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바로 알기
한상권(역사정의실천연대 운영위원장)/2011.11.30.
여는 글
한국 근현대사에서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만큼 논쟁적인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살아생전에는 추종자들로부터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위대한 혁명투사이자 애국자이며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를 방지한 신념의 정치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반면에 비판세력들로부터는 아집과 독선에 가득 찬 분파주의자, 권모술수에 능한 궁정정치적인 음모가, 찬미반공적인 냉전적 인물로서 민족분단의 장본인, 그리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개명전제군주적인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방송(KBS)이 지난 9월 28일(수)부터 9월 30일(금)까지 3회 연속으로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이승만 편"(이승만 특집)이라는 프로를 방영하여, 이승만을 미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이에 대해 독립운동단체, 4월혁명단체 등 101개 단체로 구성된 '친일ㆍ독재 찬양방송 저지 비상대책위원회'는 9월 29일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기는커녕 기획의도가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짜깁기 수준의 다큐"라며 "차라리 3년 전 KBS '한국사전' 이승만 2부작을 재방송하는 것이 낫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2008년 KBS '한국사전'이 방송했던 '이승만 2부작'과 비교했을 때 내용이 극도로 빈약하고, 이승만의 부정적 요소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평가를 유보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지적이다.
KBS의 이승만 미화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보수언론, 뉴라이트 등 보수진영이 진행해온 ‘역사 흔들기’의 연장선에 있다. 이들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서울 남산 자락에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동상을 세우고, 교과서에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려 하고 있다. 이런 작업들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보수진영의 노림수는 분명하다. 자신들의 뿌리인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고,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정당화함으로써 결국은 자신들의 기득권 체제를 지속·강화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태는 우리 사회가 피 흘리며 쟁취해 키워온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행위이자 헌법정신 위배가 아닐 수 없다. 우리 헌법이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라고 규정한 것은 이승만이 ‘반민주·반민족적 독재자’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이승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한국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출발점이 된다. 여기서는 그가 저질렀던 무수한 오류와 실정 가운데 (1)일제강점기에 국제연맹하의 위임통치를 청원하면서 무력투쟁을 배격하였으며 (2)해방 후에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민족분단에 책임이 있으며 (3)국민보도연맹,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민간인학살을 자행하였으며 (4)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등으로 헌정을 유린한 점 등을 지적하고자 한다.
1.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고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는다”(신채호)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04년 11월, 그리고 최종적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때는 1910년 6월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는 일본의 한국병합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1910년 9월에 귀국한 이승만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교육부 간사를 맡으면서 전도 및 교육사업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소위 105인 사건으로 불리는 기독교계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몰아치자 이승만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이승만을 하와이로 불어들인 것은 그의 오랜 동지였던 박용만(1881-1928)이었다.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태생으로 1904년 보안회에 입회하여 일본이 한국주권침탈의 일환으로 황무지 개척권을 강제로 요구해오자 항거하는 운동에 참여, 한성감옥에 투옥됐는데 그 감옥 안에서 이승만과 운명적으로 만나 결의형제가 되었다. 1904년 출옥한 박용만은 이승만과 동일 시점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1906년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고 1909년에 네브라스카의 커니 농장(Kearney農場)에서 독립운동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였다. 1911년 미주에서 설립된 재미동포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 때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 『군인수지(軍人須知)』라는 책을 저술, 발간하였다.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로 언론활동을 폈다. 1914년에는 농장을 임대하여 동포의 청년들이 공동으로 경작하게 하였으며 항일무장 독립운동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박용만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한다는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3년 초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무력항쟁이나 의열투쟁의 부질없음을 공박하고 나섰다. 105인 사건을 다룬 『한국교회 핍박』이라는 책에서 이승만은 “한국인들은 불평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혈기지용(血氣之勇)을 억누르고 형편과 사정을 살펴 기회를 기다리면서 내로는 교육과 교화에 힘쓰고 외로는 서양인에게 우리의 뜻을 널이 알려 동정을 얻게 되면 순풍을 얻어 돛단 것같이 우리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주장은 미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정세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 따라서 미일경쟁이 현실화될 때까지 한국인은 참고 기다리면서 실력양성과 선전활동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사실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이승만에게는 한국의 독립전망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 없었다. 이 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1919년 국내의 3.1운동 발발과 거의 동시에 미주 지역에서 제기되었던 국제연맹하의 위임통치청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전쟁에 대한 책임과 유럽 각국의 영토 조정, 전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 등을 협의하기 위해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이승만은 “당분간은 한국을 국제 연맹 통치 밑에 둘 것을 바랍니다.”라는 요청을 담은 국제연맹위임통치 청원문을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그런데 파리강화회의에서 고안된 위임통치제도란 식민지 재분할에 따른 승전국 열강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약소민족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제도적 장치로서, 실제로는 특정 수탁국의 식민통치와 하등 바를 바 없었다. 그것은 아프리카와 태평양지역에 퍼져 있던 독일의 식민지를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라는 형식을 빌어 승전국 열강이 분할지배 하고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분명해진다. 이승만은 한국인의 자력에 의한 독립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차선의 해결책으로서 미국의 잠정적인 한국 통치를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임시정부 내 독립전쟁론자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특히 단재 신채호(1880-1836)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고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는다.”며 분개했다.
2.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1925.3.11. 임시정부 의정원)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이 윌슨에게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임시정부는 내부분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북경을 중심으로 한 신숙, 신채호 등 독립전쟁파는 군사통일주비회를 열고 이승만을 불신임하면서 임시정부활동과 독립운동 전체의 방향전환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장하였다.
게다가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헌법의 규정(제16조: 대통령은 의정원의 허락 없이 국경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을 어기면서 임시대통령 재임기간(1919-1925) 6년 중 상해에는 6개월밖에 거주하지 않고 대부분의 시기를 외교독립론을 내세우며 미국에 주재하면서 구미위원부를 설치, 임정대표로 행세하며 서방 지도층과의 면담 등 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당시의 임시정부는 국내에서의 송금악화로 고전하던 재정의 상당부분을 하와이 교포들의 세금 및 성금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승만은 임정대표 자격으로 구미위원부로 하여금 세금징수 및 송금을 맡게 하고 징수되는 자금의 대부분을 임시대통령 외교활동비로 충당하였다.
마침내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의 위실실추 재정실책 등을 이유로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불신임을 결의하였고, 그와 함께 이승만에게 수차례에 걸쳐 상해로 와서 정무를 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에 응하지 않자, 마침내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11일에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직에서 탄핵하고 후임으로 박은식(1859-1925)을 선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遠洋一隅)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刊布)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킨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公決)을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 계통 운운'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이다.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에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 있는 충용(忠勇)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임시정부는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을 단행하는 것과 동시에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공포하였는데, 이때 임시정부에서 내건 이유는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구미위원부는 국문회의의 결의나 임시의정원의 동의절차를 거지지 않은 불법적 기관으로서 이승만의 독단에 의하여 설치된 것이다.
둘째, 구미위원부는 미주한인사회의 재정권을 장악하여 정부의 재정수입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집행내역조차 제대로 보고한 바 없다.
셋째, 구미위원부는 그 본래의 임무인 외교와 선전사업에서 하등의 실효도 거두지 못하였고 또 그 활동상황에 대하여 일편의 보고도 없었다.
넷째, 구미위원부는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을 파괴하고 인심을 분열케 하는 등 당파적 행동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법통을 내세워 상해임시정부의 결정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구미위원부의 명맥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의 임시정부에 대한 송금을 중단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을 들어 임시의정원 결의를 불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해방 때까지 이승만은 여전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President)로 행세하였으나 사실상 임시정부는 곧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 주석제 등으로 정부조직 형태를 바꾸어 갔다.
3.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하여…”(1946.6.3.이승만)
해방 후 이승만의 귀국은 글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다. 물론,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와 이승만과의 충분한 교감이 있은 직후의 귀국이라 이상할 것은 없었으나 당시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라디오를 통해 독립을 위해 미국에서 열심히 활동한 애국자로 선전되어 있었기에 국민들이 이승만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에 충분했다. 독립운동가로 귀국한 이승만에게 손을 내민 세력들은 친일파들이었다.
친일파들은 1920년대를 거치면서 실력양성론, 민족개조론, 자치론 등의 개량주의 독립운동에 치중하다가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일제의 폭압 아래 사업가 등으로 변신하여 학병지원 독려연설 등을 통해 민족을 배반하고 그 대신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해방 후 전국 각지의 감옥에서 풀려나온 독립투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건국준비위원회가 당시 민중들의 기본적 요구인 친일반역자 처단과 토지개혁 등을 내세워 치안과 행정업무를 장악하게 되자, 이를 숨죽이면서 지켜보면서 기껏해야 “해방의 은인인 연합군이 진주하지도 않았고, 중경에 이미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는데 국내에서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만 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일파들은 9월 8일 미국이 진주하여 한반도에 친미반공국가를 수립하려는데 힘입어 적극적으로 미군정과 손잡고 단독정부 수립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부족한 정통성 즉 독립운동에서의 선명성을 보완해줄 수 있는 인물이나 집단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국가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일차적 자격을 갖춘 세력은 말할 것도 없이 독립투쟁을 주도했던 세력임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립투쟁 경력이 없거나 오히려 제국주의 세력에 기생했던 인사들이 외세를 업거나 하여 정치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독립투쟁의 정통성이란 겉옷을 입혀 줄 인물이나 집단이었다.
친일파의 결집체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임시정부에 대한 절대지지표명인 ‘임정봉대론’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미군정은 하루속히 물러가야 할 두 손님 중의 하나였으며, 한민당계 인사들은 청산되어야 할 친일잔재였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는 귀국 직후부터 미군정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한민당이 제공한 각종 편의와 자금지원 등도 거절하였다. 이와 달리 이승만은 귀국과 함께 자신에게 접근한 한민당 인사들과 적극 손을 잡고 좌익이나 임시정부계열이 불참한 가운데 자신의 직계와 한민당을 묶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단독정부 수립의 길을 걸어갔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남한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전북 정읍에서 분단정부를 수립할 의사를 밝혔다.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
먼저 남한만으로 정부를 세우고, 세계 여론에 호소하여 소련을 철퇴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룬다는 단독정부론(단정론)을 피력한 것이다. 이승만의 단정론은 반공이데올로기와 친일세력의 물리적 기반 위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한반도 분할점령이 반공이데올로기 형성의 계기로 작용하였다면, 단정수립은 반공이데올로기가 정착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1950년대 미국의 대한정책은 소련과 중국을 봉쇄하는 전진기지로 한국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에게는 남한이 철저한 반공국가로서 존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였다. 반공이데올로기는 한국전쟁 이후 전 사회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으며 뿌리를 내렸고 그로 인해 분단구조가 내재화 되었다.
4. “억울함은 우리 세대에 해결해야 한다”(1993.강화양민학살희생자유족회)
외국의 한국 현대사 전문학자들이 부르는 한국전쟁의 또 다른 이름은 ‘잊혀진 전쟁’이다. 1․2차 세계대전을 빼고는 지난 200년 중 가장 치열했던 전쟁의 하나로 꼽히지만 그 실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분단국가를 태생시켰고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을 낳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민간인 학살’은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숨겨진 죽음’으로 지금까지 잊혀져 왔다. 민간인 학살에는 교전 중의 살인행위를 제외한 모든 살인행위가 포함된다. 민간인 학살이 ‘잊혀진 죽음’이 된 까닭에 대해, ‘코리아 국제 전범재판’ 수석 검사 램지 클라크 전 미국법무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왜 미국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주목받지 못했는지 아십니까? 한국전쟁 때 죄 없는 민간인을 조직적·의도적으로 살육한 그들이 역사를 쓰고, 교육을 하고, 미디어를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대통령은 “국군이 북한 괴뢰군을 잘 막고 있으니 서울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할 것”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정작 자신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해 버렸다. 힘의 공백을 한국전쟁에 신속한 개입을 결정한 미군이 메우었다. 7월 1일 미지상군 선발대가 한반도에 도착한 이래 미군의 전면적인 배치가 이루어졌다. 그러자 7월 14일 이승만대통령은 대전에서 협약을 맺고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이양하였다. 이후 미군은 한국전쟁의 한 당사자로서 최고의 지위와 권한을 갖게 되었다. 작전권을 포함한 모든 군사적 권한을 미군에게 양도한 뒤, 이승만 정부가 취한 행동은 경찰 및 CIC(특무대)를 중심으로 제 2전선에서 정치적 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초래되었다. 그 구체적인 실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가)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
1949년 10월 이승만정부는 좌익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각 지역 시, 군, 읍, 면 단위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다. 보도연맹이란 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단체이다. 정부는 보도연맹 창설 당시에는 과거의 좌익가담 행위를 일체 불문에 붙이고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지도하고 계도해 나가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도연맹 창설 당시 양식배급과 여행특혜 등을 준다고 속여 가입을 유도하였기에 좌익과는 전혀 무관한 주민까지 가입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정부와 경찰은 한국전쟁 중 초기 후퇴과정에서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인사들과 전향한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하여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집단총살하고, 이후 유족들에게는 연좌제의 굴레를 씌워 입을 막았다. 보도연맹사건은 한국전쟁과정에서 벌어진 최초의 집단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다. 희생자유족들은 1960년 민주당정부시절 합동위령제를 지내며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5.16 군사구테타 이후 억울함을 호소하는 유족들은 구속되었으며 합동묘소는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했다.
(나) 국민방위군사건
이승만정부에 의한 두 번째 희생은 1950년 12월 말 국군이 서울에서 재 철수(1.4후퇴)하면서 발생하였다. 이승만정부는 재 철수가 불가피해지자 100만 명에 달하는 청장년들을 남쪽으로 호송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50년 12월 15일 국민방위군설치법 공포되어,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청장년 중 군경과 공무원 및 학생을 제외한 10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국민방위군에 편입되었다. 청년들은 12월 중순경 경남북 일대 51곳에 설치된 교육대를 향해 도보행군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행군도중 동사자, 아사자, 낙오자가 속출하였다. 국민방위군 대열은 ‘죽음의 대열’ ‘해골의 대열’로 불리웠다. 이는 부패한 이승만 정권이 전쟁과정 중에 저지른 양민학살사건이었다.
(다) 빨갱이토벌작전
이승만정부에 의한 제 2전선에서의 학살의 전형은 전선이 38선 지역에서 교차된 1951년 2월 이후에 발생하였다. 빨갱이 토벌작전으로 명명된 남한 내부의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학살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51년 2월 11일에 있었던 거창양민학살 사건이다. 경상남도 거창, 함양, 산청 등은 빨치산의 활동 지역과 가까웠고 낙동강 공방전 때의 전선지역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빨치산과 내통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창군 신원면 600여 명을 비롯하여 1951년 2월경 그 지역 주민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관심이 대두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4.19혁명 직후였다. 4.19혁명 직후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피학살자 유가족의 조직, 조봉암과 김구 사인 규명을 위한 조직 등 이승만 정권 하에서 반공의 명분하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명예회복과 사실규명을 위한 조직과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4․19혁명 직후 국회 ‘양민학살조사특위는 경남 거창 등 42개 지역에서 8715명이 학살당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양민학살 진상조사 활동은 5.16 군사구테타 이후 희생자 가족들이 좌익=빨갱이로 몰려 오랜 기간 동안 중지되었다. 그러다가 군사독재정권이 끝나는 1993년부터 강화도를 시작으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강화양민학살희생자유족회’는 “억울함은 우리 세대에 해결해야 한다”라며 민간인 학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발 벗고 나섰으며, 1993년부터 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5.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 피기를 바라는 것보다 어렵다”(1950년대 영국 언론)
(1)발췌개헌(拔萃改憲:1952.7.4.)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번째의 헌법 개정은 1952년 7월 7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이루어졌다. 1952년 6월의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대통령은 야당이 다수당이 되어 국회를 통한 대통령 간선제를 통해서는 자신의 재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로의 개헌 필요성을 역설한 뒤, 같은 해 11월 28일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1952년 1월 18일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대한 표결은 찬성 14, 반대 143,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국회 내 지지 세력이 극히 미약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승만은 원외 자유당을 비롯한 국회 외부의 세력을 동원,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 등의 관제 데모를 전개하여 국회에 압력을 넣었다. 5월 15일 이래 정부에 의해 동원된 민족자결단·백골단 등의 폭력조직을 비롯한 관제 데모대가 국회의원소환·국회해산 등을 연발하며 연일 피난수도인 부산거리를 누볐다. 5월 25일에는 경상북도·전라남도·전라북도 일대에 공비토벌 명목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 다음날인 26일에는 50여 명의 국회의원이 탄 통근버스가 헌병대에 강제 연행되었고, 국제공산당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10명의 국회의원이 체포되었다. 이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정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제 등을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이 제출되었다.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했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상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었다. 국회의원들이 경찰의 연행에 의하여 동원되어 며칠씩 연금되는 테러 속에서, 7월 4일 밤 국회는 기립표결로 찬성 163,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승만은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같은 해 8월 5일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발췌개헌은 (1)국회공고와 독회절차가 생략되었고 (2)군대가 포위한 상태에서 자유토론과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었으며 (3)폭력적인 수단으로 인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저해 기립 투표하였고 (4)대통령 직선, 국무위원 불신임제를 규정하여 체계정당성이 상실되었다는 점에서 위헌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2)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 1954.11.27.)
1952년의 발췌개헌을 통하여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함으로써, 이 해 8월 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의 중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중임하기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철폐하도록 헌법을 또 다시 개정하려 하였다. 자유당은 무소속의 포섭과 조별투표지시 등 찬성공작을 벌인 후 1954년 11월 27일 비밀투표를 실시하였다. 표결결과는 재적인원 203명, 재석인원 202명,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였다. 이것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의결정족수인 재적 인원 203명의 3분의 2인 136표에 1표가 부족한 135표 찬성이므로 부결된 것이어서 당시 사회자인 부의장이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자유당간부회는 “재적인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인데, 영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이 되지 못하여 인격으로 취급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하면 135이고, 따라서 의결 정족수는 135이기 때문에 헌법개정안은 가결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 주장을 11월 28일의 자유당의원총회에서 채택하고, 다음날 야당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번복가결동의안을 상정, 통과시켰다. 국회는 곧바로 개정헌법을 정부로 이송하고 정부가 당일 공포함으로써 이 헌법은 효력을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 헌법 개정 역시 1차 개정헌법인 발췌개헌과 마찬가지로 위헌(違憲)이었다. 다음 근거에서 법리(法理)에 부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첫째, 의결정족수가 미달인데 가결하였다. 의결 정족수가 숫자상 135.333……이므로 이것은 하나를 올려 136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인데, 사사오입의 억지 논리를 전개, 의결 정족수가 135라고 해석하여 부결된 개정안을 가결로 한 것은 법리상 어긋난다. 이 때문에 ‘사사오입개헌’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앉게 되었다.
둘째, 부결선언사항을 가결로 번복하였다. 개헌안의 표결 결과에 대한 의장 또는 사회자의 의사 표시가 취소 또는 번복되는 것은 상당히 타당성 있는 근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사사오입 개헌에는 그와 같은 타당한 근거 없이 행하여져 법 이론상 맞지 않는다.
셋째,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제한을 적용하지 않도록 한 것은 평등원칙에 위반된다.
위헌적인 사사오입 개헌으로 출마가 가능하여진 이승만은 195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장기집권의 소원을 성취하였다. 이 개헌은 우리나라 정치사에 또 하나의 오점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으로 헌법 개정이 집권자에게 재집권이나 정권 연장의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이는 뒷날 박정희가 3선개헌을 하고 유신헌법을 제정하는 나쁜 선례가 되었다.
6.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1960.4.26.김수영)
이승만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리고 1960년 3월 15일 제 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이 1960년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시켰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였으나, 결국 4월 26일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퇴성명서를 발표하고 경무대를 나와 혜화동의 이화장으로 가는 날 아침에 시인 김수영은 혁명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 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 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 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안 붙은 곳이 없는
그 놈의 점잖은 얼굴의 사진을
동회란 동회에서 시청이란 시청에서
회사란 회사에서
××단체에서 ○○협회에서
하물며는 술집에서 음식점에서 양화점에서
무역상에서 가솔린 스탠드에서
책방에서 학교에서 전국의 국민학교란 국민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였느니
썩은 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너도 나도 누나도 언니도 어머니도
철수도 용식이도 미스터 강도 유중사도
강중령도 그놈의 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무서워서 편리해서 살기 위해서
빨갱이라고 할까 보아 무서워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편리해서
가련한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신주처럼 모셔놓던 의젓한 얼굴의
그 놈의 속을 창자 밑까지도 다 알고는 있었으나
타성같이 습관같이
그저그저 쉬쉬하면서
할 말도 다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그저그저 걸어만 두었던
흉악한 그놈의 사진을
오늘은 서슴지 않고 떼어놓아야 할 날이다
밑씻개로 하자
이번에는 우리가 의젓하게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
허허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
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
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
그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자유는 이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아무도 나무랄 사람은 없다
아무도 붙들어갈 사람은 없다
군대란 군대에서 장학사의 집에서
관공리의 집에서 경찰의 집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군대의 위병실(衛兵室)에서 사단장실에서 정훈감실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교육가들의 사무실에서
4.19 후의 경찰서에서 파출소에서
민중의 벗인 파출소에서
협잡을 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는
관공리의 집에서
역이란 역에서
아아 그놈의 사진을 떼어 없애야 한다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면서
영숙아 기환아 천석아 준이야 만용아
프레지덴트 김 미스 리
정순이 박군 정식이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면서
극악무도한 소름이 더덕더덕 끼치는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 ―
<1960. 4. 26. 이른 아침>
김수영은 다시 말했다. 민주주의는 이제 상식이 됐다고, 자유는 이제 상식이 됐다고. 그리고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고, 아무도 잡아갈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됐다고 외쳤다. 그리고 혁명이 4개월 정도 지났을 때 그는 ‘가다오 나가다오’라는 시를 통해 미국과 소련에게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미국인’도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가다오 가다오”라고 마음껏 외쳤다.
참고한 글
고정휴, 「이승만 외교독립론의 실상」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역사비평사, 1993
서중석, 「이승만과 북진통일-1950년대 극우반공독재의 해부-」 『역사비평』 1995 여름
정용욱, 「이승만 정권·자유당·민주당」 『한국역사입문』 3,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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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양심수후원회 소식지 10월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