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김태권의 한나라이야기 1> 김태권 / 비아북 (2018)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결하고 진나라로 통일한 첫 번째 황제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룬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오랜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의 안위와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불철주야 열과 성을 다한 뛰어난 군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데 반해서,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군력욕에 눈이 멀어 탐욕스럽고 전쟁에서는 악랄하며 걸핏하면 폭력을 일삼는 폭군에 지나지 않다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은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진시황'처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국을 통일할 정도로 강력한 진나라가 진시황과 그의 아들 호혜를 끝으로 꼴랑 2대 만에 멸망하고 말았기 때문에 미스테리한 점이 한둘이 아닌 것도 그런 평가를 부르는데 한 몫 단단히 할 것이다.
고대사 미스테리 가운데 하나인 '진나라의 멸망'에 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고마운 책이 바로 <김태권의 한나라이야기 1권>이다. 특히, 진시황과 이사에 대한 통찰은 이 책의 백미로 꼽을 수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사마천의 <진시황본기>와 <이사열전>을 주요사료로 들어서 풀어내고 있다. 간간히 <자치통감>과 그밖의 '해설서'를 참고 삼아 풀어냈지만 사마천의 <사기>의 관점을 골자로 삼았음을 밝힌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김태권만의 날카로운 관점'일 것이다. 사실, '역사책'을 다루다보면 역사적인 관점에 꽂힐 수밖에 없다. 역사적인 사실들의 나열만 담긴 역사책만큼 지루한 책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관점'이 소설책만큼이나 중요하고, 이 관점을 얼마나 통렬하게 째려볼 수 있느냐가 역사책을 읽는 재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태권이 풀어내는 진시황과 이사에 관련된 에피소드에 주목하면 원작인 사마천의 <사기>도 달리 보이게 될 것이다.
암튼, 이 책에서 주목해볼 만한 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진시황이 권력을 집중해서 통치하는 스타일인 '군현제'를 실시하게 된 까닭'을 밝혀낸 부분이다. 초기 중국역사에서 중요한 통치방식은 무엇보다 '봉건제'다. 쌍무적인 계약관계를 중요시한 서양의 중세 봉건제와는 달리 중국의 봉건제는 '가족중심', 또는 '혈연중심'이라는 점이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먼 옛날에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그 때문에 중심이 아닌 먼 지방은 '믿을만한 인물'을 대신 보내서 통치하도록 했는데, 이게 바로 '봉건제'다. 하지만 진시황은 모든 것을 중앙에서 컨트롤하는 '군현제'를 실시했는데, 이는 진시황이 가족을 믿을 수 없는 아픔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바로 아버지처럼 섬겼던 '여불위'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여불위'는 진시황의 친아비로 알려져 있다. 왜냐면 진시황의 어머니가 바로 여불위 집안의 무희로 지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비극은 진시황의 어머니와 노애 사이의 불륜이 들통난 것이고, 이로 인해 '노애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불위'도 노애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밝혀져 진시황은 노애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배 보내고, 여불위를 자살하게 만드는 등 '가족'과 관련된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는 썰을 풀어내고 있다. 이것이 '군현제(중앙집권제)'를 실시하게 된 첫 번째 까닭이라고 밝히고 있다. 논란 검증은 둘째치고 말이다. 역사적인 호기심을 한껏 불러 일으키는 재미난 에피소드 아닌가?
또, 진나라가 강력한 통일국가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법가'에서 찾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볼만 하다. 물론, 통일 전부터 진나라는 '상앙'에 의해 법가 스타일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이사'의 법가 스타일로 탄탄대로를 이어 나갔는데, 이 책에서는 '유가(유교)'를 신봉하는 구시대적인 신하들과의 논리정연한 담판이 압권이었다. 통일 직전에 진시황은 이사와 동문수학한 '한비(한비자)'를 국정파트너로 삼고 싶다며 한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한비와의 만남'을 원했는데, 막상 만남을 가지고 난 뒤에는 '기대이하'였다면서 한비를 되돌려 보내려 했다. 그러자 이사가 말한다. "당장 쓰지 않으려거든 지금 죽여야 한다"고 말이다. 까닭인 즉슨, 한비처럼 뛰어난 인재를 바로 쓰지 않고 나중에 쓰려 한다면 이득은 전혀 없으면서 훗날 적국(한나라)의 인재로 쓰여서 통일의 대업을 망칠 수도 있으니 당장 죽이는 것만큼 이로운 일이 없다고 조언한 것이다. 또한, 진시황이 국산품(진나라의 인재)보다 수입품(외국에서 들여온 인재)을 더 선호하니 진나라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울부짓는 신하들 때문에 곤혹스러워 할 때, 이사는 자신 또한 '수입품(외국인재)'에 불과한데도 이처럼 통일을 이룰 정도의 업적을 남겼는데, 자칭 '국산품'이라는 작자들이 한 일이 무엇이냐면서 호통치는 대목도 짜릿한 전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이처럼 '법가 스타일'은 시원시원스러운 맛이 일품이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법가 스타일로 탄탄대로를 질주하던 진나라도 '분서갱유'를 만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옛 것을 연구하던 신하들이 진시황에게 왕왕 간언한 내용 가운데 "요순시대처럼 태평성대를 이루어야 진나라도 영원할 것이다"라는 내용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시황이 일처리를 하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을 때마다 '유가 스타일'의 신하들이 '요순시대'와 '봉건제'를 언급하면서 진시황의 '법가 정책스타일'과 '군현제'에 흠집을 내면서 딴죽을 걸곤 하던 것이 끝내 사단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전개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분서갱유'는 진시황의 실책 가운데 빠지지 않고 등장해 질책을 받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물론 질책하는 대상들이 '유가(공맹사상)의 후손'이라는 것은 뻔한 짐작이고 말이다. 암튼, 그로 인해 진시황과 이사는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옛날 책(법가 이외의 사상)을 불태우라 지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분서'다.
그런데 '갱유'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유학자들을 산 채로 매장해 죽였다'는 내용과는 사뭇 다른 이견을 실었다. 유학자들만 골라서 생매장했다는 '갱유'가 아니라 여러 사상가들이 진시황을 진노케 했으니 대대적인 숙청을 했다는 '갱제생(제생은 뭇선비를 뭉뚱그려 일컫는 말)'의 잘못이라고 말이다. 물론 '갱제생'에는 유생들도 포함되어 있을테니 '갱유'라는 말로 한편으론 틀린 말은 아니겠으나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이 유학자의 관점에서 콕 집어서 '갱유'라고 표현한 것은 다른 사상가들은 알 바가 아니지만 유학을 공부한 유생들이 화를 입은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선택적 분노'가 담긴 표현이라고 지적한 셈이다.
그렇다면 진시황은 왜 '갱제생'을 실행했던 것일까? 그건 바로 '방중술'과 관련이 깊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꿈꿨다는 사실은 널리 알져진 사실이다.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신비로운 영약을 찾겠다며 삼천 동자와 소녀를 데리고 동쪽으로 사기치고 도망간 사건은 진시황이 속아넘어간 사기 가운데 '새발의 피'에 해당하는 것이었단다. 이렇게 아무런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고 진시황을 속이기에 여념이 없던 '방술사'들이 더는 꾀(?)를 낼 수 없게 되자 도리어 "황제는 요순과 같이 어질지도 못하면서 똑똑한 척은 다한다", "모든 일을 자기 혼자 처리할 정도로 권력욕이 너무 많기에 신선이 될 수 없다"는 등 입에 담지 못할 비방을 지껄이고서는 유유히 도망을 쳐버린 것이다. 이에 극대노한 진시황은 '지식인'이랍시고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을 몽땅 잡아들여 숙청을 해버리니..정작 화풀이 할 대상을 엉뚱하게 삼아서 사단을 일으켜 버리고 말았다. 이를 보다 참지 못해 입바른 소리를 한 맏아들 부소에게 먼 변경이나 지키라면서 내쫓아버리고 나중에는 환관 조고와 이사의 꾐에 빠져 '첫째 황자(부소)'가 죽음에 이르게 되니 진나라의 멸망을 앞당긴 초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처럼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흥미로운 관점으로 다시 읽을 수 있는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역사만화다. 다음 책은 '항우와 유방'의 한판 대결이 펼쳐질 예정이다. 조만간 리뷰로 선보여 드릴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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