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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ditor of the newspaper was D. O. Ortenberg, a capable and fastworking
journalist. He knew how to organize the work and keep his staff on its toes. He
asked Party and political workers, commanding officers and soldiers to
contribute to the newspaper. And they responded readily. During the Great
Patriotic War, Ortenberg was editor of Krasnaya Zvezda, the newspaper of the
Soviet Armed Forces, and I have had occasion to run across him in the active
army.
그 신문의 편집자는 오르텐베르크로 유능하고 일을 빨리하는 언론인이었다.
그는 일을 조직하고 직원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게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당과 정치일꾼들, 지휘관과 군인들에게 그 신문에 기고하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들은 흔쾌히 응답했다. 대조국전쟁동안 오르텐베르크는 소련군 신문 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의 편집자였고 나는 현역에 있을 때 그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But back to the Khalkhin Gol. On August 20, 1939, Soviet and Mongolian
troops began their general offensive aimed at surrounding and wiping out the
Japanese troops.
It was a quiet and warm Sunday. The Japanese Command, confident that the
Soviet and Mongolian troops were not even thinking of an offensive, allowed the
generals and senior officers to take their Sunday leaves. Many of them were far
away from their troops: some went to Hailar, some to Hanchur and others to
Dzhandzin Sumeh. We had taken this important factor into consideration when
picking the day to launch the offensive.
하지만 할힌골로 돌아가자. 1939년 소련군과 몽골군은 일본군을 포위하고 소탕하기 위한 총공세를 시작했다.
조용하고 따뜻한 일요일이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소련군과 몽골군이 공격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고 확신하여 장군과 고위 장교들에게 일요일 휴가를 허가했다. 많은 수가 부대에서 멀ㄹ이 떨어져 있었다. 일부는 하일라로, 일부는 한추르로 다른 일부는 잔진 수메로 갔다. 우리는 공격 시작일을 고를 때 이 중요한 요소를 고려하였다.
At 6:15 a.m. our artillery opened up for all it was worth against the enemy
anti-aircraft guns and machine guns. Some of our batteries lobbed smoke shells
on the objectives to be bombed by our aircraft.
In the area of the Khalkhin Gol the roar of aircraft approaching combat
positions grew ever more deafening. Over 150 bombers and some 100 fighters
were in the air. Their striking power was great and had the effect of raising the
morale of our officers and men.
오전 6시 15분 우리 포병이 전면적으로 발포했다. 그것은 적의 대공포와 기관총에 대항할만 했다. 우리의 포병 일부는 아군 전투기가 폭격해야할 목표에 연막탄을 발사햇다.
할힌골 일대에 전투 위치로 접근하는 전투기의 굉음이 점점 더 귀를 멀게 했다.
150대 이상의 폭격기와 약 100대의 전투기가 공중에 있었다. 그들의 타격력은 대단햇고 우리 장교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효과가 있었다.
At 8.45 a.m. artillery and mortars of all calibres opened fire against enemy
targets, working it up to the limit of their technical capacity. Meanwhile, our
aircraft hit targets behind the lines. All telephones and radios carried the coded
command: the general offensive starts in 15 minutes.
오전 8시 45분 모든 구경의 포와 박격포가 적 목표물에 발포하여 기술적 능력을 한계까지 발휘했다. 한편 아군 전투기는 후방의 목표물을 타격했다. 모든 전화와 무선은 암호화된 명령을 수행했다.15분 후 총공세 개시.
At nine sharp, when our aircraft were strafing the enemy and bombing his
artillery, red flares went up announcing the beginning of the offensive. The
attacking units, covered by artillery fire, charged.
Our air and artillery strike was so powerful and successful that the enemy
was morally and physically depressed. During the first hour and a half he could
not even return the gun fire. The Japanese observation posts, communication
lines, and fire positions were destroyed.
9시 정각 우리 전투기가 적에게 맹공을 퍼붓고 포를 폭격하고 있을 때, 붉은 섬광이 올라가며 공격의 시작을 알렸다. 공격 부대는 포병 화력의 엄호를 받으며 돌격햇다.
우리의 공중 타격과 포격은 매우 강력하고 성공적이어서 적군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위축되었다. 첫 한시간 반동안 적은 총격에 응사하지도 못했다. 일본군의 감시 초소, 통신선, 사격 진지가 파괴되었다.
The offensive went on in strict compliance with the operational and combat
plans, and only the 6th Tank Brigade, a part of which had failed to cross the
Khalkhin Gol, sent only some of its units into action on August 20. The crossing
and concentration of the brigade was not finished until the end of that day.
Desperate fighting went on during August 21 and 22, especially in the area
of Bolshiye Peski, where the enemy offered more obstinate resistance than we
thought he would. To rectify the miscalculation we had to bring in the 9th
Armoured Brigade from the reserve and reinforce our artillery.
공세는 작전과 전투계획을 엄격히 준수하며 계속되었고 할힌골을 통과하는데 실패한 제6 탱크여단만이 8월 20일 일부 부대만 실전에 투입했다. 그 여단의 교차와 집중은 그 날이 끝날때까지 끝나지 않앗다. 필사적인 전투가 8월 21일, 22일 동안, 특히 볼시예 페스키 지역, 적들이 우리 생각보다 더 완강하게 저항했던 곳에서 계속되었다. 계산착오를 수정하기 위해 우리는 예비군에서 제9 기갑여단을 데려와 포병을 보강해야 했다.
After destroying the flanking groups of the enemy, our armoured and
motorized units closed the circle round the 6th Japanese Army by the evening of
August 26 and thereupon began to split and destroy the surrounded enemy.
The fighting was made difficult by the quicksands, the deep ravines, and the
sand dunes.
적의 측면 부대를 파괴한 후, 우리의 기갑 및 기동 부대는 8월 26일 저녁까지 일본 제6군을 포위망을 구축하여 포위된 적군을 분리시키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빠른 모래, 깊은 골짜기, 모래언덕 때문에 어려웟다.
The Japanese fought to the last man. But gradually their soldiers came to
realize the flimsiness of the official propaganda that the Imperial Army was
invincible, since it was suffering incredibly heavy casualties without winning a
single battle in four months.
The entries made in their diaries by some Japanese officers and men
demonstrate most vividly what they felt during those days.
Below are some passages from the diary of Fakuta, a fallen Japanese soldier:
일본군은 최후의 1인까지 싸웟다. 하지만 점차 병사들은 제국의 군대는 무적이라는 공식선전의 허망함을 깨닫고 있었다. 왜냐하면 4개월 간 단 한번의 승리도 없이 엄청난 사상자를 겪고 있기 때문이엇다.
몇몇 일본군 장교와 병사들이 일기에 쓴 기록들이 그 당시 그들이 느꼈던 것을 가장 생생하게 증명한다.
다음은 일본군 전사자 파쿠타의 일기의 일부 구절들이다.
“August 20, 1939
“Good weather set in this morning. The fighters and bombers of the enemy,
some 50 of them, appeared in the air in groups. At 6:30 a.m. the enemy artillery
opened massive fire. The shells whine overhead.
“Thousands of shells are falling close to us. It is frightening. The observation
posts are doing everything possible to spot the enemy artillery, but without
success because enemy bombers bomb and fighters strafe our troops. The enemy
is triumphant all along the front.
1939년 8월 20일
"오늘 아침 날씨 좋음. 적 전투기와 폭격기 50대 가량이 무리지어 공중에 나타났다.
오전 6시 30분 적 포병이 막대한 화력을 뿜었다. 포탄이 머리 위에서 윙윙거렸다."
"포탄 수천발이 우리 가까이에 떨어지고 있다. 공포스럽다. 감시초소는 적 포병을 발견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걸 하고 있지만 성공적이지 않다. 적의 포탄과 전투기가 우리 부대를 맹폭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은 전선 전체에서 승리하고 있다."
“At 7:45
“It is becoming ever more fearful. The moans of soldiers and the explosions
remind one of hell. The situation is most depressing. We are in a bad hole, and
surrounded. If the night is dark, all of us will have to be in the communication
trenches standing in a file… The soldier’s soul is sad… Our situation is
complicated, desperate, terribly confusing.
7시 45분
"점점더 두려워진다. 병사들의 신음과 폭발이 지옥을 떠오르게 한다. 상황은 최악으로 절망적이다. 우리는 나쁜 구멍에 빠졌고 포위되었다. 밤이 어두워지면, 우리 모두는 일렬로 서있는 통신 참호 안에 있어야만 할 것이다. ..병사의 영혼은 슬프다. .. 우리의 상황은 복잡하고, 절망적이고, 끔찍이도 혼란스럽다.
“At 8:30
“The enemy artillery does not stop shelling our troops. There is no salvation
wherever we turn, shells are falling everywhere and our only salvation is in
Bdisatva.
8시 30분
"적 포병은 우리 군에게 포격을 멈추지 않는다. 어디에도 우리가 돌아갈 구원은 없다.
사방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고 우리의 유일한 구원은 브디사트바에 있다.
“At 14:40
“A ruthless battle is raging. We do not know how many wounded or killed
we have… The shelling does not stop.
14시 40분
"무자비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났는지 알지 못한다. 포격은 멈추지 않는다.
“On August 21
“A multitude of Soviet and Mongolian aircraft are bombing our positions,
their artillery, too, is worrying us all the time. After the bombing and shelling
comes the enemy infantry. The number of killed is increasing. During the night
the enemy air force bombed our rear positions.
8월 21일
"많은 소련과 몽골 전투기가 우리의 진지를 폭격하고 있고, 적 포병 역시 늘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폭겨과 포격 후에는 적 보병이 온다. 전사자수가 늘고 있다. 밤 사이 적 공군이 우리의 후방을 폭격했다.
“August 22, at 9:30
“The enemy infantry began an attack, their machine-guns opened a
devastating fire. We were in great danger and took terrible fright. Our morale
sank. When all the officers were killed I was made commander of the company.
This excited me awfully and I did not sleep all night.”
Here ends the diary of Fakuta.
8월 22일 9시 30분
"적 보병이 공격을 시작했다. 기관총이 압도적인 화력을 뿜었다. 우리는 큰 위기에 빠졌고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우리의 사기는 가라앉았다. 모든 장교가 죽자 내가 중대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몹시 흥분했고 밤새 잠을 못잤다."
여기서 파쿠타의 일기가 끝난다.
Great attention was then paid in the Japanese Army to ideological
brainwashing of soldiers against the Red Army. Our army was pictured as
technically backward and was compared in combat capacity to the old tsarist
army back in the days of the Russo-Japanese War of 1904-1905. That is why
what the Japanese soldiers saw during the battles on the Khalkhin Gol when they
were subjected to the powerful assault of Soviet tanks, aviation, artillery and
well-organized infantry, came to them as a big surprise.
당시 일본군은 붉은 군대에 대한 군사들의 사상적 세뇌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 군대는 기술적으로 뒤쳐진 것으로 그려졌고 1904-1905년 러일 전쟁 당시의 옛 짜르 군대의 전쟁능력에 비교되었다. 그것이 일본군이 소련의 탱크, 항공, 포병과 잘 조직된 보병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을 때 할힌골 전투동안 본 것이 그들에게 큰 놀라움으로 다가온 이유였다.
The Japanese soldiers were told that if they were taken prisoner they would
be shot, but before that they would be tortured. And at that time this sort of thing
had its effects.
But in due course all these fibs collapsed. I remember very well that on one
of those August days at dawn a captured Japanese soldier was brought to me to
the observation post. His face was swollen from mosquito bites. He had been
captured by scouts of I. I. Fedyuninsky’s regiment in the reeds.
일본군은 포로로 잡히면 총을 맞지만 그전에 고문을 당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당시 이런 말은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때마침 이 모든 거짓말들이 무너졌다. 그 때 8월 어느날 새벽 한 일본군 포로가 감시초소로 끌려왓던 것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그이 얼굴은 모기에 물려 부어있었다. 그는 갈대밭에서 페두닌스키 연대의 정찰대에게 붙잡혔었다.
To my question how he had been so badly bitten by mosquitoes he answered
that together with another soldier he had been put in the reeds to watch the
Russians. No mosquito nets had been issued to them. The company commander
had ordered them to sit tight and not move so they should not be spotted. At
night they were attacked by mosquitoes but did not move until the morning,
bearing the mosquito bites stoically.
어떻게 그렇게 모기에게 심하게 물렷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러시아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다른 병사와 함께 갈대숲에 있었다고 대답했다. 중대장은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앉아있으라고 명령했다. 밤에 그들은 모기의 공격을 받았지만 아침까지 모기가 무는 걸 꾹 참고 움직이지 않았다.
“When the Russians shouted something and raised their rifles,” the captive
said, “I put up my hands for I could no longer bear the agony of it.”
We needed intelligence about the Japanese troops in that very sector where
this soldier was captured. To loosen his tongue I ordered that half a glass of
vodka be given to him. To my surprise he looked at the glass and said: “Please,
take a gulp from it first because I am afraid of poison. I am the only son of my
father who has a haberdashery and consequently I am his sole heir.”
포로는 말했다. "러시아인들이 뭐라고 소리치며 총을 들었을 때, 나는 더이상 고통을 견딜수 없어서 손을 들었습니다."우리는 그 병사가 잡힌 바로 그 지역의 일본군 부대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의 혀를 풀어지기 위해 보드카 반 잔을 그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놀랍게도 그는 잔을 보며 말했다. "제발 먼저 한 모금 마셔주세요. 저는 독이 무섭습니다. 저는 잡화점을 하고 있는 아버지의 외아들이고 당연히 유일한 상속자입니다."
Our interpreter observed that according to the written rules Japanese soldiers
received from their officers, they should die with the word “Banzai” on their
lips. The soldier chuckled and said: “Father told me to return home alive and not
dead.”
우리 통역관은 일본군들이 장교로부터 받은 지침문서에 따라 입에 "만세"단어를 달고 죽어야한다고 말했다. 그 병사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죽지 말고 살아서 집에 돌아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