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30.연중 제22주 일요일 강론>
<마태16,21-2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의식이 생각하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멈춘 뒤에도 잠재의식은 계속해서 답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의식과 달리 잠재의식은 답을 발견할 때까지 결단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친구와 잡담중에 1980년대 아이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애 먹다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의식에서는 ‘아이돌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이제 됐어’라고 생각해도 잠재의식은 그저 한결같이 성실하고 우직하게 계속해서 답을 검색합니다. 적중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고 검색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잠재의식은 그런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기 위한 감정의 브레이크를 제거하는 법, 이시아 히로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에이지,2006.p.90-92)/
마태오는 마르코 복음서에 보존된 더 오래 된 수난 예고 본문을 자기 시대의 어휘에 따라 변형시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가 아니라(마르8,31) “사흗날(또는 사흘째 되는 날)” 에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것입니다(1코린15,4; 마태27,63).
마태오 복음서 저자의 의식에는, 세 차례에 걸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가 하느님의 계획과 이 사건들 안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에 정통한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써야하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의식에는 예수님을 한 예언자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신구약을 통합해야하는 의식안에 요청이 있었고, 잠재의식 안에서는 성령의 이끄심과 함께 구약과 신약을 잇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구원계획이 하나의 파노라마로 그려져야 했습니다. 그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제자들에게만 이 예고를 하십니다. 그리고 마태오만이 그분께서 고난을 받으실 공공의 장소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시온성이며 천상의 예루살렘을 잇는 장소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수고스러웠지만 수많은 구약의 사건들은 마태오의 잠재의식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질서라는 답을 찾아나섭니다. 이제 유대인들의 혈족인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구원의 역사를 “구약안에서 신약을, 신약 안에서 구약을 봄”으로써 하느님의 큰 구원계획을 깨닫게 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16,23)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 뒤에서 밝히는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가실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나서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입니다. 같은 명령이 예수님의 40일 광야 생활의 유혹에서 사탄을 향해 이미 명령하셨습니다(마태4,10도 참조).
여기서 ‘걸림돌’이란 ‘죄를 짓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네 오른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30)
이처럼 예수님은 죄 짓는 것에 대해하는 단호하십니다.
‘죄짓게 하다’의 직역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게 하다(이사8,14-15; 로마9,33; 1베드2,8 참조) 입니다. “눈”이나 다음 절에 나오는 “손”은 마음이 결정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기관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지체를 빼거나 잘라 버리라는 말은 곧 그러한 마음을 그렇게 하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마태12,14 참조).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예수님의 말씀이 지닌는 진지성과 심각성을 약화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행위로 인한 손이나 눈이 지은 죄 밑에는 마음의 죄가 있고 마음의 죄 밑에는 영적인 죄가 있어서 고통이나 무력감 안에서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취한 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인한 맛에 중독이 되어 손이나 눈의 세포가 죽으면 새로운 세포가 재생되는데, 잠재의식을 담당하는 간뇌에 의해서 뇌의 신경전달 물질인 시냅스를 통해 과거의 습관이 새로난 세포에 전수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 고통의 순간이나 무력감의 순간의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선택했던 기억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잠재의식은 과거인지 현재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초대하고 나의 죄성을 바라보고 용서청하며 하느님을 선택하는 새로운 나로 거듭날 수 있게되며, 손과 눈 등에 붙은 습관들도 사라집니다.
이 때 방법은 먼저 기억을 봉헌하고, 기억 봉헌이 끝나면 예수성심께 손과 눈 등 몸을 봉헌하면 됩니다. 물론 기억이 다 봉헌되고 난 후에 손과 눈을 봉헌하며 자주 예수 성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러한 “생각”이나 관점의 대립이 이루어진다는 견해는 구약성서와 예수님 시대의 유다교에 그 뿌리를 둡니다. 인간 이성으로 하느님 뜻을 온전히 헤어릴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십자가 성요한은 지성 기억 의지를 다 비워내만 하느님의 뜻을 알게되는 하늘의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따름’에 관한 피상적인 생각을 물리치십니다. ‘따름’은 예수님을 그냥 뒤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지성 기억 의지를 봉헌하고 비워낸 뒤에, 소화데레사 성녀처럼 수시로 자신의 몸을 사랑의 예수성심께 봉헌하여 사라지게 하면 잠재의식 마저도 정화되어 주님 사랑과 일치에 이르게 됩니다
에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의 행실대로 되 갚을 것이다”(마태16,27)라고 말씀하심니다.
마태오는 개인적 응보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시편28,4 또는 시편62,13을 인용합니다. 구약성서(욥34,11; 잠언24,12; 예레17,10; 25,14; 32,19; 에제18,30; 호세12,3; 집회11,26; 16,12-14; 35,24)에 깊이 뿌리를 내린 이 사상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새롭게 두 가지 특징을 부여받습니다.
첫째, 마지막 날에 각 사람을 심판하실 분은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시다(마태25,31-46).
둘째, 마태오는 장차 ‘갚아 주실 분’만 생각하며 실천하는 선행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마태6,4.6.18; 5,6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손과 눈의 습성들은 우리를 회개로 일깨웁니다. 우리의 기억들은 예수성심께 비워내어 공포와 수치감 그리고 성사를 통한 죄의식에서 해방되게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과 입과 귀와 눈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말해야 할 것을 하지 못했던 것을, 정화와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앞에서 다시 할 수 있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매일 미사책에 나오는 복음을 10번 읽고 묵상하며,예수님 안에서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으며 말해야 할 것을 말 함으로써 주님을 만나고 대화하며, 마무리로 1분~30초 동안 내 의식마저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 무념무상으로 머뭅니다(기도)
일상 생활에서 묵상중에 만났던 예수님의 해상도를 높여서 주님현존의식 안에서 자주 대화를 나눕니다(정화)
<Matthew16,21-23>
21 From that time on, Jesus began to show his disciples that he must go to Jerusalem and suffer greatly from the elders,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and be kill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22 Then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 "God forbid, Lord! No such thing shall ever happen to you."
23 He turned and said to Peter, "Get behind me, Satan! You are an obstacle to me. You are thinking not as God does, but as human beings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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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Therapy(마음을 방해하는 제동장치 푸는 요법)04
방황할 때 도움되는 단 한마디
1.잠재의식은 끊임없이 답을 찾는다
깜빡 잊어버렸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분명 알고 있는 건데도 생각이 안 난다?
친구와 잡담을 나누다가 그리운 1980년대의 한 아이돌 이야기가 화젯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당신도 친구도 그 아이돌 이름이 머릿속에서 맴돌며 도대체 생각이 안 난다.
“분명 ‘김’으로 시작하는 이름이었는데 뭐였더라....김지수? 아니, 다른 이름이었는데...’
둘이서 이리저리 머리를 쥐어짜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떠올리지 못하고 다른 화제로 흘러간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기 위한 감정의 브레이크를 제거하는 법, 이시아 히로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에이지,2006.p.90)/
그런데 친구와 해어진 뒤 집에 돌아와 혼자 목욕을 하다가 불현듯 그 이름이 나온다.
‘아, 김지영이었지!’
생각해내려고 그렇게 노력할 때는 떠오르지 않더니 그 화제를 완전히 잊어버린 순간에 정답이 툭 날아든다.
혹은 뭔가 아이디어를 내려고 책상에 앉아 있을 때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다가도 ‘잠시 쉬었다 할까’ 싶어 일을 잊고 산책을 나섰다가 돌연 좋은 안이 떠오를 때도 있다.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까맣게 잊었을 무렵 별안간 답이 떠올라 놀란 적이 당신에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의식이 생각하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멈춘 뒤에도 잠재의식은 계속해서 답을 찾고 있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기 위한 감정의 브레이크를 제거하는 법, 이시아 히로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에이지,2006.p.91)/
그리고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한데, 의식과 달리 잠재의식은 답을 발견할 때까지 결단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의식에서는 ‘아이돌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이제 됐어’라고 생각해도 잠재의식은 그저 한결같이 성실하고 우직하게 계속해서 답을 검색한다. 적중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고 검색을 계속하는 것이다.
잠재의식은 그런 특징이 있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기 위한 감정의 브레이크를 제거하는 법, 이시아 히로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에이지,2006.p.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