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과 예배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약성서 레위지파 사람들의 음악 체계를 성전 예배의 한 요소로서 설명하고 있다. 시편 150편과 같은 곳에서는 찬양을 권장하고 있다. 음악에 대한 구절은 회중 찬양에 대한 몇 가지로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왜 음악을 예배의 한 요소로 가지고 있는가, 어떤 음악을 사용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분명한 가르침은 어느 곳에도 없다. 교회역사에서도 음악의 역할에 대한 일치된 합의점은 없다. 문예부흥시절 이전에는 교회가 음악 발전의 중심지였다. 공식적인 음악 양식과 음보 기록법은 모두 수도원에서 개발되었다. 중세에는 음악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다. "교회안에서 인간의 경험을 다채롭게 하는 것으로서 음악은 가꾸어졌다." 그러나 종교 개혁 때부터 음악은 교회 밖에서도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개신교 교회 내에서도 음악적인 양식은 아주 다양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캘빈은 성서 안에서 음악에 대한 기록이 적은 것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특별히 허락하지 않는 한, 음악을 어떤 형태로든지 사용하지 말라." 루터는 정반대의 견해를 가졌다. "이 문제는 '아디아포라(adiaphora)(성경에 특별한 가르침이 없기에 각자의 양식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다. 각자에게 적합한 형태로 사용하라.' 종교 개혁 직후에는 이 문제에 대한 각각의 신념과 실천 형태로,
1)음악이 전면적인 배제: 초기 퀘이커 교도들, 2)악기 없이 시편의 회중 찬양만을 극히 제한하게 허용하는 것: 정통 캘빈주의, 3)오르간과 성가대의 수용: 루터 교회와 영국 성공회 등이 있었다. 음악적인 수준과 역략에 대해서도 객관적이고 일관된 기준은 없었다. 이제 실용적인 면에서 접근하여 음악이 자기 기능을 하게 되는 다섯 가지 방식을 살펴 보자.34)
1.참여로서의 음악
교회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의 하나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경꾼으로서가 아니고 출연자가 된다는 것이다. 회중 음악에 참영하는 것은 예배 드리는 사람이 진저으로라는 말 그대로 예배를 드리는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의미는 "강화"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즉 "사랑한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 강화의 과정에 밀접하게 관계된 것을 배우고 기억하는 것이다.
2.주석으로서의 음악
흔히 교회음악은 가사와 연관되어 있다. 가사 전달에 너무 무신경하다면 음악이 가지는 주석적인 기능이 훼손되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가사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음이나 음의 흐름이 손상될 수 있다. 어떤 사상을 표현해 주는 말과 그것을 강조해 줄 수 있는 음악은 서로 결합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의미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차원의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음악적인 구성이 알맞게 조정되었을 때 가사가 더욱 잘 이해된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음악가는 설교자와 함께 말씀을 명확하고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하는 작업에 동참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음악으로 표현되는 그 내용에 주의를 집중하려 할 때, 연주상의 문제가 많으면 듣는 이들의 집중력은 흐트러지고 만다.
3.권면으로서의 음악
이 기능은 독창으로 된 성악곡이나 합창곡 중 몇 가지에만 한정된다. 대중 부흥집회운동 시절에 만들어진 이 곡들은 개인적인 신앙 간증을 표현하여 듣는 이들도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도록 권면하는 내용이다. 이 때에 독창자나 성가대는 실제로 설교자나 부흥사의 역할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음악의 역할은 메시지를 호소하는 것이 된다.
4.분위기로서의 음악
예배에서 음악의 바람직한 기능은 경외와 기쁨의 감정을 우러나게 하는 데 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기독교적인 예배를 특징지워 준다고 할 수 있는 태도의 가장 일반적인 것은 경건함이다. 가장 훌륭한 교회음악이란 교회만을 위한 것이며 그 밖의 다른 요소는 전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음악은 속세의 음악 같이 감각적이고 감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중찬양 시간에 어떤 감정을 연출하려는 노력을 흔히 볼 수 있다. 찬송가 중 많은 부분에 어떻게 노래하라는 말들이 들어 있다. "헌신적으로", "경건하게", "기쁨으로" 같은 것들이다. 이런 분위기나 감정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적합한 것들이다. 특정한 감정이나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노력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분의 게시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선행되어서는 안된다. 복음주의 부흥사의 설교에서도 개인적인 느낌이나 개인적인 간중이 특별히 강조된 기록이 좀처럼 없다는 점도 유의해 볼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사엽에 대해 강조하였고 믿음과 확신, 헌신에 대해 설교하였다.
에릭 러틀리는 '교회 음악과 신학'이라는 책에서 그 같은 낭만주의적 성격을 언급하여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더 사랑하는 죄"라고 하였다. 예수님 그 분 자체보다도 연모의 감정이라는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는 경향이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기쁨의 감정을 더 바라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하면 음악은 우리에게 끝없이 소재를 제공해 준다. 말씀이나 행동보다 음악이 사랑, 평화, 기쁨, 경외의 감정을 더 잘 전해 준다. 그래서 많은 경우 우리를 현혹시켜 그것이 선교의 결과가 아니라 선교의 목표로 생각하게 만든다.
회중이 어떤 감정을 갖도록 은밀히 조작하려는 노력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선교,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의식적으로 반응하게 하고 자유 의사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성령이 사람들의 감정을 조작하고, 조작된 감정을 자신의 감정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본질적인 면에서 음악을 그런 용도에 사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 영향력을 쥐고 어떤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된다. 감정이나 정서는 추구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와 이성적으로 만나야 한다. 음악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음악이 듣는 이들에게 어떠한 효과를 줄 것인가라는 차원에서 음악을 선택하고, 해석하고, 연주하는 등의 의심스러운 경향이 나타날 때, 그 때가 음악 지도자가 주의해야 할 때다.
5.계시로서의 음악
계시가 된다는 의미는 잠재되어 있는 보다 깊은 뜻을 전달한다는 것으로 신학적 교리를 초월하는 인식과 뜻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말이나 글로는 전달될 수 없는 뜻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제한받을 수 없다. 예술을 통해, 특히 음악을 통해 초월적인 것, 말할 수 없는 것, 이해될 수 없는 것과 맞부딪치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혼에게 계시를 줄 때와 같다.35)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