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ET 9 디카시의 창작 입문을 위한 키워드
일반적으로 시 창작은 네 가지 과정을 거친다. 착상, 성장, 초고, 퇴고가 그것이다. 현대시로서 문자시가 이제까지 종이라는 인쇄매체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 네 가지 과정으로 시를 창작한다는 관점이었다.
그러면 디카시의 창작 과정은 어떨까. 종이매체로 시를 소통할 때와 SNS 같은 디지털 매체로 소통할 때의 차이는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일반 문자시가 종이매체의 산물이고, 디카시가 디지털매체의 산물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따라서 디카시의 창작 방식은, 문자시와 디카시가 공히 시라는 관점에서는 공통점도 있지만 매체를 달리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차이가 난다.
이미 뉴미디어의 산물인 디카시의 태동 배경과 시학적 전통에서 문자시와 다른 디카시의 정체성을 충분히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글쓰기와 미디어의 관계를 도발적으로 지적한 민경진 기자의 견해까지 살펴본 후, 문자시와 다른 디카시의 창작과정을 도출해 보기로 하자.
민경진 기자는 ‘신책불이(身冊不二)’, 본인이 선택한 매체가 자신의 실존적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관점에서 사이버 글쓰기를 고집하며,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오마이뉴스 [민경진 칼럼]에서 밝히고 있는데, 흥미를 끈다. 그는 미디어가 신문, 방송이나 인터넷으로 한정되는 것을 너무 좁은 시각으로 보고, 컴퓨터의 운영체제, 휴대폰의 스크린, 백화점의 쇼윈도, 광화문 4거리의 전광판, 지하철 역사의 영화 광고, 화장실의 남여 심볼, 교통 표지판, 현금 지급기 화면, 대학의 강의실 등 의미와 커뮤니케이션이 벌어지는 모든 공간이 바로 미디어로, 의미 교환이 벌어지는 이런 공간을 ‘미디어 스페이스’라 칭하며, 마샬 맥루한의 견해를 원용하여 인터넷세대가 기성세대와 달리 훨씬 더 많은 표현의 가능성을 시험 중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좀 긴 글을 인용한다.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그 갤럭시』라는 책에서 활자문화의 심대한 폐단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는 활자가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의 폭
을 크게 위축시켰다고 개탄한 바 있습니다. 생각의 표출은 그림으로도, 음악으로도, 무용으로도… 무수히 많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이루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미끼에 이끌려 활자문화에 중독되다시피 했다고 지적했지요.
그의 지적처럼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활자 미디어를 선택한 순간 이미 수많은 다른 메시지의 가능성을 차단 당해버린 셈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가 상식처럼 생각하는 국어순화운동, 인터넷 외계어에 대한 비난, 그리고 채팅이나 게임에 빠져 책을 읽지 않는 요즘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잔소리가 그저 활자문화에 중독된 세대의 근거 없는 푸념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세대는 활자와 책의 노예가 되어 원초적으로 사고의 폭을 크게 제한받고 살아 온 기성세대에 비해 훨씬 더 많은 표현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지요.
가톨릭에 대한 신교의 비난 중 하나가 교회에 성모 마리아나 성인 등 각종 조각상을 세워 마치 우상숭배하는 잡교와 같은 행태를 보인다
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신교를 ‘MS-DOS’에, 그리고 가톨릭을 ‘매킨토시’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인쇄 기술이 미천하여 성경이 성직자들의 전유물에 불과했던 시절에 가톨릭이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유용한 방법은 구두 연설 아니면 교회의 벽을 가득 메우는 성상 즉 아이콘이나 성화였던 것이죠. 가톨릭의 화려한 성당은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 최적으로 적응한 미디어였던 것입니다.
반대로 신교의 탄생에는 인쇄술의 발명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성경 보급을 통해 신도들을 각성시키려 했고 지금까지도 가톨릭에 비해 신교에서 성경 공부를 중시 여기는 것은 바로 신교가 활자문화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종교개혁은 달리 보면 성상 즉 아이콘 매체와 활자 매체의 대립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83)
민경진 기자는 마샬 맥루한이 지적한 활자문화의 폐단과 중독성에 근거하며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명제에 따라 활자 미디어를 선택한 것으로 이미 수많은 다른 메시지의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고, 또 다른 표현의 기회를 박탈당한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국어순화운동’, ‘인터넷 외계어에 대한 비난’, ‘채팅이나 게임에 빠져 책을 읽지 않는 요즘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잔소리’ 등도 활자문화에 중독된 세대의 근거 없는 푸념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현재의 인터넷세대는 기성세대와는 달리 훨씬 더 많은 표현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이들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기존의 인식 잣대로 비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물음은 일면 타당성을 지닌다.
신교가 교회에 성모 마리아나 성인 등 각종 조각상을 세워 마치 우상을 숭배하는 잡교와 같은 행태를 보인다고 가톨릭을 비난하는 것을 두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는 지적도 이채를 띤다. 인쇄술이 없던 시대 최적의 미디어가 바로 성상이었다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쇄 미디어 시대가 되면서 활자매체의 산물인 개신교가 탄생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디어 환경이 다른 전 시대의 가톨릭을 인쇄 미디어적 관점으로 재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있다.
성경책을 누구나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인쇄 커뮤니케이션 시대에도 여전히 가톨릭이 성경 외에 성상이 주요한 미디어로 활용한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하물며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을 활용하는 인터넷세대들이야 인쇄매체를 넘어 다매체 활용 읽기나 쓰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더 자연스럽고 효율적이겠는가.
디카시가 디지털 매체시대의 실시간 쌍방향 소통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디카시의 창작 방법 또한 문자시의 그것과 차별화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적 영감의 문제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앞에서도 디카시는 일반 문자시보다 더욱 뮤즈를 전제로 한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일반적으로 시에서 영감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문자시 창작에서도 영국 시인 블레이크처럼 전적으로 영감에 의존하는 시인도 없지 않다.
유종호 문학평론가는 영국 시인 가운데 대표적인 영감론자 월리엄 블레이크의 경우, 장시 「밀튼」을 창작할 때 사전 계획 없이 한꺼번에 20행, 또는 30행씩 자신에게 구술되어, 이른바 영감으로 창작한 것이고, 장시 「예루살렘」도 한밤중에 쓰라는 신의 지시를 받고 썼다는 점을 예로 들며 이렇게 말했다. “영감 경험은 블레이크 같은 극단적인 영감론자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성질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갑작스레 작품의 암시나 시상가 머리에 떠오르는 일은 흔히 얘기되고 있으며 이른바 예술기술론의 입장에 서 있는 시인, 작가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창작에서 영감의 일반성을 얘기하면서 한편으로 유종호는 영감론자와 거리가 먼 주지적 시인 발레리의 말도 소개한다. “신들은 은혜스럽게도 작품의 첫 줄을 우리에게 베풀어준다. 그러나 둘째 줄은 우리 자신이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둘째 줄은 첫 줄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하늘이 준 첫 줄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84)
디카시는 인쇄 커뮤니케이션 시대를 넘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산물임을 재삼 염두에 둘 필요가 있기에 민경진 칼럼을 중심으로 장황하게 뉴미디어 환경을 다시 살펴봤다. 문자시나 디카시는 다같이 시라는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디카시는 멀티언어(영상+문자)예술로 다매체 시대의 산물임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디카시는 주로 스마트폰 내장 디카를 활용하여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감흥이 날아가기 전에 찍고, 그것을 곧바로 언술하는 것이기에, 일반 문자시처럼 착상, 성장, 초고, 퇴고 같은 일련의 과정을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쓰기보다는 착상, 성장, 초고가 하나의 프레임으로 압축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디카시가 스마트폰 내장 디카로 찍고 또 문자로 표현하고, 그것을 실시간 SNS를 활용 쌍방향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것 같아도 그렇지가 않다.
종이매체를 이용하던 문자시가 시적 영감을 착상으로 가져와서 그것을 시인의 상상력으로 계속 키워내고, 때로 묵혀두기도 하다가 다시 책상에 앉아 고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초고를 완성하고, 또 오랜 시간 퇴고 과정을 거치다보면, 착상에서 완성된 작품에 이르는 데는 어떤 경우는 수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게다가 그 작품을 월간지에 발표한다 해도 독자에게 가는데 또 한 달이 소요된다.
발레리 경우는 첫 줄은 영감으로, 나머지는 자신의 노력으로 창작한 것이 된다. 극단적인 영감론자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적인 문자시 창작에서는 발레리와 같은 창작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 문자시도 영감이 전제되지 않고는 쓸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문자시는 발레리의 말처럼 영감보다 시인 자신의 노력이 더 중요한 게 사실이다.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작품이 완성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디카시는 문자시보다 더욱 영감에 많이 의존한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디카시는 99%의 영감과 1%의 땀으로 작품이 완성된다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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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3) 민경진,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 [민경진 칼럼] 미디어론·1 〈오마이뉴스〉2003. 12. 11.
주84) 유종호,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4),P.160.
첫댓글 99%영감과 1%의 땀으로
완성되는 디카시 매력있죠
감사히 배움합니다
성상, 미디어 이용하여 말하고
인쇄술 발달로 활자 매체 탄생
극명해지는 이해네요
99%의 영감과 1%의 땀
그렇지요
이미 발견한 이미지 자체가 형상화를 마친 셈이니까요
조목조목 짚어가며 공부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읽고 또 읽어 보며 디카시가 몸에 스며 들도록 연습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카톨릭이 그렇게 받아들여졌듯이...라고 하면 너무 쉽게 들릴까요. 디카시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모두가 쓰고 읽는 날이 머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다시 한 번 디카시 매력에 빠져 보겠습니다^^
사진이란 새로운 소통 언어를 통역 없이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인쇄술 만큼이나 획기적인 일입니다.
받은 영감을 담기에는 더없이 좋은 언어죠. 세계인들이 소통하기 좋은 시대에 사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삶이란 순간 순간이 모여 여정으로 엮어
지는것 같습니다
찰라를 붙잡고 영원
히 기억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자부
심 이렇게 길을 인도
해주신 교수님께 감
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많은 공부가 됩니다~
짧은 디카시가 갈수록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탓이겠지요.
좋은 자료 담아가서 공부하겠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