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28일 토요일 말씀 묵상♣
성경:마태복음17:9-13(신28P))
제목:변화산의 체험과 승리
9.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1)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헬, 또는 침례
할렐루야!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제목}***“변화산의 체험과 승리”
여러분! 오직 예수 그분이 보이십니까?
1. 사람들보다 예수님만 보아야 합니다.
2. 환경보다 예수님만 보아야 합니다.
3. 신비보다 예수님만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앉아 있는 신앙의 자리가 편하십니까? 그래서 마냥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이 드십니까? 편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내 신앙의 자리가 편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가 오히려 나에게 위기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눈을 들어 보았을 때 어떤 일이 펼쳐졌습니까?
8절에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 놀라운 장면은 걷히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놀라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그들에게는 오직 주님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지나갔습니다. 엘리야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그들앞에는 주님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288장을 항상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3절 가사가 더 은혜롭습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여러분!세상도 나도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생애가 얼마나 귀한 생애입니까? 내 인생의 풍랑도 걷히고 내 인생의 먹구름도 지나가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만 보이는 생애 그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화산의 체험과 승리”(마태복음17:9-13)
예수님을 따라서 산에 올라갔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참 어려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산을 내려오면서 몹시 허탈했을 것입니다. 산에서 경험한 천국의 맛뵈기가 너무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우리 내려가지 말고 여기다 집 짓고 삽시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천국을 맛본 사람이 어찌 다시 세상으로 나가려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아직 천국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맛뵈기를 경험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다시 내려가야 했는데 그 심정이 무척이나 착잡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적과 이유가 있어서 제자들에게 천국의 맛뵈기를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아직 그들이 본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한 주님을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단순히 천국에 한번 갔다 왔다고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왜 하필이면 모세와 엘리야인 것입니까?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예수님 하시는 말씀대로 따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를 하겠지만 아직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비밀을 간직하지 못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이 걸린 문제인 줄을 알면서도 대나무 숲에 들어가서라도 기어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를 쳐야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도 많이 경험하셨겠지만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것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 치유가 되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친밀하고 서로 신뢰하는 관계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더 많은 신임을 얻는 제자들이라서 그들에게만 이 비밀이 알려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예수님의 신적 광휘를 목격한 증인으로 선택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이 사건이 다른 제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지고 전해져야 할 것인데 그것을 본 사람이 있어야 전할 것 아닙니까?
때로는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한 증인으로 여러분을 선택하셔서 부르실 수 있습니다. 남들은 할 수 없는 것,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이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십니다.
노래 잘하는 사람은 노래하는 일로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로 사람 만나는 일이 많은 사람은 사람 만나는 곳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스포츠를 통하여 연기를통하여 아이돌가수들에게도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요즈음 크리스찬 기성용선수가 영국에서 축구를 잘하여 골을 넣고 감사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또 여러분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이 특별하게 역사하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과의 사이에 주고받은 비밀을 간직하고 그것에 대한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목격함으로써 그분이 참으로 메시야이심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또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는데 그것은 무엇이든지 예수께서 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하시려는 일과 그분의 신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적 영광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붙잡혀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되는 일입니다.
거기다 산에서 본 엄청난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러니 제자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갈 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서기관들은 성경에 정통한 학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 왕국이 건설되기 직전에 엘리야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
그러니까 아무리 메시야가 여기 나타났다 저기 나타났다 해도 유대인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엘리야가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고 물으셨을 때, 더러는 엘리야라고 한다는 대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메시야 앞에 오게 될 엘리야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쨌든 엘리야가 메시야보다 먼저 와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메시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엘리야가 왔어야 되는데 그것이 제자들도 미심쩍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산에 올라갔다가 누구를 보았습니까? 엘리야를 본 거예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보내겠다고 하신 엘리야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엘리야가 잠깐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하신 것은 85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엘리야가 백성 가운데 나타나 능력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 것이지 산에서 그것도 비밀리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났던 엘리야가 이제 본격적으로 온다는 것일까? 예수께서 엘리야를 만나신 것은 엘리야 보내시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되는 것은 아닐까? 엘리야가 나타나게 되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고, 더 이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에 엘리야가 백성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어쨌든 엘리야가 잠깐이나마 나타난 것을 목격했으니까 자기들의 말을 믿어줄 동료 제자들에게라도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까 보았던 엘리야가 곧 백성들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그럼, 당연히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해야지. 그런데 엘리야가 이미 왔었단다”
“네? 뭐라구요? 엘리야가 언제 왔었다는 말입니까?” “엘리야가 왔어도 사람들이 못 알아보고 잡아 죽였단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필 엘리야를 다시 보내겠다고 하셨을까요? 왜 아브라함을 보내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모세도 아니고, 많고 많은 선지자들 중에서 왜 엘리야일까요?
물론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에서도 가장 큰 능력을 행했던 사람이고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점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성경에는 죽은 사람이 금방 다시 살아나는 일은 있지만 죽었던 사람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환생하는 일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이 나타나는 일도 없습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하나의 특징입니다.
무당들은 죽은 사람을 불러오는 초혼이나 접신 같은 일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가능한 이유는 사람이 죽으면 혼이 귀신이 되어 공간을 떠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유교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유도 조상신, 즉 죽어서 귀신이 된 조상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귀신은 인간에게 복이나 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잘 모셔야 한다는 것이 제사의 기본정신입니다.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끊임없는 순환 속에 갇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이론과 가설들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귀신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람과 귀신은 그 본질과 기원이 다릅니다. 종류가 달라요. 사람은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신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천사는 부리는 영으로 만드신 영적 존재인데 그 중의 일부가 타락해서 귀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는다고 천사나 귀신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어서도 여전히 사람입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 부활을 기다리게 되고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으로 직행합니다.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은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구속역사의 프레임 속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초혼을 한 경우가 딱 한 번 나옵니다(삼상 28:8-19).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한 사울 왕이 전쟁을 앞두고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사무엘이 올라왔어요.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으면서 그의 패전과 죽음을 예고합니다.
그 다음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은 죽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고 정말로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위대한 선지자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한낱 무당의 부름에 이끌려 세상으로 다시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부자와 거지의 이야기로 이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자가 죽어서 정신을 차려보니 뜨거운 지옥불 속에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보니 저편 하늘에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아브라함에게 청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에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다가 내 혀를 서늘하게 해 주소서”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네가 세상에서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 고통이 합당하다. 그리고 여기서 너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해도 큰 구렁이 있어서 갈 수도 없단다”
“그러면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형제들에게 보내서 나처럼 이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것도 안 되겠구나. 네 형제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고 너 있는 곳에 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닙니다, 아버지. 죽은 나사로가 살아 돌아간다면 내 형제들도 듣고 회개할 것입니다”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 돌아간다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사상입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갈 수도 없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질 수도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세상에 보내지는 일도 없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에서 세상으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본 사무엘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간밤에 죽은 시아버지가 나타나서 “네가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까 내가 굶어 죽을 것 같구나”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당이 초혼을 해서 죽은 사람을 불러오면, 무당이 죽은 사람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죽은 사람만 아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보고, 역시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을 보고 우리가 속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귀신들의 취미생활입니다. 귀신은 인간을 지배하고 두려움을 심어주고 괴롭히는 일이 주 업무예요. 우리 인간을 가지고 장난 노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죽음과 동시에 즉시 천국으로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연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땅에 있는 가족이 기도를 많이 하고 면죄부를 사면 천국으로 업그레이드된다는 것도 천주교에서 만들어낸 소설입니다. 성경은 그런 소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죽은 사람이 다시 세상으로 올 수 없다는 점에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혹시라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지요. 그러나 엘리야라고 해서 천국에서 세상으로 다시 나올 수 있을까요? 그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850년 전에 살았던 엘리야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엘리야가 왔을 때 알아보지 못하고 잡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하나님이 보내겠다고 하신 엘리야는 세례 요한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고 늙은 제사장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7).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과 정확히 일치하는 메시지 아닙니까?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 4:5-6).
그렇게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러 왔던 엘리야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잡혀 죽은 것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야 역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인자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제대로 알고 정확히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람이 죽어서 귀신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잘못 알고 잘못 믿으면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아닌 즉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엉뚱하게 믿고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에입니다.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요 4:22).
성경에 통달했다는 서기관들이 지식에는 능했을지 모르지만 영이 어두워져서 하나님 보내신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에는 메시야까지 잡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제대로 배우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특별히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진리 가운데 거하고 그 진리가 우리를 모든 거짓과 오류와 죄로부터 자유케 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 중에 세 종류의 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변화산 아래의 교인입니다.
저들은 평생을 교회를 다니지만 끝까지 변화하지 않는 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 중 상당 부분이 이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12명중 9명이 변화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 비율이 지금도 맞는 것 같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 4명중 3명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거의 정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둘째는 변화산 위의 교인입니다.
교인들 4명중 1명 정도는 기도와 찬양과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여 그 맛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변화산의 체험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세상으로 다시 내려가 세상과 싸우는 교인입니다.
산 아래에는 귀신이 들려 물에도 쓰러지고 불에도 쓰러지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화산 아래에 남아있던 제자들은 그 귀신을 쫓아내는데 실패하였습니다.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만일 그냥 변화산이 좋아 세상으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면 자신들이야 삼층천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겠지만 산 아래서 고생하고 있는 어린 아이를 고쳐 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그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과 싸워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세상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싸워야만 합니다.
***{결론}***
여러분!변화산으로 올라가십시다. 세상이 우습게 보이는 그 근사한 자리에 한 번 서 보십시다. 그리고 그 능력을 가지고 세상으로 다시 내려와 세상과 싸우십시다. 산 위의 신비체험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와 생활신앙의 변화를 보여줍시다.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날 뿐 아니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세상과 싸워 승리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마태복음17:9-13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산 아래로 내려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