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쫓는 者, 쫓기는 者
손씨(孫氏) 모녀는 일 년 만에 돌아온 자신들의 은인을
극진히 대접했다.
삼 년 전, 손부인(孫婦人)은 돌림병에 남편을 잃고
친정집으로 돌아가다가 녹림도(綠林盜)들의 마수에 걸려
그자들의 산채로 끌려가서 갖은 수모를 당했었다.
얼마 안 되는 재물을 빼앗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낮에는 그자들을 위해 밥과 빨래를 해야 했으며 밤이 되면 수십 명의 사내들에게 돌아가며 시달려야했다.
평범한 아낙이던 손부인에게 산채에서의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다.
물론 산채에는 다른 여인들도 여럿 있었지만
상당한 미모를 지닌 손부인은
산적들에게 단연 인기였기 때문이다.
노예와도 같은 중노동에 시도때도 없이 자행되는 겁탈에
그녀는 무참히 시들어갔다.
그렇게 이 년여를 지낸 어느날
손부인은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산채에서 탈출하고 말았다.
목숨을 건 이 탈출은 그러나 손부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산채로 끌려갈 당시 열살이 된 딸이 있었다.
헌데 이년이 지나 제법 소녀티를 내게 된 딸을 녹림도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자들의 음험한 시선에서 손부인은
이대로 가면 딸이 자신과똑같은 신세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딸과 함께산채를 도망쳐 나온 것이다.
다행히 산적들에게 잡히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오기는 했으나
막상 세상에 다시 나오니 그들 모녀의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친정집은 벌써 일 년 전 어디론가 이사를 가 버렸고, 그들 모녀를 반기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돌림병에 죽은 전 남편은 가난한 선비였던 탓에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내 그들 모녀는 굶주림에 지쳐 홍등가로 갔다.
기왕에 정조를 잃은 몸, 손부인은 자신의 육체를 팔아서라도 연명할 각오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병들고 거지같은 모습이 된 그들 모녀를 받아주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꼼짝없이 굶어죽는 일만이 남았다.
바로 그때, 그들 모녀에게 손길을 뻗친 인물이 있었다.
그는 하복생(下卜生)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사나이였다.
하복생은 가엾은 손씨 모녀에게 따뜻한 음식을 사주었고,
평생을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태산(泰山)에서 멀지 않은 제남성(齊南城) 외곽에 다점(茶店)을 차려 주기까지 했다.
한 달 동안 그는 손씨 모녀를 도와 가게를 운영했고, 그 후 아무런 말도 없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난 지금 그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손부인은 죽었던 남편이 다시 돌아온 듯 그를 반겼다.
이제 삼십대 중반인 손부인은 하복생보다 십여 살이나 연상이었다.
게다가 무뚝뚝한 하복생의 성격 탓에
두 사람 사이에는 별반대화도 없었다.
그러나 손부인은 이미 일 년 전부터 이 연하의 잔재미 없는 사내를
마음속으로 자신의 새로운 남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는 육체관계도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손부인은
자신의 몸으로라도 하복생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했고,
인의도덕 따위와는 거리가 있는 성격인 하복생은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삼십대 중반의 난숙한 손부인의 육체와
그녀의 헌신적인 봉사로 하복생은 더 할 수 없이 깊은 만족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손부인 역시 이년에 걸친 녹림산채에서의 수난으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육신이 하복생을 받아들이는 순간 다시 여자의 기쁨을 되찾게 된 것을 깨닫고 감격해했다.
비록 나이 차이는 나고 서로 살아온 환경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돌아온 하복생은 일 년 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약간 초췌한 몰골에 허름한 장삼, 어디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나이였다.
일 년 전 하복생이 쓰던 조그만 방은 그 동안에도 깨끗이 관리되어 있었다.
나무침상 하나와 요와 이불, 탁자와 의자하나가 전부였지만
이소박한 방은 하복생에게 더할 수 없는 포근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하복생은 이틀 동안 꼼짝도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가끔 손부인과 그녀의 열세 살 난 딸 손아유(孫雅柔)가 들어왔지만 그 외에는 아무도 그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하복생-!
그는 바로 항주성에 나타났던 제 사의 자객 담사(潭邪)의
또 다른 변신이었다.
담사처럼 자객이란 위험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누구도 모르는 은신처가 필요했다.
담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에게도 중원 곳곳에 몇 개의 은신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손씨 모녀가 운영하는 이 다점이었다.
사실 그가 손씨 모녀를 도와준 것은 인정이나 동정하는 마음으로 보살펴 준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게는 은신처가 필요했고 손씨 모녀는 그것을 위해 우연히 만난 것뿐이다.
어릴 때부터 세상의 비정함 속에 삶과 투쟁을 해온 그에게는
인간으로서 사랑이니 인정이니 하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살인를 위한 냉철한 이성과 잔혹한 독심,
그리고 계산된 행동만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
이런 그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산동성(山東省)의 성도인 이곳 제남성(齊南城)의 외곽에 자리한 손씨 모녀의 다점은 담사의 여러 은신처 중
무림맹이 있는 태산(泰山)과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도 최적지이기에 담사는 이곳에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곳이라면 자신의 정체에 대하여
의문을 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 그가 손부인의 남편으로 대상(隊商)들을따라 다니는 장사꾼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손씨 모녀도 그를 그렇게 알고 있지만...!
침상에서 일어난 하복생은 전신을 가만히 움직여 본 다음
의자에 앉아 김이 다 빠진 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지난 이틀 동안 그는 자신이 할 일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을 완전히 세웠다.
이번 암살에 동원된 네 명의 자객들!
자신을 포함한 이 네 명은 모두가 이 방면에서는 최고로
알려진 암살의 전문가들이며 각자가 한 가지 표적을 두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담사에게 있어서 이러한 배치는 즐거운 일이 못되었다.
만일 자신과 똑같은 목표를 노리는 다른 세 명의 자객이 존재한다는 진상을 몰랐다면 승산이 없는 입장으로 몰리게 될지도 모르는 입장이다.
우선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게 되고, 자칫 잘못될 경우에는
돈이 그의 코앞에서 다른 사람이 낚아채 가는 꼴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에게 일을 의뢰한 자들은 분명히 말했다.
자신이 표적을 해치우기 전에 그 표적이 없어진다면 자신에게로 선금 한 푼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멋지게 해치운
범천대공(凡天大公) 연대강 (燕大强)을 해치운 대가로
그 자신이 그 보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무림맹은 자신들의 차기 맹주인 연대강을 해친 살인자를
찾아내기 전에는 결코 추적의 손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담사는 천천히 움직일 준비를 했다.
팽노대로부터 곧 자신이 부탁한 정보가 도착한 것이다.
그 안에 그는 표적이 된 인물에 관해서
나름대로 조사할 수 있는 데까지 조사를 한다.
일을 하는데 있어 사소한 일이라도 중요한 것이다.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바늘구멍 같은 허점이라도
그에게는 치명적인결함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부터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철옹성과
나머지 다른 세 명의 자객까지도 상대를 해야 하는 것이다.
담사가 가게로 나가자 손아유가 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하숙부...!}
귀엽게 생긴 손아유는 급히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하하! 아유가 그 동안 많이 컸구나.}
계산대에 앉아 있던 손부인은 자신의 딸을 번쩍 안아드는 그를 보며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로 서른네 살인 손부인은 유난히 뽀얀 살결에 풍만한 몸을 지닌 상당한 미녀였다.
일 년 전 담사가 처음 만났을 때 만해도 굶주림과 병으로 인해 마르고 볼품없던 그녀가
지난 일 년 사이 화사한 장미처럼 만개한 것이다.
역시 여자란 존재는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만 시들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여섯 개의 탁자가 놓인 손부인의 가게는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아늑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때 담사를 발견한 몇몇 손님이 아는 척했다.
담사는 환히 웃으며 그들과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그것을 쳐다보는 손부인이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사랑하던 남편이 돌아온 것이다.
장차수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오 년 전인가 육 년 전인가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모종의 사건으로 악양성에 왔을 때 도움을 준 자가 있었다.
그 자는 비록 악양성에서 건달패에 속했지만 어쩌면 의외의 소득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객이란 따지고 보면 흑도(黑道)상의 부류 아닌가?
호태(胡太)라는 이름의 그 장한은 도박장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이제 갓 삼십이 넘은 호태는 장차수를 보자 조상을 본 듯 반가와 했다.
{아이고 이게 누굽니까, 장 어른 아니십니까?}
호태는 허둥지둥 장차수를 큰 주루로 안내했다.
{호태, 할 말이 있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세.}
장차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돈은 내가 낼 터이니 밀실 같은 곳이면 좋겠네.}
{아니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이 호태가 술값도 없는 놈은 아닙니다.}
호태는 허풍을 치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야! 이놈아, 어서 빨리 최고급 객실로 안내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
점소이는 호태의 말에 실없는 웃음을 지으면서도 황망히 조용한밀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푸짐한 술상이 들어오고 이어 교태넘치는 기녀들이 따라 들어오자 장차수는 손을 저었다.
{기녀들은 필요 없으니 내보내게.}
{아니, 장 어른, 여자가 없다면 무슨 재미입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호태에게 장차수는 침중해 말했다.
{자네의 호의는 고맙지만 은밀히 할 말이 있으니 나중에 오라고하세요.}
호태는 할 수 없는 듯 기녀들을 내보냈다.
이윽고 한 잔의 술이 오가자 장차수가 입을 열었다.
{호태, 자네는 나의 신분을 모르고 있지.}
{헤헤... 장어른의 신분이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저야 뭐 장어른이 어떤 분이든 간에 존경하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고맙네.}
장차수는 빙그레 웃었다.
{내 이런 말을 안 하려고 했지만 일이 워낙 중대해서 어쩔 수 없이 자네의 힘을 빌려야겠네.}
호태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장어른, 말씀만 하십시오.
장어른을 위해서라면 끓는 물이 아니라 불 속이라도 뛰어 들어가겠습니다.}
장차수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잘못하면 이 일로 자네의 생명까지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네.}
호태는 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호태는 장어들이 살려준 생명입니다. 명령만 하십시오.}
장차수는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비마영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순간 호태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비마영이라면... 자객으로는 유명한...}
{그렇네. 나는 비마영을 찾고 있네. 그가 악양성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행방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자네의 힘을 빌리고 싶은 걸세.}
{그 사람과 무슨 원한이라도...?}
호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자를 찾아야 하네.}
말끝을 흐린 장차수는 침음성을 터뜨렸다.
{으흠! 사실 나는 무림맹의 감찰전 소속의 당주네. 그 자를 잡기위해서 이곳으로 밀파된 것이지.}
호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림맹의 무사라고 해도 놀랄 일인데 감찰전의 당주라니...!
장차수의 신분을 안 호태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했다.
호태같은 뒷거리의 패거리들에게는 천하무림의 정세를 좌지우지하고 있는무림맹은 가히 하늘 밖의 하늘같은 존재인 것이다.
장차수는 그의 놀라는 표정에 싱긋이 웃었다.
{이번 일만 끝이 나면 내가 자네를 무림맹의 무사로 천거해 주겠다.}
이 말에 호태의 눈에서 빛이 났다.
강호무림 최강의 조직인 무림맹의 무사로 발탁된다면 낙양의 뒷골목쯤 손아귀에 넣고 뒤흔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장어른?}
호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악양성에서 행세께나 하는 흑도 인물 한 사람의 거취와 행적을알아야 겠네. 비마영을 찾으려면 뒷골목부터 족쳐봐야겠어!}
호태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독목수(獨目手)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발이 유달리 넓은 자이니 장어른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장차수는 눈에서 일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그자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해보게.}
-독목수(獨目手) 소패(小覇)!
악양성 내에서 제법 거들먹거리는 인물이다.
그가 하는 일은 인신매매와 암거래를 주로 하는데 무예도 고강한 흑도인이었다.
장차수의 손이 멈추었을 때 소패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얼굴에서는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내리고 전신에는 바늘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계속되었다.
잔뜩 움츠리고 미약한 신음성을 내는 소패의 몰골은 실로 처참했다.
호태는 장차수의 잔혹한 손길에 입을 딱 벌렸고, 감천수는 아예고개를 돌렸다.
감천수 자신도 결코 성인군자는 아니었으나 장차수의 지독한 손속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감천수는 무림맹 감찰전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마도인들이 왜 그들을 사갈시하며 공포를 느끼는가 하고..,
장차수의 표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흡사 돌을 깎아 만든 돌부처마냥 그의 숨소리도 평소처럼 변화가 없었다.
장차수는 소패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았다.
{이름은?}
소패는 우물거렸다
. 고통이 심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순간, 장차수의 발 끝이 일점의 사정도 없이 칼끝처럼 소패의 배심을 파고 들었다.
{으아악... 소패, 소패입니다!}
소패는 울면서 홀린 듯이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나이는?}
{마...마흔 둘 입니다.}
소패의 입에서 자신에 관해 모든 것이 실타래처럼 술술 흘러나왔다.
이 상태라면 자신의 십 팔대 조상까지 다 말할 것 같았다.
{좋아, 소패 악양성에서 살인청부를 주선해 주는 사람도 있겠지.}
{그것은...}
소패는 말을 우물거렸다.
그리고, 비록 찰나지간이었지만 그의두 눈에 공포가 스쳐 지났다.
{왜? 모른다고 말할 셈인가? 이 새끼야!}
장차수의 발이 소패의 사타구니 사이를 파고들었다.
퍼__ 억!
{크아_ 악!}
순간 소패는 폐부를 쥐어짜는 비명을 터뜨리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의 바지가 삽시에 피로 축축해졌다.
아마도 그의 남성의상징이 뭉개졌을 것이다.
하지만 장차수의 손길은 조금도 사정이 없었다.
소패는 이 자의 앞에서는 세상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는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은 설사 부모라도 다구칠 인간이다.
그리고, 설사 나중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의 이 고통을 더이상 견딜 수 있는 인내는 없었다.
자신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자는 자신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만... 알고... 있습니다.}
손을 멈춘 장차수는 계속 다그쳤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모조리 말해. 하나도 남김없이.}
소패의 입에서 두 명의 인물에 관한 말이 흘러 나왔다.
장차수는 마침내 네명의 자객중 한명인 비마영에게 한발 접근 한 것이다.
거의 한 시진동안 소패의 말을 들은 장차수의 입가에 그때서야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태는 계속 입을 쩍 벌렸고, 감천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쓰디쓴 고소를 지었다.
문득 장차수라는 사람이 감천수의 가슴에 서늘한 찬바람을 일으켰다.
그것이 공포라는 감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한동안 시간이 걸렸다.
골동품상을 경영하는 양(梁)노인은 전부터 호태를 알고 있었다.
그 호태가 소패의 소개로 왔다는 장차수를 데리고 찾아왔다.
장차수의 신태는 어제와 완전히 달랐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손에는 한 자루의 섭선을 든 것이 거부로 보였다.
양노인은 소패가 보내서 왔기에 믿을 수는 있었지만
웬지 거부감이 일어났다.
하지만 장차수의 부티나는 행색으로 보아 수고의 대가는 상당히 그에게 돌아올 것 같았다.
평소 때라면 그는 꺼림칙한 느낌에 손님을 따돌려 보냈겠지만
거의 석 달 가까이 일거리가 없어 그는 재정적으로나 그를 믿고 있는 자들로부터 불평을 듣고 있었다.
양노인은 내심 결정을 내리고 호패와 장차수를 밀실로 안내했다.
가게를 지나 안채에 들어서자 잘 다듬은 정원이 나타나고 대청이 나타났다.
{호태,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게.}
양노인의 말에 호태는 흠칫 했으나 장차수의 눈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허름한 나삼을 입은 여인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연아야, 이 손님을 잘 모셔라. 그리고 서재에서 있을 것이니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해라.}
연아라는 여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서재는 매우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가지런히 진열된 책과 고풍스런 가구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붓과 벼루 등은 주인의 서품을 자알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둥글게 나 있는 이중으로 된 창문과 구조는 어딘지 밀폐된 느낌이 들었다.
연아라는 여인이 차를 탁자 위에 놓고 나가자
양노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님께서는 소패를 어떻게 아시고 계십니까?}
장차수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산 사람이 죽은 자에 대하여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양노인의 입술이 새파래졌다.
{손님의... 말뜻은?}
{장춘원(長春院)의 주인도 그렇게 물었지만 결과는 소패와 다름이 없었소.}
장차수는 어디까지나 태연한 표정으로 양노인이 듣기에는 너무도 섬뜩한 말을 암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양노인의 턱 및에 실룩거렸다.
이 바닥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은 그가 장차수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다.
장춘원(長春院)은 주루로써 주인은 양노인과 마찬가지로
암중으로 자객들을 소개하는 중개인이었다.
그 장춘원의 주인과 소패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양노인의 왼손이 느릿하게 탁자 모서리를 짚어갔다
.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양노인, 그 손이 한 치만 더 움직인다면 앞으로는 한 손으로만 생활하셔야 될 것이오.}
장차수가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 비록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그 내면에는 무서운 위협이 담겨 있었다.
탁자 모서리에는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누르기만 하면 눈 앞의
인물은 다섯 가지의 암기에 고슴도치처럼 변해 버릴 것이다.
양노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어찌할 것인가?
기관장치를 발동할 것인가
아니면 이 독사같은 자의 위협에 굴복할 것인가?
사시나무 떨리듯이 경련을 일으키는 양노인의 손은 한 동안 그 자리에서 머물다 다시 돌아왔다.
잠시 동안 양노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 다.
그것으로 보아 그가 한동안 얼마나 공포와 갈등에 시달렸는지 알 수가 있었다.
{으음.}
양노인은 짧은 신음성을 토했다.
마치 천 근같이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듯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오?}
양노인이 이 사업에 발을 디딘 것은 삼십 년 전이다.
그가 지금이 나이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임기웅변과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차수의 태도에서 그는 이 사람이야 말로 자신이 만났던 사람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가장 위험한 인물임을 깨달았다.
이런 유의 인물에게는 음모나 귀계는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이미 모든 준비를 하고 온 것이다.
더 이상 저항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장차수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스쳤다.
{비마영의 거처를 알고 싶소.}
양노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행방을 찾기는 쉽지 않소.}
장차수의 눈빛이 심각해 졌다.
양노인의 표정에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작정 밀어붙일까도 생각했으나, 양노인의 말에 방법을 바꾸기로 내심 결정을 내렸다.
{쉽지 않다는 말은 바꾸어 말한다면 찾을 수도 있다는 말이겠지요?}
양노인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악양성 내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찾을 수는 있을 것이오. 허나, 그가 여기에 없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소이다!]
장차수는 차갑게 양노인의 말을 끊었다.
[그가 악양성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확실하오. 양노인, 시간은 하루뿐이오. 그 안에 그자의 행방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장차수는 입을 다물었다.
뒷 말은 듣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양노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오. 게다가 자금도 필요하고...}
양노인은 애원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비마영 같은 자는 절대로 그의 흔적을 남기지는 않소. 최소한삼 일은 필요하오.}
장차수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하루뿐이오
. 그리고 우선 천 냥 짜리 은표 한 장을 주겠소. 그를 찾으면 두 장을 더 주겠소. 허나, 만일 찾지 못한다면 양노인은 결코 무림맹 감찰전의 손길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오.}
양노인은 한 순간 얼이 빠졌다.
그는 비로소 이 자로부터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의 정체를 안 것이다.
상대는 바로 무림인이라면 치를 떤다는 무림맹 감찰전의 냉혈한이었던 것이다.
장차수가 떠난 뒤에도 양노인은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단 하루, 그 안에 비마영을 찾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죽음뿐이다.
당금 천하에 있어서 무림맹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잠을 자는 것이다.
양노인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었다.
수년 이래 몸을 움직이지 않아 전날의 날카로움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한때는 그도 자객의 길을 걸어온 살수였다.
조그만 인공 연못 사이로 목련(木蓮)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기화이초들이 온통 뒤덮여 있었다.
수면이 미풍에 가볍게 일렁거리자 누각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림처럼 이층으로 만들어진 누각 주위에는 온통 꽃향기로 가득했다.
백색 문사의(文士衣)를 입은 이십대 중반의 사내가 뒷짐을 지고누각에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검미에 한성(寒星) 같은 눈동자, 쭉 뻗어난 콧날 아래 굳게닫힌 입술, 흡사 여인처럼 수려한 미목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 백삼청년 뒤로 공손한 표정의 철혈무정(鐵血無情) 석무심이서 있었다.
석무심이 여기에 온 지 일다경이 지났지만 눈앞의 청년은 도무지 반응이 없다.
다만 그가 인사를 했을 때 가볍게 고개만 까딱 했을 뿐 일체의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오만한 태도에 석무심은 내심 울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로서는 눈앞의 인물에게 감히 분통을 터뜨릴 간담은 없었다.
이 인물의 눈 밖에 벗어난다면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상(文相) 또는 백마(白魔)라고 불리우는 모용천엽(慕容天葉)!
그는 자신의 조직에서 제이인자(第二人者)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배분을 따진다면 평배이나 위치면에서 보자면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문득 모용천엽의 시선이 석무심을 향했다.
{석형께서 하신 일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조금의 실수는 있었지만 임무는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낭랑한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포근한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석무심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저로서는 별로 한 일이 없는데...}
{무슨 말을... 저는 언제나 석형의 능력을 믿고 있습니다.}
{과찬의 말씀을...}
석무심은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모용천엽은 환한 미소를 띄우며 나지막이 말했다.
{석형!}
석무심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석형의 노고는 알고 있지만 한 가지 일이 생겨서 석형의 힘이 필요합니다.}
{명령한 하십시오, 문상.}
석무심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이 일은 명령이 아니고 제 부탁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모용천엽은 선뜻 말하기 어려운지 느릿하게 원을 그리며 걸었다.
{석형도 알고 있다시피 이번 일은 우리에게 몹시 중요한 일입니다.
처음의 계획대로라면 마지막 마무리는 저의 형님이신 무상(武相)께서 직접 하려고 했지만 급한 일로 변방(邊方)을 방문해야만합니다.}
모용천엽은 멈추어 서서 다시 계속 말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 일을 석형과 적용(狄容)소저가 합심해서 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일은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석무심은 충분한 어조로 재빨리 대답하며 장읍을 했다.
담사라는 자를 다시 한 번 만나서 전 날의 수모를 설욕하고 싶었던 석무심이 아니었던가?
{석형, 그럼 곧 준비하도록 하지요.}
모용천엽은 석무심이 자신의 아랫사람이었지만 더할 수 없이 예의를 다했다.
이것으로 그의 고매한 인품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릇 사람의 마음이란 한 면만 보고는 판단할 수 없는것이다.
청풍각(靑風閣)!
이곳은 무림맹의 악양성 지부의 중지였다.
양노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장차수와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항주성을 떠나온 사공표와 자운유 그리고 악양지부장인 감천수가
기대에 찬 눈으로 양노인을 응시했다.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그의 시선은 장차수의 눈과 마주쳤다.
{이 늙은이는 아무런 할 말이 없소.}
체념한 듯 말하는 목소리 내면에는 가득 절망감이 실려 있었다.
그는 비마영의 행적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장차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분노한 그의 손이 움직이면 이 은퇴한 늙은 자객의 목숨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때 나삼을 입은 산홍(珊紅)이 차가 엊혀진 소반을 들고 가만히 들어왔다.
독목수 소패의 애첩이던 산홍은 장차수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막상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해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면서 은근히 장차수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산홍이 나타나자 장차수는 가슴에 들끓던 살의를 억지로 짓눌렀다.
{그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단 말씀이오.}
장차수의 차가운 일성에 양노인은 비감 서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자가 현재 전유(田油)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다는것을 알아냈지만 그 외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소이다.}
양노인이 진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장차수는 힘이 쭉 빠졌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헌데 바로 그때 뜻밖의 음성이 들렸다.
{저.. 전유라고 하셨나요?}
한 순간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산홍을 향했다.
산홍은 갑자기 중인들이 시선이 자신에게 닥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수줍기도 했지만 그들의 눈빛이 비수처럼 날카로와 보였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장차수가 물었다.
{그 사람인 줄은 모르지만... 이 주일 전에 소패 그 사람이 전유라고 하는 사람과 제가 있던 곳에 함께 왔던 일이 있어요.}
양노인이 다급히 말했다.
{소저,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기억할 수 있소?}
산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은 기억하고 있어요. 나이는 마흔쯤 되어 보이고..
눈빛이 무서웠어요. 그리고...}
{소저 혹시 왼쪽 눈 밑에 조그만 점이 있지 않았소?}
양노인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외쳤다.
{맞아요. 그 사람의 눈 밑에 점이 있었어요.}
산홍이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맞소이다.}
양노인이 크게 말했다.
{그 자가 비마영이요.
삼 년 전 그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소.}
중인들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감천수가 재빨리 물었다.
{소패, 그 사람의 말로는 동정호(洞定湖)에 있는 어느 기방에 머물고 있다 했어요.}
장차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산홍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소저.}
{아니예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어요.}
살며시 고개를 숙이는 산홍의 얼굴은 붉게 달아 있었다.
양노인은 언제 죽을 상을 지었나는 듯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동정호의 기방이라면 내가 앞장서겠소.}
그는 벌떡 신형을 일으켰다.
{동정호에 떠 있는 기방의 수는 천척에 달하지만 내가 나서기만하면 곧 찾아 낼 수 있소이다.}
자운유가 빙그레 웃었다.
{좋소, 앞장을 서도록 하시오.}
자운유는 비록 양노인이 흑도인이었으나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승낙한 것이다.
양노인은 생기에 찬 표정으로 급히 앞장으로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