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
전쟁의 시원(始原)
인류의 역사를 흔히 전쟁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전쟁의 역사는 언제부터일까?
인간의 옛일에 대한 기억은 오로지 남아있는 문자에 의해서만 희미하게 유지되고 있어서 전쟁이라는 것의 시작에
대한 기억도 문자의 발생 시기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지는 못한다.
슈메르인들이 은나라의 갑골문자와 형태와 성격이 비슷했던 그림문자를 쓰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로 『길가메시
서사시』가 있다.
이 고대의 이야기는 길가메시라는 포악한 왕의 이야기이다.
전쟁을 즐기고 백성들을 괴롭혀서 원성이 자자했던 왕과 그가 죽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비원의 상징인 용사 엔키두가
싸우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이다.
길가메시는 전쟁이라는 가장 손쉽고 큰 이익이 나는 사업에 눈을 뜬 최초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길가메시를 무찔러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낼 용사를 천상의 신들이 만들어내고 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초기 파라오
들이 자신의 무덤을 전쟁에서 사로잡은 노예들을 이용해서 돌로 쌓아 올리고 있었고, 크레타와 미케네가 에게해의
패권을 다투었다. 멀리 동쪽의 황하 유역에서는 황제(黃帝)가 탁록( 鹿)의 들판에서 치우(蚩尤)와 싸우고 있었다.
황제는 중국인들이 자신의 시조로 간주하는 인물로서 소위 말하는 오제(五帝)의 첫 번째 인물이다.
황제 이전에도 삼황(三皇)이라 하여 수인(燧人)씨, 복희(伏犧)씨, 신농(神農)씨가 있었지만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황제로부터 중국의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서경(書經) 등에 전해지는 삼황의 이야기에는 전쟁의 기록이라고 할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에 전쟁을 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된 것은 피라밋의 상형문자와 파피루스 조각들이 전해주는 이집트의
파라오들과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 오딧세이의 주인공들, 페니키아의 설형문자가 전해주는 중동 지역의 길가메시
왕과 그리고 동양의 황제이다.
인류가 언제부터 전쟁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인류가 수렵과 채집을
생활 방식으로 하고 있던 동안에는 전쟁이라는 것을 할만한 이유라는 것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야생 상태의 동물들도 자기가 잡은 짐승의 고기를 가지고 다투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은 거의 없다. 자기의 고기를 설령 다른 맹수류가 약탈을 해 가는 경우에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약탈자와 싸우는 것
보다는 새로 사냥을 하는 것이 훨씬 쉽고 위험이 적기 때문에 고기 덩어리는 빨리 체념하고 잊어버리는 편을 택한다.
숲 속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던 인간의 조상들도 사냥의 포획물이나 채집한 과일이나 버섯을 뺏기 위해, 또는 뺏
기지 않기 위해 노력은 했겠지만 인간들 사이에 목숨을 걸거나 상대를 죽이기까지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생존에 유리한 방식이 못되었다. 그런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은 자연상태에서 장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 하나 자연상태에서 동물들간의 치열한 격투의 원인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것인데, 이 싸움은 동종의 내부에서만
일어난다는 특성이 있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격렬해서 죽음을 야기시킬 수도 있고 유혈이 낭자한 꼴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암컷을 소유할 자격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선에서 끝나게 된다.
인간들의 경우에도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죽고 죽이는 잔혹한 전쟁까지 불사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이게 했을까?
생활 영역의 다툼이 이유였을까? 대부분의 동물들은 영역 의식이 있고, 이것을 두고 격렬하게 싸우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싸움은 개체수에 비해 적합한 생활 공간이 좁을수록 치열해 진다.
그러나 길가메시와 황제보다 더 오랜 옛날에 인간의 수는 공간을 놓고 서로 살벌한 전쟁을 해야할 정도로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길가메시 왕은 무엇 때문에 전쟁을 즐겼고, 황제는 왜 치우와 아홉 번을 크게 싸워야 했을까?
인간은 왜 전쟁을 하게 되었을까?
인류 최초의 전쟁에 관한 논문인 《손자병법》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전쟁의 이유와 시작, 그리고 그의 당대에까지
발달해 온 과정을 고찰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만이 손자가 왜 《손자병법》이라는 책에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체험적인, 시대적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전쟁의 시작은 인류가 농경을 하게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할 것이라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농경이야말로 인간에게 목숨을 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켜야만 할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인간이 가지
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농경에 적합한 땅이었다.
아주 고대에 그것은 농경지가 아니라 곡물의 자생적 군락지였을 것이다.
인간은 아직 씨를 뿌리고 물을 대는 수경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없었고, 땅을 개간하여 논밭을 일굴 도구를 만들 기술
도 없어서 그저 이런 야생 곡물의 집단적 서식지에서 땅에 떨어진 곡물의 낱알을 주웠을 것이다.
가는 나뭇가지나 넝쿨을 얽어서 만든 바구니를 손에 손에 든 여자들이 가을이 되면 곡물을 모으기 위해 이런 곳에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매년 비슷한 시기만 되면 이들 곡물들의 맨 꼭대기에 이삭이 달리고 더 기다리면 그 속의
알곡들이 익어서 언젠가는 땅에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해마다 그들은 그 시기만 되면 땅바닥에 곡물의 알갱
이들이 쌓이는 은혜로운 곳을 찾아와서 곡물을 쓸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바구니를 들고 그곳에 가보니 자기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먼저 와서 곡물을 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때 고대인들은 사냥에서 잡은 짐승의 고기나, 숲에서 채집한 과일일 경우와는 달리 목숨을 걸고서라도, 만일의
경우에 자기들 중 여러 사람이 다치고 죽는 수가 있더라도 이들을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가 저절로 우러나
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쌍방은 서로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분노를 표하다가 마침내는 돌과 몽둥이를 들고 상대를 밀어내게 되었다.
왜 이들은 야생 곡물의 서식지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느냐 하면, 만약에 이것을 뺏기고 자신들이 쫓겨날 경우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양보해도 자기가 사는데 지장만 없다면 인간은, 아니 모든 동물은 구태여 위험한 싸움을 하지 않고 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을 잃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면 양보를 하고 죽기보다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편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전쟁의 이유였다.
곡물을 남에게 뺏기면 자신의 가족, 씨족, 마을 전체가 죽음으로부터 도망갈 길이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겨울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겨울이 오면, 온 산야는 흰눈에 덮이고, 사냥할 짐승들도 보이지 않으며,
언제나 구할 수 있었던 과일도, 버섯도, 채소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
강도 꽁꽁 얼고 호수도 얼어붙어서 조개도 건질 수 없고, 고기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여름에 아무리 많은 짐승을 잡았어도 고기를 오래 보관할 방법이 없었고, 과일은 며칠만 지나면 마르고 상했다.
수많은 짐승들은 이 겨울의 재난을 피하기 위해 각자가 개발한 방법이 있었다.
곰과 뱀, 개구리 같은 것들은 땅을 파고 동면에 들어갔고, 새들은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사슴과 순록은 풀이 있는 곳으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일부의 짐승들은 겨울에 먹을 양식을 가을까지의 노동으
로 비축해서 겨울을 나기도 했다. 꿀벌들은 꿀을 모았고, 개미들도 부지런히 먹이를 모았으며, 다람쥐도 도토리를
물어서 제집에 가져다 놓았다.
인간은 두 가지 방식을 선택했다. 사슴과 말, 순록들처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나는 것과 다람쥐나 개미처럼 겨울
을 날 수 있는 식량을 비축하는 것이었다.
전자를 택한 사람들은 유목민이 되었고, 후자의 방식을 택한 사람은 농경정착민이 되었다.
유목민이 사슴과 다른 점은 길들여져서 가축이 된 짐승들이 먹을 풀을 찾아다닌다는 차이였다.
인간은 가축의 고기와 젖을 주식으로 삼았다. 농경민은 식량을 비축해서 겨울에 맞섰다. 겨울 내내 보관이 가능한
먹거리는 쌀, 보리, 밀, 조, 콩과 같은 곡물류뿐이었다. 그러므로 농경민에게 가을까지 채집한 곡물의 낱알이 충분하
지 못하다는 것은 곧 다가올 겨울 동안의 아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훗날에는 짐승의 고기를 건조시켜 장기간 보관할 줄 알게 되었고, 몇 가지 발효식품을 만들어 겨울의 먹거리로 이용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길가메시와 황제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곡물이 유일한 겨울식량이었다.
때문에 북반구의 사람들은 곡물의 야생서식지를 자신의 영역 내에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대규모 곡물의 서식지 근처에는 자꾸만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구가 늘게 되었다.
즉 인간은 곡물의 야생지 주변에 군락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곡물들은 여름에 충분한 양의 햇볕과 물을 필요로 함으로 주로 강에 가까운 저지대에 위치했다.
인간은 오랜 경험에 의해서 어떤 곳에 이런 곡물들이 있는지를 알게 되었고, 자연히 큰 강의 유역에 모여들게 되었다.
이것이 인류의 문명이 큰 강을 끼고 발생하게 된 이유이다.
곡물이라는 것이 생존과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다보니 자연히 이것의 소유권을 두고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어야 하는 절박한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인간이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지켜야만 할 가치가 있는 최초의 대상물은 바로 농경지였고, 그곳에서 나는 곡물이
었다. 야생곡물의 서식지는 그렇게 흔치 않은 것이었고 인간의 수는 점점 불어나 농경지를 사이에 둔 싸움은 점점
격렬해져 갔다.
아주 옛날에는 늦가을에 곡물의 줄기와 잎은 시들고 완전히 익은 이삭이 땅에 떨어진 후에 그것을 주워 담았을 것이다.
그러나 땅위의 곡물은 먼저 주워담는 쪽이 임자였고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힘들었다.
그 곡물의 낱알들에는 어떤 인간의 땀도 배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는 남보다 빨리 곡물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이삭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삭이 달린 줄기 채 베어서 수확을 하게 되었다.
처음 야생곡물의 추수에 사용된 도구는 돌을 갈아서 날을 세운 석기였을 것이다.
한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돌의 한쪽을 날카롭게 벼린 것을 쥐고 사람들은 벼나 밀, 조의 줄기를 잘랐다.
사람들이 사는 동굴 옆에는 베어온 짚단이 산처럼 쌓였다.
먹기 위해서는 말린 후의 탈곡 작업이 필요했다. 곡물을 식량으로 사용한 연륜이 쌓이면서 인간은 농경에 대해서 조
금씩 지식을 쌓아갔다. 낱알을 너무 남김없이 주워내면 이듬해에는 곡물이 별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관을 위해서 땅을 파고 곡물들을 파묻은 자리에서 이듬해 봄에 싹이 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곡물의 낱알은 바로 그 곡물 자체로 자라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야생의 곡물이 많이 자라던 곳과
비슷한 땅을 찾아서 곡물들을 땅 속에 파묻게 되었다.
한 알의 곡식을 파묻으면 다음해에는 그것의 백배나 되는 곡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매년 똑같은 수확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해 가을에는 걷을 곡물이 하나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아서 곡물이 자리지 못한 해였다.
가뭄이 닥쳐서 땅이 갈라지고 곡물들이 말라죽는 것을 처음에는 안타깝게 보고만 있었을테지만 나중에는 다가올 겨
울의 기아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을 가만히 있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가까운 강물을 끌어대거나 물을 길어와서 부어줌으로서 곡물들이 죽지 않도록 도와주게 된 것이다.
차츰 차츰 수경법이 발전되어 갔고, 인간은 겨울을 걱정하지 않을 만큼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곤란이 뒤따랐다. 하나는 수확한 곡물을 노리는 약탈자들이었고, 또 하나는 농경의 고됨이
었다. 농사라는 것은 그 옛날의 수렵과 채집하고는 노동의 강도가 달랐다.
인간이 야생의 곡물들에게 인간의 노동을 첨가하면 나중에 더 많은 곡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곡식들이 자라는 땅에서 인간은 곡식의 성장을 방해하는 돌을 주워내고 먹을 수 없는 잡초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땅이 메마르지 않도록 물길을 내어주는 작업도 하게 되었다.
인간의 땀이 대자연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곡물들은 더 많은 소출을 기록했고, 날이 갈수록 이런 곳은 거대한 농업
지역으로 변화했다.
주변의 인구는 급증했고, 인간은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눈부시게 발전해 갔다.
금속을 녹여 제련하는 방법을 알게되면서 인간은 처음으로 쟁기와 삽의 날을 대지에 박을 수 있었다.
인간이 길들인 가축의 종류가 늘면서 마침내 소와 같은 힘세고 덩치가 큰 동물이 인간을 위해 자신의 힘을 제공하게
되었다. 소는 사람보다 훨씬 쉽게 쟁기를 끌어 땅을 갈았다. 인간은 이제 겨울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이 그것으로 안전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농경은 인간에게 최초로 재산이라는 것을 갖게 하였고,
사유재산이 발생하게 하였다. 수렵과 채집시대의 포획물들은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먹지 않아도 버려야만 했다.
그것들은 가치를 부여할만한 재산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야생의 곡물들을 주워오던 시대에도 땅에 떨어진 곡물의 낱알들은 그것을 발견하는 모든 사람의 것이었지 누가 사
유재산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도자기나 석기와 같은 인공물들은 주인이 있기는 하였으나 제작에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무력으로 강제로 뺏기보다는 차라리 직접 만드는 것이 더 쉬웠다.
그때까지는 인간은 남으로부터 약탈을 할만한 재산이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전쟁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농경이 시작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곡물들은 몇 개월, 몇 년 동안이라도 저장이 가능한 식량이었다.
어떤 가족이나 씨족이 자기들의 동굴에 모아놓은 곡물들은 탐나는 재산이었다.
소유한 측에서는 그것을 뺏기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생사가 걸린 보물이었다.
그리고 농경은 흙을 주물러 토기를 만들거나 돌을 깨트려 석기를 제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식과 기술과 경
험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보다 진보된 연장들과 길들여진 가축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런 농경 기술을 가진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의 생존력에는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변화는 곡물의 생산에는 인간의 땀, 즉 노동이라는 요소가 투입된다는 사실이고, 그 노
동에는 양만이 아니라 지식과 기술이라는 질이 포함되었다.
누가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누가 더 결정적인 기술과 지식을 제공하였느냐에 따라 소출된 곡물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수유권이 달라졌다. 그때부터는 각자의 창고에 쌓인 곡물의 저장량이 개인에 따라, 가족에 따라, 집단에 따라 달라지
게 되었다. 부의 편중과 불평등이 생겨난 것이다.
곡물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인간 집단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위해서는 죽을지 모른다는 위험
까지도 불사하고 힘으로 강탈하려는 자들이 생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곡물의 약탈자는 주로, 먼 옛날에 생활의 방식을 달리 했던 자들이었다.
즉 유목민들이 농경민들로부터 곡물과 여자를 약탈하기 위해 자주 쳐들어왔다.
농경정착민들은 이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을 주변에 흙을 쌓아올리고, 파수를 세웠으며, 남자들은 무기를
들고 약탈자들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적은 유목민들만이 아니었다. 같은 농경민들 사이에도 전쟁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보다 생존에 유리한 땅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일상화되었다. 곡물을 경작하기 좋은 조건을 갖춘 입지는 그렇게
흔치 않았으며, 씨를 뿌릴 수 있는 땅을 개간하는데는 막대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차라리 이미 곡식이
자라고 있는 땅을 뺏는 것이 더 빠르고 쉬운 길일지 모른다는 유혹은 인간의 본능 속에서 정복욕과 지배욕구를 끌
어내었다. 더욱이 전쟁은 잘 경작된 땅과 곡식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경작하는 노동력까지 한꺼번에 획득할 수 있
는 매력이 있었다. 즉 전쟁에 이긴 집단은 진 쪽의 사람들을 자신의 가축으로 삼을 수가 있었다.
상대를 죽여도 된다는 전쟁이 부여한 승자의 권리는 자연스럽게 살려서 부려먹어도 되는 권리를 주었다.
이것이 농경에 필요한 힘든 노동이라는 난제를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노예들이 주인의 입에 들어갈 곡식을 위해서 태양이 이글거리는 대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들은 또 하나의 소요 또 하나의 말이나 다름없었다.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던 시대에는 간혹 싸움이 벌어져도 상대를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는 일은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로잡은 다른 부족의 사람을 써먹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예를 사냥에 동원해봐야 사냥을 하는 동안 다 도망가 버릴 것은 뻔했다. 그렇다고 이들을 감시한다고 해서 사냥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냥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자가 아니면 아무런 도움이 안되었다.
채집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숲 속을 흩어져서 먹을 수 있는 과일과 버섯이나 식물의 뿌리를 찾아야 하는 작업을 끌
려 나온 노예들이 제대로 할 리는 없었다.
그들의 바구니에는 독초나 독버섯들도 들어있고,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것들도 성의 없이 주운 것이며, 양도 많지 않
았다. 더구나 숲 속에서의 채집은 노예가 도망치기는 너무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노예한테 일을 시키고 그것을 감시하는 것보다는 직접 하는 것이 훨씬 속 편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랜 옛날에는 포로는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특별한 경우에는 눈을 찔러 도망을 칠 수 없
게 했다. 물론 눈먼 노예는 부려먹는데도 지장이 많았다.
어떤 종족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자를 양자로 삼아 자기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그것이 불가능한 감시와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보다 현실적이었다.
인간은 노예가 되면 달아나려고 한다. 감시를 하지 않아도 도망치지 않는 경우는 주인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의 결과
가 확실한 죽음이 되는 경우이다. 달아난 후의 생존에 자신이 없는 경우이다.
혹은 달아나 자유의 상태가 된 후의 생활이 노예상태의 생활보다 더 비참하고 힘들 것이라고 예상되는 경우이다.
이럴 때에 인간은 노예상태를 받아들이게 된다.
수렵이나 채집과는 달라서 농경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이었다. 그리고 노동의 성격이 다분히 정적이었다.
그래서 노예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 상태에서도 부릴 수 있었고, 몇 사람의 감시자가 수많은 노예들을 한 눈에 내
려다보며 일을 시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노예들에게는 어떤 감독보다 더 무서운 관리자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이었다. 이미, 자연은 집단으로부터 벗어나 고립된 개인이 생존하기는 어려운 환경으로 인간의 집
단거주지역을 에워싸고 있었다.
빙하기가 끝난 후 인류가 원시적인 농경을 시작하고 노예라는 것이 생길 무렵에는 자연환경도 바뀌어서 인간은 개인
으로서는 살아갈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집단에 속해있지 않은 외로운 인간은 다른 맹수의 밥이 되거나 아니면 첫 번째 겨울에 거의 틀림없이 얼어죽거나
굶어죽었다.
겨울에 인간이 살아남는데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우선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동굴과 같은 거주지,
두 번째가 불, 세 번째가 겨울식량이었다.
이 세 가지는 어떤 유능한 인간도 혼자서는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인간은 무리로부터 쫓겨나면 바로 죽
음이었다.
인류의 고대문명은 전부가 큰 강의 유역에서 농경과 함께 일어났으며, 그것은 동시에 노예사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 문명의 발상지는 대부분 그 주변이 죽음의 땅이었던 공통점이 있다.
황하유역은 겨울이 매섭게 추운 지방이었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강을 벗어나면 바로 불모의 사막이었다.
황하의 겨울이나 중동의 사막이나 탈출한 노예에게는 확실한 죽음이 보장되는 땅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고대에는 추방이 바로 사형과 같은 의미였다.
또 하나의 문명인 그리스도 노예가 세운 문명임에는 다를 것이 없었다.
민주정은 소수의 자유민에게만 적용된 것이었지 그 바닥에는 자유민의 몇 배가 넘는 노예들이 깔려있었다.
그리스의 경우 노예들을 가두어놓은 자연의 울타리는 바로 바다였다.
좁은 반도 지역이고 섬이 많은 그리스에서는 배를 타고 먼바다로 도망치지 않는 한 노예가 다시 붙잡혀오지 않게
숨을 곳이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인류의 사회는 지구상에 출현한 모든 문명지역에서 하나의 예외도 없이 노예제도에
기반하게 되었다.
농경사회는 노예라는 가축이 없이는 지탱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때문에 노예를 거느린 농장주들이 할 일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바로 전쟁을 해서 노예를 붙잡아오는 일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전쟁의 목적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노예라는 편리한 짐승의 포획이었다.
그래서 전쟁은 원래부터 사냥과 같은 것이며, 인간이 벌이는 가장 대규모적인 사업이었다.
그것은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전쟁은 가장 수지맞는 비즈니스인 것이다.
물론 리스크도 크지만 원래 베니핏(Benefit)은 리스크(Risk)에 비례하는 법이다.
고대(古代)의 전쟁
그렇다면 이 책의 주인공인 손무(孫武)가 활약했던 양자강과 황하 사이의 땅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살펴보
자.
중국의 경우 전설의 시대는 삼황오제로부터 하(夏)나라까지이다.
이 시대의 일을 뒷받침해 줄만한 어떤 유물이나 고고학적 증거물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지난 20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이런 전설의 시대에 은(殷)나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마천이 지은 역사책인 《사기》에는 은조 역대의 왕들이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사마천이 당시에
전해지던 전설을 토대로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1928년에 은허(하남성 안양시 소둔촌)에서 대규모의 갑골문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해독한 결과 은나라
에 대한 《사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갑골문에서 발견된 은나라 왕들의 이름이 사기의 기록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은나라부터 전설의 시대를 벗어나 역사의 시대가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격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역사상 중국의 최초의 국가가 되는 은나라는 전쟁을 통하
여 건국되었다. 이전인 요순시대의 전설은 전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인의 덕이 사방에 미쳤던 시기였다.
요순시대는 곧 우(禹)에게로 넘어갔고 우는 역사상 처음으로 하(夏)라는 국호를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하나라는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하나라는 전설에 따르면, 17대 3백년을 지속하였다고 한다.
이 전설의 시대가 남긴 이야기의 대부분은 황하의 치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이 시기가 바로 황하유역에 대규모의 농경이 시작된 때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곡물류는 대부분 물이 풍부한 습지에서 자생하였기 때문에 이런 곡물을 얻기 위해서 인간은 강변 가까이에 거주지를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경지를 보호하고 소유권을 확실히 하며 그 산출물을 얻는데는 유리하였지만 강에 가까운
주거는 크나큰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홍수였다.
곡물의 생산지를 떠날 수 없는 인간에게 강의 범람은 제1차적이고 가장 무서운 재해였다. 고대인의 생존을 위협한
것은 적의 침입과 홍수, 그리고 가뭄이라는 세 가지였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강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 것을 보면서도 강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었던 인간들은 마침내
강을 다스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치수와 관개는 나일강과 황하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그리고 양 문명 공히 이런 치수와 관개에 지도력이 있는
자가 권력을 갖게 되었다. 하나라의 창업자인 우는 선대인 순(舜)에 못지 않은 치수의 공을 세웠다.
아마도 황하의 중류 일대가 거대한 문명의 발상지가 된 데에는 순과 우의 치수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보여진다.
그러니까 역사상 실존했던 것이 분명한 은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에 황하유역에서는 농경이 시작되었고 인간의 밀집
된 사회가 생겨났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바로 전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B.C. 1751년에 상(商)이라는 땅의 우두머리이던 성탕(成湯)이란 사람이 군대를 끌고 하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하나라는 걸(桀)이라는 자가 왕이었는데 말희( 喜)라는 여자에게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 걸은 자기를 돕는 주변 세력이 아무도 없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성탕은 그를 쫓아 명조(鳴條)라는 곳까지 갔는데, 걸은 그곳에서 자기를 따라온 군사들을 정비하여 성탕과 싸웠으나
패하여 죽었다. 하나라는 무너지고 은나라가 섰다.
이 국호를 은이라고 한 이유는 성탕이 도읍을 정한 곳이 은이라는 이름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새 왕조가 들어섰을 때 그것의 도읍지를 국호로 삼지 않고 그 창업자가 본시 일어났던 근거지의
이름으로 국호를 삼는다. 그래서 은나라도 성탕의 본거지 땅의 이름을 빌어 상(商)이라고도 한다.
성탕이 하나라를 쳐서 은나라를 세웠을 무렵에 지구의 반대쪽에서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강대한 국가를 건설하고 있
었고, 힛타이트인들이 아나톨리아의 고원 일대에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집트와 바빌론과 은나라가 청동기를 사용하고 있었을 당시에 힛타이트인들은 최초로 철기를 사용하여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공격했다.
철의 제련법을 독점하고 있는 동안에는 힛타이트인들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이때 헤브라이인(유대인)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티나로 이주해 왔다.
그들은 바빌로니아에서 배운 농사기술을 이용해 요르단강 유역에서 농경지를 개척했지만 곧 이집트의 공격을 받고
노예로 끌려가게 된다.
전세계를 막론하고 이 시기부터는 인간은 약하면 노예가 되는 운명에 처해졌다.
이것은 그리스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나 황하나 인더스나 공히 마찬가지였다.
대규모 농경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씨족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고 여러 씨족들의 마을이 공동의 방위를 위해
동맹을 맺고 그들 전체를 지도할 지도자를 선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점차로 전쟁과 혼인 등을 통해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이 우의 하나라나
성탕의 은과 같이 왕을 칭하고 주변을 다스리게 되었다.
물론 복속을 거절하는 부족에 대해서는 군사를 일으켜 정복했고 굴복한 종족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은나라는 황하 유역의 많은 종족들에게서 복속할 것을 약속 받은 가장 힘센 종족이기는 했으나 모든 마을에 직접적인
통치력이 미치는 것은 아니어서 당시의 천하는 대단히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보다 수가 많고 보다 싸움에 능한 종족들이 주변의 작은 씨족과 마을들을 병합하여 커지고
있었고 도시의 규모도 확장되었고 개간된 농경지의 면적은 날로 넓어져 갔다.
농경의 발달은 공동체가 부양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늘렸고 그에 따라 인구의 증가가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먹이 사슬에 의한 자연적인 개체수의 조절이 인간에게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은나라는 이후 7백년간 존속되었는데 말대에 이르러 주(紂)라는 폭군이 등장하게 된다.
주는 본시 담력이 세고 완력이 강한 사람으로 싸움에 능하였다고 하는데, 하나라의 말대(末代) 왕인 걸과 마찬가지
로 유소(有蘇)씨 부족에서 바친 달기( 己)라는 여자에게 빠져 악행을 일삼다가 천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여 서
쪽 주(周) 땅의 제후인 서백(西伯)의 아들 발(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이가 은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주무왕(周武王)이다.
물론 주가 천하를 잡게될 기틀은 그의 아버지인 서백 희창(姬昌)의 대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가 곧 주문왕(周文王)이
며, 이를 도와 왕업의 토대를 쌓은 현자들이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강망(姜望)이라는 사람과.
주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旦)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강망은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족(姜族)은 본시 티베트사람들이다.
주(周)나라가 은의 서쪽에 위치하면서 그 경계는 티베트에 닿아있었다.
주문왕 희창은 위수를 따라 서쪽 변경을 돌아보다가 티베트 사람 강망을 만났을 것이다. 서백은 강망을 그 자리에서
스승으로 삼아 수레에 태우고 돌아왔다. 강태공이 국사로써 정사를 맡게된 후에 주나라는 크게 융성해졌다.
가까운 부족들이 복속해 왔다. 그러나 주문왕은 천하를 도모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제위를 물리고 죽었다.
주의 새 우두머리가 된 주무왕이 선대의 유업을 이어 세력을 확장해 가는 동안에도 은나라의 주왕은 방탕한 생활을
돌아보지 않고 매일같이 포악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주나라는 은을 멸한 후에 은나라 토벌의 이유로 지나친 은나라 사람들의 음주습관을 들고 있다.
은나라는 상하가 모두 술에 절어있는 술 취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은나라 문화의 가장 큰 특색인 '하늘에 대한 제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은허에서 발굴된 엄청난 양의 갑골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은나라 왕의
일상적인 일이 바로 점치는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왕은 바로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이었고, 왕에게 가장 요구되는 일의적인 능력이 바로 신탁
이었다. 즉 점을 침으로써 하늘의 뜻을 알아내는 힘이었던 것이다.
점을 치고 신탁을 받는 행위는 점차로 하나의 의식으로 발전해갔는데 이것이 예(禮)의 시작이다.
이런 갑골점과 제례의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왕은 하늘과 마주하여 서로 대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은나라 왕이 술을 마시는 행위는 바로 의식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술에 취하여 몽롱한 상태가 하늘의 뜻을
알아낼 수 있는 신비로운 접신의 상태로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인디언 추장들이 비슷한 경우에 담배처럼 들여마시는 마약을 흡취했듯이 은의 왕은 알코올에 절은 상태에서 신과의
감응의식을 치루었을지 모른다.
걸왕이 달기와 함께 저지른 행위들은 모두 만취 상태에서 벌어진 일들로 보인다.
왕이 그렇다보니 음주는 은나라 사람들한테는 하나의 신성한 의식이 되었고, 백성들 전체가 술이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상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향은 오늘날에도 러시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사실 스탈린, 후르시쵸프, 옐친이나 고르바초프까지 전부가 사실 알코올 중독자들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알코올중독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건 도가 지나친 은나라 사람들의 음주문화는 결국 주왕대에 이르러 광기로 나타나게 되고 그것이 포악성과 결부
되자 충신의 심장을 꺼내고, 죄인들을 불에 달군 기둥 위로 걸어가게 하는 등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은나라 사람들은 은허에서 발견된 유골의 조사 결과 중국의 동북지방 사람들인 동이족 계열인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음주 가무를 즐기고 지금도 술을 지나치게 탐닉하여 2차, 3차를 가서 고주망태가 되어야 술잔
을 놓는 버릇이 옛 은나라 시절의 조상으로부터 물려진 유전적 기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B.C.1751년에 주무왕은 군대를 일으켜 은나라 수도 상(商)으로 쳐들어갔다.
술에 절어있던 주는 군대를 소집해서 목야(牧野)에서 주무왕의 군대와 맞섰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은나라 군대는 저
마다 등을 돌려 도망가고, 은왕 주는 달기와 노닐던 녹대(鹿臺)에 올라가 불 속에 타죽었다. 달기도 목을 매 죽었다.
우리는 이 시대, 주무왕과 주왕의 군대가 어떤 무기를 사용하고, 어떤 갑주를 입었으며, 어떤 전술을 구사했는지,
그 병력의 수효는 얼마 정도였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다만 기록에 주무왕이 출진할 때 선대인 주문왕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출발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가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이다.
이 무렵의 전쟁과 전투의 실상에 대해서는 서양 쪽도 자료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주무왕은 주왕을 죽이고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수도를 호경(鎬京 : 지금의 西安)으로 옮겼다.
은나라의 근거지였던 상땅이나 은허가 있던 황하의 중류지역으로부터 상당히 서쪽으로 치우친 위치였다.
그래서 제2의 수도로서 낙읍(洛邑 : 낙양)을 부도(副都)로 삼았다.
그리고 은나라와의 전쟁에 공을 세웠거나 협력했던 제후들에게 봉토를 나누어주었다.
태공망 여상에게는 멀리 동쪽의 산동반도 일대인 제(齊)나라를 주었고, 창업에 공이 컸던 자기의 동생 단(旦)에게
노(魯)나라를 주었다.
단은 형을 도와 주나라의 정치를 돕기 위해서 봉국으로 가지 않고 호경에 남아 정사를 보게 된다.
그래서 단을 주공(周公)이라고 부르는데, 공자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단과 같이 주나라의 정치를 담당하는 고위관료를 공(公)이라 하고, 주나라에서 하사한 봉토를 다스리는 사람을 제후
(諸侯)라고 하는데, 제후는 그 서열이 분명해서 후작(侯爵), 백작(伯爵), 자작(子爵), 남작(男爵)으로 나뉘어졌다.
공(公)은 후(候)와 같은 반열로 대접받았다. 그러니까 중앙정부의 고위관료는 지방봉토의 제후와 동격이었다.
이런 제후들은 봉토를 다스리기 위한 통치조직으로서 자기의 가신(家臣)을 거느렸는데, 이들은 신분별로 경(卿), 대부
(大夫), 사(士)로 구분되었다.
제후의 가신들은 자기의 주군으로부터 봉토를 나누어 받거나 아니면 채읍이라는 급료를 지급받고 충성을 바쳤다.
이들은 제후에게서 받은 봉토에 대해서는 세금에 해당하는 봉납을 바쳤으며, 또한 군역을 제공했다.
그러니까 제후가 명하면 즉시 할당된 수의 병사와 군마와 수레를 제공해야 했다.
주나라 건국 초기에 주무왕이 나누어준 봉토는 약 200개에 달했다. 그러니까 제후급의 지방군주가 약 200명에 달했고,
그들이 나라라고 부른 땅의 수가 마찬가지 개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 있는 큰 제후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한 마을이 하나의 나라였다.
이런 올망졸망한 작은 나라들이 황하와 양자강 사이의 비교적 평탄한 대지 위에 산재하게 된 것이다.
제후와 가신단의 밑에는 농민이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농노와 다름없었다.
왕이나 제후가 봉토를 신하에게 나누어 줄 때는 그 땅에 포함된 사람들의 수가 명시되어 넘겨졌다.
그 사람들은 하나의 재산에 포함된 부속물로서 양도되고 증서되었다.
땅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여서 자기 마음대로 살 곳을 옮길 수 없었으며 제후나 가신단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짐승처
럼 들판에서 일해야 했다.
2백개 가까이 되는 봉토들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주나라 왕실의 인척이거나 신하였거나, 또는 협력했던
제후들이었기 때문에 서로간에는 동료의식이 있었고, 한솥밥을 먹는 식구라는 의식이 있어서 초기에는 서로간에
전쟁을 하는 일이 없었다.
주나라는 잠시동안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주나라 초기에는 전국 제후들간의 반목이나 다툼보다는 오히려
외부의 적이 우환거리였다.
바로 북쪽의 유목민들인 흉노(匈奴)와 융(戎)족의 침입과 약탈이었다.
황하 유역의 비옥한 땅에 농경을 일으켜 일찍부터 정착한 중국인들이 북쪽의 초원지대를 돌아다니는 유목민들에게
언제나 약탈의 대상이 된 것은 하나의 숙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이때로부터 북쪽의 유목민들에 대한 대처가 생사존망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는 이들에게 정복되고 지배를 받거나 이들과 싸워 물리친 끝없는 반복으로 점철된다.
주나라는 특히 서쪽 변방이나 마찬가지인 호경에 수도를 정했으므로 바로 북쪽의 흉노족들과는 담 하나를 격하고
이웃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주나라는 호경 주위의 제후국들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봉화대를 높은 산꼭대기에 만들어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흉노의 침입을 알렸다. 봉화대의 신호가 오르면 가까운 제후들이 제일 먼저 병차를 몰아 달려오게
되고 조금 후에는 먼 곳의 제후들까지 군대를 끌고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첨단의 통신시스템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탐지장비와 통신시스템도 인간이 그것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
하고, 올바르게 판단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을 이 역사상 최초의 장거리 통신 시스템은 보여주게
된다.
주나라의 봉화는 주선왕의 어리석음으로 해서 주나라의 몰락을 불러왔고, 훗날 삼국지의 관운장도 형주의 수비를
위해 봉화시스템을 구축했다가 역으로 오나라 장수 여몽의 계책에 이용되어 어이없는 패전을 하고 자신은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은 왜적의 침입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사신을 보내기까지 하였지만 그들의 보고는 당쟁의
정략에 의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조선은 7년 동안 참혹한 전란의 피해를 입었다.
2차대전때 미국은 레이더라는 첨단 탐지장비를 개발하여 하와이의 해군 기지에 설치하였고, 이 장비는 진주만 기습
공격을 위해 다가오는 일본의 항공기들을 포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레이더병의 보고는 당직장교에 의해 '착오'로 무시되었고,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단 세시간만에 자취를 감추
고 말았다.
전쟁사는 어떤 장비나 시스템도 인간의 확고한 운영의지와 올바른 판단이 결여될 때는 오히려 치명적인 패배를 불
러오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손자병법》의 천 마디가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만 못할 것이다.
아니, 그런 의지와 각오가 전제되었을 때 비로소 읽을 이유가 있고 알아야 할 가치가 생기는 것이 《손자병법》이라
할 것이다.
나는 이 시대의 한국인들에게 《손자병법》이 과연 필요한지가 의심스럽다.
주선왕에게 봉화시스템이 포사를 웃게 할 코메디의 소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한국인에게 《손자병법》은 역시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중국이 황하와 양자강이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진 광대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 그리고 당대에 세계를 항상 앞서갔
던 문화와 지식 그리고 기술을 가지고도 북쪽의 야만스러운 유목민들에게 늘 떨고 살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
까? 왜 진시황은 만리장성이라는 인류 최대의 역사를 강행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초패왕 항우를 해하성에서 잡아죽이고 천하를 통일했던 한고조 유방은 왜 흉노와의 싸움에서는 대패하고 흉노를
상전으로 모시는 굴욕적인 강화에 응해야만 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하나가 유목민들이 농경민에 비해서 기마에 능했다는 점이다.
인간은 말이라는 동물을 길들인 후에도 한참 동안 그것의 효율적인 이용방법을 알지 못했고, 소와 마찬가지로 수레
를 매어 끌게 했다. 말의 잔등에 사람이 직접 올라타는 기마술이 언제부터 보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
만 아마도 철기시대의 개막과 비슷한 시기였다고 짐작되어 진다.
동양에 국한시켜 본다면 은나라는 청동기의 나라였고, 주나라 초기부터 철기시대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철기문화는 춘추전국시대에 가서 개화하는데 주초의 철기에 대한 기록으로는 《춘추좌전(春秋左傳)이,
기원전 512년에 해당하는 진항공(晋項公) 14년에 조앙(趙 )과 순인(荀寅)이 진(晋)나라 전역에서 1고(鼓 : 480근)
의 쇠를 모아 형법을 새긴 솥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중국 전역에서 철이 생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기》에도 춘추전국시대에 철을 생산하여 거부가 된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고 대규모 철광생산지에는 천명이 넘
는 노동자가 있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미 주나라 초기에 히타이트인의 철기 제련법은 중국에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철기의 발명과 함께 고대 사회에 크나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 바로 기마민족의 출현이었다.
본시 사람을 등에 태워본 적이 없는 말이라는 동물이 자기 몸 위에 올라타는 인간을 순순히 받아주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로데오 경기에서 보듯이 말은 올라탄 인간을 떨어뜨리기 위해 모듬박질을 하고는 했을 것이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고삐로 제어하는 기술이 처음부터 있었을 리는 없고, 기수가 발을 딛는 등자가 발명된 것
도 기원 후 2-3세기에나 가서였다.
말에 올라탄 인간-말과 인간이라는 이종의 동물이 하나로 합쳐진-이라는 놀라운 신인류가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
을 때는 말이나 인간의 양쪽에 이 부자연스러운 결합을 도와주는 어떤 장치도 없었다.
오로지 말의 잔등을 양쪽에서 조아붙이는 인간의 다리근육만이 인간을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유일한
물리력이었다.
안장도 없이 고삐도 없이 말의 맨 등에 올라타서 두 다리의 힘만으로 버틴다는 것은 곡예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라는 기간만으로는 숙달되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수천 년 전의 인간에게 있어서 말을 타고 다닌다는 것은 현대인이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시절부터 말이라는 동물과 함께 살았던 유목민만이 해낼 수 있는 고난도
의 기술이었다. 농경민으로서는 흉내를 내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건축과 토목에 놀랄만한 재능과 기술력을 가졌던 로마인들도 기마에는 결코 숙련되지 못해서 언제나 유목민의 기마
대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로마군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누미디아족과 같이 로마가 고용한 전문 기마병이었다.
재갈과 고삐를 이용해서 말을 제어하게 된 다음에도 여전히 기마는 위험한 묘기였다.
인간이 달리는 마상에서 활쏘기나 창검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은 등자에 발을 딛고 말 위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
게된 다음부터였다. 나서부터 말과 함께 자란 유목민조차도 마상에서 무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병은 걸어다니는 사람보다 훨씬 먼 거리를 보다 빠르게 갈 수가 있었다.
이 이동의 속도가 바로 무기였고 두려움이었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기마를 이용하여 농경민들이 방어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기마병들은 순식간에 들판을 지나 눈앞에 쇄도했다.
그리고 싸움이 불리하면 추격할 방도가 없는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그들은 이 이동의 속도를 이용해서 농경민들의 방어가 약한 곳을 유린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유목민들과 농경민들은 전투병의 성격이 달랐다는 점이다.
고대의 농경국가는 국민의 구성비율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노예가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이 사회의 생산을 담당하고
있었다.
중국의 경우에도 주나라 시대의 모든 농토는 제후들의 사유지이며, 이들로부터 또 분봉받은 가신들의 것이었기 때문
에 자기 땅을 가진 농민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농사를 짓는 생산계층은 지배층의 소유물인 가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문제는 가축을 농사나 노동에 써먹을 수는 있어도 전쟁을 하도록 훈련시킬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사냥만 해도 노예는 별 도움이 안 되었다.
그런데 전투에 필요한 용기, 공격정신, 책임감과 사명감을 이들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난센스였다.
전쟁만큼은 '지켜야 할 것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귀함과 자부심을 느끼는' 자유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노예들은 적 앞에 내몰아도 그저 작대기 세워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봉건국가에서 군대는 지배계층만으로 구성되게 마련이었다. 결국 가진 자가 지켜야 하는 법이다.
이것은 로마제국이나 주(周)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주나라의 군대는 각 제후와 그의 가신단들로 조직된 사병(私兵)
들이었다.
그들의 정신적 토대는 귀족의 공명심과 개인적인 충성심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각자의 봉건적인 위계질서에 따라 소집되었다. 분봉받은 영지의 크기와 소출되는 생산량에 따라
거느릴 수 있는 가신의 규모가 정해졌고, 그것은 곧 전시에 동원할 수 있는 전투병력의 숫자를 결정지었다.
때문에 한 나라에서 가장 많은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공경, 대부가 곧 그 나라의 실력자였다.
물론 그의 가신들 중에서도 사병의 수가 가장 많은 자가 그 집안의 실력자였다.
이런 이유로 주나라의 군대는 귀족들이 각자 거느린 사병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이었다.
통일된 훈련이나 일체감의 유대가 있을 리 없었다. 제후들간의 전쟁 자체가 집단 유희에 가까운 일종의 세력과시였다.
농경국가이면서 봉건국가인 중국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그 군대가 약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군역에 동원할 인적 자원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인구 대비 군인의 비율이 낮아서 사람의 수는 많은데도 징집할 수 있는 군사는 적었던 것이다.
이 현상은 훗날 로마가 쇠락하여 멸망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고 노비국가로 변질된 조선이 임진왜란과 호란
을 당할 때에 필요한 정도의 군대를 편성해 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철기의 보급이 일반화되고 소가 끄는 쟁기로 땅을 갈게 되면서 농경지가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철로 만든 삽이나 괭이 등의 연장과 소라는 가축을 이용한 우경법(牛耕法)의 도입은 고대 사회에 크나큰 변혁을 가져
오게 되었다.
이 두 가지로 해서 인간은 훨씬 쉽게 불모의 땅을 농경에 적합한 땅으로 개간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 생산능력의 증대는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대규모 자영농의 탄생을 가져왔다.
자기 땅을 자기가 갈아먹는 농토를 소유한 농민계급이 출현한 것이다.
이때부터 농민도 징집대상이 되어 열국은 다투어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실시했다.
주나라 초기에 제후국이 동원할 수 있었던 군대가 고작 수천명이었던 것에 반해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군대의 규모가
수십만이라는 대군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러나 자영농민을 군인으로 징집할 수 있게 되었다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봉건제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적인 왕조가 들어선 후에도 중국은 군대의 유지에 언제나 애를 먹었는데 그 이유는 농사
때문이었다. 농사라는 것은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농부들 중에서 군인을 징발해내면 그것은 바로 식량
생산에 차질을 불러 일으켰다.
때문에 군대의 동원과 전쟁은 일년 내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추수가 끝난 후의 농한기인 겨울철에 국한되었다.
농번기가 되면 군사들을 해산해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해야 했던 것이다.
최영이 요동정벌을 주장했을 때, 이성계가 반대한 이유 중의 하나가 여름철 동원이라는 점이었다.
장마와 역병도 여름철 원정의 악재였지만 그것보다는 농업 생산에 주게될 피해가 더 큰 이유였다.
이런 점은 농경 국가의 공통된 문제였고 하나의 숙명이었다.
반면에 유목민들은 구성원 중에 노예의 수가 많지 않았다. 그들은 목축을 하며 이동해 다녔는데 언제나 감시를 하고
감독을 해야 하는 노예들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유목민들간의 전투에서 포로는 대개 살해되었다. 진 쪽의 여자들은 모두 승자에게 끌려가고 남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여자들은 이긴 쪽의 남자들의 아이들을 낳고 그들의 가족으로 쉽게 흡수되었다.
이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종족의 구성원 전부가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남자는 전원 전투원이 되었다.
징기스칸 당시의 전투원 비율은 전체 인구의 3할을 넘어섰다. 남녀를 합한 총인구 열명에서 세명의 전투원이 징집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유목민은 특별히 농번기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전쟁을 하는데 계절적인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일년 중 어느 때라도 전사들을 징발하여 전쟁에 돌입할 수가 있었다.
유목민들의 재산인 가축을 돌보는 일은 농사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경노동이었으므로 나이든 남자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여자들만으로도 감당을 해낼 수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북방의 유목민들은 전투원 개개인의 용감성과 자질이 뛰어났고, 군대의 규모가 컸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한나라를 세울 무렵에는 흉노가 동원할 수 있었던 기병의 수가 40만 명에 달했다.
중국 전체를 지배했던 한나라의 황제인 유방이 흉노정벌에 동원한 군대의 수는 보병 32만이었다.
중국과 흉노는 인구의 차이가 10:1이면서도 군대의 수는 오히려 흉노가 우세했던 것이다.
그리고 흉노의 군대는 대부분이 기병이었고, 한나라 군대는 보병이었다.
한고조는 평성(平城)의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의 왕 목돌선우(冒頓單于)에게 포위 당해 7일을 버틴 끝에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풀려 나왔다. 한나라가 흉노를 상국으로 모시고 조공을 바치기로 약조를 한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공주를 목돌선우에게 보내는 것도 약조의 일부였다.
로마제국에게 북쪽 갈리아의 야만족들이 언제나 우환거리였던 것과 같이 중국에게는 북방 유목민들이 한시도 마음
을 놓을 수 없는 걱정거리였다.
로마군단은 주변의 야만족들과는 그 전투력에서 현격한 차이를 항상 유지하고 있었지만 중국은 그렇지를 못했다.
오히려 중국의 군대는 대개 주변의 유목민들보다 약체였다.
중국에서 병법이 발달한 것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약자의 생존술이나 마찬가지이다.
결국 병법이라는 것은 약으로 강을 물리치고, 과로서 중을 제압하는 방법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주나라는 흉노와 견융의 침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는 평화를 누렸다.
9대까지 별 탈 없이 300년의 평화시대가 지속된 것이었다. 그러나 주나라의 초기 역사에 해당하는 이 3백년 동안 어
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전해주는 기록은 거의 없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이 무렵에 대해서는 상세한 이야기를 쓴 것이 없다.
그리고 '무슨 왕 몇 년의 일'이라는 식으로 기록하는 연표라는 것이 《사기》에 적히기 시작하는 것은 공화시대(共
和時代) 원년인 B.C. 841년부터이다.
그 이전의 기록들은 연표가 없어서 선후와 시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실 중국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후대에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841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주나라 제10대 주여왕이 백성들이 일으킨 난에 쫓겨 달아난 후에 주나라 정사를 대신들이 맡아보았는데 이 시기를
공화(共和)라고 한다.
왕정(王政)의 반대말인 공화정(共和政)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왕이 없는 나라를 대신들이 함께(共) 화합하여(和) 이끌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서에 자세한 기록이 없어 상세한 내막을 알 길이 없으나 어쨌건 쫓겨간 주여왕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14년 만에
망명지에서 죽고, 그 아들이 제11대 왕으로 즉위했다. 이가 주선왕(周宣王)이다.
주선왕은 4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에 부왕의 망명과 공화정의 실시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주나라를 부
흥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다가 위를 아들 궁생(宮生)에게 물려주고 B.C. 782년에 죽었다.
주나라 제12대 왕인 이 주유왕(周幽王)은 그러나 영민하지 못했다.
정사를 귀찮아했고 난폭했으며 무엇보다도 여색을 탐하는 사람이었다. 현명한 노신들은 차례로 죽고, 새로 중임을
맡은 자들은 대개 아첨배였다.
망국의 위기를 느낀 충신 조숙대(趙叔帶)는 왕한테 간하였으나 먹히지 않자 식솔들을 데리고 냉큼 진(晋)나라로 망
명해 버렸다.
이 조숙대의 후손이 훗날 진(晋)나라 땅을 기반으로 천하 6국 중의 하나인 조(趙)나라를 세우게 된다.
조숙대의 망명소식을 들은 지방의 호족인 포향(褒珦)이라는 사람이 상경하여 주유왕에게 현신들이 떠나는 세태에
대해 간하였는데 주유왕은 포향을 가두어버렸다.
이 일이 주나라를 망하게 하고야 만다. 포향의 아들인 홍덕(洪德)이 자기 영지 안에 절세의 미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눈으로 확인을 한 후에 그 여자를 주유왕에게 바치고 아버지를 구출해 내는 것이다.
이때 홍덕이 주유왕에게 바친 여자의 이름이 역사에 요부(妖婦)로 그 이름이 길이 남은 포사(褒 )였다.
이 포사의 출생에 대해서는 기이한 전설이 있다. 아마도 한 인간의 출생에 얽힌 비화 중에서는 포사보다도 더 오랜
세월에 걸친 장대한 이야기는 드물 것이다.
포사의 출생 비밀은 근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라의 말대왕인 걸에게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걸은 점을 쳐보게 했다. 점괘는 '불길(不吉)'이었다.
걸이 두 용을 쫓아보내는 일을 점치게 하였더니 역시 '불길'이었다. 이때 태사가 진언하기를 "이 용은 신인이 모습을
변한 것이니 용이 나타난 것은 상서로운 일이며 그 거품을 받아 잘 간직하면 크게 길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걸왕이 그 말을 그럴듯하게 여겨 용이 흘린 침을 붉은 나무 상자에 담아 소중히 보관하게 했다.
그제서야 두 용은 구름 위로 승천하여 사라졌다. 이 나무상자는 하나라가 망하고,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설 때
까지 근 천년의 세월동안 궁궐 속 창고에 있었는데, 주선왕의 아버지인 주여왕 때에 이 상자에서 빛이 한줄기 새어
나오는 것을 본 창고지기가 왕에게 그 일을 보고하여 열어보게 되었다.
창고지기가 상자 뚜껑을 열고 왕에게 바치려고 하다가 실수로 상자를 놓쳐버렸고 그 순간 용의 침이 바닥에 쏟아져
버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침이 조그만 도마뱀으로 변하여 쏜살같이 숲 속으로 도망가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도마뱀이 기어간 자국을 밟은 궁녀 하나가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주여왕은 이 궁녀도 가두어버렸다.
그런데 깊숙한 내실에 감금된 이 궁녀가 40년 만에 여자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주여왕의 왕후는 그 아이를 강에 내다 버리게 하였다.
이때 활과 화살을 만들어 호경에 팔러온 시골 부부가 이 여자아이를 발견하였는데 아낙은 관에 붙들려 죽고, 남자만
포성 땅으로 도망쳐 이 여자아이를 사대(似大)라는 사람에게 베 한필을 받고 팔았다.
사대는 여자아이에게 포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수양딸을 삼아 길렀다.
포사(褒似)라는 이름은 포성(褒城)에 사는 사(似)씨 집안의 여식이라는 뜻이다.
이 설화는 엄격하게 진위를 따져 기록했다는 《사기》에 실려있는 이야기다.
어쨌건 파란만장한 운명을 타고난 한 여자아이는 포성땅을 다스리던 포향이 주유왕에게 감금된지 3년이 되었을 때,
열다섯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눈부신 자태는 인근에 널리 소문이 퍼졌다.
아버지를 구해낼 방법이 없을까 골몰하고 있던 홍덕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과연 포사의 미색은 주유왕을 사로잡았고, 주유왕은 그날부터 포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은의 주왕이 달기를 위해 녹대를 지어주었듯이 주유왕은 포사를 위해 경대(瓊臺)를 지어주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왕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주유왕은 포사의 환심을 하기 위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지 들어주었다. 포사는 곧 백복(伯服)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주유왕의 정처인 왕후 강씨와 태자는 폐하여져서 서민
이 되었다. 궁중에서 버려진 아이, 포사는 왕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듯 싶은 영화의 절정에 오른 그녀였으나 이상하게도 포사는 한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차가운 표정, 무심한 눈길이었다.
주유왕은 포사를 웃게 만드는 사람에게 천금의 상을 걸었으나 누구도 포사를 웃기지 못하였다.
이때 간신 괵석보가 왕에게 계책을 아뢰었다.
"여산(驪山)의 봉수에 봉화를 올려 천하열국의 군대를 소집하여 열국의 제후들이 군대를 끌고 집합하는 광경을 왕후
께서 구경하시도록 합소서. 도착한 제후들이 아무런 외적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당황해하는 모습은 왕후를 충분
히 웃게 하리이다"
주유왕이 "그 참 신통한 계책이로다."하고는 포사를 대동하고 여산에 나아가 봉화를 올렸다.
여산에 오른 봉화를 보고 사방팔방의 제후들이 왕성을 구하고자 군대를 끌고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여궁에 차려진 잔칫상과 질펀한 풍악소리뿐이었다.
제후들은 사태를 짐작하고 어이가 없어 서로 쳐다만 볼뿐이었다.
그때 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여궁에 울려 퍼졌다. "호호호호호호..." 포사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터뜨린 웃음소리였다.
주유왕은 괵석보에게 천금의 상을 내렸다.
이 여산의 일을 전해들은 신(申)나라의 제후는 무도한 천자를 간하기로 결심한다.
신후는 바로 폐위된 주유왕의 정후 강씨의 아버지였다. 전(前) 태자 의구는 그의 외손자였다.
포사가 왕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신후는 국구로서 주왕실의 중심가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딸은 왕후자리에서 쫓겨
났고 외손자는 폐태자되었다.
그러던 중에 여산에서의 망발을 전해듣게 된 것이었다. 신후는 간언장을 주유왕에게 올렸고 주유왕은 그 대답으로
왕사군(王師軍)을 일으켜 신후를 치게 했다.
신나라만의 힘으로는 왕실의 직속군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신후는 북쪽의 유목민인 견융에게 사자를 보내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증(繒)나라와 서이(西夷)하고도 손을 잡았다. 신후의 제의를 받은 융주(戎主)는 5천기의 우군을 패정( 丁)에게, 5천
기의 좌군을 만야속(滿也速)에게 맡기고 융주 자신은 중군 5천기를 이끌고 호경을 향해 남하했다.
1만5천의 융기병이 북에서 내려오는 것과 동시에 신나라와 증나라 그리고 서이의 군대가 남쪽과 서쪽에서 호경을
향해 올라왔다.
주유왕은 급히 여산의 봉수대에 봉화를 올리라고 명했다. 사방 수천리에서 그 꼭대기가 보인다는 여산의 봉수대에서
왕경의 위급함을 알리는 연기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고 큰 북은 다급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길과 북소리에는 냉소만이 되돌아왔다. 어느 제후도 군대를 동원하려 하지 않았다.
한 여자를 웃기기 위해 달려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북쪽의 유목민에게 농경민인 중국의 왕조가 쓰러지는 첫 번째 사건이었다.
우리가 기록으로서 그 동기와 배경과 진행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상의 첫 번째 전쟁이 동양에서는 이 융족의
호경 침입이다.
그 이전에 황제가 치우와 싸웠던 탁록의 전투나, 은나라의 성탕이 하나라의 걸왕을 무찌른 명조의 싸움, 그리고 주의
무왕이 은의 주를 멸한 목야의 싸움 등은 사서에 단지 한 줄로서 그런 싸움이 있었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을 뿐, 군사
적으로 가치 있는 어떤 정보도 전해지지 않는다.
서주(西周)가 무너지고 주나라가 동쪽의 낙읍으로 천도해서 춘추전국 시대가 열리는 원인이 되는 B.C. 771년의 융족
침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약간의 구체적인 기록으로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싸움은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의 전쟁의 특성을 가장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융족은 기병(騎兵)이었고, 주나라 군대는 전차대(戰車隊)였다.
2003년 낙양 부근에서 발굴된 주평왕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혔던 전차를 끌던 말과 전차의 유물.
주평왕은 포사에 탐닉하여 융족의 침입으로 죽음을 당한 주유왕의 아들이다. 아버지 주유왕의 피살 후에 주평왕은
수도를 낙읍으로 옮겼다.
이때로부터 주나라는 쇠약해지고 천하는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비운의 왕답게 부장품은 초라했다.
고대에 사용되던 전차는 유럽, 중동과 동양에 차이가 있다.
말이나 소가 끄는 전투용 수레를 처음으로 사용한 민족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였고, 후일의 로마군도 전차를 애용했다.
중동과 지중해 연안국의 전차는 가볍고 소형인 1인승 수레였다.
고대 이집트의 전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끌었으며, 로마군의 전차는 네 마리가 표준이었다.
특별한 경우 외에는 별도의 마부를 탑승시키지 않았고 혼자서 마차를 몰고 돌격하면서 창을 던졌다.
전차는 충격 병기지 격투용 무기가 아니었다. 적의 밀집보병 속에서 마차가 정지하면 내려서 싸웠다.
마차를 몰면서 창을 휘두르거나 칼로 적을 베어 쓰러뜨리기는 어려웠다. 마차가 달리는 동안에는 칼이나 창이 닿는
거리 안에 적병이 들어오기 힘들었고, 마차가 정지한 다음부터는 마차 위에 있는 것이 아무런 이점도 주지 못했다.
중국의 전차는 최근에 발굴된 전차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최소한 네 마리의 말이 끌어야 하는
무거운 수레였다.
모양은 두 바퀴 위에 나무로 된 판이 있고, 둘레를 나지막히 가죽이나 나무판으로 둘러놓은 단순한 것이었다.
신분이 좀 더 높은 귀인의 경우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것도 있었다.
이 싸움용 수레에는 최소한 세 명 이상이 탔는데 차의 주인은 사(士) 이상의 신분이었으며 나머지 두 사람은 그의
종복이었다.
참승(參乘)이라고 부르는 마부가 수레의 한가운데 위치하여 고삐를 쥐고 채찍을 써서 말을 몰았으며, 오른쪽에는 적
을 살상하는 전투원이 탑승했다. 이를 차우(車右)라고 하는데 차우가 사용하는 무기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모(矛), 이것은 내밀어 찌르는 창이다. 두 번째는 과(戈), 이것은 끝에 갈고리 모양의 쇠붙이가 달려있어 적을
찍어 당기는 무기였다. 세 번째가 극(戟), 이것은 글자의 모양부터가 차(車)에서 쓰는 과(戈)라는 상형을 하고 있다.
창의 자루 끝에 창(矛)과 과(戈)를 합친 모양의 것이 달려있다.
이 극에는 과 대신에 도끼가 창날과 합해진 변형도 있다. 차우는 이것을 휘둘러 전차 가까이 접근하는 적병을 살상했
다. 차주는 수레의 왼쪽을 맡아서 차우와 마찬가지로 적병과 싸우기도 했지만 마부와 차우에게 방향과 싸울 적을 지
정하기도 하고, 활을 쏘기도 했다. 현대의 전차장과 마찬가지였다.
신분이 일군의 장수인 경우에는 전차의 싸움과 방어는 마부와 차우에게 맡겨놓고 전군의 지휘를 하기도 했다.
이런 때는 전차에 깃발을 흔드는 신호병이 함께 탑승하는 경우도 있었다.
동양의 전차는 돌격이 정지되어도 내리지 않고 탑승한 채로 싸울 수가 있었다.
기록을 쫓아 호경의 싸움을 살펴보면 신후를 정벌하기 위해 소집되었던 왕사군은 그보다 더 대병력으로 먼저 쳐들
어온 신, 증 , 서이, 강융의 연합군이 쇄도하자 호경의 성문을 닫고 농성에 들어갔다.
제후들의 구원군을 기다릴 셈이었지만 여산의 봉화를 보고도 제후들은 코웃음을 쳤을 뿐이었다.
주유왕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괵석보에게 나가서 연합군을 무찌르라고 명령했다.
이때 괵석보는 200대의 전차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전차 2백대라면 말이 800필에 탑승한 전사의 수가
6백명 정도이다. 이것을 보병의 전투력으로 환산하면 2,000명을 능가하는 전력의 출동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융족의 기병이었다. 좌선봉 패정이 괵석보의 전차를 바라보고 말을 달려 접근했다.
전차에 탑승하여 창을 휘두르는 자와 마상에서 칼을 쓰는 자와의 싸움은 후자의 승리로 끝났다고 《사기》는 전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차대와 기병의 우열을 말해주는 결과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유목민과 농경정착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결과에 더 가까웠다.
고대의 전쟁에서 봉건적인 농경사회였던 중국은 주변의 유목민들과의 싸움에서 결코 우세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중국의 봉건주의가 전쟁을 직업으로 하는 전문가의 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춘추시대까지도 중국에는 장군이라는 직업이 없었다.
군의 지휘관은 제후나 가신들 중에서 그때그때 임명되었는데 이들의 발탁은 군사적 지식이나 무인으로서의 재능하
고는 별 상관이 없었다.
공경, 대부들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전쟁을 맡아서 최고 지휘관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공경, 대부는 세습이어서 군사적 재능이 없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니까 고대 중국은 전쟁의 전문가가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세력이 큰 권문세가의 주인이 나서서 수행했다는 것
이다.
반면에 흉노나 융족과 같은 유목민들은 부족 내에서 가장 전투에 능하고 힘이 센 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
했다.
중국에 킹쉽(King Ship)이라 할만한 것이 나타나는 것은 요순의 시대로 거슬러올라가고, 성탕의 이윤과 주문왕의
태공망에 오면 이미 천자의 도에 대해 설명하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제네랄쉽(General Ship)이 등장하는 것은 손무의 탄생을 기다려야만 한다.
호경성의 싸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주나라의 괵석보는 무장이었기 때문에 지휘관이 되어 싸우러 나간 것이 아니었다.
권세를 휘둘렀던 죄로 전쟁터에 나가게 된 불운한 사나이였다. 반면에 그를 향해 말을 달려온 융족의 좌선봉장 패정은
사나운 융족 내에서도 제일 사납고 싸움 잘하는 무장이었다. 괵석보는 패정의 칼 앞에 다섯합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괵석보가 패정의 칼에 목이 달아난 후에 4개국 연합군의 호경성 공격이 시작되었다.
포사와 향락에만 도취해있던 군주를 위해 결사적으로 싸울 군사는 없었다.
연합군이 성벽에 사다리를 놓고 기어오르기 시작하자 이미 성벽 위의 주나라 군사들은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절감한 주유왕은 수레에 포사를 태우고 같이 성문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이때 정나라 제후가 홀로 약간의 병사를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한번 속았던 일이 생각났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 달려온 것이었다.
정후의 도움을 받아 여산을 거쳐 달아나던 주유왕은 정나라로 가는 길목에서 뒤쫓아온 융군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혔다.
정후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기병의 위력 중 한가지를 보게 된다.
바로 추격할 때의 속도였다. 아마도 같은 중국 제후들간의 전쟁이었다면 주유왕은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목민인 융족의 기병은 수레를 타고 달아나는 중국의 왕보다 훨씬 빨랐다.
주유왕은 북방 오랑캐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빌었으나 융주는 비웃으며 한칼에 목을 베어버렸다.
포사와 그의 소생인 태자 백복은 융주의 말에 태워져 호경으로 끌려갔다.
융족에게 점령당한 호경은 이미 짓밟힌 귀부인의 신세였다.
신후가 융족을 만류해 보려 하였으나 들은 척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융족에게 잡혀 죽은 정후의 세자 굴돌(掘突)이 부군의 복수를 하고자 군대를 끌고 달려왔지만 정나라 군대인 병차
3백승은 융족의 기병에게 포위되어 전멸하고 만다.
정나라 세자 굴돌은 위(衛)나라로 달아나 원군을 청했다.
위나라 군대가 호경 부근에 도착하자 진(秦)과 진(晋) 두 나라의 군대도 도착했다.
정, 위, 진, 진의 네 나라 군대가 호경성을 공격하자 성 안에서 신후가 성문을 열어 이들을 맞아들였다.
융주는 포사를 끼고 잠을 자다가 성을 넘어온 연합군이 들이닥치자 한 필의 말에 올라 바람처럼 도망쳤다.
융주가 달아난 뒤 궁 안을 뒤지던 연합군 제후들은 별채의 작은 방 기둥에 목을 매단 여인의 시체를 발견했다. 포사였다.
융족의 호경 침입과 주유왕의 피살은 고대 중국의 봉건사회를 밑바닥부터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일로 해서 봉건지배체제의 정점에 있던 주왕실의 권위와 통제력이 상실되었다.
권위의 원천은 힘과 전통이라는 두 가지에서 나오는 것인데, 전통이 없는 힘만의 권위는 반발과 저항을 부르고, 힘이
없이 전통에만 의존하는 권위는 경멸을 받게 되는 법이다.
주유왕 이후의 주나라는 후자의 경우에 속하게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종가인 주나라의 실력이 천하의 제후들에게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주나라는 3백년 전에 은나라를 칠 때 '주나라는 강하다'는 강렬한 인상을 천하 제후들에게 심어준 바 있었다.
이 힘이 제후들을 복속시켜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주나라의 왕사군은 신나라와 융족의 연합군 앞에 맥없이 무너졌고 수도인 호경이 순식간에 오랑캐 손에 떨어
졌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이었던 것은 이 전쟁은 주나라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악재를 한꺼번에 다 가진 것이었다.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도 주나라였다. 왕을 간한 신후를 정벌하겠다고 주유왕은 먼저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천자를 향해 군대를 일으킨 신후조차도 사후에 변명을 할 여지가 있었다.
거기에다가 주유왕은 천자로서 천하 제후들의 군대를 소집할 권한과 권위를 스스로 짓밟은 사람이었다.
천자의 소집령을 제후들이 묵살해버렸어도 그것을 탓할 도리가 없었다.
융족에게 붙들린 주유왕이 마지막에 보여준 모습도 비굴하고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오히려 정백 우의 당당한 죽음이 돋보였다.
주나라는 융족에게 전쟁에 패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최악이었다. 도
저히 천하제후들에게 천자로서의 면목을 살려낼 방도가 없었다.
전쟁 후의 사후 처리에서 목소리를 높인 것은 융족과 손을 잡고 주나라를 공격한 신후였다.
원래가 죽은 주유왕은 신후의 사위였다. 포사가 낳은 백복 때문에 폐태자되어 쫓겨나 있던 신후의 손자인 구의를 다
시 불러들여 주유왕의 뒤를 잇게 했다.
이가 곧 주무왕으로부터 13대째 주나라 왕이 되는 주평왕(周平王)이다.
그러나 주평왕은 왕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포사를 웃기기 위해서 올린 봉화에 속아서 여산에 모였던 제후들
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벌어진 전쟁의 경과를 모두가 보았다. 거기에다가 전쟁을 일으킨 신후가 나서서 자기 딸과
사위를 다시 복위시키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천하 열국은 등을 돌리고 돌아앉아 냉소했다. 주나라가 봉국한 200개 가까운 나라에서 주평왕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온 나라는 고작 열 개 안팎이었다.
말이 천자지 천자가 아니었다. 대궐은 불타고 창고 속의 주나라 재물은 달아나기 전에 융주가 모조리 수레에 싣고
자기 본국으로 털어가 버렸다. 돈도 없고 군대도 없는 빈털터리가 주평왕이었다. 달아난 융주는 주나라를 아예 업신
거리고 심심하면 쳐들어와서 주나라의 식읍을 뺏어갔다.
주평왕은 호경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결국 B.C. 770년에 부도였던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그때까지의 기간을 서주(西周) 시대라 하고 이후를 동주(東周) 시대라 하는데, 동주시대는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라는 말로 더 많이 불리워진다.
춘추(春秋)는 공자(孔子)가 쓴 노나라 역사책의 이름이다.
이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나라가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더 이상 천자의 왕실로서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당연한 결과로 천하는 왕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변했다.
군사사(軍事史)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때부터 전쟁이 비로소 전쟁다워지고 지휘술, 용병술, 군략, 병법 등으로 말
해지는 제네랄쉽(General Ship)이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이 집대성되어 고대 군사사상의 집약이요 정수라 말할 수 있는 《손자병법》이 된다.
병가(兵家)가 출현한 것이다.
손무는 역사상 최초의 전문직업군인이었다. 무(武)의 전문기술자였다.
이때부터 전쟁과 군사가 하나의 전문적인 기술과 학문, 철학의 분야로 편입되었다.
주나라의 동천(東遷)은 후세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씨앗들을 뿌렸는데 그 중 기억해야 할 것이 호경을 구하러 군
대를 보냈던 네 나라 중의 하나에 진(秦)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주나라의 호경은 위치가 천하의 중앙이 아니라 서쪽 변방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국경의 서쪽에 진(秦)이라는 약간
은 미개하고 세력도 미약한 부족을 두고 있었다.
이 진(秦)은 주나라 경계 밖에 있는 주변 종족이었는데, 그 족장인 영개가 주나라 왕성의 위급을 전해듣고 달려왔던
것이다. 물론 호경에 아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진(秦)이 이번 일로 해서 공로를 인정받아 정식 제후국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영개는 진양공(秦襄公)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어 제후국으로서의 진나라의 초대 군주가 되었다.
이 진(秦)이 훗날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주유왕 때에 이런 사건이 없었다면 진시황은 태어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 사건이 멋 훗날 천하 통일의 주인을 결정지었다고 나는 본다.
그 다음 특기할 만한 일은 융족이 호경을 에워쌌을 때 제일 먼저 구하러 달려왔던 정(鄭)나라이다.
정후는 주유왕을 호위하여 자기 나라를 바라보고 도망치다가 추격해 온 융군에 붙들려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굴돌도 본국에 남은 나머지 군대를 달달 긁어 달려왔지만 정나라만의 힘으로는 역부족하여 융족
에게 대패하고 굴돌은 위나라로 달아났다. 이기지는 못했지만 전란 초기에 정나라의 분전은 인상적이었다.
천하 제후가 움직이지 않을 때 주나라를 위해 홀로 분투한 것이 정나라였기 때문이다.
그 공은 적지 않아서 새로 왕으로 등극한 주평왕은 정나라에 삼공(三公)의 지위를 제수하였다.
주나라 왕실에서의 직급이 경(卿)에 이르면 그 나라 군주는 시호에 공(公)을 붙일 수 있게 된다.
그 아래 제후들은 계급에 따라 무슨 백, 무슨 후로만 불렸다.
중앙정부에서 경사(卿士)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다른 제후들과는 격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권위를 잃은 주왕실이었지만 왕실의 봉직은 그래도 가치가 아주 없지는 않아서 천하에서 행세를 하는데는 유용
한 것이엇다.
주유왕을 위해 죽은 정백(鄭伯) 우는 일약 정환공(鄭桓公)이 되었고 세자 굴돌은 정무공(鄭武公)이 되었다.
앞서 말한 진(秦)의 봉작은 훗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단초가 되었고, 정나라의 봉작은 전국시대를 여는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래 정나라는 그리 큰 나라가 아니었다. 다만 주왕실과 지리적으로 제일 가까운 나라였다. 그런데 이번 전란의 포상
으로 삼공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새로 정나라의 왕이 된 정무공은 자기의 직위와 나라의 크기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경사의 나라치고는 너무 작지 않느냐는 불만이 생긴 것이다. 지위가 만들어낸 탐욕이었다.
정무공은 주나라 왕실의 봉건 질서를 우습게 여기고 작고 힘없는 나라를 서슴없이 병합하기 시작한 최초의 군주가
된다. 즉,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전국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제친 사람이었다.
정무공 이후의 천하는 힘이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전쟁은 제후들의 주된 사업이 되었고, 이 사업에 재능이 없는
제후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당했다.
이 책의 주제인 전쟁과 군사가 역사의 본류가 되었다. 정무공의 생애가 당시 세계에 갖는 또 하나의 의의는 정무공은
전쟁에 처음으로 계략, 지략, 모략, 간계라고 이름할만한 병학의 기초적인 수단들을 선보인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상대를 속이는 것'이 전쟁이며, '모략이야말로 군주지도'라는 것을 실증해 보인 최초의 인물이었다.
주평왕이 동천(東遷)을 할 무렵에 지구의 반대편에는 또 하나의 찬란한 문명이 개화기를 맞고 있었다.
바로 그리스문명이다. 크레타와 미케케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해양문화인 에게문명은 이제 발칸 반도로 옮겨져 있
었다. 찬란했던 에게문명의 기억들은 호메로스와 같은 위대한 시인의 서사시로 기록되어 희랍을 유랑하는 음유시인
들의 노래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탁월한 저서 속에서, 우리의 사고(思考) 대상에서도 특히 인간 생활의 여러 현상을
바라보고, 드러내 보이는 방법에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일이며, 둘째로는 확인된 사실의 비교 연구에 의해 일반적인 '법칙'을 명
백히 하는 일, 셋째로는 창작의 형태로 사실을 예술적으로 재생하는 일이다"라고 토인비는 말했는데 전쟁과 군사에
관해 한정해서 고찰하면 서양은 토인비가 말한 첫 번째 방법을 택하였고, 동양은 주로 두 번째 방법에 치중하였다.
그래서 서양에는 전쟁사(戰爭史)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남았고, 동양에서는 전쟁의 법칙에 대한 연구서인 병법이
저술되었다.
그래서 동양에는 헤로도투스의 《역사》나 투기디데스의《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카에사르의 《갈리아 전기(戰記)》
와 같은 책이 없고, 서양에는 《손자(孫子)》나 《오자(吳子)》, 《육도(六韜)》나 《삼략(三略)》, 《울료자(蔚 子)》
와 같은 책이 없다.
은허에서 발굴된 대량의 갑골문은 그 내용이 모두 점을 친 내용의 기록이다.
점을 친 왕이나 복사의 이름과 점괘, 그리고 그것이 훗날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기록해놓은 것이다.
때문에 은나라의 문자는 하늘에 제사하고 신탁을 받는 무당들의 전용 기호라 해도 무방하다.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도, 읽을 사람도 왕을 비롯한 소수의 신관들뿐이었다.
그러니까 초기의 한자는 소수의 지배계층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보도록 약속한 기호였다.
반면에 같은 시기에 피라미드의 내벽이나 신전의 벽에 화려한 채색으로 그려진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점괘풀이집이
아니라 바로 역사서였다. 그들은 이런 그림문자를 통해서 주나라가 건국되기 2백년 전인 은나라 후기에 있었던 위
대한 정복자의 전쟁이 어떠한 것이었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원전 1천2백년 전에 있었던 이집트의 람세스2세와 히타이트 제국의 무와탈리스 왕이 벌인 카데시 전투는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한 사마천의《사기》와는 전혀 다른 필체와 묘사로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대부분의 '세계 전쟁사(戰爭史)'는 이 카데시 전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아니면 마라톤 전투에서 시작한다.
그 어느 책도 탁록의 전투나 목야의 싸움 또는 주유왕의 이야기로서 전쟁사를 시작하지는 않는다. 그
래서 이 책도 《손자병법》의 체험적 토대가 되는 고대의 전쟁사를 더듬어 본다는 차원에서는 람세스2세의 이야기
를 건너뛴다면 아쉬움이 클 것이다.
인간 사회의 일반 법칙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서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의 카데시에서 벌어졌던
사건도 《손자병법》이 말하는 전쟁의 법칙 속에서 같이 고찰되어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람세스1세 때 이집트는 이미 홍해와 지중해의 패자였고, 주변에 이집트에 저항하는 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람세스2세가 즉위하였을 때 아나톨리아 고원에 히타이트인들이 나라를 건설하면서 이집트에 맞서기 시작하
였다. 람세스2세는 재위 5년이 되는 해에 드디어 이 숙적을 해결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던 것 같다.
그는 기록에 의하면 전차 3,500대와 보명 4만명을 페르라메수에 집결시킨 후 호호탕탕 시나이 반도를 지나 지금의
시리아 땅인 카데시를 향해 진군해 갔다.
일부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이때 람세스 2세가 동원할 수 있었던 군대의 규모는 전차 50대와 보병 5,000명 정도였다
고도 한다. 그러나 이때가 기원전 1,200년이라는 까마득한 옛날임을 상기하자.
당시에 5,000명이라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왕조는 지구상에 거의 없었다.
히타이트의 왕 무와탈리스도 지금의 터키 동남부의 고원지대에서 출발하여 남하해 왔다.
카데시는 지금의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북동쪽 80km 정도의 지점에 있는 고대 도시였다.
람세스2세가 카데시 남쪽에서 오론테스 강을 건넌 것이 그의 재위 5년째 되는 해의 여름의 둘째 달이라고 기록에는
적혀있다.
람세스는 전군을 4개 사단으로 편성했는데, 진군 도중에 만난 베두인 족 두명으로부터 히타이트군이 겁을 먹고 멀리
도망쳤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명의 유목민은 무와탈리스가 일부러 보낸 첩자였다.
거짓 정보에 속은 줄도 모르는 람세스2세는 후위 사단들과 떨어져 서둘러 히타이트군을 쫓아 북상했다.
그가 카데스의 서북쪽에 도착했을 때는 두 번째 사단은 이제 오론테스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 건너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히타이트의 왕 무와탈리스가 전군이 바라보이는 고지 위에서 손을 높이 들었다.
히타이트의 보병대가 북소리에 일제히 발을 맞추어 남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히타이트군은 강의 건너편에서 남쪽으로 우회하여 람세스2세를 포위하려고 기동했던 것이다. 1
개 사단뿐인 람세스2세의 눈앞에서 약 4만명 가까운 대군이 먼지를 일으키며 움직이고 있었다.
카데시 남쪽에서 히타이트군이 도강을 시작했을 때, 이집트의 두 번째 사단인 프레 사단이 멋도 모르고 강변에 도착
했다. 히타이트 군의 공격을 받고 프레 사단은 무너졌다.
이것을 보고 있던 람세스2세가 친위 사단인 아몬 사단을 돌격시켰다. 람세스2세 자신이 검게 탄 어깨와 가슴에 땀을
번들거리며 마차의 고삐를 부여잡고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군데군데 갈대숲을 이룬 오론테스 강변은 금세 고함소리
와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히타이트 군의 일부가 강을 건너 람세스2세의 본대와 후속사단을 가르며 북상했다. 이것을 새로 도착한 이집트의
슈테켓 사단이 가로막고 나섰다. 그 뒤에는 다시 히타이트의 별동대가 달려들었다. 혼전이었다.
패색이 짙어진 이집트군을 구해준 것은 마지막으로 도착한 4번째 사단인 프란 사단이었다.
람세스2세의 장례사원인 라메세움(Ramesseum)의 부조와 새겨진 글들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잘
말하고 있다.
"나는 철저히 혼자였고,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대군은 내 곁을 떠났다. 전차부대 병사들 중 누구도 나를 쳐다
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그들에게 소리쳐 불렀을 때도... 전차부대여, 그대들은 자신이 얼마나 비겁했는지 돌아 보라."
아마도 카데시 전투에서 람세스2세는 겨우 패배를 모면했으며 젊은 이집트의 제왕은 혼쭐이 나서 그의 왕국으로 돌
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고국에 돌아온 람세스2세는 선전술로 그의 패배를 승리로 바꾸었다.
고전의 원인은 이집트군의 비겁함에 있었고, 승리는 람세스2세의 용기와 무용이 얻은 고귀한 것이었다.
만만치 않은 적수를 만났을 때 인간이 택하게 되는 현명한 방식의 선례가 이때 만들어진다.
전투가 끝난 후 두 왕은 동맹조약을 맺고 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조약은 훗날 람세스2세의 재위 26년째 되던 해에
무와탈리스의 아들인 하투실리스와 람세스2세 사이의 평화조약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정전 협정이며, 평화조약이다.
이 카데시 전투의 생생한 부조와 글들은 3천년전의 전투의 모습을 우리 눈앞에 펼쳐서 보여준다.
전차를 몰아 적진 속에 돌입한 젊은 왕이 자기 주위에 아군이 없는 것을 알고 다급하게 부하들을 소리쳐 부르는 장면
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래도 아무도 달려오지 않자 왕의 노기는 사정없이 적병을 향해 폭발한다.
말이 앞발을 들어 울고, 청동의 검이 춤을 춘다. 아마도 황제와 치우가 싸웠던 탁록의 들판에서도 이와 비슷했을 것
이다. 하의 걸과 은의 성탕이 싸운 명조의 벌판에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972년에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임기현(臨沂縣)에 있는 은작산(銀雀山)에서 한(漢)나라 초기의 무덤을 발굴하였는
데, 그 속에서 엄청난 양의 죽간이 나왔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손자병법》과 손무의 손자(孫子)로 알려진 손빈(孫 )이 썼다고 하는《손빈병법》이 같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 은작산본 《손자병법》을 이전에 전해진 《손자병법》의 전본들과 비교해본즉, 내용에 그렇게 큰 차이는 발견되
지 않아서 《손자병법》이라는 고전의 원전에 대한 시비부담은 경감되었다.
그러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기존의 13편 외에 처음 발견된 부분들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왜냐 하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병서의 내용들이 35편 정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내용들이 과연 《손자병법》
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냐를 놓고 학자들간에 이론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35편의 내용을 보면 기존의 《손자병법》13편의 누락된 부분이 아닌가 의심될 수 있는 내용은 『사변(四變)』편
과 지형이(地形二)의 두편이고, 사마천의 사기에 아주 간략하게 기술된 황제의 전쟁에 관한 기록인 『황제벌적제
(黃帝伐赤帝)』편이 있다.
이것은 '황제가 적제를 정벌한 이야기'이다. 그밖에 손무가 오나라 왕 합려와 병법에 관해 대화를 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 2편이 나왔는데 이것의 제목을 각각 「견오왕(見吳王)」과 「오문(吳問)」으로 하였다.
전자는 손무가 오왕을 배알한 자리에서 병법을 설명한 내용이며, 후자는 오왕이 이를 듣고 손무에게 질문한 내용이다.
내용 자체는 기존의 《손자병법》 13편과 연결되지 않으나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와 오왕의 대화라는 점에서
최소한 《손자병법》의 부록이나 별첨 자료로 부기될 가치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 외에 손무가 직접 저술한 내용은 아니지만 모든 내용이 '손자왈'로 시작하는 것이 10여 편이 있었다.
'공자왈'로 시작되는 것이 공자의 제자가 정리한 공자의 어록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10여 편의 내용은 손무로부터
병법을 들은 후학이 기록해서 남긴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손자병법》의 13편에 부가해도 무리는 없으리라고 보여진다.
나머지 20편 중에는 손빈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5편이 있고, 근거가 확실치 않은 15편이 있었다.
다소 안타까운 점은 이 은작산 죽간본은 보존상태가 좋지 못해서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군데군데 한두 글자씩 망실되었지만 앞뒤의 문맥으로 보아 유추할 수는 있기 때문에 내용의 대강을 읽어내기는 어
렵지 않다. 이 은작산 죽간본의 출토로 해서 우리는 《사기》에 간략하게 기술되고 끝났던 황제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알 수가 있게 되었다.
이 죽간의 『황제벌적제(黃帝伐赤帝)』편을 보면 손무는 오나라왕 합려에게 옛 황제의 고사를 빌어서 병법의 요체
를 설명하고 있다.
제목을 보면 황제가 적제를 정벌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고전의 편명은 대개 첫문장의 첫구절로 삼는 것이 통례여서
그렇지 실제로 이 편에서의 내용은 황제가 사방의 적을 정벌하여 사해를 평정한 이야기이다.
훗날에는 중국인들이 사방의 적을 말할 때, 동이(東夷),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이라 했다.
그러나 까마득한 전설의 시대인 황제 당대에는 사방의 적을 동쪽은 청제(靑帝), 북쪽은 흑제(黑帝), 서쪽은 백제(白帝),
남쪽은 적제(赤帝)라 했다.
물론 다 상징적인 인물들이어서 람세스2세가 싸운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와는 달리 픽션인 감이 짙다.
한번 보도록 하자.
군데군데 '○'으로 표기한 것은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이다.
손무가 오왕에게 말하기를, "황제가 남쪽으로 적제를 정벌할 때에 ○○까지 나아가서 반산(反山)의 들판에서 싸웠습
니다. 황제는 우음(右陰)하고 순술(順術)하여 배충(倍沖)함으로써 적제를 크게 멸하고 ○년을 휴민(休民)케 하였고,
아울러 ○穀하며 사죄(赦罪)하였습니다" 했다.
여기서 우음(右陰)이라는 말의 뜻은 '음(陰)한 방법을 주로 하여 싸웠다'는 뜻이다.
무기를 잡는 손이 오른 손이기 때문에 병가에 말하는 우(右)는 '주(主)'라는 의미로 읽으면 대개 들어맞는다.
좌(左)는 부(副)이다. 음(陰)은 당시의 음양 개념으로는 '부드러움, 차가움, 아래, 우묵함, 어두움, 조용함, 숨음, 움직
이지 않음' 등의 기운 내지는 성향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양(陽)은 '단단함, 뜨거움, 위, 불룩함, 드러남, 밝음, 시끄러움, 움직임' 등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황제는 굳세고 단단함이 아니라 무르고 부드러움이며, 뜨겁고 요란한 것이 아니라 차갑고 조용함이
었으며, 드러나고 밝은 것이 아니라 숨고 어두움이며, 내달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머물러있는 것에 의지하
여 전쟁을 했다는 소리다.
이것이 병법의 요체라고 손무는 오왕에게 말하고 있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결코 나불대고 까불고 설치고 경망스럽게 굴지 않는다는 소리다.
병법의 정수는 양(陽)적인 것에 있지 않고 음(陰)적인 것에 있다는 소리다.
지금까지는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해서 황제가 '권모술수에 의지해서 이겼다'는 식으로 해석을 해왔다.
그러나 '우음(右陰)'이라는 말의 진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음의 순술(順術)은 황제의 전술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사리에 맞고 상황에 적합하여 천지의 도에 순응하는
것이었다고 하는 소리다. 결코 역(逆)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순(順)이 즉 병법의 요체라는 말이다. 이것도 은작산 죽간이 발견된 후에 학자들이 번역하여 옮기기를 우음(右陰)
을 '권모술수'로, 순술(順術)은 거꾸로 '정공법'으로 풀이했다.
그러니까 황제라는 사람은 권모술수를 즐겨 쓰고, 정공법으로 공격도 해서 이겼다고 하는 소리다.
어딘가 앞뒤가 안 맞고 썰렁한 소리다. 고전의 한문을 이런 식으로 읽어온 것이 동양학이었다.
다음의 배충(倍沖)을 보자. 이 말은 '비우기를 거듭하였다'는 소리다. 배(倍)는 배가(倍加)한다, 더한다는 소리이고
충(沖)은 빌 충이다. 그래서 이 말은 마음을 비우고, 탐욕을 비우고, 성급함을 비우고, 분노를 비우는 것에 노력하였
다고 읽으면 손무의 말뜻에 근접하는 풀이가 된다.
황제가 사방의 적을 정벌하고 사해(四海)를 안정시킬 때에 무엇에 의지하여 성취했는가를 아주 교훈적으로 들려주
고 있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 배충(倍沖)을 '반격을 물리쳤다'는 식으로 억지해석을 해왔다.
도대체 옛 한자를 읽고 제대로 뜻을 알아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에 중요한 구절이 뒤따라 나온다. 바로 '대멸유지(大滅有之)'라는 말이다.
이 구절에서 유(有)는 앞에 나온 충(沖)과 대응한다. 즉 황제는 비우는 것(沖)으로 그것을 가진 자(有)를 크게 멸했다
는 소리다. 그러고 나서 무엇을 했느냐? 글자가 망실되어 기간이 확실치는 않지만 몇 년이라는 기간 동안 백성들을
쉬게 했다고 한다.
휴민(休民)이라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시책이 포함된다.
이 기간 동안에는 군역과 부역이 면제되고 세금이 탕감된다. 이런 위무정책은 전국시대에 들어서서 대부분의 정복자
들이 빼앗은 새로운 영토에서 시행한 것이다.
전국시대의 일본에서도 영주들이 전쟁을 통해 새로운 영지를 확보하면 그전 영주보다 세금을 낮추어주어서 영민들
의 환심을 사는 정책을 흔히 썼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기원전 2천년 년 인물이 황제에게서 이미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다음 구절인 ○곡(○穀)은 글자 하나를 알아볼 수 없지만 내용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양곡을 풀어 기민(饑民)을 구제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사죄(赦罪)는 감옥의 죄인들은 석방하고 죄를 사해준다는 사면의 시행이다.
황제벌적제(黃帝伐赤帝)』의 뒷부분은 똑같은 구절의 동형반복이 4번 계속된다. 즉 동쪽의 청제, 서쪽의 백제,
북쪽의 흑제로서 황제의 상대만 달라질 뿐 내용은 똑 같다. 그래서 원문도 적제에 대한 것 한가지만 소개한다.
孫子曰, 黃帝南伐赤帝, 至于○○, 戰於反山之原, 右陰, 順術, 培沖, 大滅有之, ○年休民, ○穀, 赦罪.
손자왈, 황제남벌적제, 지우○○, 전어반산지원, 우음, 순술, 배충, 대멸유지, ○년휴민, ○곡, 사죄.
비슷한 시기의 기록이지만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남긴 람세스2세의 전기(戰記)는 전투의 경과에 대한 사실적인 기술
이다. 즉 몇 명의 군대를 어떻게 편성했으며, 언제 어디에서 모여서 어디를 경유해서 진군했으며, 어디에서 진을 쳤
고, 어떻게 기동해서 우회나 포위를 시도했으며. 어떻게 싸움이 진행되어 누가 이겼는지 하는 구체적인 서술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손무가 들려주는 황제의 적제 정벌기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황제가 사방의 적을 정벌하여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던 이치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