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검난(劍難)과 여난(女難)
흑살마녀는 백무영이 화염묵강(火焰墨 )이라 일컬어지는 강기에 맞아 퉁
기어 오르자, 포효성을 터뜨리며 또다시 쌍장을 휘둘러 댔다. 무시무시한
흑색마세가 뿜어져 나가며, 일대의 숲이 찰나적으로 독무에 뒤덮였다.
싯누런 연기가 푹푹 뿜어지면서 아름드리 거목은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
다.
"카아아… 넌 내 머리를 아프게 한다. 네 몸뚱이를 찢어 버리겠다."
흑살마녀는 백무영이 떨어지는 곳으로 다가섰다.
백무영은 그 때까지 나뭇가지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는 공중제비를 돌
면서 떨어져 내리는 바, 그의 옷가슴에는 흑색 장인 하나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그는 고통에 겨운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흑살마녀가 다가서는 것을
바라봤다.
"흑란, 날 알아보지 못하오?"
"흑… 흑란? 그게 누구지?"
흑살마녀가 멈칫거린다.
그녀는 흑란이었다. 그녀는 사밀여후의 양녀로서 몽고왕부에 볼모로 잡혀
갔던 흑란공주였던 것이다.
그녀의 팔뚝에 차여진 팔찌는 한때 백무영이 보관한 바 있던 팔찌였던
것이다.
"고월, 그가 흑란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그리도 곱던 흑란공주를…
…."
백무영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난… 흑란이 아니야. 난 흑살마녀다. 난 천마왕야의 명령에 따라 환우천
하를 피로 씻는 흑살마녀일 뿐이다."
흑살마녀는 점점 더 다가섰으며, 뒤쪽으로 모여든 혈포인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죽여라!"
"녠녠… 흑살마녀의 일 장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즉사를 하지 않다니,
보통 놈은 아니야. 하지만 일 장에 격타당한 이상에는 살기 힘들지. 게다
가 흑살마녀의 비위를 건드린 이상, 쉽게 죽지도 못할 거야."
혈포인들은 흑살마녀의 살기를 북돋우고자 하는 듯, 마성을 자극하는 휘
파람 소리를 쉬지 않고 흘려 냈다.
"넌… 예쁘게 생겼다. 으음, 죽이기 아까울 정도야. 그러나 나는 널 죽여
야 해."
흑살마녀는 이 장 앞까지 다가섰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쳐들렸으며 손바닥 가운데에서 검은 철봉 같은 강기
가 뿜어져 나올 때, 백무영의 뒤쪽에서 회색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사숙조를 건드리지 마라, 요녀!"
선장(禪杖)을 휘둘러 대며 날아 내리는 사람은 혜종선사였다.
그는 일위도강(一葦渡江)의 신법을 발휘하여 두 사람 가운데로 끼여들었
다.
"사숙조님, 일단 이 자리를 피하십시오. 소승이 사숙조님을 대신하여 요
녀를 막겠습니다."
혜종선사의 뒤쪽에는 혜종선사가 친히 기른 백팔 명의 금강동인(金剛銅
人)이 버티어 있었다.
그들 모두 상반신이 드러나 있었으며, 상체를 금빛 물감으로 발라, 멀리
서 보면 금부처가 걸어 다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소림사 비전 백팔나한진을 시전한다면, 요녀의 발을 묶을 수 있을 것입
니다."
혜종선사는 선장을 번쩍 쳐들며 가슴을 딱 폈다.
그가 백팔금강동인에게 포진을 명하고자 할 때였다.
"자네들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해. 그녀의 장력은 천마사혼경에서 비롯
된 절세마강(絶世魔强)! 선천강기(先天强氣)를 녹여 버리는 마의 강기이
지."
백무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흑색 장인이 선명하게 찍힌 옷자락
을 나붓거리면서 혜종선사 쪽으로 다가섰다.
"사숙조님, 제가 맡겠습니다. 부상당한 처지에 만용을 부리지 마십시오."
혜종선사는 백무영 대신 죽을 작정을 하고 나섰는지라 백무영이 다시 끼
여들려 하자, 기겁을 하며 일 장을 쳐냈다.
백무영은 싱긋 웃으며 소매를 흔들었다.
순간, 혜종선사가 쳐낸 공공진결(空空眞訣)은 소리도 없이 무산되어 버리
고 말았다.
"어엇? 내, 내공이 여전하시군요?"
혜종선사는 하해처럼 거대한 기세가 다가서는 것을 막지 못하고 뒤로 일
곱 걸음이나 미끄러졌다.
"저 여인은 죄인이 아니야. 죄인은… 고월이란 놈이지. 이제까지 감정적
으로나마 그 녀석을 이해해 주고자 하였는데, 이제는 달라. 나는 절대로
그를 용서할 수 없어!"
백무영은 나뭇가지를 천천히 내렸다. 그의 자세에는 허점이 무수했다.
검초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백무영의 자세가 어떠한
초식도 시전하지 못할 엉터리 자세라고 여길 것이다.
"까르르르… 넌 제법 용감하군."
흑란의 눈에서 광기 가득한 마광이 폭사되었다.
누구도 감히 그녀와 시선을 맞부딪치지 못한다. 그녀의 눈빛은 상대의 눈
빛을 태울 듯 강렬하다.
반면, 백무영의 안광은 칙칙하여 범인(凡人)의 눈빛과 다를 바가 없었다.
"넌 흑살마녀가 아니야. 넌 흑란이라는 여인이지. 넌 과거의 모습을 찾아
야 한다."
"흑란, 난 그런 이름을 모른다. 카아아…!"
흑살마녀, 아니 흑란은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피를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 다시 혼신내공을 끌어올리
기 시작했다. 그녀의 옷자락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으며, 머리카락이 빳빳
이 치솟아 올랐다.
백무영은 검세를 약간 고치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넌 그 이름을 기억해 내야만 한다. 그건 내가 사밀여후에게서 너를 부탁
받았기 때문이다."
"크아아……!"
그녀는 흑란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성이 더욱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
듯, 전신 팔만사천 모공에서 핏빛 기류를 뿜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뚱이는 시뻘건 안개에 휘어 감겼다.
가히 혈영인(血影人).
"우우우……!"
흑살마녀는 천마혈후를 토하며 위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의 몸뚱이가 허공에서 여러 개로 흩어지기 시작하며, 허공 가득히 악
마의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백무영은 눈길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를 느슨히 쥔 채 천천히
미소를 흘린다.
"연대구품(蓮臺九品)!"
문득 그의 몸이 떠올랐으며, 아홉 개의 분영(分影)이 허공 도처에 만들어
졌다.
신기한 것은, 허공에 나타나는 아홉 개의 인영이 각각 다른 자세를 취한
다는 것이다.
베고, 후리고, 자르고, 쪼개고…….
연대구품은 소림사 칠십이종절기 가운데 하나이다.
그 위력은 익히 알려져 있는 바, 현재 백무영이 시전하는 연대구품은 본
래의 위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구룡등천(九龍騰天)!"
이번에는 아홉 개의 인영이 아홉 마리의 용으로 화하는 듯한 환각과 더
불어, 허공 가득 무형검세(無形劍勢)가 뿜어졌다.
나뭇가지 하나에서 일어나는 힘은 백 장 방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
"우우, 무서운 검세다."
"피, 피하라! 자칫하다간 오장육부가 으스러진다!"
"검선(劍仙)의 경지, 아니 검성(劍聖)의 경지이다!"
보라! 백무영의 모습이 뿌옇게 사라져 가지 않는가?
중인들은 뒤로 물러나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어느 새 허공 가득 거대한 원형이 그려지고 있었다.
무지개가 떠오르며 동그란 고리로 연결이 되는 듯, 보이는 것은 뿌연 안
개 가운데 월광(月光)을 가르는 한 줄기 금색 검기였다.
금빛은 느리게 허공을 갈랐다.
흑살마녀는 거대한 나찰의 그림자를 흘리며 검세를 향해 신형을 이동시
켰다.
그녀의 쌍장에서 일어나는 강기는 한 덩어리로 뭉치는 바, 그 경지는 무
형(無形)의 강기가 유형(有形)의 강기로 화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금색의 검기와 흑색 기류는 허공에서 하나로 얽혀 들었다.
순간 중인들은 돌연 구천(九泉)에 메아리치는 한 마리 천룡의 울부짖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거대한 금빛 무지개가 허공을 가로지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부동허공결(不動虛空訣)!"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순간 같은 혼돈이다.
수백 그루 나무가 뿌리째 뽑혀 허공으로 떠올랐으며, 굉렬한 폭음과 함께
이백 장 안에 있던 모든 무사가 휘청이며 나뒹굴었다.
백무영은 나뭇가지를 든 채 흑살마녀를 향해 빠르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의 손이 우아한 곡선을 그려 나가는 가운데, 흑살마녀의 옷자락이 길게
베어지고 있었다.
흑살마녀는 나뭇가지에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나뭇가지에 맞으며
백무영의 가슴에 쌍장을 가했다.
펑- 펑-!
폭음과 함께 백무영의 옷자락이 다시 훼손되었다.
백무영의 상체가 격렬히 흔들린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문득 고통에 겨운
표정이 흘렀다.
'이 기회를 노려야 한다!'
그는 고육지계(苦肉之計)로 흑란의 쌍장을 맞는 걸 감수하며 나뭇가지로
흑란의 미심혈(眉心穴)에 혈흔(血痕)을 찍었다.
모든 상황은 거의 동시에 진행이 되었는 바, 중인들은 흑란의 얼굴이 묘
하게 일그러지는 걸 볼 수 있었다.
"크아아아악……!"
흑란은 두 손으로 목을 쥐어뜯으며 거꾸러졌으며, 백무영은 사선을 그으
며 떠올라 그녀의 몸뚱이를 팔과 허리 사이에 끼웠다.
"이젠 내게 의지해, 흑란."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켜보던 소림사의 승려들은 환호성을 터뜨리기 시작했으며, 노심
초사 바라보던 혜종선사는 감격해 눈에 습막을 품을 지경이었다.
"역시 사숙조시다!"
그가 기뻐 합장할 때, 혈포인들은 백무영의 절세신공에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단 피하라!"
"독탄을 터뜨리며 물러나라! 젠장,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소림사를 독으로
짓밟자!"
혈포인들은 갈가마귀 떼가 조약돌 하나에 놀라 흐트러지듯이 뿔뿔이 흩
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암기 주머니를 꺼내 허공에 던지기 시작했다.
주머니가 도처로 떨어져 내리며 폭발이 일어났다.
독탄이 화염과 함께 터지며 사방으로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호하던 소림사 승려들은 독무를 들이마시고 비틀거리기 시작했
다.
"독이다!"
"우욱! 오보단장산(五步斷腸散)! 약간만 맡아도 피가 썩어 버리는 독이
다!"
"악마의 무리들! 독을 쓰다니, 비열하다!"
젊은 승려들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쓰러지기 시작할 때, 갑자기 웅장한
불호성이 도처에서 들려 왔다.
"아미타불… 악적들은 도주하지 못한다."
"감히 독을 쓰다니, 용서하지 못하겠다."
혈포인들이 퇴각하는 장소에서 불쑥불쑥 승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무 속에서 나타나는 노승들, 그들은 독무를 흡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 독무 속으로 접어들며 장력을 발휘해 냈다.
"금강장으로 독무를 태울 수 있다. 겁낼 필요 없다!"
"소림사를 업신여기는 악적들을 모조리 계율원(戒律院)에 잡아 가두라!
최소한 백 년은 면벽해야 마성을 버릴 자들이다!"
"단 하나라도 살려 보낸다면, 소림사의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될 것이니라!
아미타불……!"
닥쳐 드는 노승들의 우두머리는 법등(法燈)이라는 고승이었다.
그들은 하원에 칩거하고 있는 승려들로, 소림사의 무공을 연마하는 것을
주된 일과로 삼고 있었다.
폭음이 잇달아 터져 나오는 가운데, 자욱하던 독무가 허공으로 휘몰아쳐
오르기 시작한다.
흑살마녀가 제거된 이상 혈포인들은 독자적으로 진세를 구축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로서는 감히 소림사의 천년저력을 감내할 수 없었다.
일각도 되지 않아 혈포인들은 속속 제압되었다.
소림고승들은 세존금나수(世尊擒拿手)로 알려진 금나절기를 시전하는 바,
그것은 변황마공을 제압하는 극성의 무공이기에 몽고무사들은 몇 초 저
항하지도 못하고 속속 제압되고 말았다.
천마왕야는 이제까지 전승(全勝)의 신화를 구가해 왔었다. 그런데 이 날,
소림사에서 최초의 패배를 기록하게 되는 것이다.
방장실.
백무영은 흑란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를 영접한 사람은 방장보다도 일배분 높은 천우선사(天宇禪師)였다. 그
는 백무영을 위해 대환단(大丸丹)을 전하였는 바, 백무영은 먹기를 사양
했다.
"대환단은 귀한 약입니다. 독에 당해 죽어 가는 분을 위해 쓰십시오."
"아미타불… 하오나, 소사숙(小師叔)의 상세가 더욱 위중한 처지가 아니
외까?"
천우선사는 방장을 사질(師姪)로 두고 있는 인물인 바, 백무영에게는 일
배분 아래일 뿐이다.
"훗후… 전 다치지 않았습니다."
"천마사혼강에 맞지 않으셨소이까?"
"맞기는 하였으나, 상처는 없습니다."
백무영은 계면쩍어 하면서 옷자락을 헤쳐 보였다.
그의 앞가슴이 나타나는데, 상처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구태여 상처를
찾는다면, 세 개의 핏빛 장인이 흐릿하게 찍혀 있는 정도랄까?
'놀랍다. 이미 금강불괴(金剛不壞), 만독불침지체(萬毒不侵之體)의 경지로
다!'
천우선사는 혀를 내둘렀다.
백무영은 공탁 위에서 쇠구슬을 주워 들었다.
쇠구슬 위에는 지인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백무영은 철주(鐵珠)를 만지작거리며 풀잎처럼 신선한 미소를 입가에 머
금는다.
"보십시오. 전 다치지 않았습니다."
백무영은 중지(中指), 식지(食指) 사이에 구슬을 끼웠고… 그의 손가락이
백옥처럼 희어지면서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쇠구슬에 균열이 일어났다.
'누구도 부수지 못하던 철주를 파괴하다니… 아아, 최상승의 파해신공(破
解神功)마저 터득했군!'
천우선사는 철주가 가루로 바수어지는 것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이윽고 그는 원로회의를 소집 중이니, 백무영이 묵궁대선사 대신 꼭 참가
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방장실을 벗어났다.
이각 후 많은 노승들이 묵궁의 후계자로 나타난 백무영을 만나기 위해
방장실로 접어들었을 때, 백무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만 포단 위에 휘갈겨 쓴 글씨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당분간 소림사에서 벌어진 일을 비밀로 묻어 주십시오.>
아직 묵향(墨香)이 자욱하다.
방장실 둘레에는 무수한 승려들이 머물러 있었으나, 그들 중 누구도 백무
영이 흑란을 안고 떠난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새벽부터 안개비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태실봉 기슭은 습기에 젖기 시작했다. 태실봉은 동굴이 많은 봉우리이다.
보통 날이었다면 조양(朝陽)의 햇살로 인하여 운모(雲母)와 석영(石英)
따위의 광석이 햇살에 반짝거리며 새벽을 찬미하는 광경이 찬란하기 이
를 데 없었으리라.
비가 뿌린다 하더라도 날은 밝기 마련이다.
꽤 깊은 마른 동굴 속,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흐느끼는 듯한 숨소리는 여인의 그것이었다.
"하아아아……!"
더운 숨소리.
대체 누가 이렇듯 조급한 숨소리를 토하는 것인지?
동굴 안은 습기에 뒤덮이고 있었다.
어두운 동굴 속, 희끄무레한 물체가 누워 있었다.
옷이 너덜너덜 찢어진 나머지,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신체가 누워 있
다.
굴곡이 완연한 것으로 보아 여인이다.
앞가슴의 찢어진 부위를 통하여 봉긋하게 부풀어오른 육봉이 보이는 것
으로 미루어, 그는 여인이었다. 그것도 지극히 젊은 여인이었다.
"하악… 더, 더워!"
"……."
청년 하나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있었다.
그의 망막에는 여인의 얼굴이 맺히고 있었다.
오똑한 콧날, 도톰하게 부푼 입술과는 거리가 먼 추악하게 뭉그러진 얼굴
이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얼굴, 가히 세상에서 제일 가는 추녀라 할 수
있었다.
입술은 으깨어졌고, 코뼈가 부서져 내렸다. 얼굴은 썩은 과일처럼 고름에
뒤덮여 있어, 얼핏 보기만 하더라도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무참히 뭉그러뜨렸다. 그가 사밀왕부 사람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나, 이 정도로 가혹하게 다루다니……."
비분강개하는 청년은 백무영이었다.
그리고 앞에 누워 있는 추녀는 흑란이었다.
흑란은 천마사혼대법에 걸려 인성을 잃은 상황이다.
백무영은 사밀여후의 양자이기도 하기에, 흑란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상
황이었다.
'아름답고 순수했던 소녀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백무영은 한 시진에 걸쳐 추궁과혈을 하여 금단진기로 마기를 억누르는
데 일단 성공하였으되, 흑란의 전신 혈맥은 무참히 끊어졌는지라 영약의
도움 없이는 혈맥을 이을 수 없었다.
"영웅은 무정하고 난폭해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지. 그러나 지금은
달라."
백무영은 과거 자신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난폭했었는가 생각하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퉁기었으며, 흑란의 몸뚱이가 풀썩풀썩 튀어올랐
다.
그리고 그녀의 눈까풀이 위로 쳐들리며, 멍한 눈빛이 흘러 나왔다.
"……."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무영은 마른침을 삼키다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내 얼굴을 기억하느냐?"
"으음, 몰라."
"훗후… 잘 기억해 봐!"
백무영은 산발된 머리카락을 위로 빗어 넘기며 얼굴이 뚜렷이 나타나게
했다.
관옥 같은 얼굴이다. 그 어떤 여인이 그의 얼굴을 보고 매혹되지 않겠는
가?
"남자가 뭐 그리 예뻐?"
흑란은 바보처럼 말했다.
'안타깝군. 백치가 되어 버렸다. 아아, 다시는 그 총명한 모습을 볼 수 없
으리라!'
흑란은 뇌성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절세영약을 쓴다면, 뇌호혈(腦戶穴)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
그는 흑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보며 마음을 정하
게 되었다.
'구태여 괴로운 기억을 되살려 줄 필요는 없으리라. 흑란의 지금 처지를
생각한다면, 백치상태로 놔 두는 게 차라리 평화를 주는 일일지도 모른
다.'
그의 생각이 거기에 이를 때, 흑란이 천천히 손가락을 쳐들어 그의 얼굴
에 대었다.
"만지고 싶어."
"으음……!"
"날 괴롭히지 마."
"그래, 넌 이제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돼."
"피이, 네가 나의 무엇인데?"
"난… 너의 낭군이야."
백무영은 어설프게 웃었다.
그는 흑란을 보호해 주기 위해 흑란의 남편이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다.
"피이, 네가 내 낭군이란 말이야?"
흑란의 추악한 얼굴이 더욱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눈빛의 아름다
움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난 너의 낭군이야."
"그럼… 잠도 같이 자겠네?"
"훗후… 그래야겠지."
"흐응, 난 지금 네 가슴에 안기고 싶어."
흑란은 수줍음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그녀는 둥지 속으로 날아드는 참새 마냥 백무영의 가슴으로 화드득 뛰어
들었다.
물컹한 육질이 가슴에 와 닿는다.
흑란의 가슴은 꽤 풍만한 편이다. 얼굴이 뭉그러졌다고는 하나, 몸매의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과거 변황제일의 미녀로 불리지 않았던가?
"내가… 미워?"
흑란은 백무영의 호흡이 차갑다 느끼는지, 몹시 서운하다는 표정이었다.
"밉다니?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데……."
"피이, 거짓말!"
"세상이란 속으며 살아가야 할 필요도 있는 곳이야."
"난 어려운 말은 몰라."
흑란은 점점 더 백무영의 가슴 속으로 탐닉해 들었다.
그녀는 백무영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긴밀하게 의지하고자 하는 것
이다.
'지금 뿌리친다면, 심한 상처를 입으리라!'
백무영은 흑란을 꼬옥 끌어안았다.
'흑살마녀는 이미 죽었다. 지금 내 가슴에 안겨 있는 여인은 내가 보호해
주어야 할 흑란이다. 죄인은 고월이지, 흑란이 아니다. 내가 흑란을 보호
해 주지 않는다면, 누가 흑란을 보호해 줄 것인가?'
백무영은 흑란을 꽈악 안았다.
지금 그녀의 얼굴이 아무리 추악하다 한들, 백무영의 뇌리에는 과거 그녀
의 아름다운 영상이 떠오를 뿐이다.
그리고 백무영에게는 그녀의 일그러진 용모를 고쳐 줄 의술이 있지 않은
가?
그렇게 여긴다면, 흑란의 육체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아름답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흑란의 몸뚱이는 백무영의 몸뚱이보다 더 빠르게 달아올랐다.
"날 더 힘있게 안아 줘요."
"그래……."
백무영은 팔뚝에 힘을 가했다.
흑란은 필설로 형언하지 못할 애틋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이나마 백무영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의 품에 안기기를
간절히 희구하는 것이다.
"더욱 강하게……."
"후후후… 제법 여자답군."
"피이, 아까는 나더러 당신의 신부라더니."
"그래, 넌 나의 신부야. 내가 널 보호하는 한, 누구도 널 해치지 못하리
라."
백무영은 흑란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어떤 때에는 동정도 사랑이 될 수
있다.
흑란의 몸뚱이가 손에 쥐어진 새처럼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속살에서는 상큼한 사과의 향기가 풍겼다.
사과 껍질이 과도에 의해 벗겨지듯, 찢어진 옷자락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우선 드러나는 것은 터질 듯 팽팽하게 발달된 젖가슴의 융기였다. 흑란은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 옷자락을 훌훌 벗어 버렸다.
옴폭한 배꼽이 드러나고, 매끄러운 아랫배가 보인다. 아랫배에는 군살이
조금도 끼여 있지 않았다. 하의마저 벗기어지자, 대리석처럼 미끄러운 허
벅지가 드러났다.
"보기 좋아?"
"그렇군. 꽤 아름다워."
"흐응, 그럼 날 더 세게 안아 줘요."
흑란은 다시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백무영은 그녀의 체온을 느꼈다.
남녀지간의 사랑이란 정신적인 사랑일 수도 있으되, 솔직히 말하자면 육
체의 결합이 우선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흑란은 전라의 몸이 되어 백무영의 가슴에 안겼다.
백무영은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으되, 그녀의 몸이 끈적거리는 아교처럼 달
라붙자 차츰차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들판을 달리는 준마 마냥 거침없이 애무의 손길을 놀리기 시작했다.
흑란은 흥흥거리는 비음을 내었으며, 정말 오랜만의 쾌락의 기분에 빠져
들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군, 흑란. 다만 널 사랑해 줄 수밖에…!'
백무영은 또다시 여난에 걸려든 것이다.
창궁선사가 천기를 보았듯이, 백무영은 도화살(桃花煞)을 갖고 태어난 녀
석이었다.
끈적거리는 새벽이다.
쏴아아… 쏴아아……!
비 내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숭산은 온통 비에 젖었다. 하지만 동굴 속에 내리는 비보다 뜨거운 비는
없으리라.
남녀의 몸뚱이는 하나로 묶어졌다.
어느 한순간, 흑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아파하는 표정을 지으며 백무영의 어깨에 팔을 걸었으며, 백무영
의 등판으로 손톱이 박혀 들었다.
파과(破瓜)!
백무영은 문득 그녀가 이제까지 처녀라는 걸 느꼈다.
흑란의 허벅지를 타고 앵화(櫻花)처럼 붉은 혈적(血滴)이 맺히지 않는가?
고월은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처녀신을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정사한 후의 피 한 방울은 처녀성을 상징한다.
흑란의 지난 일 년이 피로 오염되었기는 하되, 성적으로 문란하지는 않았
던 것이다.
"남자는… 나빠! 날 아프게 하다니!"
흑란은 화가 나는 듯 백무영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백무영의 어깨에는 이빨 자국이 선명히 남게 되었다.
작은 호수에 파문이 번진다.
일송호(一松湖)라는 호수에도 비가 쉬임없이 퍼부어지는 것이다.
백무영은 호숫가에 서 있었으며, 호수에서는 랄라라 콧노래 소리가 흘렀
다.
흑란은 귀여운 몸뚱이를 호수에 담근 채 오랫동안 씻지 못했던 육체를
씻어 내고 있었다.
백무영은 그녀의 찢어진 옷자락을 지키고 있는 처지였다.
'흑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
제정신을 차리고 과거를 기억한다면, 자결해 버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는 나름대로 안도해 했다.
'그럭저럭 사밀여후와의 약속을 지키겠군!'
그는 흑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흑란의 둔부는 암사슴의 그것처럼 탄
력적으로 부풀어올랐다.
"아이, 좋아."
흑란은 기분이 몹시 좋은 듯 쉬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대상(隊商)의 노래였다.
그녀는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가는 한참 후에 고개를 반짝 내밀곤 했다.
그녀의 얼굴은 새벽에 비해 훨씬 아름다웠다.
백무영의 몸에서 뿜어진 진기의 힘이 마성을 사그러뜨림에 따라, 외상(外
傷)의 흔적도 빠르게 치유가 된 것이다.
사실 백무영은 아침 내내 흑란의 얼굴에 불사진력(不死眞力)을 발휘한 바
있는 것이다.
흑란의 지금 얼굴은 쳐다보아 구역질을 느끼는 대신 꽤 귀여운 편이라
느낄 정도였다.
차차 상처가 나아진다면 과거의 미색이 되돌아올 것이다.
"호호… 같이 목욕해요."
흑란은 발딱 서서 백무영을 바라봤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가슴을 감춘다.
"싫어."
"피이, 남자가 쩨쩨하기는."
"왜 그렇게 말하지?"
백무영은 팔짱을 끼고 웃었다.
"등에 낀 때를 밀어 달라고 부탁하려는데, 거절하다니?"
"하하… 난 그런 재주 없어."
"흥!"
흑란은 새촘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바로 그 때, 백무영의 눈이 반짝 빛났다.
"머리카락을 모두 어깨 뒤로 넘겨 봐."
"왜요?"
"가슴을 보고 싶어."
"호호… 음탕하기는……."
흑란은 까르르 웃었으며, 볼이 약간 붉어졌다.
"한 번뿐이에요."
흑란은 생긋 웃으며 머리카락을 완전히 빗어 넘겼다.
그녀의 육봉에는 현란하기까지 한 꽃이 피고 있었다.
진짜 꽃이 아니라 꽃의 문신(文身)이다.
화사한 꽃문신이 나타날 때, 백무영은 주먹을 거머쥐며 쾌재를 불렀다.
"흑란, 네가 중원에 진 죄를 씻을 길이 생겼다. 넌 천하제일의 부자야. 푸
하핫! 넌 죄값을 치룰 수 있어."
"무슨 말이지요? 내가 갖고 있는 건 찢어진 옷가지 한 벌뿐인데?
"
"네 가슴에 새겨진 꽃문신에는 보물 창고의 도해가 숨어 있다. 도해를 푼
다면 당장 천만금(千萬金)을 꺼낼 수 있으며, 그 돈을 쓴다면 무너진 백
도방파를 재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푸하핫……!"
백무영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사밀여후가 죽으며 한 말이 있지 않은가?
사밀왕부의 마지막 보물은 흑란의 가슴에 기록되어 있다고.
흑란의 가슴에 새겨진 꽃무늬는 보물 창고의 위치를 알리는 지도였다.
지도를 따라간다면, 사밀왕부가 중원을 정복하기 위해 은밀히 비축한 군
자금이 묻힌 장소를 알아 낼 수가 있다.
그것을 모두 쓴다면, 붕괴된 백도방파를 빠르게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우(細雨)가 한기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 새벽, 백무영의 어깨를 적시는 빗줄기는 몹시 따뜻한 빗줄기였
다.
'군자금이 마련된 이상, 흑란은 어느 정도 죄값을 치루었다고 할 수 있
다. 문제는 누가 그 일을 하는가이지. 그분이라면…….'
백무영은 한 사람을 기억했다. 그가 알기에 그는 강호제일의 학자라 할
수 있다. 그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백무영의 지식은 일정한 수준에 머
물러 있었을 것이다.
'만박, 그분이라면…….'
그의 얼굴은 이끼낀 돌덩어리처럼 굳어졌다.
비는 더 세차게 뿌려졌다. 빗소리를 따라 휘감아 도는 콧노래는 백치가
된 흑란이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