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섬은 따뜻하다 / 이승훈(12)
오르페우스
이 땅에는 4월 부우연 황사 바람이 분다. 머언 황하 유역에서 바람이 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해에도 그랬다. 오후만 되면 바람이 불고 하늘에는 부우연 황사가 인다. 눈을 뜨고 거리를 걸으면 눈이 아파 왔다.
성에 앉아 있으면 바람 부는 소리가 견딜 수 없어 성 앞 뜰로 슬리퍼를 끌고 나가 본다. 뜰가운데는 이파리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하이얀 꽃들이 말없이 피어 있었다. 언젠가 저 나뭇가지에 하이얀 꽃들이 핀 걸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파 눈물이 터질 것만 같던 일이 생각난다. 그해 4월에도 내가 기다렸던 일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황사 바람 속에서 나는 시체처럼 외로웠다.
지난 주일은 너무 바쁘기만 했다. 월요일에는 인천을 다녀오고, 수요일 저녁에는 광화문 근처 어느 식당에서 인천교대의 김계곤 교수님을 뵙고, 토요일 다시 인천을 다녀왔다. 일주일에 세 차례나 서울을 다녀온 일이 꿈만 같다.
토요일, 서울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제물포 역에 내렸을 때 내가 본 것은 노오란 개나리였다. 낯선 제물포 역, 노오란 개나리는 왜 그렇게 안쓰러운 모습으로 지상의 온갖 고뇌를 끌어안고 있었던가. 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개나리를 바라보던 순간의 내 심정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리라. 노오란 빛이 주던 그 거리감. 이상하게도 노오란 빛은 그때부터 나에게는 따뜻함이 아니라 시린 거리감, 고뇌를 환기했다. 김수영의 시에서 읽은 것도 그렇다. 그는 <꽃잎 2>에서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애져 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 가는 소란을
처럼 노래한 바 있다. 김수영의 경우 노란빛은 고뇌와 소란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꽃은 개나리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노란꽃에서 <금이 간 삶>을 연상하고, <하애져 가는 삶>을 연상하고, 마침내 <넓어져 가는 삶>을 연상하는 것에 나는 매혹되었다. 성 앞 뜰에 서 있는 한 그루 앙상한 나무에 피어 있는 하이얀 꽃과 인천 제물포 역에서 본 노오란 개나리는 결국 나에게는 같은 의미로 다가왔다.
인천을 다녀온 저녁 나는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내용을 헤라에게 모두 이야기했다. 문제는 이 마을을 떠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마을에서 내가 만난 것은 K를 빼고는 모두가 안개와 바람 소리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 바람과 안개를 견디기에는 이제 지친 모양이다. 이 마을에서 일년 내내 나를 휩싸던 바람 소리, 그것은 문득 공포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지난 금요일 중앙일보 문화부에 있는 정규웅 형이 수필을 청탁했을 때도 나는 이 마을에는 바람만 분다고 써서 보냈다.
어제는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인데도 나는 아무도 없는 성으로 왔다. 사실은 원고를 쓰기 위해서였다. 글을 쓰기 위한 자료가 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자료를 가지고 집으로 가서 글을 써도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마을에 살면서 나는 모든 글을 성에서 썼다.
4월의 일요일. 성은 고요하기만 했다. 성에서 나는 지난 일들을 잊으려 했다. 이 마을로 이사온 다음, 나는 거의 빼지 않고 일요일이면 성에 앉아 있었다. 처음 몇 해는 집에 나의 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혼자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방은 좀처럼 마련되지 않았다. 성에 대한 그리움은 개인적으로는 이런 사정이 계기가 되었다. 학교 연구실을 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따지고 보면 나대로의 방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오후면 성을 찾아오는 심란한 바람 소리. 때로는 절규하면서 영혼의 창문을 두드리던 그 울음 소리, 그 속에서 붉은 피를 토하던 추억들, 이제는 끝났으면 좋겠다. 그런 성에 앉아 원고 35매를 썼다. <시에 나타난 분단의식>이라는 주제로 쓴 김종삼론이다. <월간문학>에 보낼 원고였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다시 살펴보니까 그것은 시인론이라기보다는 김종삼론을 위한 하나의 에스키스Esquisse에 지나지 않았다.
바람 속에서 일요일 하루가 저문다. 그런 시간에 나는 시를 쓰거나 아니면 화집을 펼쳐 본다. 바람 불던 토요일 서울에서 산 두 권의 화집. 그건 르동과 끌레의 화집이었다. 화집을 펼치면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르동의 그림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은 <오르페우스>와 <바다 위를 나는 목>이었다.
르동의 그림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르동의 그림을 볼 기회가 없었다. 우연히 서점에 들러 이 화집 저 화집 펼쳐 보다가 어쩐지 마음에 들어 산 것이다. 르동의 생애에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파란도 없는 일생이었다고 작가론에 씌어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의 그림 속에는 이상한 고뇌가 가득 차 있는 것일까. 그는 프랑스 모르도에서 10km 떨어진 메도크 지방에서 외삼촌 손에 의해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 마을은 황량했고, 더욱 가족과 떨어져 어머니의 애정을 모르고 지낸 고독한 시절이었다. 후년에 그는 자신의 초기 작품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가 지난날 제작한 저 슬퍼 보이는 예술의 근원을 샅샅이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수도원풍의 장소, 그 안에 있으면 나 자신이 외톨이로 느껴지는 격리지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황폐했을까요. 거기서는 있을 성싶지도 않은 것으로 상상력을 채울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눈으로 봐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완전히 박탈당한 곳에서는 어쩐지 정신력과 상상력이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릇인가 봅니다.
한 예술가에게 어린 시절의 삶은 그가 창조하는 예술의 영원한 주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그림에서 이상한 혈연감 같은 것을 느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우수와 황량감, 그것은 가정환경과 관계된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일생 동안 그의 내면을 지배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의 그림 <오르페우스>에는 목이 잘린 오르페우스가 하프를 곁에 두고 눈을 감고 누워 있다. 그런가 하면 <바다 위를 나는 목>에는 그야말로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남자의 목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은가. 잘린 남자의 목이 어떻게 살아서 바다 위를 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그의 그림에 매혹된 것은 이런 점에 있었다.
사정은 다소 다르지만 내가 펴낸 첫 번째 시집의 이름으로 되어 있기도 한 시 <사물 A>에는 목이 잘린 닭 한 마리가 겨울 마당으로 뛰어가는 이미지가 나온다. 잘린 목의 이미지 도대체 어떤 까닭으로 이런 이미지가 나를 휩싼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은밀한 대답을 그때 나는 르동의 그림에서 찾고 있었다. 목이 잘린 채 하프를 켜는 오르페우스, 목이 잘린 채 바다 위를 날아가는 남자, 목이 잘린 채 겨울 마당을 뛰어가는 한 마리 흰 닭, 이 모두는 내 젊은 날의 초상이다. <사물 A>라는 시를 여기 옮겨 본다.
사물 A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명령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해 등불을 켜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완강한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볕 속을 뒤우뚱걱리며 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