮安儒生) 이만손을 필두로 하는 영남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렸다. 이들은 소두(疏頭)에서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이 유전(流轉)되는 것을 보고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렸
다.
1874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출생
[역사속의 인물] 조선 마지막 황제 순중
권력은 무상하고, 끝은 허망하다. 삼국과 고려, 조선시대 마지막 왕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나라의 무너짐을 순순히 받아들인 왕도, 끝까지 저항했던 왕도 있었다.
1874년 오늘 태어난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본에 의해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돼 창덕궁에 머물다 숨졌다. 일본과 이완용 등의 압력으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한국군을 해산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을 허가했다.
백제 의자왕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항복한 뒤 소정방에게 끌려 태자 등 1만2천여명과 당나라에 압송됐다 그 곳에서 병사했다. 고구려 보장왕은 668년 역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돼 나라가 망한 뒤 당나라로 압송됐다. 이후 말갈족과 손잡고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다 실패, 681년 쓰촨성에 유배됐다. 통일신라 경순왕은 후백제의 침공으로 나라 기능이 마비되고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자, 군신회의를 소집해 935년 고려에 귀부(歸附)했다. 고려 공양왕은 정몽주와 이성계로 대표되는 구세력과 신세력에 번갈아 실권을 뺏겼다. 정몽주가 살해된 뒤 1392년 폐위됐고, 2년 뒤 강원도 삼척에서 살해됐다. 왕들은 권력과 나라, 백성을 잃은 슬픔 중 어떤 슬픔이 더했을까. 백성을 지키고 떠받드는 왕이 그립다.
김병구 사회2부 차장 kbg@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3월 25일
1871 군포제 페지 .호포제 실시 (흥선대원군의 생애)
1820년 12월 21일 한양에서 영조의 5대손으로 태어남. 1843년 흥선 대원군의나이 24세 흥선군이 되었다. 이때부터 안동 김 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얼굴에 나타난 술기운에 빠져 행실이 추저분한 생활을 했습니다. 1863년 흥선 대원군의나이 44세 철종이 뒤를 이을 왕자가 없이 병이 들자 조 대비에게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약속받았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올랐고 대원군이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시작하였다. 공평하게 인재를 등용하고 양반
들에게도 세금 따위를 거두어들이게 하여 나라 살림이 좋아지고 인공적으로 흙의 온도를 높여서 식물을 재배하는 묘상이었던 서원 을 정리하였습니다.1865년 흥선 대원군의나이 46세 왕조의 위엄을 살리기 위하여 경복궁을 손질하여 고쳐 세웠다. 공사비용을 보충하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여 바친 돈을 발행하였다.
1866년 흥선 대원군의나이 47세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천주교도를 더욱 권력이나 무력 따위로 억눌러 꼼짝 못하게 하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1867년 흥선 대원군의나이 48세
경복궁에서 불이나자 경복궁 복구 작업을 시행함. 공사비용이 많이 들자 다시 조선 고종 때 발행한, 한 푼이 엽전 백 푼과 맞먹던
돈을 발행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졌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의나이 49세 경복궁을 완성하였다. 1871년 흥선 대원군의나이 52세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1873년 흥선 대원군의나이 54세 명성황후가 최익현을 시켜 대원군의 잘못을 알리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도록 하였고 11월,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발표하자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885년 흥선 대원군의나이 67세 청나라에 끌려갔던 흥선대원군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895년 흥선 대원군의나이 77세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흥선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얼마 후 스스로 물러났다. 1898년 2월 흥선 대원군의나이 79세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흥선대원군의 업적
1) 신분 구별 없이 인재를 등용, 서원을 대폭 정리
2) 탐관오리의 처벌, 양반·토호의 면세전의 철저한 조사와 징세,
3) 호포제 실시, 사회의 악습 개량에 힘쓰고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사치를 금하였다.
4) ≪대전회통≫·≪육전조례≫·≪양전편고≫ 등 법전을 편찬
5) 의정부를 부활시킴, 비변사를 폐지, 삼군부를 설치
6) 경복궁 중건과 척화비 건립
1867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꼽히는 이탈리아 음악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출생
1867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꼽히는 이탈리아 음악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3.25. - 1957] 출생
, *이탈리아 지휘자. 파르마 출생. 파르마와 밀라노에 있는 음악원에서 첼로를 배웠다. 1886년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오페라 《아이다》의 지휘자로 기용되면서부터 성공을 거두어, 그해 토리노에서 A. 카탈라니의 오페라 《에드메아》로 데뷔하였다. 그 뒤 이탈리아 각지에서 오페라 지휘자로 활동하여 92년 R. 레온카발로의 《익살꾼》, 96년 G. 푸치니의 《라 보엠》을 처음으로 공연해 명성을 떨쳤다. 1898∼1908년 밀라노 스칼라극장의 음악감독, 1908∼1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하우스 지휘자로 있으며 이 오페라하우스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1910년에는 푸치니의 《서부의 딸》을 처음으로 공연하였다. 13년 콘서트에 진출해 성공을 거두고, 21∼29년 스칼라극장에 복귀하였으며, 26년 푸치니의 유작(遺作) 《투란도트》를 초연하였다. 29∼36년 뉴욕 필하모니 상임지휘자, 37년 뉴욕에 토스카니니를 위한 NBC교향악단이 조직되었고 54년 은퇴할 때까지 상임지휘자로서 악단을 이끌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작곡자의 지시를 엄격히 지키고, 작품의 구조를 명확히 부상시키면서 모든 리듬을 생명력이 넘치는 연주스타일을 구축함으로써 20세기 지휘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명지휘자였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867년] 미국의 조각가 보글럼(Borglum, John Gutzon de la Mothe) 출생 ← 보글럼
1867. 3. 25 미국 아이다호 베어레이크 세인트찰스~1941. 3. 6 시카고.
천연의 바위에 거대한 정치가 조상(彫像)들을 새겨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을 되살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1890~93년에 파리에 있는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파리에서는 살롱전에 그림과 조각을 모두 출품했으며, 영국에서는 중요한 작품의 주문들을 받고 왕실의 인정을 받았다. 1901년 뉴욕 시에서 〈디오메데스의 암말 The Mares of Diomedes〉이라는 청동 군상(群像)을 만들어 이름을 날렸는데, 이 작품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미국의 조각품으로는 처음으로 사들인 것이다. 다재다능한 솜씨로 뉴욕 시에 있는 세인트존더디바인 대성당의 〈12사도상(像)〉과 같은 장엄한 조상들을 비롯해 애국자들의 흉상을 많이 만들었다. 얼마 후 설형문자 등 중동지역의 여러 문자들을 연구하는 학자였던 그의 아내가 말한 것처럼 '작품의 크기가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무게가 6t이나 되는 대리석으로 워싱턴 D. C.의 캐피털로툰다에 있는 링컨 대통령의 거대한 두상을 만들었다.
일부 남부지방의 여성들은 보글럼에게 이것을 본떠 남부 연합군의 장군이었던 로버트 E. 리의 두상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했다. 그러나 보글럼은 그 대신 조지아에 있는 스톤 산에 대열을 지어 행군하는 리 장군과 참모들 및 병사들의 거대한 조상을 만들 것을 구상했는데, 후원자들과 논쟁을 벌인 끝에 이 방대한 작업을 포기했으며 결국 이 작업은 다른 사람들이 완성했다. 그뒤 그는 정부당국에 고용되어 또다른 산을 기념물로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 그는 사우스다코타의 러슈모어산 국립기념비에 있는 워싱턴과 제퍼슨,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의 두상을 조각했다. 그는 뛰어난 공학 기술로 많은 양의 돌을 빠른 시간에 쪼아낼 수 있도록 다이너마이트와 공기 해머의 기능을 이용한 새 방법들을 창안했다. 이 기념물 작업은 1941년 보글럼이 죽은 해에 완성되었는데, 마무리 세부작업은 그의 아들 링컨이 해냈다.
1864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남강 이승훈(1864-1930) 태어남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남. 44세 때 평양 모란봉에서 도산 안창호의 강연에 감명 받아 술과 담배 끊고 재단을 만들어 오산학교
설립, 신민회 가입, 1910년 기독교에 입교, 평양신학교에서 신학 공부해 목사가 됨 1911. 5월 신민회 사건으로 제주도로 귀양감
1911. 9월 105인 사건 관련자로 4년 2개월간 복역.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년 동안 감옥살이. 1924년 동아
일보 사장 1930년 5월 9일 66세로 세상 떠남
1655 - 호이겐스, 토성위성 타이탄 발견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위키백과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토성의 가장 큰 위성인 티탄을 발견하다.
티탄 또는 타이탄(Titan)은 토성에서 가장 큰 위성으로, 태양계 내에서는 목성의 가니메데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위성이다. 토성 VI라고 부르기도 한다. 짙은 대기를 가진 유일한 위성이며, 표면에 안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액체가 확인된 지구 외의 유일한 태양계 내의 천체이다. 대기 구성이 지구와 유사하여 다양한 관심을 받고 있다.
티탄은 토성에서 20번째로 먼 위성이자 구형 외관을 지니는 일정 질량 이상 되는 위성들 중에서는 여섯 번째로 떨어져 있기도 하다. 행성과 비슷한 특징을 지닌 위성으로 자주 기술되는 것처럼 티탄은 반지름이 달의 약 1.5배이고 질량은 1.8배나 된다. 목성의 가니메데에 이어 태양계에서 두번째로 큰 위성이며, 크기만으로 따진다면 수성보다 더 크다. (그러나 질량은 수성의 반 정도이다.)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1655년3월 25일 최초로 발견했다. 당시 티탄은 토성의 위성들 중 첫번째로 존재가 증명된 존재였다. 태양계의 위성 중 갈릴레이 위성 다음으로 발견된 첫 천체다. 명칭은 그리스 신화의 티탄 신족에서 이름을 따왔다. 티탄 신족은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의 12남매를 지칭한다.
티탄의 표면은 주로 얼음과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티탄은 짙은 대기로 둘려싸여 있기 때문에, 2004년, 카시니-하위헌스 호가 도착하기 전까지 인류는 티탄의 표면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했다. 카시니-하위헌스 호의 탐사로부터 탄화 수소로 채워진 호수들이 티탄의 극지에 존재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표면은 지질학적으로 젊었으며, 산과 얼음 화산으로 보여지는 지형들이 몇몇 관찰되었다. 티탄의 표면은 전체적으로 평평했으며, 충돌 크레이터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티탄의 대기는 대부분 질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량의 메테인과 에테인이 섞여 있다. 티탄 표면에는 바람과 비 등의 기상 현상이 발생하며, 지구 해변과 비슷한 물결 모양의 지형도 형성되어 있다. 표면 및 지하에 있는 액체 물질 및 질소로 충만한 대기 때문에 티탄은 온도가 훨씬 더 낮다는 점만 제외하면 마치 원시 지구의 모습과 유사해 보였다. 이 때문에 티탄은 예전부터 미생물 혹은 적어도 복잡한 유기 화합물 형태의 생명체가 태동할 환경이 형성되어 있을 것으로 믿어져 왔다. 과학자들은 티탄의 지하에 있는 액체 바다가 생명체가 생겨날 환경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위키백과
708 - 콘스탄티노, 제88대 교황으로 즉위.
교황 콘스탄티노(라틴어:Constantinus, 이탈리아어:Papa Costantino)는 제88대 로마 교황(재위: 708년3월 25일 - 715년4월 9일)이다.
콘스탄티노는 685년 이래 시리아 출신으로서 4번째 교황이 된 인물이다. 라벤나의 총독 요안네스 리조코포스와 그곳의 대주교 펠릭스와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콘스탄티노가 파비아의 주교를 임명할 때 밀라노의 주교는 콘스탄티노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교황의 책》에 의하면 콘스탄티노는 710년 10월 동방의 니코메디아에 가서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환대를 받았다. 교황과 황제 사이에 이루어진 밀담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라벤나와 로마 그리고 퀴니섹스트 공의회에 대한 콘스탄티노의 입장에 대하여 논의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그 해 12월에 살해된 후 필리피쿠스가 새로이 비잔티움 황제의 제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단성론을 지지하자 콘스탄티노는 트룰로 공의회의 결정들을 거부하였다. 필리피쿠스도 713년 6월 퇴위되고 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2세가 즉위하여 정통 신앙을 고백한다는 내용을 로마 교회에 통보하였다. /위키백과
1704 (조선 숙종 30) 한양도성 수축공사 시작
서울성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수선전도. 조선시대 한양지도로 형광색 부분이 경복궁, 서울성곽, 4대문과 4소문이다. ⓒ민중의소리
1392년 개성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후 한양천도 계획을 명하고 3년 뒤인 1395년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최측근인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서울성곽(한양성곽)을 축성하기 시작한다.
서울성곽은 풍수지리 명당론에 따라 한양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4대산인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길이 18.2km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 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 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 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서울성곽을 전면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사업을 벌여 세종 4년(1422) 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이었으니 서울인구의 3배가 넘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동원된 국가적인 토목 공사였다. (비교하자면 오늘날 4대강 사업보다 훨씬 큰 규모이다.) 실로 전국의 힘쓸만한 장정들은 대부분 동원되었던 것이다.
인부의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는데 추운 겨울 자신이 먹을 식량을 지게짐 지고 올라와 임금도 못받는 강제부역을 한 것이었다. 그중에는 동사, 압사, 아사, 골병이 들어 축성공사에서만 사망자가 872명에 달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실록에 기록된 사망자 수 외에도 골병 든 몸으로 고향에 내려와 죽은 농민까지 포함을 한다면 1천명이 넘는 전국의 백성들이 임금도 받지 못한채 왕명에 의한 한양 도성축성으로 목숨을 바친 것이다. 조선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되는 세종 재위시기의 농민들의 처지가 이러하였다.
이후 서울성곽을 재정비 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간 서울성곽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본래 서울성곽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였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울성곽은 큰 전란에서는 제 구실을 할 수 없어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다. 따라서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도성전투는 없었다.
임진왜란의 교훈을 토대로 인조는 서울 성곽과는 별도로 전쟁에 대비한 남한산성과 강화도산성을 수축하였으나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며 이마를 땅에 9번 찧으며 군신관계를 맹세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였다. 이때 맺은 조약에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서 서울성곽은 방치된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704년 숙종은 일부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협약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서울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나아가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도성의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 이것이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의도적으로 헐어내기 전의 서울성곽이다.
이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에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부설을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이 헐리며 사실상 서울의 평지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 길이 18.2km 중 산지성곽 10.5km만 남게 되었다.
오늘은 서울성곽의 역사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함께 공부해 보았다. 다음 시간부터는 등산화 신고 수첩 들고 본격적인 역사탐방을 시작해보자. 그 때까지 예습 열심히 해 주세요.
[참고자료] 문화재청 북악산 서울성곽 홈페이지(http://www.bukak.or.kr/index.asp), '다시찾는 우리역사'(한영우 저)
시대별 성곽축조기술의 변천모습. 가운데 부분이 세종때 메주만한 돌로 쌓은 성곽이고 좌우로는 숙종 30년의 성벽으로 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하여 튼튼하게 쌓았다. ⓒ이윤재
서울성곽. ⓒ이윤재
서울성곽. ⓒ이윤재
오늘의 탄생화와 꽃말 3/25일
[3월 25일 탄생화] 덩굴성 식물(Climbing plant)
꽃말: 아름다움
분류: 풀과
원산지: 전세계
포도·나팔꽃·시계꽃·등나무·아이비·호프처럼 덩굴이 있는 식물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뭐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으면 몸을 지탱할 수 없다 해 정숙한 여성에 비유되며,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시나 문학에 자주 등장합니다. 덩굴성 식물의 대표는 '생명의 나무' '보호와 비호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포도나무입니다. 포도에 아이비를 담그어 익히면 화상이나 짓무름에 특효약이 된다고 합니다.
[꽃점 이야기]
'인연'은 적극적으로 구해야 하는 것. 당신은 그런 기회를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당신에게 매혹되는 관객이 없다면 무대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뒤에서 도와 주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자신의 무대를 갖고 있어야만 당신의 아름다움도 연마됩니다.
덩굴성 식물食物 Climbing Plant :
덩굴식물은 관상용, 자연생태의 야생 등 수많은 종류가 다양하게 생장한다. 대개 덩굴식물은 줄기나 덩굴손 따위가 다른 물체에 붙어서 올라가는 식물이다. 식물들은 수분(물)과 온도가 알맞은 곳에서는 햇빛을 얻기 위하여 자기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한다. 보통 키가 가장 큰 식물이 햇빛을 가장 많이 받지만 높은 곳까지 잎을 펼치려면 단단한 나무줄기를 만들어야 하는 종류도 있다. 그러나 덩굴식물은 이와 반대로 적은 노력으로 높은 곳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으며, 이들은 다른 식물이나 건 물 또는 지지대를 이용하여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는 식물이다. 덩굴식물은 접촉에 민감한 덩굴손이 있어서 자기가 지탱할 지지대를 감고 올라갈 수 있으며, 이밖에도 곁가지, 가시, 뿌리, 털 등을 이용하여 감아 오르는 식물도 있다.
[꽃 말] : 아름다움
[탄생화] : 인연因緣은 적극적積極的으로 구求해야 되는 것인데 귀하는 그런 기회機會를 멀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귀하는 적극성積極性을 띠고 인연과 기회를 포착할 필요必要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