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의 구두 한 켤레
이 세 진
쓰레기장에 버려진 구두 한 켤레
어둠 속에 놓여 있는 모습이
어디서 본 듯하다
무겁고 버거운 생의 무게 견딘
실밥 터진 옆구리
말할 기운이 없는 절반쯤 잘린 혓바닥
균형 맞지 않았던 생이 엿보이는
더 닳은 한쪽 굽
젊은시절 알 수 없는 분노와
돌부리처럼 걸리적 거리는 것들
깡통차듯 차버리곤 했지만
늘 발등 찍혀 마음 아파했다
때로는 험준한 구보를 위해
뜨거운 결의로 구두끈을 조여 묶고
장맛비 속에 젖고,
쓰러뜨릴 것 같은 눈 속을 헤짚으며 길을 갔지만,
오늘은 틀니 빠진 노인처럼 입 벌리고 있다
새 구두보다 생각이 많은 낡은 구두 한 켤레
누추한 모습으로 입 꼭 다물고 있다
순명한 눈빛으로 하늘을 보고 있다
하늘에 뜬 접시 하나
공사장 콘크리트 벽
화석처럼 박제되어 있던 빛
어둠의 그늘에 밀려갈 때
깊지 않은 웅덩이 속
개밥그릇으로 쓰던
깨진 접시 하나
물결이 씻고 있다
누가 버렸을까
하루 일과 끝난 시장한 귀가길
무심코 고개들어 바라본
하늘의 접시 하나
누가 저 높은 곳에 걸어 두었을까
가로등 없는 좁은 골목길 접어들 때
길 건너는 허기진 고양이
오늘따라 그림자가 길다
꽃진 자리
엉덩이 자국
앉아 있던 흔적이다
왕관 같은
감꽃도 그렇고
매화꽃 자리도 그렇고
잠시 쉬어간 흔적, 상처뿐이다
만약 하늘이 엉덩이라면 달은 항문일 것이다
때로는 보이지도 않는
둥글기도 하고
찢어지기도 한 그 항문
구린내 나서 철새가 비켜가는
온기
해거름 저자거리 채소전에 가면
풋풋한 채소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어느 가난한 저녁 식탁 한 끼의 식사가 되기 위하여
잉걸불 위에 누워서 노릇노릇하게 익어
어느 젓가락에 내 살 한 웅큼 물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없는 입맛이 돌아 오라고
지하철 신문을 덮고 잠든 노숙자를 보면
포근한 한 장의 이불이 되고 싶고
독거 노인의 싸늘한 아랫목을 더듬으며
따뜻하게 날 수 있게 연탄이 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
한 생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온기가 되어 본 적이 있는가.
개구리 울음
초여름
모 심은 무논
개구리 울음이 푸르다
땅거미 짙어오는
무논에 개구리밥처럼
별들이 둥둥 떠 있다
개구리들이
한창 벼를 키우느라
힘을 쏟는
실바람 부는 초저녁
개구리 울음 소리에
벼들이 파르르 떨며 자란다
어느 오월
달빛도 별도 없는 밤
보랏빛 섬광 허공을 가른다
잠시 인간 세상 윤곽이 보였는데
어둠의 침략군이 무자비하게 점령했다
어리석은 내 눈에 그 섬광
어느 시절 채찍일 것이라 느낄 때
쿵쿵쿵 말발굽 소리 들리고
양철 지붕 위로 도망가는
요란한 발걸음 소리에 놀라 눈을 감았다
감았던 눈을 뜰 때
또 다른 날이 밝아 있었고
시체는 보이지 않는데
하수구에 흥건한 핏물이 넘쳐 흘렀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잡초들 키를 늘리는 싱그런 오월이었다
새벽 강가
초저녁
달이 강물에 떨어질 때
물이 어깨를 출렁거렸다
새벽녘
달이 강물에서 걸어 나올 때
물이 어깨를 출렁거렸다
늙은 아이 하나
맨발로 강가에 달려가는 새벽
그 곳에 달의 눈꺼풀이 있고
풀어헤친 머릿카락 사이에 귀가 있는데
이런 날은
하늘에 해와 달이 같이 있어
동쪽의 태양은 몸이 붉게 달아 오르고
서쪽 핏기 잃은 달은 산 너머로 숨는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행간에 씨앗 하나
흙의 품 속
씨앗 하나
황홀한 결실의 순간까지
나는 행간에 숨겨 놓는다
한 편의 시가
흙 속 행간에서 올라올 때까지
유혹에 빠진 집안 할아버지
고향 강가에 서면
먼 날의 기억이 떠올라 입가 웃음이 번진다
아니다, 배고픈 시절 일이라 슬프다
굶기를 밥 먹듯 하시던 집안 할아버지
어느 여름비 오는 밤
장에 가 안 온다는 할머니 말씀에
젊은 아버지가 할아버지 찾아 강가로 나섰는데
놔라 놔라 이 년아 놔라 실랑이하는 할아버지 목소리
바지를 걷는 둥 마는 둥
강물에 뛰어드신 아버지 눈앞에
외나무다리 놓으려 박아 놓은 소나무 말뚝에
두루마기 자락 걸어 당기는 집안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시고 집에 오셔서 들은 사연
오랜만에 빈속에 술 한 잔 하시고 강물을 건너려할 때
한복 곱게 입은 여인이 손짓하며 따라와라 하길래
얼큰한 술김에 그 여인을 따라갔다는데
가시밭이면 물이라 바짓 가랑이 걷으라 하고
물이면 가시넝쿨이라 가랑이 내리라 하더란다
밤새도록 끌려다니다
첫 닭이 울 때 찾은 집안 할아버지
남루한 살림살이에 환갑도 못 넘고 뜬 세상
오늘 때를 건너 뛰지 않는지
강물에 얼비치는 빙그레 웃으시는 할아버지
주름진 얼굴 천천히 지우는 고향의 강 물결
아내의 브래지어
아내가 나들이 간 날
속내의 찾으러 뒤지는 낡은 장롱 서랍 속
오래 살아 온 흔적들
남루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또 다른 낡은 서랍 속
아내의 그것을 닮아
겹겹이 포개 놓은 풀 죽은 브래지어들
어느 공동묘지 쌍분 같은데
아내가 평생 끌어안고 살았을,
새끼들 밥통이었거나
생명의 원천,
또는 뜨거운 사랑이었을.
첫댓글 시집을 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이세진 시인님 ^^
시집 발간을 충신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세진 시인님...
와 !축하드립니다
축하합니다. 동인들 주소를 보내드려야 되는데......
시집 상재하시느라 여름 고생이 많으셨지요
축하드립니다 이세진 선생님,
축하 드립니다. 독자의 사랑 마니 받는 시집 되시길요^^
이세진 시인님 !
시집 <저녁 무렵의 구두 한 켤레> 출간을 축하합니다.
축하드립니다...팔공산에서 뵈엇는데..그 후에 상재하신 모양이네요
이제사 봅니다 정말 감사 합니다 꿉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