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전 설레던 마음은 에어프랑스 파업으로 가느냐 마느냐의 걱정으로 바뀌었다. 다행히 우리가 떠나기로 약속했던 날 파업은 풀리고(프랑스 파업은 세계적으로 유명함. 그래도 프랑스인들은 느긋한것이 특징임) 무사히 파리를 거쳐 스페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유럽은 EU(유럽연합)로 묶여 있어서 환승하거나 출입국시에 까다로운 규정이 없어서 옆집 드나드는 느낌으로 가볍게 통과 할 수 있었다. 2년전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할때는 어찌나 까다롭던지 관광 버스에까지 마약 탐지견이 킁킁거리곤 내려 갔는데 역시 미국쪽 보다는 유럽이 여행 하기는 편하단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유럽은 미국보다 테러위협이 덜해서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순례 첫날 (2014.9.30)
파리 드골 공항도착. 현지시간 오후 2시 25분. 드디어 처음으로 유럽 땅을 밟자마자, 다시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 수속을 밟았다. 마드리드로 향하는 기내에서 내려다본 스페인의 모습은 온통 올리브 나무뿐이었다. 신의 선물 올리브!! 그들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리 많은 올리브를 품고 있을까? 부럽다. 쩝.. 마드리드에 도착해서 한 일 이라곤 호텔 체크인 후 발닦고 자는 일이었다.
순례 둘째날 (2014.10.1)
드뎌 유럽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아니 둘째날인가? 스페인이다. 한국이 아니다. 조금은 흥분되지만 성지 순례가 아니던가!
스페인에 가장 먼저 정착한 민족은 BC.900경 유럽에 침입한 켈트족과 아프리카에서 이주해온 이베리아인이 섞인 켈트이베리아인과 지중해 동부에서 건너온 페니키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다.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켈트인, 이베리아인이 서로 교류하며 융합된 이베리아 반도에 BC.6세기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인들이 침입하게 되고 약 400년간 식민지배를 받는다. BC.3세기 중엽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새로운 강자 로마와 충돌하게 되는데 이것이 포에니 전쟁이다(이때 유명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등장한다).
로마의 통치는 약 600년간 지속되다 AD 4세기 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소홀해진 로마의 지배를 틈타 피레네 산맥을 넘어 게르만계의 서고트인들이 스페인에 새 왕국을 세우고 톨레도를 수도로 삼았다 (톨레도는 스페인이 마드리도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스페인 중심 도시였다).
끝없는 내란으로 711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들이 침입하고, 700여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스페인 국토회복운동이라는 뜻의 '레콘키스타'가 시작되었다. 1238년 세워진 그라나다 왕국은 그리스도교 세력과 동맹함으로써 이슬람 왕국은 사라지게 된다. 알함브라 궁전은 이 시기의 유산이다.
1469년 카스티야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르나도가 결혼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연합 왕국이 세워진다. 이슬람 세력의 최후 보루였던 그라나다가 1492년 함락되고 700여년에 걸친 국토회복운동은 끝을 맺게 된다. 1492년은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이고 콜롬부스를 지원했던 스페인은 이후 남아메리카를 정복하여 막대한 부를 얻게된다. 카를로스 1세는 151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에 걸친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이끌며 유럽 최강국이 된다.
1588년 스페인이 자랑하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격파된 이후, 스페인은 많은 식민지를 잃고 1808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의 침입과 유럽의 산업 혁명등의 영향으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1992년 올림픽을 개최하고 2002년에는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똘레도 대성당>
우리 순례단원들은 호텔 조식 후 마드리드를 출발해 똘레도로 향했다. 똘레도는 마드리드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다. 똘레도는 도시 전체가 1986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는데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유적이 공존할 뿐만 아니라 스페인 역사상 가장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문화의 도시이다. 스페인을 단 하루만 본다면 주저 없이 똘레도를 보라는 말이 있다.
현재의 똘레도 주교좌 대성당은 1226년 페르디난드 2세의 통치 시기에 건축을 시작하여 그리스도교 시기였던 1493년에 완성되었다. 이슬람 사원이었던 것을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한 것이다. 대성당 내부에는 22개의 경당이 있다. 성당 건립에 기부한 영주들에게 분양했다고 하니 중세 카톨릭의 개혁 운동을 생각케 하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똘레도 대성당의 한 경당에서 순례 첫 미사를 볼 수 있었다. 이역만리 먼 유럽 성지에서의 첫 미사는 감동이었고 '내 자신의 변화가 우선'이라는 신부님 강론 말씀에 잠시 반성해 본다.
<산토 도메 성당 그리고 엘 그레꼬>
1323년 똘레도에 살던 신앙심 깊은 곤잘로 루이스 백작이 죽었다. 그는 고향이 오르가스 였기 때문에 오르가스 백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시신은 1569년 이 성당으로 옮겨졌는데 그때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스테파노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시신을 직접 안치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것이 바로 엘 그레꼬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 중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들과 눈이 딱 마주치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는 엘 그레꼬 본인이고 또 하나는 엘 그레꼬의 아들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화가의 낙관이 없었기 때문에 화가 자신의 얼굴을 작품에 그려 넣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우린 성지순례이므로 오르가스 백작의 신앙심과 성 아우구스티노, 스테파노 성인의 기적에 촛점을 맞춰 설명을 들었다.)
<아빌라>
점심은 스페인 현지식 이었다. 스테이크와 와인, 올리브 등이 나왔다. 외국 어디를 가도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먹는 편이다. 스테이크도 낯설지 않는 메뉴이고 올리브는 우리나라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지금도 스페인의 올리브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여행 기간 내내 올리브를 김치 삼아 서양의 낯선 현지식에 잘 적응해 갔다.
아빌라는 해발 1,130 미터로 스페인 도시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아빌라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성벽과 스페인 내에서 가장 많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교회 건축물을 가지고 있고, 예수의 데레사 성녀를 포함해 성인의 수만 16명에 이르기 때문에 흔히 '돌과 성인들의 도시' 라고 부른다. 아빌라 성을 거닐면서 마치 중세의 한 마을에 들어와 살고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시 전체가 198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우리는 데레사 성녀가 태어난 곳과 수도원등을 둘러보고 대학의 도시 살라망카로 이동했다.
순례 셋째날 (2014.10.2)
외국 여행중 호텔 조식은 대부분의 나라가 비슷하다. 입맛이 서구화 되고 있다는 증거다. 스크럼블에그, 햄, 치즈등등.. 스페인엔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하몽이다. 하몽은 스페인 사람들의 주식이다. 보통 빵위에 올려 먹는데 돼지고기 뒷다리를 절여 바람이 잘통하는 곳에서 숙성 단계를 거친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냥 햄같다. 훈제가 아닌 생 햄이다. 난 또 바로 적응했다. 나름 맛난다. 다른 순례객들은 못먹겠다고 고추장을 꺼낸다. 우리 순례단은 매일 성지를 찾아 다니며 미사를 드렸다. 오늘은 살라망카에서 30분 거리의 알바 데 또르메스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 성당에서의 미사였다.
알바 데 또르메스는 개혁 가르멜 수도회의 데레사 성녀가 선종한 곳이다. 15세기경 알바 공작의 영지라는 뜻으로 '알바 데 또르메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녀 데레사는 이곳에서 1582년에 선종하였다.
<대학의 도시 살라망카 그리고 마요르광장>
살라망카는 1988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1250년 설립된 현존하는 스페인 최고의 대학이자 유럽에서 4번째로 오래된 역사를 가진 살라망카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은 알폰소 대주교에 의해 세워져 스페인 정신문화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살라망카는 스페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유학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살라망카에 들어서면 지극히 유럽스러운 마요르광장과,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들 사이로 눈에 띠는 개구리 모양의 기념품 가게 들이다. 살라망카 대학이 유명한것처럼 살라망카 대학 하면 개구리가 유명하다. 살라망카 대학의 상징이 개구리가 된것은 살라망카 대학의 정문(파사드)에 있는 개구리 조각 때문이다. 깨알 같은 조각들 사이로 한번에 개구리 조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안내문에 있는 힌트를 보고 겨우 찾아냈다. 사람들이 이렇게 개구리 조각을 찾기 위해 애쓰는 것은, 전진만 하지 후퇴할줄 모르는 속성을 갖고 있는 개구리가 행운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건물 앞에는 지금도 개구리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을 것이다.
<살라망카 주교좌 대성당>
신, 구 두개의 주교좌 성당 건물을 가지고있는 살라망카 대성당은 고딕과, 바로크양식으로 지어졌다.
먼저 눈에 띠는 것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성당의 정문 벽면(파사드)이다. 그중에서도 마치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을 닮은 우주인 조각상 이었는데. 성당 정면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각상임은 물론,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는 엉뚱한 조각상에 빠꼬(본명이 프란치스코라서 애칭으로부름) 형제님은 성당을 지을때 우주인의 영향을 받았다는설과 최근 보수할때 장난으로 조각했을 가능성등..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라며 들려 주었다. 한마디로 믿거나 말거나 였다. 살라망카 대성당은 알베르또 데 추리게라의 작품으로, 흔히 '추리게라 양식'으로 불린다. 추리게라 가문의 세 형제가 17세기 건축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아주 세세한 부분에 까지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포르투갈>
살라망카 성당 순례가 끝나고 우리는 스페인에서 포르투갈의 성모 발현지 파티마로 향했다. 파티마는 살라망카에서 버스로 5시간 걸리고 시차는 1시간 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EU로 연결되어 있어 국경을 넘는데 문제는 없었다. 참 부러운 부분이었다.
포르투갈은 코르크 생산 1위의 국가이다. 프랑스, 캐나다와 함께 포르투갈도 와인으로 유명하다. 우리 순례단은 저녁 식사 때마다 동행 신부님과 와인을 마셨다. 현지 음식은 와인과 잘 어울렸다. 유럽 사람들이 와인을 즐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수에비족과 서고트인들이 처음 포르투갈 지역에 그리스도교 왕국을 세웠다. 711년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안달루스를 세우자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쪽에 모여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우고 무어인들을 상대로 한 전쟁(레콘키스타)과 포르투갈 독립 전쟁을 벌였다.
독립전쟁을 끝낸 포르투갈은 식민지 개척에 참여하여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에 진출하고 1530년부터 돈 주앙3세는 브라질을 식민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가 포르투갈의 황금기이다.
이후 스페인과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실패하고 쇠퇴하기 시작한다. 1668년에 가서야 리스본 조약을 맺고 포르투갈은 독립을 인정받고 왕정을 복고한다. 1807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침입을 받고 포르투갈 왕실은 수도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긴다. 19세기 내내 포르투갈은 내전과 반란으로 혼란을 겪는다. 1926년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고 치열한 정치적 대립기를 보내고 이 시기에 모든 아프리카 식민지가 독립한다. 1975년 또 한번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후 첫 포르투갈 대통령이 선출된다. 1999년 유로존에 가입하고 같은 해 마카오를 중국에 이양했다.
<포르투갈의 파티마>
파티마는 1917년 포르투갈의 가난한 세 어린이 9살 루시아, 8살 프란치스코, 6살 히야친타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유명해진 곳이다. 루시아가 성모님께 자신들을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자 성모님께서 루시아는 하느님께서 지상에 오래 남겨 두실 것이라 하셨고,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는 곧 천국으로 데려 가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 성모님 말씀대로 프란치스코는 발현 다음 해인 1918년 유행하던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이듬해에 먼저 천국으로 올라갔고 히야친타 역시 병에 걸려 1920년 세상을 떠났다. 루시아는 이후 갈멜 수녀회에 입회하여 봉쇄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다가 2005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파티마 대성당과 성모 마리아 발현 소성당>
우리 순례단은 밤 9시, 3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파티마 성당앞 광장과 성모 마리아 발현 소성당에서 세계 각국의 순례단과 묵주기도를 바치고 촛불행렬을 하였다. 묵주기도를 바칠때 한국 순례단 대표로는 청주에서 오신 자매님이 뽑혔다. 각국 대표가 먼저 선창을 하면 나머지 순례객들이 후렴구를 하는 형식이었는데 각각 자기 나라 언어로 기도를 바치는데도 마지막 '아멘' 할때는 마치 한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것 처럼 딱딱 맞아 떨어져서 별 불편함 없이 기도 할 수 있었다. 기도의 힘인것 같았다.
순례 넷째날 (2014.10.3)
어제밤 파티마에서의 국제 로사리오 기도와 촛불행렬이 끝나고 자정이 다 된 시각, 각자 숙소로 돌아오는길.. 우리 셋 ( 나 포함 화서동 성당 자매님) 국제 미아 될뻔하다. 분명히 어둡기 전엔 자신있었다. 길이 복잡하지 않고 짧은 길이었고.. 그런데, 아뿔싸!! 아무리 찾아도 숙소는 보이지 않는다. 오분이면 오는 길을 삼십분은 헤맨것 같았다. 다행히 마을이 크지 않아 뱅뱅 돌아도 찾을 만한 숙소였던 것이다. 그 당시엔 얼마나 당황 스럽던지..그러니까 우리의 빠꼬 형제님이 기도가 끝나면 각자 알아서 숙소로 가라고 했을 것이다.파티마에서의 일정은 짧았다. 파티마 세 어린이 생가방문과 미사를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6시간 가까이 스페인 산티아고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내일은 산티아고 순례길 체험이 있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 살짝 겁이났다. 저질 체력 때문이다. 그래도 왔다. 산티아고에서의 밤이 깊어 간다.
순례 다섯째날 (2014.10.4)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조개>
우리는 다시 순례자의 도시 스페인 산티아고로 왔다. 살라망카에도 '조개의 집'이 있었지만 이곳 산티아고의 상징도 조개이다. 순례길 곳곳에는 조개 그림과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란 뜻이다. 야고보는 현재 스페인 수호성인이다. 신대륙에 이주한 에스파냐인들은 야고보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의 이름을 붙였는데, 현재 칠레의 산티아고, 쿠바와 도미니카공화국의 산티아고등이 대표적 예이다. 콤포스텔라(별의 들판)라는 지명은 별 하나가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알려 주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보통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에 이르는 800여 키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우리 순례단은 아침 일찍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찾는 순례는 9세기 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도 순례자들은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순례했다는 표시로 조개 껍질을 몸에 지니고 돌아간다. 야고보 사도의 시신이 조개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것과, 조개는 그리스도교에서 세례와 새로운 탄생을 가리키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도 세계 각국의 순례객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한결같이 배낭에 조개를 달고 다녔다. 지나는 순례객들에게 "부엔 까미노" 하면 반갑게 인사하며 간다. 부엔 까미노란 스페인어로 '좋은 순례길'이란 뜻이다. 까미노 길엔 조개 껍데기가 박혀있어서 조개 껍데기만 따라가면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게 된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대향로(大香爐)미사>
9세기에 발견된 야고보 사도의 무덤위에 여러번의 증개축을 통해 현재의 성당이 되었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20여년에 걸쳐 만들어 졌다는 영광의 문(Portico de Gloria)이다. 중앙이 그리스도의 문, 좌측이 유대인들의 문, 우측이 이교도들의 문이다. 문 중앙에 놓인 기둥에는 야고보 성인의 상이 서 있고 순례자들은 이 기둥에 손을 대고 무사히 순례를 마친 것에 감사하는 전통이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이 그 기둥에 모여 있었다. 대성당앞 광장에도 한달 남짓 긴 순례를 마친 많은 순례자들이 감격의 눈물과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겨우 한시간 코스 순례를 마친 우리도 그들을 보면 감격스러웠다.
정오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향로 미사가 봉헌 되었다. 중세에 순례자들이 오랜 기간 순례를 마치고 대성당에 도착하면 성당안은 순례객들의 악취가 가득했다고 한다. 순례객들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성당안에 향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산티아고 대성당의 향로미사는 이러한 이유에서 시작 되었다고 한다. 미사가 끝나고 드디어 커다란 향로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세계 각국의 순례객들이 일제히 카메라 후래쉬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나도 향로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는데 그때의 감동이 아직 남아있다.
<부르고스 대성당>
산티아고에서 7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스페인 부르고스에 도착했다. 부르고스는 스페인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지이다. 스페인 엘 시드 장군이 바로 이 지역 출신이다. 스페인 국민적 영웅으로 대성당 내부에는 엘시드와 그의 아내 무덤이 놓여있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스페인은 구석 구석이 모두 세계 문화 유산이다. 여행 내내 이러한 부분들이 제일 부러웠다.
여행 여섯째날 (2014.10.5)
<이냐시오 성인의 고향 로욜라>
1491년 에스파냐 로욜라 성의 부유한 가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성 이냐시오는 1521년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생애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냐시오는 이 즈음 젊은 날의 방탕함을 반성하고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한 뒤 기도와 극기와 명상으로 '영성수련(Exercitia Spiritualis)이란 유명 저서의 틀을 완성하게 된다. 1527년 살라망카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후 건강악화로 에스파냐로 돌아오게 된다. 1537년 사제 서품을 받고 1540년 예수회를 창립하고 교황의 정식 인가를 받는다. 예수회는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며 이단과 싸운다. 그는 피정과 영성 수련의 수호 성인이다.
로욜라 대성당은 이냐시오 성인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바로크 양식 성당이다. 유럽의 성당들이 그러하듯 로욜라 성당 또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였고 특히 이냐시오가 살았다는 로욜라 성 내부는 중세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냐시오 성인이 사용했던 '회심의 방'에서의 미사는 쉽게 잊혀질것 같지 않았다.
<스페인 국경도시 산세바스티안>
스페인 북부 최고의 휴양도시를 꼽으라면 단연 산세바스티안이다. 이곳은 휴양지답게 물가가 비싸지만, 햇볕이 부족한 북 유럽인들에는 인기가 많은 곳이다. 우리는 이곳 중식당에서 중식인지 양식인지 아무튼 난 또 맛나게 점심을 즐겼다. 일행중 몇몇은 또 고추장을 꺼냈다. 한국인의 고추장 사랑은 유럽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곳에서 버스로 3시간이면 프랑스다. 국경선을 넘나들며 유럽의 고속도로에서 느낀것은 고속도로 1차선 추월선을 정확하게 지키며 운전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추월할 때만 1차선으로 들어갔다 바로 나온다. 우리나라 고속도로 1차선은 추월선의 개념보다는 빨리 달리기 위한 사람들의 주행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속도로 1차선 추월선을 단속한다는 뉴스를 본것 같다. 교통 법규 하나는 잘 지키는 유럽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광버스 기사 면허증을 따는 기준도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워서 교통사고 발생율이 매우 낮다고 한다. 소중한 생명을 다루는 직업으로 기사들의 자부심도 크다는 빠꼬 형제님의 설명이 덧붙여 졌다.
순례 일곱째날 (2014.10.6)
<프랑스 루르드의 기적수 그리고 까쇼(감옥)>
프랑스 루르드에서 아침을 맞았다. 루르드는 인구 17,000명의 작은 산악 마을이다. 한나절이면 다 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이곳에서 1858년 2월 18번에 걸쳐 성녀 벨라뎃따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셨다고 한다. 현재는 연간 500만명의 순례객들과 광광객들이 방문하는 유명 성지순례장소이다. 많은 순례객들 때문에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숙소가 많은 도시이다.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이다. 육지의 반 이상이 농업에 적당하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간직한 넓은 삼림지역이 영토의 4분의1 가량을 덮고 있다. 프랑스는 세계 주요 경제 대국으로 소규모 기업들이 국가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며 유럽 공동체 창립 회원국이다. 프랑스는 중세 초기부터 세계 문화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프랑스에서 발굴된 고고학 유물은 구석기 시대부터 정착생활을 해왔음을 보여준다.
BC5세기 까지 갈리아인이 라인 강 유역에서 지금의 프랑스 지중해 연안으로 이주해 왔다. 기원전 50년경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대한 정복을 완성한다. 민족의 대이동이 끝나는 5세기 말 클로비스에 의해 프랑크왕국이 건설된다. 8세기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는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완수하여 로마 교황으로 부터 '서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게 된다.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으로 영국이 지배하던 프랑스 영토를 되찾는다. 15세기말 프랑스 영토는 지금과 거의 같게 되었다. 16세기 위그노 전쟁(1562∼1598)의 결과 낭트칙령이 앙리 4세에 의해 발표되면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종교 분쟁은 종식된다. 루이 14세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던 낭트칙령을 폐지하여 위그노 대부분이 망명하고 프랑스 상공업은 위축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앙시앵 레짐)를 무너뜨렸으나 나폴레옹의 통치 아래에서 프랑스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고 왕정과 공화정을 반복하며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 북부지역이 폐허가 되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찌 독일에 의한 친독일 비시 정권이 들어 서기도 하였으나 세계대전 종식과 함께 의회 민주주의를 회복하였고, 1950년대 인도차이나 반도의 식민지 민족주의 운동에 직면하게 된다. 샤를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 해외 식민지 대부분을 독립 시킨다. 1981년 사회당 출신 미테랑 대통령이 당선되고 프랑스는 이후 각각 다른 정당의 대통령과 총리가 선출되어 '동거정부'라고 알려진 권력이 분리된 균형잡힌 정부 형태가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 루르드를 순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희망을 갖기 위한 힘과 용기를 얻으려고 루르드에 온다. 성모님 발현 동굴 앞과 로사리오 대성당 앞은 많은 순례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특히 침수 예절을 하는 곳에는 순례객들의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유럽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원 봉사자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곳 루르드의 자원 봉사자들은 특히 이곳이 치유의 장소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모든 순례객들에게 정성을 다했다.
루르드의 성녀 벨라뎃따는 가난하여 폐쇄된 까쇼에서 생활하였는데 신앙심이 높아 좁은 감옥에서도 작은 제대를 마련하여 온 가족이 묵주기도를 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벨라뎃따는 마사비엘 동굴로 땔감을 구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다. 이 지역은 피레네 산맥 기슭으로 여름엔 만년설이 녹아 내린다는 가부강이 마을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루르드의 기적수도 피레네 산맥의 만년설처럼 항상 흘러 넘치고 있었다.
<무염시태 대성당>
무염시태란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가 있지만 성모님은 죄가 없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성모님의 요청에 따라 1876년 축성된 이 대성당은 성모님 발현 동굴 위에 지어졌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성당의 종루는 70m에 이르며 금색이 칠해진 중심부에는 성모님이 베르나데따에게 원죄없는 잉태를 알려주신 말씀이 문자로 새겨져있다.
<로사리오 대성당>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901년에 지어진 이 성당은 성모님 발현 후 30년이 지나서 완성되었다. 이곳에서 매일 밤 세계 로사리오기도가 바쳐진다. 우리 순례단은 파티마에서 처럼 저녁 식사후 세계 로사리오 촛불행렬에 참가하였다. 밤 9시 수백명의 세계 각국 순례객들이 로사리오 대성당 앞에 모였고 그들과 함께하는 촛불행렬 또한 감동이었다.
순례 여덟째날 (2014.10.7)
무염시태 대성당에서의 새벽미사를 끝으로 루르드를 떠나 프랑스 포우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한시간 반 정도 비행후 파리 오를리 공항에 도착하여 파리 시내를 순례하였다. 파리는 프랑스 수도이며 파리 출신 거주자는 남성이 빠리지엥, 여성이 빠리지엔느로 불린다.파리는 세계 최고의 경제 도시이며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 3위의 도시로 평가된다. 파리의 행정 구역은 1구역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20 행정구역으로 늘어서 있어서 '달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낭만적인 파리지만, 파리시내엔 소매치기들이 많아서 조심하란 소리에 늘 긴장하면서 다녔던 곳이다.
<노트르담 대성당과 제로 포인트>
파리에서의 첫 발은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 바닥에 있는 제로 포인트를 꾹~ 밟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제로포인를 밟으면 다시 파리로 돌아 온다는 속설이 있다. 예전의 파리는 시테섬의 작은 지역에 불과했다는데 노트르담 성당앞엔 항상 세계 여행객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노트르담 성당은 프랑크 왕국의 질베르트 1세가 528년 처음 지었다. 모리스 주교에 의해 이때의 노트르담 성당은 무너지고 루이 7세의 통치기간이었던 1163년 공사를 시작한 현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 건축과 조각 그리고 스테인드그라스의 표본이 되는 건축물이다. 그래서인지 성당내부를 장식한 스테인드그라스의 화려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곳에서 1804년 나폴레옹 보나빠르트는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고 한다.
<파리 외방전교회>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의 수많은 여행객들을 뒤로 하고 18,19세기 아시아 선교의 중심지 파리 외방 선교회로 향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아시아로 파견된 선교사는 4,300여명에 이르며 1831년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30여명의 선교사들이 끊임없이 국내에 파견되었다. 선교사들은 본부 정원에 있는 성모상 앞에서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고 이들 선교사들 가운데 170여명이 순교하였다고 한다. 베트남과 한국은 많은 박해를 받은 대표적인 나라이다. 성당 왼쪽 벽면에는 당시 선교사들의 파견 장면을 담은 그림이 전시되어있다. 지하 전시실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전시되어 있다.
<몽마르뜨의 예수 성심 대성당>
파리의 소매치기들을 늘 염두에 두고 몽마르뜨로 올라갔다.몽마르뜨는 언덕이란 뜻이다. 몽마르뜨에는 수많은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19세기 몽마르뜨는 루소, 고흐등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들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술적 면모 보다는 수많은 상점들이 늘어선 유흥가의 모습을 하고있다. 이곳에 빨간 풍차란 뜻의 무랑루즈가 있다. 1889년 개장한 댄스홀로 건물 간판 위에는 빨간 풍차가 돌아가고 있었다.
예수 성심 성당은 몽마르뜨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비잔틴 양식의 성당으로 프랑스 국민들의 사기와 신앙심을 높이기 위해 지어졌다고 하며 프랑스 영웅 잔다르크가 말위에 검을 들고 있는 동상이 있다. 성당앞 계단에서는 파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 광경을 보기위해 그렇게 사람이 많은가 보다..
<세느강 유람선에서 바라본 파리 에펠탑>
어둠이 깔리는 세느강 변은 그 자체로 황홀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밤에는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 배를 타고 파리 시내를 한바퀴 돌기엔 몹시 추웠지만 유람선 위에서 바라본 노트르담과 에펠탑의 전경은 세계 제일의 관광지, 파리의 모든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에펠탑은 1889년 세워질 당시 파리의 경관을 해친다 하여 모파상등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낭만의 도시 파리의 밤은 세느강변의 찬바람과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순례 아홉째날 (2014.10.8)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를 이용해 4시간을 이동하여 벨기에 보랭지역에 도착하였다.
벨기에는 맥주와 쵸코렛으로 유명하며 유럽 연합 본부가 위치하고 있다. 벨기에는 본래 네덜란드 남부 지역이었으나 네덜란드 독립전쟁 이후 분리되었다. 1793년 프랑스가 벨기에를 합병하였고 나폴레옹 전쟁이후 네덜란드와 다시 합쳐졌다. 1831년 벨기에의 독립을 둘러싸고 영국의 제창으로 런던 조약을 맺음으로 벨기에는 네덜란드로 부터 독립한다. 벨기에는 이후 콩고를 점령하고 르완다와 부룬디를 통치하였다. 벨기에가 콩고를 지배하는 동안 특산물이었던 상아와 고무를 착취하기 위해 콩고 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 하기도 하였는데 그 규모는 콩고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1000만명 정도라고 한다. 이를 '고무테러'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실은 조지프 콘란드의 '암흑의 핵심'이라는 책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고 한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벨기에는 독일의 침략을 받았고 가장 많은 피해를 받은 나라중 하나이다. 루뱅이 대표적인 지역으로 '루뱅시 대학살'이라고 부른다. 현재까지도 루뱅 시내에서는 독일국기 게양이 금지 된다고 한다.
<벨기에 성모 발현지 보랭>
보랭은 벨기에의 작은 읍이다. 1932년 부터 1933년 까지 33차례에 걸쳐 5명의 아이들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신 곳이다. 이곳에서 한국인 수녀님을 만날수 있었다. 고향이 경상도인 수녀님은 순례단 미사가 끝난후 푸짐한 점심식사를 대접해 주셨다. 닭다리찜 요리인데 벨기에 닭은 큰지 커다란 접시에 닭다리 하나가 가득찼다. 오랫만에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맛있는 점심 식사후 2시간 거리에 있는 바뇌로 향했다.
<바뇌의 샤티 퐁텐 순례자 숙소>
바뇌는 일종의 요양 도시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바뇌 성모님 발현의 핵심은 '샘물'에 있다. 성모님은 "모든 민족들과 병든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 샘물을 마련했다"고 알려 주셨다. 그래서인지 벨기에 작은 마을 바뇌는 숲속 산책길이 인상적으로 펼쳐져있다. 이곳에 요양오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물이 잘 마련되어 있는 듯 했다. 우리가 묵은 샤티 퐁텐 순례자 숙소도 일반 호텔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객실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시설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특히 욕실은 객실만큼 넓고 각종 편리 기구들이 마련되어 있어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편히 지내고 쉴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이 느껴졌다. 봉사자들의 친절함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녁에는 이웃나라 독일에서 사목하시는 한국인 신부님께서 방문하셔서 독일 교민들이 싸줬다는 김밥과 떡, 김치를 배부르게 먹으며 마치 한국에 온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순례 열흘째 (2014.10.9)
바뇌의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주변이 모두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인적이 드물어 마치 휴양림의 한가운데 들어 온듯한 느낌이었다. 멀리 유럽에서 한가한 가을의 아침 정취를 맘껏 누리고 있었다.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마리에뜨 베코의 생가를 둘러보고 그곳 경당에서의 미사를 마지막으로 순례일정이 끝나고 버스로 네시간을 이동하여 네덜란드 암스텔담에 도착했다.
<네덜란드 암스텔담>
암스텔담은 네덜란드에서 사목하시는 한국인 신부님을 만나고, 스키폴 공항으로 가기위해 잠깐 들른 곳이었다. 저녁으로 신부님과 우리 순례단은 한인 식당에서 오리지널 소시지가 잔뜩 들어간 부대찌게를 먹었다. 세계 어딜 가나 한국인들을 만나며, 과연 국제화 시대임을 실감케 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네덜란드 스키폴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도착>
갈때는 에어 프랑스를 타고 갔는데 11시간 가까이 비행을 하려니 막막했다. 다행히 좌석이 바깥쪽이라 맘대로 들락 거릴 수 있었고 모두 프랑스 승무원들이라 밥두 못 얻어 먹을 줄 알았더니 뜻밖에 비빔밥 메뉴도 있었고 기내 뒤쪽으로 가면 휴게실 처럼 꾸며져 있어서(아마도 승무원들의 공간을 조금 개방한듯하다. 신선한 감동이다.) 출출하면 즉석 스프도 먹을 수 있어서 의외로 편하게 갔다. 다만 일행중 한명이 뜨거운 스프에 손을 데었는데 승무원들의 신속한 처지로 한나절 만에 다 나을 수 있어서 순례에 차질은 없었다. 올때는 대한항공 이었고 승무원들도 한국 사람이라 맘이 놓였다. 좌석이 창가여서 창밖 풍경도 실컷 볼 수 있었지만 맘놓고 들락 거릴 수가 없어서 밥먹고 딱 한번 화장실에 가고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피곤한지 자고 먹고 자고 먹고 하다보니 어느새 인천공항이다. 처음밟아본 유럽땅은 자연의 풍요로운 은혜와 여유로운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잘 보존된 문화 유적등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천천히 잘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