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에세이(2)
당신의 봄을 믿어야 합니다 / 김잠출
모처럼 지역방송을 시청했다. 곧 사라지게 될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호계역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로컬성이 강한 프로는 재핑(Japping) 습관까지 절로 멈추게 했다. 내가 사는 곳, 내 주변과 이웃, 내가 잘 아는 지역소재는 잠시도 화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한다. 아직도 본방사수와 몰입시청을 하다니... 지역방송과 지역시청자의 숙명에서 벗어나진 못한 꼰대라 한들 어쩌겠는가.
“Boys, be ambitious”
1975년 설을 쇠고 난 뒤의 어느 날, 고향 마을에 낯선 이들이 들어왔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마지막 겨울방학이라 치도(治道) 같은 부역(賦役)을 하며 빈둥거리던 차에 마주한 낯선 사람들이 무척 궁금했다. 15년 동안 보던 버스보다 더 많은 수의 트럭이 왔다 갔다 하고 시멘트 포대를 산더미처럼 쌓아놓더니 며칠 만에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이어 집집마다 뚝딱 두꺼비집을 달아 주었다. 작은 도란스를 하나씩 나눠주기까지 하니 온 동네가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첩첩산중의 마을에 ‘새마을 운동과 정신’이 복음처럼 다가왔고 우리의 ‘대통령 각하’는 정말 위대한 영웅으로 숭상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마다 다리가 생기고 산골의 밤은 낮처럼 밝아졌으니 말해 무엇하랴. 더 이상 남포를 들고 밤마실을 다니지 않아도 된 어른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각하를 칭송했다. 군사부일체를 배워 몸에 밴 필자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상기하며 칭송 대열에 합류했다. “Boys, be ambitious!” "환경이 결코 나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같은 구호는 마법처럼 새길수록 힘이 거듭 솟구치게 했다. 뒷산의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를 보면서 최악의 환경에서도 꽃이 핀다는 암시와 자기최면을 숱하게 되풀이했다. 내 생애 첫 문명의 혜택이 된 ‘전기’와 ‘새마을’은 그렇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단어로 각인되었다.
입춘은 일년 중 봄이 시작되는 날이라지만 매화는 입춘보다 더 빨리 봄소식을 전한다. 통도사의 자장매(慈臧梅)는 해마다 영남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린다. 자장매를 놓쳐 아쉬운 사람은 양산 원동역의 매화마을에 가면 된다. 산과 산 사이에 강이 흐르고 삼랑진과 물금 사이 낮은 곳에 있는 원동역과 주변 10리는 입춘 전후에 온통 매화밭으로 변한다. 특별한 스토리도 없고 그리 뛰어난 품종도 아니다. 그저 강변을 온통 꽃천지로 만드는 ‘떼장’으로 유혹한다. 개화도 그리 서두르지 않는다. 해마다 실바람이 봄을 실어다 놓고 강물이 풀릴 즈음, 기차도 강촌도 매화천지로 덮인다. 사방천지 널리고 널린 게 매화다. 엄마가 봤으면 “여어 봐라, 마케 꽃이다.”고 외쳤을 화사한 꽃무더기 아래를 욜그랑살그랑 걸으면 꽃멀미가 날 정도다. 통도사 자장매가 나름 매니아들이 찾는 세련되고 귀한 존재이니 ‘중앙방송’의 화려한 고급, 일류 프로에 견줄만하다. 원동 매화는 도리불언하자성혜(桃李不言下自成蹊), 그 자체다. B급이나 삼마이, 노잼이라는 평가를 인정해야만 하는 지역방송에 비유하면 다들 억울해 할까.
“지역방송은 지역파수꾼이어야 한다.”
봄(春)을 봄(視)을 강제로 차단 당한지 3년째다. 아무래도 올 2월엔 통도사를 들르거나 원동에 가서 봄을 보아야겠다. 원동역에서 낙동강 건너 작은 공원에 홍수진 PD의 시비가 있으니 생각은 결국 ‘지역방송의 파수꾼’이었던 홍 피디에 귀착한다. 시비는 2008년 방송 후배들이 가수 최백호와 함께 세웠다. 그는 ‘영일만 친구’라는 노래의 실제 주인공이었고 팝DJ와 화가, 연극인, 시인으로 활동한 지역문화의 첨병으로 살다 갔다. 늘 지역과 지역민 네트워크를 활용해 지역문화를 이끌었다. 지역민요와 전통 노동요를 채록하고 팝DJ와 연극연출, 화가, 팝 칼럼니스트로 다양한 재능을 발휘했다. 무용연출과 민속연구, 향토사 연구는 물론 문화기획자로 또는 시인, 수필가로도 이름을 날렸던 지역방송인이었다. 밥 딜런과 비틀즈, 폴 사이먼과 앤디 워홀 등을 상당히 편애했지만 향토색을 잊지 않았고 향토 소재를 활용한 문예창작에 몰두했다. 이런 스타PD, 방송에 미친 ‘쟁이’들은 지역과 지역방송, 지역 문화계에 생수이자 마중물 같은 존재이다. 광주의 소수옥 피디나 포항의 정옥희, 마산의 정해숙, 윤시내의 ‘열애’를 만든 부산의 배경모 PD 등이 그런 분들이었다. 말로 뉴스를 전하고 시사를 달구는 방송인들은 작가나 신문기자처럼 글을 잘 쓰지 못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지만 당시의 ‘컨트리 스타’들은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팝송에 해박했다. 그들은 MBC 예쁜 엽서전이나 가곡의 밤, 고전음악동호회 등 각종 문화이벤트를 주도했다.
한 시대의 아이콘을 넘어 브랜드가 된 '영일만 친구'는 포항 등대박물관 앞에 노래비로 남았고 홍수진의 시는 양산 원동면 원리 매화공원 시비에 새겨져 있다. ‘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 수평선까지 달려 나가는, 돛을 높이 올리던 친구’는 어디로 갔을까. 변방의 문화, 지역방송의 파수꾼들이 그립다. ‘글로벌’을 ‘반성문’으로 오독하지 않는다면 오! Glocalism이여, 나는 기도한다. ‘미나리’의 윤여정이나 ‘깐부 할배’ 오영수처럼 지역방송의 콘텐츠도 언젠가 세계에 빛을 발하는 날이 오기를.
“무한한 디지털 영토를 점령하자.”
'관행'이라는 단어의 양면성과 ‘안다이 박사’를 떠올려 본다. '관행' 은 낡은 것이나 구시대적이고, 고질적이거나 잘못을 반복한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한 말이다. '안다이 박사'도 똥파리와 붙여 쓰는 부정적인 조어(造語)다. 하지만 21세기의 지역방송은 습관 같은 관행은 지양하되 안다이 박사를 지향했으면 좋겠다. “지역소멸이 지역방송 위기와 궤를 같이 한다”는 뉴스를 전한 뒤, “서울에 대한 판타지를 갖고 있는 지역민들”을 위해 ‘경성판타지’란 프로그램을 지역방송이 고정 편성한 걸 본 적이 있다. 제목부터 불편하고 거슬렸다. 아무래도 사고의 혼돈이요 아이러니로 여겨졌다. 지역의, 지역을 위한, 지역에 의한 안다이 박사로서는 지역방송의 ‘서울 동경’이 낳은 ‘잘못된 관행’으로 보였다. 지역 예술인의 목소리가 더 어울릴 법한 로컬 프로에 굳이 서울의 유명 연예인이나 성우들을 내레이터로 내세우는 것도 정말 보기 상그럽다. 울산의 라디오 MC가 서부경남의 강한 억양으로 방송하면서 “사투리는 지역문화의 정수” “사투리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라는 멘트를 부끄럼 없이 날려 보낸 날, 울산의 청취자가 얼마나 공감을 했을까. 부산과 마산, 진주와 합천의 말이 울산 말과 차이나고 억양과 고저장단이나 단어의 강세 위치가 판이하다는 사실을 그들만 모르고 있었다. 지역에 방송하는 특집 강좌나 동사무소와 구청, 시청이 주관한 특강에 연예인들과 서울 강사를 동원하는 현실을 보는 것도 내겐 고통이었다. 그들은 용돈벌이 겸 푼돈을 챙기며 전국을 순회하는 꾼들이다. 지역의 공공기관이 오히려 지역의 전문가나 지역 예술인을 외면하고 낮춰 본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아니면 서울의 고급문화를 촌놈들에게 맛보여주려는 지역방송이나 지자체의 눈물겨운 배려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지방자치나 local이란 영어를 써놓고 촌놈, 컨트리, 하수라고 읽을 것이 뻔한 사람들이다.
서울에서 내려 보낸 K나 M의 지역 사장들 역시 식민지의 ‘총독’ 같은 분들이다. 이들은 2~3년간 본사 눈치 보며 쉬다가 서울 복귀를 꿈꾼다. 그들은 지역방송사의 순이익 1%를 지역 문화예술에 투자할 것을 권유해도 오불관언이다. SB나 광고 틈새에 지역 시인의 시노래를 편성하려고 무던히 애써 봤자 촌스럽다며 거부당하기 일쑤다. 그새 강물은 흘러가고 또 흘러왔건만 돌은 구르지 않았고 뽑히지도 않았으니 “변하는 미디어, 변하지 않는 지역방송”이란 말이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지역방송이 유일하게 지역민에게 손을 비빌 때는 통폐합이나 광역화 같은 자신들의 존립이 걸렸을 때다. 갑자기 지역민이나 시민단체를 찾아가고 지역 정치인, 단체장에게 청구서 같은 서명지를 들이민다. ‘지역방송을 사수하자.’며 지역의 힘을 보태라고 역설한다. 그래봤자 결국 꿩 새끼는 산으로 가고 오리새끼는 물속으로 가버린다. 지 배부르면 토사구팽 저리 가라다.
서울에 가도 지역방송이 푸대접을 받는 건 매한가지다. 국회나 정당, 청와대나 기업체를 막론하고 중앙과 지방 기자실의 구분은 아직도 엄격하다. 중앙방송과 지역방송은 서비스 구역(coverage) 크기만 차이 나는데, 우린 왜 모든 일을 중앙에 기대어 처리하고 중앙에 줄 서야 좀 더 그럴 듯 해 보이고 그래야만 마음이 놓이는지 알 수가 없다. 지방화, 풀뿌리 민주주의를 입으로는 외치면서 마음속에는 뿌리 내리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디지털 영토는 무한하다. 디지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말하기와 글쓰기 능력, 기획력과 영상이나 이미지 활용능력은 지역에서 지역방송인들이 최고 전문가이다. 단지 도전정신이 문제겠지만 지역방송인이 무한대로 열려있는 디지털 영토를 점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에 탑승하면 되는데 언제까지 ‘좋은 방송’ ‘공익 방송’만 만들겠다며 망설이기만 할 것인가. 방송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문학도 방송도 소비자가 외면하면 그냥 그런 것으로 폐기된다. 소구력 강한 콘텐츠, 3초 전쟁과 30초 전쟁에 발맞춘 신상만이 살아남는 이유가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데 지역PD는 살아남아서 ‘보는 프로그램’ 한 개 정도는 남겨야 하지 않겠나. 올해는 지역방송이 사라질까 두려워 말고 걱정 대신 희망을, 불평 대신 변화와 도전을 선택해 세계의 환호와 박수를 받아보자. 아마추어는 피하기 위해 애쓰지만 프로는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을 증명해주면 좋겠다.
제작 스크롤이 흐르는 것을 보니 호계역 다큐가 거의 끝나간다. 유명가수인 내레이터의 투박한 부산 사투리가 1시간 내내 울산 시청자의 귀를 괴롭혔지만 그래도 ‘지역방송’을 본 마음은 흐뭇하기만 하다. 이 마음을 담아 Bill Evans의 “You Must Believe In Spring!”을 지역방송에 선물해야겠다. 머잖아 다가 올 당신의 봄을 믿어야 하고 ‘로컬의 힘’과 ‘로컬의 가치’를 굳게 믿으시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