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떠밀려가다보니 미처 뒤 돌아볼 새도 없이 2023년은 북 찢겨서 쓰레기통에 쑤셔 박혀 버리고 벽엔 허락도 없이 낯선 2024년이 떡 하니 걸려 있습니다.
무정하게 떠나버린 세월에 대한 배신감...
이 배신감 때문에 새해 인사의 홍수 속에서도 낯선 달력이 벽을 차지한 처음 며칠간은 텅 빈 가슴을 달래기 힘들었습니다.
나만 그런가요?
텅빈 가슴을 달래려면 재즈를 들으면 될까요? 아님 세상을 향해 총질이라도 해댈까요? 내 젊음을 낚아채 도망간 세월의 심장에 칼질이라도?
그래서 새해 첫 독서토론회의 책은 토니 모리슨의 ‘재즈’입니다.
앙증맞은 사이즈에 듬성듬성한 글씨로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소설이라니...
과연 회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여기저기서 볼멘 소리들이 터져 나오는데요
소설 속 화자(話者)가 계속 바뀌고, 때론 화자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힘든 모호함, 선형성을 벗어난 줄거리 전개 방식 때문에 책장이 술술 넘어가지 않고 몹시 힘들었다는 것이 참석자 대다수의 공통된 소감이었습니다.
하기야, 독서에 관한 한 득도(得道)의 경지에 오른 선정위원장님 조차도 몇번이나 다시 읽으며 곱씹어봐야 했다니 저같은 범인(凡人)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쉽게 읽히지 않았다면, 이 소설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까요?
책장을 넘기자마자 살인, 불륜, 원조교제에다 스리썸의 의혹까지... 이건 대 놓고 아사리판(!)이었다는 농담섞인 비난부터, 정돈되지 않고 산만한 줄거리 전개에다 작가가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조차 알기 힘든 이따위 소설이 노벨상 작가의 작품이라니! 라는 기자(記者)의 폭언에 가까운 혹평까지..
하지만 고수(高手)의 평가는 다른데요.
이 책이 작가를 스타로 만든 ‘빌러비드’보다 읽기 쉽지 않고 구조가 자칫 산만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꼼꼼하게 읽어보면 “완벽하게 완성된 구조”를 갖춘 뛰어난 작품이라는 강력한 반론이 있었습니다.
가장 이슈가 되었던 부분은 화자(話者)의 모호함이었는데요,
“츳, 나는 그 여자를 안다”
소설 첫 문장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부터 논란이 있었습니다.
대상인 ‘그 여자’가 바이올렛이니 ‘나’는 당연히 다른 누군가이다는게 다수의 생각이었지만, 이에 맞서 ‘나’역시 바이올렛이라는 내공 9단의 강력한 반론에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조자들도 생겨나네요.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요?
기자(記者)는 가슴에 확 와 닿는 메시지를 찾기 어려웠는데요
노예 해방 전후 시기에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극심한 억압과 폭력의 상처들이 그 자녀 세대로 전수되는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는 소감도 있었고요,
하지만 이 소설 이전에 발표한 ‘빌러비드’에서 흑인들에게 가해진 상상을 초월한 만행들이 적나라하게 고발되고 있기에, 작가가 이 소설에서 인종 문제를 주된 이슈로 부각하려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많네요.
화자도, 등장인물들의 관계도, 이들의 미래도 모호함 투성이긴 하지만,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등장 인물들이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 많은 분들이 공감하였습니다.
그래서 말미에 봄이 등장하는 것이고요
소설의 제목이 왜 '재즈'일까요?
내용이 재즈와 별 관련이 없으니, 그냥 독자들이 낚인 거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었지만, 소설과 재즈의 관련성을 찾으려고 애쓴 기특한 회원들도 많았습니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재즈라는 의견도 있었고요,
제목과 달리 음악 장르가 없어 좌절했지만, <트럼본 블루스> 레코드 판을 비롯해 재즈 이미지를 곳곳에 차용하고 있어 위안을 삼았다는 고백도 있었고요,
클래식 음악은 악장 사이에 간극이 있는 반면 재즈는 그렇지 않은데, 이 소설이 각 장별로 제목도 없고 화자의 변화, 등장인물의 자연스런 변화가 재즈의 이미지와 비슷하지 않을까? 라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품격있는 독토회원들이지만, 곁가지에도 관심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군요.
관심의 초점은 40대인 조 트레이스가 어떻게 16세 여성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을까에 맞춰지네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남자라잖아.. 외모가 출중했을 걸? 아니 복숭아씨 같다고 했으니 비주얼이 출중하진 않았을텐데.. 도카스가 댄스파티에서 두 형제에게 퇴짜맞고 실의에 빠져있을 때 그 틈을 운명처럼 비집고 들어간 거지...
정답을 찾느라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여성회원들의 말투엔 조트레이스가 가진 매력에 대한 궁금증이, 남성회원들의 말투엔 질시어린 부러움이 묻어 있었다는 사실! 아~ 물론, 일평생 해바라기처럼 조강지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몇몇 회원은 빼구요ㅋㅋ
등장인물들이 흑인이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구별되는 다양한 피부색 (크림색, 골든그레이...)에 관한 이야기, 도시와 시골의 대비에 관한 이야기도 화제에 올랐습니다.
역시 토론의 힘이 대단하군요
난상 토론이 마무리될 즈음엔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귓전을 맴도네요
만일 네가 삶을 바꾸지 못하면 삶이 너를 바꿔 놓을거야. 그리고 그건 전부 네 잘못이 되지
그리고 작가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 해요
당신도 오케 레코드의 바늘처럼 정해진 홈을 따라 뱅뱅 돌기만 할거야?
다음달 책은 오쿠보 준이치의 ‘우키요에’입니다.
‘재즈’보다 더 앙증맞은 사이즈에 큼직한 글씨도, 화려한 그림들도 마음에 쏙 드네요. 기대만땅!
*참석 ; 강창* 김일* 박영* 박지* 심길* 양정* 윤봉* 정인* 최나* 홍혜*
(♧ 부산독서아카데미는 월 1회 오프라인으로 독서토론을 하는 부산독서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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