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아르의 대모험(1부) -3/3-
글쓴이 레온 유리스
그들의 뒤쪽으로 사내 한 명이 내려서고 있었다. 4 베이츠쯤 키에 강인해 보이는 체격, 등 뒤에 둘러메고 있는 <기가소드>가 힘깨나 쓸 것 같았다. ‘골리아르 셰한’내려서 있었다.
“넌 누구냐. 누구기에 우리가 하는 일에 끼어드느냐?”
쉬리릭!
복면인 몇몇이 칼을 뽑아들고 그를 포위했다.
골리아르는 잠시 당황했다. 칼은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고, 상대는 질문을 던지고, 싸워야 되나, 우선 대화가 먼저 아닌가. 이름을 묻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신분을 묻는 것인가. 그는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이름은 골리아르 셰한, 지나던 길에 싸움소리가 와 보니 여러분들이 노인분을 죽이려 하는 것 같기에 나섰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나. 그래 맞다. 저들이 나보다는 나이가 많은 듯하니 예의는 갖추는 게 좋겠구나!’
골리아르는 떨리는 입을 열었다.
“저는……. 골리아르 셰한으로…….”
‘저 바보, 하여튼 미련으로 성을 쌓았다니까’
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막았다.
“건방진 놈들, 네 놈들이 감히 그분의 이름을 물을 자격이 있는 줄 아느냐! 건방진 덩어리들, 물러나라!”
크레아였다.
‘멋진 말씀이야!’
그녀는 자찬하며 멋있는 공중제비로 골리아르의 옆에 내려섰다. 그러나 하필 착지한 곳엔 돌부리가 박혀 있어서 발바닥에 알싸한 통증이 왔다.
‘아이쿠. 발이야. 망할 놈의 돌이 왜 거기 있는 거야’
그녀는 생떼를 부렸다. 돌이 무슨 죄람. 거기로 뛰어내린 그녀의 잘못인 것을.
“건방진 놈들. 이분으로 말씀드리자면, 아레코의 영웅이시며, <드래곤 길드>의 전설적이신 분, 대전사 골리아르 셰한님이시다. 너희는 저분의 노래를 듣지 못했느냐?”
그녀는 상대의 반응 따위엔 관심도 없이 낭랑하게 시를 외기 시작했다.
<인간의 심장에 꽂히는 드래곤의 이빨에 맞서
인간의 안녕을 위해 오랜 세월을 싸워왔노라.
수많은 고귀한 생명은 희생되었고,
대륙은 흙덩이로 변해 버렸지만,
이 커다란 아픔에 비해 얻은 것은 없다네.
겨우 얻은 위대한 전사 골리아르
쓸데없는 이름만 원망스럽구나.
인간을 외면한 채 대륙의 수호자된 것은
인간의 심장에 꽂히는 드래곤의 이빨인 것을
나의 <기가소드>는 인간의 심장에 꽂히는 드래곤의 이빨.
인간들이여 존재들이여 나의 곁에 다가서지 마라.
그대들의 용기여! 몸뚱이를 지킬 힘이 있다고 나서지 마라.
두개의 달이 뜰 그날이 와도 그대들은 잊지 말라!
아! 원망스레 일렁이는 나의 <기가소드>여!
드래곤의 이빨아! 목덜미를 후벼 파고 싶으냐.
저들의 심장을 조각내 피 냄새를 맡고 싶으냐.>
“잘 들었느냐. 만약 저분을 화나게 해 <기가소드>를 뽑는 날이면 너희들의 영혼마저 보존하지 못할 것이니 썩 물러가거라.”
‘<루카대왕의 전설>이군!’
골리아르는 기억했다. 유르겐에서 크레아가 주연으로 공연했던 연극‘루카대왕의 전설’에 나오는 대사였다. 이름과 마지막 세 줄의 구절만 첨가되었을 뿐이었다.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는 크레아의 누구도 생각 못 할 참신성이며 기지에 황홀했다.
‘정말 크레아는 신비롭고 놀라운 존재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느끼는 그 황홀감과 터져 나올 듯한 웃음을 표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지고 흉포하게 변했다. 정말 <대전사>다운 위용이 엿보이는 듯도 싶었다.
얼굴 때문이었을까. 크레아의 당당함에 기가 죽은 것일까. 파란 옷의 사내들은 한 걸음씩 물러섰다. 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멍청한 놈들 별 것 아니군. 이 크레아님의 머리는 끝내준단 말이야. 히히히, 겁을 더 줘서 쫓아버려야겠군’
“이놈들!, 이제야 골리아르님을 제대로 알아보는구나. 그렇다면 속히 여기서 꺼져라. 우리는 저 불쌍한 노인네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놓아두고 그냥 가거라.
이제 내가 셋까지 셀 테니, 그 안에 모두 사라져라. 만약, 물러가지 않는 자가 있다면, 골리아르님의 <기가소드>가 너희의 머리통을 갈라놓을 것이며, 나의 검이 너희을 눈알을 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머리통을 오크에게 던져 줄 것이다. 알았느냐!”
크레아의 표독하고 야멸치게 소리를 질렀다. 그 악랄한 말은 신뢰감마저 주었다. 정말 그런 일이 금방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
“하나!”
그녀는 거침없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앞쪽의 사내들이 난감한 모양새로 두리번거렸지만, 달아나는 자는 없었다.
“둘!”
크레아는 자신있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한편으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신도 느꼈다. 그리고 <블루 레전드>라는 검을 가진 자가 엷은 웃음을 본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러나 이미 빼든 칼이다.
‘셋까지 세고 안 되면 한판 붙어보는 거지 뭐’
“셋!”
“...... .”
뒤엉킨 적막감이 크레아를 칭칭 감았다.
“이봐요. 아가씨! 셋을 다 셌는데 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지?”
느리지만 뜻밖에도 밝음 음색이 그 적막을 깼다. 해석하기 미묘했지만, 놀리는 말투가 분명했다. 라지에였다.
크레아는 그때에야 파란 옷의 복면인들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복면 속에서 번뜩이는 강인한 눈빛, 골리아르 못지않은 건장한 체격. 오히려 더 크고 건장한 자도 있었다.
“아가씨의 작전은 훌륭해 보였지만, 적어도 전사라면 그런 말 따위에 겁먹지는 않아. 우리의 머리수가 많아서 가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라 하더라도 모름지기 한번 부딪혀보지 않고 포기한다는 것은 별로 전사답지 못하지. 말과 외형으로 판단되는 건 의외로 많이 없지. 그리고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의 싸움에서 진다고 해도 진정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는 게 있는데, 그런 걸 ‘투지’라고 하지. 또 어떤 경우는 죽음에 맞설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경우가 있지. 이런 건 ‘신념’이라고 하고……. 잘 새겨 둬. 풋내기 아가씨!”
거의 훈계조의 말이었다. 크레아는 이들이 자기의 얕은 수에 넘어갈 자들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거기에 굴복할 크레아는 아니었다.
“파랑 대가리!,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죽을 채비나 대가리 터질 생각이나 해라. 골리아르님이 아니라 나 혼자서도 네 놈들은 다 없앨 수 있다.”
쉬리릭!
그녀가 검을 뽑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프랑베르주>가 빛을 뿜으며 칼집에서 나왔다. 등에서 작은 방패도 함께 빼어 들었다. 그리고 날렵하게 가장 좌측의 적에게서 반 보정도 바깥 방향으로 벗어난 자세를 취했다. 다수의 적들을 상대하는 데 안성맞춤인 바렌바트 선생의 교본에 나오는 ‘벽 허물기’였다. 그녀는 라지에란 자를 외면하고 바로 앞의 다른 파란 옷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봐 떨거지! 이 누님이 한 수 가르쳐주지. 죽어라!”
그녀는 예고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맨 앞의 복면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칼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예리하게 치명적인 급소만 노리고 공격했고 빨랐던 탓이었을까. ‘떨거지’는 미처 검을 뽑을 틈도 없는지 뒤로 옆으로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수십 차례의 공격에서 상대는 겨우 목숨을 부지하듯 보였지만, 사실 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얍!”
피하기만 하던 복면인이 기합소리와 함께 번개처럼 칼을 뽑아 들고 크레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전세는 단번에 반전되었다. 거꾸로 위기에 몰린 그녀에게 ‘떨거지’의 일갈이 쏟아졌다.
“써켈 쿠토렉!”
크레아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 ’떨거지‘ 자식이 써켈 쿠토렉을 나에게 사용하다니. 이런 건방진 놈을 그냥……. 하지만 지금은 너무 급하다!’
써켈 쿠토렉!
1/4의 힘으로 빠르게 상대의 한쪽 어깨를 찌르다 한바퀴 회전하여 반대편 다리를 노려 베는 수법이다. 처음 1/4의 힘으로 가볍게 찌르는 수법은 언뜻 보기인 가짜 공격처럼 보이지만 칼의 뾰족한 앞쪽 끝은 그 정도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목과 어깨를 뚫을 수 있으므로 이미 가짜 공격이 아니며, 당연히 강력한 회전력을 수반한 두 번째 공격 역시 진짜 공격인 것이다. 일종의 연쇄공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해 보이는 써켈 쿠토렉은 레벨 7 등급 이상의 전사가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수법은 속도 즉, 빠르기 동반되지 않으면, 회전할 때 등 쪽이 노출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서, 상대가 나보다 약하다는 확신이 들 때만 사용하는 수법인 것이다.
“쨍강!”
“읍!”
겨우 그의 검을 막아냈지만 급기야 그녀의 검이 동강나고 말았다. 기고만장 크레아 붐이 첫 실전에서 펼친 절묘해 보이던 수법이 ‘떨거지’의 한방에 산산조각 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그녀는 가까스로 상대의 쿠토렉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칼은 동강이 났고, 칼들이 부딪힐 때 생긴 파동으로 토막마저 놓치고 말았다.
“죽어라!”
다음 순간 번득이는 독이빨처럼 찔러오는‘떨거지’의 청회색 검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다.
어린 시절 따듯한 오후, 벤치에서 깜박 잠이 든 그녀가 목의 촉촉한 느낌에 화들짝 깨어났을 때, 썩은 냄새가 진동했고, 그녀의 목을 핥고 있는 한 얼굴을 코끝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아! 그것은 시쥐와 마충들에게 파 먹히고 구더기가 들끓는 추악하고 소름끼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얼굴이 아니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절대공포였다. 그녀는 절대공포를 또 경험하게 된 것이다. 목이 잘리고 발길에 걷어 채일 자신의 머리통이 눈에 보였다.
‘아직 할 일이, 해보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은데.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은데…….’
“쨍강”
느닷없는 칼 부딪히는 소리가 구르는 머리통을 쫓아내고 있었다.
‘골리아르인가?’
“그만하게. 훌륭한 쿠토렉일세.”
그러나 뜻밖에도 ‘떨거지’의 칼을 멈춘 것은 라지에였다.
크레아는 움찔하며 겨우 눈을 떴지만 불쾌했다. ‘살아남은 게’ 절대기쁨은 또 아니었다. 치밀어 오르는 오기를 느꼈다.
‘제까짓 게 뭐라고’
재수 없는 작자가 모습이 보였다. 뒤의 ‘떨거지’는 자신의 칼질이 제압당한 게 불만인 듯 라지에를 노려보고 있었다. 라지에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이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니 당장이라도 물어뜯고 싶지만 지금의 형세론 언감생심이었다.
그녀는 금방 태도를 바꾸었다. 연습대련에서 스승의 가르침에 감사의 목례라도 하듯 고개를 까닥였고, 눈에 적의를 볼 수 없었다.
“맹랑한 아가씨군. 하지만 난 여자는 질색이야. 항상 여자는 말썽을 일으켜.”
“콰에 시타롯!”
라지에가 수인과 함께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는 스르르 주저앉듯 쓰러졌다. 그녀가 팔을 움직여 쓰러지는 대비를 하려 했지만, 도대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의 얕은 수는 애당초 먹혀들지 않았다. 온몸이 칭칭 감긴 것처럼 압박을 느꼈다. 눈도 뜰 수가 없었다. 어둠에 갇혀 버린 것이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녀가 반항하듯 거칠게 소리쳤다. 엥! 다행히도 입은 움직일 수 있었다.
“아가씨! 우리를 가로막는 이유는 뭐야?”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당신들이 떼거지로 저 영감님을 둘러싸고 위협했잖아요?”
“저 노인이 혼자이고 우리가 다수라서? 만약 저 영감님이 인간으로 변한 포악한 드래곤이라면 어떨까. 세상에는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른 진실들이 많이 숨겨져 있거든. 나도 그게 골치가 아프지.”
“무슨 말도 안 되는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 저 영감님 그냥 두고, 당장 꺼져라. 골리아르님이 화나시기 전에 빨리 꺼져라. 나쁜 놈들!”
그녀는 악으로 깡으로 골리아르를 외쳤다. 무심한 골리아르를 원망하듯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골리아르는 뭘 하는 지 반응이 없었다. 라지에가 손을 튕기자 그녀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깥의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침만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라지에는 그녀가 구원신호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대전사 골리아르’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골리아르는 무심한 눈으로 그의 눈에 맞섰다. 의혹이 생겼지만 생각을 꼬아 더 얽히게 만들지 싶지 않았다.
상대가 비겁해서 옴짝달싹 못하였거나, 혹은 무슨 꿍꿍이가 있어 자신 뒤통수를 치려고 움직이지 않았거나 간에 개의치 않았다. 누가 감히 자신을 해칠 수 있겠는가. 그는 긍지가 높았다.
그는 <블루 레전드>를 세우고 글레이번 노인에게 다가갔다.
“트라투마니 트라투카나!”
그의 어깨에 있던 폴리엠이 허공 높이 날아오르며 원을 만들고 있었다. 애도하려는 것인가.
“글레이번 슈벤타여. 용서를 바라오.”
“....... .”
눈을 감은 클레이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검은 하늘을 찌르듯 높이 솟구쳤고 라지에는 나지막이 구절을 읊조렸다.
<영원한 안식의 평화가 소멸의 고요 속에서 그대를 포옹하리라!>
그 순간 골리아르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파란 검광이 퍼져 장관을 이루고 라지에도, 노인도 검광에 파묻혔다. 파란빛의 향연은 잠시 계속되었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며 라지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 <블루 레전드>가 노인의 심장에 박혀있었다.
“피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군요! 피를 만들지 않는 검. 뱀파이어 같군요.”
복면인 중 한명이 신기한 듯 혼자 말을 했다. 호의적인 듯했다.
라지에가 심장으로부터 검을 뽑아내자 노인의 몸이 끌려오다 털썩 바닥에 떨어졌다. 처참한 주검을 바닥에 팽개치고 있었다.
“응……. 이건 뭐지?”
라지에는 노인의 시신과 <블루 레전드> 교차해 바라보며 건조한 음색으로 말하던 그가 골리아르 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글레이번 당신이 그자의 몸속에 숨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시오!”
-3/3-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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