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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선생의 초상화(위)와 정암 조광조와 우암 송시열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 도봉구 도봉서원에서 열린
`도봉서원 추향제.
성종의 아들 연산군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왕이 된 이유는 생모를 잃은 불행한 개인사와 그의 성품도 작용했겠지만, 한편으로는 문화 창조의
열정이 잦아드는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거룩한 사업은 세종, 세조, 성종을 거치며 마감돼 연산군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추진할 만한
문화사업이 없었던 것이다.
연산군의 황음무도는 할 일 없는 시대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그가 양반들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았더라면 황음무도는
기록에 남지 않았을 것이고, 그는 쫓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정(反正)을 주도한 공신 역시 도덕적 집단은 아니었다. 그들 또한 부패로 말하자면 연산군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무언가 참신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반정세력은 깨끗한 이미지가 있는 집단을 불러냈는데, 이들이 바로 ‘사림(士林)’이다.
사림은 권력의 단맛에 취한 서울 양반들이 아니라, 성리학에 의식화된 지방의 선비들이었다. 사림은 성종 때부터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했지만,
연산군 시대에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거치며 패퇴를 거듭하던 중이었다. 반정세력의 요구에 따라 그들은 도덕적 상징이 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그들이
주도한 개혁의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반정세력에 의해 정계 진출 후 초고속 승진
모든 인간의 도덕화! 이것이 사림 개혁의 골자였다. 사림이 꿈꾸던 이상사회는 모든 개인이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도덕적 개인이
집합을 이룬 사회! 황홀하지 않은가. 사림은 개인의 대뇌에 도덕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그 프로그램에 의해 신체가 저절로 작동하는 상태를 바랐던
것이다. 당연히 구체적인 방법이 모색됐다. 그 방법이란 성리학에 근거한 도덕 교과서를 인쇄하고 배포하는 일이었다. 사림들은 기묘년(중종 14년,
1519) 정계에서 축출되기 전까지 ‘생산량을 늘리자, 부를 균등히 하자’는 식의 삶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는 정책은 단 한 가지도 추진하지
않았다. 오로지 도덕책을 찍어 전국에 배포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중종 초기에 국가가 발행한 도덕 교과서는 다양했다. 국역본 ‘삼강행실도’를 엄청나게 찍었고, ‘삼강’에 ‘이륜’을 더한 ‘이륜행실도’를
새로 편집했다. 또한 향촌사회를 교화하기 위한 ‘정속편’과 ‘여씨향약’, 그리고 여성들을 의식화하기 위한 ‘열녀전(列女傳)’ ‘여계(女誡)’
‘여측(女則)’ 등을 저술하거나 편집해 보급했다. 그런데 이 모든 도덕책은 ‘소학(小學)’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 사림들이 보급하고자 가장
노력했던 책이 바로 ‘소학’이었던 것이다.
‘소학’은 ‘대학’과 짝을 이룬다. ‘대학’은 ‘예기(禮記)’의 한 부분이었다. 주자(朱子)가 ‘예기’에서 떼내어 경전으로 격상시킨
‘대학’은, 개인의 인격 수양에서 천하 경영의 정치학에 이르는 과정을 압축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은 총론이다.
일상적 차원에서 유가의 도덕적 원리들은 어떻게 실천돼야 할 것인가. 즉 일상의 국면에서 유가의 도덕적 원리에 합하는 구체적 행위란 어떤
것인가? 주자는 여러 고전을 인용해 ‘소학’을 엮음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소학’은 인간의 일생과 일상을 포괄하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행위의 사례, 즉 출생에서 죽을 때까지, 하루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구성하는
미세한 구체적 행위에 대한 명령이다. 세수할 때, 식사할 때, 홀로 있을 때, 부모를 대할 때 등등으로 말이다. 예컨대 식사 때의 규범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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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시 덕천면에 있는 동죽서원. 1960년 지방 유림이 정암 조광조와 덕촌 최희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 밥을 뭉치지 말며, 밥을 크게 뜨지 마라.
음식을 앞에 놓고 혀를 차지 마라. 뼈를 깨물어 먹지 마라. 먹다 남은 생선이나 고기를 다시 그릇에 놓지 마라.
국을 들이마시지 말고, 국에다 다시 간을 하지 말며 이를 쑤시지 마라.
물기가 있는 고기는 이로 끊고, 마른 고기는 이로 끊지 마라. -
‘소학’이 어떤 책인지 짐작이 가는가. 사림이 모든 인간의 도덕화를 정책으로 밀고 나가려면 자신들부터 도덕적 존재가 돼야 했다. 그리고
표본으로서 최고의 도덕적 인간이 필요했다. 그 표본이 바로 조광조(趙光祖, 1482~1519)였다. 오늘날까지 조광조는 개혁을 추진하다가 부패한
훈구세력에 의해 희생당한 인물로 기억된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맑고 강직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소학’이 그 근거다. 조광조는 ‘소학’ 실천에
골몰했던 ‘소학동자’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였다. 두 사람 사이에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김굉필이 어머니에게 보내려고 꿩 한 마리를 말리고
있는데, 지키는 사람이 소홀한 틈을 타서 고양이가 꿩을 물고 달아났다. 김굉필이 흥분하여 지키던 자에게 소리치며 꾸짖자, 제자 조광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어버이를 봉양하는 정성은 지극하시지만, 군자는 말과 안색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소자가 마음에 찜찜하여
말씀드립니다.” 충격을 받은 선생은 제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도 즉시 뉘우쳤는데, 네가 이렇게 말하니 정말 부끄럽구나. 네가 내 선생이지,
내가 네 선생이 아니다.”
‘소학’의 실천으로 ‘소학동자’라는 이름까지 얻은 스승을 도덕적으로 훈계한 제자 조광조는 그야말로 ‘소학’의 완벽한 구현이었다.
홍인우(洪仁祐)는 조광조가 꿇어앉는 자세가 습관이 됐고, 언제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있었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초저녁부터 삼경까지 꼿꼿이
앉아 꼼짝하지 않았고,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었으며, 아무리 더운 여름의 짧은 밤이라도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말한다.
스승에게까지도 군자의 도리 간언
조광조는 중종 10년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그의 출세는 쾌속 항진이었다. 그는 4년만인 중종 14년, 곧 그가 죽음을 당한 기묘사화가
일어난 그 해에 대사헌까지 오른다. 그 과정에서 그가 추진한 정책의 핵심 역시 ‘소학’이었다. 중종 11년 11월4일 조광조의 우익
김안국(金安國)이 조강(朝講)에서 중앙과 지방, 그리고 민간과 학교에 ‘소학’을 널리 보급할 것을 요청했다. 여기에 장순손(張順孫),
기준(奇遵) 등 사림 출신들이 거들자, 중종은 이틀 뒤 예조에 ‘소학’의 보급을 지시했다. 보급의 범위도 양반에 한정한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까지 확대되어 있었다. 즉, 중종 12년 6월27일 홍문관이 ‘소학’을 ‘열녀전’ ‘여계’ ‘여측’과 함께 국문으로 번역해 보급하자고
건의해 허락을 얻어낸 것이다. 국문 번역본의 목적은 ‘여염의 소민(小民)들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 없이 다 강습하여 일국의 집들이 모두 바르게
되는 데’ 있었다. 기묘사림의 ‘소학’ 보급 노력은 중종 12년 7월27일 “‘소학’은 풍속을 바로잡는 책이므로 많이 인쇄해 중외에 널리
반포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중종 11년부터 기묘사화가 일어난 중종 14년까지 사림들은 ‘소학’의 보급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았다. 중종은 ‘소학’을 경연의 텍스트로
삼았다. 그의 실천은 성과를 냈다. “근래 성상께서 이처럼 ‘소학’을 높이 받드시기에 젊은 무리가 다투어 ‘소학’을 끼고 항간에 다닌다”는
것이었다(‘중종실록’ 12년 8월29일). 그럼에도 조광조 등은 미진하다면서 임금에게 계속 ‘소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마침내 그 철저한 근본주의자 조광조의 입에서 ‘소학’ 보급이 실효를 거두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근일에 신이 성균관에 가서 보니
입학(入學)하는 사람은 다 ‘소학’을 끼고 있고, 읽는 자도 많아졌습니다. 전에는 ‘괴이쩍다’고 하던 ‘소학’ 읽기를 지금은 예사로 여기고
있습니다.”(‘중종실록’ 13년 7월27일) ‘소학’ 보급이 얼마나 강력하게 추진되었는지는 중종 13년 7월2일 일시에 ‘소학’ 1300부를
찍어 관료와 종친에게 나눠준 일만 보아도 알 만하다. ‘소학’이 온 나라에 보급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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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을 배향한 죽수서원. 전남 화순군 한천면에 있다.
조광조와 사림의 ‘소학’ 보급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 성과는 중종 14년의 기묘사화로 일시에 파산해버리고 만다. 조광조가
실각한 직접적인 계기는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추삭(追削)에 있었다. 정국공신이란 중종반정의 공신이다. 원래 이런 일에는 어중이떠중이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조광조 등은 별 공도 없이 공신의 칭호를 받게 된 어중이떠중이들의 공신 칭호를 취소하자고 주장했다. 어중이떠중이를 대표하는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은 분노했고,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조작해 조광조와 그의 당류(黨類)를 축출했다.
기묘사화의 중심에도 ‘소학’이 있었다. 조광조가 쫓겨난 뒤 남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간에서 ‘소학’을 힘써 실천하게 된 것은 다
저들이 주장했기 때문이므로, 저들이 귀양을 간 뒤로 무지한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죄를 받은 것은 ‘소학’을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듣기에 아주 민망합니다.”(‘중종실록’ 14년 12월16일) 요컨대 기묘사화는 ‘소학화(小學化)’와 ‘반소학화(反小學化)’의 대립으로 발생했던
셈이다.
경직된 도덕주의가 불만·원한 초래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1년 전 익명의 투서를 단 화살이 의정부와 사간원의 대문에 꽂혔다(중종 13년 8월21일). 이 투서에는 조광조,
김안국, 기준 등 30여 명의 사림 출신 관료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들이 국정(國政)을 어지럽힌다는 비난이 담겨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사관(史官)은 조광조 등의 개혁 정책을 일단 높게 평가한 뒤, 사람에 대한 과도한 도덕적 평가가 인재를 폐기한 탓에
노성(老成)한 사람들 중에는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경직된 도덕주의가 불만과 원한을 초래했던 것이다. 조광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남곤 역시 애초에 조광조 일파와 어울리려고 했으나, 조광조가 소인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원한을 품었다고 하지 않는가? 사관은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때 조광조의 명망이 가장 높아 그를 사모하고 본받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젊은이들은 ‘소학’의 도리를 말했고, 행동거지도 법도에 맞게
하려고 힘써 농담조차 하지 않았다. 성리학에 관한 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은 이름만 있고 실천은 없다 해도 도학(道學) 하는 사람이라 했으므로,
문관(文官)과 선비들이 읽는 책이란 ‘근사록’ ‘소학’ ‘대학’ ‘논어’와 같은 책뿐이요, 문예(文藝)의 학문은 거들떠보지 않아 문장과 학술이
성종조보다 훨씬 쇠퇴했다.-
‘소학’에 근거한 사림들의 도덕주의는 문화를 쇠퇴하게 만들었다. 도덕적 행동이 잘못일 리 없다. 하지만 인간의 문화는 오로지 도덕만이
아니다. 조광조의 실패는 도덕적 근본주의에 있었던 것이다.
선조(宣祖) 때 사림들은 정계에 복귀했다. ‘소학’도 부활했다. ‘소학’을 문제 삼으며 반대하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과연
도덕적 사회가 되었던가? 천만에! 사림은 정권을 잡자 권력투쟁에 돌입했다. 조선의 고질병인 당쟁(黨爭)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들은 과거 부패했던
정권과 다를 바 없었다.
사실 ‘소학’은 양반의 책이었다. 상민들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신체를 완벽하게 ‘소학화(小學化)’해 ‘소학’의 내용이 양반만의 독특한
사회적 습관이 되게 하는 것이 ‘소학’ 보급의 속내였다. 곧 ‘소학’은 조선의 지배계급을 만들어내는 장치였던 것이다. 조광조가 증오했던 부패한
인간들은 사라졌지만, 조광조의 기획은 대신 백성과 구별되는 ‘소학화(小學化)’한 양반들을 만들어냈고, 그들은 조선을 영원히 지배했다. 어떤가?
도덕주의에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끝)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퇴계 이황과
‘朱子大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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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씨름하며 성리학
파고들기 |
벼슬도 버리고 연구에 몰두
… 조선의 학문 기틀 다졌지만 ‘사상의 편협성’ 초래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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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초상화.
나는 1000원권 지폐 앞면에 실린 이황(李滉)에게 존경의 염을 느끼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퇴계(退溪)보다는 그를 화폐에 안치한
국가주의가 싫다. 한데 그 국가주의를 걷어낸다 해도 퇴계는 여전히 별로다. 퇴계가 생각했던 이상적 인간과 사회가 나의 세계관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퇴계가 민족의 스승일지는 몰라도 나의 스승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나의 호오(好惡)와 관계없이 퇴계는 중요한 인물이다. 조선의
학문사에서 퇴계는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주자학(朱子學)이라고 한다. 주자에 의해서 성(性)과 리(理)를 논하는 장대한 학문체계가 완성됐기에 성리학은 곧 주자학이다. 주자
없는 성리학이란 바울 없는 기독교와 같다. 한데 바울과 달리 주자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직접 쓴 글과 책, 주해를 가한 책, 편집한 책 등
그의 손길이 닿은 저작물은 실로 엄청나다. 2002년 중국 상하이고적출판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 27책을 간행했는데, 2만 쪽을 훨씬
웃도는 분량이다. 이처럼 거창 무비한 주자의 저작인 만큼 조선에 한꺼번에 수입될 수가 없었고, 200~300년에 걸쳐 조금씩 천천히 수입됐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고려 후반인 1300년경 성리학이 전래됐고, 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아 1392년 조선이 건국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성리학 전래로부터 약 100년 이후 성리학에 입각해 조선이 건국됐으니, 건국 당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오해다. 1300년경에서 1392년까지 전래된 성리학 서적은 ‘사서집주(四書集註)’ ‘근사록(近思錄)’ ‘주자가례(朱子家禮)’ 등
몇 종에 지나지 않았고, 그 이해의 수준도 낮았다.
퇴계 이전까지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 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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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1574년 퇴계 이황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제자들과
유림이 건립했다.
세종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이 전해졌지만, 그것만으로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여전히 불가능했다. 더욱 깊은 이해는 주자학의
사상체계가 성립하는 과정을 이해해야 가능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서집주’와 같은 완결된 체계의 독립 저작이 아닌, 그 완결된 체계가 성립되는 과정을 알려주는 텍스트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인가? 곧 주자의 문집(文集)이다. 주자의 문집은 성리학과 함께 수입된 것으로 알기 쉽지만 이 또한 아니다. 주자의 문집에 관한 기록은
세종 때에 가서 겨우 나타날 정도다.
‘세종실록’ 11년 5월29일조를 보면 각 도의 감사에게 왕명이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민간에서 ‘국어(國語)’ 등 7종의 책을 찾아 바치라 했는데, 여기에 ‘주문공집(朱文公集)’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6월27일 안동
사람 윤기(尹山己)가 ‘주문공집’ 32권을 바친다. 그 뒤 ‘실록’ 등의 자료에서 주자의 문집은 이 ‘주문공집’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성종
7년 5월 정효상(鄭孝常), 박양신(朴良信)이 중국에서 돌아와 근래에 중국에서 간행된 것이라며 ‘주자대전’ 20권을 바친다. 명대에 새로 간행한
주자의 문집 ‘주자대전’을 구입했던 것인데, 국가 도서관인 홍문관에 소장되고 민간에는 유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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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이 학업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던 경북 영주시의 소수서원.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될수록 주자의 여타 저작에 대한 필요성도 커졌다. 개인적으로 중국에서 수입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요를 채울 수 없었다. 국내에서 인쇄하지 않는 한 이 책은 보급될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다. 주자의 저작은 중종 때 사림들이 정계에 진출한 이후
인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종 10년 11월4일 홍문관 부제학 김근사(金謹思)는 ‘주문공집’을 위시한 성리학 관계 서적을 광범위하게
인쇄할 것을 청해 중종의 허락을 얻는다. 하지만 결과는 미상이다. 이어 사림정권의 한 축이었던 김안국(金安國)이 중종 13년 베이징에서
돌아오면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朱子語類)’,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등 방대한 양의 성리학 서적을 구입해 돌아왔고, 중종에게 이 책들의
인쇄를 허락해줄 것을 청한다. 하지만 그 이듬해는 기묘년이었다. 기묘사화로 사림들이 실각하자, 책의 간행은 없던 일이 됐다.
주자의 편지 추려 ‘주자서절요’ 엮기도
김안국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18년 후인 1537년 정계로 돌아온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교서관(校書館) 제조(提調)가 되자 자신이
염원했던 책들을 인출해 유포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그 책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전하는 ‘주자대전’ 판본 중 가장 연대가 앞선 것이
중종 38년(1543)본인데, 김안국이 인쇄를 주관했던 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주자대전’은 본문 100권, 속집 12권, 별집 10권으로 도합 95책의 막대한 분량이었다.
퇴계는 1543년 10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됐으나 곧 휴가를 청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11월에 또 예빈시 부정(副正)에 임명됐으나 역시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뒷날 그는 남명 조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벼슬을 하게 된 것은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께서
연로하였기(家貧親老)’ 때문이었으며, 1543년부터는 벼슬을 하려는 마음이 없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퇴계는 1543년 이후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됐으나, 늘 오래 머물지 않고 귀향했다. 나는 1543년 퇴계의 은퇴 결심이 그해 간행된 ‘주자대전’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퇴계집’에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란 글이 있다. 퇴계가 주자의 편지를 추려 ‘주자서절요’를 엮고 그 앞에 붙인 서문이다. 이
서문에서 그는 마흔셋의 나이에 ‘주자대전’과 만났던 것을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에 따르면 ‘주자대전’은 동방에 거의 없고, 있어도 겨우
있는 것으로, 본 사람 역시 아주 드문 책이었다(此書之行於東方, 絶無而僅有, 故士之得見者蓋寡). 그 역시 이 해에 비로소 ‘주자대전’이란 책이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니, ‘주자학자’ 이황도 43세 이전에는 ‘주자대전’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그는 또 ‘주자대전’을 입수하고도 이 책이
어떤 책인 줄 몰랐다고 말하고 있다. 왜일까? 95책이나 되는 ‘주자대전’의 내용을 짧은 시간에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자대전’의 복잡하고 미묘한 내용을 이해하면서 읽어낸다는 것은 엄청난 지적·육체적 노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학자 퇴계 앞에
일생일대의 과제가 던져진 것이다. 퇴계는 병을 핑계 삼아 고향 ‘퇴계’로 돌아와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주자대전’을 읽어나갔다. 그는 마침내
“점차 그 말에 맛이 있음과 그 뜻의 무궁함을 깨닫게 됐고 특히 서찰에 대해 느낀 바가 있었다(自是漸覺其言之有味, 其義之無窮,
而於書札也尤有所感焉)”고 말한다.
이 시기에 불교는 이단으로 취급, 축출돼 있었다. 그렇다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해석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리학이 이미 존재했지만, 주자의 몇몇 저술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했다. 특히 퇴계는 불교와 성리학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사서집주’ ‘주자가례’ ‘근사록’을 낳게 한 그 사유의 과정과 더욱 상세한 설명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자의 전집
‘주자대전’이 그의 눈앞에 놓였다. 동아시아의 한 귀퉁이에 살던 지식인 퇴계는 주자의 언설과, 주자란 항성 주위에 몰려든 수많은 인간과 그들의
학문적 담론이 이루어내는 장엄한 세계를 처음 경험했고, 거기서 자신의 의문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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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이 제자 송암 권호문에게 글씨체본으로 써준 ‘퇴도선생필법(退陶先生筆法·왼쪽)과 주자대전.
퇴계는 특히 주자의 편지에 주목했다. 편지는 ‘주자대전’ 100권 중 48권이니 거의 절반에 해당하고 내용은 곧 논문에 가깝다. 퇴계는
‘주자서절요서’에서 ‘주자대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대개 전집 전체를 두고 말한다면, 전집은 대지와 같고 바다와 같다. 없는 것이 없지만 그 요령을 얻기 어렵다. 서찰의 경우 사람들의
타고난 자질의 높고 낮음과 학문의 얕고 깊음을 따라, 증세를 살펴 약을 쓰고 사물의 성질을 보고 풀무질과 망치질을 베풀 듯, 혹은 누르기도 하고
혹은 드날려주기도 하고, 혹은 인도하기도 하고 혹은 구제해주기도 하고, 혹은 격려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혹은 물리쳐 깨우쳐주기도 하였다.
마음의 은밀하고 미묘한 틈에서 작은 악조차 용납하지 않았고, 의리를 궁구할 즈음에는 먼저 털끝 같은 차이도 환히 살피었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일러줄 때면 능히 사람들이 감발(感發)하여 흥기(興起)하게 만들었다. 단지 당시 직접 배운 문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100세 뒤라 할지라도
그 가르침을 듣는다면, 귀를 당겨 듣고 그 앞에서 직접 말씀을 듣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
주자와 그 사우(師友) 간의 편지는 당시의 성리학이란 관념적 학문체계 속에서 제기될 수 있는 수많은 의문과 그에 대한 답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해 성리학을 진리로 알고 있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학문행위 속에서 제기할 수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주자의 편지를 주자와 그 문인 사이의 것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주자와 수백 년 뒤 조선 지식인들과의 대화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는 너무나 방대하다. 중복되는 것도 있고, 꼭 볼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그래서 그는 학문에 절실한 것만을 추려 14권 7책으로
줄인다. 주자의 저작은 주자 당시 송대 지식인에 대한, 그리고 송대 역사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했다. 이 작업을 최초로 정밀하게 수행한 사람이
바로 퇴계였던 것이다.
‘주자서절요’의 서문은 1558년 4월 쓰여졌지만, 1561년 성주(星州)에서 20권 10책으로 처음 간행됐다. 이후 1572년
정주(定州), 1611년 전주(全州)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널리 간행됐고 이 책은 주자학으로 들어가는 가장 보편적인 문이 됐다.
퇴계 이후 주자 관련 서적 쏟아져
‘주자서절요’는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조선의 학문은 거칠게 말해 ‘주자대전’을 읽고 이해하고 가공하는 것이었다. 퇴계의 제자
이덕홍(李德弘)의 ‘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 조익(趙翼)의 ‘주서요류(朱書要類)’, 정경세(鄭經世)의 ‘주문작해(朱文酌海)’,
이재(李栽)의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 박세채(朴世采)의 ‘주자대전습유(朱子大全拾遺)’,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김창협(金昌協)의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정조(正祖)의 ‘주서백선(朱書百選)’ 등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그 외의 유사한 서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장유(張維)는 1632년 ‘계곡만필(谿谷漫筆)’에서 중국에 다양한 학문이 존재하는 데 반해 조선은 오로지 주자학만 안다고 학문의 편협성을
한탄했던 바, 그 편협성의 기원은 1543년에 간행된 ‘주자대전’에 있었다. 요컨대 1543년 ‘주자대전’의 간행과 1561년 퇴계의
‘주자서절요’의 간행은 주자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했지만,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자대전’이라는 마르지 않는 거대한 호수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호수에 갇힌 그들은 다른 사유와 학문을 볼 수 없었다. 나는 1543년 ‘주자대전’의 인쇄와 퇴계의 ‘주자서절요’가 학문적 상상력을
제한하는 재앙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끝)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율곡 이이의 독서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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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는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과 |
텍스트 뜻 연구, 언제나
실천방략 생각 … ‘소학과 사서오경’ 기본 교과서로 권장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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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의 초상화와 율곡이 쓴 격몽요결(왼쪽).
한국사상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퇴계 이황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사상적 차이를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둘은
오십보백보다. 모두 주자대전(朱子大全)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바탕으로 성리학이 조선의 이데올로기로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지난번에 퇴계를 다루었으니, 이제 당연히 율곡을 언급할 차례다.
한때 독서는 한국인들의 ‘취미’였다. 취미란에 쓸 마땅한 것이 없으면 누구나 ‘독서’라고 적어넣지 않았던가. 한데 따지고 보면 독서는
복잡한 문제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이 간단한 물음은 사실 ‘학문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은 거창한 문제다. 율곡은
특이하게도 독서론(讀書論)을 남기고 이 물음에 대해 답하고 있다.
율곡의 독서론은 자신을 반성하는 문장, 곧 자경문(自警文)에 피력돼 있다.
-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나절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낮 동안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아무 일이 없으면 마음을 내려놓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일 처리에 마땅한 방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독서를 한다. 독서란
옳고 그름을 분변(分辨)하여 일을 행하는 데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오뚝 앉아 독서만 한다면, 무용한 학문이 된다. -
사림 의식화한 격몽요결
독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아니다. 일과는 일과 독서로 구성된다. 일을 하지 않으면 책을 읽고 사색하는 것이 율곡의
일과다. 독서는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독서를 통해 옳고 그름을 분변하고, 그 분변은 일상의 일에서 실천돼야 한다. 율곡에게
독서는 곧 인간 행위의 윤리성을 판단하는 준거였던 것인가.
자경문에 간단히 언급된 독서의 원리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 더욱 상세히 언급된다.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비결’로 번역되는 격몽요결은
율곡의 대표적 저작이다. 율곡은 왜 이 책을 썼던가? 중종, 명종대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선조(宣祖)대에 와서 마침내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림(士林)들은 스스로를 의식화하기 위한 교과서를 필요로 했던 바, 격몽요결은 바로 이 요구에 부응하는 책이었다. 격몽요결은 입지(立志),
혁구습(革舊習), 지신(持身), 독서(讀書), 사친(事親), 상제(喪制), 제례(祭禮), 거가(居家), 접인(接人), 처세(處世)의 10장으로
구성돼 있다. 보다시피 4장이 독서다.
4장에서 율곡은 독서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다.
- 배우는 사람은 늘 이 마음을 보존하여 사물의 유혹에 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치를 따져보고(窮理), 선(善)을 밝힌 뒤에야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가 눈앞에 드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로 드러내는 데는 이치를 따지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이치를 따지는 데는 독서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성현(聖賢)들이 마음을 쓴 자취와 본받거나 경계해야 할 선과 악이 모두 책에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성리학이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라고, 곧 궁리(窮理)하라고 말하면서 왜 다시 책을 읽으라 하고, 성현들이 책에 모든 것을 다
말해놓았다고 하는지 늘 궁금했다. 자연과학의 이치는 성현들의 책에 나와 있지 않다. 선입관 없이 사물을 직접 관찰할 때 이치는 발견된다. 내
의심의 골자는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율곡의 말이 겨냥하는 바는 다른 데 있다. 그 이치란 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닌 윤리·도덕적 원리였던
것이다.
성현이 책에 모든 이치를 다 밝혀놓았다면, 성현의 그 책이란 어떤 책인가. 그는 성현의 책을 예거한다. 먼저 ‘소학(小學)’을 읽어 부모,
형제, 임금, 어른, 스승, 벗과의 관계에서 윤리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방법과 힘을 얻을 것이다. 다음에는 사서(四書)를 읽어야 한다.
‘대학(大學)’과 ‘대학혹문(大學或問)’을 읽어 궁리(窮理)·정심(正心)·수기(修己)·치인(治人)의 도리를 알고 실천할 것, ‘논어(論語)’를
읽어 인(仁)에 대해 배울 것, ‘맹자’를 읽어 의(義)와 이(利)를 가리고, 인욕(人欲)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공부를 할 것,
‘중용(中庸)’을 읽어 성정(性情)의 덕과 천지 만물의 원리를 음미하여 깨달음을 얻을 것 등이다.
사서 다음에는 오경(五經)이다. ‘시경(詩經)’을 읽어 마음의 정(正)과 선을 칭찬하고 사(邪)와 악을 나무라는 도리에 대해 공부할 것,
‘예기(禮記)’를 읽어 예(禮)의 절차와 정신에 대해 깨칠 것, ‘서경(書經)’을 읽어 유가(儒家) 정치철학의 기원을 밝힐 것,
‘주역(周易)’을 읽어 인간과 존재의 변화에 대한 통찰력을 기를 것, ‘춘추(春秋)’를 읽어 역사에 대한 도덕적 판단력을 기를 것 등이 율곡이
주문하는 바다.
율곡은 소학과 사서오경을 인간이 읽어야 할 기본 교과서로 들고 있다. 사서란 논어·맹자·중용·대학(여기에 대학혹문을 더함. 대학혹문은
대학에 대해 혹자-어떤 사람의 물음에 대해 주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엮은 책)이고, 오경은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다. 유학자가 사서오경을
필수적인 서적으로 읽으라는 말은 당연한 주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경전의 주해라는 미묘한 문제가 끼어든다.
계속해서 독서 목록 추가
경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어적·문화적 코드가 달라지면, 어휘와 센텐스의 의미 역시 달라진다. 곧 시간의 퇴적 속에서
경전의 화자(話者)가 말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미는 모호해지고, 급기야 실종되기도 한다. 주해는 모호해진 혹은 실종된 의미를 찾는 행위다. 하지만
주해는 궁극적으로 오해다. 주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원래 화자의 견해가 아니라 주해자의 견해일 뿐이다. 주자(朱子)의 사서에 대한 주해에서
드러나는 것은, 공자와 맹자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가 아니라 주자의 생각일 뿐이다.
율곡이 읽으라고 한 사서오경은 중국 영락제(永樂帝, 成祖, 재위기간 1402~1424년)의 명으로 만든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이다. 사서대전은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주를 채택했다. 모시대전(毛詩大全, 곧 詩經大全)도 주자의 주를, 주역대전은
정자(程子)와 주자의 주를, 상서대전(尙書大全, 곧 書經大全)은 주자의 제자인 채침(蔡沈)의 주를 채택했다. 춘추대전(春秋大全)은
좌구명(左丘明)의 전(傳)을 채택했고, 예기대전(禮記大全)은 송나라 진호(陳澔)의 집설(集說)을 채택했다. 보다시피 가장 중요한 사서삼경은
주자와 주자학파의 주해본이었다. 율곡이 읽으라고 한 것은 이 사서오경 대전의 주해였다. 그것은 주자의 경전 해석만을 정통 해석으로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
이 ‘대전’에는 말들이 많다. 워낙 졸속으로 만들어졌고 또 황제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국가권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자의 주해를 채택한 것 역시 국가권력이었던 것이다. ‘대전’은 세종 1년 12월7일 성리대전과 함께 들어온다. 정확한 연도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이른 시기를 취하면 ‘대전’은 세종 3년부터 인쇄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종 17년이면 사서오경 전체의 인쇄가 끝난다.
‘대전’이 조선에서 정통의 권위를 갖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사림 정권 이전에는 정통의 지위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절대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사림 정권 이후, 곧 율곡 이후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주자와 그 학파가 주해한 사서오경 대전만 읽으면 끝인가? 그렇지 않다. 율곡은 계속해서 독서 목록을 추가한다.
- 오서(五書)와 오경을 돌려가며 익숙하게 읽고 이해하기를 멈추지 않아 의리(義理)가 절로 밝아지게 만들어야 하되, 송대(宋代)의
선현(先賢)들이 저술한 근사록(近思錄)·가례(家禮)·심경(心經)·이정전서(二程全書)·주자대전(朱子大全)·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을 틈틈이
정독하여, 어느 한순간도 끊어짐이 없이 의리가 항상 내 마음에 젖어들게 해야 한다. 여유가 있으면 역사책을 읽어 고금의 역사적 변화에 통달하여
식견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단 잡류(雜類)의 책은 한순간이라도 펼쳐 보지 않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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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자운서원. 율곡 이이를 추모하기 위해 1615년 제자들과 유림이 만들었다.
주자의 주해가 지배하는 사서오경의 ‘대전’뿐만이 아니었다. 근사록, 가례, 심경, 이정전서, 주자대전, 주자어류는 모두 주자와 정자,
그리고 주자의 우익들이 저술한 서적이었다. 율곡은 사서오경 이외에는 이 책만 읽을 것을 요구했다.
텍스트 고정으로 편협한 사유 불러
율곡이 격몽요결에서 고정시킨 텍스트들은 조선조 말까지 변함없이 유지됐다. 지식인이면 주자와 주자학파가 주해한 사서오경과 주자대전, 근사록
등의 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었다. 누구도 이 책을 읽지 않고, 혹은 이 책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는 지식인 행세를 할 수 없었다. 텍스트의
고정과 절대화는 당연히 다른 텍스트들을 배제했다.
유교의 경전과 성리학 서적이 아닌 타자들은, 이단이 되거나 잡류가 됐다. 이것은 지식과 사유의 폭을 제한하고 자유로운 지식과 사유의 분출을
잡도리하는 것이었다. 이단 잡류의 서적은 잠시도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성종 때까지는 학문의 다양성이란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사림 정권
이후 다양성은 사라지게 됐다.
주자에 의해 모든 진리가 밝혀졌기에 더 이상 밝혀야 할 큰 덩어리의 이야기는 없었다. 한층 더 상세한 이해와 약간의 보충으로 주자학을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일만이 남은 과제였던 것이다. 설사 부분적으로 주자와 주자 학설을 달리한다 해도 그 역시 주자가 만든 범주 속에 있는 것이었다.
주자는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학문체계였으며, 그중 자연인 주자의 학설을 일부 공격, 비판한다 해도 주자학이란 학문체계는 멀쩡하게 작동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율곡의 텍스트 고정은 실로 인간의 사유를 편협하게 만들었다.
독서는 율곡에게 근엄한 행위였다.
- 독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꿇어앉아 공경스런 자세로 책을 대해야 할 것이다. 마음과 뜻을 한데 모아 골똘히 생각하고 푹
젖도록 읽어 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로되, 구절마다 반드시 실천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만약 입으로만 읽고 몸에 체득하여 직접
실천하지 않는다면, 독서는 독서고 나는 나일 뿐이니,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
단정히 앉아 엄숙한 자세로 텍스트의 뜻을 연구하고, 언제나 실천의 방략을 생각할 것! 요즘의 독서와 크게 다른 모양이다. 현대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독서의 자세다.
율곡 시대의 독서는 양반만의 일이었다. 양반의 시대는 지나갔다. 율곡의 독서론이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다. 그러나 곱씹어봐야 할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율곡이 정한 책의 목록과 저 근엄한 독서 자세에는 찬동하지 않지만, 그의 진지한 책 읽기에는 찬성해 마지않는다. 적어도 책
읽기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무다. 책 읽기가 무너짐에 따라 한국 사회의 교양층이 무너지고 있다. 정녕 어떻게 할 것인가. 율곡의
독서론을 읽고 복잡한 심회(心懷)를 감출 수
없다. (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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