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들은 자신의 '필요'를 따라 예수님을 찾는다. 병 낫기를 위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필요가 채워지면 떠난다.
반면 제자들은 부름 받는다. 부르심 앞에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간다. …
"당신은 무리인가, 제자인가?"
답변은 절묘했다. 제자로 부름 받았으나 무리로 살고 있단다. 아마도 무리로 살고 싶은 게 아닐까? 아무래도 제자는 조금 불편하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두려워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가? 어려울 때 도와주시고, 죄 지으면, 따뜻하게 즉각 용서해주시고, 우리 삶에 너무 깊이 개입하시지 않는 정도의 관계를 원한다. 근본적인 변화를 원치 않는다. 적당한 선에서 어려울 때 도움 받고, 주일에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헌금 해드리면 되는 부담 없는 관계를 원한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대한 부채의식에 시달릴 수 있다. 예수님은 고생하셨기 때문에 나약한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하실 것이라든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눈에 들려면 나도 그 정도의 고생을 해야 하거나 혹은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힘겹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다. 이는 예수님을 괴롭히는 일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던데요?"
어감이 중요하다. 내 말이 당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들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해준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제1계명으로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다들 수긍하지만 무언가 개운치 않다. 할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간섭한다.
만약 우리가 은혜 받고 울면서 인생을 주께 드린다면 예수님은 기뻐하실까? 부담스러워 하실까? 내 생각에는 부담스러워 하실 것 같다. 우리 삶이 예수님께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헌신을 기뻐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일한 것에 관한 기쁨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혼자 일하실 때 제일 잘하신다. 말로 일을 하신다. 파도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하면 잠잠해진다. 그런데 베드로가 끼면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내서야 한다. 일이 늘어난다.
"나 때문에 예수님의 일이 줄어들까? 아니면 늘어날까?
… 우리를 쓰시면 좌우간 일의 능률은 확실히 떨어진다. 그럼에도 같이 하시는 이유는 뭘까? 나 자신을 깊이 생각해보면 된다. 그동안 예수님께 부름 받아서 어떠했는가? 일단 나 자신이 아주 좋은 사람이 되었다. 정말 과거를 생각해보면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지금이 제일 착하다. 갈수록 죄와 실수가 줄어든다. 나이 들수록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지고 점점 착해진다. 사실 나는 예수님의 일을 많이 방해한다. 공명심(功名心), 나를 나타내고, 높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마음이 전혀 없으신 예수님의 이름에 누를 끼친다. 그래서 내 사역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예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말자" 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능력이 없는 것이 낫다. 우리는 모두 가지다. 예수님만 참 포도나무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 가지가 열매를 맺겠다고 돌아다니면 바로 죽는다. 열매를 맺는 능력이 가지에게는 전혀 없다. 가지끼리 붙어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께 붙어야만 한다. 능력은 예수님께만 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배가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일에 예수님이 무언가 하셔야 한다고 아무 두려움 없이 말한다. 하나님은 가지가 스스로 가지임을 알 때까지 그냥 기다리신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예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나를 좋아하시겠지만 죄를 지으면 미워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해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의 일'은 예수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주로 내 입장에서 행하는 예수님의 일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징계하시기로 하셨다면 십자가를 지시는 대신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셨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큰 십자가로, 메고 죽으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예수님과 친해지면 혹 고난이 많아질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지독한 오해이다. 나는 인생에 고난이 많았다. 깨어진 가정에서 자랐고, 결혼해서는 늘 돈이 없었고, 아이가 아팠고, 사역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위하다 감옥에 갔을 것이고, 고문을 받았을지 모르고, 진보정당운동을 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아팠다면 분명히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인생이 어땠냐고 물어보라. 대부분 쉽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인생은 고난이다. 고난 없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언젠가 청소년 캠프에서 설교할 때 남아공에서 사역하는 몸이 불편한 선교사님이 오셔서 삶을 나누셨다. 선교사님은 비틀비틀 걸어 나오셨다. 정면을 정확히 보지 못하셨지만 짧고 단호하게 한마디 하셨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미 다 주셨으니까 더 이상 뭐 달라고 하지 말고 감사하십시오.
언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맡겨놓은 사람이 되었는가?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해도 된다고 누가 알려주었을까?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이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단 말인가. 무슨 행동이 하나님을 높일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인격과 행하심에 대해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높임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오는 것을 그리 반가워하시지 않는 듯하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 8-13)
*예수의 옷자락을 잡은 여인 - 그녀가 옷자락을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는가. 그냥 문제 해결하자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서 믿음을 보셨다. 항상 그렇지만 믿음을 보여야 한다. 문제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하다는 믿음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때에 응답되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믿음을 거두어들인다. 예수님보다 문제가 더 소중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너무 얇은 관계, 얇은 믿음이다. 마치 예수님이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신 분으로 여긴다. 우리는 우리의 권위자에게 조차 결코 이렇게 대할 수 없다. 그 사람이 나의 의도를 알고 멀리할까봐 무섭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하여는 내 마음대로 한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면 그 정도는 해주어야 한다는 것일까?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마음과 행동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을 존귀하게 만드신다. 다윗이 들에서 양을 칠 때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왜 그 일이 되어야 하는가?"
나의 동기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동기가 점검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일의 동기를 점검하시고, 하나님의 동기로 새롭게 하시고, 일의 진행 과정이 하나님의 뜻과 성품 안에 있도록 주장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항상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성품을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에서 벗어나지 않는 동기와 일의 진행은 결과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나의 내면의 생각들,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시는데 나는 나의 마음을 모르거나 스스로 속인 채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의도 없이 하는 일은 없다. 사람이 스스로 살피기를 거부해서 그렇지 잘 보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의도와 동기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 자신의 숨은 동기를 알려고 해야 한다.
'왜 내가 이 일을 하려고 하는가?’
자신의 의도에 대한 정직한 직시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해준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쓰실 수 없는 이유가 이 한 번의 실수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만약 사울이 여기서 정직하게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해야 했다.
‘예, 저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백성들을 의지했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필 수 없는 내면은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방해가 된다. 자신의 숨은 동기에 대한 정직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내면의 진실한 말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자신의 내면, 숨은 동기에 대한 정직한 직시와 기도는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새롭게 한다. 그만큼 인생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여 정직하게 돌이키지 않으면 내면에 대한 통제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마음, 잘못된 동기로 가득한 마음은 스스로를 망하게 한다.
*'하나님, 사람들이 다윗이 저보다 열 배 낫다고 말합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삼을지 모릅니다. 백성들이 저를 버릴까 두렵습니다. 다윗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사울이 이런 고백을 하면 하나님이 놀라실까 ? 하나님은 이미 사울의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정직하게 말하는 사울을 새롭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다윗을 주목하게 만들어서 사울을 버리시는 인격을 가지셨는가? 전혀 아니다. 사울이 자신의 내면에 정직했다면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사울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고 동기를 드러내서 말할 수 있는 정직함과 하나님 앞에 가서 내면을 보여드리는 관계의 기술이 부족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내면을 하나님이 주시는 관점으로 살필 수 없고, 살피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고, 결국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위배된 마음이 가득하게 됨으로서 교제가 끊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섬세하고 세밀하다.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하심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마치 공기 좋은 곳에 있는 식물 같다. 조금만 오염되면 사라진다. 내 마음이 조금만 오염되면 하나님의 뜻은 오지 않는다. 내 마음의 동기를 살펴서 내 뜻이라면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내 마음대로 한다. 그 결과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는 늘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인격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인격의 핵심은 십자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내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나의 뜻은 나의 욕심이다. 나의 욕심은 나를 묶고, 다른 사람을 묶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인격을 아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평소에 알았던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은 방향을 제시한다. 여기서도 적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알고자 하지 않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만 알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은 평소에 알았던 하나님의 인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안 친한 사람의 뜻은 말해도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친밀한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그의 뜻을 알 수 있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는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아는 것이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뜻이 가장 우선이다.
잘 모르겠으면 기다리고
뜻을 주시면 행동하는 것이 원칙이다.
기다림을 배워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 내 뜻은 점점
하나님이 주시는 뜻으로 바뀌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음성을 듣는 삶은
자신의 뜻에 대한 철저한 감시가 늘 요망된다.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내려놓는 것이다.
나의 뜻은 끝까지 살아 있다.
죽었다고 믿지 말라.
나의 뜻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관리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정직하게 말하면 반드시 도움을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에 우리의 어려움을 이해하시고 따뜻하게 도우신다.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 우리를 도우시는 선하신 분이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대해서는 절대 안 된다. 반드시 하나님을 존중해야 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격을 향한 깊은 신뢰는 역사를 일으킨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평강하지 못하고 복잡할 때는 먼저 마음의 어려움들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충만해지면 그 다음 우리가 기도하는 제목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도움으로 응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원한다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조이 도우슨은 그런 것을 죄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는 죄, 누군가 우리의 뜻을 추측하고 행동한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추측만으로 중요한 행동을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대표적인 것이 엘리의 두 아들이 전쟁에 언약궤를 가지고 간 사건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다면 전쟁에서 지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다가 전쟁에서 졌을 뿐 아니라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나 요행히 앞날의 일을 알아맞히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향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심지어 내가 잘못했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기다리시기 때문에 지금 돌아가면 가망이 있다고 하나님의 인격을 굳게 믿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물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악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나를 받아주신다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인격을 향한 안정감 있는 신뢰가 하나님의 뜻을 인격적으로 분별할 수 있게 한다.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실현되는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고전 1.30). 자신이 들은 것을 너무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기다리라. 끝까지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살피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면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면 된다. 거기에 내가 있을 곳은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뜻을 주시고,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음성을 들을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려고 한다면 내 욕심이 통제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들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그분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 6:3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다면 다음 사항들을 잘 점검 해봐야 한다.
첫 번째로 자신의 생각이 이미 있는 경우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물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이미 자신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결정을 하나님이 확인해주시도록 기도하고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경우에는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살펴서 아시는 분이다. 따라서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아시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늘 자신의 마음을 살펴서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두 번째는 동기가 잘못된 경우이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내면의 동기를 가지고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잘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고 싶어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혹은 자신만을 이롭게 하는 동기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음성을 잘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는 죄에 대한 회개가 없는 경우이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은 회개가 없다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기 어려울 것이다.…
네 번째는 사소한 음성을 불순종한 경우이다. …
다서 번째는 음성을 듣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경우이다. … 순종하려는 태도가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신다. …
여섯 번째는 기다림이 필요할 때이다. …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지 말아라.” …
일곱 번째는 하나님께 ‘예스 아니면 노’라고 답변해 달라고 할 때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
*성경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본다고 말한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자신의 의도에 정직한 사람이다.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사람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나의 의도를 설명했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지 조금 두려워도
정직하게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의도라면
그 일 자체를 도모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기를 바라겠는가?
악인은 그 마음에 생각하는 바를
해가 뜨면 실행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악한 일을 도모하고 저지른다는 것이다.
* 다윗은 죽지 않았다. 회개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간단하게 말하지만 다윗은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율법대로 한다면 다윗은 간음과 살인죄로 적어도 두 번은 죽어야 한다. 그럼에도 진실한 회개는 다윗을 살게 했다. 어느 상황에서든 마음을 즉시 가난하게하고 회개하여 상한 심령으로 돌아가면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왕이 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제는 스스로 전쟁에 나서지 않아도 될 때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
호와를 사랑하라 (신 3:5)”
삶이 어렵든지 좋든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집중력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겸손하게 호소하라. 마음의 어려움을 그대로 두면 점점 믿음은 없어지고, 믿음이 없는 마음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아닌 무언가로 채우게 된다. 원망이나 두려움 같은 것이다.
어려운 일을 주께 맡긴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일단 마음의 짐을 주께 올려드린다는 것이다. 어려운 마음 그대로 있지 말자. 힘들어서 아무것도 못하겠어도 주님께 가자. 그래야 믿음이 생기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믿음이 없는 마음으로 역사를 기대할 수 없다.
믿음은 나의 노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지금까지 이끌어 오셨던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깊은 신뢰, 하나님 때문에 세상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자. 나에겐 하나님밖에 없다고 말하자. 그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무엇이 어려운지 담담하게 말하자
*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복수해달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원수가 하는 일이다. 원수의 별명은 ‘참소하는 자'이다. 고발하는 자'라는 뜻이다. 누군가를 고발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된다. 그렇다고 자신을 자책하면서 기도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문제가 자신의 탓인 양 자책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할 수 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자세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는데 그동안 나는 하나님께 무언가 어려운 일을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연습해야 한다. 말해 버릇해야 할 수 있다.
변명해도 되고 사정해도 된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이다. 마음을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본래 친한 사람들과는 마음을 이야기한다. 안 친한 사람들과는 줄거리만 이야기한다. 때로 자신의 불안함과 믿음 없음도 이야기하자.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지 않고 들어주실 것이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 둔다는 것이다. …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으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만 마음을 지키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고 정금이 되기까지의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오직 예수님만 아신다. 길을 찾기 전에 나의 마음이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제자가 예수님과 친하고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 마음이 예수님과 친밀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다는 것이다. 얼굴이 닮을 수도 있겠지만, 마음이 닮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기 마음 밭의 농부가 되어야 한다. 농부가 밭을 가꿀 때처럼 열매를 내기 위해 열심히 밭을 가꾸어야 한다. 잡초도 뽑아주고, 해충도 막아야 한다. 적당한 물도 주어야 한다. 농부의 마음이 밭에 있듯이 우리의 마음 씀씀이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지 열심히 살펴야 한다.
*사람마다 약함은 다르지만 다 약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판단하면 안 된다. 자신도 약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늘 분석하고 정리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나의 연약함이 무엇이고, 어떤 상황에서 연약함이 일어나고 잘못된 반응으로 가는지, 그리고 그 연약함이 드러났을 때 관계나 일 속에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지도 알고 있어야 한다.
상처는 약함과 관계가 있다. 신뢰하는 것에 약한 사람은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신뢰가 무너진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근본적인 신뢰가 무너진 경우 다른 사람을 신뢰하고, 문제 상황이 왔을 때 믿음 속에서 성숙하게 반응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과거의 상처는 예수님께서 치유하신다. 과거의 일에 대해서 생각나게 해주시고, 치유해주시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예수님의 신뢰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열매인 충성과 신실함에 대한 열매가 있도록, 나의 약함이 예수님의 강함으로 변화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공동체가 이 과정에 함께하면 좋다. 서로 약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돕는 것이 공동체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반응들에 대해서 그 원인을 묻고 생각나게 하실 때 치료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 관해서 자신이 가장 전문가인 것을 믿자.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내면을 그동안 쭉 지켜보고 계셨고, 또 기도하고 계셨으며 내면의 연약함을 친히 짊어지신다. 기도하면 생각나게 하시고 치료하신다.
자신의 내면에 정직하게 기도한다면 예민한 반응들, 잘못된 반응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내면의 모습들을 알 수 있다. 아주 큰 문제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것까지 계속해서 만져야 한다. 끝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성품이 우리를 통하여 자연스레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때까지 마음을 계속 만져야 한다. 속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훈련의 전부이다.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스스로 살피고 예수님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훨씬 빨리 내면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을 아시고 치료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나의 예민한 반응이나 예수님이 원치 않는 마음의 반응들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말고 예수님께 들고 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반드시 그 원인을 알게 해주시고 생각나게 해주신다. 생각나는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마음 안에 일어난 문제들에 대해서 예수님께 깊이 기도하고 치료를 받는 것이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는 어려워도 남의 약함을 알기는 쉽다. 특별히 가족들의 약함을 알기는 정말 쉽다. 늘 같이 살면서 약함이 흘러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함이 반드시 가정의 어느 부분을 붙잡고 분위기를 결정하는 영역이 있다.
가정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모든 것이다. 서로의 연약함이 관계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 안에서 서로의 장점 때문에 즐거운 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은 가정이 각자의 역량을 따라 일을 하는 직장과 달리 서로의 관계를 통하여 사랑하는 관계 중심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녀가 가정을 이룰 때 서로의 장점을 보고 만나는 것은 그리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연약함을 알고 그 연약함을 감당할 수 있다면 좋은 부부가 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가망이 높아진다. 누가 그렇게 선택하겠는가마는,
장점은 가정을 잘 돌아가게 만든다. 약점은 가정을 깨트린다. 서로의 약점이 가정을 깨트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가정은 잘해야 본전인 곳이다. 가정이 평안하고 자식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열심히 해도 누가 알아주는 일은 아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삐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 전문용어로 '시험 들었다'고 한다. 삐치는 사람들은 반드시 공동체를 뒤에서 깐다. 교회를 허무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한번 삐치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진다. 자신의 삐침에서 온갖 사고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거다. 자신의 삐침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내가 지금 마음이 뒤틀려서 정상적으로 사고하기가 쉽지 않고, 판단하는 마음으로 모든 상황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삐치면 마음이 힘들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삐칠 수 있다. 나를 삐치게 하지 않는 상황을 기다리자면 항상 우리는 함정에 빠진다. 내가 삐치지 않도록 결정해야지, 어떻게 삐치는 상황이 없도록 하겠는가? 자신의 약함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를 향해 한번 마음이 토라지면 회복이 안 되는 사람은 특별히 훈련이 필요하다.
교회 공동체는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누군가 삐쳐서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면 성령 충만한 사역이 불가능해진다. 문제가 일어나게 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깊은 은혜 가운데 행복함을 맛보기는 쉽지 않다. "나 삐졌어” 하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리고 알아주지 않으면 불평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이다.
*"회사에서 뒷말을 하는 게 부담스러워요? 교회에서 뒷말을
하는 게 부담스러워요?”
다들 회사가 더 부담스럽다고 한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까봐 그럴 것이다. 회사에서 뒷말을 하다가 걸려봤자 잘리기밖에 더하는가? 그러나 교회에서 뒷말을 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아프게 한다. 회사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교회를 아프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뒷말을 하면 사장이 아플지 모른다. 그러나 교회에서 뒷말을 하면 예수님이 아프시다.
교회는 마치 마을의 공동 우물과 같은 곳이다. 마을 사람 모두가 우물을 깨끗하게 관리함으로써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다.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모두가 소중하게 아낀다. 지나가다 무너진 곳이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돌을 쌓아놓고 간다. 우물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은 어려워도 더럽히는 것은 순식간이다. 누군가 못된 마음으로 우물에 침을 뱉으면 금방 더러워진다. 내 것이 아니지만 모두가 소중하게 아끼면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갈증을 해결할 수 있다.
*교회를 자기 기분대로 다니지 않아야 한다. 가정, 직장, 교회 중에 가장 만만한 곳이 교회다. 자기 아버지에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 직장 상사에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자기 기분을 감추지 않는다. 가정만큼 아끼지 않아서일까? 회사만큼 불이익을 주지 못하니까? 교회 와서 함부로 하는 것은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모든 말 하나 행동 하나를 할 때 예수님께 평가 받을 생각을 하고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고, 교회의 주인이시라는 것은 나의 말과 행동이 주인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내가 비칠 때 원수가 그 일을 내 생각보다 더 크게 부풀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수는 작은 일을 크게 만드는데 선수다. 분열의 실마리가 나의 사소한 삐침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말자. 서운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 늘 만지고 해결해야 한다. 서운한 것을 담아두면 반드시 원수가 언젠가 그것을 이용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상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자신이 삐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듯이 혹은 호소하듯이, 정직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웃지 않고 진심으로 자기 문제로 알고 함께 기도할 수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강해질까.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다. 처음 이 구절을 접했을 때는 화가 났다. 어떻게 항상 기뻐한다는 말인가. 사람에게는 희노애락이 있는데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훈련해보니 항상 기뻐할 수 있다. 물론 어렵다. 삶이 기뻐할 일보다 화나고 슬픈 일, 무신경하게 모른 척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성경의 명령은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다. 상황을 모른 체하거나 속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들어서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숙한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신기하게도 마음을 지키기 시작하면 어려운 일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어려움이 생겨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강한 마음의 소유자, 예수님 닮은, 예수님의 사람이 되자!
* 그리나 연약함을 감추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조용히 뒤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저 사람은 속을 알 수 없어!"
이것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다. 가장 나쁜 평가가 아마도 그런 평가일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3년 동안 같이 지내시면서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의 헌신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투명하셨고, 제자들도 투명했다. 비록 제자들이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연약함이 드러날 때마다 예수님의 완전하심이 더 드러났다.
지도자가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고 완벽한 체하면 모든 사람들이 따라하게 된다. 그러면 공동체 전체가 투명함이 아니라 거짓된 꾸밈으로 형성된다.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깨어짐이 없는 공동체는 성장도 없고 은혜도 없다. 공동체가 힘을 잃는 것은 자정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다 연약함이 있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을 새롭게 하지 않고 투명하게 다루지 않으면 이유를 모른 채 은혜가 없어지고 능력이 사라지게 된다.
*훈련은 나의 연약함을 건드리는 일들이 상황은 바뀌지만 원리는 똑같이 반복해서 다가오는 경우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실 때 이 과목을 훈련한다고 미리 알려주시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연약함을 건드리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면 '아 지금 내가 이 부분을 훈련 받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훈련 과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훈련을 거부함으로써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가나안은 훈련된 사명자들의 땅이다. 광야에서 훈련하지 않은 사람이 가나안을 꿈꾸는 것은 심지 않고 거두겠다는 태도이다. 훈련으로 심어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열매는 그냥 생기지 않는다. 남에게 먹일 열매가 없는 나무는 주인이 찍어서 불쏘시개로 쓴다. 열매를 맺으면 주인이 귀하게 여긴다. 당신은 주인이 귀하게 여기는 나무인가?
감당하기 버거운 일들이 계속 일어날 때는 질문을 잘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고 원망하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조이 도우슨이 가르쳐준 백만 불짜리 질문이 있다.
“하나님 제가 이 일을 통하여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 훈련을 통과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의 연약함을 건드리는 일이 발생했을 때, 과거의 연약함으로 반응하지 않고 예수님의 성품을 따라 반응할 수 있으면 훈련을 통과한 것이다.
*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람의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신다. 아브라함의 사명은 분명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불러내신 것은 가나안 땅을 주고, 거기서 민족을 이루게 하려는 것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살고 이삭을 낳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행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일을 하라고 부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롯은 사명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와 숙부를 따라왔다. 분명한 사명이 있어서 가나안까지 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삶에 선택이 필요한 순간, 물의 넉넉함을 기준으로 판단했다. 이 작은 선택이 자신의 삶을 결정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우리도 삶 속에서 어떤 결정이 우리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사명이 없는 사람은 항상 그 기준이 '물 좋은 곳이 어딘가' 하는 것이다. 환경은 수시로 변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안 좋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소돔은 물은 넉넉하지만 죄가 많아서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지는 곳이었다(창 13:13), 죄를 보지 못하고 물만 보는 것이 우리의 한계다.
*사명은 우리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사명과 안정되게 사는 것과는 연관성이 없다. 그런데도 먹고사는 문제가 사명에 방해가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삶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사명 따라 산다고 가난한 것도 아니고, 불안정되게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명 없이 그냥 안정되게 살고 싶어 한다.
강의를 하면서 물어본다.
“예수님의 제자로 가난하게 살고 싶은가 아니면 제자가 아니면서 부자로 살고 싶은가?"
제자이면서 부자로 살고 싶단다. 질문의 의도가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방어하는 것일 거다. 제자로 살면 가난할까? 혹은 가난해야 할까? 사실, 그런 것은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제자로 살면서 부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 위에 사명이 가장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명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삶은 먹고사는 문제로 가득 차게 되고, 하나님과도 사명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먹고사는 것 중심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
… 사명을 따라 사는 삶은 먹고사는 삶을 해결하는 삶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해결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삶이다.
*가나안 땅, 그 자체는 애굽 땅만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애굽 땅은 물이 넉넉해서 물 대기가 쉽다. 그러나 가나안은 큰 강이 없고, 산과 골짜기로 되어 있어서 물을 흡수하는 땅이다.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돌보아주시기 때문이다. 가나안은 결국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리는 땅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면 하나님은 그 땅에서 살아남는데 필요한 지식을 주신다.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성취한 사람들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을 배운다. 그리고 기적을 체험한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배울 수 없는 지식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방법과 지식을 주신다. 땅에서 먹고살 수 있는 나만의 지식, 진정한 생산수단을 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주셔서 곡식이 자라게 하시고 배불리 먹게 하신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기적이 자주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섬세한 도움을 받는 삶이 되는 것이다. 나의 아성을 쌓아놓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과 튼튼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사는 삶이어야 한다. 삶의 안정감이 하나님께 있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주신 지식과 기적이 일어나는 삶, 그것은 나의 땅이다.
*우리 인생은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가 이전에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상속 받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우리의 노력과 능력이 배양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의 노력과 능력이 되게 해야 한다. 은혜로 일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선순위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은혜로 공부하고, 은혜로 직장을 잡고, 은혜로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 좋은 것을 주신다. 자녀인 우리는 좋은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상속 받는다.
강의하러 가서 물어본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 억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까?"
다들 믿는다고 한다.
“십 억을 주시면 우리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까요? 아니면 관계에 더 게을러질까요?"
내부분이 게을러질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십 억이 안 생기는 것 같습니다."
다들 웃고 나도 웃는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으로 많이 맡겨도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높일 수 있어야 더 많은 것을 맡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변화를 세 가지 영역으로 말하고 싶다. 사람의 변화, 관계의 질적인 변화, 체제의 변화이다. 세 가지는 연결되어 있고 단계적이다.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변화되면 반드시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혹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는데 아직도 관계 속에서 영향력이 없고,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당장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은혜가 얼마 가지 못할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은혜를 자신만 누리고 흘려보내지 않는데 신선한 기름부음이 계속 있을리 만무하다. 금방 지치고 이기적으로 변한다.
은혜가 있으면 즐겁게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된다. 은혜가 메마르면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되고 불만과 짜증이 늘어난다. 혹 그런 감정을 다스린다 해도 성령의 열매를 나누는 즐거운 삶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삶은 문제가 없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를 다른 사람에게 먹여서 그 사람이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새롭게 되어 하나님 섬기는 즐거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최선이다. 평생 예수님을 믿어도 누구에게 성령의 열매를 나누고 변화시켜 본 적이 없다면 내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었다면 반드시 사람이 먹게 된다.
* 직장, 교회, 조국이 나의 손에 달려 있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예루살렘을 위해 우는 느헤미야처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느혜미야 한 사람의 눈물과 결심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조국을 위해 울지 않고 악평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에게 허락된 가나안은 없다. 자기 땅을 위해 우는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 가나안이다.
느혜미야의 훌륭한 점은 그가 성벽을 재건했다는 것이다. 그는 기도한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말만 좋거나, 뜻만 좋거나, 희생이 없거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거나, 치밀한 전략이 없거나, 전쟁을 치를 용기가 없거나, 뜨거운 마음과 차가운 전략을 갖지도 못하고, 조국을 위해 울지도 않는 사람. 무너진 성벽을 위해 금식하지 않는 사람, 자신을 위해서는 울고 화내도 남을 위하여 무엇보다 하나님을 위하여 울지도 화내지도 않는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느혜미야의 기도는 그냥 기도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실천적 사명에 따른 기도이다. 그는 단순히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을 회복하는데 자신의 삶을 바친 사람'이다. 그는 삶을 바쳐 기도한다. 말로만 기도하지 말자, 삶을 드려 기도하자. 그는 진정 예루살렘 회복을 위하여 자신을 드렸다. 생명을 바친 기도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