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만나야 할 사람들
곤륜산(崑崙山).
가히 중원을 얕잡아 보는 천악(天嶽)이라 할 수 있다.
북방(北方)에는 겨울이 빠르다. 중원은 늦가을일진대, 곤륜산은 벌써 백두
옹(白頭翁)이 되어 버렸다.
눈보라가 심하다. 산상의 수목은 이미 설화옥수(雪花玉樹)로 화해 버렸다.
비파 소리 같은 눈바람 소리 가운데, 흘러드는 한기는 살 조각을 한 점
한 점 베어 낼 듯 차디차다.
시월 초에 불과하지만, 곤륜산 정봉(頂峰) 부근은 이미 한겨울이었다. 그
리고 산중턱은 핏빛 단풍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으니, 가히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축융곡(祝融谷).
유황(硫黃)의 골짜기이다. 축융곡으로 접어들면 코를 매캐하게 만드는 유
황 내음에 취하게 된다.
축융곡은 한 달 전부터 인산인해(人山人海)로 뒤덮여 있었다.
삼산오악(三山五嶽)에서 몰려든 정파협사들은 일사불란한 진세를 이룩하
며 축융곡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으며, 그들의 목적은 축융곡 안으로 스며
든 백도의 위선자들을 응징하는 것이다.
백도인을 이끌고 있는 인물은 오랫동안 은둔해 있던 곤륜의 종대선생(鐘
大先生)이었다.
그는 다년 간 대명무문(大明武門)을 이끌며 백도의 위선자들을 암중 척살
해 왔던 노익장이 아니던가?
그는 지난 봄에 분연히 의검을 쳐들었고 천하각지로 의첩(義帖)이라 불리
우는 밀지가 전하였다.
이어 삼산오악에서 동조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대명무문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냉약빙이다. 그녀에게는 옥검성녀
(玉劍聖女)라는 별호가 붙여진 상황이며, 그녀의 권위는 과거 관산검협
(關山劍俠) 잠풍(潛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축융곡은 계절이 없는 곳이다.
언제나 같은 정경, 메말라 버린 붉은 흙과 균열이 심한 거대한 암괴들,
그리고 검산도림처럼 삐죽삐죽 솟아오른 난석군(亂石群).
키가 낮은 관목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다고는 하나, 전체적으로 보아 식물
이 거의 없다.
그러하기에, 멀리서 본다면 핏빛의 골짜기로 보이는 것이다.
축융곡이 포위된 지 한 달째이되, 누구도 감히 축융곡 안으로 접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축융곡 일대에는 기문대진이 펼쳐져 있는 바,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기
문대진은 파괴되지 않았다.
해서 종대선생은 죽음을 겁내지 않는 열사들을 규합하여 기문진 안으로
들어가 자폭하여 진세를 파괴하는 방법을 쓰고자 하였으나, 그것조차 허
사였다.
이백여 명의 영걸(英傑)이 진세 안으로 날아들었지만, 일각도 아니 되어
모조리 제압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혈도가 찍힌 채 곡 외부로 내던져지고 만 것이다.
혈사풍(血砂風)이 자욱이 일어난다. 안력이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핏빛
모래가 회오리치듯 치솟아 오르는 그 속을 뚫어 볼 수는 없다.
무수한 협사들이 축융곡으로 접어드는 모든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바, 무사
들의 숫자를 모조리 따진다면 거의 이만에 달한다.
멀리는 남해(南海) 청호각(淸湖閣)과 태행산(太行山)의 운중검부(雲中劍
府), 그리고 동해칠십이군도(東海七十二群島)까지…….
가깝게는 이제까지 잠풍을 맹주로 추종하였던 강호십팔가문(江湖十八家
門)까지…….
가죽 신발에 풀잎이 질끈 밟혔다.
그는 일각 전에 축융곡 어귀로 접어들었다.
무수한 무사들이 포진하고 있기에, 잠입하기는 오히려 쉬웠다.
백무영은 화산파(華山派) 제자 행세를 하며 포진 속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백사십 개 방파가 모였다. 강호가 이룩된 이래 가장 많은 방파가 연합
되었다 할 수 있다."
백무영은 팔짱을 끼고 축융곡 쪽에서 치솟아 오르는 피모래 바람을 응시
하고 있었다.
'건곤미리혼돈진(乾坤迷離混沌陣)! 중원의 귀재(鬼才), 만박의 최후 진세
이다. 저 안에 만박 일행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백무영은 안전한 장소에 흑란을 맡기어 둔 다음에, 어풍비행공(馭風飛行
功)을 시전하여 곤륜산에 당도한 것이다.
'사실 이 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감회에 사로잡혔다.
소수미랑과 백비룡이 신혼살림을 꾸민 곳은 축융곡으로 접어드는 길목에
있는 무릉농원(武陵農園)이 아니던가?
무릉농원은 이십 년 전의 혈사가 시작되었던 근원점이며, 또한 백무영이
탄생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는 천천히 죽립을 내렸다. 그리고 두 눈에서 한성(寒星)의 빛 같은 예
광이 흘렀다.
"종대선생은 엄청난 실수를 했다. 그분은 잠풍을 무너뜨리기 위해 몽고왕
부 쪽 무사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솔직히 그들은 이리를 몰아내고자 하
는 호랑이들이거늘, 종대선생은 세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그들과 연
합한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인자(忍者)도 은밀히 섞이어 있다. 모두 사륵
이 보낸 자들이다."
백도세력에는 정체 모를 자들이 대거 끼여 있었다.
용모와 옷차림은 위장을 할 수 있으되, 눈빛이며 기세는 감추기 힘들다.
백무영은 세 명에 하나꼴로 마도인이 머물러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고월의 세력, 사륵의 세력이 은밀히 섞이어 있다. 종대선생과 냉약빙은
대세의 흐름을 잘못 읽고 있다. 그들은 잠풍이 진정한 정파인이라는 걸
모른다.'
사실 잠풍 일행은 백도인 가운데 백도인이다.
백무영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고는 하되, 지난 이십 년 간 그들은 백도
를 굳강히 이끌어 왔다.
그들은 겉으로 위선자 행세를 하고 속으로는 마도세력의 팽창을 암중 경
계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백도를 위해 동귀어진(同歸於盡)하고자 한다. 축융곡 안으로 접
어드는 자가 백도인이라면 제압하여 살려 보내고, 마도인이면 죽여 버리
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만박과 잠풍 일행은 마도의 거두들이 자신들을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그들은 연환마교의 우두머리들이 진세에 걸려들기만 기다리는 것이
다. 그러나 사륵은 그들 이상으로 병법진세에 달통한 인물. 그가 축융곡
의 함정에 빠져들 리가 없다.
사륵은 오십여 리 밖에 거대 세력을 포진시켜 놓고 사태의 추이를 유심
히 지켜보다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로써 흑도 백도를 한꺼번에 장
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륵, 넌 대단한 자다. 너의 가문 신풍가(神風家)는 능히 대륙(大陸)을
삼킬 힘이 있다. 하지만 넌 한 가지 착오를 했다. 그것은 백가의 후예가
건재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백무영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축융곡으로 접어드는 어귀 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곡구로 다가설수록 무사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리고 강한 경풍(勁風)이
일어나 폐부를 막히게 했다.
검을 꺼내 든 오백여 무사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지휘부에 속하지 않는
하급무사가 곡구를 향해 다가서는 것을 가로막는 이유는, 자칫 잘못하여
축융곡으로 들어서다가는 진풍에 휘말려 몸뚱이가 가루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백무영의 모습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관산검맹에서 보았던 많은 협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임시로 세운 군막 둘레에 머물러 있었다.
백무영은 팔짱을 낀 채 곡구 쪽으로 다가섰으며, 철검을 쥔 소년무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어느 문파의 노형이신지 모르되, 여기서 걸음을 멈추시오. 더 이상 다가
서다간, 문규에 저촉을 받소이다."
"문규라면 대명무문의 문규 말인가?"
"그렇소!"
"핫핫… 난 대명무문 사람이 아니니, 대명무문이 정한 법을 따르지 않아
도 괜찮아. 솔직히 난 대명무문에 받아 낼 빚이 있는 입장이지."
백무영은 웃으며 성큼 걸었다.
소년무사는 그를 가로막고자 하다가 기이한 반탄진기에 휘말려 주욱 미
끄러지고 말았다.
"어엇?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
총기 있어 보이는 소년무사는 백무영이 시전한 수법이 곤륜파 비전 반야
대능력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 냈다.
그가 몸을 바로잡고자 할 때, 백무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
다.
그는 느릿느릿 걸었지만, 실제적으로 몸이 나아가는 속도는 섬전처럼 빨
랐다.
그가 곡구를 향해 다가설 때, 도처에서 호각 소리가 들려 왔다.
"귀찮아지는군. 하나, 이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으니……."
백무영은 씨익 웃었다.
'약간의 소란을 일으켜야 한다. 훗훗, 어딘가 숨어서 머리를 굴리고 있을
사륵을 놀라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자가 마각을 나타내겠지.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안다면…….'
백무영은 일부러 정체를 노출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백 보를 가기 전에 천여 명의 무사들에게 포위되었다.
"멈추시오!"
곤륜파의 능향객(凌香客)이 무사들을 진두지휘한 채 엄숙히 소리쳤다.
백무영은 못 들은 척하며 계속 걸음을 내딛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군."
능향객은 슬쩍 눈짓을 하였으며, 곤륜파 젊은 무사 가운데 제일 뛰어나다
는 소리를 듣는 용봉쌍재(龍鳳雙才)가 기합 소리를 내며 퉁기어 올랐다.
"신룡출운(神龍出雲)!"
"용비구천무(龍飛九天舞)!"
용재와 봉재는 허공에서 방향을 자유롭게 바꾸는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
을 시전하며 권장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허공 가득 장영이 난무할 때, 백무영은 오른손을 쳐들어 죽간을 슬쩍 잡
아당기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소리가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용재와 봉재는 보이지 않는 새끼줄에 묶인
듯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우거지상을 하며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이쿠우!"
"종, 종학금룡수(縱鶴擒龍手)… 이건 본파의 무공인데?"
용재와 봉재는 종학금룡수라는 곤륜 절기에 당한 것이다.
종학의 절기란 진기를 풀어 흩트려 반탄력을 일으키는 수법이며, 금룡절
학이란 흡인력을 발휘해 사물을 끌어당기는 절학이다.
그것은 곤륜파에서도 최상승의 무공으로 알려진 것이다.
"난 바쁜 사람이지. 그러니 내 앞을 막으려 하지 말길 바래."
백무영은 느긋하게 말하며 걸음을 계속 내딛었다.
창- 창-!
도처에서 검이 뽑혔다.
능향객을 위시하여 대명철열사(大明鐵烈士)에 속하는 무사들이 기합 소리
를 내며 발검(拔劍)하는 것이다.
백무영은 십여 자루 검의 테두리에 휘감겨 버리는데, 역시 여유만만했다.
그는 취한 듯 흐느적거리기 시작했으며, 손발이 허우적거렸다.
그런데 이럴 수가? 여러 자루 검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지 못하고 허공만
가르는 것이 아닌가?
"어엇? 저 보법은 개방의 취팔선보(醉八仙步)!"
"으으, 저 자가 누구이기에 구파일방의 초식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단 말인
가?"
능향객 이하 모든 무사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백무영은 백도인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취팔선보에 이어서 비서무영
(飛絮無影)의 보법을 썼다.
비서란 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들강아지를 말한다.
무수한 검사들이 그의 몸 근처를 얼씬거리고 있으며, 도검이 쉬지 않고
날아든다.
한데, 그의 옷자락에는 검이 닿지 않았다.
내가강기를 시전해 검을 막아 내는 것도 아니다. 그는 유려한 몸놀림으로
다가서는 검을 모조리 피해 내는 것이다.
그는 곡구 가깝게 다가섰다.
사방에서 귀를 찢을 듯한 호각 소리가 일어나는 가운데, 사람의 장벽이
갈라졌다.
착검한 무사들이 도열해 걸어 나왔으며, 그 사이에서 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눈처럼 흰 궁장을 걸친 여인, 여인의 손에는 옥적(玉笛)이
쥐어져 있다.
학의 털보다도 흰 궁장의 허리에는 자줏빛 허리띠가 질끈 동여매져 있다.
허리띠에는 금빛 수술이 탐스러운 영부(令符)가 걸리어 있었다. 얼굴을
가는 면사로 살포시 감추고 있는 여인의 등장과 함께 다른 사람은 일제
히 검을 멈췄다.
"옥검성녀(玉劍聖女)시다. 무뢰배는 절을 하라!"
궁장여인 둘레에 있던 자들이 큰소리를 냈다.
옥검성녀, 바로 냉약빙(冷若氷)이었다.
냉약빙이 걸친 옷은 궁장이기는 하되, 꽤 수수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화용월태(花容月態)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빛을 발하
는 감이 있었기에, 어떠한 옷을 걸치든 그녀의 용모는 찬란하게 타올랐
다.
침어낙안(沈魚落上)이라는 말을 감히 쓸 수 있는 용모랄까?
그녀의 얼굴은 얇은 망사에 의해 감추어져 있는 바, 내공수위가 삼십 년
이상 가는 사람이라면 망사를 꿰뚫고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
어딘지 모르게 고독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녀는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아랫사람들을 자애스럽게 대해 주는 데에다
가 일생을 같이 할 남자를 정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성결녀 같은 인상을
주는지라, 강호의 영웅호걸들은 그녀를 백도의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
다.
"절하라, 잡배!"
호위무사가 크게 소리칠 때, 냉약빙은 조용히 손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섰
다.
그녀가 사박사박 걸어 나오자, 모든 사람은 숨을 죽이며 허리를 약간 조
아렸다.
그리고 그녀 뒤쪽의 위사들은 만에 하나, 백무영이 자객으로 화할 것에
대비하여 검자루를 바짝 거머쥐었다.
백무영이 쓸데없는 동작을 취한다면, 도처에서 살검이 날아들리라.
"귀하의 무공을 보니, 대단하군요."
"……."
백무영은 죽립을 낮게 내려 얼굴을 가렸다.
그의 외모는 전과 약간 다르기에, 냉약빙은 그를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시전하는 무공으로 미루어 보아 백도협사 같은데, 어이해 대명무문의 지
시를 따르지 않는지요? 대협은 대체 어떠한 분입니까?"
냉약빙은 꽤나 공손히 말했다.
그녀는 백도계의 화합을 위해 되도록 화를 내지 않고 있으며, 무공이 강
한 사람이 나타나면 불원천리 찾아가서 대명무문에 입문하기를 권하는
처지였다.
"난… 무문에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지. 후훗, 솔직히 난 무문에 받을 빚
이 있는 입장이지."
단단해 보이는 아래턱이 일그러진다.
그 순간, 냉약빙의 얼굴은 새파랗게 물들었다.
"빚이라니요?"
"글쎄, 꽤 많은 빚이지."
백무영은 천천히 얼굴을 쳐들었다.
죽립 깊이 감추어져 있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다.
'이럴 수가? 바로 이 자였단 말인가?'
냉약빙은 죽립 아래에서 나타나는 영준한 얼굴을 보고 몸을 휘청거렸다.
그녀는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잊고 흑! 소리를 내며 휘청
거렸다.
야수의 이빨처럼 하이얀 치열이 백무영의 아래턱에서 드러났다.
"난 거친 자야. 물론 날 잘 알고 있겠지!"
"으으, 악마 같은 자! 냉혈살흔!"
냉약빙은 치를 떨며 손을 휘둘러 댔다.
옥같이 고운 손이 매서운 경풍을 끌며 가슴으로 다가섰다.
백무영은 섬섬옥수(纖纖玉手)가 코앞까지 다가설 때에야 손을 쳐들었다.
그의 반응은 대단히 느렸지만, 냉약빙의 손이 가슴을 치기 직전 가냘픈
손목이 억센 손아귀에 쥐어졌다.
"비파산수(琵琶散手) 따위로 냉혈살흔을 잡진 못해!"
"더, 더러운 자!"
냉약빙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리고 도처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수백 자루의 검이 뽑히는 가운데, 검광이 충천한다.
"저 자가 냉혈살흔이다!"
"죽었다고 소문난 자인데, 살아났군. 강호의 살성, 저 자가 감히 옥검성녀
의 팔목을 잡다니!"
젊은 무사들은 분노하여 몰려들었다.
그들은 백무영이 냉약빙의 손목을 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죽음 같은 치
욕을 느끼는 것이다.
"훗훗… 애송이들이 덤비지 못하도록 하는 게 현명할 거야."
"놔라!"
"후후후… 난 쓸데없는 살육은 싫어하지. 물론 피비를 흘리는 걸 두려워
하지는 않아. 네가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백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냉약빙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잠시 잠깐이었으나, 냉약빙의 숨결이 격렬해졌다.
어쩌면 그녀는 백무영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그녀는 이제까지 단 한 번의 정사를 했다. 그건 백무영과의 정사였다.
그녀는 무사이기 이전에 여인이다. 그녀는 남자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한 자! 그래도 인정이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냉약빙은 눈물이 흘러내리려 하는 걸 애써 참았다.
하나, 진정으로 가슴이 메어지는 쪽은 백무영이었다.
사실 그의 첫사랑은 냉약빙이었다. 다른 여인은 냉약빙 이후에 알게 된
여인이다.
그에게 단 한 여인만 택하라 한다면, 냉약빙을 택할 것이다.
'단념해야 한다.'
백무영은 애써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저 여인을 위해 무정해져야 한다. 그 때 그 일은 영원히 비밀이 되어야
한다.'
백무영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난 축융곡 안으로 가겠다. 무사들이 나를 막지 않기를 바란다."
백무영은 냉혹스럽게 말하며 걸음을 내딛었다.
수많은 무사들이 기합 소리를 내며 떠올랐다. 강호의 젊은 무사들은 냉혈
살흔과 더불어 무공을 비교하고픈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과거
백무영이 함백이라는 절대자와 무공을 겨루고 싶은 충동을 느꼈듯이.
창- 창- 창-!
검성이 요란할 때, 냉약빙은 자지러지게 소리쳤다.
"안 돼요. 누구도 냉혈살흔의 적이 되지 못해요!"
"하앗!"
"내가 냉혈살흔을 베겠다!"
무사들은 흥분하였는지라, 냉약빙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수십 자루 검이 백무영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 때, 백무영은 슬쩍 손을 쳐
들어 원형의 궤도에 따라 흔들어 댔다.
만월심극혜검(滿月心極慧劍)!
비록 삼 성의 진력만으로 시전한 만월심극혜검이되, 그 위력은 절대적이
었다.
부동허공결(不動虛空訣)과 일점결(一點訣)을 터득한 이후, 백무영은 모든
검파의 절학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어떠한 기운이 일어나는 기미도 없다.
다만 수십 자루 검이 동시에 반으로 꺾어지고 말 뿐이었다.
우박처럼 떨어지는 검편(劍片) 가운데, 기고만장 덤벼들던 무사들은 사색
이 되어 몸을 멈춰 세웠다.
"검, 검귀(劍鬼)!"
"으으, 신묘한 검이다. 얼핏 보면 불가절학으로 보이는데… 냉혈살흔이
어이해 불가정종검(佛家正宗劍)을 시전한단 말인가?"
젊은 무사들이 자지러질 때, 백무영은 훌쩍 떠올라 축융곡 안으로 날아들
었다.
냉약빙은 탈진해 휘청거렸다.
초록색 옷을 걸친 몸종이 부축을 하지 않았다면, 기절하고 말았을 것이
다.
"이젠 다 끝난 일이야!"
"아씨, 냉정을 찾으십시오!"
몸종은 계월(桂月)이라 했다.
냉약빙은 흘릴 눈물도 없는 듯 멍한 눈빛이었으며, 계월은 쉬지 않고 눈
물을 흘렸다.
"다 틀렸어."
"아씨, 몽룡(夢龍)공자를 생각하셔야죠."
"몽룡… 그 아이는?"
"종대선생이 안고 계십니다."
"흐흑… 내가 살아 백도의 수치가 되고, 곤륜파에 불명예만 안기는군."
냉약빙의 입술이 파리해졌다. 그녀는 눈물이 흐르는 걸 애써 참았다.
대신, 그녀의 파리한 입술 사이에서 핏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 말을 하고자 하였는데… 이젠 할 필요가 없다.'
냉약빙은 허리에 매달린 검을 내려다봤다.
소녀 시절부터 그녀는 여인검왕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한때에는 열사의 여로를 거치며, 강호거마를 척살하며 산화하는
꿈을 키워 왔다.
그 때마다 그녀는 세 척 길이 검에 숙명을 걸어 보곤 했었다.
지금 이 순간처럼 검이 무겁게 느껴진 적은 없다.
허리에 매달린 검이 태산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나의 아가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녀가 망연자실해 할 때, 꽤 많은 무사들이 후미 쪽으로 치달려 가고 있
었다.
그들은 사륵이 보낸 은밀들이다.
그들은 냉혈살흔이 나타났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미친 듯 치달려 가는
것이리라.
또한 원로급 무사들 가운데 여러 명은 축융곡 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
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그가 바로 본좌를 구한 신비낭객(神秘浪客)이다."
"아아, 내게 오행혈검서(五行血劍書)를 전한 그 청년이다."
오행파(五行派)의 장문인은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개방의 방주 지위에 있는 철지신걸(鐵指神乞)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파의 태상호법(太上護法)이 바로 강호의 악마로 소문난 냉혈살흔이란
말인가? 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개방은 최근 들어 방의 규모가 급속도로 성장한 방파이다.
개방의 제자들은 상고비급을 상실한 방파를 방문하며 비급을 전하는 일
을 대신 한 바 있다.
솔직히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축융곡의 회합은 규모가 축소되
었을 것이다.
신비낭객은 백도의 은인으로 알려졌으며, 장차 백도를 이끌 맹주감으로
소문나고 있었다. 그는 구름 속의 신룡처럼 모습을 감춘 채… 백도를 돕
는 영원한 신비인이며 고금에 드문 대협객으로 알려지고 있었으며, 그가
지니고 있는 성가는 과거 백비룡이 지녔던 성가 이상이었다.
사실 백무영은 이미 자신의 아버지 이상으로 유명한 존재로 부각되고 있
었다.
강호방파인은 비급의 가치를 끔찍이 여기고 있는 바, 우연히 타파의 비급
을 얻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돌려주는 일이 거의 없다.
한데 신비낭객은 모든 비급을 본래의 문파에 돌려주지 않았던가?그 일로
인해 백도는 오랜 침체를 벗어나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강호의 은인인 신비낭객이 바로 냉혈살흔이라니?
유황(硫黃) 내음이 코를 찌른다.
축융곡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만여 무사들이 바글거리는 곳과 비교한다
면, 너무나도 조용하다고 할 수 있다.
스슷-!
갑자기 검은 선이 치솟아 올랐다.
"하앗! 운리번신(雲裏蒜身)!"
맑은 목소리와 함께 검은 선은 하나의 점으로 변화한다.
죽립을 기우뚱 쓴 청년의 모습이 허공에 걸리더니, 그의 모습이 갑자기
뿌연 안개처럼 흐트러지며 유황 안개가 갈라졌다.
그는 신형을 다섯 번 정도 퉁기어 올리는 가운데, 진세를 돌파해 냈다.
균열이 심한 암반 위, 거대한 창(槍)을 든 노무사가 서 있다가 그가 날아
드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으로 대어(大魚)가 걸려드는군."
그는 철창을 꽈악 거머쥐었다.
그는 청년이 바로 앞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창을 쳐들었다.
그의 창법은 악가신창(岳家神槍)의 경지를 한수 웃돌고 있었다.
일컬어 풍뢰차륜창(風雷車輪槍)!
창이 한 번 떨치어지면 천이백 가지 변화가 쉬임없이 퍼부어진다.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변화가 이어지고, 극랄한 창세로 인해 상대는 어포
처럼 난도질당해 고꾸라지게 된다.
그래서 풍뢰차륜창은 일명 패왕벽력(覇王霹靂)이라고도 불린다.
창의 무게는 백이십팔 근(斤). 하지만 체격이 장대한 노인은 젓가락을 놀
리듯 창을 가볍게 휘둘러 댔다.
"후훗… 축융곡에 접어든 용기가 가상하도다."
"……."
청년은 느릿느릿 다가섰다. 그의 얼굴은 죽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백무영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의 눈빛은 암울하게 가라앉아 있었
다.
노인은 백무영의 몸에서 뿜어지는 무서운 힘을 느낀 듯, 자신도 혼신공력
을 일으켰다.
"솔직히 노부는 그리 강한 사람이 못 돼. 하지만 노부를 눕히기 전에는
이 곳을 넘어가지 못한다. 노부를 죽인 후에야 이 곳을 지나갈 수 있다."
"……!"
백무영은 강한 살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의 모공(毛孔)에서 한무가 피
어 올랐다.
츳- 츳-!
뱀이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일대가 냉각되기 시작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뜨거운 기류에 뒤덮여 있던 일대가 한무에 뒤덮였으며,
땅바닥에 서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대단한 빙백공(氷魄功)!"
창을 든 노인은 내공이 흐트러지는 걸 느끼며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그는 순양공(純陽功)을 일으켜 한기에 저항하고자 했다. 하지만 백무영이
뿜어 내는 한기는 그의 내공으로 막기 힘들었다.
그는 백무영이 삼 장 앞으로 다가설 때에야 그의 무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빙하신공(氷河神功), 너는 빙하의 골짜기에서 왔느냐?"
"꼭 그렇진 않소."
"그럼 어디서 왔지?"
"난… 이 곳 사람이오."
"그럴 리가? 이 곳 사람이라니?"
"후후… 나에 대해 알려 하지 마시오. 다만 내 손에 죽기만 하면 되오."
백무영은 손을 쳐들었다. 그가 시전하는 초식은 절대구류검 가운데 제육
초가 되는 파천황(破天荒)이었다.
"철객(鐵客), 이 곳에 뼈를 묻어야겠소."
"노, 노부를 알다니?"
기겁을 하는 노인은 과거 흑도무림의 패왕으로 군림한 바 있던 철객이었
다.
그는 이십 년 가깝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인물이다.
백무영은 손을 천천히 이동시켰다. 그의 손에 오 성 진력이 모아지기만
한다면, 철객의 두개골은 썩은 두부처럼 바수어지리라.
"과거… 그분이 그랬듯!"
그의 하이얀 치열이 드러난다. 그는 살기를 억제하지 못하는 경지에 도달
한 듯했다.
"그분이라니? 으으, 네가 누구이기에 이 곳의 비화를 아느냐?"
철객은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일단 뒤로 물러나 피신해야 하는 것도 잊
었다.
백무영의 손은 점점 더 다가갔다.
그의 손은 희고 곱다. 남자의 손이라기보다 여자의 손에 가깝다.
손이 철객의 머리에 닿으려 할 때, 철객은 문득 백무영의 얼굴을 보게 되
었다.
검미봉목(劍眉鳳目), 실로 영준한 얼굴이 아니던가?
"흐으으… 그 얼굴은?"
철객의 머리카락이 빳빳이 일어났다.
"내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나았을 텐데……."
백무영은 입술을 질겅 씹었다.
"백비룡(白飛龍), 그대가 아직까지 살아 있었단 말인가?"
철객은 기겁하며 창을 떨어뜨렸다.
그는 잘 때에도 창을 놓치지 않는 인물인데, 백무영의 얼굴을 보고 놀라
창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백무영이 한 걸음 더 다가설 때, 그는 상대의 얼굴이 과거 그를 비롯한
여섯 사람의 이기심으로 인해 쓰러졌던 전설적 영웅의 얼굴과 약간 다르
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턱이 각이 졌었는데, 이 자는 갸름한 윤곽이다. 그리고 보다 섬세
하다.'
철객은 청천벽력의 충격에 휘어 감겼다.
그는 문득 상대를 느낄 수 있었다.
"너군. 무영(無影)……."
"훗훗… 이제야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육사부!"
백무영의 손은 허공에서 멈추어졌다.
"아, 네가 살아왔구나. 네가……!"
철객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백무영에게 무공의 기초를 알려 준 사람이다.
그는 도공(陶工)으로 지냈으며, 백무영은 그의 슬하에서 제반 무공의 기
초를 연마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철객은 백무영을 무해(武海)로 안내한 교사라 할 수 있는 것
이다.
그는 혈의육존(血衣六尊)의 막내였다.
과거, 그는 백비룡이 자신의 수하를 쳐죽였다는데 분개하여 극천단 위로
올라갔던 것이다.
"네가 돌아오다니… 아아, 네가 자랑스럽다. 너의 무공이 나를 능가할 정
도라니… 그간 기연(奇緣)을 많이 얻었구나."
철객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늙으셨군요."
"세월의 힘은 위대하지."
"후후후… 전 예전의 무영이 아닙니다. 전 제가 어떻게 혈의육존이라는
죄인들의 공동전인이 되었는가 알고 있습니다."
"으으, 그랬군. 그래서 날 죽이려 하는 것이군."
철객은 상체를 휘청였다.
'올 것이 왔다.'
그는 눈빛을 흩트렸으며 내공마저 흩트렸다.
"언제고 알 게 될 일을 알았을 뿐이다. 사실 우리 여섯 명은 너를 강자로
길러 네 손으로 복수하게 할 작정이었다. 그것만이 너의 가문을 붕괴시킨
혈채를 갚는 길이라 여겼기에……."
"변명하지 마십시오."
"변명은 하지 않겠다. 변명을 할 작정이었다면 지난 이십 년을 그리도 심
한 고통 속에서 살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철객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는 고개를 쳐들어 백무영을 올려다봤다.
"네 손에 죽는 게 소원이었다."
그는 죽음 따위는 겁나지 않는 듯 입가에 웃음꽃을 피워 올렸다.
백무영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손을 더 높이 쳐들었다.
"무영, 날 죽여 다오. 그리고 천하를 얻어라. 네가 한 마리 용이 되는 날
을 기다려 왔다. 아아, 이십 년 전에는 이런 날이 오리라 의심했는데…
너는 어엿한 절정무사(絶頂武士)가 되었구나."
"베겠습니다, 육사부."
"내 목숨은 이십 년 전에 사라졌다. 지난 이십 년 간은 허깨비로 지내 왔
다. 죽음은… 이미 오래 전에 익숙해졌다."
철객은 차라리 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건, 그가 진실로 죽음을 겁내지 않는
다는 증거일 것이다.
"내 마음을 약하게 할 순 없소. 천지신명이라 하더라도 나의 복수검(復讐
劍)을 멈추게 할 수는 없소!"
백무영은 처절히 소리치며 손을 내리쳤다.
철객은 눈을 뜬 채 손이 떨어져 내리는 걸 바라봤다.
우르르릉- 꽝-!
폭음과 더불어 암괴가 산산이 부서졌다.
머리통만한 바윗덩어리가 허공으로 퉁기어 오르며 거암이 형체도 없이
으스러졌다.
"으아……!"
백무영은 포효하며 떠올랐으며… 그가 축융곡 깊은 곳으로 날아들 때, 무
너지는 바위 틈에서 격정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못난 녀석! 독심장부(毒心丈夫)라 하거늘, 어이해 날 베지 못하는 게냐?"
철객의 목소리였다.
그는 바위가 부서진 곳에서 비틀비틀 일어나고 있었다.
백무영의 일 장은 그의 몸뚱이가 아니라, 거석을 산산이 부수어 버린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