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디카시의 드러난 화자-드러난 청자
이 통화체계는 화자와 청자가 모두 텍스트에 드러나 대화적 성격을 띤다. 야콥슨은 이런 지향을 능동적(지령적) 기능이라고 봤다.
나를 꺼내 읽는다
그 어디에도 사랑이라는 문자는 없다
꼭 걸어서 당도하라는 당신의 부탁만이
활판(活版)의 문자로 새겨졌을 뿐
― 우대식, 「노을에 앉아」
이 작품은 노을에 앉아서 자기 자신을 살펴본다. 붉은 석양이 철로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온통 벌겋게 물들이고 있다. 강물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장렬한 느낌마저 든다. 사랑을 환기하는 온몸이 붉게 물든 강물 어디에도 사랑이라는 문자는 없다고 진술한다. 사랑은 철길을 쏜살같이 달아난 기차처럼 사라져버린 것인가.
그러나 사랑이 떠나버린 자리에도 당신의 부탁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꼭 걸어서 당도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활판의 문자로 새겨져 있다. 강물에 붉게 물든 노을은 화자의 내면세계로 동일시된다. 외부사물인 노을 진 강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과의 간접 대화 방식이다. 독백처럼 보이지만 당신을 거론하며 당신에게 말하는 방식인 것이다. 어디에도 사랑의 문자는 없다는 것은 이미 사랑은 상실됐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꼭 걸어서 당도하라는 당신의 전언은 남아 있다. 이것은 사랑의 유통기한으로서의 사랑의 속성을 말하는 것인가. 사랑은 소멸되고 의무만 남아서 철길의 떠나버란 기차가 환기하는 당신을 찾아 걸어서 당도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당신의 부탁은 살아남아서 화자를 곤혹스럽게 한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형식상 나와 당신과의 대화체로, 세상을 온통 물들여버릴 것 같은 사랑도 잠시 후면 깜깜한 암흑으로 뒤덮이듯, 떠나가는 기차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환기하며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 사랑의 역설적 속성임을 모호한 간접화접 화법으로 드러낸 것이다.
방앗간 옆집 사는 창녕 댁
코로나 확진 소식에
살아 있소!
우짜든지 며칠만 잘 참아보소, 밥은?
-천융희, 「응원」
이 다카시의 통화체계는 사진에 대한 정황을 2행으로 먼저 제시함으로써 사진 속의 이웃이 목소리의 주체임을 알 수 있다. 나 곧 우리가 언술에는 목소리만 존재하지만 사진 속에서 선명하게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통화체계는 시인으로서의 화자가 1연 언술에서 사진의 정황을 제시하고 이웃 주민으로서의 화자가 코로나 걸려 격리된 청자에게 안부를 묻는 이중적 통화체계를 보인다. 그럼에도 이 통화체계의 주된 국면은 2연에서 보이는 나-너 통화체계이다.
이 디카시는 화자와 청자의 대화국면이지만 여기서는 화자의 메시지만 나타나고 청자는 침묵하고 있어, 코로나 펜데믹의 우울한 풍경이 더 초점화된다.
시골마을에서 코로나로 격리된 주민을 걱정하며 이웃 주민들이 담장 너머에서 안부를 묻는 극순간의 한 풍경을 전경화한 것도, 점점 더 담장이 높아가는 도시와는 대조적 국면으로 이채를 띤다. 인류 사회가 약육강식하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으로 치달을수록 휴머니즘을 옹호하는 이런 류의 디카시는 더욱 주목을 끌게 될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몰어보려고
네게 전화를 걸면
귀뚜라미같이 맑은 네 목소리
다른 행성에서 들려온다.
너 거기 어디야?
- 김개미, 「만취」
이 작품도 ‘나’와 ‘너’의 대화 관계를 보인다. 만취 상태로 ‘너’에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면, 너는 다른 행성에서 귀뚜라미같이 맑은 목소리로 ‘너 거기 어디야?’라고 되묻는다. 이 디카시의 매혹은 이런 문제적 통화체계에서 기인한다. 아주, 아이러니컬한 대화를 보이지 않는가. 이 대화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 것 같은 낡은 빈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화자는 만취가 되어 집이라고 찾아왔는데,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 당도한 것이다. 그럼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내 집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내가 알 수 없어 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상대방은 다른 행성에서 매우 또렷한 목소리로 “너 거기 어디야?”라고 묻는 것이다. 나는 술이 취했는데 너는 정신이 말짱하니, 둘은 다른 의식세계, 곧 각각 다른 행성에 있는 게 분명하다.
이 작품은 아이러니컬하고 패러독스한 두 마디의 대화를 통해 존재론적 질문을 강하게 던진다.
나-너 통화체계는 야콥슨의 언어 의미 기능으로 청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지령적이지만, 시적 통화체계에서는 직접적 명령의 방식을 넘어 통화체계 자체가 시적 코드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하다. 나-너 통화체계가 시적 통화체계로 활용될 때 형식상은 청자 지향을 취하지만 그것이 억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것도 극양식과 다른 서정적 양식의 속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나-너 통화체계는 아무래도 등장인물들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극양식에 더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 통화체계도 앞의 예시 작품들처럼 시적 통화체계에서도 서정적 양식적 특성을 고려해서 활용의 묘를 살리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첫댓글 주변에서 흔히 마주하는, 그래서 그냥 지나치곤 하는 물상를 통해 인간 심사의 다양한 편린들이 드러난다은 것을 확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