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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 [ 11회 ~18회]
11, 동아시아 최강 기병국가 고구려의 몰락은 초원제국 돌궐이 멸망했기 때문
1. 유라시아지역에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한 돌궐
흉노는 유라시아 대초원지역에서 기마유목민이 건설한 최초의 스텝제국이었으며 기마유목국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흉노는 유라시아대륙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겼으나 한나라와 쟁패하는 가운데 분열되면서 유목민 선비에 패배해 역사에서 사라졌다(151년).
선비족은 몽골고원 일대를 장악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되어 중국의 화북지방으로 남하하여 5호16국 시대를 열게 됐다(304년). 선비의 남하로 생긴 공백을 틈타 몽골계 유연이 몽골고원을 차지하고 150년 가까이 지배했으나 또 다른 유목민 튀르크계 돌궐에 멸망당했다(330~555).
흉노의 후예로 알려진 튀르크족에서「부민(Bumin)」카간이란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돌궐을 건국(552년)했으며 나라의 정식 명칭은 Kok Turk인데, 이는‘하늘의 신성한 튀르크’란 뜻이다. 부민카간을 이은「무한(Mukhan)」카간(553-572)은 최고 전성시대를 열었는데, 돌궐비문은 그에 대해“사방에 군대를 보내 모든 종족을 복속시키고,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릎을 가진 자는 무릎을 꿇게 하였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그의 장례식에는 중국, 티베트, 비잔틴, 유연, 거란, 고구려 등에서 사신이 왔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돌궐은 유라시아지역 동서·남북에 걸쳐 건설된 최초의 대제국으로 최대 영토가 1,000만㎢를 넘었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당나라와 쟁패하면서 역사의 중심에 등장했다. 그러나 돌궐은 초원제국의 분열이라는 역사상 전례를 벗어나지 못하고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돌궐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 서돌궐로 분열됐다(582년).
둘로 나뉜 돌궐은 국력이 쇠잔해지면서 동돌궐은 630년, 서돌궐은 651년에 각각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50년의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당에 대해 꾸준히 독립투쟁을 전개했고, 마침내 682년「쿠틀룩」이란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 거의 완전하게 돌궐을 재건하여 후돌궐시대를 열었다.
후돌궐은 720년경「빌게」카간 때 최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이시기에 세워진‘오르혼비문’은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사의 기념비적인 유물이다. 빌게카간 사후 급속히 약화된 후돌궐은 745년 위구르·당·티베트의 협공을 받아 멸망했다.
동돌궐에 속했던 유목민족은 전통을 유지했으나 불교의 영향으로 불교화했고 이후 원의 지배하에 들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서돌궐은 초원지역에서 유목과 오아시스 농경생활을 병행하다가 압바스 왕조의 지배하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일부 세력은 터키 지역으로 계속 서진했다.
이들 서돌궐세력은 960년경 셀주크 장군의 지휘로 실크로드를 따라 부하라·사마르칸트로 이주했고, 1037년 토그릴이 셀주크튀르크를 건국했다(1037~1194). 서진을 계속한 셀주크튀르크 일족은 아나톨리아 지역(터키)에서 비잔틴 제국을 격파하고 룸셀주크를 건국했다(1077년). 룸셀주크 세력약화 후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오스만1세가 오스만공국을 건국(1299년)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출발이다.
돌궐의 황금유물./사진=몽골국립박물관
2. 북방민족 돌궐과 통일중국의 대결
돌궐이 건국되던 시기에 중국은 5호16국 시대를 지나 남북조시대에 들어섰으며, 돌궐은 북위가 분열되는 상황에서 무력으로 북조를 압박하는 등 우월한 지위를 견지했다. 589년 중국은 수나라가「통일」하고 돌궐은 동·서로「분열」되는 큰 정세변화가 일어났다.
「통일」과「분열」은 향후 양국의 역사전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키워드다. 통일 수나라는 돌궐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돌궐 분열을 더욱 조장하고 그 결과 더욱 약화된 돌궐을 압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데, 이것이 역사다.
수나라에 이은 강력한 왕조 당나라는 돌궐과 다시 대적하게 된다. 당나라는 290년간 존속한 통일 왕조로, 중국은 한나라에 이어 제2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자신을 진시황과 한무제에 비견했던 당태종 이세민(627~649)은 끊임없는 팽창정책을 추구했으며 따라서 그에게 가장 큰 위협이며 숙제는 바로 고구려와 돌궐이었다.
고구려는 수나라 대군을 격파하고 결과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한 바 있고 돌궐은 수시로 중국영역을 공략하면서 국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당태종의 집념으로 630년 동돌궐이, 651년에는 서돌궐이 당에 멸망했다. 이어 668년에는 고구려 또한 나·당 연합군에 패하고 700년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국력은 대단했다. 당은 선비계가 세운 왕조로, 당나라 사람은 남북조시대 이전의 중국 한족의 후예라기보다는 한족과 이민족이 융합한 새로운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당나라는 주변의 이(異)민족의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문화를 교류하는 등의 개방정책을 통해 융성했고 전성기에 교류한 국가가 70여 개국에 달하는 등 중국왕조의 대명사가 되었다. 수도 장안은 전 세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인 국제도시로서 문명과 교통 교류의 허브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당나라 현종은 서역장악을 위해 고구려유민의 후예 명장 고선지로 하여금 서역원정을 하게했다. 고선지는 11년간(740~751) 다섯 차례 출전했다. 747년 출병시에는 해발 4,600미터의 탄구령을 넘는 전설의 진군을 했고, 중앙아시아, 파미르, 실크로드를 관장하는 안서도호부의 책임자가 됐다.
연전연승하던 고선지장군은 751년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패권을 두고 타쉬겐트 부근 탈라스강 유역에서 압바스·티베트·돌궐의 이슬람 연합군과 맞선 대전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했다. 고선지군대는 중국의 중앙아시아지역의 마지막 진출세력이었고, 이 전투의 패배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슬람 세력이 뿌리를 내리게 됐다. 고선지 장군은 그 후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모함을 받아 죽었다.
터키교과서에 실린 돌궐의 전성기 영토 지도
3. 돌궐시대와 동아시아 최강 기병국가 고구려 역사
돌궐 건국 전 몽골고원과 내륙 아시아지역은 150년간 몽골계 유연이 지배했으며, 유연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돌궐이 유연을 멸망(552년)시키고 동진하면서 여러 유목민족과 거란을 복속시킴에 따라 고구려의 서북국경에 전운이 감돌게 됐다. 돌궐은 고구려와의 사이에 있는 거란·말갈족에 대한 정벌전쟁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적대적 관계에 서게 된 것이다.
전성기 돌궐의 무한카간은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고구려는 말갈족과 연합하여 이를 격퇴하기도 했다. 당시 돌궐은 동로마제국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동로마 문헌에‘고구려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 매일의 신체 단련으로 투지가 높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구려의 국력과 고구려인의 기상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수나라가 건국되고, 돌궐이 동서로 분열되는 582년경 이후에는 고구려와 돌궐은 상호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강력한 수나라의 등장이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를 우호적이고 긴밀하게 바꾼 것이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반면 돌궐세력은 약화되면서 고구려는 홀로 수와 대적하게 되나 끝내 수를 격파하고 침공을 막아냈다.
이어 등장한 당나라는 동·서돌궐을 멸망시킨 후 팽창정책을 지속했고 돌궐 없이 홀로 남은 고구려는 영류왕·연개소문 시대에 단독으로 최강의 당을 상대하다가 668년 결국 멸망했다. 강한 북방유목민족국가가 존재할 때는 중국을 견제하여 고구려가 안정될 수 있었으나 북방세력이 쇠퇴할 때는 강국 고구려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682년 돌궐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당이 다시 돌궐과 전쟁에 돌입하면서 세력의 공백기가 생겼고, 이를 이용해 고구려 후예들은 만주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여 한민족사의 남북국시대(신라+발해)를 열었다. 발해건국에 참여한 말갈은「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으로 시대별로 달리 불리웠던 우리민족의 갈래다.
중국통일 후 돌궐의 분열과 멸망은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후돌궐의 부활은 고구려의 부활(발해의 건국)로 연결됐다. 이는 초강대국의 등장에 따른 인접국가의 운명과 이에 맞서는 전략에 관한 중요한 시사를 하고 있는 대목이어서, 오늘날의 동아시아 정세를 판단할 때도 참고 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고 보여 진다.
중국의 통일왕조인 한나라시대에는 고조선과 흉노의 협력을 경계했고, 수·당시대에는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을 경계했다. 이것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통일 중국왕조의 대외전략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외교정책의 기본인 것이다.
12. '코리아' 명칭이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에서 유래했다는 근거
기마유목민족 돌궐과 한민족의 관계(上)
1.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수많은 튀르크국가를 건설한 기마유목민「돌궐」, 현대의「터키」로 이어지다.
돌궐족은 유라시아 스텝지역 역사의 핵심인 기마유목민족이다. 튀르크족으로도 불리는 돌궐은 오늘날의 터키를 건국하기 전 이미 수천년에 걸쳐 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아프리카 등지에 100여개의 크고 작은 국가를 건설했다. 튀르크족은 알타이산맥에서 기원해 서쪽으로 진출했다.
BC 20세기경 등장한 흉노는 튀르크족과 몽골족이 혼재된 유목민 집단이어서 흉노가 튀르크의 선조라 할 수 있다. 이 튀르크가 아시아 동부에서 서진하면서 유라시아 전체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최초의 튀르크족 국가는 BC 3세기의「흉노(아시아훈제국)」다. 흉노가 분열되면서 서진한 세력은「훈(유럽훈제국)」을 건국했고, 이어 질풍노도와 같이 유럽에 엄습하여 세계사를 뒤흔들었다.
다음으로 등장한 튀르크국가가「돌궐(괵튀르크)」로, 튀르크라는 이름을 쓴 최초국가다. 돌궐은 745년 멸망하고, 알타이산맥에 살던 또다른 튀르크계「위구르」가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이 시대를 전후하여 튀르크족이 서진하면서 이슬람화 하게 되고 이후 이슬람 튀르크 국가들이 중앙아시아 등지에 계속 세워지게 된다.
11세기 들어 실크로드를 따라 서진한 튀르크 일파가「셀주크튀르크」를 건국했으며(1037), 만지케르트전투(1071) 승리로 비잔틴제국을 제압하고 오늘날 터키 땅인 소아시아 반도까지 차지해「룸셀주크」라는 나라를 세웠다.
몽골의 공격으로 셀주크제국이 멸망한 후 룸셀주크도 약화되면서 오스만공국이 세워졌고 이후「오스만튀르크제국」으로 이어졌다. 16세기 슐레이만 1세때는 제국의 전성기로 발칸반도, 헝가리, 소아시아, 흑해 일대, 이집트 및 아프리카 북부 등을 차지하여 지중해를 장악했으며, 최대 영토는 560만㎢에 달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이 제국도 그러나 레판토해전의 패배(1571), 2차 빈 포위 실패(1683) 등으로 영토를 잃어가다 19세기에는 발칸반도, 이집트, 아랍지역까지 상실하면서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후 1908년 청년터키혁명을 거쳐 1923년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에 의해 오늘날의 터키공화국이 건설됐다. 이렇게 돌궐은 552년 건국 이래 몽골고원에서 유럽지역까지 광대한 스텝지역을 무대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1·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튀르크국가를 건설하는 등 유라시아스텝지역의 역사를 계속해 써 내려 갔다. 오늘날 터키의 교과서는 이들 튀르크국가를 모두 터키 역사로 가르치고 있다.
튀르크인들이 사는 세계지도(위)와 6.25 참전기사(아래)/자료=터키교과서
2. 기마유목민 최초로 문자기록을 남기고 동서교역의 중심 실크로드를 경영한 초원제국 돌궐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은 약 2,500년에 걸쳐 세계사의 중심무대에서 활약했다. 돌궐도 바로 이 기마유목민족이다. 기마유목민족들은 정주민족과는 달리 오랜기간 자신의 문자를 갖지 못했고, 그 결과 기록문화가 취약하다. 그래서 이들에 관한 오랜 기록은 정주민족의 시각에서 보고 쓰여진 것들 뿐이다.
「스키타이」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그 존재를 처음 기록했고, 「흉노」에 대해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언급했다. 이들이 본 스텝지역의 기마유목민족은 매우 호전적이고 잔인하며, 더 나아가 비문명과 비문화의 대명사로까지 다루어지기도 했다. 이것이 오늘날 유라시아스텝민족의 역사가 왜곡되고 세계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한 원인이 아닐까.
그런데 돌궐은 예외였다. 그들은 유라시아 스텝민족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를 가졌고 기록을 남겼다. 몽골북부 오르혼(Orkon) 강주변에서 AD 720-735년경 세워진 돌궐어 비석이 발견됐다. 이 비석은 후돌궐지도자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것으로, 돌궐제국은 물론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의 잊혀진 역사를 다시 꺼내어 새롭게 보게 만드는 기념비적인 문화유산인 것이다.
이 비석의 비문에는 돌궐제국의 건국, 역대 카간들의 업적, 주변국과의 관계, 군사 및 사회제도, 법과 관습 등 스텝지역 기마유목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170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에서 포로가 된 스웨덴 장교 ‘슈트라흐렌베르그’가 포로 생활 중에 발견하여 1730년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알려졌는데, 19세기말에 본격적 연구가 진행되어 덴마크 학자 ‘톰센(V.Thomsen)’이 판독했다.
이 비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돌궐어 문헌이다. 그런데 이 비문 중 퀼테킨비문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바로 고구려에 대한 것으로, 572년 ‘무한카간’이 사망하자 고구려가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록이다. 이 비문 동쪽면 40줄 중 네 번째 줄에는 ‘동쪽의 해뜨는 곳으로부터 뷔클리(bükli<bök(kö)li<mäkkoli(맥코리)로도 읽는다)…에서 문상객이 와서 애도했다’고 적혀있다.
‘뷔클리’는 ‘맥족고구려’라고 해석되고 있다. 이는 튀르크족이 서방으로 진출하면서 고구려의 존재를 ‘코리’라는 이름으로 알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돌궐과 교류하던 동로마 문헌에 고구려가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후 10세기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 이름 했으며, 고려가 남송 및 아랍세계와 교역하면서‘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널리 소개됐다. 따라서 코리아 명칭은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는 민족구성과 언어, 관습, 문화 등은 물론 이름까지 명백한 한민족고대국가로 중국이 시비할 사안이 아니다.
퀼테킨(왼쪽)과 퀼테킨 비문/사진=카자흐스탄 문화정보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돌궐은 중국과 비잔틴제국간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장악하게 된다. 실크로드에서는 소그드인이 동서교역을 맡고 있었고, 돌궐의 보호 아래 교역이 이루어졌다. 돌궐은 교역확대를 위해 비잔틴제국과 직접 무역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계기로 돌궐과 비잔틴 간에 우호관계가 맺어져 페르시아를 동·서에서 견제하는 구도가 됐다.
이는 중국의 수·당에 대항하는 고구려와 돌궐이 우호관계를 갖게 되는 상황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본고 11편 참조). 고구려를 이어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도 돌궐과는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3. 단재 신채호, 일제하에 목숨 걸고 '조선상고사' 써 한민족 원류 새로 밝히다
기마유목국가 돌궐과 한민족의 관계(下)
"조선의 속국이었던 흉노(돌궐의 조상)는 조선에 배반했다 붙었다를 되풀이했다"
3.「돌궐」과「한민족」의 뿌리
흉노·돌궐 등 기마유목민족과 한민족 사이에는 고분과 유물, 언어, 생활관습,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밀접한 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한민족은 구체적으로 이들과 어떤 공통분모가 있을까? 단재 신채호선생의‘조선상고사’를 먼저 보자.
단재선생은 조선독립 운동 중 1928년 49세때 일제에 체포되어 1931년 만주 대련법정에서 10년 실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수감생활하면서 그해 6월10일부터 10월14일까지 103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조선사’(후에‘조선상고사’로 이름을 바꿈)를 연재했다. 거기에서 신채호 선생은 ‘조선민족의 태어나고 자라고 발달해 온 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 다음을 과제로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언어와 풍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한 조선민족의 구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요약하면, 단재선생은 돌궐을 비롯한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이 한민족과 끊을 수 없는 친연관계를 갖고 있다고 봤다. 윤치도는 ‘민족정사’(1965)에서 조선족과 흉노족이 같은 언어군에 있고, 조선족은 조선, 선비, 여진, 몽고, 퉁구스, 왜 등으로 세분되며, 흉노족은 돌궐, 헝가리, 터어키, 핀란드 등으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3대 가륵 단군시대에 요동태수 삭정을 징계하여 약수(흑룡강)변에 유배하였는데 그들이 후에 흉노족이 되었다 했다. 잘 알려진 ‘단기고사’, ‘단군세기’(*위서논란이 있음)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으며, ‘규원사화’에는 단군왕검시대에 돌궐의 조상격인 험윤(흉노)이 난을 일으켰다는 기록도 있다.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는 물론, 역사시대에도 기록하지 않는 기마유목민 특유의 문화로 인해 뿌리찾기는 쉬운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내몽골·만주 일대에서 유적과 유물 발굴이 계속 되고 있고 근간에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에 대해 유전자분석 등 과학적인 기법을 포함한 다양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보다 열린 시각에서 심도 깊은 고고학·역사학적 연구가 이루어 졌으면 하는 것이 위와 같은 사항들을 살펴본 필자의 바람이다.
14. 고려 관리가 되어 정몽주와 함께 고려를 지키려 했던 위구르인 설장수
몽골고원의 주인공이 된 위구르제국
1. 돌궐을 멸망시키고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위구르제국
기마유목민족의 진원지 몽골고원은 흉노(BC3C~AD2C), 선비(1~3C), 유연(4~6C), 돌궐(6~8C) 등이 차례로 지배하다 위구르가 이어 받았다. 흉노의 후예 위구르는 돌궐 혼란기를 틈타 세력을 키워 745년 돌궐제국을 멸망시키고 위구르제국을 건설했다.
튀르크인들은 유라시아 스텝지역에서 2천년간 수많은 크고 작은 국가를 건설했는데, 위구르제국 역시 몽골고원·중앙아시아 지역의 튀르크계 위구르족이 세운 국가다. 당나라는「안사의 난」(755~763)을 진압하기위해 위구르의 도움을 요청했고, 이 난을 진압한 후 위구르제국은 동방세계 최강세력으로 급부상하여 100년 가까이 존속했다.
위구르시대에는 유목민문화에 농경문화가 도입되면서 도시화와 정착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를 토대로 유목민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했다. 이후 위구르인들은 유목과 농경, 동서문화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위구르문화를 전개해 나간다. 초기에는 돌궐문자를 썼으나 소그드인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자체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고 둔황·투르판 등지에서 문서·벽화 등 다수의 문화유적을 남기고 있다.
투르판 벽화/베를린국립박물관
위구르 제국은 840년 또 다른 튀르크계 키르키즈에 멸망당했으나, 위구르인들은 제국의 멸망 후에도 간쑤, 둔황, 투르판 등지에 튀르크계 국가들을 건설하여 중앙아시아지역에서 기마유목민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9세기 들어 위구르인들은 서진하면서 이슬람을 대거 받아들여 11세기에는 본격적인 튀르크 이슬람시대가 전개된다. 위구르인은 현재 중국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약166만㎢)에 대부분(약880만명) 거주하고 있고, 중앙아시아에도 일부 산재해 살고 있다.
터키교과서의 위구르 지도.
2.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전개되는 기마유목민의 역사
중앙아시아 지역은 투르키스탄(Trukistan)으로 불렸고, 이는 튀르크인(Turk)의 땅(Stan)이란 뜻이다. 투르키스탄은 톈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동·서로 나누어지는데,「동 투르키스탄」은 지금의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이다.
신장지역은 중국으로 편입된 후에도 분리 독립운동이 일어나 1930~40년대 2차례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일부지역이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1949년 중국이 재점령했다. 「서 투르키스탄」은 오늘날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이 있는 땅이다.
중앙아시아 지역도 오래전부터 기마유목민이 활동해오던 지역이다. 몽골고원을 평정한 흉노제국은 중앙아시아 지역 일대까지 정복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흉노 이후에도 중앙아시아 지역은 유연, 돌궐, 위구르 등이 지배했고, 특히 9세기부터 위구르인들이 중앙아시아 오아시스지대에 본격적으로 이주·정착하여 이 지역이 투르키스탄이라 불리는 계기가 된다.
중앙아시아 민족은 튀르크계 유목민 후손이 대부분이나 소수민족도 혼재해 있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대가 압바스·위구르 연합군에 패퇴했고, 이후 파미르고원 서쪽의 중앙아시아 지역은 급속히 이슬람화했다. 당나라시대에 위구르는 회흘(回紇), 회골(回鶻)로 불리웠으며, 이것이 이슬람교가 중국에서 회교(回敎) 또는 회회교(回回敎)로 불리게 된 유래다.
이후 13세기에는 몽골제국의 차카타이한국, 15세기에는 티무르제국 등이 차례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이 지역에서 기마유목민족 국가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청나라·영국·러시아 등이 이 지역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그 결과 동투르키스탄 지역은 1760년대 건륭제때 청나라가 차지하게 되고, 서투르키스탄 지역은 1880년대에 이르러 러시아가 대부분 장악하게 됐다.
터기 국기(왼쪽)와 과거 동투르키스탄 국기.
3. 위구르-중앙아시아와 한민족의 교류
중앙아시아 지역은 한민족과 뿌리를 같이하는 기마군단이 활약해 온 땅이자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18세기까지 동서간 문명 교류의 중심이었다. 이 실크로드는 스텝지역 중심을 통해 동서를 연결하는 통로로, 한반도는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의 수많은 고분과 유물은 스텝지역 기마유목민과 한반도의 교류를 말해주며, 고대 북방유목민의 생활·관습·문화 등이 우리와 뿌리를 함께 하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당나라와 고구려가 대항할 때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돌궐이 고구려와 동맹관계였던 것은 군사적 이해관련 뿐 아니라 알타이 민족으로서의 친연성에서 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오래전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은 우리와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신라·발해·고려시대에 줄곧 실크로드에서 활약한 상인인 소그드인 등을 통해서 중앙아시아 및 서방과 교류해 왔고 이러한 흔적은 우리문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중국 섬서성 역사박물관의 소그드인 기마용.
신라(BC57~935)는 실크로드를 통해 당시의 페르시아 등 서역문화권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신라의 무덤에서는 북방계는 물론 다양한 서역 문화의 흔적이 나타난다. 신라에서 발굴되는 유리제품은 로마문화권 등 서역에서 유래했고 경주의 괘릉에서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무인상이 발견된다. 처용가의 처용도 신라 헌강왕때 귀화한 이슬람계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중앙아시아인을 볼 수 있으며, 사마르칸드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는 고대 한민족 특유의 복식을 하고 있는 2명의 사신 모습이 그려져 있다(본고③편 참조).
고려에서도 위구르인들이 활약한다. 몽골제국은 몽골인과 위구르인의 연합정권 성격으로 위구르인들은 준 지배계층을 형성했다. 이 위구르인들은 몽골군의 한반도 침입때 참전하거나 이후 고려가 몽골 영향력 하에 있을 때 관리·역관 등으로 한반도에 와서 정착하기도 했다. 고려에 들어온 위구르인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로 「고려사」등에 회회인(回回人)으로 쓰여 있는데, 개경에 회회인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회회아비도 이들을 일컫는다.
설장수라는 위구르인은 고려 관리가 되어 정몽주와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나 이후 조선조 때도 등용되어 외교에 공을 세웠다. 몽골·고려의 혼인정책으로 고려왕비가 된 몽골공주는 대규모 시종들을 대동하였는데, 이때 다수의 위구르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충렬왕비가 된 쿠빌라이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와 귀화한 장순룡은 장군에까지 이르러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세종때 학자 설순은 고려말 귀화한 위구르인의 후손이다.
근세에 들어서도 우리와의 관계는 지속된다. 중앙아시아는 한인(고려인)이 1937년 강제 이주된 후 70여년간 거주한 지역으로 지금도 30만명 이상이 살고 있다. 중국·미국·일본 다음으로 많은 한인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이슬람교는 조선시대 유교에 배척되어 사라졌으나 6·25참전 터키군에 의해 한국에 다시 전파되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동쪽 끝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한민족은 오랜 역사 속에서 북방기마유목민족과 끊임없이 교류해왔고, 그 역사도 유라시아 스텝제국들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보다 긴 시간의 흐름과 넓은 공간적인 이해 속에서 한민족의 형성과 삶의 흐름을 읽어나가는 것이 현대의 기적을 이룬 국가 대한민국을 해석하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나가는데 필요하다고 본다.
15. 발해를 멸망시켰으나 고려가 지켜낸 역사
10세기 초에 초원을 통일하고 거대북방유목국가를 건설한 거란(契丹)제국 이야기
1. 동호계 기마군단 거란의 기원과 흥망
선비족은 몽골고원에서 흉노를 제압하고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3세기 ‘단석괴’ 사후 분열되었다. 한편, 중국은 삼국시대를 진(晋)이 통일하나, 혼란기에 선비를 비롯한 흉노ㆍ갈ㆍ저ㆍ강등 북방유목민족이 화북으로 남하하여 「5호16국시대(304~439)」가 전개된다. 이 시대는 439년 ‘선비족 탁발부’가 화북을 통일하여 북위를 건국함으로써 종식되고 「남북조시대(429~589)」가 열렸다.
거란은 대흥안령산맥의 동쪽 시라무렌강 유역에 살던 동호계 민족으로 선비족의 한 갈래다. 거란은 동쪽의 고구려 서쪽의 돌궐 양대세력 사이에 끼여 세력을 키워나갈 수 없었고, 고구려 멸망 후에는 동돌궐과 당나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당나라 말기에 본격 세력을 키우게 된 거란은 영걸 ‘야율아보기(요태조)’가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 제국으로 출범했다.
923년 돌궐세력을 축출하고 몽골고원을 대부분 장악한 야율아보기는 924년 여진을 제압하고 926년 발해를 멸망시켜 강성한 국가를 건설하였으나 발해 원정 중 사망했다. 왕위를 이어받은 ‘아율덕광’은 936년에 후진의 건국을 도운 대가로 연운16주를 차지하고 후진마저 멸망시켰다.
이로써 거란은 동아시아 최강국가로 등장했다. 이때 거란이 차지한 북경은 이후 금, 원시대를 거쳐 1368년까지 유목민이 지배했다. 947년 국호를 「대요국」으로 하였으나 덕광이 전쟁 중에 죽고 혼란에 빠지면서 중국 전체정복의 기회는 사라졌다.
거란은 태평양 연안에서 알타이산맥, 만리장성에서 헤를렌강 북부까지 광대한 땅을 차지했고 몽골계 유목민, 여진족, 발해유민 등 다양한 민족을 통합하여 대제국을 건설했다. 한편 송화강유역에서 부상한 퉁구스계 여진족은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한 후 송과 연합하여 1125년 거란을 멸망시켰다.
거란영역(몽골의역사,동북아역사재단)
2. 거란시대의 국제정세
거란의 발흥 경로는 이전의 흉노ㆍ선비ㆍ돌궐 등 북방유목국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고, 이어 부족을 통합하며, 다음은 몽골고원을 차지하고, 최종적으로 중국왕조와 쟁패하는 것이다. 북방민족이 중국을 통치한 것이 북위ㆍ요ㆍ금ㆍ원ㆍ청의 다섯 왕조로, 진ㆍ한나라 이래 중국역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10세기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북방민족 거란은 916년 요를 건국했고, 한민족은 918년 고려를 건국하고 936년 삼국을 통일했다. 중국에서는 5대10국시대가 마감되고 960년 송나라가 건국됐다.
북방민족-한민족-중국왕조 간에 7세기에는 돌궐-고구려-당이 삼각구도를 형성했다. 당시 당나라(618~907)가 돌궐과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동아시아를 평정했다. 그러나 8세기에는 후돌궐과 후고구려(발해)가 다시 등장하여 당과의 삼각구도가 이어졌다. 9세기에는 거란이 세력화하게 되어 당나라는 발해(698~926)와 거란이라는 양쪽의 적대세력과 대치하게 됐다.
10세기에 이르러 다시 거란-고려-송의 삼국구도가 재연된 것이다. 이처럼 북방민족-한민족-중국왕조 간에는 시대별로 여러 국가가 등장하고 상호 교류-협력-투쟁하면서 역사를 전개해왔다.
3. 거란과 한민족의 역사적 관계
거란은 선비족의 한 그룹이며, 선비족은 동호에서 기원하고, 동호는 예맥의 후대 이름이며, 예맥은 고대 한민족이다. 그래서 거란은 한민족과 혈통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강성하여 국가를 이룬 10세기 초 이전의 거란과 우리의 관계 기록은 많지 않다. 한민족과의 역사적 조우를 보면 거란은 고구려와 대치했고 국경을 맞댔으나 당시 강성한 고구려 때문에 거란세력은 위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10세기 초 요제국을 건설한 거란은 926년 발해를 공격해 불과 달포 만에 멸망시켰다. 이로써 한민족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져 내려온 만주일대에 대한 영토권을 상실했고 신라-발해의 남북국시대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강성한 거란과 고려가 등장하게 되는데 두 나라간 갈등의 상징인 만부교사건(942년)이 일어났다. 거란이 사신과 낙타 50필을 보내왔으나 태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 하여 사신은 유배하고 낙타는 만부교아래 매어 굶겨 죽였다.
고려는 기본적으로 발해에 대해 민족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발해멸망 후 많은 유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욱일승천하는 거란, 후당에서 후진으로 이어지는 중국왕조, 고구려후예 발해의 멸망,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삼국통일 등 역사적으로 거대한 사건들이 10년 남짓 사이에 잇달아 벌어졌던 상황을 충분히 감안해 살펴야 한다.
거란ㆍ고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중국도 송나라에 의해 통일됐다. 만주지역에 있던 말갈족은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북만주지역은 동여진, 압록강하류지역은 서여진이 각각 차지했다. 당시 여진이 차지한 압록강 하구는 송나라, 거란, 고려 삼국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송나라는 거란을 공격하나 실패했고(986-989), 고구려는 송의 참전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991년 거란은 서여진을 정복하고 압록강하류를 차지했다. 송나라와 여진을 제압한 거란의 다음 수순은 말할 것도 없이 고려 침공이었다.
993년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이끄는 대군이 고려를 침공한 이후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1019년)까지 양국 간 전쟁은 26년간 지속했다. 고려 성종은 신하들과 할지론과 항복론을 논의했으나, 중군사인 서희는「선 항전 후 협상」을 주장하면서 소손녕과의 회담에 나섰다.
이 담판에서 소손녕의 주장은 ①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옛 고구려 땅은 거란에 돌려 줄 것 ②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에 사대할 것 등 두 가지였다. 이에 대해 서희는 ①고려라는 국호와 고구려 옛 수도인 평양에 서경을 두는 등 고려는 고구려 계승국이다 ②압록강주변에 여진이 있어 거란과 교류가 어려우므로 여진 영토를 고려가 확보하면 거란에 사대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서희의 탁월한 외교로 고려는 나라를 지키고 전쟁을 막았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강동6주의 강역을 확보하게 됐다.
1010년 거란 성종은 다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친정을 하나 실패하는 둥 여섯 차례에 걸친 침략전쟁에 모두 실패하고 양측은 강화하게 됐다.
거란의 요나라 역사를 기록한 정사가 원나라 때 기록된「요사(遼史)」다. 여기에 한민족과 관련된 특별한 기록이 있다. 요사 지리지인 권 38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지금의 랴오닝성 요양)에 대한 기록이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동경 요양부는 본래 조선땅이다. <여기서 조선은 물론 고조선을 의미한다. 고조선의 존재와 영역에 관한 기록이다.> ②조선은 40여대를 전해 내려왔다.(傳四十餘世) <단군은 신화가 아닌 역사이며, 단군이 한 사람이 아니고 왕조의 수장으로 이어져 왔음을 말해준다.>
③연나라사람 위만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이는 위만의 땅이 동경(요동)지역으로 고조선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④한무제가 조선을 평정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 <이는 요동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한사군이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⑤요나라 동경이 고구려 수도인 평양이다. <고구려의 수도가 현재의 평양지역이라고 우리가 아는 것과 명백히 다른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북방 기마민족 거란 역시 한민족과 고대로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앞으로 북방민족과 한민족 간의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에 의해 역사적 실체가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16. 고려를 부모로 모시던 여진족, 금나라 건국 후에는...
1. 여진족의 나라「金」의 기원과 흥망
여진족은 만주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을 지칭하는데, 시대에 따라 중국 사가들은 다르게 불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나라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당代에는 말갈(靺鞨), 송·명代에는 여진(女眞), 청代에는 만주족 등이었다.
6세기말 수·당시대 이후 만주지역 주민들은 말갈로 불리웠다. 속말·백산·백돌·불열·호실·흑수·안차골 등이 큰 부족이었으며, 이중 속말·백산부족은 고구려에 복속했다가 후에 발해를 구성하고, 흑수부족은 발해북부지역에서 발해에 대항하다 발해 멸망 후 거란에 복속하여 여진이라 불리웠다. 그러나 대체로 발해 멸망 후 그 지역은 여진으로, 살던 사람은 여진족이라 불리웠다.
여진은 10세기초 이후 요나라(遼:거란)의 지배를 받았다. 遼의 호적에 편입된 요양 일대(요령성) 부족은 숙여진, 편입되지 않은 송화강 이북(흑룡강성) 및 두만강유역(길림성) 부족은 생여진이라 불렸다.
이 시기 200년간 여진은 역사에 눈에 띠게 나타나지 않았으나 12세기초 만주 하얼빈 남동쪽의 생여진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고, 영걸 아골타(阿骨打)가 흑수말갈을 통합하고 1115년 금나라(金)를 건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금태조 아골타는 遼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히고 1120년 宋과 동맹을 맺은 후 만주에서 遼를 쫓아내고 북경까지 진출했다. 1125년 2대 태종때 마침내 遼를 멸망시켰다.
金은 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동맹국이었던 宋과 마찰이 일어나자 1127년 宋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여 황제를 사로잡고 宋을 강남으로 몰아냈다. 이로써 金은 만주·내몽골·화북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1153년 상경회령부에서 연경으로 천도하여 중국 중심부를 장악했다. 남쪽으로 간 宋은 이후 南宋으로 이어지면서 金의 신하국이 됐다. 12세기 말 전성기를 구가하던 金은 남송·서하·몽골 등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1234년 몽골과 남송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금나라 지도와 금태조 아골타
2. 금나라시대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흐름
金은 발해멸망(926년)후 약 90년이 지난 1115년 발해영역에서 건국해서 120년간 존속했다. 당시 중국 본토에는 宋(960~1126)·南宋(1126~1279), 만주·몽골·화북지방에는 遼(916~1125), 한반도에는 高麗(918~1392)가 세워졌다. 이 시기는 돌궐족(투르크)이 위구르에 멸망 후 서진하여 셀주크투르크를 건국했던 때다(1037~1194).
① 여진(金)-거란(遼)의 관계
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지역에 있던 여진은 여러부로 나뉘어졌지만 대체로 거란과 속국관계에 있어 거란의 착취와 여진의 반발이 이어졌다. 아골타는 金을 건국한 후 遼에 수교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만주각지에서 遼를 격파했다. 이때에 宋과 金은 요나라 협공을 위한 조약을 맺었다. 金은 遼를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상경·중경·서경을 함락하고 수도 연경에 입성(1122년)한 후 1125년 부패로 국력이 쇠잔한 遼를 멸망시켰다.
② 여진(金)-宋의 관계
宋은 거란과 대치하는 가운데에도 여진과 바다를 통해 교역을 지속했으나 여진을 큰 세력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아골타 등장 이후 강성한 金이 遼를 격파하고 만주를 장악하자 宋은 과거 거란이 차지한 연운16주를 수복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을 들고 나왔다. 金과 宋이 연합하여, 金은 長成以北의 중경을 차지하고 宋은 長成以南의 남경을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金은 대군을 동원하여 遼를 전면 공격했으나 宋은 출병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금태조는 이에 대해 대규모 배상을 받아냈을 뿐 아니라 남진정책의 빌미를 얻게 됐다.
1125년 金은 宋을 공격했다. 宋은 나약하게 대항하다 모든 방어기회를 놓치고 1127년 왕실이 포로가 되면서 멸망했다(정강의 변). 그러나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 살아남아 남경에 도읍하여 이후 南宋으로 이어졌다. 남송시대에도 양국의 전쟁은 지속됐다. 남송은 금이 가장 두려워하는 걸출한 장군 악비를 모함 끝에 처형하는 등 국력을 낭비한 끝에 1141년 金과 화의하고 종속됐다.
③ 여진(金)-고려의 관계
당초 여진은 고려와 거란에 귀속하였으나 복속과 배반을 되풀이 했다. 고려와 여진은 두만강변 등 국경지대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윤관은 金 건국 이전인 1107년 천리장성을 침입하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金 건국후 遼가 멸망하고 金이 만주를 차지한 후에는 金과 고려 사이에 긴장과 마찰이 생겼으나 金은 거란을 무력 정복한 것과 달리 고려에 대해서는 회유의 방법으로 접근했다(요동사, 김한규). 金과 고려는 전형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135년 묘청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金나라를 정벌하자는 서경천도운동을 일으키나 김부식의 관군에 진압된 이후 金과는 큰 전쟁없이 사대관계를 지속했다.
3.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 한민족의 관계
고조선 이래 만주에 거주하는 다수 주민은 조선민족이었다. 부여, 고구려도 그러하며 발해 역시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누구나 이들 역사를 우리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발해가 멸망한 이후가 문제다. 발해 멸망후 그 지역과 사람들은 여진(족)으로 불리웠으며, 여진인들이 金을 세웠다.
그러면 金나라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1900년대 들어서까지도 金나라 역사를 우리 역사에서 다루었다. 「신단민사」(1923, 김교현)에서는 발해·遼·金·淸까지 포함해 민족사의 흐름을 밝히고 있고, 「배달민족정사」(신태윤, 1928·1945)에서도 遼史·金史·淸史를 한국사에 포함시켰다. 「민족정사」(윤치도,1968)에서는 제6장 남북조시대사의 제1절 北朝史에서 발해사·遼朝略史·淸朝略史를, 제2절 南朝史에서 고려·조선사를 다루고 있다.
「조선유기」(권덕규, 1941)·「조선사」(권덕규, 1945)및 「조선역사」(세창서관 편집부, 1945)에서는 朝鮮歷代傳受圖에서 고조선으로부터 韓(마한·진한·변한 →백제·신라·가야→신라·고려·조선), 夫餘(북부여·동부여·북옥저·동옥저→고구려·발해), 肅愼(읍루-물갈-말갈, 여진→금·청)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쓰고 있다.
여진과 한민족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목할 만할 기록이 있다. 「金史」는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라고 했다”고 썼다. 또 금나라의 기원과 관련하여 “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로 고려에서 왔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고려에서’라는 표현은 다른 역사서나 신라·고구려의 구별이 잘못된 사례 등에 비추어 볼 때 신라인을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金志, 大金國志, 三朝北盟會編 등은 초기 여진 추장이 신라인이라 밝히고 있다. 고려사 등에서는 이를 김준이라 전한다.
종합하면 신라유민이며 신라종실인 권행(權幸:본명은 金幸)의 둘째아들 김함보(=김준)가 여진 완안부의 추장이 되어 주변을 통합해가다 흑수말갈까지 장악하고, 이에 발해유민이 가세하여 건국한 것이 金이다. 즉 金은 지배층인 황실은 신라계 유민의 후예며, 발해인들이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여기에 흑수말갈도 구성원이 된 국가인 것이다.
여진인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기원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으나, 고구려·발해 등 한민족국가의 구성원이었으므로 우리와는 형제민족이라 할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668)후 고구려 유민이 건설(698)한 나라이고, 신라 멸망(935)후에는 신라유민들이 발해땅(926멸망)으로 다수 이주하였으며, 이들의 후예가 세운 나라가 金이다.
金은 宋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나 고려와는 대체로 큰 전쟁없이 형제국가로 지냈다. 여진은 金 건국전에는 고려를 부모나 형으로 여겼고, 金 건국후에는 스스로 형이라 칭했다.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도 많은 여진인이 귀화했고 통혼도 했는바, 이는 서로 남이 아니라는 역사적 인식의 공유 때문이지 않았을까. 여진은 만주에서 일어나 걸출한 지도자의 등장과 더불어 단기간내에 대통합국가를 건설했고, 중원까지 제압하면서 동북아의 패자가 되었다. 현대의 기적을 일구어 낸 한민족의 성장 DNA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대목이 여진史라 하겠다.
17. 칭기스칸, 인구 300만의 몽골을 이끌고 인구 5000만명의 금나라를 격파
몽골제국 이야기(上)
1. 기마유목군단의 발원지 몽골고원
몽골고원은 면적 272만㎢(남한 약27배), 해발고도 1.5㎞의 고원지대다. 동쪽으로는 대흥안령산맥을 경계로 만주, 서쪽으로는 알타이산맥 넘어 중앙아시아, 고비사막 남쪽으로는 중국, 바이칼호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각각 접하고 있다.
오늘날 몽골(156만㎢)과 중국 내몽골자치구(148만㎢)에 대부분 속해있다.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준평원지역으로 남부에는 고비사막지대가 100만㎢를 넘고, 중앙·동부지역은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많아 넓은 초원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 몽골고원이 북방기마유목민족이 유라시아 대초원의 역사를 써 내려간 출발지이자 동시에 한민족성장 DNA 탐구여행의 길라잡이다.
몽골고원은 여름에는 40℃ 가까이 올라가고 겨울에는 영하 40℃이하 까지도 내려간다. 연간 강수량이 350㎜로 우리나라의 1,250㎜에 비하면 턱없이 비가 적은 지역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농경생활이 불가능하다. 넓은 초원지대에서 가축을 방목하면서 생활하는, 삶의 환경으로는 매우 열악한 곳이다. 이런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인지 기마유목민은 우선 대단히 용감하고 동시에 영리할 수 밖에 없는 DNA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몽골 중등국사교과서를 보자. 기원전 3세기 이후 6세기 중엽까지 몽골고원에서 일어난 고대국가로 흉노(BC209~AD93), 선비(1~3세기), 유연(330~555년)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 6세기 중반 이후 몽골제국 건국전인 12세기 초반까지 활약했던 국가로 투르크(돌궐, 552~745년), 위구르(745~840년), 키르키즈(840~923년), 거란(901~1125년) 등을 기술하고 있다.
이후 몽골제국이 등장하였고, 북원을 거쳐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다가 1921년 몽골인민정부가 독립을 선포했다. 2차대전 후 외몽골은 몽골인민공화국으로, 내몽골은 중국의 자치국으로 각각 운명이 나뉘었다.
몽골고원의 여름(위)과 겨울.
2. 세계제국 대몽골국의 건설과 흥망
몽골고원에서는 선비족이 선비제국을 건설한 이후 그 후예가 유연·북위·전연·후연 등을 각각 세웠다. 6세기 중엽 이후 돌궐·위구르·키르키즈 등 투르크족이 몽골고원을 장악하면서 선비족은 몽골고원 외곽으로 밀려 났으나 투르크 세력이 약화되는 8세기 중반부터 다시 점차 고원 중심부로 돌아왔다. 10세기 들어서는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이 몽골고원을 완전히 차지하게 했다.
몽골족은 투르크족에 의해 몽골고원에서 쫓겨난 선비족의 일파로 보여진다. 이들은 몽골고원 동부의 ‘에르구네 쿤’의 몽골인, 유연의 후예인 ‘타타르 소칸국’의 몽골인, 선비계 ‘실위인’들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10~11세기 고비사막 남북초원에 많은 몽골계 부족연합체가 형성되었고, 11~12세기에는 전몽골,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홍기라트, 옹기라트 등의 부족이 몽골고원의 큰 세력이었다.
이 가운데 전몽골족에서「테무친 보르지긴」이란 영걸이 나타나 케레이트의 지지를 받아 메르키드를 정복하고 이후 타타르, 홍기라트, 케레이트, 옹기라트, 나이만을 차례로 격파하여 몽골초원을 통일했다. 테무친은 1206년 44세의 나이로 몽골의 대칸에 올라 칭기스칸이라 불렸고, 이로써 대몽골국이 출범했다. 서른 두 차례에 걸친 전쟁과 전투의 결과다.
칭키스칸은 몽골의 기마군단을 이끌고 금나라, 호레즘, 탕구트를 궤멸시키는 등 공포의 정복전쟁을 거듭하여 대몽골제국을 건설하였으나, 1227년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1229년 징기스칸을 이어받은 셋째 아들 우구데이는 카라코룸으로 천도하고 금을 멸망시킨 후 서역정복전쟁을 전개했다. 그는 킵차크,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등 유라시아지역을 차례로 정복하여 태평양 연안에서 동유럽·시베리아·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1246년 우구데이의 큰아들이 제3대 대칸으로 옹립되나 원정중에 사망하고, 1251년 징기스칸의 막내아들인 톨루이의 큰아들 뭉케가 제4대 대칸으로 등극했다. 뭉케의 동생 쿠빌라이와 훌라구는 형의 정복사업을 돕다 뭉케 사후 1260년 쿠빌라이가 제5대 대칸이 됐다.
쿠빌라이는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정하고 원(元)제국을 출범시켰다. 다음해 수도를 대도(오늘날 北京)로 옮기고 남송을 멸망시켜 중국 전토를 장악했다. 쿠빌라이의 원나라는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했고, 4대칸국까지 아우르는 아시아·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러시아 지역의 킵자크칸국은 칭기스칸의 큰아들 주치와 그 아들 바투가, 페르시아지역의 일칸국은 뭉케의 동생 훌라구가, 중앙아시아지역의 차카타이칸국은 칭키스칸 둘째아들 차카타이가, 위구르지역의 우구데이칸국은 우구데이의 남은 일족들에게 각각 지배하도록 분봉했던 땅이다.
칭기스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BC 4세기의 알렉산드로스, 18~19세기의 나폴레옹, 20세기의 히틀러가 다스렸던 제국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넓은 777만㎢의 땅을 정복해 세계역사상 유일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몽골제국 지도(왼쪽)와 칭기스칸.
원나라의 쿠빌라이는 몽골의 옛 제도에 중원 왕조의 전통 정치체제를 적절히 접합시켜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했다. 이로써 칭기스칸의 대몽골국은 100년 이상 융성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 사후 황실의 후계다툼이 지속되면서 14세기 중엽에는 국정이 극도로 해이해지고 사회적 모순이 심화됐다. 이에따라 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 폭동들은 한족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이어져 주원장에 의한 명나라가 출현하게 됐다. 13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에 빼앗기고 몽골 본토로 쫓겨나 북원(北元)으로 명맥을 잇다가 마침내 나라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3. 몽골제국시대의 주변국 정세
1206년 칭기스칸이 대칸으로 추대될 당시 남중국은 남송, 만주·북중국은 금나라, 한반도는 고려, 일본은 가마쿠라시대였다. 몽골서남부는 탕구트, 서부는 호레즘제국이었다. 13세기 당시 몽골 인구는 약 200만~300만명에 불과한 반면 최대국가인 금나라는 5000만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칭기스칸은 1211년 금나라와 천하를 다투는 23년간의 대전쟁을 개시하여 1215년 금수도와 주요거점을 정복했다. 이어서 인구 2000만명의 호레즘과 탕구트(서하)마저 정복했다.
칭기스칸이 금나라를 쳐서 황하 이북을 차지하면서 금나라는 황하 남부로 쫓기게 되고 내분이 일어나면서 금나라가 차지했던 만주지역에는 세력의 공백이 생기게 됐다. 과거 요나라를 세웠던 거란족은 이틈을 타서 여진과 연합하여「대요국」을 세웠다. 이에 몽골은 거란을 공격하고, 거란은 이에 쫓기어 고려의 평안도 지방 강동지역에 들어오게 됐다.
당연히 고려군이 출병하여 거란을 강동성에서 격퇴했다. 이때 몽골군이 고려군과 협공하게 되었는데, 거란이 격퇴된 후 몽골족에서 협력한 대가를 과도하게 요구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이 와중에 1225년 몽골사신 저고여가 국경지대에서 피살되면서 국교가 단절되고 마침내 여·몽전쟁이 시작됐다.
당시 몽골기병은 전쟁이 없을 때는 하루 200㎞, 전쟁이 있을 때는 40㎞를 진군할 정도로 놀라운 기동력을 발휘해서 전광석화 같이 전쟁과 전투를 끝냈다. 그러나 고려와의 경우는 달랐다. 두 나라는 무려 39년에 걸친 긴 전쟁을 했고, 이는 당시 몽골이 가장 어렵게 치룬 전쟁에 속했다. 이 전쟁은 몽골의 세계정복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고려를 패배시킨 원나라는 일본의 가마쿠라정권이 복속할 것을 거절하자 남송과 일본의 연합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1274년 고려와 연합군을 편성해 일본정벌에 나섰지만 태풍으로 실패했다. 몽골은 일본과 베트남 정도를 정복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쿠빌라이는 1279년 인구 3000만의 남송까지 멸망시켜 마침내 세계제국을 완성했다.
대몽골제국은 세계 역사상 유일한 세계 제국이며, 그 흥망은 유라시아 일대를 대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세계사의 대변혁속에서 한민족의 역사도 전개되어 갔던 것이다.
18. 1000년의 역사 인물 칭기스칸의 탄생지에 직접 가보니...
몽골제국 이야기(中)
1. 칭기스칸이 탄생하고 성장한 몽골고원
몽골에는 특별시에 해당하는「울란바토르」와 21개주(아이막:aymag)가 있다. 이중 동북쪽의「헨티」주가 바로 칭기스칸이 태어나고 세력을 모아 세계제국을 건설한 발원지다. 헨티주는 면적 8만㎢로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으나 인구는 7만2천명에 불과하다.
주도는「온드르항」으로, 지난해 말부터 이름을「칭기스칸市」로 바꿨다. 헨티주에는 群에 해당하는 솜(sum)이 18개가 있는데 이중 북동쪽끝 러시아와 경계에 있는「다달솜」이 칭기스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칭기스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그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그곳을 직접 보고싶은 마음 역시 커졌다. 그래서 찌는 듯한 더위 속에 다시 몽골을 찾았다.
다달솜을 방문하려면 먼저 울란바토르에서 칭기스칸시까지 330㎞를 달려야한다. 포장도로지만 비포장과 다름없어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7시간이 걸렸다. 이어서 다달솜까지는 275㎞의 비포장 초원길로, 휴식시간을 포함해서 11시간 걸렸다. 오후1시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 7시까지 밤을 꼬박 지새우며 총 18시간의 강행군 이었다.
일반 차량으로는 어림도 없다. 웬만한 물속과 뻘판을 지날 수 있는 특수 RV차량이 필요하고, 사고·고장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적어도 2대 이상이 워키토키로 교신하면서 가야 한다. 동북쪽 러시아 국경쪽으로 갈수록 숲은 울창하고 강물은 맑아졌다. 가는 중에 몽골의 3대 강인 톨강, 헤를렌강, 오논강을 모두 만났다.
몽골지도(위)와 칭기스칸시 입구(아래). 붉은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헨티주다.
2. 테무진의 탄생과 아버지의 죽음
몽골제국의 창시자이며 초대 대칸은 ‘칭기스칸’이다. 그는 미미한 세력이었던 고원동부 주변부족을 통합하여「전몽골칸국」을 세웠다. 이어 메르키트,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등 강성한 이웃 몽골부족을 차례로 정복하여 몽골고원을 장악하고 마침내「대몽골국」을 출범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역사적인 대원정에 나서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
그가 있었기에 몽골제국이 존재했고, 몽골제국으로 인해 세계는 통합과 교류라는 역사상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세계화」는 이미 그때 시작된 셈이다. 그런 위대한 칭기스칸이지만 300년간의 청나라 지배와 러시아 영향력하에 있던 시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1995년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는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스칸을 선정했다. 그의 고향을 돌아보면서 그의 시대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몽골비사」는 몽골인들의 조상과 건국과정에 대해 몽골어로 기록된 방대한 초기문헌이다. 주인공은 ‘테무진’(후에 칭기스칸)이다. 일찍이 부친을 잃고 황량한 초원에 버려졌던 그가 어떻게 외로움과 굶주림과 위험을 이겨내고 약탈과 보복이 횡횡하는 유목민의 근원지 몽골고원을 통일한 후 정복전쟁을 통해 대몽골제국을 건설했는지,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몽골의 한 부족 ‘보르지기드’의 부족장 ‘예수게이 바아타르’는 메르키트족의 ‘칠레두’가 신부를 데려오는 길을 습격해서 신부를 빼앗아 버리는데 이 신부가 칭기스칸의 어머니 ‘후엘룬 카툰’이다. 1162년 예수게이와 후엘룬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예수게이는 그가 사로잡은 타타르장수 이름을 따서 테무진이라 이름지었다. 그 장소가 오논강변의「델리운 볼닥」이다.
테무진이 아홉 살이 되자 예수게이는 후엘룬의 친정인 옹기라트족 마을에 가서 ‘부르테’라는 처녀와 결혼시킨 후 풍습에 따라 테무진을 처가에 남겨두고 돌아오다 타타르족 게르에서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 숨졌다.
칭기스칸 탄생지(위·1962년 지정)와 칭기스칸 탄생 후 목욕한 냉천(아래).
3. 테무진에게 닥친 시련과 불굴의 투혼
예수게이가 죽자 그 통치하에 있던 몽골부족은 후엘룬과 테무진을 비롯한 어린 자식들만 버려둔 채 다른 목초지로 이동해 테무진 일가는 몰락한다. 이때부터 여장부 후엘룬은 어린 자식들을 홀로 기르면서 초원에서 생존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테무진은 이복형 ‘베르테크’를 살해하고 가장으로서 일가가 초원에서 자리를 잡도록 한다. 그러나 장래를 우려한 몽골족 일파(타이치우트)가 다시 공격했다. 테무진은 포로가 되어 수년간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과 재회한 테무진은「부르칸 산」남쪽으로 옮겨가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다 어느날 전 재산인 말 여덟마리를 도둑맞았다. 테무진은 즉시 잃어버린 말을 찾아 정처 없이 나섰고 그 과정에서 ‘보르추’를 만나 함께 힘을 합해 말을 되찾았다.
테무진이 찾은 말 중 일부를 나누어 주겠다고 하자 보르추는 “나는 좋은 동무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왔다. 무슨 전리품이라고 내가 갖겠는가?”라고 답했다. 이후 둘은 평생 동지가 되었다.
칭기스칸과 보르추가 만난 오논강변(위)과 칭기스칸이 피신한 부르칸산(아래).
테무진은 자리를 잡자 헤를렌강을 따라 내려가 아홉 살때 정혼한 부르테를 찾아 돌아왔고 세력도 늘어갔다. 그러나 이런 안정도 잠시. 과거 예수게이에게 후엘룬 신부를 빼앗겼던 초원의 강자 메르키트족이 원한의 보복 공격을 해 이번에는 예수게이의 며느리이자 테무진의 부인인 부르테를 납치해갔다. 테무진은 부르칸산으로 도주했다.
기운을 차려 돌아온 테무진은 부족을 재건하면서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형제맹약)관계였던 케레이트의 ‘토그릴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토그릴칸은 쾌히 응하고 자신의 2만 군사와 안다인 자다란의 ‘자무카’ 2만 군사로 메르키트를 협공하여 와해시켰다. 테무진은 부르테를 되찾았다. 부르테는 납치되어 잉태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치’(손님이란 뜻)란 아들을 낳았다.
4. 전몽골 칸 → 대몽골국 대칸 → 대몽골제국의 출범
테무진은 토그릴칸, 자무카라는 동맹군과 보르추, 젤메, 무칼리 등 동지들의 도움으로 분열된 나라를 다시 통합한 후 1189년 귀족회의인 쿠릴타이에서「전 몽골국」의 칸으로 추대되어 칭기스칸이란 칭호를 받았다. 테무진은 28세로 전 몽골족을 부흥시켰고, 이것이 대몽골국의 기초였다.
칭기스칸은 전체 몽골부족통일을 위해 매진했다. 1190년「달란 발주트」평원에서 자무카와 최초의 전쟁을 벌였으나 자무카가 승리했다. 그러나 자무카는 동족 약탈로 신망을 잃어 오히려 많은 부족이 달아나 칭기스칸 진영에 합류했다. 1196년에는 토그릴칸과 연합하여 금나라 군대에 쫓긴 타타르 부족을 섬멸했다. 이때 금나라는 토그릴에 ‘옹칸’이란 칭호를 내렸다.
1201년 자무카는 타타르, 메르키트의 잔존세력과 나이만을 자기세력으로 편입해 칭기스칸, 옹칸과 더불어 초원을 나누어 지배했으나 헤를렌강 하구「쿠이텐」전쟁에서 패배해 세력을 잃었다. 1202년 칭기스칸과 옹칸은 메르키트, 타타르를 이어 정복했다.
1203년 케레이트 옹칸의 아들 셍굼은 자무카와 결탁하여 칭기스칸에 대항했으나 결국 멸망했으며 이듬해 칭기스칸은 나이만까지 정복하여 메르키트,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등 주요 소칸국과 휘하의 부족들을 모두 복속시키게 되었다. 드디어 1206년 오논강 상류에서 역사적인 대쿠릴타이가 열리고 칭기스칸은 대몽골국의 대칸으로 추대 됐다.
자무카와 대결했던 달란 발주트 평원(왼쪽)과 다달솜, 칭기스칸 비석 앞의 필자.
이는 그 후 세계사에 불어 닥친 대폭풍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몽골제국은 불과 25년만에 로마가 400년간 정복한 땅보다 훨씬 넓은 땅을 지배했다. 이런 이유로 칭기스칸은 뛰어난 군사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인으로, 천년의 역사위인으로 꼽힌다.
칭기스칸 군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동력과 전 세계에 걸친 역참과 정보네트워크를 통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적을 압도해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경영의 키워드로 꼽히기도 한다.
칭기스칸은 시대를 앞서 보고, 남의 말을 경청하며, 철저히 능력본위로 인재를 쓰고, 동지를 아끼고, 법과 원칙을 앞장서 지키고, 생각과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다. 한마디로 진정한 리더, 그 자체 였다. 이러한 탁월한 리더쉽이 「대제국-몽골」의 탄생을 가능케한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출처]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 [ 11회 ~18 회] |작성자 ohyh45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 DNA 추적[1회~10회]를 보려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들 |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 [ 1회 ~10회]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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