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곽재구
섬이
물위에 떠 있는 것은
함께 지낸 이가 물 안에 누워 있기 때문이다
북국으로 날아가는 새들이
함께 가지 못하는 살붙이 형제들을
그리워하며
꺼억꺽 목놓아 울
둥지 하나를 놓아주기 위함이다
달이 환한 밤
자신의 다리뼈로 만든 피리를 불며 오는 사내에게
당신이 찾는 뼈들이
여기 누워 있어요
이정표가 되어주기 위함이다
별이 하늘에서 반짝이는 것은
지상에 얼마나 많은 서러운 섬이
홀로 고요히 노래를 부르는지 알기 때문이다
육신은 때로
얼마나 가슴 저미는 환영인지
스스로의 눈물 안에 소금을 뿌리기 때문이다
첫눈 오는 날/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 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저녁의 꽃 냄새/곽재구
국경 강마을
저물녘 꽃 냄새 물큰하여라
어릴 적 우리 동네 물가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지
동무들 모여 꽃 내음 속에서 말뚝박기하는데
봉숭아빛 불 켜진 조선족 민가에서
엄마 목소리 들리네
웬수야 저녁 먹어라
아들은 강변 갈숲에 앉아
BTS 듣느라 정신없는데
유람선 타고 마실하는 남녘 사람들
비닐봉지에 쪼코파이랑 치약이랑 USB 넣어
강 건너 북녘땅으로 던진다네
개망나니 아베와 시진핑과 트럼프가 함께 악머구리 춤추며
8천만 한반도 들들 볶는데
강변 국경 마을은 저녁 이슬 내려
알전구 불빛들 촉촉하고
물큰한 꽃향기 속 다급한 엄마 목소리 들리네
웬수야 저녁 먹어라
내 웬수야 저녁 먹어라
선유도/곽재구
섬과
섬 사이
새가 날아갔다
보라색의 햇살로 묶은
편지 한 통을 물고
섬이 섬에게
편지를 썼나 보다
두부 먹는 밤/곽재구
두부를 먹자
하얗고 순결한 조선의 마음을 먹자
두부는 조선의 밥상 위에 가지런하다
심청도 조선의 밥상 위에 가지런하다
심청도 춘향도 두부 앞에서 가슴이 설렌다
두부 속 마을에 수궁가도 있고 사랑가도 있다
두부 속 꽃핀 산골 마가리에 해월도 봉준도 산다
두부 속 녹두꽃밭에 파랑새가 종일 노래한다
막걸리 한 병 두부 접시 앞에 두고
통일이 대박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통일이 쪽박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흥부네 초가집 담장에 박씨 하나
뿌린 적 없는 잡놈들이 박타령을 한다
두부는 말이 없다
뚜벅뚜벅 주모의 칼질에 베일 때도
펄펄 끓는 동태탕에 들어가서도
신음 한번 내지 않는다
두부를 먹자
두부를 먹고
순교하는 조선의 마음이 되자
받들어 꽃/곽재구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미사일 받아라 끝내는 좋다 원자폭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아름을 골라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과꽃
한 송이를 꺾어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
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곽재구 시인 약력>>
*1954년 광주에서 출생.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등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장편동화 『아기 참새 찌꾸』 등.
*1992년 신동엽 창작기금과 1996년 동서문학상 수상.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
*현재 순천대학교의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강의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