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과연 워싱턴문학의 변방인가
권대근
(대신대학원대 교수, 문학평론가)
이영묵 소설가의 발제 <워싱턴은 한국문학의 변방인가>, 잘 들었습니다. 지명토론을 맡은 저는 한국의 부산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권대근입니다.
발제문은 ‘변방’의 의미를 두 가지 갈래로 규명하고 있습니다. 발제는 더 나아가 ‘하지만 워싱턴을 중심으로 한 우리는 디아스포라 문학이 아닐 것이다’라고 언명하면서 결론적으로 선생님은 워싱턴을 중심에 놓고 한국을 변방으로 위치지우고 있습니다. 이런 역설적인 언설은 현대적 의미의 해체적 관점에 따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관점에 따라 모든 것은 입체적 양상을 갖게 되니까요. 소설 분야에 한정되어 있지만 폭넓고 치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미국 워싱턴 내 한국문학의 위상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이영묵 선생님의 발제는 매우 훌륭한 결과물이라 생각하며, 경의를 표합니다.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하자,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는,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은 한국문학이 비로소 ‘한국어로 쓴 한국문학"의 좁은 틀을 벗고 세계문학이란 보편적인 흐름에 진입했다는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면서, 연세대 국문과 정과리 교수의 코멘트, “1990년대 초반부터 이문열·황석영 등의 작품을 영어와 불어로 번역하면서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의 문을 두드려 왔다”며 “이제 한국문학이 변방의 문학이 아니라 세계문학의 일원이자 개성적인 세계문학으로 읽혀야 하는 시기가 왔고 한강의 수상은 그 신호”라고 한 의미 부여에 따라, <변방의 한국문학, 세계문학에 입장>하다란 타이틀로 세계문학의 바운드리 속에서 한국문학을 변방문학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어 “‘채식주의자"는 탐미주의라는 욕망과 욕망 자체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채식을 전기의 양극처럼 대비해 엄청난 밀도를 만들어낸 작품”이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에 몰입했고 그것이 한국문학의 특수성을 깼다.” 아울러 “한강 개인의 성공이라기보다 한국문학이 지난 25년간 세계문학의 문을 두드려온 결과이며 이번 수상이 다른 한국작가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정 교수의 기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국대 권영민 석좌교수도, 소설가 한강 씨의 ‘채식주의자’가 2016년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하면서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 출판이 연일 화제가 되었다. 좋은 작품이 훌륭한 번역을 통해 세계무대에서 그 수준을 당당하게 평가받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문학 작품의 해외 번역 출판 자체가 대부분 지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임을 생각한다면, 한국문학이 여전히 세계문학의 변방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번역만 잘되면 금방 엄청난 독자가 밀려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서울에서 사는 또는 활동하는 사람들, 서울에서 나오는 잡지사 편집진, 서울 소재 문예지로 등단한 사람들이 간혹 부산이나 대구문단을 지방문단, 부산이나 대구에서 나오는 문예지를 지방지 등으로 폄하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저는 이런 서울 중심주의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는 편입니다. 중앙문단, 지방문단으로 가르는 이분법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울지방경찰청, 부산지방경찰청이라고 부르는 사실을 적시하며, 서울문단 부산문단이라 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서울이 아닌 지역을 지방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반드시 타파되어야 할 이분법적 논리로서 타자를 억압하는 중심주의논리입니다. <중앙문단>과 <지방문단>, <중앙지>, <지방지>가 섞여 쓰여지고 있는 현실에서 앞으로는 이런 차별적 개념은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의 백색신화에 의하면, 동양은 비합리성이 지배하는 미개한 영역으로 서양에 비해 열등하다는 이분법 하에서 서양에 대한 타자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근대성에 기반한 이러한 모더니즘적 이분법은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다른 것을 억압하여, 상대를 타자화하면서, 주체의 우월성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감성보다 이성이, 여성보다 남성이, 흑인보다 백인이, 동양보다 서양이, 노예보다 주인이 우월하다는 차별의식은 이성중심주의에서 비롯합니다. 보시다시피 이분법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분법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갖게 합니다. 그것은 편견의 대상을 고통에 빠뜨립니다. 즉 이분법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억압과 탄압을 낳습니다.
그런데 발제자는 워싱턴을 중심에 두고 한국문학을 변방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워싱턴을 중심에 놓고, 한국문단을 타자화하면서, 한국에서 문학하는 사람을 고통에 빠트리려고 합니다. 이런 대담한 호기를 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역으로 묻겠습니다. 한국은 정말로 워싱턴문학의 변방입니까?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저작권은 권대근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