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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무속인들의 모임(신내림굿 신병 빙의 치료 천도 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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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꽃사진★ 스크랩 중국 귀주성 10.7
마산덕구1 추천 0 조회 574 17.10.02 14: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국 귀주 소수민족 여행   2010. 7. 22 - 7. 31


7. 22(목) 인천 -중경

인천 공항에서 밤 8시 30분 출발하여 약 3시간 30분을 비행하여 중경 강북 공항에 도착하였다. 밤늦은 시각에 다시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시내에 위치한 호텔에 여장을 푼다.  


7. 23(금)  중경 -귀양(청암고진, 귀양박물관, 갑수루)

8시 호텔을 출발하여 10시 35분 발 국내선을 1시간 정도 비행하여 귀양(貴陽)에 도착하였다. 예로부터 산의 남쪽과 물의 북쪽은 양(陽), 산의 북쪽과 물의 남쪽은 음(陰)이라 불렸는데 귀산(貴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이름 지어진 귀양은 윈구이고원(雲貴高原) 동반부에 속하는 귀주성의 중심 도시이다. 석회암의 영향으로 검은 색을 띠기에 옛날부터 첸성(黔省검성)이라 불리는 귀주성은  하늘은 3일 이상 맑은 적이 없고(天無三日請), 땅은 3리 이상 평평한 곳이 없으며(地無三里平), 사람은 3푼의 돈도 없다(人無三分銀)는 척박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열대에 속하면서도 고원지대에 위치하기에 제 2의 춘성이라 불리는 귀양을 중심으로 서쪽의 아름다운 카르스트 지형과 동쪽의 소수 민족의 문화를 느끼기 위해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활기를 찾고 있다고 한다.

곧장 시내를 벗어나 구름을 안고 선 봉우리들을 감상하면서 시내에서 29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청암고진(靑岩古鎭)을 찾으니 12시 30분이었다. 방어를 위한 군대 주둔 규모에 따라 진(鎭), 보(堡), 둔(屯) 등이 있는데 운남(雲南)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군사적 방어지와  상업지구의 역할을 해왔다는 청암고진은 푸른 돌을 사용했기에 청암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성곽이나 도로의 돌에서는 그 색깔을 느낄 수는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강한 햇빛을 피해 북쪽에 위치한 북성문(北城門)에 들어서니  명, 청 시대의 건축물 사이로 화려한 옷을 입은 관광객들이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조이형(趙以炯) 생가였다. 조이형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홍정장원(紅頂狀元)이 된 사람이다. 장원은 흰색 구슬이 달린 모자를 쓰지만 조이형이 장원 급제한 때는 황후 책봉이 있었던 해여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붉은 구슬을 달았던 것이다. 생가 마당 계단 옆에는 우물이 2개가 있는데 형이 판 우물의 수면이 약간 높다고 한다. 도로변 가게에는 돼지 족발과 진흙으로 둘러싸인 거지 닭을 많이 팔고 있었다. 조이형이 어릴 적 돼지 족발을 즐겨 먹었기에 두뇌가 좋아져서 장원급제 할 수 있었다는 소문으로 인해서 이곳에서는 옛날부터 돼지 족발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다시 남쪽 끝에 위치한 정광문(定廣門)으로 들어서자 충효나 정절, 장수 등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하얀 색의 돌로 만든 패방이 눈에 띠었다. 

 (청암고진 시내의 모습)

이곳에는 예로부터 '구사팔묘오각일궁(九寺八廟五閣一宮)'과 '팔좌패방(八座牌坊)'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3개의 패방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자유 시간을 이용하여 정광문 성채에 올라서니 망루와 포대가 보였는데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서양 세력이 들어오면서 받아들여진 천주교, 기독교와 더불어 옛날부터 자리 잡은 불교와 도교가 조화를 이루는 사교합일(四敎合一)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성채를 내려와 먼저 교회를 찾았다. 교회 안에는 음악을 틀어놓고 춤 연습하는 신자가 있었는데 교회의 엄숙함은 느낄 수 없었다.  길모퉁이를 돌아 영상사(迎祥寺)를 찾아가니 입구에는 할머니들이 점괘를 보면서도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에게도 미소를 보내주는 여유를 보여준다. 조그마한 절을 단숨에 구경하고 돌담과 돌바닥 길을 따라 찾은 곳은 만수궁(萬壽宮)이었다. 마당에는 팔괘 형상이 새겨져 있었고 오도루(悟道樓) 누각에 나무로 만들어진 삼국지 주인공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문화혁명 때에 진흙으로 덮고 그 위에 모택동 만수무강이라 새김으로써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오도루의 나무 조각상을 뒤로하고 본당 옆으로 들어서니 도교에 대한 홍보에 열중하는 사람과 팔뚝만한 향을 피우면서 소원 성취 바라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만수궁을 나와 서쪽 성벽으로 가는 길목에 접어드니 마작과 카드 놀이하면서 소일하는 주민들과 꼬마들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약 1시간을 통해 6백년 역사를 다 느낄 수는 없었지만 무더운 날씨 때문에 발길을 돌릴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 3시 청암고진을 출발하여 1시간 정도 달려 귀양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박물관 2층에는 귀주성에 많이 살고 있는 소수 민족인 묘족, 동족, 부이족, 요족의 생활양식을 사진과 모형으로 전시하고 있었고 1층에는 각종 수공예품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1시간 정도 구경을 하고 시내 중심을 흐르는 남명하(南明河)의 중간에 자리 잡은 귀양의 상징인 갑수루(甲秀樓)에 도착하니 5시 20분이었다. 

(갑수루 전경)

 1597년에 과거 시험에 갑수(장원)의 인재들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건설된 갑수루는 20m 높이의 3층 누각으로 주변의 현대식 고층 건물들 사이에서도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3층 누각에 올라 바라본 뒤편의 용문서원은 지금은 찻집으로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멀리 무지개가 귀양에서의 첫날 여행을 환영해주고 있었다.  

(갑수루 누각에서 바라본 귀양 시내의 건축물들 모습)

6시가 되자 빗방울이 들기 시작하였다. 긴 머리카락을 말아 감아올린 머리에 화려한 장식을 한 동족(?族) 아가씨들이 맞아주는 식당에서 신맛을 특징으로 하는 수안탕위(酸湯魚)를 맛보면서 귀주의 명주(名酒) 모태(茅台)주는 아니지만 소주 한 잔 하면서 피로를 풀어본다.

여행 첫날인데 호텔 방에 있는 시간이 아까워 부근에 위치한 인민광장을 둘러보고 약 20분 정도 걸어 갑수루를 다시 찾았다. 아름다운 조명으로 장식하길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갑수루 주변은 조명을 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아름답고 화려한 야경을 생각하면서 갑수루를 찾았는데 기분이 묘했다. 넓은 광장에서 울러 퍼지는 음악 소리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호텔로 돌아와 하루를 접는다. 


7. 24(토)  안순 황과수 폭포 - 흥의

8시 호텔을 나와 1시간 반 정도 달려 안순(安順)을 통과하여 10시경 황과수(黃菓樹) 풍경구에 도착하였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키가 작은 현지 가이드가 틈새를 이용해 표를 구입하는데 1시간이나 걸렸다.

먼저 버스를 갈아타고 7㎞ 정도 떨어져 있는 황과수 풍경구내에 있는 천성교(天星橋) 풍경구를 찾았다.  천성교 풍경구는 천성분경구(天星盆景區), 천성동(天星洞), 수상석림(水上石林) 등 세 구역으로 되어 있었다. 계곡을 조금 내려가니 먼저 수생보(數生步)가 보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수면위에 드러난 징검다리를 일렬로 건너면서 주변 경관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돌 징검다리 하나하나에 1년 365일 날짜를 새겨 두었기에 자기 생일 날짜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또한 특정 날짜에는 유명인사의 이름도 새겨 기념하는 것 같았다. 우기였기에 계곡물은 맑지는 않았지만 주변 석회암 바위에 자라는 선인장의 모습이 특이하였으며 계곡 구석에는 포의족(布依族) 꼬마와 할머니들이 화려한 꽃과 과일을 팔고 있었다.  

(수생보의 전경)

직접 옷을 만들어 입는다 해서 이름 붙여진 포의족은 납염(臘染 :녹인 황랍을 천의 무늬에 붓고 염색 후 제거하여 그 부분만 백색으로 남김)으로 유명하며, 혼인을 하여도 신부가 바로 신랑 집에서 살지 않고 신랑 집에 일이 있을 때 가서 잠을 자고 아이가 생기면 그때서야 신랑 집으로 간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결혼 당일 날 친정으로 갔다가 곧장 저녁에 시집으로 와버린다고 한다.  바람, 물, 세월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경관들을 감상하면서 걷다보니 지하에서 물이 솟아나는 용천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약 1시간을 더위와 싸우다보니 아름다운 여인이 거꾸로 매달린 채 머리를 감는 형상을 한 나무인 ‘미녀용(美女榕 Beuty Banyan))’에 도착하였다.

 

(중앙에 하얀 부분 중 위는 두 다리, 아래로 양팔을 벌리고 머리 감는 모습의 미녀용)

 갖가지 형상을 하고 있는 인생백태(人生百態)를 지나 천성호(天星湖)에 도착하니 12시 30분이었다. 천성호 가운데에 있는 바위모양이 마치 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천성호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천성호 모습)

 계속해서 수상석림으로 구경을 해야 하는데 비가 많이 왔기에 수상석림 가는 길이 물에 잠겨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황과수 폭포로 향했다. 매표소 부근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황과수 분재원에 들어서니 사람 키 정도의 다양한 분재들이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니 물보라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비가 솟아지기 시작했다. 폭포 주변에 황갈용(黃葛榕 벵골보리수 : 갈(葛)을 과(果)로 발음 )이 많아 이름 지어진 황과수 폭포는 높이가 74m, 폭이 81m로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황과수 폭포는 수렴동(水簾洞 물로 된 커튼)이란 동굴을 가지고 있어 뒤쪽에서도 볼 수 있기에 6방향에서 볼 수 있는 A가 5개나 붙은 유명 관광지이다. 예년에 비해 비가 너무 많아 폭포 뒤에 있는 동굴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계곡 밑에서 바라본 폭포수의 위용에 다소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황과수 폭포의 위용)

말발굽 모양의 U자 계곡 가운데에 쏟아지는 폭포수는 억수같이 뿌리는 빗방울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반대쪽 계곡에서 오는 사람들이 수렴동굴을 통해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능선을 따라 폭포 물이 떨어지고 있는 지점까지 다가가보니 수량이 엄청나게 많았으며 소리 또한 엄청나 옆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자연 동굴을 사람들이 쉽게 다닐 수 있도록 만든 수렴동은 6개의 동굴 창구가 있다는데 동굴 창구에서 바라본 폭포수는 마치 새로운 세상에 온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수량이 너무 많아 바깥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폭포 뒤에서 보낸 약 10분의 시간은 이미 이번 여행의 충족감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폭포 뒤 동굴에서 바라본 모습)

수렴동을 빠져나와 반대 능선에 들어서니 비가 그치고 푸른 녹음 사이로 흰 물보라가 장관을 이루었다. 계곡을 따라 내려와 구름다리를 건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출발지점인 분재원에 도착하였다. 일행들을 기다리면서 분재원을 구경하다 오후 5시 폭포를 출발하여 흥의(興義)로 향했다. 구름 낀 산봉우리와 능선의 옥수수 밭과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해바라기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달리다 6시 경 북반강(北盤江) 대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흥의에 도착하니 9시 30분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발마사지를 받고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7. 25(일)  흥의 (만봉림. 마령하 대협곡) -북반강 대협곡 - 안순

8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20분 정도 달려 마령하 대협곡(馬靈河大峽谷)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는 오후에 구경할 만봉림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할까 걱정이 되었다. 지각 변동에 의해 형성된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흉터’로 불리는 이 협곡은 길이가 75km, 너비 50∼150m, 높이가 120∼200m로 깎아지른 절벽에 많은 폭포가 있는데 약 2km를 걸어서 구경할 수 있도록 길이 나있다. 계단을 내려 계곡에 이르니 많은 폭포들이 물을 내뱉고 있었다. 계곡을 연결하는 중턱의 구름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협곡의 경관은 환성을 지어내기에 충분하였다.  

(사자청에서 바라본 마령하 협곡의 폭포와 구름다리)

석회암 절벽에 붙어있는 버섯 모양의 커텐석 위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황토 물과 합쳐져 급하게 계곡 아래로 달려가고 있었다. 특히 사자청(獅子廳)이라 불리는 넓은 광장에서 바라본 경관이 멋있었다. 1시간 쯤 계곡 아래로 내려오니 황룡폭포(黃龍瀑布)가 나타났다. 어제 본 황과수 폭포 때문에 웬만한 폭포는 마음에 차지 않을 줄 알았는데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황룡 폭포 또한 멋진 경관을 만들고 있었다. 폭포 뒤에서 위로 쳐다본 폭포 물방울의 다양한 크기를  카메라에 담는 재미도 솔솔 하였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치는 10시 15분 엘리베이터를 타고 계곡을 올라와 만봉림풍경구(萬峰林風景區)로 출발하였다. 10시 40분 이른 시각인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구름이 조금 있을 뿐 카메라에 봉우리들을 담기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개의 봉우리가 숲을 이루고 있어 이름 붙여진 만봉림은 과거 바다로 있으면서 퇴적되었다가 융기한 후 차별침식으로 마치 팽이를 엎어 놓은 형태의 수많은 봉우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전동차를 타고 산 중턱을 잠시 달려가니 장군봉이 눈에 들어온다. 계곡에 자리 잡은 소수민족인 포의족 마을의 회색 지붕과 벼가 한창 자라는 녹색의 경지, 회색 바위를 덮고 있는 녹색의 나무들, 그 사이를 흘러내리는 작은 하천,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이 모두가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고개 들어 멀리 능선을 바라보니 여인이 누워있는 형상을 한 봉우리가 보였다. 물건을 강매하는 다른 지역과 달리 동네 꼬마들은 수예품들을 내놓고 한마디 말없이 우리 일행들을 쳐다보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화려한 유채꽃을 자랑하는 봄과 달리 우기에 해당되는 여름의 만봉림은 중후함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가운데 깔대기 모양의 팔괘전)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중국 도가의 음양도를 땅에 새겨놓은 팔괘(八卦)모양의 논이다. 옥수수 밭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로마 원형 극장과 같은 형태를 한 팔괘답은 우기인 지금은 논으로 이용되지만 봄에는 유채밭으로 이용되는 곳으로 전형적인 돌리네 지형이다. 직접 가까이 가서 볼 수 없었지만 여덟 단계 정도 내려가면 가운데 물이 빠지는 구멍(포노르Ponor)이 보였다. 이것 말고도 여러 개의 돌리네가 보였다. 그래서 안내판에는 지안(地眼)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땅의 눈에 해당된다는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중앙 오른편에 하트 모양의 돌리네는 지상의 눈과 같다하여 지안)

오지경천(五指驚天)의 팻말은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능선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가옥들의 옥상에는 방수시설을 하고 건기에 물을 확보하기 위해 물을 저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들의 무덤은 화려한 돌 장식을 한 모습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을을 끼고 흐르는 하천을 따라 전동차를 타고 매표소까지 나오니  12시가 다되었다. 만봉림을 출발하여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안순을 향해 1시 40분 출발하였다. 어제 올 때에는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흥의 시내 모습과 마령하 대협곡을 연결하는 다리의 모습을 보면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북반강 대교(北盤江 大橋)에 도착하니 4시가 되었다. 제갈량과 맹획의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의 배경이었다는 북반강 협곡을 현수교 다리 중앙에서 바라본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북반강 협곡 전경)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순박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서 옥수수 밭 사이로 솟아올라 있는 수많은 봉우리를 바라보면서 달려 오후 5시 40분 안순에 도착하였다. 시내에서 쇼핑센터를 들렸는데 그 곳에는 묘족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수예품이 벽에 걸려 있었다. 노란 유채 밭에 춤추는 나비를 배경으로 묘족 아가씨 5명이 빨간 우산을 들고 화려한 의상과 은으로 만든 장식품, 소뿔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는 수예품인 것이다. 묘족은 치우(蚩尤)의 후예로 탁록 전투에서 황제에게 패해 치우가 사망하자 황하, 장강을 거쳐 이곳 귀주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곳의 토착민이던 동(?)족과의 싸움에서도 패해 산봉우리 위로 도망쳐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묘족 여인들은 치우 이래로 쫓겨 다녀야 해서 집에 재산을 모아둘 수 없기에 은으로 장신구로 만들었다고 한다. 장신구에 나타나는 두 개의 물줄기는 황하와 장강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중원의 황제에게 패했던 치우의 영혼이 붉은 단풍나무로 변하자 거기에서 메이방 메이류(妹榜妹留 :호접마마’즉‘나비엄마’)라는 여신이 탄생하고 그녀는 ‘작은 물거품’과 혼인하여 열두 개의 알을 낳는데  장양(姜央)도 그 알 속에서 나온다. 장양(姜央)은 하얀 알에서 나온 우레신 뇌공(雷公)과 싸워 이겨 포로로 잡아둔다. 뇌공은 장양의 아이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홍수를 일으켜 복수를 하게되는데 장양의 오누이만 살아남게 되어 그들이 혼인하여 묘족이 생겨났다고 한다. 쇼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지명과는 달리 남쪽으로 가는 길목이기에 치안이 불안하여 안 순하다는 안순의 호텔 앞 광장 노점상에서 꼬치와 맥주 한 잔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7. 26(월)  안순 - 천룡 둔보 - 홍풍호 - 귀양

8시 30분 호텔을 출발하여 안순에서 약 27km 떨어진 곳에 있는 "검남 제일산" 이라 불리는 천대산((天台山) 오룡사(伍龍寺)에  도착하니 9시 반이었다. 450여개의 돌 계단을 올라서자 돌로 만든 대표적인 사찰 오룡사가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 앞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팔뚝만한 향불을 들고 소원을 빌고 있었다. 조그마한 전시실에는 오삼계(吳三桂)가 황제를 알현할 때 입었다는 옷과 홀, 칼이 전시되어 있었다. 현지 가이드로부터 오삼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는 청의 침입을 잘 막고 있었으나 황제가 죽은 뒤 농민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점령하는 상황에서 이자성이 오삼계의 가족들을 붙잡고 이자성 휘하의 장수 유종민이 오삼계가 북경에 남겨두었던 천하의 미인 애첩 진원원(陳圓圓)을 취하자 청과 손잡고 이자성을 토벌하여 명나라를 멸망하게 한다. 이러한 공로로 오삼계는 운남 ?귀주의 총관으로서 광둥(廣東)의 상가희(尙可喜), 푸저우(福州)의 경중명(耿仲明)과 함께 삼번(三藩)이라 하여 대단한 권세를 누리다 나중에는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1678년 5월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나 5개월 만에 사망한다. 경국지색 진원원을 생각하면서 하늘로 솟아오른 지붕의 모습과 기둥을 받치고 서있는 돌로 만든 기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산 아래로 펼쳐진 많은 봉우리들의 모습에서 지무삼리평(地無三里平)이란 말을 실감케 해주었다.  

 (오룡사 전경)

10시 반 오룡사를 뒤로하고 찾은 곳은 바로 부근에 있는 천룡 둔보(天龍屯堡)였다. 이곳은 14세기 명나라의 주원장이 소수민족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귀주성에 파견하였을 때, 몇 년 동안 이곳에 머물던 군사들이 임부가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정착을 한 마을이다. 

 

 

라우(老)한족 혹은 둔보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푸른색 계통의 옷을 주로 입고 여자들은 사악한 기운을 제거하기 위해 앞머리를 뽑고 백년해로를 의미하는 머리띠를 하는데 흰색이며 시집을 갔다는 징표이며 검은 색 머리띠를 했다면 그녀는 가장 연장자라고 보면 된다고 한다. 화려한 신발 코는 무기를 숨기기 위해 크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개울을 따라 집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고 길가에는 잡다한 물건들을 팔고 있는 할머니와 잡담을 하면서 여유를 즐기는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역참에는 차를 무료로 대접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인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천룡 둔보의 수를 놓는 할머니 모습)

둔보인 가이드 아가씨를 따라 잠시 걸어가니 광장이 나오고 치라정(治懶井)이라 적힌 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우물은 여자들이 일찍 오지 않으면 뚜껑을 덮어 물을 길지 못하게 하여 게으름 피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돌로 만든 집들을 구경하면서 조금 가니 옛날에 학교로 사용되었던 박물관이 있었다. 시원한 그늘 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찾은 곳은 삼교사(三敎寺)이다. 불교, 유교, 도교를 한 공간에 같이 모신 곳이다. 넓지는 않았지만 아기자기한 공간 배치를 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들이 소원 성취하는 향불을 구입하라고 하여 10위엔을 주고 향을 구입한 후 재미있는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소원을 빌어본다. 

 (삼교사에서 소원 성취 바라는 할머니)

 절을 나오자 일행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없었다. 조금 걸어가니 요란한 소리가 들려 달려 가보니 지희(地戱)라는 전쟁을 주제로 한 가면극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공연되는 삼국지 영웅들의 가면은 관객들을 위해 이마 위로 쓴다고 한다.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자리에 앉자마자 공연은 끝이 났다. 조금은 허탈하였다. 발길을 돌려 마을을 빠져 나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12시 40분 천룡 둔보를 출발하여 오후 1시 30분 청진(淸鎭)시와 평패(平貝)현의 접경지에 있는 홍풍호(紅楓湖)에 도착하였다. 홍풍호는 인공호수로 주변에 묘족, 포의족, 동족 등 소수민족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약 20분 정도 유람선을 타고 먼저 동족 마을에 도착하였다. 아마 소수 민족 마을이 분포하고 있는 검동남(黔東南) 지역을 여행하지 못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고루 (鼓樓)와 풍우교(風雨橋)는 지나치게 화려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홍풍호의 풍우교)

  광장에는 칼을 꼽아 놓은 큰 기둥을 볼 수 있었는데 ‘상다오산’(上刀山)이라 하여 젊은이들이 남자로서의 자격을 얻기 위해 칼날을 밟고 기둥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이라고 한다. 화교(花橋)라고도 불리는 풍우교를 지나 고루에 도착하니 큰 북이 매달려 있었다. 고루는 마을 사람들의 집회가 열리는 곳이며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큰 북이 설치되어 있다. 5위엔을 주고 북을 아홉 번 치면서 소원을 말하며 이루어진다고 하여  북을 치고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올라 고루 꼭대기에 올랐다. 꼭대기에는 동족 청년들이 비파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고루 오르는 계단)

 고루를 나와 다시 유람선을 타고 맞은편에 있는 묘족 마을을 찾았다. 어차피 묘족 마을이 여행 일정에 잡혀 있었기에 무더운 날씨에 인위적으로 만든 묘족 마을은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유람선을 타고 나와  3시 40분 홍풍호를 출발하여 4시 30분 귀양 시내의 카르스트 호텔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 후 6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야시장을 찾았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각종 구이를 먹으면서 큰 소리로 잡담을 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특히 실처럼 가늘게 채쓸으 놓은 약 30여종의 각종 야채를 싸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창왕미엔(?旺面)과 더불어 귀주의 대표적 음식인 쓰와와(?娃娃)라고 한다.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정리한다.


7. 27(화)  귀양 - 개리 (박물관) - 서강(천호묘채)

8시 30분 호텔을 나와 12시 경 개리(凱里)에 도착하였다. 귀주성 검동남(黔東南) 자치주의 주도인 개리시는 대체로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깨끗한 시가지를 갖추고 있었다. 운동장의 모습도 풍우교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며 소수 민족들의 체육대회를 알리는 게시판의 모습도 특이하였다. 검동남 자치주에 있는 서강(西江)의 천호묘채(千戶苗寨)와 대당향(大塘鄕)의 단군묘촌(短裙苗村), 용강(榕江), 그리고 종강(從江)의 파사묘채(芭沙苗寨), 조흥(肇興)의 동족마을 등을 여행한다는 기대감을 갖고 점심을 먹고 나서 먼저 검동남민족박물관(黔東南民族博物館)을 찾았다. 박물관 이층에는 이 지역에 많이 살고 있는 동족, 포의족, 묘족 등의 유물과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약간 무서운 표정이지만 머리에 양쪽으로 길게 뻗은 뿔을 가진 준엄한 모습을 한 나무로 만든 치우의 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또한 묘족들이 딸에게 짝을 맺어주기 위한 축제인 자매반(姉妹飯) 축제 때 사용했던 자매밥이 전시되어 있었다. 묘족 여자들이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찹쌀에 야생의 꽃을 넣어서 만든 자매밥을 대접하는데 그 속에서 실이 나오면 마음에 든다는 표시이고 가시가 나오면 싫다는 표시라고 한다. 그 밖에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직접 소수민족 마을을 방문하기에 자세히 구경을 하지 않고 2시 경 박물관을 빠져나와 3시에 서강 호텔에 도착하였다. 너무 더운 날씨라 약 30분 휴식을 취하고 서강 천호묘채를 구경하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뇌산(雷山)현에 자리 잡은 서강은 뒤로는 뇌공산(雷公山), 앞으로는 백수하 (白水河)가 흐르는 험한 산골이지만 풍부한 물과 적당한 기온으로 농사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곳으로 천 가구가 사는 묘족 최대의 마을이라 '천호묘채'(千戶苗寨)라 불리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마을의 지도자가 나와 소뿔 형태의 잔에 술을 따르고 여자들은 술잔을 관광객들에게 돌린다. 마을 출입문인 채문(寨門)을 넘을 때는 진채주(進寨酒)라 불리는 술을 마시는데 이때는 손을 뿔잔에 대면 계속 마셔야만 하기에 손을 뒤로 하고 약간 마셔본다. 그렇게 독하지는 않았지만 더운 날씨 때문인지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도로 중앙에는 2열로 은으로 만든 모자와 장식품을 가득 단 여자들의 행렬이 보이고 좌측에는 노생(蘆笙)을 부는 할아버지들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손님을 맞이하는 묘족들)

 젊은 사람들 뒤로는 수십 명의 할머니들이 나와 있었다. 대체로 키가 매우 작았지만 머리에는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었고 햇빛에 그슬린 까만 피부는 그들의 나이를 더 많이 보게 만들었다. 묘족은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기에 니코틴산 결핍증후군(펠라그라: pelle 피부, agra 거칠다)에 잘 걸려 평균 수명이 짧다고 들었지만 대부분 그들의 나이가 일흔 전후였다.  

 

하천을 따라 서있는 상가를 구경하면서 잠시 걸어가니 묘족마을마다 다 있다는 동고평(銅鼓坪) 혹은 노생장(蘆笙場)이라 불리는 넓은 광장이 나왔다. 이 광장에서 5시부터 묘족의 민속 공연이 있다고 한다.

1시간의 여유가 있어 광장 뒤쪽 언덕 위에 있는 집들을 구경하기 위해 경사진 계단 길을 올랐다. 계단 길에는 나귀의 똥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고 나귀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마침 꼬마와 아주머니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어 무거운 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으나 끝까지 거절하는 순박한 아주머니를 따라 무덤이 바로 곁에 있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였다. 생전 처음 보는 손님에게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했으나 공연 시간 때문에 거절하자 조그마한 배를 주면서 웃음을 띠운다. 천진난만한 꼬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집안을 구경하였다. 

 (순박한 아주머니와 천진난만한 꼬마의 모습)

 경사를 이용하여 나무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지어진 조각루(弔脚樓)양식인 3층의 목조 건물은 1층은 가축을 사육하고 2층에는 사람이 거주하며 3층은 창고로 이용되고 있었다. 집을 나와 동고평 광장에 오니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약 30분을 기다려 비가 그치자 이번에는 정전이 되어 공연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강 건너 맞은 편 언덕에 있는 관경대(觀景臺)에 올라가 마을 전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넘어가는 햇살에 비치는 천호묘채는 한 장의 그림엽서였다.  

 

산정을 내려와 호텔로 돌아와 식당을 찾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도 묘족 처녀 총각들이 찾아와 노생을 불면서 소뿔 잔에 술을 따라 주었는데 안주를 주는 척 하면서 계속 술을 입에 부었다. 식사가 입맛에 맞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은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준비해온 반찬과 더불어 즐겁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전동차를 타고 야경을 구경하기 위해 관경대에 다시 올랐다. 관광객을 위해 정부에서 일정시간 마을 전체를 야간 조명으로 비춰주고 있었다. 야경을 카메라에 담고 낮에 보지 못한 공연을 야간에 연습을 한다기에 구경하기 위해 전동차를 타고 광장으로 내려왔다. 젊은 남녀들이 평상복을 입고 연습을 하고 있었지만 실감은 나지 않았기에 실망을 하고 부근에 있는 카페에서 맥주 한 잔 하면서 하루를 정리한다.


7. 28(수)  서강 - 대당신교 단군묘족마을 - 용강

8시 호텔을 나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험한 산지를 구비 돌아 9시 40분 대당향(大塘鄕) 신교촌(新橋村)에 위치한 단군묘촌(短裙苗村)에 도착하였다. 옛날에 며느리가 제사 음식을 나르다 치마에 걸려 넘어져 음식을 모두 쏟았기에 앞치마를 자르게 되었다는 묘족 마을에 들어서자 입구에서 노인들은 노생을 불고 여자들은 은으로 만든 화려한 모자와 짧은 치마, 무릎까지 오는 스타킹을 신고 손에는 술잔을 들고 일행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묘족 마을에 들어서면 동네 입구에서 여성들이 환영의 뜻으로 주는 길막이 술인 란로주(?路酒)를 마셔야 하고 또한 마을 출입문인 채문을 넘어서면 또한 진채주를 마셔야 한다. 이곳에서도 역시 몇 잔의 술을 마셔주면서 그들의 호의에 보답하였다. 이들은 평소에는 일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단체 관광객들이 오면 일정한 금액을 받고 촌장의 지휘아래 광장에 모여 관광객들에게 그들의 공연을 보여준다고 한다. 진채주를 마시고 광장에 들어서니 중앙에는 황소 뿔 형태를 한 나무 기둥이 꼽혀있고 거기에는 구리로 만든 북이 걸려 있었다. 이 광장을 동고평(銅鼓坪)이라 불리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주변에는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먼저 젊은 아가씨가 공연의 시작을 알리자 남자들의 노생이 시작되고 젊은 아가씨들이 뒤에서 사뿐 사뿐 춤을 추는데 마치 나비가 춤을 추는 형상을 하고 있어 확인해 보니 나비춤이라 한다. 아마 치우 황제 전설의 메이방 메이류(妹榜妹留) 즉 호접마마의 나비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소뿔 잔에 술을 담아 손님들에게 권하고 판등무(板?舞)라는 의자춤을 추기 시작한다. 왜 하필 의자를 갖고 춤을 출까 의아해 했는데 나중에 마을을 돌면서 가정집을 방문하니 집집마다 많은 의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의자에서 생활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놀다가  신이 나면 그 의자를 갖고 놀았기에 의자춤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머리에 화려한 장식을 한 기혼녀와 장식을 하지 않은 미혼녀, 할머니, 꼬마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와 원을 그리면서 관광객들과 같이 춤을 추면서 공연은 마무리 되었다. 

 

 

 (단군 묘족 아가씨들의 춤사위)

 간단한 기념촬영을 마친 후 자유 시간을 이용하여 마을을 돌면서 구경하였다. 특히 곡물 창고는 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연못 위에 여러 개의 기둥 위에 만들어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11시 10분 단군묘족 마을을 출발하였다. 뇌공산(雷公山; 해발 2,179m)을 주봉으로 하는 묘령산맥(苗嶺山脈)의 능선 길은 일부 비포장이기도하고 경사가 심하면서도 굴곡이 많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능선에서 바라본 계단식 논은 소수 민족들의 삶을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저렇게 높고 경사가 심한 곳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떠할까 궁금하기도 하였다. 12시 50분 뇌산현(雷山?)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1시 40분 출발하여  3시 20분 용강현(榕江?) 평영진(平永鎭)도착하여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여 오후 5시쯤 용강에 있는 조그마한 호텔에 도착하였다.

더운 날씨라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시내 구경에 나섰다. 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마작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장례 문화와 비슷함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발 마사지를 받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7. 29(목)  용강 - 종강 파사묘족마을 - 조흥 동족마을

8시 호텔을 나와 도류강(都柳江)을 따라 달리는 도로는 포장 상태가 좋지 않아 80여 Km를 달리는데 3시간 반이 필요했다. 중간에 잠시 쉬어 휴식을 취했지만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을 정도였다. 종강(從江)에 11시 15분 도착하여 약 5Km 정도 떨어진 파사 묘족(芭沙苗族)마을을 찾았다.  산길을 구비 돌아 약 20분을 달려가니 황소 뿔 모양을 한 문이 보이고 그 앞에는 총을 멘 촌장이 일행들을 맞이하였다. 왼편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자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다른 묘족과 달리 손님을 환영하는 표시라고 한다. 남자들은 노생을 불고 여자들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쑥스러운 표정으로 관광객들을 맞이하였다. 언덕을 조금 올라가니 조모석(祖母石)을 모신 신수정(神樹亭)이 있었다. 여기에 있는 신수(神樹)는 모택동 기념관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자 비바람이 불고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기에 뿌리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파사(芭沙)라는 말이 묘족 말로 ‘나무와 풀이 무성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로 이들이 자연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 나무를 심고, 죽으면 태어날 때 심었던 나무를 베고 그 밑에 시신을 안장하고 다시 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특히 그들은 치우 황제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기에 단풍나무를 숭배하고 집을 지을 때에도 가운데 큰 기둥만은 단풍나무로 세운다고 한다.

모퉁이를 돌아 옥수수가 무성히 자라고 있는 마을로 접어들자 나무로 만든 집 사이로 곡식을 말리는 사다리 모양의 목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골목길을 잠시 돌아서자 넓은 광장이 나왔다. 단체 관광객을 위한 공연이 열리는 공간이다. 입구에서부터 따라 온 묘족들은 먼저 향불로 공연의 시작을 알린다. 방수와 방풍 효과를 내기 위해 아교액을 덧칠했기에 반질반질한 그들의 전통 복장인 ‘타오부'는 검은 색을 띠고 있었고 허리에는 소뿔 잔과 화약통, 그리고 단도를 차고 있었다. 먼저 남자들이 사람보다 더 큰 노생을 들고 나와 불면서 둥글게 춤을 추자 뒤이어 여자들도 따라 나와 같이 신나게 춤을 춘다. 그들의 춤이 다른 묘족보다 더 격동적인 것은 아마 산에서 살아왔던 그들의 삶을 잘 반영해주는 것 같았다.  

 

 (파사 묘족의 격동적인 춤사위)

 또한 일행 중 한 명과 묘족 처녀와의 가상 결혼식이 열렸다. 결혼식이 끝난 후 찰밥을 관광객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약간의 팁을 챙긴다. 이어서 남자가 성인식을 할 때 정수리 부분을 제외하고 머리카락을 낯으로 면도하는 '후쿤'(戶棍) 의식을 재현하였다.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머리를 면도한다고 한다. 보는 사람들은 조마조마하지만 그들은 태연하게 핸드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이들의 삶의 모습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년식 의식의 하나인 후쿤 의식을 보여주는 모습)

끝으로 관광객들과 같이 손을 잡고 흥겹게 춤을 추다 총 쏘기를 하면서 마무리를 한다. 공연을 구경하고 이 마을의 족장 집을 찾았다. 족장 집은 관광객들에게 숙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미 많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빗방울이 조금씩 들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12시 50분 버스를 타고 종강 시내로 들어와 점심 식사를 하였다. 도류강 양편으로 들어선 아파트와 산기슭에 자리 잡은 고루를 뒤로하고 조흥(肇興)으로 향했다.

약 1시간 30분을 달려 여평현(黎平?: ) 지평향(地坪鄕)에 있는 풍우교에 도착하니 3시 반이었다. 1882년에 처음 세워진 지평의 풍우교는 최근에 중건된 것으로 교량 길이는 70m로 다리 난간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 그들의 삶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중 고루야성(古樓耶聲)이라 소개된 그림은 그들이 춤과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넓은 광장인 고루평(鼓樓坪)이 자리하고 있었고 주민들은 모여 카드놀이를 하면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가옥구조는 기둥으로 지상과 떨어져 가축 사육으로 이용되는 1층과 사람들이 거주하는 2층 구조로 된 간란누방(干欄樓房)양식이다. 약 30분 정도 마을을 구경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계단식 경지를 바라보면서 약 1시간을 달려 여평현 조흥향에 도착하였다. 계단식 논으로 이루어진 능선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분지에 자리 잡은 마을은 700여 채의 목조 건물 사이로 동족의 상징인 고루가 자리하고 있어 아늑하게 느껴졌다. 먼저 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3층 목조 건물인 호텔에 짐을 풀고 나와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카운터에서 시내 지도를 요구하자 조금 있다가 한 장 가져오면서 5위엔을 요구한다. 조흥동족 마을에는 12개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인, 의, 예, 지, 신을 상징하는 5개의 고루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데 먼저 찾은 곳은 지단고루(智團鼓樓)였다. 고루 앞에는 연못이 있었으며 고루에는 북은 매달려 있지 않았지만 긴 의자에는 노인들이 모여 한담을 즐기고 있었다. 고루 뒤쪽 언덕 위에는 살세단(薩歲?)이 있었다. 동족 사람들이 숭배하는 대모신(大母神)인 싸쑤이(薩歲)를 모신 사당이다. 사당 문은 잠겨 있었으며 현지 가이드도 신화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 지 못하고 있어서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어 조금은 답답하였다. 조그마한 노천 시장을 지나 신단고루(信團鼓樓)에 도착하니 동네 꼬마들이 신나게 놀고 있었으며 어른들은 긴 의자에 앉아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고루 처마 밑에는 동족들의 삶의 흔적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동족 마을 전경)

 신단고루를 구경하고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오른쪽으로 돌자 마을 출입문인 북채문(北寨門)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조그마한 개울을 따라 올라가니 맹묘화교(孟猫花橋)라 적힌 풍우교가 있었다.  신단고루의 풍우교에 해당되는 것이다. 보를 만들어 계단상 모양을 한 개울은 많은 물은 아니지만 꼬마들이 물놀이하면서 더위를 식히기는 충분하였다.  

 (조흥 동족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의 모습) 

3층 목조 가옥들이 늘어선 개울을 따라 지단풍우교를 지나 계속 올라가니 의단 풍우교가 나오고 옆에는 의단고루(義團鼓樓)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루 옆에는 광장을 끼고 극장이 있었는데 저녁에 이곳에서 공연이 있다고 한다. 인단고루(仁團鼓樓)와 예단고루(禮團鼓樓)를 거쳐 중앙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은 세공품과 수예품들을 구경하고 7시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걱정과는 달리 음식이나 호텔 시설이 그렇게 열악하지는 않았다.

어두움이 자리 잡은 8시 네온 불빛으로 단장한 의단고루에 있는 극장으로 가서 약 1시간 정도 민속 공연을 감상하였다. 먼저 화려하게 장식한 머리와 짧은 치마, 무릎까지 오는 스타킹을 신은 아가씨들이 비파를 들고 나와 높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동족들은 문자화된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기에 노래로서 그들의 삶을 표현하였는데 동족어로 신성한 노래라는 뜻을 가진 동족대가(?族大歌)는 명절이나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부르는 노래로서 고음(高音)과 떨림으로 유명한데 떨림은 매미 소리를 고음은 새소리를 모방한 것이라 한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이어지는 연극은 아마 주랑(珠郞)과 랑미(?美)의 슬픈 사랑 이야기인 것 같았다. 옛날 뇌산(雷山)에 살던 사랑하던 두 남녀가 집안의 반대 때문에 이곳으로 도피해 왔는데 지방 유지가 랑미의 미모에 반해 주랑을 궁지에 몰아 죽이자 랑미는 그를 산으로 유인하여 무덤을 파게하고 그를 죽여 원수를 갚았다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었다. 

 

 관광객들과 동네 꼬마들이 한마음이 되어 같이 춤추면서 공연을 마무리하니 9시가 되었다. 부근에 있는 향풍각(鄕風閣)이라는 카페에서 맥주와 땅콩을 안주로 하여 여행담을 나누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

 

7. 30(금)  조흥 - 용성 다락논 - 계림

6시 기상하여 중학교로 향했다. 동네 전체를 조망하기에 적당하다고 하여 언덕을 올라 교문에 들어서니 문이 잠겨있었다. 시내 전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갖고 내려왔는데 마침 지단고루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벼 가보니 조문을 받고 있었다. 어제 밤늦게 사람들이 시내를 배회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루가 사람들의 휴식처이면서도 집회 장소로, 또한 제사와 장례를 치르는 공간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조문을 마치자 폭죽이 연속으로 떠지면서 불꽃을 내 품었고 고루가 연기에 쌓여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조문을 마친 사람들이 고기가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뒤로 하고 저녁을 먹었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7시 40분 출발하여 마지막 목적지 용성(??)을 향해 출발하였다. 

(조문을 받고 있는 지단고루의 풍경)

 약 2시간을 달리자 도류강의 지류에 설치된 교량이 폭우로 인해 공사 중이어서 큰 차량이 통행할 수 없어 걸어서 건너가니 계림에서 온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삼강(三江)을 지나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동북부에 위치한 용성에 도착하니 12시 30분이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 평안장족제전관경구(平安壯族梯田觀景區)에 도착하였다. 미니버스를 갈아타고 급경사 산길을 갈지자로 약 20분을 달려 용척(?脊)이라는 글자가 적힌 채문에 도착하니 무더위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입구에는 큰 귀걸이를 하고 긴 머리를 말아 올린 요족(?族)여인이 수예품을 팔고 있었다. 요족 여인들은 18세가 되어 성인식을 치를 때 딱 한 번 머리카락을 자르고는 평생 정성스레 머리를 손질하면서 기른다고 한다. 또한 요족 신랑은 귀걸이를 결혼 선물로 하는데 크기가 부의 척도가 된다고 한다. 

 

오후 일정이 바빠서 정상 부근의 전망대까지 갔다 오기에 시간이 빠듯하여 무더위 속에서도 빠른 걸음으로 올라야만 했다. 한족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가진 민족인 장족들의 3층 목조 가옥들은 이미 상가나 식당으로 이용되어 많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거형태는 간란(干欄) 혹은 마란(麻欄)이라 불리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하고 있는데 지면으로부터 높이 떨어진 곳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지어 가축을 아래층에서 사육하고 사람은 위층에 거주하는 것이다. 계곡 부근의 논들은 대나무를 이용하여 수로로 사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계단 논에는 벼가 한창 자라고 있어 먹구름과 녹색의 나무들, 밤색의 가옥들 그리고 화려한 복장을 한 관광객들의 모습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오르는 계단 중간 중간에는 장족의 아가씨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관광객들에게 미소를 보내기도 한다. 계단식 논이 마치 용의 척추와 같이 생겼기에 용척이라 불리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용척 제전의 모습)

정상 부근에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우기에 물이 풍부하기에 큰 저수지 역할을 하는 것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정상 부근 중에 한 곳에는 물이 조금 고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을이면 벼가 누렇게 익어 더 멋진 경관이 될 것 같았다. 장족 아가씨들과 1달러 지불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전망대 정상에 올라서니 3시쯤 되었다. 

 (화려한 복장의 장족 아가씨와 함께..)

 멋진 경관을 만들어 낸 구불구불하게 자리 잡은 논두렁은 나에게는 감동을 주지만 그것을 만든 장족들의 땀은 논을 채우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잠시 쉬었다가 하산을 서두른다. 흐린 날씨 때문에 깨끗한 화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화려한 복장을 한 장족 아가씨들의 모습에 위안을 삼는다.

오후 4시에 용성을 출발하여 1시간 반을 달려 계림에 도착하니 많은 비가 내려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들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계림은 처음에 보았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를 한 것 같았다.  일정에 잡혀있는 시내에 있는 차 집을 방문하였다. 일엽차(一葉茶) 또는 선차(仙茶)라고도 불리는 자연의 쓴맛이 많은 것이 특징인 고정차(苦丁茶)를 음미해 보고 인근 한식당에서 오랜만에 삼겹살과 소주를 한 잔 하면서 여유를 찾는다. 저녁 식사 후 발마사지를 받고 공항으로 출발하여  11시 35분 비행기를 탔다.


7. 31(토)  계림  - 인천

약 3시간 비행하여 4시 인천에 도착하여 사우나에서 대기하다 첫차인 6시 40분 리무진으로 구미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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