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세상의 이치를 미루어 짐작한다는 오십 줄도 어느새 끝 줄이다, 남들은 우리를 베이비부머라 부른다. 앞만 보고 달린 세월인데 7백만 베이비부머의 노후 난민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회사를 부모처럼 여기고, 정열도 바쳤지만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대부분 일자리를 잃고 회사를 떠나고 있다. 정년퇴직은 바라지도 않았고 다만 애들 대학등록금 때문에라도 최소 3, 4년은 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우리는 날마다 사표를 쓰고 있다. 끝까지 버텨서는 대기발령을 냈고, 책상을 없애고 직위도 박탈했다.
결국 사직서를 냈고 물론 명예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퇴직 이후 평생 몸을 바친 직장에서 버림받았다는 배신감에 뒷목이 땅기고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하다.소화제를 끼고 악몽도 많이 꾼다. 스트레스가 겹쳐 고혈압 판정까지 받아 약도 먹고 있다. 하지만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장남인 그는 주저앉을 여유도 없다. 보험설계사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한 달에 150만 원을 벌기도 벅차다. 월급이 증권사를 다닐 때의 4분의 1도 되지 않지만 아이들 학자금을 대려면 어쩔 수 없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지금도 그는 보험상품을 팔기 위해 거리를 걷고 또 걷는다. 기막힌 현실이다.박복함을 평생 달고 다니는 가련한 생, 뭐가 옴팍 씌우거나 잡신이라도 껴 붙은 것은 아닐까. 가난 속에 고생하며 자랐고 산업화의 주역으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경제개발 연대를 살았으나 나이 들어서도 늙은 부모와 앞가림 못하는 자식들 부양하느라 허리가 휘어지는 낀 세대. 그렇다고 부모 세대처럼 자식 덕 보기를 기대할 수도 없어 노후불안에 수심이 많은 세대다.
이래저래 낀 세대는 힘들다. 자식 농사 잘 하면 노후보장이 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삶이 팍팍한 탓에 은퇴 후를 대비해 재산을 모을 겨를이 없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인빈곤율 1위(49%)를 몇 년째 지키고 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준비 안 된 베이비부머들이 속속 은퇴하고 노인 대열에 편입할 태세라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에게는 동지의식으로 묶는 몇 개의 키워드가 있다. 그 첫 번째가 '가난'이다. 낡은 교과서를 보따리에 싸맨 채 밑창 달아난 고무신을 신고 십 리 길을 걸어 등교했던 유년의 체험이나, 원조용 옥수수빵과 우유가루로 허기를 달랬던 기억이 있으며 가난 외에도 함께 겪은 고난의 사회·문화적 체험은 또 어떤가. 이승복을 매개로 한 무조건적인 반공교육, 달달 외우지 못하면 교실로 들어갈 수도 없었던 국민교육헌장, 기능 올림픽, 중동 건설등등 ...
다소 서글픈 것일망정 동일한 기억과 체험을 공유한다는 건 특정집단에게 결속감을 부여한다.까까머리에 새까만 교복을 입고 청춘의 빛나는 한 때를 속박과 부자유 속에서 보내야했기에 그 반발심으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팝송에 빠져들고, 히피처럼 머리칼을 길게 기르던 경험도 동지의식을 설명하는 키워드 중에 하나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이 주도한 5공화국의 공포정치는 오히려 절망보다 더 큰 결속감을 심어줬다.
유신 말기에 대학에 들어가 18년 독재가 부하의 총탄에 의해 무너지는 걸 봤고, 80년 광주 오월항쟁을 거쳐, 5공의 전횡까지 겪으며 20대 초반을 보냈기에 그 어떤 세대들보다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컸다.나이 서른 살 쯤에는 1987년 '6월 항쟁' 때 넥타이 부대라는 별칭을 받았던 사람들이 그 누구였던가. 때로는 시대의 아웃사이더로 때로는 분노와 울혈의 청년으로 척박한 시대를 억척으로 스스로 꽃인 줄 모르고 악착같이 견딘 우리이다.
하지만 소싯적 프로레슬러 김일의 호쾌한 박치기, 헝그리 복서 홍수환의 눈물겨운 4전5기, 배꼽이 빠질 정도로 우스웠던 배삼룡의 슬립스틱 코미디를 또한 추억의 꽃으로 즐거움으로 아름다움으로 간직한 아날로그 감성체인 베이비부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쯤의 막막한 현실은 꺼리도 못된다. 자조적으로 말할 업적과 용기를 지닌 우리는 자신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말하는 시대의 개척자가 아니겠는가.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이 글 집을 통하여 우리에게 되묻고 싶다. 공유하고 싶고 눈물 한 번 찔끔 나누고 또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고 싶다. 우리는 흡사 산동네 물지게를 지며 근근이 살다 어느 날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삐라를 줍고 (유년), 까까머리로 반공을 외치다 '독재타도'라는 낙서로 필체추적을 당하고 구속도 당하며 (청년), 먹고살자고 안 간 곳이 없으며 안 해 본 게 없는 전천후 오뚝이 (장년)로 비록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아마도 그때 그 어둑한 시절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예서 좌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궁핍과 정치적 박해를 겪고 처연한 동일 문화체험을 공유하며 단련하듯 살았다는 자긍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천명을 넘어선 나이 , 하늘의 뜻을 잘 아는 이제야 말로 제대로 살아보아야 한다. 아직도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쓸쓸해질 여유가 없다. 우리는 권위주의를 물리치고 보통사람이 보통으로 사는 데 일등으로 기여한 사람들이다. 어르신들은 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 잘 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 맞바꿀 수 없는 노동자가 되어 땀 흘리며 살고 있다. 갑근세 주민세 한 푼 깎거나 날짜 하루 어긴 날 없고 공짜 술 얻어 먹거나 돈 떼어먹은 일 한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노동의 대가 훔친 적 없고 바가지 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못난 과거를 거울삼아 앞으로도 똘똘 뭉쳐 기 죽지 말고 잘 살자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즐겨 입던 청바지.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다. 건배 하자.청바지!
(조성원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