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02 (일) "나야 윤석열, 좀 도와줘"… 文때 쫓겨난 검사에 전화
따끈따끈한 ‘신상’, 22대 국회가 5월 31일 막 개점했습니다. 포장지도 뜯지 않은 300명의 의원이 진열대에 나란히 도열해 소비자와 첫 대면 했습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비슷해 보이는 상품들이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300명 중 61명이 판사, 검사, 변호사 출신입니다. 법학자(법학박사)까지 더한 범(汎)법조인으로 범위를 넓히면 그 수는 66명까지 치솟습니다. 무려 전체의 22%입니다.
양만 많은 걸까요? 그럴 리가요. 원내 1, 2, 3당의 수장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변호사), 윤석열 대통령(검사),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법대 교수)가 모두 법으로 밥을 먹던 이들입니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 권력이 ‘정치 군인’ ‘정치 운동권’을 거쳐 ‘정치 법조인’으로 대이동 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이들을 옹위하고 있는 법조인 출신 의원들은 여러 측면에서 흥미롭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제 갓 국회의원 배지를 단 초선들에 관심이 집중됩니다. 주목할 만한 요소들은 차고 넘칩니다. 서초동에서 치고받던 ‘친윤 검사’와 ‘반윤 검사’가 대거 여의도에 입성해 제2라운드를 시작할 태세입니다. ‘찐명’으로 불리는 이른바 ‘대장동 변호사’ 출신 의원들은 어떤 행보를 보여줄까요? 의원 사관학교가 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출신들은 이번에도 최전선에서 투쟁하게 될까요?
이들의 관계가 마냥 심각한 것만은 아닙니다. 당적과 이념을 떠나 윤석열 대통령, 이재명 대표, 조국 대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등과 재미난 인연으로 얽혀있는 이들도 많습니다. 중앙일보 프리미엄 구독 서비스 ‘더중앙플러스(https://www.joongang.co.kr/plus)’ 기획물인 ‘이것이 팩트다: 법인(in)여의도, 여의도법인(人)’편에서 초선 법조 정치인들의 다양한 면면과 인연의 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① 꼬박 7시간 100쪽 고쳐 쓴 尹… “밥 먹자” 버너로 찌개 끓였다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은 고독합니다. 22대 국회에 입성한 초선 의원 중 유일한 ‘친윤 검사’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윤 더불어민주당 의원, 조국혁신당의 박은정·차규근 의원 등 무수히 많은 ‘반윤 법조인’과 일당백의 싸움을 해야 할 처지입니다. 시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겁니다. 2019년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장(특수부장)으로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를 지휘했던 게 주진우 의원이었습니다.
문재인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살아있는 권력과 정면으로 싸운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주진우 의원은 청와대를 두 번이나 압수수색하는 등 정공법으로 승부했고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등을 기소해 법원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그때 그에게 전화를 걸어온 선배 검사가 딱 두 명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 한 명이 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었습니다. 한동훈 전 위원장은 그때 주진우 의원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요?
권력에 대항한 이에게 돌아온 건 핍박이었습니다. 주진우 의원은 2019년 7월 인사에서 지방으로 좌천되자 사흘을 고민한 끝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그때 마지막까지 마음에 걸렸던 이가 갓 검찰총장이 된 윤석열 대통령이었습니다. 주진우 의원은 2011년 중수부에서 중수과장이던 윤석열 대통령을 모시고 저축은행 수사를 담당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서류에 도장 하나 받으려고 중수과장실에 들어갔다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붙잡혀 7시간 동안 ‘빨간 펜’ 퇴고를 당해야 했던 일화가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식사 시간이 되자 윤석열 대통령은 사무실에 있는 재료와 휴대용 버너를 이용해 이제는 유명해진 ‘그 요리’를 해줬다고 합니다. 그런 인연을 소중히 여긴 두 사람은 검찰에서의 이별을 앞두고 서로 울컥했다고 합니다. 주진우 의원의 사표 제출 소식을 들은 윤석열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리고 정치에 입문한 직후 윤석열 대통령이 주진우 의원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당시 주진우 의원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주진우 의원이 한동훈 전 위원장과 본격적으로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된 ‘검언유착’ 혹은 ‘권언유착’ 사건 변호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② 尹 부부에 고발장 날렸다… ‘1기수 선배’ 양부남의 돌변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의원은 이채로운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고검장까지 역임한 특수통 검사 출신인 데다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전 위원장과도 잘 아는 사이입니다. 두 사람과 2003년 대검 중수부에서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함께 한 인연도 있습니다. 특히 한동훈 전 위원장과는 더 각별합니다. 그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윤석열 사단’ 숙청으로 부산고검 차장으로 좌천 시 직속 상관이던 부산고검장이 바로 양부남 의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양부남 의원은 ’윤석열 캠프’가 아니라 ‘이재명 캠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는 ‘대장동 변호사’ 그룹의 리더로 활약하면서 윤석열 대통령, 그리고 검찰과 정면으로 대치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궁금했던 취재팀이 광주광역시의 의원 사무실에서 그를 직접 만났습니다. 양부남 의원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비판했습니다. “통 크던 윤석열 대통령이 졸장부가 됐다”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가 옛 동지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변 좋은 그의 입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이재명 대표, 한동훈 전 위원장과의 일화도 줄줄 쏟아졌습니다. 민주당행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던 이재명 대표와의 단독 회동 자리 내용과 그가 거기서 느낀 이재명 대표의 매력이 자세히 소개됩니다. 양부남 의원이 ‘와, 이놈 어떻게 이렇게 영리할까’라며 감탄했던 한동훈 전 위원장의 수사 관련 일화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한동훈 전 위원장에게 호(號)를 지어준 이야기입니다. 양부남 의원이 그에게 붙여준 호는 무엇이었을까요? 한동훈 전 위원장의 일반적 이미지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반전’이 거기에 있습니다.
③ 尹-이성윤 원래 절친이었다… 여의도 입성한 ‘반윤’ 검사들
22대 국회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반윤 검사’들의 입성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이성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입니다. 그는 검찰 시절 윤석열 대통령의 주적이자 숙적이었습니다. 서울중앙지검장, 서울고검장으로 있으면서 검찰총장이던 윤석열 대통령과 사사건건 충돌했죠. 그런데 두 사람이 원래부터 원수지간이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법연수원 시절에는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검사로 임관한 직후에는 이성윤 의원이 먼저 치고 나갔습니다. 성적 우수자만 갈 수 있는 서울지검에서 초임 검사 시절을 보냈죠.
하지만 우위가 오래 가진 않았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방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곧 두각을 나타내면서 대검 중수부에 입성했고 이후 특수통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지만 이성윤 당선인은 반대로 지방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기사에는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이어져 온 두 사람의 관계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역시 공직 시절 윤석열 대통령과 악연을 맺었던 조국혁신당의 박은정, 차규근 의원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알고 보니 박은정 의원의 남편 이종근 변호사가 조국 대표와 특별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분만 전국 1위였던 산부인과… 곽여성병원 문닫았다
지난달 5월 30일 오전 경기 성남시 수정구 곽여성병원. 6층짜리 구관과 11층짜리 신관 모두 적막한 가운데 일부 층은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병원 관계자는 “마지막 산모가 5월 22일 출산하고 퇴원했다. 병동은 다 비었다”고 말했다. 서류를 떼러 온 임신부, 보호자만 이따금 보였다. 2010년대 전국 분만 건수 1위에 올랐던 129병상 규모의 이 병원은 다음날인 5월 31일 폐업했다. 심각한 저출산에 신생아가 줄자 수익을 내지 못한 것이다. 지난달 5월 29일 통계청이 발표한 1분기(1∼3월) 합계출산율이 1분기 역대 최저인 0.76을 기록한 이면에는 이 같은 출산 의료 인프라 붕괴가 있다.
출산율이 하락하고 신생아가 줄자 산부인과가 문을 닫고 출산 인프라 부족 현상이 심화되며 다시 출산율에 악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지난달 5월 30일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분만 실적이 1건 이상인 병의원은 지난해 460곳으로 2013년(689곳)보다 32% 줄었다. 분만병원 위기는 도시와 농어촌을 가리지 않았다. 광주에서 연 1회 이상 분만을 한 병의원은 10년 전 25곳이었는데 이제는 9곳뿐이다. 지역에 분만 병원이 없어 다른 지역으로 ‘원정 출산’을 해야 하는 시군구도 10년간 12곳이 새로 생겼다.
● 광주 분만병원 10년새 25→9곳… “출생아수 반토막에 운영 불가”
“큰딸을 여기서 낳았습니다. 임신한 둘째 딸도 여기 다녔는데 이제 병원을 옮겨야 한다고 해서 검사 기록을 떼러 왔습니다.” 지난달 5월 30일 곽여성병원에서 만난 김모 씨(64)는 “2대째 다니던 산부인과가 이렇게 문을 닫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이 병원에선 1981년 개원 이후 지금까지 신생아 17만9000여 명이 태어났다. 이 병원 대표원장은 최근 홈페이지 공지에서 “많은 노력을 했으나 악화되는 출산율로 더 이상 운영이 불가능하게 됐다”고 밝혔다.
● 무너지는 분만 인프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분만 실적이 있는 병원은 전국 460곳이다. 의료계 관계자는 “병원 460곳 중 상당수는 응급 등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출산을 지원할 뿐 평소에는 산모를 받지 않는다”며 “실제로 분만할 수 있는 곳은 더 적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 분만 실적이 있는 병원은 전국에서 391곳에 불과했다.
분만 병원이 줄어드는 가장 큰 원인은 임신, 출산 감소다. 통계청에 따르면 연간 출생아는 2013년 43만6600여 명에서 지난해 22만9970명으로 반 토막 났다. 신봉식 대한분만병의원협회장은 “분만실을 적자 없이 운영하려면 의사 1명당 월 20건 정도는 분만을 해야 한다”며 “이 정도 실적을 내는 병원은 전국적으로 10곳도 안 된다”고 했다.
분만 병원이 줄다 보니 대도시로 ‘원정 출산’을 가는 경우도 늘고 있다. 경남은 시군 18곳 중 3곳에 산부인과가 없다. 경남 의령군에 사는 35주 차 임신부 유모 씨(31)는 “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이 모두 없어 친정이 있는 창원시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 칠곡군에 사는 30대 주부도 “3개월 후 출산 예정인데 지역에 분만이 가능한 병원도 없고 산후조리원도 없다”며 “대구나 구미로 원정 출산을 하러 갈 수밖에 없다. 자녀 둘은 갖고 싶은데 여건이 안 따라줘 어려울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 “막대한 의료사고 부담 덜어줘야”
우리나라 분만 수술 수가(건강보험으로 지급되는 진료비)는 매우 적은 수준이다. 정부는 출산 인프라를 유지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분만 수가를 인상했다. 과거에는 자연분만 1건당 78만 원 안팎의 수가가 지급됐는데, 여기에 광역시는 55만 원, 도 지역은 110만 원을 얹어 주고 있다. 그래도 자연분만 1건당 300만 원 안팎인 일본과 비교하면 절반 남짓에 불과하다. 의료계에선 분만 수가를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분만 중 의료사고에 대한 의사와 병원의 책임을 덜어줘야 분만 인프라가 회복될 수 있다는 요구도 나온다.
성원준 칠곡경북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의 지난해 ‘산과 의료소송 분석’ 연구에 따르면 최근 10년 동안 분만 관련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환자) 측은 평균 5억3800만 원을 청구했고, 인정된 배상액은 평균 2억2900만 원이었다. 오상윤 분만병의원협회 사무총장은 “분만 중 뇌성마비가 온 아이에게 12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작년에 나오기도 했다”며 “아이 한 명을 받을 때마다 조마조마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불가항력적인 분만 사고에 대해 국가 배상 제도를 운용하고 있지만 최대 보상금이 3000만 원에 불과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높은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 소송 위험 탓에 산부인과를 지망하는 젊은 의사도 갈수록 줄고 있다. 지난해 산부인과 레지던트(전공의) 지원율은 정원 대비 77.5%에 그쳤다. 산부인과 중에서도 아이를 받는 산과 지원자는 더 적다. 전임의(펠로)가 대형 5대 병원에서 9명에 불과하다. 설현주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의 2021년 조사에서도 산부인과 레지던트 4년 차와 전임의 47%는 “분만 업무를 맡지 않겠다”고 했다. 백 의원은 “저출생 극복을 위해 분만 병원에 대한 획기적인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아이들 덕에 활기”… 온 마을이 함께 키우는 상동고 야구부
‘폐광촌’이라는 명사에는 보통 ‘쓸쓸하다’는 형용사가 따라온다. 하지만 야구는 서둘러 해가 지는 강원 산골 마을에 ‘반짝반짝’이라는 부사를 선물했다. 이름을 잃어 가던 학교와 마을을 모두 살린 상동고 야구부를 만나봤다. 전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읍(邑)은 어디일까. 정답은 강원 영월군 상동읍이다. 올해 4월 기준 상동읍 인구는 1012명이 전부다. 영월군에 속한 7개 면(面) 모두 상동읍보다 인구가 많다.
그런데 이 지역이 읍인 건 텅스텐 덕에 ‘리즈 시절’(과거의 황금기)을 보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상동광산에서 생산한 텅스텐은 한때 한국 전체 수출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 덕에 영월 동쪽 끝에 있는 이 산골에 4만 명이 넘게 살았다. 상동읍에 분교만 4, 5개씩 있던 시절 상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조윤희 씨(56)는 “그때는 서울 명동 다음에 영월 상동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상동에서 서울에 가는 직통버스만 하루에 30대 넘게 있었다”고 말했다. 광산이 문을 닫은 이제는 ‘상동 시외버스터미널’에 시외버스가 한 대도 서지 않는다.
◆ 야구로 상동 살리기
버스가 끊기면 아이들부터 떠난다. 2022년과 2023년 모두 상동고 신입생은 ‘0명’이었다. 상동고와 교문을 같이 쓰는 상동중 졸업생도 다른 지역 고교로 떠나기 바빴다. 그 바람에 상동고에는 3학년 세 명만 남았다. 이들이 졸업하면 학교는 자연스레 문을 닫게 될 운명이었다. 상동 사람들도 “있는 애들도 떠나는 마당에 누가 이 시골에 오겠냐”며 폐교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조윤희 씨는 생각이 달랐다. 상동고 28회 졸업생이기도 한 조윤희 씨는 모교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동읍현안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동창생 김경수 씨(56)와 의기투합해 ‘상동야구고 설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야구 선수 아들을 15년 넘게 뒷바라지했던 조윤희 씨는 폐광지역개발기금을 활용해 무상 야구 전문 교육 제도를 만들면 학생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이웃사촌으로 인연을 맺은 양승호 전 프로야구 롯데 감독(64)에게 도움을 청했다. 야구부 단장을 맡기로 한 양승호 전 감독은 신일고 코치 시절 제자였던 백재호 감독(50)에게 ‘지휘봉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백재호 감독은 서울, 인천, 경기, 충북 지역을 돌면서 전학 희망자 9명을 모았다. 이들이 지난해 6월 19일 상동고에 전학 오면서 이 학교에는 2년 만에 1학년 학생이 생겼다. 올해는 야구부 신입생까지 들어오면서 상동고는 3년 만에 입학식도 열었다. 현재 이 학교 전교생 25명이 모두 야구부원이다.
엄경옥 상동읍장(56)은 “상동읍 인구가 997명까지 줄어든 때도 있었다. ‘이러다 정말 마을이 소멸되는 거 아닌가’ 싶어 무섭기도 했다. 야구부가 생기고 나서 다시 인구 1000명을 넘었다”면서 “밤에도 불이 켜 있고 아이들 소리가 나니까 어르신들도 정말 좋아하신다. 또 아이들 인사성이 정말 밝다. 어르신들이 저기 멀리서 보여도 얼른 뛰어가 인사하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른다”며 웃었다.
◆ 온 마을이 키우는 야구부
‘인사만 잘해도 먹고는 산다’는 말은 상동고 야구부 학생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르신들은 “염소 두 마리를 팔았다”며 150만 원, “배추가 잘 팔렸다”며 300만 원, “폐휴지를 팔았다”며 300만 원을 들고 학교를 찾았다. 상동고 교장실 한쪽 벽엔 ‘야구부 장학금 기부 증서’가 한가득하다. 엄경옥 읍장도 “장학금 전달 방법을 알려달라는 이장님들 전화를 받느라 바쁘다”고 말했다.
상동고에서 영월읍에 있는 별마로야구장까지는 차로 40분 정도 걸린다. 야구부 버스가 따로 없어 초창기에는 백재호 감독 차에 세 명, 상동읍자율방범대 차 두 대에 나머지 선수들이 타고 다녔다. ‘야구부에 큰 차가 필요하다’는 소식에 김치 공장 ‘솜씨가’ 김덕규 대표는 기꺼이 회사 승합차 열쇠를 내줬다. 지난해 장마 기간에는 ‘비 때문에 연습이 어렵다’는 이야기에 동네 어르신들이 ‘전천후 게이트볼장’ 열쇠를 내주기도 했다. 지붕이 있는 넓이 482m² 게이트볼장에 그물망을 치자 그럴듯한 실내 타격 연습장이 됐다.
백재호 감독은 “처음에 학교에 왔더니 어떤 분이 운동장에 야구공 세 개를 놓고 가셨더라. 유니폼도 없었는데 그게 야구부 1호 자산이 됐다. 이후 모든 분들이 도와주신 덕에 짧은 시간에 환경이 어마어마하게 좋아졌다”면서 “처음에는 지도자가 나뿐이라 아이들 밥 먹이고 병원에 데려가는 것 모두 어르신들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정말 온 마을이 야구부를 함께 키워주고 계신다”고 감사함을 전했다.
◆ 아웃카운트 딱 1개
지난해 야구부 학생들이 처음 전학 오던 날 상동고 정문에는 ‘야구부 여러분의 상동고 첫 등교를 환영합니다’라고 쓴 현수막이 붙었다.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아 ‘제78회 황금사자기 첫 일(1)승!’이라는 문구가 이 학교 정문 전광판에 반짝이고 있다. 상동고는 지난달 제78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주말리그 왕중왕전을 통해 메이저 전국대회 데뷔전을 치렀다. 상동고는 서울 신월야구장에서 열린 1회전에서, 인터넷 중계로 경기를 지켜본 상동 어르신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클럽팀 EPBC를 7-3으로 꺾고 첫 승 기록까지 남겼다.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상동고의 2회전 상대는 국내 고교야구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경기고(1905년 창단)였다. 많은 이들이 상동고의 콜드게임 패배를 예상했지만 상동고는 9회말 2아웃까지 7-4 리드를 이어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동점 홈런을 내준 데 이어 끝내기 안타까지 맞으며 16강 목전에서 상동으로 돌아와야 했다. 상동고 선수들은 매일 오후 9시 학년별 단체 모바일 채팅방에 ‘감사 일기’를 띄운다.
이 경기에서 동점 홈런을 허용한 문석준(2학년)은 그날 밤 “경기를 뛰게 해주셔서, 마운드에 오를 수 있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적었다. 문석준은 “당연히 아쉬웠다. 그래도 최선호 멘털코치님(더홉티 스포츠멘탈코칭 대표)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면서 “교문 전광판을 볼 때마다 ‘여기 와서 1년 동안 이 정도로 성장했구나’ 하고 느낀다. 우리도 경험이 쌓이다 보면 다음 대회에서는 2승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든다”고 말했다.
프로팀 코치 시절 멘탈 코칭의 힘을 몸소 느꼈던 백재호 감독은 감독이 되면 선수들에게 멘털코칭을 시키겠다는 꿈이 있었다. 상동고 감독이 된 후 백재호 감독은 신일고 동문 최선호 대표에게 멘털코치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백재호 감독의 전화 한 통에 멘털코치를 맡은 최선호 코치는 2주마다 상동에 와 아이들과 1박2일 상담을 한다.
최선호 코치는 “책임감이 강한 선수일수록 경기에서 패하면 힘들어 하는 시간이 길다. 특히 석준 이는 워낙 책임감이 강하다. 다만 책임감으로 힘들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결과적으로 팀에 도움이 안 되는구나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한다”며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고 친구나 지도자와는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코치님은 너와 나눈 이야기의 비밀을 지켜야 하는 윤리강령이 있다’고 알려주고 아이들이 안심하고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 ‘수포자’가 없는 학교
상동고 선수들은 상동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떻게 동네에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입을 모은다. 상동고에는 심지어 ‘수포자’(수학 포기자)도 없다. 올해 이 학교에 부임한 이종혁 교사(수학)는 “다른 학교와 달리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친구가 없다.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니 ‘각자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하자’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말했다. 상동고 선수들도 원래는 ‘엎드려 자는 친구’였다. 외야수 박준형(1학년)은 “중학교 때는 수업 시간에 잠만 잤다. 그런데 여기서는 야구부원끼리 수업을 듣다 보니 수업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같은 반 학생인 투수 이승우도 “여기서는 틀려도 다 말하고, 몰라도 대답한다”며 웃었다. 백재호 감독이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것도 ‘포기하지 말자’다. 백재호 감독은 “실책을 해도 질책하지 않는다. 안타 맞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전력 질주를 하지 않거나 (수비 때) 백업에 들어가지 않으면 경기에서 바로 뺀다”면서 “솔직히 야구를 잘해서 우리 학교에 오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런데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산골까지 와서 야구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계속해 “고맙게도 아이들이 노력을 정말 많이 한다. 밤에 방문을 두드려서 열어 보면 ‘운동 더 해도 되죠?’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아빠 미소’를 지었다. 박준형과 쌍둥이인 박시형은 “과학 시간에 어떻게 쳐야 홈런이 되는지 배웠다. 상대 투수 공이 빠를 때는 정타로 맞히기만 해도 공이 (담장을) 넘어간다고 한다. 그렇게 치는데 안 넘어가는 걸 보니 아직 힘이 부족한 것 같다”며 학교 체육관으로 향했다.
◆ 상동의 여름
“이모, 계란 더 없나?” 상동고 선수들은 매일 저녁을 먹는 식당 주인 김선애 씨(61)와 반말로 얘기할 만큼 친해졌다. 김선애 씨와 남편 박정열 씨(65) 모두 상동고 선배다. 비빔밥을 담은 그릇마다 계란 프라이를 하나씩 올려뒀지만 선수들 먹성에는 못 미친다. 김선애 씨가 팬 하나로 계란 프라이 다섯 개씩 뚝딱 만들어 나르는 사이 남편 박정열 씨는 계란 한 판을 더 냉장고로 옮겼다. 선수들이 다녀갈 때마다 계란이 네 판씩 사라진다.
고향을 떠났다가 10년 전 상동으로 돌아온 김선애 씨는 “애들이 너무 예뻐서 내가 먼저 말을 놓자고 했다. 어르신들은 나물 반찬 위주로 드시는데 야구부 애들은 ‘무조건 고기’”라면서 “아이들 덕분에 온 동네가 떠들썩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상동고 1학년 학생들은 지난달 ‘꼴두바위 축제’ 장기자랑 무대에 동네 할머니들과 한 팀으로 올라 상을 받았다. 정곤휘(1학년)는 “이제 이 축제 무대에 오르는 게 상동고 신입생들의 전통이 될 것 같다”며 웃었다.
상동고 학생들은 축제 기간 어르신들에게 커피와 차를 나누는 봉사 활동에도 참여했다. 이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어르신들은 성금함에 찻값을 두둑이 냈다. 냉정하게 말해 상동고 선수들 대부분은 고교 졸업과 동시에 야구를 그만 둘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 막 인생의 출발선 위에 섰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동을, 그리고 상동에서 보낸 자신들의 ‘리즈 시절’을 아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상동의 여름이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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