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 가요의 주제로 흔히 등장하는 것은 사랑, 이별, 고향, 항구, 지명 등이 있지요. 길도 대중가요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본래 길은 인류의 생존사와 함께 생성, 발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길’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사와 함께 발생한 원초적 어휘의 하나로 추정됩니다. 즉 ‘길’이란 인간의 의식과 주거 사이를 연결하는 공간적 선형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쓰는 길은 선사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길의 의미는 크게 네가지로 볼수 있습니다.
첫째 ,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로서 보행을 목적으로 하는 육상교통의 수단을 뜻합니다. 그 길의 규모에 따라서 ‘길’ 앞에 어떤 관형어를 붙여 오솔길·산길·들길·자갈길·진창길·소로길·한길· 지름길, 역마차길, 신작로길 등을 사용하지요. 육상 통로는 교통기관이 발달함에 따라 개념이 확대되어 실체가 없는 관념적 통로까지를 일컫게 됩니다. 물길을 다니는 배의 통로는 뱃길, 선로를 달리는 기차나 전철의 통로는 철길, 항공기가 다니는 공중의 통로는 하늘길 등으로 불립니다.
둘째 , 교통 수단으로서의 길에서 뜻이 분화되어 방도라는 개념이 파생됩니다. 방도란 어떤 일에 취해야 할 수단이나 방법을 뜻하는 것입니다. ‘무슨 길이 없을까?’, ‘손쓸 길이 없다.’라고 할 때의 길은 교통 수단의 길이 교통 이외의 수단으로까지 확대된 개념입니다.
셋째 , 동아시아에서 길은 흔히 인생에 비유되곤 합니다. 이때 세상은 여관으로, 사람은 나그네로, 인생살이는 길 가는 것으로 관념하는 일이 많습니다. 가요 <하숙생>에서 “인생은 나그네길……” 하는 노래가 불리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에 비해 서구에서는 흔히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고 세상은 무대로, 사람은 배우로 관념하지요.
네째,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입니다. 유교나 불교·도교 등의 사상은 그 이념을 길[道]이라 하고,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심성이나 행위를 도의니 도덕이니 하여 길로써 표현합니다. 왕도정치니 공맹지도니 하는 말이나, ‘군자 대로행’이니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 ’는 우리 속담의 길도 모두 도의의 상징으로 쓰인 것들입니다.
한국 대중가요 중에는 길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습니다. 길을 검색하면 동명의 가요가 수십개가 나옵니다. 길을 주제로 하는 수많은 곡들의 가사를 살펴보면 길의 의미도 다 제각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길을 주제로 한 가요 중에서 유명한 네 곡을 비교해보기로 합니다.
먼저 가수 최희준 님이 1970년 발표했던 <길>이 있고,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
1. 세월따라 걸어온 길 멀지는 않았어
돌아보니 자욱마다 사연도 많았다오
진달래꽃 피던 길에 첫사랑 불태웠고
지난 여름 그 사랑에 궂은 비 내렸다오
2. 종달새 노래따라 한세월 흘러가고
뭉게구름 쳐다보며 한시절 보냈다오
잃어버린 지난 세월 그래도 후회는 없다
겨울로 간 저 길에는 흰 눈이 내리겠지
최희준 님이 들려준 <길>은 독특한 저음의 보이스에 실려 은은한 느낌을 안겨주지요. 이 곡의 주인공은 진달래꽃이 피는 봄에 연인을 만나 사랑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름, 가을을 지나면서 사랑이 식어갔고, 흰눈이 내리면 사랑도 망각될 것이라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이 곡의 주인공은 겨울에 도로를 걸으면서 연인과의 애증섞인 추억을 회상합니다. 이 곡에 등장하는 길은 도로와 연애 역정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즉 길에 도로와 세월의 의미를 혼재시켜 노래를 음미하게 하는 그윽한 매력을 지니고 있지요.
https://youtu.be/T-GxXI-XeBo
1973년에는 저명 가수 이미자 님이 또 다른 <길>을 발표했으며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
1. 돌아보지 말아요 아득히 지나온 길
갈 길은 멀고 먼데 내 발길이 무거워
어쩌면 지워질까 못잊을 얼굴
미움과 아쉬움을 내맘에 남긴 사람
돌아보지 말아요 저 멀리 떠나온 길
갈 길은 멀고 먼데 내 마음만 무거워
2. 생각하지 말아요 아련히 지난 세월
눈물을 담아 보낸 지나버린 그 세월
이대로 끊임없이 흘러가다가
물거품 사라지듯 가버린 추억인데
생각하지 말아요 아련히 지난 세월
눈물을 담아 보낸 흘러 버린 그 세월
1절의 길은 2절의 세월과 같은 의미로 보입니다. 결국 이 곡에 등장하는 길은 인생 역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곡에 등장하는 길은 연애사, 즉 연인과의 연애 역정을 의미하며, 지나온 길은 헤어진 연인과 지낸 시간을 의미합니다.
주인공은 연인을 사랑했지만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한동안 미워하기도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결국 단념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더이상 과거를 돌아보지도 기억하지도 말자고 다짐합니다. 이 곡은 최희준 님이 불렀던 <길>과 유사하게 연애 역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접어들자 유명 그룹 GOD 가 <길>(2001)을 발표했고,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나는 왜 이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인지 명옌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자신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오 지금 내가 어디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살아야만 하는가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이 곡의 주인공은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지만 자주 회의에 빠지곤 합니다. 그가 걷고있는 인생이 돈, 명예, 연애 등 기성세대 혹은 타인이 설정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주인공은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던 길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 곡에 등장하는 길은 인생 목표와 인생 살이, 즉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곡은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들의 공감을 얻을만한 곡으로 보입니다.
2020년대에 들어와 인기 가수 주현미 님이 <길>(2020)을 발표했고,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
https://youtu.be/nqkTTTOXy3M
수많은 사람들 스치며 지나가고 긴 하루 속에 지친 발걸음
저녁 노을 지고 어둠이 짙어 가지만 수평선 너머 조용히 찾아가는 길
기나긴 세월의 시간 넘어 희미한 기억들이 내 곁에 다가와
길 따라서 걸어온 그 자리마다 때로는 눈물이 때로는 웃음들이
길 뒤에서 다가온 그림자 하나 타버린 가슴을 말없이 감싸주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길 없어 다시 또 찾아온 이 길
길 떠나는 그대 오늘은 어땠나요 내일이 오면 슬퍼 말아요
비바람이 치고 구름이 앞을 가려도 무지개 너머 살며시 찾아오는 길
고단한 시련의 끝을 건너 아련한 행복의 시간들이 찾아와
길 따라서 걸어온 그 자리마다 때로는 눈물이 때로는 웃음들이
길 뒤에서 다가온 그림자 하나 타버린 가슴을 말없이 감싸주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길 없어 다시 또 찾아온 이 길
모진 바람 불어 가눌 곳 없다 해도 애써 웃으면 그것이 우리 인생길
이 곡에 등장하는 길은 주인공이 설정한 인생의 목표이자 동시에 주인공이 목표를 이루고자 분투하는 과정에서 겪은 기쁨과 슬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길을 걷다보면 과거의 상처들이 되살아나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림자가 나타나서 주인공의 상처를 어루만져줍니다. 그림자는 주인공을 묵묵히 후원하고 무조건 지지하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곡은 자신을 지지, 후원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고 닥쳐오는 역경에 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이곡에 등장하는 길은 인생의 목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GOD의 길과 유사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GOD의 길이 끊임없이 인생의 목표를 고민하는 데 비해 이 곡의 길은 인생의 목표가 확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의 곡들 외에도 한국 대중가요에는 길을 주제로 한 곡들이 많습니다. 더 많은 곡을 검토하다보면 또 다른 의미로 길을 사용한 것들이 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