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마지막 기행지인 하멜 기념관으로 가 보실까요?
하멜 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 보고서》의 저자 헨드릭 하멜을 기리는 전시공간입니다.
강진군에서는 그가 전라병영성에 7년간 있었던 것을 기념하여
1998년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 시와 자매결연하고,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통해 2007년 12월 3일 하멜 기념관을 개관하였습니다.
그러면 헨드릭 하멜에 대하여 알아볼까요?
헨드릭 하멜은 네덜란드 호르큼 시에서 태어났으며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원이자 서기로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당시에 바타비아라 불리던 자카르타를 출발하여 타이완을 거쳐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1653년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그의 일행은 조정에서 보낸 네덜란드 인 벨테브레를 만나게 됩니다.
벨테브레는 1627년 일본으로 가던 중 역풍 때문에 배가 조선 해안으로 밀리게 되자,
식수를 얻기 위해 상륙하였다가 동료 2명과 함께 붙잡혔습니다.
그 뒤 이들은 병자호란에 참전했는데 동료들은 전사하고 벨테브레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후 북벌 정책에 따라 훈련도감에서 무기를 개발하고 제작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조선에 귀화하여 ‘박연’으로 개명하였습니다.
1654년 5월, 하멜 일행은 서울로 이송되어 훈련도감의 군인으로 배속되었습니다.
하멜 일행은 이 때 청나라 사신을 통해
자신들이 조선 땅에 억류되어 있음을 알리고 탈출을 시도하려다 발각되어 유배되었으며,
조선은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이 사실을 입막음했습니다.
하멜 일행은 1656년 3월부터 1663년 3월까지 약 7년 동안 강진 병영에서 지냈습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거나 구걸을 하기도 하고 나막신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곳에서 보낸 기간이 길었던 만큼, 병영 일대에는 하멜의 역사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기근으로 1663년 3월에 남원, 순천, 여수로 분산되었다가
1666년 9월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하였습니다.
이후 1668년 네덜란드에 돌아간 하멜 일행은 동인도회사에 조선 표착기간 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받기 위해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문서가 바로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하멜 보고서》입니다.
《하멜 보고서》에는 조선에서의 생활과 경험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서양 사회에 조선을 최초로 소개하는 저서로서 그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하멜 기념관은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109번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기념관 입구로 들어가는 길이 잘 포장되어 있습니다.
평탄한 길이 방문객에게 안정감을 주는 듯 합니다.
이곳은 목조건축으로 지어졌는데, 타원형의 전시관은 하멜이 표착한 남도의 섬을 상징하며
맞은편 사각형 건물은 하멜이 타고 왔던 선박 스페르베르 호를 상징합니다.
건물 우측 부분에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이라는 글자가 보이시나요?
저 글자를 지나 오른쪽으로 들어가 보면 기념관 입구가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전시실 입구로 들어가자, 《하멜 보고서》가 제작된 배경을 영상으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화면에
이해하기 쉬운 자막이 더해지니 금상첨화였습니다.
하멜이 살던 당시의 호르큼 시를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하단 중앙부에 하멜의 동상을 축소한 모형이 서 있습니다.
하멜의 고향이기도 한 호르큼 시는 현재는 호린헴이라 불리며,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 어부와 농부들이 세운 도시입니다.
호르큼은 지리상으로 군사적 요충지여서 13세기 말에 성벽을 세워 요새화한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곳은 예부터 곡물 거래를 위한 상선들의 왕래가 왕성했고, 오늘날에는 항구도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가 불리한 지리적 조건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를 알려 주는 안내판입니다.
이 나라는 특이하게도 전 국토의 3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아서,
바닷물이 넘쳐 땅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경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점을 기회로 활용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둑을 쌓아 바다를 메우는 방법으로 국토를 마련하였습니다.
바닷물이 빠진 곳에 제방을 쌓았는데, 현재 네덜란드 국토의 20%가 13세기 이후 이러한 간척사업으로 만든 땅입니다.
풍차를 배경으로 네덜란드가 겪어 왔던 역사가 나와 있습니다.
네덜란드에는 수도 암스테르담처럼 '담(-dam)'자가 붙은 도시들이 많은데
이는 둑을 쌓은 '댐(dam)'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사례는 인간이 자연을 극복한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하멜이 동인도회사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던 네덜란드의 17세기는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봐도 매우 중요한 시대였습니다.
특히 이 시기의 네덜란드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커다란 발전을 하며
당시 유럽 역사를 이끌어간 주역이었습니다.
1648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벗어났습니다.
이것은 독립을 위한 상인들의 끝없는 투쟁 덕분이었으므로,
독립 후에 상인 계층이 네덜란드의 사회를 주도하였습니다.
이들은 봉건적이며 구교도 중심이던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상을 가질 수 있었지요.
16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7세기, 세계에서 최초로 네덜란드에 주식회사, 주식시장, 은행이 설립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엄청난 자금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동인도회사란 17~19세기에 교역을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를 통틀어 말합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1600년 런던에 가장 먼저 창립되었고,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1602년 자카르타 북부에,
프랑스의 동인도회사는 1664년 인도 동해안에 설립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정부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향신료, 면, 커피, 차 등 동양의 산물을 서양으로 가져왔습니다.
신대륙 무역과 함께 이 동양무역이 유럽문화에 끼친 영향은 크며 의식주 각 방면에 걸쳤다고 합니다.
13세기 후반에 원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청화백자가 유럽까지 전래된 과정을 서술한 안내문입니다.
청화백자란, 순백색의 바탕 위에 청색의 코발트 안료로 문양을 표현한 도자기로서
조선에서도 중기 이후에 발달하였습니다.
갖가지 도자기가 진열장에 늘어서 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델프트 청화백자가 유행하였는데,
델프트란 로테르담과 헤이그 사이에 위치한 작은 도시의 이름으로
16세기 말 이곳에 이탈리아 도공들이 이주해 오면서 도자기 산업이 융성하였습니다.
델프트 도공들은 동인도회사가 들여온 중국 및 일본의 도자기에 매료된 유럽인들을 위해
흰색 바탕에 푸르고 섬세한 선, 동양적인 문양 등을 표방한 도자기를 만들었습니다.
점차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델프트는 특유의 유럽풍 도자기를 생산하여
대규모 도자기 산업단지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만들어진 청화백자 화초문 유개호의 복제품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경제 발달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크게 융성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화가 렘브란트입니다.
1642년 렘브란트가 그린 유화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입니다.
우리에게는 <야경>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작품이지요.
작품 중앙에 빨간 어깨띠를 두르고 서 있는 인물이 바닝 코크입니다.
그는 암스테르담 시장의 사위로서, 그가 이끄는 민병대는 독립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네요.
원래 이 작품은 낮을 배경으로 그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시청의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먼지가 많이 싸여 어둡게 보이는데다,
1700년대에 이 부대의 역할이 야간 보안 순찰대로 바뀌었기 때문에
밤 장면처럼 생각되어 '야경'이라고 잘못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니와 네덜란드 지도제작자 블라외가 공동 제작한 중국지도입니다.
비록 실제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박 ‘고스버그(Gotherborg)' 호입니다.
축척은 100분의 1이며,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흐려서 잘 보이지는 않으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성립과 활동, 동방 무역 항로를 다룬 영상 자료입니다.
스크린 뒤에는 당시의 네덜란드 선박을 재현해놓은 듯한 모형이 있어서
더욱 실감나게 영상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나막신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윗줄 맨 왼쪽에 있는 신은 마치 도자기처럼 매끄러워 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네덜란드를 여행하고 쓴 기행 서적이 진열되어 있고,
아래쪽에는 나막신이 보입니다.
나막신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 보겠습니다.
화려한 문양의 나막신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습니다.
흔히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하멜 보고서》의 모습입니다.
하멜이 13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할 당시,
그들의 일행 중 15명만이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이 보고서는 그 동안 하멜 일행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고서 뒷부분에는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탈출하여
나가사키 총독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조선으로 가게 된 이유나 개종 요구 여부, 제주도의 지리적 조건,
탈출 배경 등 다양한 답변이 실려 있습니다.
《하멜 보고서》는 하멜이 탈출한 후,
본국에서 억류 기간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하여 일본 나가사키에서 쓴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럽 사회는 금속활자가 발명되어 새로운 책의 출간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있던 시기라,
출판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1936년 이병도가 진단학보에 발표하면서 《하멜 표류기》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고
그 때부터 우리에게는 이 호칭이 더 익숙해졌습니다.
일본에서는 《조선유수기》로 불리고 있으며, 지금도 그대로 통용됩니다.
하멜이 조선에서 겪었던 사건의 날짜와 시간이 정확히 적힌 것으로 보아,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에 《하멜 보고서》를 썼을 것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는 유력합니다.
게다가 조선에서도 기록에 대한 제한은 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학 박물관에서 접하였던 '홍이포'가 여기에도 적혀 있습니다.
홍이포는 원래 네덜란드 사람들이 쓰던 것을
명나라에서 수입한 후 개량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효종 때 홍이포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와서 겪은 일들이 삽화와 함께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안내판들은 병풍 형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그들이 조선에 와서 느꼈을 고달픔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직접 와 닿는 것 같았습니다.
하멜 일행은 네덜란드에서 귀화한 벨테브레 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으며,
벨테브레와의 대화 또한 그들을 조사할 때 잠시 나눈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들 주변에는 동물원의 희귀 동물을 보려는 것처럼 모여든 구경꾼 외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그들은 구걸을 하고 방황하면서도, 조국에 대한 갈망과 기독교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17세기, 제주도는 군사적으로나 정치 ·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았을 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오가는 뱃길을 따라가다 표류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주도는 국가에 말 · 귤 · 해산물 · 약재 등의 특산물을 진상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이곳은 국가의 죄인을 유배시키는 유배지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멜 일행이 표류했던 무렵, 제주도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하멜 일행이 서울로 이송된 것도 당시 제주도의 기근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멜 보고서》가 공문서라는 것을 보여 주는 안내문입니다.
《하멜 보고서》를 단순한 기행 수필로 생각하셨던 분들께 신선한 충격이 될 것 같습니다.
강진군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와의 우호 교류 협력의 과정을 알 수 있도록,
하멜 기념관에서는 호르큼 시에서 기증한 다양한 유물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기증받은 많은 전시품들이 보입니다.
전시품을 모두 감상하고 출구로 나오는데,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벽에 하멜과 그의 동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잠시 하멜 일행을 기리는 마음으로 숙연하게 서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이 네덜란드와 정식 관계를 맺은 것은 1962년의 일입니다.
특히 2002년 한 · 일 월드컵 때, 우리나라 대표팀의 거스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네덜란드에 쏟은 관심은 더 커졌습니다.
그 이듬해인 2003년은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한 지 350주년이 되는 해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그들을 억류한 이유는 뚜렷하지 않으나,
이미 벨테브레의 사례처럼 훈련도감에 넣어 군에 복무시키면서
그가 가진 서양의 화포술을 배우는 등 유용하게 쓴 경험이 있으니,
하멜도 그처럼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는 주장이 유력합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하멜의 첫 등장 부분에는
하멜 일행을 궁궐 호위 부대로 넣으려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멜 일행은 조선 사회에 동화될 마음이 없었고,
이에 실망한 조선 사회에서는 이들을 죽일 수도, 함부로 풀어줄 수도 없었으므로
억류시켰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여기가 전라남도 강진의 마지막 답사지입니다.
학창 시절에 《하멜 표류기》를 간략하게 배우셨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 글을 계기로 하멜에 대하여 되새기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첫댓글 짧은 시간 동안 저와 같이 강진 유적지를 여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좋은 자료를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덕분에 좋은곳 여행 많이 하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