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호호호~! 그를 내 노리개로 삼아 난 천왕성 최초의 여제가 될 것
이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졌다.
4
정도련은 빠르게 본모습을 갖추어 갔다. 구대문파에서 총력을 기
울인 덕분에 건물은 금세 올려졌고, 사람들 또한 속속 모여들기 시작
했다. 덕분에 안휘성은 활기가 넘쳐 났다.
태풍의 핵으로 등장한 정도련, 천하의 간자들과 시선이 안휘성으
로 몰려들었다.
안휘성에서 정도련이 급부상하고 있을 때 사천성에서는 천왕성과
십자서의 격돌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천왕성은 어떻게 하든 사
천성에 교두보를 확보하려 하고 있었고, 십자성은 그들을 저지해야
했다. 때문에 사천에서는 연일 무시무시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면에서는 십자성이 유리한 형국이었다. 어느 정도
전체적인 윤곽을 보인 천왕성에 비해 그들은 아직 보여 주지 않은
모습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사천의 절대강자
인 당문이 있었다. 당문의 합세 덕분에 조금씩이긴 했지만 십자성이
천왕성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곧 십자성이 천왕성을 사천성에서 몰아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십자성이 오직 천왕성에만 집중할 수 있는 데 반해
천왕성에서는 십자성과 함께 또 한 사람을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적무강의 북진.
양동계로 십자성을 상대하려던 천왕성은 적무강이라는 의외의 복
병을 만남으로써 커다란 타격을 입어야 했다. 적무강 한 사람 때문
에 내몽고를 돌아 산서성을 통해 호북성으로 진격하려던 그들의 작
전은 전면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단 한 사람 때문에 천왕성의 천하 계획이 완전히 수정된 것이다.
천왕성의 움직임이 변했다. 그리고 사천성의 십자성 총타에도 새
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두두두!
커다란 사두마차가 십자성의 총타에 들어서고 있었다.
연일 치열한 격전을 치른 총타의 무인들은 피곤한 얼굴에도 불구
하고 공터에 도열해 있었다. 천왕성과의 격전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잃지 않던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의 빛이 떠올라 있었
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사람들은 전신을 흑색 보
갑으로 두르고 있는 남자들이었다. 근 오백여 명에 이르는 남자들,
그들이 바로 십자서의 정예 중 하나인 흑기대(黑騎隊)였다.
밀릴 대로 밀린 사천성의 전투를 십자성에게 유리하게 흐름을 바
꿔 놓은 자들이 바로 흑기대였다. 단지 오백 명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천왕성의 무인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평소 대주인 청호문의 명령 외에는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던 그들이 이렇듯 일반 무인들과 함께 도열해 있는
것은 그만큼 오늘 이곳에 오는 사람이 거물이기 때문이었다.
무인들의 맨 앞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각진 얼구에 덥수룩한 턱수염이 인상적인 남자가 바로 이곳 사천
총타의 총타주인 구문해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는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마치 사자와 같은 인상과 박력을 풍기는 남자, 그가 바로
십자성의 최정예 중의 하나인 흑기대를 이끌고 있는 청호문이었다.
십자성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전황을 뒤집은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
이라 할 수 있었다.
십자성이 실세들인 그들이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감히 다
른 곳으로 눈을 돌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두두두!
점점 마차의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에 따
라 구문해와 청호문의 얼굴에 떠오른 긴장의 빛도 더욱 커져 갔다.
마침내 사두마차가 그들의 눈앞에 멈춰 섰다. 마차를 몰고 온 마
부는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마차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주인님, 도착했습니다."
"음!"
"그럼......"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은발의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청호문과 구문해가 일제히 포권을 하며 외쳤다.
"무상의 총타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옵니다."
뒤를 이어 사천 총타의 무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쿵ㅡ!
그들의 외침은 거대한 울림이 되어 성도에 울려 퍼졌다.
무상 사무독의 입가에 은밀한 웃음이 떠올랐다.
"오랜만이군, 총타주, 흑기대주.'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예, 무상 어르신."
사무독의 말에 구문해와 청호문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
다. 그들의 눈에는 존경의 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십자성의 실세 중 실세인 무상 사무독,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
지 아는 사람은 오직 성주인 마영백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진실한 내력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리도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의 화려한 이력
때문이었다.
십자성의 무저뇌가 생긴 이후 가장 많은 거마들을 집어넣은 사람
이 바로 그였다. 철부쌍괴뿐 아니라 수많은 전대의 거마들이 그의 손
에 분루를 흘려야 했다. 그들의 면면을 살려보자면 그야말로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잔심독수(殘心毒手), 또는 은발의 학살자라고 불리는 것은 결코
우연 따위가 아니었다. 그만큼 가공할 무력과 심계, 그리고 잔혹한
심성이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때문에 십자성에 소속
돼 있는 무인들은 하나같이 사무독을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
것은 구문해와 청호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들이 커다란 권력
과 실력을 가졌다고 하나 사무독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어린아이 수
준일 수밖에 없었다.
문상인 문수영이 심계로 인정을 받는다면 사무독은 그야말로 십자
성을 대표하는 무력인 셈이다.
사무독은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보고는 내실에서 받겠다. 준비해 오도록."
"존ㅡ명!"
구문해와 청호문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총타의 내실은 상당히 소박했다. 넓은 방을 채우고 있는 것은 커
다란 책상과 약간의 가구들뿐, 그 이외의 호사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총타를 맡고 있는 구문해의 성품 탓이었다. 워낙 강경하고 소
탈한 성품 탓에 사치품들에는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천생 무골이 바
로 그였다.
사무독은 내실이 마음에 드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평
소 구문해가 앉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구문해와 청호문이 그의 앞
에 기립했다.
"현재의 상황을 말해 보도록."
"예! 현재 사천성에는 천왕성의 마도육문 중 최소한 두 개의 문파
가 전력을 투입힌 것으로 보입니다."
구문해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보고했다.
"그곳이 어딘가?"
"하나는 패천문이 확실한데 다른 하나는 아직 정보가 부족해 확실
치 않습니다. 아마도 여러 문파에서 정예를 뽑아 합류시킨 듯 보입니
다."
"패천문에 관한 정보는?"
"거기 책상 위에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마도육문 중에서도 가장 패도적인 자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볼 수 있
습니다. 무공마저도 강공 일변도이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마도육문
중 서열 3위라고 합니다."
"흠~! 흥미롭군."
"패천문의 이곳 책임자는?"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조만간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이 알려질 겁
니다."
"최대한 빨리 그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도록. 움직이는 것은 정보
가 모두 모아진 다음에 한다."
"알겠습니다."
사무독의 시선이 청호문에게 향했다.
"이곳에 흑기대의 모든 전력이 투입된 것인가?"
"그렇습니다. 오백 명 전원이 투입됐습니다."
"잘됐군. 흑기대는 대기하면서 나의 명령을 기다리도록."
"알겠습니다."
사무독의 은색 눈이 반짝였다. 그는 책상 위에 올려진 보고서를
들면서 말했다.
"천왕성을 친 후에 정도련을 친다. 구대문파 따위가 두 번 다시
십자성에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을 것이다."
나직한 목소리에 전혀 감정의 고저가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
는 순간 구문해와 청호문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라
오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사무독이 사신(死神)으로 보였다.
적무강은 너른 초원을 달렸다. 말은 북방 혈통답게 엄청난 지구력
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지난 시간 동안 쉼 없이 달리고도 지칠 줄
을 몰랐다.
이곳은 이제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몽골인들의 구역이었다.
한때 중원을 지배했던 원은 이제 북쪽 초원에서 부족 단위로 분열했
다. 개개인의 부족의 힘은 아직도 막강했지만 예전 원의 태조처럼 강
력한 힘을 가진 대족장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제 그들은 자신들끼리의 세력다툼으로 지리멸렬해 가고 있는 상황이
었다.
적무강은 모래바람을 뚫고 길을 걸었다. 이제 겨울이 다시 시작되
려 하고 있었다. 때문에 초원의 풀들은 모조리 말라 죽고, 황량한 모
래 바람만이 자신의 위세를 자랑했다.
"겨울이라......그것도 좋겠지. 하얀 눈은 모든 것을 다 덮을 테니
까."
적무강은 하가하게 중얼거리며 바닥을 살폈다.
이미 천왕성의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 모두가
만형통과 곽부종 덕분이었다. 그들의 가공할 정보력 덕분에 적무강은
천왕성이 이동해 온 경로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들의
경로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천왕성에 대한 추적을 할 수 있었다.
이미 낭혈문의 무인들이 지나간 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바닥에는 그
들이 말을 달렸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천에 달하는 남자들
이 지나간 곳은 제아무리 잘 숨겨도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다.
우르릉~!
그때 초원 북쪽에서부터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바라
보니 한바탕 비가 내릴 듯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음!"
적무강은 나직이 소리를 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은 비를 피해야겠군."
그는 말을 몰아 눈앞에 보이는 산을 향해 달렸다. 일단 숲 속에 들
어가면 커다란 나무 밑에라도 말과 자신이 비바람을 피할 만한 곳은
있을 것이다.
말은 힘차게 달려 금방 숲 속에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마침내 하
늘에서 비가 힘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나뭇잎 사이로 차가운 빗물이 느껴졌다.
적무강은 숲 속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 밑으로 말을 끌고 갔다. 장
정 둘이 팔을 벌려도 닿지 않을 정도로 나무의 밑동은 굵었다. 그만
큼 나뭇잎도 무성해서 장대처럼 내리는 비도 나무 그늘은 쉽게 침범
하지 못했다. 덕분에 적무강과 말은 폭우처럼 쏟아지는 장대비를 겨
우 피할 수 있었다.
푸스스!
젖었던 적무강의 옷이 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금세 말랐다. 그
스스로가 운공을 하지 않아도 화륜심결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움직이며 그의 몸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 주었다.
적무강은 말을 나무 한쪽에 묶어 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봇
짐에서 쇠고기를 말려 만든 육포를 꺼냈다. 그리고 조금씩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는 육포를 한 입 베어 물고 최소한 수십 번을 씹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씹은 후 삼키면 위에서 부담 없이 고스란히
흡수가 된다. 특히 이토록 오랜 시간 노숙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몸
을 최대한 가볍게 해 둬야 했다. 그렇기에 적무강은 필요한 양만큼
만 육포를 씹었다.
끝없이 쏟아질 것만 같던 비는 잠시 후 흔적도 없이 그쳤다. 물기
를 촉촉이 머금은 나뭇잎과 풀잎만이 비가 왔었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 그나마도 없었다면 적무강도 방금 전까지 그토록 거세게 비가 내
렸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북방의 날씨는 변덕스러
웠다.
"북방에는 곧 겨울이 닥쳐온다. 그 전에 모든 것을 결판내야 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저들은 천왕성에 꼭꼭 숨겠지......"
적무강은 다시 육포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신경은 지금 한없이 예리하게 일어서 있었다. 그것은 그가 지
금을 전시라고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서 적이 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뇌가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몸이 그에 준하
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끝없이 화륜심결이 일어나 몸을 돌고 있었다. 그것
은 이미 그가 따로 운공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가
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의 몸은 항상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
었다.
스르릉!
적무강은 도집에서 두 자루의 도를 꺼내 들었다.
하나는 자신이 소림사에서 직접 만든 도이고, 다른 하나는 생사도
였다. 두 자루의 도는 적무강의 무릎에 올려진 채 나직하게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적무강에게 있어 두 자루의 도는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생사도는 그에게 있어 죽음과 파괴를 상징한다. 적씨 가문 삼백 년
의 한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생사도는 이름처럼 그야말로 죽음과
가장 밀접한 도였다. 때문에 일단 생사도가 펼쳐지면 그 누구도 죽
음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것이 적씨 가문의 의지였고, 또한 적무
강의 결심이었다. 생과 사를 구분하는 도, 생사도.
또 한 자루의 도, 그것은 적무강이 소림에서 참오하며 만든 도였
다. 생사도와는 여러 가지로 다른 의미를 가지는 도였다.
웅웅!
적무강의 손길이 닿자 도가 나직하게 울음을 터트렸다. 생사도와
는 비할 수 없는 미약한 울음이었지만 그래도 도명을 울릴 정도의
명도였다.
사문(思雯), 서문아를 생각해서 만든 도였다. 그래서 이름에 서문
아의 가운데 자를 붙였다. 자신의 의지가 약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사문을 만들었고, 사문을 볼 때마다 서문아를 생각
했다. 때문에 사문은 그의 의지의 발현이나 마찬가지였다.
스윽!
적무강은 품에서 하얀 천을 꺼내 생사도와 사문을 정성스럽게 닦
았다. 마치 유리처럼 그의 모습이 도면에 비칠 정도로 닦았다.
그는 지금 단지 도만 닦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까지 닦고 있
는 것이었다. 도와 자신의 일체, 자신이 곧 도이고, 도가 곧 자신이
었다. 그러니 내 몸처럼 아끼고 닦을 수밖에.
그러나 적무강은 계속해서 열중할 수 없었다.
"꺄ㅡ아악!"
숲 속에서 여인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적무강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는 잠시 자신의 도를 바라보
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을 끌고 비명 소리
가 나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5
여인의 눈빛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수백 송이
백합이 한꺼번에 피어난 듯 화려하면서도 청초했다. 그녀는 매우 두
터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육감적인 몸
매를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었다.
여인의 앞에는 세 명의 남자가 음흉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먹음직한 먹이를 보는 늑대의 눈빛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
리고 실제로 그들은 매우 흥분해 있었다.
"다...가오지 마세요. 왜 이러는 거예요?"
여인이 애처롭게 말했다. 그녀는 무척이나 겁에 질린 듯 오들오들
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묘한 매력을 불러 일으켰다.
"흐흐~! 우리가 뭔 짓을 한다고 그렇게 겁을 먹은 건가? 소저, 우
리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네."
"맞아! 우리는 매우 선량한 사람이지. 그러니 소저가 그리 겁을 집
어먹을 이유가 없다네. 흐흐흐!"
남자들이 여인을 보면서 음소를 터트렸다.
여인은 그런 남자들에게서 멀어지려고 뒷걸음질 쳤지만 그 모습마
저도 무척이나 고혹적이어서 보는 이의 애간장을 다 떨어지게 만들
었다.
천생의 우물, 여인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외모를 지니고 있
었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건 간에 그녀를 보는 남자는 자극을 받
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지
자꾸 남자들을 유혹하는 행동만 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여인을 보며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본래 이곳 장성 외곽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산적 떼였는데,
오늘은 특별히 산기슭으로 내려왔다 이런 봉을 잡은 것이다. 생전 처
음 미인을 본 그들은 순식간에 이성을 잃었다. 그들은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여인이 타고 있던 말을 습격했다. 놀란 말은 여인을 떨어
트리고 숲으로 사라졌고, 이렇게 여인만이 홀로 남아 비 맞은 참새처
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흐흐~! 내 사십 년을 살았지만 이런 우물은 또 처음일세."
애꾸눈의 남자가 여인을 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욕정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여인을 처음 보는 순간부
터 그의 하초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여인만 보
일 일 뿐, 이런 절세 미녀가 왜 이토록 한적한 숲에 혼자 말을 타고
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 이유를 생각하기에는 그의
몸이 너무 급했다. 어서 저 여인을 바닥에 눕히고 참을 수 없는 지독
한 욕정을 풀고 싶었다.
"네년이 아무리 소리쳐 봤자 이곳에 널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
다. 이곳은 그야말로 사람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는 외진 곳이니까.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옷끈을 푸는 것이 좋을 게다. 이 어르신들이
듬뿍 예뻐해 줄 테니까."
남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욕정을 드러냈다. 이제는 더 이상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저 여인을 범하느냐 하는 순서의 문제
였다. 이미 그들의 이성은 저 멀리 날아가고 없었다.
"으아아! 도저히 못 참겠다. 내가 먼저다."
애꾸가 마치 짐승처럼 으르렁 거리며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아악! 제발 이러지 마세요."
여인은 무공을 모르는 듯 몸부림을 치며 애꾸를 밀어내려 했다. 그
러나 연약한 여인의 힘으로 남자의 거센 힘을 당해 낼 수 있을 리 만
무했다. 그녀의 옷은 애꾸의 힘을 못 이겨 여기저기 찢져 나갔다.
그때마다 뽀얀 그녀의 속살이 수줍게 드러났다.
"흐흐흐! 정말 죽겠군."
"이봐, 어서 끝내라구, 견디기 힘들다구."
뒤에 남겨진 남자들이 애꾸를 재촉했다. 그러자 애꾸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발, 제발......"
"젠장! 가만있지 못해? 죽인다는 것도 아니잖아. 금방 끝날 테니
까 가만있어!"
짜아악!
"꺄악!"
결국 애꾸는 여인의 뺨에 손바닥을 날렸다. 커다란 남자의 손바닥
에 맞은 여인의 뺨이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여인의 고개가 모로 넘어가자 애꾸의 눈에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
랐다.
"흐흐~! 이제야 얌전해졌군. 조금만 기다려라. 이 어르신이 극락
을 경험하게 해 줄 테니까."
애꾸가 여인의 상의를 거칠게 벗겨 갔다.
또로록!
여인의 눈가에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
면 그녀의 눈에는 정절을 뺏기게 되었다는 상실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권태감 그 자체였다.
'개자식,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여인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으면 당
연히 내려와서 도와주는 게 정상 아니야?'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시
선에는 지금 자신에게 앞뒤 없이 덤벼드는 짐승들처럼 욕정 따위는
없었다. 그의 눈은 차분했고, 또한 냉정했다. 그리고 절대 먼저 흥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냉정하게 지켜보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의
지금 상태는 다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부터 계획이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어떤 남
자라도 이런 상황이 되면 앞뒤 재 보지 않고 달려들어 악당을 물리
치고 감사의 인사를 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녀가 원하는 남자는 마
치 남의 일처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이대로 있다가는 진짜 눈
앞의 냄새나는 산도적에게 몸을 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고민했다. 자신의 가슴에 자꾸 얼굴을 들이대는 입 냄새가
지독한 인간을 어째 처리할지를. 그러나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그녀는 암암리에 공력을 운용했다. 여차하는 순간 자신의 몸을 깔
고 앉은 애꾸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녀 자신이 처녀도 아니
었고, 또한 정절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몸을 주는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과 격이 맞는 상
대하고만 잤다.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자신이 깔고 앉은 여인이 사신(死神)인지도 모르고 애꾸는 침을 흘
리며 여인의 뽀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크흐흐~! 극락을 보여 주마."
애꾸가 본격적으로 여인을 범하려는 듯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
순간 애꾸를 방해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쯤에서 멈추지."
낮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심령을 울리는 목소리. 순
간 여인의 눈가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호호! 그럼 그렇지. 제까짓 게 안 나오고 배길 수 있어?'
여인은 최대한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나타난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허름한 피풍의를 걸친 남자가 보였다. 그녀가 이제까
지 애타게 기다리던 남자, 그는 다름 아닌 적무강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한소희, 장성 밖에서 적무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겠다고 호언장담한 여인이었다.
'제아무리 철석간담을 지닌 남자라 할지라도 나를 본다면 안 넘어
오고 배길 수 없지. 원래의 미모를 살리지 못하는 해서연 그년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 어서 오너라, 도마여. 호호호!'
한소희는 야망이 큰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번 천왕성의 십자성 정
벌에 차출된 혈화문의 여인이기도 했다. 본래는 그녀와 동문이자 소
문주인 해서연이 이 자리에 참석해야 했으나 그녀는 지금 징벌동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마림에서의 천왕성과 십자성의 격돌, 그 당시 해서연은 자신의 뛰
어난 머리만 믿고 함정을 파 놓았다가 십자성과 적무강에 의해서 정
예를 잃었다. 그 일로 인해 그녀는 징벌동에서 삼년 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덕에 살맛이 난 것은 한소희뿐이었다. 미모로는
오히려 해서연보다 뛰어났지만 그녀의 재능은 해서연에 한참을 못
미쳤다. 그래서 같은 사부의 밑에서 무공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녀는 늘 해서연의 뒤에 처질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무공으로는 해서
연을 따라잡지 못하겠다고 판단한 한소희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미염공(美艶功) 종류의 무공이었다. 원래부터 타고난 자신의 미색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내는 미염공,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웠던 그녀가
미염공을 익힌 후로는 그녀의 미소 한 번에 넘어오지 않는 남자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남자를 섭렵한 한소희는 천왕성에서 자신의 입지를
키워 나갔다. 그러나 단지 미염공만으로 입지를 키워 나가기에는 한
계가 분명 존재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고심 끝에 선택한 패가 바로
적무강이었다. 단지 혼자만으로도 마도육문 중 한 곳인 낭혈문을 상
대할 정도의 절대자, 더구나 그는 젊었다. 다른 절대고수들이 대부분
나이가 든 노인인 데 반해 그는 젊고 강했다. 비록 미남자는 아니었
지만 젊고 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한소희는 적무강을 점찍었다.
그를 자신의 치마폭에 넣을 수 있다면 분명 천왕성주도 그녀를 다시
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 또한 수직상승할 것이 분명했다.
산적들이 다니는 길 따위는 한 번만 쳐다봐도 파악이 됐다. 문제
는 적무강이 과연 자신의 비명 소리를 듣고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
이었는데 그것도 이제 해결됐다. 때문에 그녀는 득의의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뜻대로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퍼억!
"대협, 제발 살려 주세요."
한소희는 있는 힘껏 애꾸를 밀치고 일어나며 급히 적무강의 등 뒤
로 달려와 숨었다. 그녀의 모습은 정말 봉변을 당할 뻔한 여자의 모
습 그대로였다.
"이런 씨발년이 감히 날 밀쳐?"
애꾸가 인상을 팍착 쓰며 일어났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커다란 감
산도가 들려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뒤에서 경계를 서던 남자들도
흉흉한 표정을 지으며 철퇴와 곤을 꺼내 들었다.
"이건 또 어디서 온 개뼉다구야. 아가야, 좋은 말로 할 때 썩 꺼져
라. 괜히 봉변당하지 말고 말이야."
애꾸가 자신의 손에 침을 탁 뱉으며 거칠게 말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적무강의 얼굴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는 나직한 목소
리로 말했다.
"조용히 물러가라."
"뭐여? 이런 씨불놈이 개소리를 하네. 그년 내놓지 못해? 그년은
우리 거여!"
애꾸의 뒤에 있던 남자가 철퇴를 두드리며 험하게 인상을 썼다.
그렇지 않아도 거친 그의 얼굴이 더욱 무서워 보였다. 그러나 적무강
은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산적들이 제아무리 인상을 써 봐야 그에
게는 아무런 의미도 줄 수 없었다.
"좆만 한 새끼가 죽고 싶어서 감히 흑호채를 건드리다니!"
"아주 포를 떠서 늑대들 먹이로 던져 주마."
듣기에도 섬뜩한 말을 산적들이 토해냈다. 그들은 감히 자신의 눈
앞에서 자신들의 노리개를 채 간 적무강을 용서할 수 없었다. 욕정
에 눈이 먼 그들은 적무강이 어떻게 그들의 이목을 숨기고 근처까지
접근했는지 판단할 이성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감히 대호 앞에서
발톱을 드러낸 하룻강아지처럼 겁 없이 설쳤다.
"훗!"
적무강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떠올랐다. 단지 웃음만 떠오른 것
뿐인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바뀌었다. 이제까지 존재감
없던 그의 몸에서 갑자기 흘러나오는 막대한 기세.
"크윽!"
"허으윽!"
남자들의 얼굴이 변했다.
비록 삼류만도 못한 무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주워들은
바가 적지 않았다.
'씨발! 좆 됐다.'
'젠장~! 잘못 건드렸다. 상대는 고수다.'
'꿀꺽!'
그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제야 그들을 지배하던
욕정이 깨끗이 사라지고 이성이 남았다.
적무강이 그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물러가라.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준다."
슬금슬금!
그의 말에 남자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
을 보면서 눈치를 봤지만 더 이상 적무강에게 대들 담력은 없었다.
투다닥!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그들은 서둘러 몸을 달려 숲 속을 향
해 달렸다. 그리고 한 소리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두고 보자. 이 빚은 반드시 갚겠다!"
"우리 흑호채를 잊지 마라!"
그들의 외침이 숲 속에 울려 퍼졌다.
"훗!"
적무강의 입가에 절로 웃음이 어렸다. 원래 저런 소리는 패배자들
이나 하는 것이고, 들어줄 생각도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기에 순순히 그들을 보냈다. 만일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는 것을 도적질이나 하던 남자들이 알 턱이 없
었다.
남자들의 모습이 사라진 다음에야 적무강의 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소희가 아직도 겁먹은 모습으로 몸을 드러냈다. 그녀는 애꾸
에게 찢긴 옷을 추스르며 적무강에게 인사를 했다.
"대협, 도와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대협이 아니었으면 큰 봉변을 당
할 뻔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서 찢어진 옷 사이로 풍만한 가슴이 언뜻 보
였다. 그것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러나 적무강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흥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괘념치 마시오. 누구라도 아리따운 소저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똑같이 나섰을 테니까."
"아닙니다. 정말 대협이 아니었으면 큰일을 당했을 겁니다. 정말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적무강의 말에 한소희는 더욱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녀의 모습
은 무척이나 고혹적이어서 그 어떤 남자라도 안아 주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지금 한소희는 암암리에 미염공을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손짓과 몸짓, 그리고 목소리에는 애절함이 절
절 넘쳤다.
한소희는 적무강이 자신에게 넘어오리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적무
강의 표정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마치 예쁜 인
형을 보는 듯한 모습, 하지만 그뿐. 그에게서는 그 어떤 욕정이나 동
요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경우는 철든 이후 한 번도 없었기
에 그녀는 당황했다.
'아니, 이놈은 석상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면 고자라도 되는 건가?
왜 나를 보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냐?'
자신의 미모와 미염공에도 반응이 없는 남자는 처음 봤다. 그렇기
에 그녀의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했다.
그때 적무강이 말했다.
"이런 외진 곳에 호위도 없이 홀로 오다니......"
"소녀는 인근 마을에 살고 있사옵니다. 마침 오늘이 돌아가신 아
버님의 기일인지라 무덤에 바칠 꽃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가 저
런 불한당들을 만났습니다."
"음!"
적무강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순간 내심 뜨끔했던 한소희는 시
치미를 딱 잡아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말조차 잃어버려 집에 돌아가기가 암담하니 대협께서 도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 집은 여기에서 삼십 리나 떨어져 있기
에 저의 걸음으로는 도저히 오늘 안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애절할 정도로 처연해, 남자라면 그 누구도 감히
거절할 수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의도대로 적무강이 고개를 끄
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좋소! 내 말에 올라타시오. 댁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
"아~! 감사합니다, 상공. 정말 감사합니다."
한소희가 연이어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때마다 그
녀의 우윳빛 살결이 아찔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적
무강의 눈빛은 너무나 차가웠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소희는
적무강의 그런 눈빛을 미처 발견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