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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한 번 밖에 없는 고귀한 인생을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훌륭한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원치 않게 초라하고 후회스런 인생을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자가 진정 훌륭한 자인가, 어떻게 참으로 훌륭한 인생을 살 수 있는지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 통하여 훌륭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가 진정 위대한 사람입니다.(38)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였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실 때 항상 제자들과 나란히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셨습니다.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님의 이런 결연한 자세에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하기만 해도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또 제자들을 불러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33,34절을 보면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고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이 말씀은 벌써 세 번째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는 "보라!"하시며 제자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며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고난의 의미를 아주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묻기조차 두려워하는 말씀을 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일을 당하면 실족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복해서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2) 복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신다는 것은 바로 복음중의 복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아직 복음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담스런 십자가의 내용보다 세상 영광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두려워하고 싫어했습니다. 십자가 말만 나오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반드시 알아야 할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마음에 복음을 심고자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잘 돕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도울 때 음식을 대접하고 때를 따라 말씀을 가르쳐 주며 기도해 줍니다. 이런 사랑의 수고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무럭무럭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십자가 없이 은혜만 누리고 싶어합니다. 십자가를 가르치면 힘들어져 도망갈 것 같아서 좋은 말만 해주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십자가를 배우지 않으면 유혹이나 위기가 오면 그냥 무너져 버립니다. 사랑이 모래에 해당된다면 십자가는 시멘트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되어야만 견고한 기초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 같습니다. 결국 어느 순간에는 제 길로 가 버립니다. 성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십자가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심각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35절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예수님께 나아와 부탁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자기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부모님에게 꼭 사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수제자들로서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고난에 동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지긋이 보시면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재빨리 대답하였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영광이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곧 세울 것이라고 여긴 지상 메시야 나라를 말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점점 가까워지자 초조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자리를 얻는데 있어서 베드로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야심이 많은 자들 이였습니다. 이 두 형제는 경쟁심이 많았지만 베드로와 비교해 볼 때 아래였습니다. 이들은 첫째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최고 지도자 자리를 베드로에게 결코 빼앗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두형제가 용기를 내서 청탁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반드시 <베드로 문제>가 있습니다. “저 권사만 없으면 내가 인정받고 사랑받고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을텐데”, “저 형제 때문에 내가 뒤로 밀려나 난 것 같아” 서 속상합니다. 베드로 문제는 반드시 신앙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신앙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선의의 경쟁이야 문제될 것 없지만 인간적인 야심과 욕심에서 나는 경쟁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못쓰게 만들어 버립니다. 경쟁심을 넘어서 시기심에 붙잡히게 되고 결국은 사단의 밥이 되어 버립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의 경쟁심으로 늘 마음이 시끄럽고 영적으로 꽉 막혀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욕심으로 심령이 막히고 눈이 감긴 이들을 보실 때 심히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이들이 구하는 것이 너무나 세상적이고 또 그 방법도 이기적인 것 이여서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여기서 '나의 마시는 잔'이란 십자가의 쓴 잔을 의미하며, '나의 받는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먼저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하며 기를 꺾기보다는 영적 무지를 아시고 반복해서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 있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들은 높은 자리만 하사해 주신다면 어떤 고난도 감수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39절을 보면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예수님은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대답하였든지 간에 그들의 대답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대답대로 야고보는 제자들 중 최초의 순교를 당했습니다. 또 요한은 가장 오랫동안 십자가를 지고 복음 역사를 섬기다가 후에는 밧모섬에 유배 가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은 고난의 길을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41절을 보면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히 여겼습니다. 이를 볼 때 그들도 똑같이 높은 자리에 대한 야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가치관은 여전히 세상적이요 사고 방법도 세상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인간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참으로 위대한 자가 될 수 있는 영적인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 섬기는 종이요,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이 훌륭한 삶입니다.(43,44)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신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3년간의 훈련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는 것 같아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치 않으시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져야 할 영적 가치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42절을 보면 당시 로마는 힘이 곧 법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경찰공무원만 되어도 권세가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별을 달면 별별 권세가 다 주어집니다. 사람이 대권을 잡기만 하면 밑의 사람들이 "각하"하며 모든 시중을 듭니다. 그 맛에 한 번 권력을 잡으면 놓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손가락 하나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을 보면 멋있어 보이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집니다. 제자들은 권세를 행하는 로마가 미웠지만 자신들안에도 그런 자리에서 대접을 받고자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43,44절을 보면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great)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first)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합니까?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받고 대접받고 지시하는 자가 크고 위대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종과 같이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세상에서는 타이틀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어야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대하게 된다는 것은 타이틀이나 지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 '종'이라고 하시므로 소유보다 존재 자체, 인격 자체가 중요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정말 위대한 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받고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내면>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관심이 자기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바뀝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가족들이 크게 되기를 바라던 사람이 교회성도들을 섬기고 이웃들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섬기고자 합니다. 또한 자기 속회만 아니요 다른 속회도 관심을 가지는 내면입니다. 위대성의 척도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길만한 깊고 넓은 내면성>이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치 세상적인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얻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길만한 내면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타이틀이나 직분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위대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1)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잘 섬기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과 그냥 대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얼핏보면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고 그냥 훌륭한 것 같은데, 관심을 가지고 보면 도움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많이 갖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넓은 마음을 가진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높이시고 당신의 종으로 귀하게 쓰십니다.
2)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남을 섬긴다고 해서 맛있는 것을 사주고 듣기 좋은 말만 해주므로 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꽃병에 꽂힌 꽃과 같이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가장 잘 섬기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영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죄를 회개하고 그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혼들은 쉽게 말씀을 영접치 않고 빛 가운데 나아오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섬김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소원이 없는 자는 소원을 심고, 연약하여 자주 드러눕는 자는 찾아가 격려하고, 음란물, 허무, 교만, 야심 등 내면 문제가 많은 자는 말씀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결국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도록 하는 자가 진정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45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본받도록 친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인생들을 섬기셨는가 가르쳐 주십니다.
1) 예수님은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으로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분으로서 모든 천군 천사들과 인생들로부터 찬송과 경배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섬김 받고 싶은 본성을 부인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도리어 섬기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이 땅에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인생들을 섬기시기 위해 사람들보다 더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무기력하게 된 중풍병자도 섬기시고, 이기심으로 병든 세리들도 섬기시고, 예수님은 교만하여 서로 경쟁만 하고 세상 욕심으로 가득차 있는 제자들을 품고 섬기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섬김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본성대로만 살면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이 마음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시고자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기는 삶의 절정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을 전폭적으로 희생하시기까지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많은 죄인들이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났습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낮아져서 자기를 희생하면서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인정해 주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우리에게는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 명예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자기의 꿈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섬김 받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희생하여 겸손히 낮아져서 남을 섬길 때 반드시 생명이 살아나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각종 죄인들을 다 품고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리고 무지한 제자들을 끝가지 품고 섬기시므로 그들이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 되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므로 온 인류를 섬기셨습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본받아 섬기는 인생을 살므로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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