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 울려 퍼진 산울림, 또는 산울림의 독백: 김창훈과의 인터뷰(1)
최지선 soundscape@empal.com |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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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03년 4월부터 9월까지 이메일 인터뷰
질문: 신현준, 최지선, 김남훈
정리: 최지선
김창훈은 샌드 페블스를 거쳐, 산울림이라는 거목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활약한 인물이다.
또한 솔로 가수로, 김완선 등의 제작자로도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에 관한 정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그와 인터넷을 통해 만날 수 있었던 덕에, 확인되지 못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본 인터뷰는 대략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되었다. 첫째 성장과정 및 샌드 페블스 활동, 둘째 샌드 페블스의 대학가요제 입상 및 산울림 활동(군 입대 전까지), 그리고 셋째 군 제대 이후 산울림 활동과 솔로 및 제작자 활동 순이다. 분량상 군 입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의 활동과 이후의 활동으로 나누어 싣는다. 중도에 연락이 끊겨 인터뷰가 장시간 중단되는 등 우여 곡절이 많은 인터뷰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의 어린 답변을 주신 김창훈 님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이 감사드린다. 또 김창완 님의 매니저 지명옥 님에게도 감사드린다. 지명옥 님이 아니었다면 김창훈 님과의 연락이 힘들었을 것이다.
"형제들끼리 주말마다 음악 놀이를 한 것이지요": 성장기
Q: 생년월일은 1956년 2월 11일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맞는지요.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성장한 곳은 어딘지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정확한 생년월일은 음력으로 1956년 3월 11일입니다. 당시의 많은 부모님들과 같이 학교를 일찍 보내기 위해 한 달을 당겨서 출생신고를 한 것으로 압니다. 사실 기억력이 없는 편이라 흑석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기억밖에 없습니다.
Q: 출신 학교도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대학은 서울대 농대에 다니셨는데 학번은 어떻게 되는지도..
- 1968년인가? 중학교 시험 재수를 하고 있는데, 추첨으로 바뀌는 바람에 당시 처음 설립된 영등포구 당산동 소재 당산 중학교를 1회로 입학해 다녔습니다.
고등학교는 시험을 봐서 용산 고등학교를 다녔죠.
그리고 바로 1975년도에 서울대 농대에 입학했는데 계열 모집이어서 1학년 때는 과를
결정하지 않았고 2학년 때 식품공학과로 전공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Q: 김창완 형님은 1954년 2월생인데 71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가셨는데 역시 1년 빨리 학교에 입학하신 건가요. 이것 역시 부모님의 의사였나요.
- 형님의 경우 워낙 수재이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그렇게 밀어 넣으신 것으로 압니다.
Q: 성장기에 음악을 어떻게 들었는지요. 라디오/오디오/TV 등에서 즐겨듣던/보던 프로그램은 무엇입니까. 당시에 인상깊었던 음악이나 음악인이 있었다면 누구입니까.
- 저는 사실 형(김창완)과 달리 음악을 즐겨 들은 편이 아닙니다.
서양 밴드들의 이름도 잘은 모릅니다. 아주 유명했던 밴드들의 음악은 고등학교 시절에 형이 듣고 있는 걸 어깨 너머로 들은 정도입니다.
제 음악의 기초는 중학교 때 형성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아주 좋은 선생님을 만났는데 클래식 성악을 전공하신 남자 선생님이셨지요.
그분이 음악 시간에 화성학이며 청음 등을 가르치시며 클래식 음악 중 중요한 곡조 등을 모아서 들려주곤 하셨죠.
중학교 때 통학하면서 많이 걸어다녔는데, 그 멜로디를 외우면서 노상 그 곡조를 읊조리고 속으로 무언가 만들어 보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Q: 중고교 시절 밴드부나 학교에서 하는 음악 활동을 하신 적은 있는지요.
했다면 어떤 악기를 맡고 어떤 레퍼토리를 연주했는지요.
- 중학교 때 음악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고등학교 때 처음 밴드부에 가입하여
악기를 잡게 되었어요. 제가 처음 잡은 악기는 색서폰이었습니다.
특별히 좋아서 선택한 것은 아니고 악기가 여유가 있었거나, 아니면 남들이 고르다 남은 파트였을 겁니다.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었고, 형이 대학에 입학하며 사온 기타를 어깨 너머 배우게 되었습니다.
Q: 당시 전성기를 누리던 음악 감상실 같은 곳에 놀러 다닌 일은 없는지요.
감상실에 다녔다면 같이 어울려 놀던 사람은 누구였는지 궁금합니다.
- 음악 감상실이 있는지는 저희가 데뷔 앨범을 낸 후, 박원웅 씨가 운영하는 종로에 어느 음악 다방에서 레코드를 소개할 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만큼 바깥 세상과 물정을 모르고 지냈다고 할까요. 그저 학교에 통학해 늦도록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주말에 기분 전환으로 형과 동생이 모여서 음악 놀이를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Q: 당시 들었던 외국의 팝/록 음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또 라디오 외에 음반(빽판) 같은 것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주로 좋아했던 음악은 어떤 스타일이었는지요. 일반적인 팝 음악이 아닌 록 음악에 심취하게 된 것은 어떤 음악인지요.
- 형은 그 당시 많은 팝송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청계천인가에 다니면서 빽판도 구해 듣곤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아마 집이 가난해서 직접 산 것은 별로 없고 친구들에게 빌려서 듣기도 했을 겁니다. 저는 고등학교까지는 외부와 단절된 채 물정 모르고 그저 착실히 공부나 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내성적이고 말이 없던 순진한 학생이었다고 할까요.
대학에 들어가서 샌드 페블스 활동을 하며 성격도 조금 바뀌고 팝송을 들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무엇에 심취했다는 건 좀 과장이고 그저 연주하기로 결정된 곡의 베이스를 따내어 연주하는 그런 재미만 있었고 가장 큰 관심과 노력은 곡을 만드는데 두었던 듯합니다.
공부에 대한 구속으로 정서적인 여유를 찾을 수 없던 시절이 지나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곡을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걸 가지고 형제들끼리 주말마다 음악 놀이를 한 것이지요. 물론 형은 형 나름대로 많은 곡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1972-76년까지 100곡이 넘는 곡을 만들었으니까요.
Q: 당시 한국 그룹 사운드 음악도 들으셨는지요. 예를 들어 신중현의 그룹, 키 보이스, 히 식스 등. 들어보았다면 TV나 방송을 통해서였는지 직접 라이브를 본 것인지요.
이들의 음악은 듣기에 어땠는지요. 산울림의 음악이 이들의 영향받은 점은 없는지, 있다면 어떤 점인지도 궁금합니다. 또한 김창훈 님의 고등학교 시절은 당시 통기타(포크) 음악이나 포크 록(특히 동방의 빛이 연주한 이장희, 송창식 등의 음악)의 전성기입니다. 이런 음악에도 영향을 받았는지, 그렇다면 어떤 영향인지요.
- 주로 음악은 집에 있던 고물 전축과 라디오를 통해 듣는 게 전부였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을 들어간 이후에 TV가 있었을 텐데...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펄 시스터즈와 김추자 씨의 노래가 나오면 귀담아 들었던 것 같고, 포크송 중에는 아무래도 송창식과 이장희 씨의 음악을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Q: 악기는 어떻게 익히게 되었습니까. 또 악기를 '배운' 적이 있다면 어디서 어떻게 배웠나요. 베이스 외에 또 배운 악기가 있었는지요.
- 특별히 배운 적이 없습니다. 기타 코드에 의해서 베이스의 기본음을 알고 적당히 듣기 좋은 대로 치기 시작했죠. 단순하고 무료하기 쉬운 악기이므로 개성과 특징을 살리려고 어떤 영감과 상상을 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특별히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어서 당시에는 악보를 잘은 볼 줄 몰랐기 때문에 그저 코드를 가지고 머리 속에 떠오르는 대로 자꾸 연주하고 어떤 패턴을 만들어 나가는 식으로 연주하였습니다.
Q: '록 밴드'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마음먹은 '결정적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 대학에 들어가면서 베이스의 기초를 좀 알고 싶다는 마음과, 밴드의 일원으로 좀 활동하고 싶은 마음에 농대 샌드 페블스에 가입하게 된 것이 전부입니다.
"고유의 아마추어리즘을 간직하여 나름대로의 순수성을 지켜나갔던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샌드 페블스에 관한 기초 정보
Q: 서울대 농대 그룹 사운드 샌드 페블스가 만들어진 것은 언제이고 이를 주도한 인물은 누구인지요. 그리고 그룹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김창훈 님은 몇 기인지요.
- 샌드 페블스는 수원에 위치한 서울대 농대에서 콘센트 막사 같은 곳에서 결성된 것으로 압니다. 또한 주도한 인물은 아무래도 1기들이라고 봐야죠. 그런데 1기-3기까지는 한 동료애로 뭉쳐진 느낌을 받았고, 4기-6기까지가 2세대로 생각됩니다. 저는 5기이고, 1년만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7기 이후의 일은 별로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가 75학번이니까 샌드 페블스는 1971년에 결성되었겠지요. 그 외 샌드 페블스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오히려 샌드 페블스 웹사이트를 보면 더 도움이 되겠죠. 이름의 작명 배경도 그곳에 기록된 것으로 압니다.
Q: 제가 학교에 다닐 때 보니, 서울대 농대생들은 1학년 때는 관악 캠퍼스에서 수업을 받고 2학년 때 수원 캠퍼스로 내려간 것으로 기억됩니다. 김창훈 님 때는 어땠는지요? 서울대가 1974년경 관악 캠퍼스로 이전했으니까 과도기로 보이는데요. 관련해서 샌드 페블스의 멤버 모집, 주축 활동 시기 등에 관한 설명도 부탁드립니다. 주축으로 활동하는 건 2학년으로 보입니다만.
- 제가 대학 생활을 시작한 1975년도에는 농대생의 경우 수원 캠퍼스에서 계열별 일반과목을 수강했습니다(모두들 기숙사 생활을 했으나 저는 집안사정으로 통학했습니다).
따라서 연습과 멤버들간의 친목 및 단결이 비교적 잘 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샌드 페블스 신입 선발은 1학년 중 2학기 정도에 오디션을 거쳐 이루어집니다.
이때 합격한 멤버들은 연습 등 훈련을 해서 2학년 때 1년간 활동하게 되죠.
3학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일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특별히 멤버가 차지 않은 경우 또는 어떤 파트에 적임자가 없는 경우 일시적으로 3학년 선배가 돕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며 긴급 처방적인 성격입니다.
3학년이 되면 멤버중 한 사람이 2학년 현역 샌드 페블스의 매니저 역할을 합니다. 완전 심부름꾼이지요. 권한은 없고 책임과 일만 있는 완전 자원 봉사 성격의 자리입니다.
Q: '서울 농대'의 음악문화를 이야기할 때 1970년대 초 4월과 5월에서 활동했고 뒤에는 솔로 활동도 한 이수만 님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서울 농대생들의 음악 문화에, 그리고 샌드 페블스에 미친 영향이 있는지요.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요. 그와 관련된 특별한 인맥(학맥) 같은 것이 있는지요.
- '서울 농대'의 음악문화에서는 이수만 선배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겠지요.
아마 그런 딴따라 기질이 서로 공유되고 동료 음식을 고양하는데 많은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하지만 당시 이수만 선배는 중앙 무대에 보다 전문적으로 진출했던 것이며 그곳에서 성공한 반면, 샌드 페블스는 고유의 아마추어리즘을 간직하여 나름대로의 순수성을 지켜나갔던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샌드 페블스와 이수만 선배와의 교류는 직접적이지 않고 다만 이수만 선배가 샌드 페블스 2기와 동기이므로 샌드 페블스 1세대(1기-3기)와 절친했던 것으로 압니다. 참고로 형(김창완)과 동창인 것으로 압니다. 형 또한 샌드 페블스 1세대와 친목이 있던 것으로 압니다.
Q: 지난 번 김창완 님과 인터뷰했을 때 '베이스는 배울 데가 마땅치 않아서 (김)창훈이가 샌드 페블스에 들어가 배워오게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맞는지요. 맞다면 그건 산울림 활동을 위해서였습니까. 또 샌드 페블스에서의 활동이 산울림의 음악에 영향이나 변화를 주었습니까.
- 샌드 페블스 가입 동기는, 집에서 형제들끼리 나름대로의 밴드를 했는데. 보다 공개적인 무대를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샌드 페블스라는 통로를 통하여 베이스의 기초를 확인하려는 희망이 있었지요. 그러나 산울림의 활동에 대비해서였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곤란합니다. 그 당시에는 저희가 산울림이 될 것으로 누구도 알 수 없었던 때이니까요.
다만 추후 산울림의 음악에 자신감을 갖는 부분적인 자양분이 되었을지 모르지요. '아~ 대학 밴드는 이렇게 활동하는구나', '형제들이 해 온 것과 비교하여 이렇구나 저렇구나', '연주 기술은 나을지 모르지만 창의력은 부족하구나' 등등 하는 생각이 들게 했으니까요.
Q: 산울림의 음악에서 베이스 기타의 주법이 독특합니다. 이런 주법이 샌드 페블스 활동하는 중에 길러진 것으로 볼 수 있는지요. 관련하여 샌드 페블스 내부에서 연주법의 '전수'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요.
- 저의 산울림 베이스 라인은 중학교 때 배운 클래식과 연관된다고도 생각됩니다. 그 당시에는 베이스 교본도 없었고 아주 생소한 악기였는데, 중학교 때 배운 기초적인 화성학과 또한 막연히 접했던 가요와 팝이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샌드 페블스의 활동에서 베이스의 기초와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하기에는 비약이 많겠습니다. 하지만 샌드 페블스의 활동이 없었다면 "나 어떡해"도 없었을 것이며 또한 산울림도 없었을지 모르죠.
Q: 대학생들만으로는 악보, 음반, 교본 등이 부족했을 텐데, 선배 외에 외부 인물에 의한 레슨 같은 것도 있었는지요. 이 과정에서 혹시 '직업적 그룹 사운드'들과의 교류가 있었는지요. 아울러 편곡 같은 것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 저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드럼과 기타 등은 보다 전문적인 기초가 요구되므로 미리 배워서 어느 정도의 숙달이 된 상태로 가입된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오디션 때의 실력이 실제 활동 기간을 거의 좌우하는 것이지요. 1년만 활동하므로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형태로 운영될 수 없겠지요.
Q: '서클룸' 혹은 '연습실'의 위치나 규모는 어땠는지요. 아울러 악기나 장비 수준은 어땠습니까. 혹시 악기나 장비가 열악해서 하고 싶은 음악을 못한 일도 있는지요. 당시 캠퍼스 그룹 사운드는 대체로 앰프는 30와트 수준의 진공관 앰프, 이펙트는 경남전자에서 나온 퍼즈와 와와 정도만 썼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악기나 장비와 관련된 학교측의 지원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요.
- 별도의 서클룸은 없었고 연습실이 바로 서클룸이었지요. 소음을 생산하는 곳이므로 학교에서 제일 외곽진 곳에 위치했습니다. 악기는 심벌 하나만 외제였고 나머지는 말씀하신 대로 아주 후진 진공관 앰프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연도 그런 악기들로 그냥 했습니다. 때로 다른 대학의 초청이 있을 경우 앰프 등은 가져가지 않았지요.
Q: 참고로 어떤 캠퍼스 그룹 사운드는 키보드가 없어서 건반이 그려진 종이로 연습하고, 발표회 이틀 전에 낙원상가에서 빌려와서 겨우 맞춰보고 공연을 했다고 합니다. 샌드 페블스도 이와 비슷한 어려움이 있었는지요.
- 그런 일까지는 없었습니다. 5기까지 이어져 있었으므로 기초적인 악기는 그래도 마련되어 있었던 편입니다. 하지만 조악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죠. 심벌과 스네어 드럼 같은 작은 부피의 고가품은 애지중지 다루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나름대로 자긍심이 있어 공연 이외에 다른 연주는 안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샌드 페블스의 활동
Q: 샌드 페블스의 경우 '정기발표회' 형식의 공연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한 것인지, 장소는 어디였는지요. 공연을 보러온 청중은 어떤 성향의 학생들이었는지요. 김창완 님의 증언에 의하면 흑석동에 있던 중앙대 그룹 사운드의 발표회가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몰려가 구경을 했다고 합니다. 샌드 페블스의 경우도 그랬는지요?
- 첫 공연은 아마 신입생 환영회일 겁니다. 데뷔 무대라고 할까요. 겨울 방학중에 새로 선발된 멤버가 열심히 연습하여 3월쯤의 신입생 환영회에서 첫 무대를 갖는 것이지요. 정기 발표회는 가을에 학교 강당에서 했습니다. 1년에 한 번하지요. 정기 발표회가 아마 마지막 공식행사인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5월인가 자체 대학 축제 때 공연을 하고 일부 다른 대학 축제 때에도 초청을 받아 공연했습니다. 사례는 용달차와 저녁 식사비 정도였던 걸로 압니다. 회계가 따로 있어 작은 금액이지만 돈 관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기 공연 때는 주로 재학생, 샌드 페블스 선후배와 몇몇 교수님들, 그리고 수원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왔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Q: 발표회는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었나요. 사회자가 있고 그룹을 소개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식이었습니까 아니면 그룹이 스스로 진행도 맡은 식이었나요.
- 발표회 진행은 우선 포스터와 팜플렛을 제작합니다.
포스터는 수원시내에 붙이고 다닙니다. 보통 다음 기수 후배들이 그런 궂은 일을 하게 되지요. 그리고 일부 대학에도 포스터를 보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회는 보통 선배가 했는데 사회를 잘 보시는 1기 선배가 있었습니다. 정학상 선배라고, 색서폰도 잘 불고 사회도 프로와 같이 잘 본 것으로 생각납니다. 그래서 졸업 후에도 여러 번 사회를 보게 되었지요. 그 이후는 잘 모릅니다.
Q: 발표회의 레퍼토리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레퍼토리 가운데 외국곡과 국내곡의 비중, 자작곡과 카피곡의 비중은 어떠했습니까? 스푸키스의 멤버였던 백광우 님은 샌드 페블스가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를 즐겨 연주했고, 김창완 님은 유라이어 힙(Uriah Heep)을 많이 했다고 기억하던데요.
- 샌드 페블스가 무대에서 연주했던 곡은 "We're an American Band", "Black Diamond", "Sun Rise", "Who'll Stop the Rain" 등 10곡 이내로 생각됩니다. 주로 외국곡이었으며 6기 이후에 자작곡이 한두 곡 들어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Q: 캠퍼스 그룹 사운드는 신입생 환영회, 정기 발표회 외에 축제 때 고고 파티 같은 데서도 종종 연주하기도 했고, 학교 이외의 무대에서 연주한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샌드 페블스의 경우도 그랬나요. 그랬다면 대략 1년의 활동 기간 가운데 무대에 선 일은 얼마나 있었는지요.
- 샌드 페블스는 나름대로 자긍심이 있어 공연 이외의 다른 연주는 안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고 파티?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학교 이외의 무대에서 연주한 건 대학 축제 외에는 없었습니다. 1년에 공연은 5-10차례 정도로 생각됩니다만 멤버들의 의지와 매니저의 활동, 그리고 연고 등에 따라 기수마다 차이는 있었을 겁니다.
Q: 서울대학교에는 샌드 페블스 외에도 단과대별로 그룹 사운드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에코스(공대), 엑스타시(?), 스푸키스(치대 중심) 등등. 혹시 이들과의 교류는 없었는지요. 또 각 그룹마다 특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기억나시는 게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 말씀하신 다른 단과대학 밴드의 이름은 들었습니다만 명맥이 제대로 유지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류는 별로 없었습니다.
'누가 기타 잘 친다더라' 하는 정도의 얘기는 들었습니다.
Q: 샌드 페블스에서 기타를 연주한 김영민 님은 스푸키스라는 대학연합 그룹 사운드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치대생인 백광우와 정운남 등과 함께 했던 밴드로 박성원과 어니언스의 백 밴드를 했고, 1973년 여름 연포 페스티벌에서 "Hey Joe"를 불러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 김영민 씨의 경우 스푸키스에 가담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사항은 모릅니다.
경향신문 1977년 9월 6일자 기사.
Q: 1977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후 신문에 나온 기사에 의하면 샌드 페블스의 자작곡이 100여 곡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작곡 활동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요. 순전히 개인적인 창작이었는지, 아니면 그룹 내부에서 집단 작업 같은 것도 이루어진 것인가요.
- 100곡의 존재는 산울림과 혼동되어 알려진 것입니다. 샌드 페블스의 자작곡의 효시가 바로 "나 어떡해"입니다. 그러니 샌드 페블스에 100곡의 자작곡이 있었을 리가 없지요. 그 기사 내용은 저와 형의 작품이 와전된 얘기일 겁니다
Q: 뒤에 '대학가요제 출신'으로 분류되는 여러 캠퍼스 그룹 사운드들이 당시에도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활주로, 블랙 테트라, 작은 거인, 블루 드래곤, 휘버스 등등... 이들 타 학교 그룹 사운드와 교류는 없었는지요. 특별히 친했던 그룹 사운드가 있었다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작은 거인의 김수철 씨와 휘버스의 이명훈 씨와 한두 번 식사를 한 적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의도적인 교류는 없었습니다. 공연장에서 마주치고 뒷풀이에서 만나는 정도였죠. 이는 산울림도 마찬가지고요.
Q: 항공대 활주로의 경우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해서 신촌을 들락거리면서 그곳의 언더그라운드와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말합니다. 샌드 페블스 경우 이와 유사하게 영향을 주고받은 음악 씬(scene)이 있었나요.
- 샌드 페블스는 캠퍼스가 수원이므로 지리적 제한 등과 멤버들의 프라이드와 패쇄성으로 그런 교류는 없었습니다. 아마 6기들은 대상 수상 후 여러 교류와 활동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잘 생각이 안 납니다. 저는 이후에는 산울림 활동과 이어져 있으므로...
Q: 2학년 때 샌드 페블스 활동을 한 뒤에도 후배들(''77 mbc 대학가요제' 참가 팀)의 '매니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즉, 3학년 이후에도 김창훈 님은 계속 샌드 페블스에 이래저래 관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것이 선배들의 보편적 정서였는지 아니면 김창훈 님이 특별했던 것인지요.
- 앞서 얘기했지만, 전통적으로 선배 중 하나가 후배들의 매니저를 맡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고 그때 대학가요제라는 것이 처음 열리게 되어 다른 때보다 여름 방학 때 더 열심히 하고 그랬던 겁니다. 지금도 아마 3학년 선배 중 한 사람이 2학년 후배들을 돌보아 주고 있을 겁니다. 사실 3학년이면 학업에 다시 열중해야 하는 시기인데... 어떻게 보면 마이너스가 될 수 있으나 그를 통하여 봉사와 섬김을 배우며 인생의 폭넓은 경험을 할 수 있는 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Q: 1975년 긴급조치 9호 발표 이후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지면서 모든 써클(동아리)을 학도호국단 산하에 두게 되는데, 샌드 페블스의 경우 이런 변화가 준 영향은 얼마나 어떻게 있었는지요.
- 저희 집단은 반항적, 이단적인 이미지가 강해서 별로 터치를 안 받았던 것으로 압니다. 학도 호국단 산하가 되었는지도 몰랐습니다.
Q: 대마초 파동이 당시 캠퍼스권 음악활동에 준 영향은 어떤 것이었는지요.
- 저는 개인적으로 접해본 적이 없어 뭐하고 말씀드리기 곤란하나, 우리 기수들의 경우 (대마초를 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저 마이티 같은 카드게임과 소주나 맥주 등의 모임을 가진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 서울대 서클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샌드 페블스의 대학 가요제 입상
Q: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샌드 페블스의 "나 어떡해"가 대상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김창완 님에 의하면 '산울림이 대학가요제 예심 때 무이(無異)라는 이름으로 "문 좀 열어줘"로 참가했는데 예심에서 1등(샌드 페블스가 2등)했는데 본인이 졸업생이라는 이유 때문에 못 나갔다'고 하셨습니다.
- 참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는 정확히 모릅니다. 산울림 데뷔 이후 당시 피디가 뒷이야기를 해준 것으로 기억합니다.
Q: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뒤 학교측의 대우가 달라진 게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 이단시했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되나, 학교 명성이 그런 쪽으로 희석되는 것에 대해서는 (학교측에서는)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기억됩니다. 하지만 이후 서울대 서클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계기가 없었다면 중도에 맥이 끊어졌을지도 모르죠.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 "나 어떡해"가 최초의 자작곡이라면, 1979년 발표된 샌드 페블스(화랑)의 독집 [달빛 속에서(저 새)/달려라]의 수록곡들은 1977년 하반기 이후 1978년경에 작곡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샌드 페블스는 3학년이 되면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이 기수는 아무래도 예외였던 것인지요.
- 대학가요제 이후에 작곡되었을 겁니다. 실제 6기가 대학가요제 이전에 활동할 때 자작곡에 대한 연주나 의논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부끄러워서 자심감이 없어서 내놓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Q: 샌드 페블스의 독집은 상업적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요. 산울림이 한창 인기를 높을 때라서 '기대감'을 가지고 제작했을 것 같은데. 관련해서 샌드 페블스의 멤버들도 이 앨범의 성과가 좋을 경우 프로로 진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모든 제작물은 기대를 갖고 기획되겠지요. 하지만 좋은 성과로 인한 프로 진출 여부는 낙관적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졸업 후 진로에 담보될 수 있는 어떠한 보상과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산울림의 경우도 '배고파서' 그만둔 것 아닙니까?
"그때의 목표는 평생 100장의 음반을 내는 것이었을 거예요.
그러다 보니 다산을 하게 되었을 겁니다" - 산울림 데뷔(군입대 전까지)
[데모 테이프/음반사]
Q: 프로로 활동하기로 마음먹은 때는 언제인지요? 데모 테이프를 만든 것은 프로로서 활동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 대학 시절의 음악 활동을 정리하는 '기념 음반'의 성격으로 음반을 내겠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김창훈 님의 경우는 어땠는지요.
- 프로라는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있을 것이고, 또한 사회적인 부정적 인식도 있었고.. 음악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은 별로 안한 것 같아요. 그저 만들어진 음악이 판으로 나온다는 신기함에 도취되었다고 할까요.
Q: 데모 테이프 제작은 언제, 어디서 녹음했는지요? 데모 테이프를 만드셨는데 "나 어떡해"는 데모 테이프에는 없었고, 음반보다 적은 곡이 수록되었으며, 집에 있는 JVC 포터블 카세트 레코더로 녹음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데모 테이프 제작에 대한 에피소드 같은 게 있으면 소개 부탁합니다. 혹시 현재 소장하고 계신가요.
- 소장하고 있는 것은 없고요. "나 어떡해"는 저희 형제의 개성을 대표하는 곡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같은 곡을 좋아했지요. "아니 벌써"보다도. 음반으로 나올 때도 우리 형제는 타이틀곡도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를 주장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녹음은 집의 툇마루나 방에서 했는데, 그렇게 심각하거나 특별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장난 같이, 같이 놀이를 한 것 같아요.
Q: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서 음반사들을 돌아다녔는데, OK 사인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OK 사인 받은 시기는 제1회 대학가요제(1977년 9월) 이전인지 이후인지 궁금합니다. 김창완 님에 의하면 여러 음반사를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음반사 전화번호를 보다가 가장 가까운 곳이 종로 2가 관철동에 있던 서라벌 레코드라서 그곳을 찾아간 것이라던데 맞는지요?
- 당연히 대학가요제 이후입니다. 형의 이야기가 맞을 겁니다.
그때는 형이 취직 이전이라서 시간 여유가 있었던 편이라 형이 그렇게 했을 거예요.
Q: 데뷔 음반 표지에 나오는 성음사, 서라벌, 그리고 뒤에 대성음반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정리가 힘듭니다. 김창훈 님이 알고 계신 것을 알려주시면 저희에게 좋은 추가 정보가 될 것입니다. 참고로 통상 '이흥주 사장'이라고 부르던데 이 분이 뒤에 대성음반 사장인 것은 알겠는데, 산울림 음반 나올 때도 '이흥주 사장'이었던 것인지요. 그리고 데뷔 음반에 한자로 이름이 적힌 성음사(成音社가 아니라 省音社)의 사장은 이흥주 씨가 아닌 것 같습니다.
- 지금에야 든 생각이지만, 당시 이흥주 씨가 아마 월급사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제대하여 산울림 활동이 재개하기 전에, 대성음반을 설립해서 오너(owner)가 된 것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 외의 사항은 잘 모릅니다.
Q: 산울림이 크게 부상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방기남 님, 주영철 님, 박영걸 님 등의 이름을 들었는데, 이 분들의 역할에 대한 김창훈 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방기남 님은 제작자, 주영철 님은 매니저, 그리고 박영걸 님은 공연 프로모터로 알고 있습니다만. 또 주위의 서포트와 관련해서 다른 그룹에 비해 산울림이 특별히 달랐던 점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해 주시면 좋겠네요.
- 부상에 도움을 준 사람은 한두 분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주변에 있던 분들의 도움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언더그라운드의 디제이들과 지방 유력 방송사의 프로듀서들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부산지역. 다른 그룹과 비교해서는 매니저가 매니지먼트를 하기에 좀 까다로왔다고 생각합니다. 가리는 게 많았으니까요. 밤무대는 못 선다, 다른 가수와 공연은 못한다, 단독 콘서트만 한다, 남의 곡은 안 한다 등등이었으니....
Q: 1977년 12월(1집 발매)부터 1979년 3~4월(김창훈, 김창익 님의 군입대)까지, 정규 1, 2, 3, 4, 5집, EP, 동요집 [개구장이], 영화음악 [내일 또 내일]까지 8장의 음반 녹음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많은 음반들을 만든 것은 군입대 전에 최대한 발표하기 위해서였습니까. 발표된 곡들은 대부분 공식 데뷔 전에 만들어 놓은 것인지요?
- 왜 그렇게 무리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날림이 되고 또한 유행은 변하는 건데... 어떤 객기와 자신감이 그렇게 표현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레코드사 입장에서는 원가 없는 장사가 되니 이를 방조한 면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렇게 하라면 절대 안 하겠지요. 어떻게 보면 지혜가 부족하고, 그저 의욕만 앞세운 결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때의 목표는 평생 100장의 음반을 내는 것이었을 거예요. 그러다 보니 다산을 하게 되었을 겁니다.
Q: 1-3집을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4집 이후의 음반들과는 사운드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 맞습니다. 1977-78년경에 다 만들어진 거니까요.
[악기 및 장비]
Q: 처음에 녹음하러 (1만원 짜리 악기들을 들고) 서울 스튜디오에 갔더니 스튜디오 관계자가 악기를 보고 황당해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김창완 님에 의하면, 1만원 짜리 기타는 필리핀 밴드가 쓰다가 두고 간 악기를 중고로 산 것이었고 이펙트는 퍼즈와 와와가 같이 달린 경남전자 제품이었으며, 스튜디오 관계자들 때문에 이대로는 안 되겠어서 이백천 씨를 통해 텔레캐스터 기타를 빌려서 다시 녹음실로 갔다고 합니다.
- 맞습니다. 형이 얘기한 대로입니다.
Q: 그렇다면 스튜디오에 처음 갔을 때 김창훈 님이 들고간 베이스 기타는 무엇이었는지요.
- '암페그(Ampeg)'라는 브랜드의 중고 베이스 기타였습니다. 그리고 국산을 사용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Q: 악기가 질적으로 달라진 시기는 언제인가요. 또 음반사에서 악기와 장비를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었나요.
- 제대 후에 당시 거액을 들여 악기들을 업그레이드했으며, 전적으로 회사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이래저래 저희 형제는 돈이 없었으므로 그럴 형편도 못되었지요.
[녹음]
Q: 1977년 12월에 나온 데뷔 앨범 [아니 벌써]는 서울 스튜디오에서 2채널로(일명 '오도아와세') 녹음했다고 들었습니다. 녹음기사는 정용원 님이구요. 맞는지요. 그리고 녹음이 멀티트랙으로 바뀐 것은 7집부터인지도 궁금합니다.
- 1집 때 2채널 스테레오 녹음이라, 지금 같으면 간단히 교정될 일을(예를 들어 한 판트가 틀리면) 3형제가 모두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편집의 기술이 굉장한 노하우였던 시절이었죠. 목이 쉬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데, 녹음실 비용 등을 생각하며 OK를 해야하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멀티트랙으로 녹음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7집부터일 겁니다.
Q: 한 파트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녹음해야 했다면 "그대는 이미 나" 같이 18분이 넘는 긴 곡의 경우는 어떻게 했는지요.
- 여러 군데 잘라서 편집했습니다. 참으로 긴 작업이었지요.
Q: 초창기 음반들을 들어보면 보컬과 베이스, 키보드가 강조되는 대신 기타는 뒤로 물러서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것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만든 사운드인지, 아니면 당시 녹음기술의 한계 때문인지요.
- 과감한 시도를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사운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이 있었지요. 우리 형제는 오디오 전문가는 아니니까 눈치보기에 바빴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운드가 아니었습니다. 악기의 문제, 연주 기술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파트별 음량조절, 특히 보컬 볼륨 처리 등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풋내기, 초보들이 주장하기에 한계가 있었지요.
Q: 사운드를 어떻게 잡고 싶다는 모델 같은 것이 있었는지요. 그런 모델로 어떻게 녹음해달라고 요구를 하기도 했는지요.
- 어떤 모델이 있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고. 하여튼 우리가 추구했던 '록'(그때는 그런 어휘가 대중화되지 않았지만..)과도 좀 다르고, 또 기존의 가요와 어느 정도 타협된 그런 사운드였다고 여겨집니다. 지금 깊이 생각해 보니, 더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Q: 1집의 성공 이후 음악에 대한 태도나 접근이 달라진 것이 있었는지요. 만약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이 표명되기 시작한 작품은 어느 것부터인가요. 즉 '대중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 대중성에 대한 고민보다는 작품성에 대한 고민이지요. 대중성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없습니다. 좀 더 창의적이고 스스로의 정서를 타인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작품성에 집착하지요.
[공연]
Q: 1979년 3~4월 김창훈, 김창익 님이 입대하기 전까지, 각 대학을 돌며 1달에 2차례 이상 공연을 하신 듯합니다.
- 대학 축제에 많이 다닌 것으로 기억됩니다. 라디오프로가 함께 하는...
Q: 산울림 첫 콘서트를 박영걸 님이 맡아서 진행했다고 들었는데요.
- 문화체육관 삼일절 공연일 겁니다. 입대하기 전 1979년 2월 28일, 3월 1일???
Q: 김창완 님에 의하면, 그 전에 DJ연합회장인 구자룡(구자형의 형)이 기획한 콘서트가 있었다는데 단독 콘서트였는지 게스트로 나간 것인지 기억을 못하시더군요.
혹시 이 콘서트에 대해 기억하신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 단독은 아니지만 저희가 주된 아티스트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나가지 않았을 거예요.
Q: 대학에서의 공연은 어떤 식이었나요?(몇 곡/청중의 반응) 동국대, 중앙대, 외대, 상명여대, 숙명여대, 고려대, 경기대, 경희대 등 상당히 많은 대학에서 공연했는데, 어디에서 공연한 게 가장 인상적이었는지요.
- 보통 라디오 방송과 엮어져서 출연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특별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악기가 마음에 안 든다던가, 사운드가 영 아니다 싶었던 불쾌한 기억이 납니다. 끝나고 '쪽팔려서' 어떻게 나가나 등등 염려도 있었지요.
Q: 산울림의 경우 자작곡 이외의 곡들은 연주하지 않았는지요. 어떤 기사에서 보니 "I'd Love to Change the World"를 매우 좋아했고 그 영향으로 만든 곡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 자작곡 외에는 안 했어요. 안 그러면 큰일 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방송]
Q: 방송 출연과 관련해 줄을 대주거나 도움을 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 아마 레코드사 사장과 매니저가 주로 처리한 것으로 압니다.
Q: 1979년 1월 TBC-TV <쇼는 즐거워>에 처음 출연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이후 어떤 프로그램에, 얼마나 자주 출연했는지요. 방송 출연의 느낌은 어땠습니까.
- 방송은 대부분 억지로 출연한 겁니다. 옷도 없고, 악기만 땀나게 나르고, 중노동이었거든요. 지금 그렇게 하라면 아무도 안 할 겁니다.
Q: 1978년 9월 TBC 가요대상 중창부문 수상, 1981년 12월 KBS 가요대상 수상 등 방송국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는데, 어땠습니까.
- 너무 기쁜 순간이었겠으나 그 상이 주는 의미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습니다.
그 이후에 변한 것이라고는 버스 타기 '쪽팔리고' 그런 불편만 생긴 게 아닌가 하는 기억이 납니다.
Q: 음반, 라이브, 방송 외에 연주한 곳은 어디인지요?
업소에 출연한 적은 없나요. 없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 없습니다. 우리는 술 먹는 대중 앞에서 공연하기 싫었어요.
그런 것은 음악이 아니라 유흥이라 생각했죠. 억만금을 주어도 우리는 안 했을 거예요. '우리는 유흥밴드가 아니다'라는 자존심,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군입대]
Q: 군대는 어디에서 복무하셨습니까.
- 육군본부 군악대에서 복무했습니다. 동생(김창익)은 그곳에서 드럼이 많이 늘었습니다. 저는 정체 상태에 있었고... 다만 그때 "독백"을 만들었습니다. 약 1년에 걸쳐 야간 보초를 서며 흥얼거렸죠.
Q: 입대하면서 산울림을 비롯한 음악활동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미래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습니다.
음악 활동이 중노동을 겸하는 것이었으니 별로 매력이 없었습니다. 정상에도 서 보았고...
20031010
→ 김창훈과의 인터뷰(2)로 계속(Coming soon!)
첫댓글 옛날에도 올린적이 있는데 다시읽으려니 찾기가 어려워서 또 퍼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다시 읽어도 감회가 새롭네요!
회상님 예쁜소녀 입니다 고맙습니다 산울림 다음에 회상님 ㅎㅎㅎ 다 ~ 잘될겁니다
산할배 그 눈빛의 의미는 뭐에요...?? ㅋㅋ
쪽팔리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