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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빌립보서 1장 12절 - 26절
제 목 : 고난을 뛰어넘는 기쁨
일 시 : 2019. 10. 12.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난은 축복이다.”
견디기 힘든 고난에 빠져 본 경험이 있는 나는 하나님의 침묵이 가장 마음 아팠다. 그렇게 날 사랑한다고 하더니, 정작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는 어디에 계시는지 볼 수 없고, 뭘 하는지 당최 알 수 없다. 이럴 때, 성서와 신학은 ‘숨어계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될 리 만무하다.
1.
위의 말과 쌍벽을 이룰, 우열을 가리기 힘든 말이 있다면, 고난의 현장 한 가운데 처해 있는 이들에게 가슴을 후벼 파는 한 마디가 있다면, ‘고난은 축복’이라는 그 말일 것이다. 차마 발설하지 못한 내 마음 속 한 마디는 이것이다. ‘그게 축복이면 너나 실컷 받아라. 나는 축복도 적게 받고 고난도 적게 받을란다.’ 나는 고난도 큰 복을 받을래, 고난도 적지만 복도 작은 쪽을 택할래, 라고 선택권을 준다면, 아뇨, 고난은 없고 축복만 받을래요, 라고 하겠다만, 그런 것은 애당초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후자를 당당하게 선택하겠다.
하여튼, ‘고난이 축복’이라고 말하는 이도 정작 ‘그렇게 복스러운 고난 맛 좀 볼래요’라고 묻는다면 시치미를 딱 떼고 정색하고 돌아서거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툴툴거린다. 자기도 저리 싫은 것을 왜 나한테는 가지라고 하는 거야‘라고 말이다.
과연 고난이 축복인지 여부는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자.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너무나 확고부동한 진실은 이것이다. 누구나 고난당한다. 이 세상에 고난을 피할 사람도 없다. 이것은 절대 법칙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고난을 피할 수 없었고, 싫어서 몸부림을 쳤다. 하나님 아버지도 이따금 외로워서, 아파서 우시고, 화가 불같이 낸다. 자기 아들 예수가 죽었을 때는 절대 침묵 속에서 계셨다. 누구나 고난 받는다.
2.
고난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기쁨이란 어디에 있는 걸까? 누구나 고난은 없고 기쁨만 가득한 세상을 바라고 바라지만, 그것은 유토피아의 말 뜻 그래도 ‘그런 곳은 없다.’ 고난 없는 기쁨이란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부재하는 유토피아나 있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곳, 없는 곳에나 그런 것이 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고난이 없다면, 우리의 주제인 ‘기쁨’과 연결시켜 보자.
고난 없는 인생 없고, 고난 없이 기쁨 없다.
참된 기쁨은 고난 없는 기쁨이 아니다. 고난이 없어서 기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 얼마나 좋으련만, 아쉽고도 안타깝지만 그런 것은 없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고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고난을 어떻게 핸들링 하느냐로 결판난다. 고난이 없어서 기쁜 삶이 아니라 고난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있음에도 기뻐하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허락된 기쁨이다.
3.
바울이 빌립보 지역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는 ‘기쁨의 서신’이다. 그렇지만 그냥 기쁨이 아니다. 마냥 기쁜 것이 아니다. 김도현교수의 책, 「빌립보서」의 부제처럼, “고난을 뛰어넘는 기쁨”이다.
11절에서 26절은 바울이 처한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앞에서 인사, 감사, 그리고 기도를 드렸던 사도는 지금 여기서 자신의 형편을 소상하게 기술한다. <조금 더>
자, 그러면 고난을 뛰어넘는 기쁨, 장애와 시련을 극복하는 기쁨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가 뛰어넘은 장애물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을까?
첫째,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이다.
1.
우리의 삶에서 맞닥뜨린 첫 번째 고난이랄까 어려움은 외부의 환경이다. 끊임없이 내 길을 방해하고, 내 내면의 기쁨을 앗아가는 이러저러한 환경이 첫 번째 주범이다. 나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는 사역자인지라 동시에 몇 가지 일을 하다가 지칠 때면 자동반사적으로 생각하는 한 문장이 떠 오른다. 그것은 노틀담대학의 어느 노교수가 헨리 나우웬에게 해 준 말이다. “이보게. 평생 나는 내 일이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고 불평하면서 살아왔네만 결국은 나를 방해했던 그 일들이 바로 나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영적 발돋움」, 59) 내가 처한 환경은 나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내야 할 하나의 필연적 조건인 셈이다.
2.
바울에게 자신의 사역과 선교를 쉼 없이 방해하는 결정적 요소는 ‘감옥’이다. 그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로마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로마 교회의 파송과 후원을 받아서 그 당시의 땅 끝으로 인식되던 스페인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실천하고 완성하려고 했다. 그 원대한 플랜에 큰 차질이 생겼다. 바로 감옥 생활인 것이다.
바울이 처음부터 감옥에 갇힌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재판을 받으면서 황제에게 상소한다. 압송되어 로마로 가는 여정이 사도행전 후반부를 차지한다. 로마에 도착해서 곧 바로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 사도행전 28장에 기록된 대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가택연금 상태이었다. 자신의 돈으로 셋집을 얻어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사람을 만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행 28:30-31).
그러다가 지금은 시위대 안의 감옥, 그러니까 로마 황제의 감옥에 투옥된 상태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제한되었고, 조만간에 무죄방면될지 아니면 반역죄에 해당하는 유죄를 선고 받아 사형당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살지 죽을지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당시 황제가 네로이었던 만큼, 기독교에 대한 핍박의 강도가 세졌기 때문에 옥중 생활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영화 “사도 바울”>
이는 한 마디로 바울 선교의 좌절이었을 것이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외부의 접견자는 드물었고, 자신과 같이 복음을 전했던 초창기 동료들 중 다수가 바울 곁을 떠났다(딤후 4:16) “내가 처음 나를 변론할 때에, 내 편에 서서 나를 도와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감옥 안에서의 고통, 등 돌리는 동지들, 갈수록 막히는 복음 전도, 이런 것들로 바울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을 것이다.
3.
그런데 바울은 수차례 자신의 매임을 말하면서 독특한 한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13절을 읽어보라. 감옥에 갇혔다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갇혔다라고 말한다. 외적으로는 감옥이지만, 내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자신이 당하는 환난을 물리적으로, 물질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바울의 신앙적 고백이기도 하지만, 바울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인식했다. 12절에서 말한 대로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감옥에 갇힘으로써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장소와 영역, 그가 쉽사리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감옥에 갇히지 않고서는 투옥된 사람들이나 간수들에게 전도할 기회가 생길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그는 친위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들은 당대의 최고 엘리트라고 보아야 한다. 가문과 학벌, 무력에서 뛰어난 사람들만 선별해서 황제를 최측근에서 보좌하고 시위하는 이들이다. 로마 황제 칼리큘라를 암살한 이들이 바로 이 친위대 사람이다. 그러니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더 엄격히 선발했을 것이고, 로마 정계에 대한 발언권도 강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 결과 4장 22절에서 ‘황제 집안에 속한 사람들이 빌립보 교회에게 안부를 전한다’고 말한 것은 바울의 친위대 감옥에 갇혔고, 그때 전도한 사람들이 회심하였던 것이다.
4.
뿐만 아니다. 극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도리어 복음 전하는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바울의 놀라운 열정에 감복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4절을 근거로 추정한다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네로의 폭압으로 상당히 위축된 상태이었을 것이다. 전략적으로 후퇴한 것일 수도 있고, 실제로 겁을 잔뜩 집어먹고 움츠렸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등장해서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은 것이다. 복음은 인간의 환경과 압력, 박해에 방해를 받지 않으며, 확장된다는 것을 그들은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겁도 없이 복음 전파하는 일에 동참하고 앞장 서게 된 것이다. 그러니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이 실패나 패배만은 아닌 것이다. 환경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도 불구하고 진보했던 것이다. 그렇다. 바울은 환경과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고, 그래서 복음의 진보가 있었기에 기뻐하고 기빠할 수 있다. 외부의 고난 없는 기쁨이 아니라 외부의 고난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기쁨을 누렸다.
5.
감옥이라는 곳에서, 어찌 보면 막장 같은 곳에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끝없이 후퇴하고 퇴보할 것 같은 곳에서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일구어내고, 하늘의 기쁨을 누렸던 사람들은 바울만이 아니다. 나는 대표적으로 존 번연을 생각한다. 그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인정하지 않은 비국교도요, 청교도요, 침례교 사역자이었다.
그는 국가가 인정하는 자격 없는 자는 복음을 전하지 말고, 설교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죄로 무려 1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그는 안 그래도 가난한 가족을 뒤로 두고,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열 살 짜리 큰 딸 메리를 남겨두고, 투옥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 감옥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책, 「천로역정」을 저술했다. 감옥이 없었다면, 「천로역정」은 없다고 말해도 되리라.
또 한 사람, 니체도 찬양했던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있다. 그의 시베리아 유형생활이 있었기에 그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모든 세기에 걸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요 사상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곳에서 인간의 악함과 악한 인간 안에 자리 잡은 아름다움을 보았다. 무엇보다도 시베리아로 끌려가던 중에 어느 부인이 건넨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났고,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문학 작품을 남겼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길을 뒤따라간 사람이 또 한 명 있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대작품을 남겼는데, 감옥에서 8년을 지냈고, 형기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유형지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는 197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다. 그는 「수용소 군도」에서 이런 말을 했다.
“감옥아, 내 너를 축복하노라! 나는 거기서 충분히 섬김을 받은 셈이다. 나는 거기서 내 영혼을 먹였으며, 주저없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감옥아, 내 너를 축복하노라, 내 인생에 네가 함께 있음이여!”(존 파이퍼, 「하나님의 숨겨진 미소」, 44에서 재인용)
성공하는 부자들
최근에 1분 뉴스에서 본 것이다. 「상식 밖의 부자」을 요약한 것이다. 세계적인 재정 전문가 루이스 쉬프가 자수성가한 부자 1천명과 평범한 사람을 인터뷰하고 연구한 결과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총 7가지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심각한 좌절이나 실패를 겪어도 한 번 더 시도한다는 문항에 대해서 평범한 사람들은 10%,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무려 80%가 Yes라고 답했다. 그 연구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실패는 부를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수 조건이다.”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에서 배우느냐, 배우지 못하느냐과 관건인 셈이다.
6.
지금 당신의 외부 환경은 어떤가? 성공과 성취라는 잣대로 보면, 투옥 상황은 분명히 실패한 인생이다. 바울과 존 번연, 도스트예프스키, 솔제니친, 다산 정약용, 안토니오 그람시, 등은 감옥과 유배지에서 인류의 삶을 풍성하고 풍요롭게 하는 위대한 성취를 일구었다. 가족이라는 족쇄 때문에 불평하는가? 내가 다니는 직장과 동료 때문에 힘들어하는가? 바로 그들 때문에 내 삶이 막힌다고 고통스러운가? 바로 그것 속에 노틀담 대학교의 노교수의 말처럼 내 할 일이 있다. 기쁨은 바로 그 안에 있다.
둘째, 원수를 뛰어넘는 기쁨이다.
1. 여는 말
어쩌면 환경 보다 더 힘든 것은 사람이다. 누가 봐도 최고의 직장인데도 그만 두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힘들어서 그만 둔다고. 일이야 한국사람들은 밤새워 하면 되고, 내 한 몸 고생하는 것을 조직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은 하나의 사명으로 여기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감당이 불가능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 관계이다. 사람 관계 속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면, 아무리 부를 축적하고, 명예가 드높아져도 모래사장에 쌓은 성에 불과하다.
2. 본문 관찰 및 설명
바울은 자신의 감옥생활에 대한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한쪽은 선한 마음으로, 다른 한쪽은 악한 마음으로. 전자는 옥중의 바울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의 권능을 재발견한다. 복음은 그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뚫고 나간다. 어떤 시련에도 지치지 않고 치고 나간다. 또한 바울을 사랑한다. 복음의 노예된 바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어한다. 그들도 바울처럼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복음 때문에 고난 받기를 자처한다. 바울이 어찌 아니 기쁠까?
후자는 정반대다. 불순한 동기다. 바울에 대한 시기심이 가득하고 어찌하든지 간에 바울을 찍어 누르려고 한다. 자신들의 전도 행위가 어찌하든지 간에 바울에게 해가 되기를 바란다. 이 상황에서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한다는 것은 적어도 바울의 옥중 생활이 지속되고 할 수 있는 한, 그가 죽는 날까지 연장되는 것을 말한다. 좀 더 나가면, 그들은 바울이 재판을 받고 유죄가 되고 사형 언도를 받고 죽기를 원한다.
우리의 관심은 저들의 정체이다. 누굴까? 대관절 누구기에 바울이 영영 감옥에서 나오지 않기를 원하고, 감사형으로 죽기를 바라는 걸까? 진정한 관심은 그럼에도 기뻐하는 바울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에 있지만 말이다. 거짓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바울을 괴롭게 하는 이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처음 나는 로마 교회 내의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바울의 말 그대로 그들의 동기가 무엇이든지간에 결국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것과 바울이 기뻐한다는 대목 때문이다. 불신자가 그토록 복음을 열심히 전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는가? 자기를 괴롭게 할 요량으로 전도하는 눈꼴사나운 소인배들과 달리 그들을 너그럽게 웃어주며 우리의 바울은 얼마나 대인배의 풍모가 풀풀 풍겨나는가? 감옥 생활하기도 쉽지 않고 재판을 받는 과정 자체가 상당히 지치고, 게다가 결과에 따라서 처형당할 처지인 그가 자신을 못살게 구는 이들을 향해 기뻐하다니!
3. 본문 의미 및 확장 1
이들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에 가장 적합한 말이 있으니, “바울, 그리스도인 형제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다”일 것이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적이 아니라 벗이다. 예수는 제자단의 핵심 중책을 맡았던 가룟 유다가 배신했고, 시저는 양아들처럼 사랑했던 브루투스에 의해서, 간디는 같은 힌두교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적은 언제나 밖이 아니라 안에 있고, 거리와 관계가 먼 사람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일 공산이 크다.
성서의 위대한 시인, 다윗의 말을 먼저 보자.
“나를 비난하는 자가 차라리, 내 원수였다면, 내가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차라리, 자기가 나보다 잘났다고 자랑하는 내 원수였다면, 나는 그들을 피하여서 숨기라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자가 바로 너라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바로, 내 동료, 내 친구, 내 가까운 벗이라니!”(시편 55:12-13)
그러기에 다윗도 원수가 비난하면 그나마 견디겠는데, 함께 했던 동지, 의지했던 친구, 사랑했던 가족의 배신이기에 더 쓰라리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더 아프다. 더 아리다.
바울이 기뻐하는 이 모습은 이 편지의 수신자인 빌립보 교회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그 교회는 공동체의 리더들간의 알력과 내분이 있었다. 4장에 그들의 이름을 거명하는데, 유오디아와 순두게이다. 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노예’라고 호명했던 바울은 나도 하나님의 노예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 듯이, 너희도 지도자라는 의식이 잘못되어서 누군가에게 지시하고 군림하는 줄로 착각하지 말라는 약간의 경고성 멘트를 날렸다. 여기서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간에 나랑 반목하는 그 사람과 갈등을 빚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앙의 중심을 간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을 향한 요청의 교두보 역할을 수행한다.<문장 수정>
4. 본문 의미 및 확장 2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의 실체를 신실한 그리스도인인데도 바울과 입장과 견해의 차이로 인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바울을 괴롭히는 일을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헌데, 일부 학자들은 저들의 정체를 로마 지역의 성도가 아닌 바울을 따라 다녔던 적대자들이라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신적 저주’를 퍼부은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1) 그 근거를 보자면, ‘시기와 다툼’이라는 단어가 바울 서신의 사용 용례를 보면, 대개 세속적이거나 비신자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롬 1:29, 갈 5:20-21, 딤전 6:4, 딛 3:3, 9)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사용한 경우가 없다. (이진섭, 박영호의 책)
2) 3장에 보면, 바울이 자신이 유대인으로,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자랑을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빌립보 교회 안에 육체로 자랑하는 율법적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들이 로마 지역의 교회 안에도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이 바울의 복음에 반대해서, 오직 은총만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인간의 혈통과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행위가 더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쁜 동기로 복음을 전했고, 그리스도가 전파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들이 실제로 그리스도를 전도한 것이라기보다는 결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이진섭)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호재로 삼았다. <한 문단> 전자가 선의로 복음을 전했다면, 이건 숫제 악의적이다.
나는 저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쪽을 택할는지 확정할 능력이 없다. 설교자로서, 성경을 읽는 묵상자로서 둘 다를 받아들이는 쪽이다. 그리고 저 두 가지 해석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그것은 바로 ‘원수’이다. 온건하게 말하면 ‘사람’이고, 그 사람의 정체를 특정해서 말하면 ‘원수’이다. 그들이 교회 내 반대자이든, 교회 밖 적대자이든 간에, 바울에게는 지긋지긋한 ‘원수’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5. 해석 및 예화 – 내 간증
내게도 원수가 있었다. 그를 죽이고 싶을 만큼, 내가 죽고 싶을 만큼. 나는 그로 인해 내 삶이 망가졌다고 느꼈다. 그가 없었다면 내 인생과 사역은 더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만 없다면 적어도 이리도 힘들어하는 시기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얼마나 많이 푸념하고 투덜거렸는지 모른다. 그 지독한 고난의 연대기가 5년 정도이었다. 그때는 날마다 죽음을 묵상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주의 은혜로 기적같이 문제가 말끔히 사라졌다. 그 자초지종을 나의 책,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복 있는 사람)에 자세히 적어놓았다. 그냥 은혜이고 기적이다.
언제인지 특정할 수 없는 어느 화창한 날 오후이었다.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고, 그토록 미워했던 원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치를 떨고 몸이 잔뜩 긴장을 했을 텐데, 그날은 달랐다. 그분을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런 고백이 터져 나왔다. “아,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분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미친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분으로 인해 나는 얼마나 고통 받았던가. ‘죽여야지’와 ‘죽어야지’ 사이를 무한 왕복하지 않았던가. 내 사역이 헝클어지고, 내 내면이 붕괴되고, 내 가정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감사하다니. 그분이 내 눈앞에서 사라진 것으로 감사하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보란 듯이 승리하고 그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차려주신 상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런 내가 낯설기 그지없었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감사할 수 없다.
그 순간 나는 유체 이탈하여 감사하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본 나는 진심으로 기뻐서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더 없이 행복한 모습으로 빙그레 웃고 있었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내가 봐도 내가 좋았고, 기뻤다. 설사 그런 내가 미쳤다할지라도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누리지 못했던 기쁨이다. 내 어찌 마다하리오.
그러고는 얼마 후, 동일한 경험을 한 번 더 했다. 그분으로 인해 내 길이 닫혔고, 그분으로 인해 다른 길이 열렸다. 대개 그러하듯, 나도 내 인생에 책 한 권은 쓰고 싶다는 로망을 품었는데, 내가 책을 쓰는 전업작가가 될 줄이야. 이따금 외부 강연 가서 나를 소개하는 첫 인사말은 이렇다. “책을 읽다가 책을 쓰게 되었고, 책을 쓰니 내 인생의 이야기를 다시 쓰게 된 로고스교회 김기현목사입니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분에게서 고통 당하지 않았다면 꿈도 뭇 꾸었을 일이 아니던가. 아니 한낱 꿈에 그칠 일이 현실이 되고, 실재가 되었다.
월터 윙크가 쓴 「사탄의 제국과」(한국기독교연구소)에는 내가 무지하게 좋아하는 한 문장이 있다.
그리하여 나는 내 책 「내 안의 야곱 DNA」의 8장, “하나님의 얼굴”에서 “원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이를 수 없다.”라고 썼다. 우리는 원수가 아니면 바뀌지 않는 어떤 것이 있고, 그 원수를 통해 우리는 폭력적인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다.
6. 마무리 및 적용
사도 바울은 자신의 원수를 통해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사자요 메신저이다. 내 가는 길을 바꾸라고. 너는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지금과 다른 길, 다른 삶을 살라고. 내가 원하는 것은 지금 너의 삶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라고. 그대 앞의 원수가 하나님이 보낸 사람임을, 그대를 연단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도구임을, 원수를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 길을 가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그를 적대하지 않고 환대하면 바울과 마찬가지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18절에서 바울의 기쁨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라는 문장의 앞에는 오랜 기도와 성찰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도 잠못 이루는 밤이 많았을 것이다. 디모데에게 속마음 들키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물었기도 했을 것이다. 몰래 울다가, 화가 나서 흥분했는데 디모데에게 들통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간을 보낸 다음, 자신의 적대자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그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된다는 사실 앞에, 그저 복음의 노예인 자신은 그걸 받아야 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리라.
<마무리 한 문단 – 권면하는 말?
셋째, 죽음을 뛰어넘는 기쁨이다.
1. 여는 말
참된 기쁨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쁨은 고난 없는 기쁨이 아니라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고난은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인데, 외부 환경과 내 길을 가로 막는 반대자라고 했다. 그것이 없는 기쁨이 아니라 그것이 있음에도 내 길을 막는 환경과 사람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에 기뻐할 수 있다고 했다. 이제 마지막이다. 이번에는 죽음이다.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은 죽음이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참된 기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2. 본문 관찰 및 설명
바울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다. 지금 받고 있는 재판의 결과에 따라서 살아서 계속 복음을 전하고 오매불망 바라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형을 당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주님을 하루 빨리 만나는 것이니 더 바랄 것이 없다. 그의 논리는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죽어서 주님을 만나고 안식을 취하는 것을 더 원한다고 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육신으로 남아 있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최종적으로 무죄로 풀려날 것을 기대한다는 점을 감추지 않는다.
3.
어떤 이들은 바울의 이런 태도에서 죽음, 곧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해석도 한다. 당시에 명예 자살은 사회적으로 인정 받았고 존중 받았다. 그러나 우리 본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스스로 죽겠다는 말도 없고, 죽고 싶어 안달이라는 의미도 없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살게 된다면, 살아서 복음을 전하고, 죽게 된다면, 죽어서 주님을 만나서 좋다는 것이다.
혹, 둘 중 하나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면, 그리고 선택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라면, 죽음을 원한다는 것이다. 고난 없이, 그리고 고난에 종지부를 찍고 하루 빨리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준이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면, 자신의 사명이 기준이라면, 힘겹지만 이 삶을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과 선택의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도저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로 하여금 삶에 대한 애착을 갖게 했을 것이다.
4.
사실, 내게는 죽음은 = 끝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어려서 겪었던 아비의 죽음으로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과부가 되고 다섯 남매 키우느라고 피눈물을 흘리셨다. 동네에서 공부를 제일 잘해서 대구로 유학 갔던 바로 위 누나는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고, 결국 공부하는 좀 하는 남동생 때문에 대학도 포기하고 공장에 취직했다. 그 남동생은 공부가 살 길이었고, 예수가 살릴 자라고 믿고 죽어라 예수를 믿었다. 돌아보면, 때 이른 죽음 경험이 나로 하여금 삶에 집착하고 미친 듯이 살게 하지 않았을까?
톨스토이가 그랬다. 그는 나와는 다른 진짜 황금수저인 사람이다. 귀족 출신에다가 부유했고, 공부도 잘했다. 뭐하나 모자랄 것도 부족한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착한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과 내 편에서 그다지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늘어가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다.”(「톨스토이 인생론」, 212) 젊은 날에는 방탕했다. 놀아본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신나게 잘 살았던 사람이지만, 뭔가 허전했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에 목이 탔다. 그가 남긴 「참회록」은 그 목마름의 실체를 알려준다. 바로 ‘죽음’이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그가 아무리 공들여 작품을 쓰고 부를 얻고, 명예와 칭찬을 받고, 대작을 남긴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죽은 다음에도 남는 것, 그것을 찾아다녔다. 그 결론은 신앙이었다.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한 세계를 주는 것, 소멸해 가는 세상 속에서 불멸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신앙이었다. 신앙이 그의 모든 물음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이었고, 죽음으로 무의미해지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궁극적 해결이었다.
죽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자각할수록 사람들은 삶을 더 사랑하게 되는 법이다. 자신의 끝이 있다는 것, 한계가 있다는 것,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있다는 것, 이 생 다음 다른 생이 있고, 그것이 나를 기다린다는 명징한 직면을 할수록 그는 지금 여기를 사랑하고 잘 살게 된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변혁하는 능력이다.
5.
대학 시절 존경했던 스승의 투병 소식을 듣고는 매주 일정한 시간에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스승의 말에 제자는 되묻는다.
“그러면 죽음과 직면하면 모든 게 변하나요?”
“그럼. 모든 것을 다 벗기고, 결국 핵심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자기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매사가 아주 다르게 보이네.”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
1.
제랄드 싯처가 경험한 사건 「하나님 앞에서 울다」
2.
위의 책이 그 사건의 기록이라면,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해석과 반응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런데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우리 가정이 그 비극으로 규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중략) 나는 비극 자체보다 비극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고 중에 부재하셨던 듯한 하나님 보다 사고 후에 은혜로 개입하신 하나님께 더 주목한 것이다.”(24쪽)
3.
그렇다. 나는 누구인가? 세 가지 고난이 나인가? 그 세 가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기쁨을 누리는 것이 나인가? 고난이 나를 규정하지 못하게 하라. 고난이 내 영혼의 기쁨을 앗아가지 못하게 하라. 고난이 내 영혼의 기쁨을 더욱 탄탄하게 구축하게 하라. 고난 없이 기쁨 없다. 고난 안에 기쁨 있다. 고난을 바라보는 나의 세계관, 나의 반응에 따라서 그것은 나를 멸망에 이르는 길이 될 수도 있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된다.
그의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한 대목이다. “결국은 죽음을 향해 달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 순간, 그때는 기쁨으로 여겨졋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그의 눈 앞에서 허망하게 녹아내리면서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더리는 구역질 나도록 추한 것으로 변해 버렸다.”
죽음 앞에서 사라질 것에서 기쁨을 더는 찾지 말자.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을 것에서 기쁨을 찾다. 그리고 죽는다는 진실 앞에서 지금 여기 내 환경과 상황을 받아들이고,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기쁨이다.
그리하여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었다고,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유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