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
섬진강에 가을 선물이 내렸다 / 이강철(안산시 단원구)
섬진강둑을 걷다 보면
가을 햇살 한 톨 얼굴에 받아
코스모스가 살랑살랑 풍년가를 지휘한다
오일장에 가는 순이와 순돌이의
발을 묶어 놓고 입가는 빵긋 웃는
온음으로
눈망울은 사랑이 또르르 구르는
16분음으로 지휘한다
갈바람은 코스모스의 매끄러운 허리춤을
휘어잡고 서편의 논배미를 향해
지휘봉을 걸어주면
황금물든 나락들 독일 병정이 되어
대장인 농부의 위엄에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일동 경례
우렁찬 구령에 온 들판에 가을이 노랗게
내렸다
멀뚱멀뚱 지켜보던 까막까막한 피 두어
포기도 더부살이에 고마운지 고개를
숙인다
논배미의 소절을 끝내고
동편 뒷산 농부네 뜰 안 수탉의 목에
지휘봉을 걸어 주었다
지휘는 화려한 구령으로 시작된다
사시사철 떨어지는 얇실한 댓잎에 놀란
수탉은 가늘고 길게 지휘봉을 휘두른다
연주를 시작하니 서둘러 목청을 높혀란다
합창은 시작된다
감나무는 연분홍 치마에 노오란 매듭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두 팔 올려 흐트러졌던 밤나무는
뭉실뭉실 가시 턱을 쩍 벌려 매끄러운
밤톨들을 주름진 저고리 사이로 떨어뜨린다
둥기둥기 엉덩이 씰룩대며 농부네 댁
달달한 대추 몇 알 골 마리에 넣는다
마당 덕석에서 잠들었던 콩알이
가을 햇살에 놀란
노오란 콩알 떼구루루 굴러 담장 밑의
두엄 속으로 파고들며 외친다
연주 끝
봄의 교향곡을 위하여 취침이다
가을밤
아랫목 이불 속에서 농부네 부부 달달한
가을대추 먹는 소리 사각사각 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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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간절한 기쁨 / 이혜란 (안산시 상록구)
가족이 모인 주말 저녁이다. 모처럼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시간, 맥주잔 부딪히는 소리가 풍경소리처럼 경쾌하다. 알콜로 달달해진 기분 탓일까. 노랫가락이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아들이 잠깐만을 외치며 다급하게 티브이를 가리켰다. 하얀 설원이 펼쳐진 산, 매서운 바람만 살 것 같은 네팔 히말라야 절경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히말라야 최후의 사냥꾼 빠랑게에 대한 세계테마기행 프로그램이다. 우리 가족은 이름도 생소한 빠랑게에 대한 궁금증으로 티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물속에 사는 꽂게나 털게 일종인줄 알았다. 빠랑게는 해발 삼천 미터 이상 아찔한 절벽 사이에서 작업을 한다. 외줄과 막대 그리고 꿀을 담아 아래로 내려 보내는 바구니가 도구의 전부다. 그들이 목숨을 담보로 외줄 하나에 의지한 체 채취한 귀한 꿀이 석청이다. 이런 귀한 석청을 대를 이어 채취하는 전문가를 빠랑게라 불렀다.
운 좋게 석청을 체취한 날은 마을 사람 모두 모여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가난한 이들에게 벌집 속에 들어 있는 애벌레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어주었다. 거칠게 저항하는 벌에 쏘여 퉁퉁 부은 얼굴로 웃는 빠랑게 얼굴 위에 친구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그들의 욕심 없는 소박한 삶이 그녀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아따 시방꺼정 자냐.?"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새벽잠을 깨웠다. 곱게 키운 귀한 딸자식 멀리 시집보내는 부모 마음에 뒤지지 않는다며 택배를 보내기도 전에 호들갑이었다. 전화기 너머 그녀 목소리는 기쁨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 귀한 걸 힘들게 구해서까지 뭣 하러?"
"몸도 약한 니가 먹어야 재, 맘 변하기전에 오늘 보내 불란다."
"학교 다닐 때 마냥 픽픽 쓰러지지도 않고 지금은 건강해졌어. 괜찮아."
"어디서도 구하기 힘든 진짜배기여 믿을 만한 사람 통해 구했다니께."
깊은 산속을 찾아 석청을 따는 사람을 통해 어렵게 구한 것이니 빠뜨리지 말고 먹으란 말을 벌침 놓듯 강조한다. 농사철만 아니면 직접 건네주면 좋으련만 혹시 택배로 보내는 과정에서 분실될까 염려된다는 걱정도 끈적끈적 꿀처럼 늘어진다. 이틀 만에 도착한 택배는 어찌나 꽁꽁 싸맸던지 박스를 푸는 손에 걱정스런 그녀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버릴 것 없이 손끝이 야문 그녀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 같은 반 친구로 만났다. 시골에서 시내 학교로 진학한 학생들은 자취를 하거나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취라고 해봐야 주인집에 붙은 허름한 방 한 칸에 조그만 부엌 하나가 전부였다. 딸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마치고 공장으로 돈 벌러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시골에서 딸자식을 고등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의식이 깨어 있는 부모를 만나야 가능한 일이다. 가난한 살림에 아들만 가르치기도 버겁다고 버티던 부모를 설득하는데 그녀는 목숨을 걸었다. 입학금만 내주면 혼자 힘으로 졸업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일주일 동안 밥을 굶어가며 얻어 낸 값진 승리였다.
통학하기에는 거리가 멀고 밤길을 다니기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나는 자취를 했다. 그러다 그녀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날씨가 궂은날이나 학교에서 늦은 날 자취방에서 함께 자고 학교에 갔다. 그런 횟수가 늘어나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취방에 눌러 앉게 되었다. 그녀 형편을 잘 아는 나는 짐짓 모른 체 했고 경제적인 부담은 주지 않으려 애썼다. 허약체질인 나를 밀어내고 몸이 가볍고 부지런한 그녀는 내가 부엌에 들어올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농사일로 바쁜 엄마를 대신해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왔다는 그녀는 빨래며 밥 짓는 일도 어른처럼 능숙하게 해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어설프게 그릇이나 깨던 부엌일에서 자유로웠다. 그녀는 나와 동감내기였지만 언니처럼 듬직했다.
학교 다니는 삼년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다. 장학금을 놓쳐 학업을 포기할 고비도 여러 번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각 반을 돌며 십시일반 모금을 했다. 그런 사실이 교무실에 알려졌고 선생님들의 따뜻한 기부금이 더해져 그녀는 등록금 걱정 없이 졸업 할 수 있었다. 학교 졸업을 보름쯤 앞두고 취업이 된 그녀는 바로 사회로 나갔다. 처음 몇 년은 애틋한 마음을 구구절절 편지로 주고받으며 지냈다. 직장에 근무한지 사년이 되는 해에 그녀는 회사 거래처 사람과 열애 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첫 아이를 가졌다는 기쁜 소식을 마지막으로 연락은 끊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움과 함께 살뜰하게 생각나던 그녀였다.
구년 전 가을 이른 아침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웠다. 백방으로 내 연락처를 알아봤지만 매번 절망적이었단다.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한 동문회에서 알게 되었다는 그녀는 아침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단다. 집칸이나 마련하고 먹고 살만하니 마음이 급해지더란 말도 덧붙였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얻은 빠랑게의 기쁨처럼 오랜 기다림 끝에 그녀의 간절한 마음은 내게로 달려왔다. 험한 절벽에서 석청을 채취하듯 안타깝고 긴 시간을 돌고 돌아 택배 속에 꾹꾹 눌러 담은 채였다. 감자, 옥수수, 고구마, 양파, 농작물은 물론이고 각종 나물류도 빼놓지 않고 보내왔다. 뭐라도 나눠주고 싶다는 그녀는 전라도 나주에서 벌써 칠년 째 직접 농사지은 땀과 마음을 보내오고 있다.
먹어도 늘 허기지던 시절이었다. 내 몫을 반으로 나눠 먹으면서도 함께여서 행복했던 마음을 이제는 그녀가 돌려주고 싶다고 우긴다.
"삼년치 방값과 밥값을 원금에 이자까지 얹어 주려고?"
"암만 그래야제"
"음마, 이러다 악질 고리대금업자 되것어."
"복리 이자로 치면 아직 멀었제"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사실은 내가 더 많은 것을 그녀에게 배우고 받았다는 것을 더 늦기 전에 고백해야겠다. 어려운 형편에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배웠고 약한 사람을 자신의 일처럼 앞장서 도와주는 따뜻함도 그녀를 통해 배웠다. 몸이 약한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언제나 그녀였다. 배고픈 사람에게 라면 한 그릇이 배부른 사람이 먹는 쌀밥에 고기반찬 보다 더 값지고 오래 기억된다는 것도 그녀를 통해 알았다. 무엇보다 부지런한 그녀를 앞설 재간이 없어 늘 뒷전에서 손 놓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제는 말해야겠다.
̋̎̋̋̋̈아따 뭔 쓰잘데기 없는 소리다냐˝
벌써부터 손사래 치는 그녀의 능청스런 웃음이 들리는듯하다.
“딩동딩동”
오늘도 먼저 달려온 그녀 마음이 우리 집 문을 힘차게 두드린다. 아뿔싸, 또 한 발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