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33년 동안 하신 일들을 몇 가지 떠올려 봅니다. 가난한 나자렛 출신 요셉의 아들로 집도 아닌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신 즉시 누군가의 원수가 되어 본국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하며 지내셔야 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30년이라는 시간, 어떻게 보면 인생의 95%가 넘는 시간을 평범함이라는 침묵 속에서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노동자로서 지내셨습니다. 생로병사와 같은 지극히 생리적인 삶의 현상들로부터 시작하여 희로애락을 겪으며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에서 연출되는 표정과 마음을 마주하며 지내셨습니다. 또한 출신과 성별로 인한 차별, 재물과 재화의 소유로 인한 불평등과 근심, 로마 제국의 식민(植民)으로 사는 민족의 비극 등과 같은 사회적 정치적 환경과 문제들도 겪으셨습니다. 가정에서는 가난과 병듦의 고통을 비롯해서 양부인 요셉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받아들여야 하셨고, 마을에서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일하고 먹고 마시며 상생(相生)하는 우정을 나누셨고, 누군가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큰 기쁨과 사랑을 보고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렇게 30년을 마치시고 나서 고향 나자렛을 시작으로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데카폴리스와 유다 지방 곳곳을 다니시며 사람들에게 전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 의로움에 주린 이들, 슬퍼하는 이들, 굶주린 이들, 소외받는 이들, 죄에 묶여 있는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과 기쁨을 건네는 일이었습니다. 병자들을 낫게 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며, 모든 이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비롯하여 아버지께서 이루실 구원에 관한 신비를 드러내시며 하느님 나라 건설을 시작하셨습니다. 국가를 뒤엎어 버리는 혁명도 아니었고 반란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의 존엄함과 함께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이끄셨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직전에도, 예수님은 친구 나자로의 죽음을 보시고 깊이 애통해 하시며 그를 살리심으로써 당신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으로서, 믿는 모든 이에게 말씀하신 모든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이로써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진실과 진리가 눈앞에 드러났고 하느님의 구원이 그들이 머문 곳에서 시작되고 있음에도, 믿지 않는 자들과 자신들의 기득권과 실리를 지키고자하는 사람들은 결국 ‘사사로운 것’을 얻기 위해 ‘절대적이고 영원한 하느님 은총’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요한 11,53)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 결국 이루어지겠지만, 하느님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당신의 은총과 생명을 거부하는 인류의 모든 죄를 죽이실 것입니다. 대사제 카야파의 예언대로 ‘온 민족이 죄로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그 모든 죄를 끌어안고 죽는 것(요한 11,50)’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죽이는 불신자들과 죄인들의 죄마저도 아들에게 지워 살리시고자 하십니다. 오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결심하지만,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서 하느님은 그들의 죄를 없애고 살리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사랑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이며 능력입니다. 죄에서도 구원을 뜻하시고,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며, 죽음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서 소외될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믿는 모든 이에게 사랑이시고 자비이시며 생명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