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목: 밤 줍기의 행복
김명심
추석명절이 닥아 오면, 산과 공장이 어우러진 경기도 광주에서철물 장사할 때가 생각이 난다. 많은 거래처 중에 전기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있었다. 주변에는 소나무보다 밤나무, 은행나무, 상수리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전기에 관한 부속품도 만들고 완제품도 만들었다. 아파트공사 현장과 가게에도 도매로 납품하고 지방에는 택배로도 보내는 잘나가는 회사였다.
이 회사 이사님은 유별나게 바빴다. 잠시도 쉬지 않고 동서남북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커피는 꼭 우리가게에 와서 마셨다. 공장안에서 커피를 마시려면 직원들 눈치 보여서 거북하다며 오며가며 마셨다. 커피를 쉬엄쉬엄 마시는 것이 아니고 물을 마시듯이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 와중에 믹서커피보다는 블랙카누커피를 좋아했다. 커피는 믹서만 있는 줄 알아서 좋아하지 않았다. 이사님 덕분에 블랙도 알게 되었고, 카누커피도 좋아하게 되었다. 물 마실 시간도 없다고 하면서도 카누커피는 맡겨놓은 것처럼 와서 마셨다.
그런데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면 더 바빴다. 가게에 올 때마다 커피 값을 가져왔다며 옥돌같이 매끈매끈한 붉은 밤을 한 봉지씩을 가져왔다. 은행도 가져와서 겨울에 난로 불에 구워먹으라며 은행의 효능까지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어느 날은 상수리를 주워서 묵을 만들었다며 한 사발씩 담아오기도 했다. 또 토요일만 되면 밤과 은행을 주우러 가자고 했지만, 가게 문을 내리고 갈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미루다 보니 추석명절이 되었다. 급한 물건이 있어서 공장에 있다며 뒷산에 빨갛게 떨어진 밤을 주우러 가자고 했다. 나는 추석전날이 남편 기일인지라 추석명절을 가게에서 보냈다.
해마다 가을바람만 불어오면 공장 뒷산에 밤이 빨갛게 떨어진다며 자랑을 했다. 도대체 얼마나 빨간 밤이 많이 떨어지기에 저리도 밤을 줍자고 몸살을 할까? 나도 몹시 궁금했다. 분명히 산밤이 수북이 떨어진 곳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명절이라 사람들이 주워가지 않아서 더 빨갛게 쌓였을 것이라며 재촉을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냐고 묻자 “빨갛게 쌓여있는 밤을 가져오는데 무슨 시간타령이냐”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산에다 밤을 자루 째 맡겨놓은 것을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이사님 말처럼 명절에 산에 간 사람이 없으니 맞는 말이었다. 속는 샘치고 따라 나섰다.
준비물은 튼튼한 20키로 국산마대 하나면 된다. 뱀에 물릴 염려가 있으니 필히 장화를 신으라고 당부를 했다. 뱀 소리를 하니 영 탐탁지 않았다. ‘밤을 얼마나 주워올지도 모르지만, 뱀이라도 물리게 되면?’ 하는 염려가 스멀스멀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하지만 아버지 기일만 지내고 간 큰아들이 명절날 처가에 들렸다가 온다는 전화가 왔었다. 이사님의 말대로라면 빨갛게 쌓인 밤을 쓸어오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아들은 고사하고 두 손자가 눈에 아른거렸다. 시골 할머니 집에 오면 도시에서는 흔하게 볼 수없는 산밤을 손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물론 시장에 가서 돈을 주면 살 수는 있다. 하지만 산에서 빨갛게 떨어진 밤을 줍는 즐거움이나 행복한 마음까지는 살 수가 없다.
두 손자는 내겐 유별한 손자다. 큰 아들이 스물 일 곱에 결혼을 했는데, 칠년이 되도록 태기가 없었다. 제일로 마음이 괴롭고 아팠던 때는 봄이었다. 추운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였다. 회색나무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날 때나, 꽃이 피려고 꽃봉오리가 맺힐 때였다. 꽃봉오리는 꼭 임산부의 배처럼 보였다. 버스를 타나 전철을 타나 내 눈에는 배부른 임산부의 배만 보였다. 그렇게 가슴조이며 기다려 칠 년 만에 태어난 손자다. 한명도 감사한데, 다음해에 또 한명의 손자가 탄생했다. 하늘에서 맺어준 천생연분인지, 갈라서려고 할 때 찾아온 두 손자이기에 더 없이 귀하고 소중한 손자들이다. 그런 손자들에게 달달한 산밤을 주워서 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산에도 가지 않았는데 툭! 툭! 하고 밤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산밤이 얼마나 많기에 빨갛게 쌓여서 쓸기까지 할라고?’ 은근히 기대가 됐다. 덩달아 맘이 바빴다.
그런데 막상 산에 올라가보니 빨갛게 쌓였을 거라고, 고무풍선처럼 부풀었던 기대는 바람 빠진 풍선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허탄한 웃음을 웃고 말았다. 나한테 장담을 하며 채근했던 이사님이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사님, 밤나무 숲속에 왔는데, 시간이 없지 밤이 없겠어요. 이곳은 초입인지라 없지만 올라가다 보면 빨갛게 쌓여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떨지 말고 올라가 봅시다.” 내가 먼저 서둘러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옥돌처럼 매끈한 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군데군데 한 움 쿰씩 모여 있기도 했다. 때로는 툭툭 떨어지며 머리통을 정통으로 맞히기도 했다. 하지만 즐거웠다. 명절에 이런 호사를 누려보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니었다. 마대를 끌고 정신없이 주워 담았다. 다람쥐가 밤을 움켜쥐고 사근사근 밤을 갉아먹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먹던 밤을 내던지고 훌쩍 뛰며 도망을 쳤다. 다람쥐에게 미안했다. 이들의 겨울양식을 싹쓸이 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잠시 쉼을 갖고자 하는데, 밤알이 툭! 하고 화가 난 것처럼 머리위로 떨어졌다. 밤알만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밤송이가 반쯤 벌어진 것도 있었다. 벌어진 밤송이 모양이 손자들이 웃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밤송이 그대로 자루에 담았다. 손자들에게 밤이 나무에 달려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뱀이 있을 거라고 했지만, 요행인지 다행인지 뱀은 만나지 않았다. 이사님이 하는 말이 재미있었다. “뱀도 명절을 지내려 친척집에 갔나 보네요. 산에 올 때마다 한두 마리는 만나는데, 오늘은 없어서 다행입니다. 밤은 주우러 오자고는 했지만 은근히 걱정을 했거든요.”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사님 덕분에 올해 추석은 완전히 대박입니다. 명절이면 헛헛했던 마음이 훈훈합니다. 해마다 이런 추석이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내가 더 고맙습니다. 나는 명절이라서 밤이 빨갛게 떨어져 있을 줄로만 알았지요. 명절에 누가 산에 오리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나저나 주울 만큼 주웠으니 달달한 커피나 한잔 하고 내려갑시다.” “아니, 산에서 커피는 무슨 커피에요?”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커피는 들에서나 산에서나 기본이지요. 얼음을 동동 띄워서 가져왔으니 시원할 것입니다. 땀 흘리고 나서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의 커피는 힘이 솟아나게 하거든요. 내가 지금까지 얻어먹었으니 오늘은 내가 대접하려고 준비해 왔습니다.” 하면서 어깨에 짊어졌던 가방을 풀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산에까지 음료수처럼 가져올 줄은 몰랐다. 일회용 종이컵까지 준비를 해온 정성에 감동했다. 커피는 뜨거운 물로만 타 먹는 줄 알았다. 얼음을 동동 띄웠다고 하더니 정말로 얼음이 그대로였다. 얼음이 있어서인지 커피가 음료수처럼 시원하고 맛있는 커피는 처음이었다.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넘어가는 커피는 목젖을 시원하고 쌉쌀하게 휘감아 적셔주는 절묘함의 맛은 환상 적이었다. 온몸의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이런 맛의 커피가 있는 줄은 난 정말 몰랐었다. 온몸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로 출렁거렸다. 이사님이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이 우리가게에 와서 커피를 물처럼 꿀꺽꿀꺽 마시는 이유를 토해냈다. 자신도 꿀꺽꿀꺽 물을 마시듯이 마셨던 것이 걸렸던 모양이다.
사장님은 부인의 여동생 남편이다. 자신이 사업하다가 망하고 오고갈 때가 없을 때 동서가 사장인 공장에 오게 되었다. 때로는 속상할 때가 많다고 했다. 일하다 커피한 잔을 마시려고 해도 당최 눈치가 보여서 마음 놓고 커피를 마실 수가 없어서 택배 보내려 간다고 하고 우리가게에 와서 급체로 커피를 마시고 간다고 했다. 회사에 휴게실이 없느냐고 했더니, 사무실에서 보면 회사 안이 훤히 보이는 CCTV를 해 놓았기에 아무데서나 커피를 마실 수가 없다고 했다. 자신이 어려울 때 많이 도와주었고, 처제나 부인에게 해가 될까봐서 무던히 조심하며 일한다고 했다. 이제 나이 육십이 넘었으니 앞으로 한 십년만 더 버티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십년이면 강산이 한번은 변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동안에 두 아들 결혼도 시켜야 되니, 길지 않다고 했다. 마음이 짠했다. 커피한 잔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직장을 앞으로도 10년을 더 다녀야 한다니 내가 맥이 빠졌다. 그래서 유난히 가을만 되면 가을 줍기에 바빴을까? 나에게 이런 사사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동갑이었고 신앙도 같았다. 거래를 하게 된 것도 같은 신앙인이었기에 가능했다. 답답했던 속내를 토해내더니 부끄러운지 멋쩍게 웃었다. 가을 줍기만 한 것이 아니고 이사님의 아픈 마음까지도 주울 수 있었다.
가지고간 마대는 채우지 못했지만 두 아들에게 나누어 줄만큼은 주웠다. 많고 적음의 양이 문제가 아니었다. 산에서 공짜로 주웠다는 것이 마음은 부자였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자루 그대로는 들고 올 수가 없었다. 이사님이 일어나더니 자신의 자루에서 내 자루에 밤을 퍼 담았다. 내가 깜짝 놀라자 “사장님, 나는 또 산에 가서 주우면 됩니다. 공장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이 내 밤인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커피 값 드리는 것입니다.” “밤으로 커피 값을 받아보기는 내 생전 처음이네요. 밤이 더 달달하겠는데요. 고맙습니다.”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사님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칡넝쿨을 잘라서 짊어지고 갈 수 있도록 끈을 만들었다. 가득 찬 마대는 이사님이 짊어지고, 나는 반쯤 찬 마대를 머리에 이고 내려왔다. 머리는 무거워도 기분은 산심을 캔 기분이었다. 욕심껏 이고 지고 오면서도 은행나무가 궁금했다. 은행나무 밑에는 은행이 수북했다. 은행은 아무도 주워가지 않았다.
"내일은 은행을 주우러 옵시다. 은행이 건강에 좋답니다." “이사님, 이래서 옛말에 '가을에는 없는 친정집에 가는 것보다 산에 간 것이 낫다'고 했나 봅니다. 은행도 주우면 많이 줍겠네요. 가을이 게으른 사람 부지런하게 만드네요. 내일도 오고 휴무 끝날 때까지 와서 주워봅시다.” 하면서도 가슴이 뜨끔했다. 욕심꾸러기인 나를 들킨 기분이었다. 이사님은 지고 간 밤 마대를 마당에 부어놓고 ‘산밤은 벌레가 많아서 골라내야 한다.’며 좋아한 커피도 마시지 않고 반쯤담긴 마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던 길로 돌아갔다.
큰아들과 며느리와 두 손자가 왔다. 두 손자가 할머니를 부르며 달려든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 큰손자가 묻는다. “응 이것이 산밤이란다. 아주 달달하고 맛이 있단다.” “이것이 밤이라고요? 밤은 캄캄한데......!” 세 살짜리 어린아이의 말에 웃음도 나왔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떡 벌어진 밤송이를 내 놓자 그것이 더 신기한지 참새가 입을 쩍쩍 벌리며 재잘거리는 것처럼 두 손자도 쫑알댄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지 입에다 대보고 꼬막손으로 만져보는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세 살짜리 큰 손자가 형이라고 두 살짜리 동생한테 무섭다며 밤송이를 만지지 못하게 했다. 형이라고 동생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니, 피를 말리며 기다렸던 칠년의 가슴앓이가 한 순간에 녹아내렸다. 감동이었다.
당장에 삶았다. 참새같이 쫑알대는 입속에다 파슬파슬하고 달달한 산밤의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산밤의 맛과 토정 밤 맛을 어떻게 구분을 할 수가 있을까마는 할머니의 사랑을 달달한 밤 맛과 함께 기억되게 하고 싶었다. 남들 다 노는 명절에 가을을 줍자고 보채는 이사님 덕분에 두 손자에게 확실히 밤 할머니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풍성한 추석명절이었다. 산에서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의 맛과, 파실파실하고 달달한 산밤의 맛을 꿈엔들 잊힐리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