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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혼 도장 ]
대학원까지 졸업하고도 취업 대신 고시에 매달려 오던 남편은 시간이 갈수록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 되어갔다. 웅변 학원 강사인 하현선이 늦은 퇴근을 해오면 씽크대에는 라면 그릇이 딩굴고 주말에 애써 만들어 두었던 밑반찬들은 썩어가고 있었다.
생활비 한푼 벌어다 보태 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면피라도 하려는 듯 부모님 탓, 시동생 들 탓으로 그가 칭얼거릴 때면 몸에 나사를 박는 듯 현선은 힘들어했다.
남편의 두 여동생까지 취직을 시켜줄 정도로 뒷바라지 했으나 시부모 눈에는 똑똑하던 장남을 무능력자로 만든 기세 강한 며느리로 비춰질 뿐이었다.
결혼 6년째 되던 해 이혼을 거듭 요구했으나 남편은 그녀의 보살핌에 안주하는 편리함을 포기하기 싫었다.
어느 봄비가 내리던 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눈 앞의 벽이 자신을 깔아 덮쳐오는 듯 환영에 시달리던 끝에 그녀는 무작정 길을 나섰다. 옷가지 몇 개와 지갑과 보물 일호인 애견 제롬이와 사료 봉다리를 챙겨 현관문을 나설 때 까지도 남편의 코 고는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아무 연고도 없던 서울에서 내달려 하필 속초까지 간 것은 가까운 동해 바다라도 한 번 보고서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춥고 배고픈 듯 옆에서 캥캥 거리는 애견 제롬이 덕분이었을까? 이 어린 생명 덩어리라도 믿을 만한 주인에게 맡기는 게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 책무인양 생각하며 일단 잘 곳을 찾아 싸늘한 암흑 속에 원색적인 불빛들을 낼름 거리는 모텔들 골목에 들어섰다.
세상에 떳떳하지 못할 음지의 만남들이 지나간 흔적이 남은 이불에서 긴 밤을 보낸 현선은 새벽 5시 경에야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고 하룻밤 정사를 치르고 허둥대며 나가는 남녀들의 부산스러움이 옆방에서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 보았다. 8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속초의 아침은 공기는 푸른 바다 냄새를 한껏 머금고 있었다. 수평선을 더듬던 그녀의 시선에 보험 영업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보험 판매업을 저도 시작하고 싶은데요”
설계사 지망자가 적어 매출 실적, 육성 실적 모두 좌불안석이던 영업소장은 자신의 면전에 나타난 진중한 인상의 준수한 외모를 한 여성의 출현에 들떠 한동안 허둥거렸다. 동안의 얼굴을 보아하니 많아야 30대 중반이라고 여겼건만 입사지원서류의 주민번호에서 10년의 오차를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손수 칠판을 붙들고 오리엔테이션을 해질 때까지 진행하도록 흐트러짐 없이 침착한 눈빛으로 스폰지처럼 경청하는 그녀의 출현이 아직도 믿겨 지지 않았다.
입사 환영회라는 명분으로 동안의 현선을 옆에 앉히고 저녁 회식 자리까지 마련한 영업소장은 현선을 이모 저모 뜯어 보았다.
이것 저것 현선의 전력에 대해 캐묻고 싶은 호기심을 간신히 억누르며 별거 생활중인 보험 영업 2년차 양세나에게 그녀를 부탁했다.
“당분간 언니처럼 양세나 씨가 살펴 줄 거에요. 보험영업도 고참이고 자동차 영업도 겸하고 계신 영업의 챔피언 입니다”
현선보다 두세 살 많아 보이는 자동차 영업소 직원은 170 cm 키에 회색 코트에 흰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그녀는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는 듯 자기 집으로 현선을 데려갔다.
근처 고시원에라도 알아볼 생각에 서글펏던 현선에게 2살 많은 양세나는 자연 의지할 수 있는 언니처럼 다가왔다. 그날 밤 잠을 설치며 왈칵 눈물을 쏟는 현선을 양세나는 짐짓 모른 척 해주었다.
친구에게도 오빠에게도 언니에게도 누구에게라도 연락을 해서 도피와 새 출발을 위한 도움의 손길을 받을까도 생각했으나 그녀는 끝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이토록 비참해진 자기 처지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일을 시작하고 7일만에 보험설계사 자격증 시험이 예정돼 있었다.
“저도 이번에 시험을 보게 해주세요”
“아무리 흔한 자격증이지만 최소 3주 , 보통은 4주를 교육받고 응시하는 국가 시험인데요”
“자동차 운전면허지만 하루전에 공부해서 1등으로 필기 합격했어요. 한번 기회를 줘 보세요”
내심 기대되었던지 영업소장은 그녀의 입사시기를 본사에 허위 신고하면서 응시를 주선했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한숨들이 간간히 들려들 왔지만 현선은 가장 먼저 답안지 작성을 끝내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창가 옆에 올려 남자 수험생의 가방에 삐져 나온 신문이 보였는데 글자가 한글도, 영어도 아닌 것이 아랍어 처럼 생긴 꼬부랑 글씨였다.
시선을 돌려 그 주인인 듯한 이의 옆얼굴을 보니 면도는 하다가 만 얼굴에 검은 피부가 꼭 아랍인 같이 보였다.
첫 연금 보험 상품을 고객으로부터 계약하던 날 양세나를 통해 카드 빚을 내어 하얀색 세단을 샀다. 금액 일부는 팔찌며 반지며 목걸이를 결혼 패물을 처분해서 보태었다. 금값이 전에 없이 인상된 무렵이라 제법 돈이 되었다. 8년 결혼의 상혼이 묵은 딱정이로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사무실 빌딩 옥상에 올라가 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거기 어디야? 당장 집에 돌아오질 못해?”
“지금 소릴 지를 사람이 누군데? 다음주 까지 가정 법원에 나와 도장 찍지 않으면 장남인 당신이 부모님으로부터 명의를 이전 받을 집도 있으니 그간 경제활동 못한 것까지 포함해서 위자료를 톡톡히 경고할거야”
“너 많이 변했다. 그 천사같던 현선이 맞니?”
“시끄러워 날짜 어기면 바로 소송들어가. 가계부 기록 다 있으니 법원에서는 당연히 파경감이야”
현선 스스로도 자신의 힘있는 어조가 놀라웠다. 워낙에 내성적이던 자기 성격을 개조해 보고자 시작한 웅변을 배우고 그 학원에서 강사까지 했던 그녀가 학생들 앞에서 그토록 발성연습과 소리 지르기를 지도했건만 남편 한테 이런 언성을 내기엔 처음이었다.
사람은 막다른 골목에서 숨겨진 생존의 힘을 만나는 것일까?
주문했던 흰색 세단을 인도 받는 순간 양세나가 옆에서 작은 박수를 쳐주었다.
“ 하얀 요트 같지? 고객님께 행운을 가져다 주는 백마가 될 거에요”
부러워하는 기색의 그녀의 한마디가 현선에게 어린 시절 고향의 앞바다를 펼쳐 보였다. 여름 해변 시퍼런 바다를 가르며 달리는 요트들이 수평선에 기러기처럼 즐비할 때면 현선은 인어공주가 되어 있었다.
현선은 웃으며 양세나를 쳐다 보았다. 타지에 와 같은 여자로서 의지할 수 있는 그녀가 미더웠다. 처음 며칠 숙소를 허락해준 그녀의 배려에 보답도 할 겸 그녀의 자동차 매출을 소화해 줄수 있어 또한 뿌듯했다.
여성 운전자의 특성을 헤아려 이런 저런 옵션 품목 선택도 자상히 일러주고 현선의 처지를 이해한듯 대금 지불 조건도 자동차 캐피탈에 할부에 최적 조건을 도출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틀이 지나 약속한 시간에 현선은 서초동 가정 법원으로 달려갔다. 뭘 씹기라도 한 듯 찌푸려진 남편의 표정에 관심도 안 보이며 현선은 시종 차갑고 싸늘했다. 결혼 10년이었지만 양육을 부담스러워 한 남편 고집에 자녀가 없었던 것이 도리어 족쇄를 쉽게 풀게 할 줄이야. 자녀가 없어 숙려기간 3개월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판사앞 입실로 바로 이혼은 성립되었다.
‘그래 나는 마음의 안정에서 뭐든 해왔잖아? 엄마도 그 어렵던 살림 중에서 외상을 해서라도 과일을 상자때기로 구해와 우릴 먹이셨잖아’
운전대를 잡고 현선은 있는 힘껏 소릴 질렀다. 불행한 결혼, 무의미한 희생으로 살며 잃어버린 청춘에 종지부를 찍고 돌아오는 길 새 차의 경쾌한 발진은 푸른 하늘로 차오를 듯 짜릿했다.
바로 원룸을 하나 계약하고 샴페인을 따는 기념 이벤트로 자축했다.
[ 은사님 방문 ]
현선의 대학 은사이자 결혼식에 주례를 서주셨던 백교수는 그녀에게 자주 전화를 해오는 편이었다.
이번에는 백교수의 사모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자네 새 직장은 맘에 드는가? “
“네. 그동안 인사도 못 드리고 죄송해요. 제가 조만간에 인사 드리러 갈께요.”
“나한테도 재무 상담을 좀 해준다면 그 보다 고마울 수는 없을 거 같네”
사모님께 노후생활자금 마련은 물론 연금 개시 전에는 질병, 사망 등의 위험보장 혜택도 받을 수 있는 상품을 권했다.
그러나 사모님은 그녀가 권하는 무난한 상품을 굳이 놔두고 수익성만큼 위험성이 있는 상품에 더 눈길을 두었다.
“사모님이 이것은 연금을 받는 동안에도 적립금을 펀드에 투자해 그 수익을 연금액에 더해주는 변액연금 보험상품인데요. 펀드에 투자하는 것이라서 투자 위험도 따르는걸요”
“다른 이도 아닌데 현선씨가 파는 것이 위험할 리가 있을까? “
현선이 권하는 상품을 굳이 마다하고 비싼 상품을 들어 주었다. 정작 자신이 필요해서 자신의 판단으로 보험을 드는 것이지 괜히 너의 처지를 생각해서 들어주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사모님은 보이고 싶었던 교수님 부인으로서의 자격지심 같았다.
며칠 후 신청한 보험서 약관도 전달하고 3건이나 큰 상품을 가입해 준 데에 인사도 할 겸 백교수 내외가 좋아하는 보신탕 찌게 거리를 장만해 찾아 ㅤㅂㅚㅆ다.
자동차 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애견 제롬이는 보따리 안의 음식이 개라는 것을 이미 육감으로 알아차리고 한참 전부터 불편한 내색으로 킹킹거리곤 했다.
그녀가 개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는 걸 아시는 사모님은 그녀만을 위해 물회 비빔밥을 따로 차려 내오셨다.
어린 시절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동네 술집에서 뵈면 자주 먹여 주시던 추억의 음식이었다.
“여기 베란다에 나와봐. 자네가 좋아하는 노을 없는 일몰이 마침 장관을 연출하는군. 저걸 보면서 한대 피워 보면 어떨까?”
저녁을 함께 마치고 언제나 그랬듯이 사모님 대신 주방 설거지를 하려는 현선에게 백교수는 담배를 권했다.
“그래요.. 현선양. 내 걱정은 말고 우리 바깥 양반이랑 잠깐 거기서 담배 피우면서 말 벗 좀 해드려. 안 그러면 내가 오늘밤에 괴로워”
사모님이 되려 반색을 하시면서 현선을 베란다로 밀어내었다.
“내가 비록 자네 결혼식장에서 주례를 섰지만 그런 남자를 배필 감으로 결혼을 결심한 자네를 진작 말리지 못한 것이 한이 돼 속으로 울었었네”
백교수는 피우던 담배를 잿털이에 비벼서 끄더니 현선의 손목을 잡았다.
“집사람하고 각방을 쓴지가 벌써 20년이 되어가. 이렇게 무늬만 부부인 사이로 해서 허하게 살아가야 하느니 차라리 솔직해 지기로 했네”
심상치 않게 시작된 교수님의 말은 순간 공포로 다가왔다. 오래 전부터 제자로 자신을 아끼면서도 여자로서의 감정으로 다가오려는 걸 조금씩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현선이 이혼을 한 이후 여서였는지 백교수는 현선에게 직설적으로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교수님이 인간적 연민을 부를 법도 했으나 현선으로서는 무엇보다 주방의 사모님이 의식되었다.
“교수님 그러시다가 제가 들이대면 어쩌시려고요?”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려고 현선은 억지 미소를 머금으며 농담 아닌 농담을 해보았다.
“자네를 바라만 보는 꽃으로 남겨두고 싶지는 않네. 자네와의 인연을 위해서라면 저 모든 지위나 이 껍데기 보금자리 다 포기하고 자네를 지켜주겠네.”
기지를 발휘해 본다고 내뱉었던 농담이 도리어 빌미를 준 듯 백교수는 솔직한 말을 꺼내 놓는 것이 아닌가. 불과 둬 걸음만 비켜서면 주방 정리 중이신 사모님께 노출될 상황이었다.
그녀는 피던 담배의 꽁초를 끄는 것도 잊어 버리고 코트와 핸드백을 챙겨 집을 나섰다.
총장 출마에 낙선한 이후부터 은사님은 지적인 긴장감 대신 세속의 성취에 더 쏠리는 듯 보였다. 그런 백교수가 급기야 남성적 욕구로 구걸해 오는 말을 접하자 현선은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죄송해요. 사모님.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급히 좀 가봐야할까봐요”
그녀 답지 않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끝내 사모님은 읽은 걸까?.
평소보다 길었던 베란다에서의 흡연 시간 속에 남편의 구애하는 기색을 끝내 읽은 모양이었다.
여느 때면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하던 남편이 황급히 나가는 그녀를 배웅도 않고 내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고 있다는 점부터 사모님의 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3개나 가입하셨던 사모님의 보험상품이 2주후 고객 요청에 의해 가입이 취소돼 있었다.
불편한 감정의 악순환에 망연자실했다.
보험 상품도 투자 자문도 원래 그런 것이었을까? 가치와 비용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정작 고객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이 기대하는 대목만 귀 담아 듣는 것 같았다. 자신이 소흘히 듣고서 결정한 것에 대한 책임을 나중에 원망할 때면 현선으로서도 곤혹스러웠다.
물론 매월 실적을 시간에 쫓겨 맞춰야 하는 처지에서 때론 고객의 구매 결단을 이끌어 내기 위해 부지 불식간에 다소 영업적인 매너로 다가간 경우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며 양세나에게 전화를 했다. 백 교수님 계약 해약건도 있고 해서 보험일을 그만하고 싶다고 했다.
“실은 나도 다른 일을 하려던 참이었어. 자동차 판매에 기업 종신보험을 다뤄오다 보니깐 기업주들과 인맥도 젭법 되는 거 같아서 인재 알선업을 시작해 보려고해.”
뜻밖의 제안이었다. 양세나는 웅변학원 강사 출신인 현선이 구직자들에게 면접 코칭까지 해주는 인재알선업을 만들면 특화된 서비스가 될 것임을 더불어 강조했다. 세나의 맑으면서도 어딘가 슬픈 사연을 간직한 듯한 눈빛이 끌렸다.
그녀와 함께 서울에서 헤드헌터 회사 하이파이 컨설팅의 일과는 분주하고 피곤했지만 구직자들을 구인사에 면접 보내기 전에 미리 불러 면접 요령을 지도하는 일이 현선에게는 큰 보람이었다. 처음에는 우물쭈물하던 이들이 그녀의 1시간 교육으로 훨씬 매무새 있게 입사 포부와 자기 비젼을 설득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사무실에 직원이라고는 양세나, 현선, 그리고 중간 키에 짙게 염색한 머리에 금테 안경을 쓴 송호림 이라는 이름의 중년 신사였다. 그는 무슨 명함이 그리도 많은지 전화 거는 곳마다 사장님, 전무님, 상무님이었다.
점심때가 되자 송호림은 외부 점심 약속으로 나갔다.
“찰밥을 도시락으로 좀 넉넉히 싸왔어. 함께 먹자”
식사를 하면서 양세나는 남편 이야기를 했다. 그는 공부를 잘했으나 집안 형편 탓에 지방의 명문대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가 학생 운동으로 지명 수배가 되면서 취업 기회를 놓쳤다. 그는 컴퓨터 게임방 사업자들에게 시설 설치 작업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인터넷 광고 솔루션을 아이템으로 한 벤처를 창업했다.
“나는 건축사 사무실에서 그는 회사 개발실에서 각자 야근을 밥 먹듯이 해왔지. 친구랑 2명이서 창업했던 회사는 3년이 되던 해 직원 수 50명에 이르렀고 벤쳐 신화로 매스컴에도 오르내리더니 어느 대기업로부터 100억원에 회사를 매각하지 않겠냐는 제안까지 받았지만 그들이 거절했어. 그러자 그 대기업 측은 회사의 핵심 기술자를 매수하여 유사 사업을 개시했고 특허 분쟁에 휘말려 좌초되고 말았지”
당시 회사를 살리겠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온갖 대출 라인을 총 동원했던 시절을 한숨으로 떠올리며 세나가 들려준 얘기는 현선 자신만큼 불행한 추억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현선은 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서 빈그릇과 도시락을 주섬 주섬 챙겼다.
“아니 뭐하려고?”
“화장실에 가서 잠깐 설거지해올께요. 늦게 퇴근하시는데 집에 가서 하려면 서글프잖아요”
“아서라.. 됐어. 그거 놓고 여기 좀 앉아봐”
양세나가 부탁한 것은 상로 구청 노인 문화교실 봉사 활동건이었다.
“우리가 후발 인재 알선 업체인데 60대 이상 노인 재취업 시장도 앞으로 커질 것 같아서 봉사활동 이미지도 얻고 시장 발굴도 겸하는 차원에서 1주일에 2번 화요일, 수요일 오후 3시간씩만 노년의 행복과 열정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는거야”
상로 구청이라는 말에 숙희는 귀가 솔깃했다. 탑골 공원 근처여서 어쩌면 그 근처에서 배회하실 엄마나 낯익은 엄마의 지인들을 보게 된다면 엄마의 행방을 찾을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 윤상의 서울 가는 길 ]
"윤상아 ! 너라도 어여 멀리 피해 살아 남거라. 동생 은희를 잘 부탁한다”
윤상이 눈을 번쩍 떴을 때 등에는 식은 땀이 흘렀다. 숙면을 허락하지 않는 전립선이라는 노환은 몇 번이고 밤잠을 설치게 하면서 어스름 꿈결에 어머니의 얼굴을 한층 선명히 보여준다.
1.4후퇴의 악몽에서 뵌 어머니는 40대의 곱던 자태가 무색하게 비녀는 잃어버리시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계셨다.
이러다가 어머니를 하늘 나라에서 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후즐근 파고드는 전립선의 통증은 살아 있음을 새삼 상기 시키고 있었다.
전기장판 잠자리가 70년대에는 사치였으나 팔순을 넘긴 나이에 전기장판은 뿌리깊은 두통의 온상이었다.
그 흔하다는 옥돌매트조차 아내는 돈이 아깝다고 장만을 미루고 있었다.
“발 조심하소 ! 이 양반이 오늘 따라 왜 이리 자주 가나 이상하네!”
윤상의 바스락 거림에 잠을 설치게 된 아내 백수희의 짜증 어린 말투가 서운했다.
밤잠을 하룻밤에 서너 번 방해하는 전립선의 잔뇨 증상 탓에 윤상은 비틀거리며 방문을 열고 슬리퍼를 더듬는데 싸늘한 암흑이 냉기가 엄습해 온다.
“어이고.. 그년한테 그렇게 돈을 날릴 줄 알았으면 작년에 양옥 집으로 1천만원 더 주고 옮겨나 갔을것을.. 그랬더라면 이런 엄동설한에 재래식 화장실 가겠다고 새벽길 더듬을 일도 없을텐데…”
자리를 돌아누우며 내뱉는 아내의 혀 차는 소리에 윤상마저 짜증이 더해갔다.
궁상스럽게 아끼며 동네 은행에 맡겨온 돈을 담당 여직원의 범죄로 다 날리는 어처구니 없는 화를 입게 된 것은 창구 여직원의 친절에 전적으로 그녀를 신뢰한 아내의 실수였다.
인사성이 밝았던 송희자가 고객의 인감 서류를 조작해 예탁한 액수를 담보로 대출금을 빌려간 것으로 처리해 수 억대의 예금을 빼돌렸다. 노인 고객들에게 환심을 산 송희자는 할머니들의 도장까지 아예 자신에게 맡기게 하고서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수년에 걸쳐 수십 명의 고객 예탁금을 임의로 인출하고 횡령했단다.
그렇게 해서 큰 오빠 송호림의 사업자금으로 넣어주고 있었지만 지난 여름 태풍으로 집이 온통 젖었을 때 자기 집 방을 빌려주던 고마운 동네 아가씨라는 믿음에 추호의 의심도 해볼 겨를이 없었다.
피해자 조서를 작성하던 아내는 수사관의 질문에 동문서답 하면서 가슴만 움켜쥐었다.
" 처음 이 마을에 이사를 와서부터 금고에 예금을 하러 가면 그 아이가 창구에서 늘 나를 반겨 주었어요.
근무도 8년 넘게 하고 늘 사근 사근하고 명태며 소고기며 목돈을 예탁하면 사은품이라며 자주 내어 주던 고것이 글쎄 나를 이렇게 만들지 누가 알았겠어요?"
수술할 시절을 훨씬 넘기 만성 전립선염. 소변을 보고 나오는 뒤척거림은 자기로서도 짜증스러운 노년의 굴레였다.
희미한 백열등, 재래식 화장실 싸늘한 벽 앞에서 힘없는 소변 줄기를 추스리는데 싸늘한 냉기가 올라온다.
이곤 외진 어촌 마을로까지 이사를 온지도 어언 8년. 전세금 1천만 원을 아끼자고 아내 백수희는 기어코 수도 배관도 부실하고 화장실은 뒷켠에 허름한 이 집을 사글세로 살기로 결정해 버리고 말았으니 이렇게 허망하게 전재산을 날릴 바에야 집이라도 좀 나은 걸 고르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리에 아내는 잠을 또다시 설치고 몸을 뒤척인다.
“ 아이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평생 안 쓰고 안 먹으며 천원 쓰는 것도 주저하며 아껴온 돈인데..
수천 만원도 아닌 수억을 잃다니…”
이튿날 전립선 병원에 정기 진료를 받으러 윤상이 서울행 버스를 기다리는데 대합실 TV 방송에 여배우들의 사각거리는 말투와 미소로 도배된 대출 광고가 문득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 쳇바퀴의 정점에는 돈으로 돈을 버는 이들이 고급 승용차에 골프장에서 품격 있는 식당에서 대접받는 인격으로 행사할 것을 생각하니 분이 끓었다. 어쩌면 그의 고혈로 모았던 돈들은 카지노의 밤으로 흘러 가 화려한 불꽃 놀이로 태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녀가 근무하던 동네 은행 측은 윤상의 아내가 사채 이자를 여직원으로부터 받을 기대에 개인적인 돈거래를 하다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진실이 어떻든 일단은 아내가 자필로 서명한 대출신청서건 때문에 있지도 않은 대출 채무를 피할수 없게 된 판국이었다.
5시간을 달린 끝에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횡단보도는 전보다도 인산인해였다. 지하철 승강장까지 올라가는 계단에 숨이 차 올랐으나 한강변을 따라 지상을 달리는 2호선 순환선의 바깥 전경에서 모처럼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동대문 운동장 역에 하차한 윤상은 이번에는 보청기를 무슨 값을 치르고서라도 장만해야겠다고 맘 먹었다.
똑똑히 들어서 검사가 하는 질문에 똑똑히 당당히 답변하겠다고 벼뤘건만 몇 군데 가게를 둘러 보아도 백만원대를 호가하는 가격대였다. 젊은 이들이 말하는 카드로 긁는다는 행위가 새삼 부러웠다.
변호사라도 수임해 보려고 챙겨온 사건 서류들과 보기 싫어도 다시 쳐다 보아야 하는 두터운 거래 원장들의 무게가 어깨를 시큰거리게 한다.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떨리는 심장과 눈물은 법정이라는 곳에서 검사와 판사들 앞에서는 강아지 재롱만도 못하는 소음일 뿐이었다. 숫자와 물증으로 진위를 입증하고 나를 주장하는 잔인스런 숙제였다.
눈과 귀가 점점 희미해지는 노년에 이 무슨 버겨운 숙제란 말인가?
보훈 의료원에 도착했다. 예약 진료를 받고 비뇨기과 약을 타기 위함이었다.
병원 대기실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자 해방 후 성탄도 참 설레던 시절이었음을 새삼 느낀다.
평양 시내 교회들로 들어오는 많은 땔감과 성경학교 학생들에게 전해질 구호 물자들을 말수레로 운반해 주던 그의 마음도 산타클로스가 되곤 했었다.
추억에 잠겨 있는데 송호림이 나타났다.
"어르신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만 제 동생은 열심히 살겠다는 억순이였습니다. 그 아이가 철이 없던 나머지 저를 도와 보겠다고 어르신 가정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저 아이는 출소하면 접시 닦이를 해서라도 다만 얼마씩 변제해 드릴 것입니다."
송희자가 예금 횡령으로 증발시킨 3억 외에도 사채 형식으로 빌려간 돈 1억 5천만원은 받을 길이 요원했다.
사기 고발 건 만이라도 취하해 달라고 그는 그녀의 오빠로서 애걸하고 있었다.
송희자를 피해자와 함께 대질 심문하던 날이 기억났다.
청심환을 몇알 씩 먹고서도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아내가 영 불안해 보여 윤상도 그날은 가게를 닫아걸고 동행을 했다.
조사실에 들어서면서 악의 실체인양 송희자의 눈동자를 똑똑히 쳐다 보며 엄중히 꾸짖겠다고 윤상은 맘을 먹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사고 방식에서 법의 테두리를 무시하고 저지르는 그들만의 융통성. 법과 세상 물정에 어두운 틈을 타 벌어지는 범죄가 자신의 늘그막까지 뻗쳐 온 마수의 실체를 응징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사실로 들어서던 송희자는 많이도 수척해 있었다. 억순이같던 체구는 간 데 없이 심문 과정에서 가슴을 부여잡으며 심장이 아프다며 구심을 찾았다. 교도관이 그녀가 수감돼 있는 방에 달려가 소지품을 뒤져 약을 찾아 건네 주었다. 대질 심문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2시간을 넘겨 해는 어둑 어둑해지고 있었다.
송희자는 조사를 받던 중 잠시 휴식시간 때 윤상을 붙들고 그렇게 말했었다.
" 우리 오빠가 죽을 고생을 해서 신기술을 내놓았는데 대기업이 모방 제품을 바로 내놔 결국 개발비도 못 건지고 말았어요. 수년간 대기업에 맞서 특허소송을 벌이다 본전도 못 건졌어요. 그 법정 비용의 몇분의 1만 줘도 오빠의 기술을 사갈수 있었을 대기업이 그렇게 우리 오빠를 무참히 짓밟았어요.”
오빠의 성공하면 대한민국 서민의 희망이 될 거라고 믿었다며 송희자는 굵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머니들의 눈먼 장롱 거금들이라도 끌어내서 오빠를 돕고 보자고 맘먹었어요. 오빠는 성공하면 내가 많은 이자를 쳐서 돌려 드리면 될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끝이 좋으면 다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어투는 나름 떳떳하다는 듯이 들려오기까지 했다. 자기 중심적 사고와 융통성은 그렇게 범죄 불감증을 허락하고 문제 상황을 편법과 변칙을 타개하려다 그 실패의 여파로 주변 사람들까지 수렁에 빠뜨린다.
차라리 은행 측 제안을 받아들일걸 싶었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었다.
억울해 응하지 않았던 탓에 2억의 예탁금은 허위 대출 신청서에 의해 2억의 예금담보 대출로 둔갑했고 법정 싸움을 끌고 오는 2년 동안 연체이자는 연체 이율 20%가 꼬박꼬박 적용돼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밖에도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윤상은 아들 정호와 고속버스 터미널 지하의 찜질방으로 향했다. 모처럼 아들과 보내는 하룻밤이었다.
너무나 잃은 게 많았던 전쟁이라는 역사의 칼바람. 목숨 하나를 부지하기 위해 재산이며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던 시절을 떠올리니 그나마 위안이 되는구나. 숱하게 넘겨온 그 죽을 고비들을 넘었으니 이후로 살아온 지금의 인생은 덤이 아니겠니?
[ 노인 대학 ]
“ 어르신.. 여기 점심 식사가 3천원 밖에 안 합니다. 종로구청 부설 시민 회관에서는 노인들을 위한 레크레이션과 복지 후생시설이 구비돼 있어 자주 들리실 만 합니다. 제가 급히 용무를 마치고 어르신을 모시러 오겠습니다”
송호림을 따라 이동한 종로 구청에서 다급하게 윤상을 구내 식당으로 안내한 그는 3천원 짜리 식권을 건네 주며 잠시 사라졌다.
금고 측에 변제 해야 할 연체 이자 건에 대해 어떤 법률 대응을 하면 좋을지 자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는 말에 윤상은 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에 나타난 송호림이 윤상을 안내한 곳은 구청 문화원 노인 강좌 교실이었다.
현선은 노인 심리 상담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서 노년층에 대한 상담과 인생 비젼 설계 강의를 자원봉사로 맡게 되었다.
전 남편의 고시공부를 뒷바라지 하느라 현선이 법에도 해박한 것을 알고 있던 송호림은 윤상을 그녀의 강좌에 참여시키는 형식으로 그녀에게 자연스레 떠넘겼다.
일단 노인의 피해의식과 집착을 버리게끔 해주는 것이 여동생에 대한 고소 취하로 유인하는데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윤상은 작고 하얀 얼굴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40대 현선의 얼굴에서 평양에 두고 온 홀어머니 얼굴을 순간 느꼈다.
" 할아버지, 할머니들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는 70 연세에 운전 면허증을 따신 할아버지의 인생 도전담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고령의 운전면허 취득자를 소개하면서 현선은 노인분들께 희망 강의를 하고 있었다. 현선이 노인 강좌에 자원 봉사를 하게 된 것은 잠적해 버린 엄마를 찾기 위해서였다. 탑골 공원이나 주요 구청 문화 교실 등이 한때 엄마가 활약하시던 다단계 판매 조직들의 노인 대상 공략 지대였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거울 앞에서 이쁜 눈화장에 정성을 귀울이는 엄마. 이렇게 이대로 늙어 죽을 수 없다며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개척하겠다고 외출하시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시는 엄마의 몸부림. 그 역동성 만큼 여기 저기 금전 관계로 문제 상황을 유발해서는 자식들에게 큰 짐으로 되돌리시는 엄마지만 현선은 그 열정만큼은 이 침울한 노인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자 그럼 여러분 한 분 한 분씩 앞으로 나오셔서 나는 이런 어린 시절이 너무 기억에 나고 자랑스럽다라고 느끼는 부분을 5분씩 발표하시겠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윤상은 한동안 경직됐지만 다사 다난하던 어린 날의 생존담을 숙연한 음성으로 발표했다.
아버지를 5살때 여의고 바느질 하시는 어머니 슬하에서 그는 중학교 때부터 일을 해야 했다.
일본 군대가 발주하는 관급 공사에 자재 관리와 물류 용역 업무를 해오던 윤상의 작은 아버지는 서울과 평양 그리고 함흥을 전전했고 그런 삼촌의 심부름하며 따라 다니곤 했다.
평양에서 비행장 공사가 마무리 된 후에는 말과 수레 등 운송 수단이 남아돌아 삼촌은 대부분 팔고 처분하고도 남은 노새 한 마리가 윤상에게 맡겨져 그는 그 노새로 짐수레 일을 하며 홀어머니와 누이동생 생계비를 보태야 했다.
가을이면 황해도 제령 평야로부터 각종 김장 채소와 쌀들이 무동력 황포 돗배에 실려 대동강 기림 나룻터로 집하되었다. 그 물자를 평양 시내로 운송하는 일은 윤상과 같은 말수레꾼들이었다.
쌀가마를 배에서 지고 내리는 게 어린 체구의 윤상으로서는 가장 큰 고역이었다.
하지만 인생에 닳아 버린 찌든 표정들의 어른 마부들 보다 영민하게 생긴 윤상의 민첩함은 금새 많은 고객을 모아갔다. 말을 잘 다뤄서 윤상의 말은 다른 마부의 말보다 곱절의 일을 하고도 잘 순종했다. 배가 고프면 혼자서 순안 비행장 풀밭에서 꼴을 뜯어 먹고 주인에게 돌아오는 노새였다.
강의가 끝나고 윤상은 조용히 교단을 향해 걸어가 현선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마누라가 금전 사고를 겪고 엄청 실의에 빠져 있어요. 그런 우울증을 극복하는 강좌는 없나요?"
강의가 끝난 후 다가온 윤상의 조심스런 질문에 그녀는 눈을 깜빡 거렸다.
윤상에게 의자를 내어 드리며 사연을 듣던 그녀는 윤상에게 종이컵으로 물을 한잔 담아 권하면서 속 상한 얘기를 천천히 말하게 했다.
“ 참는 것은 폭발하지만 드러내면 곪아 터지지는 않습니다. 다음주에 새로 시작하는 웃음치료 과정에 사모님과 함께 나오세요. 함께들 모여서 친교를 형성하며 속마음을 드러내어 울고 웃고 하다보면 할머니께서 안정과 자신감을 되찾으실 거에요”
윤상은 진지하게 듣고 있었지만 어딘가 얼굴이 그늘졌다.
“저 선생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가게를 비워놓고 집 사람 손을 잡고 여길 데려 오려고 해도 올 사람은 아닙니다. 송호림 씨 말에 따르면 선생님께서 법에도 해박하다고 하시던데 어떻게 송희자의 회사측에 손해 배상을 요구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뭔가 구체적인 도움을 드려야 할 것 같은 마음에 현선은 잠시 골몰 하다가 윤상의 옆에 아들로 보이는 정호를 보게 되었다.
“저기 아드님이신가 봐요. 그럼 제가 검찰의 공소사실을 단순 금전거래 사기에서 업무상 배임 횡령으로 고칠수 있도록 탄원서 작성의 지침을 알려드릴게요. “
현선이 메모장을 찾으려 두리번 거리는 데 윤상의 아들 정호는 대뜸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펼쳐 보이며 여백을 가리키면서 펜을 내밀었다.
“어르신들은 손에 쥐고 있는, 평생을 모은 돈이 생명 줄과 같고 당신만의 삶에 활력소라고 생각하시거든요
지금은 아무런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으니 조심히 위로해 드리시고 많은 사람을 만나서 자꾸 내면에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하시고 계속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시게 하시는 일 먼저인 것 같습니다”
.
얼른 사무실로 복귀할 급한 마음에 현선은 그에게 말을 함과 동시에 담당 검사 앞으로 제출할 탄원서의 요지를 그 여백에 메모해 가지 시작하는데 낯선 꼬부랑 글씨에 몇번이고 눈길이 갔다. 소위들 말하는 아랍어 같았다.
그제서야 현선은 보험설계사 보던 날 고사장에 그 사람을 기억했다.
“그 때 시험 보신 분 맞으시죠? 어느 영업소에 근무하시나요?”
“그냥 보험사 육성팀의 선배가 하도 졸라서 한달 나가 준 거에요. 연수 받으며 금융 상식도 배우고 나름 보람이었지요”
말을 하면서 유심히 들여다 본 정호는 어깨에 비듬이 떨어져 있었고 면도는 하다가 만 듯 지저분했다.
반코트 하나도 없는지 추위에 어깨는 움츠려져 있었다.
정호는 열심히 들으면서도 현선에게 되물었다.
“이 요지대로 시안을 작성해 오면 선생님께서 한번 더 검토해 주시겠습니까?”
현선은 대답대신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핸드폰이 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런데 귀에 익은 엄마의 목소리였다.
“현선아. 내가 여기 선릉역 갤러리아 컨벤션룸 3층 행사장엘 있는데 나를 좀 만나러 오렴. 절대 다른 형제들에게 알리지 말고 너도 혼자 와야한다”
아마도 긴급히 자금이 필요하셨던 모양이었다. 1년전에도 똑같이 엄마가 다급한 연락을 해오셨을 때 언니를 몰래 불러내 엄마의 뒤를 밟아 거처를 알아내고 엄마가 활동하던 다단계 회사의 재고를 처분한 뒤 엄마를 모셔왔었던 일이 있었다. 그 날 사건에 대한 경계감에서 엄마는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지 말고 혼자 오라며 신신 당부를 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현선은 골몰했다. 엄마가 얼굴을 모르는 사람과 동행한다면 뒤를 밟을수 있고 엄마의 거처를 알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현선이 열병을 앓게 만들었던 남자 정호와의 묘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의 아버지 윤상에게 찾아온 기막히게 억울한 사건의 불씨가 인연의 가지를 피웠던 것이다.
앞에 서 있는 정호의 손을 끌어 현선은 선릉역을 향해 차를 몰았다.
여의도에서 선릉역까지 정호를 옆자리에 태우고 가는데 노을 없는 일몰이 한강 너머에 펼쳐지고 있었다.
현선은 차츰 이런 저런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그의 마지막 직장은 한국 제일의 건설사 사우디 아라비아 주재원.
현지인 상대의 영업을 하러 갔으나 주된 업무가 국내 출장 임원의 의전과 보고서 작성이었는데 보고서 글자체,토씨, 편집 등을 가지고 본사 기획실에서 불만이 거듭되자 입사 반년을 안 넘기고 자진 퇴사해 버린 남자였다. 두 아이와 아내까지 있는 가장이 제일 평판 좋은 건설사를 퇴사하자 이후에도 면접을 보는 족족 회사들은 그의 이직 근성을 염려해 선뜻 뽑으려는 데가 없었다.
[엄마의 꽃다발 ]
" 한때 대형 한정식 집 사장이던 저는 2004년도 카드 대란 여파로 매월 적자에 허덕였습니다.그러나 과거 외환위기를 이겨냈던 자신감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가게 운영비를 충당해 가면서 공격적인 경영을 고집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이달의 판매 왕으로 등극한 그 50대 남성은 스스로를 한국 사회 자영업자들의 자화상으로 견주었다. 몰락과 절망의 나락에서 재기를 할수 있었던 건강식품, 건강 내의 사업을 찬양하면서 사회의 희망전도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옆에 역시 화환을 목에 건 분이 엄마셨다. 연단에 서게 되신 명분은 최고령 회원이면서 매출 상위 30%에 진입했다는 이유 같았다.
결국 그날 엄마가 현선을 부른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아까 점심때 여기 행사장에 이 녀석이 혼자 버려져 있지 뭐니?”
작은 푸들 강아지였다. 엄마가 계신 거처에서는 단체 생활을 하니깐 강아지를 키울 수 없던 나머지 현선에게 맡기셨다.
우수에 젖은 듯한 검은색의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숙희에게는 생명덩어리로 다가왔다.
현선이 강아지를 안아들고 엄마에게 인사를 드리고 주차장 차에서 기다리던 사이 정호는 행사를 마친 일행들 틈에 끼여 엄마가 탑승하는 봉고차 번호판을 보고 기억했고 재빨리 현선에게 전화 연락을 했다. 현선은 차를 미행했고 신대방동 단독 주택촌까지 봉고차를 몰래 따라가 엄마의 거처를 파악해 내고 말았다.
6남매를 혼자 키우다시피 했던 엄마는 당신의 삶을 살아갈 도전의 길을 벼뤘다.
엄마의 미용실에 모여든 손님 아주머니들의 들뜬 대화에서 다단계 판매 회사를 알게 되었다.
그곳은 엄마의 잠재된 도전의식이 나래를 피기엔 어울리는 무대였고 엄마는 열정 전도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노후에 대한 불안에 파고드는 다단계 조직에게 엄마의 열성은 저변 확대에 기여 가치가 높았다.
여사님 소릴 들으며 금새 좌중의 분위기를 주도하시곤 했지만 악성 재고는 쌓여가고 종국적으로는 빚과 손해로 결말이 나는 활동이었다.
그날 다급하게 현선을 부른 것도 긴급 자금이 필요해서임을 현선은 일찌감치 알아채리고 있었다.
아빠로부터 받은 상처에 엄마는 평생 그 완고한 맘을 돌이키지 않았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빠를 저주하듯 분리와 독립의 길을 모색하셨다.
급기야 아빠의 은행계좌 비밀번호가 단순한 1111번임을 눈치 채시고 집안의 돈과 아빠의 계좌에서 현금을 죄다 인출해 가출을 하시고 한동안 잠적을 하셨다가 다단계 판매 조직에서 보내온 빚 독촉과 숱한 고지서들 덕분에 역으로 조회해서 다단계 교육장을 덮쳐 엄마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당뇨에 고혈압까지 있으신 엄마가 매일 사업 모임에 출석하고 상품을 홍보하고 상담하시는 모습이 현선으로서는 불안스러웠다. 언제까지 저런 활동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연로하시어 인지력은 노쇠했는데도 열정과 의욕은 여전한 엄마의 파장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힘겨웠다.
[ 아빠 생신 ]
생신을 맞아 오랜만에 할아버지 댁에 놀러 온 조카들이 부산스럽다. 장작 난로에서 군고구마를 구워보겠다는 손주들의 성급한 동심을 달래어 가시는 아빠는 영락없이 현선을 보듬어 키우시던 그 옛날의 자상하던 아빠였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태양의 햇살에도 소리 없는 깃발처럼 일렁이던 억새풀 같은 아버지의 백발이었다.
하지만 독거하는 엄마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으셨고 엄마 또한 아빠를 용서할 여력이 없이 이렇게 두분은 철저히 갈라서 있었다.
아버지 생신이라고 형제들이 모처럼 모인 자리에서 현선은 엄마의 거처를 알아냈다고 말을 꺼냈다. 그런데 다들 나서는 이들이 없었다. 누구 집에 모셔온들 엄마는 또 얌전히 계시질 못하고 밖으로 나다니실테고 이젠 엄마의 뒷감당을 더는 하기들 버겨워 하고 있었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인양 체념들 하고 있었다.
당신이 정히 그런 노년의 길을 가시겠다면 당신 뜻데로 하시다가 설령 추운 길바닥에서 비명 횡사를 하시더라도 집안에서 갑갑해 하시며 최후를 맞이하는 것 보단 나을 거라고 은연중에들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서글펐다.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와 결코 외면해서는 안될 엄마의 독거 생활!
아버지의 좋은 것을 물려받고 어머니의 좋은 것을 먹고 자랐지만 두 분의 뿌리깊은 불화가 일으킨 멀미가 인생의 부채로 남아 형제들 삶의 뿌리를 흔들어댈 만큼 업보가 돼 버렸다.
능력만큼 좌절에 허덕이며 술로 벗하시던 아버지와 공주 같은 삶을 꿈꾸시던 엄마가 이토록 철저한 남남이 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엄마 아빠처럼 돼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가 환희의 절정에서도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부모님의 수십 년 세월 가시지 못한 불화를 지켜 보며 누군가를 사랑하고 거기에 하나처럼 자신이 몰입되는 순간이 한편으로 두려웠다.
그러다가 헤어질 고통이 두려웠고 아버지를 닮은 자신의 예민함이 어느 순간 상대방을 내치게 할까봐 두려웠다.
결혼 후 양장점을 여신 아버지는 큰 돈을 벌기도 했지만 패션 잡지 사업에 투자했다가 사기를 입고 빚쟁이들 집고
대문에서 기다리자 소주병을 허리춤에 매단 채 어지러운 밤거리를 홀로 헤매곤 하셨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대로를 활보하던 아빠는 영등포 4거리 길을 걷던 중 눈에 우연히 사무실 임대 안내문 앞에
서 귀신에 홀린 듯 결정을 해버리고 전화· 팩스, 직원 2명으로 도전했으나 원단 구입 자금이 부족했었다.
이번에는 부모님 집을 담보로 잡을 수조차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미장원 보조로 나서셨던 엄마까지 나서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꿈쩍도 않으셨다.
몇 날 밤을 새워 일하고도 피곤한 줄 몰랐던 아빠의 곁을 지켜준 사무실의 경리 아가씨가 예전에 파산한 패션 잡지 사업 시절 표지 모델을 하던 여자였음은 나중에 알게 됐다. 아빠가 철야근무를 이유로 집에 귀가하지 않는 날이 잦아들면서 걱정이 된 엄마는 어느 한밤중 남편의 속옷을 챙겨주려고 사무실에 갔다가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보고 말았다.
너무나 여린 엄마의 심성은 아빠의 그런 배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 정호의 이력서 전달 ]
현선이 동운테크 본사에 도착했을 때 회사 복도, 사무실 곳곳에는 창립 30주년 기념 혁신, 도전, 창조 등 현수막들이 즐비했다.
“우리도 이제는 내수 위주의 영업에서 시장다변화를 통한 글로벌 시장에 적극 진출해야 할 때입니다.”
황 회장이 글로벌 비즈니스 행사장을 참관하고 돌아온 뒤부터는 해외 사업에 몹시 집착하고 있었다.
“회사의 현실은 아직 걸음마 수준인데다 그 동안 쌓아왔다는 기술, 품질, 오랜 노하우의 경쟁력이라는 게 다 허깨비 같은 것을 인정도 안하고 의욕만 가지고 부하들을 다그친다고 일류기업이 되나?”
회사 밖에서 직원들은 그렇게 취중 진담을 하고 있을 때 동운 그룹의 창립 30주년 기념 행사에서 전무로 특별 승진된 장혁진 전무였다.
“전무님.. 찾으시던 인물에 근접한 인재입니다”
현선은 해외사업 직원의 후보가 될 인물의 이력서를 건넸다.
"개발,연구,영업,기획, 지원 본부간의 부서 폐쇄주의나 방어적 업무문화라는 장막을 걷어내는데 코뿔소 역할을 해줄 돌쇠형 인재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장 전무는 외국어가 되면서 해외 영업에 선봉장이 될 만한 인물을 앞세워 해외 사업이 물꼬를 트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가시화 시키고 싶어했다.
“플랜트 영업은 의사결정의 시간과 과정이 복잡합니다. 상대국의 거시적 미시적 국가개발 전략 등에 대해 거의 주간 단위로 현지 개발 정보와 경제 뉴스를 챙겨야 하구요.
시장 파악과 사업 기획 단계에서 손정호 씨의 다양한 외국어 채팅 능력은 좋은 무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손정호에 대한 이전 회사들의 품평은 하나같이 그가 부담스러운 직원이라는 쪽으로 모아졌다.
특히 예전 직장에서 정호는 홈쇼핑 물류창고 사업부 근무를 할 때였다.
홈쇼핑 사업팀을 기획한 팀장이 고객사 사장과 담합하여 장기간 미수금을 방치하고 그 고객사의 임원으로
전직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일이 발생하기 2달 전부터 정호는 화물창고에 입고시키는 고객사 납품업체들의 동향과 입소문을
수집하여 그 고객사의 부도 시기를 예측하고 본사에 수차례 투서하며 문제를 사내에 공론화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룹웨어 게시판에 상관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처벌성 인사명령이 떨어져 서울에서 연고가 없는 부산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 내력을 근거로 볼 때 소신 주의 업무 추진력이 큰 일을 선구적으로 해낼수 있지 않을까요? “
그래도 주저하는 장 전무에게 현선은 또다른 해법을 제안한다.
“약 3개월간 다들 기피하는 인천항 컨테이너 하역장 업무에 배치를 해보세요.
그러다가 3개월 못돼서 그를 본사 해외 사업부 사무직으로 그를 전임시키세요.
다른 직원들에게 매우 큰 동기부여가 될 것임을 지적했다.”
“듣고 보니 역시 공감이 가는군요. 현선 강사님 혜안이 보통이 아닙니다”
변방 점소에서 현장 업무를 하던 말단 직원이 본사의 인기 부서로 격상돼 간다는 사실을 사보에 대대적으로 게재하므로서 동운 그룹은 인재를 아끼며 직원의 경력 고도화를 지원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었다.
인천 하역장 근무를 2달 만에 졸업한 정호.
그는 자기 혼자 세상을 떠받치는 양 강박감 속에서 사는 듯 보였다.
그는 스스로를 미아 보호소의 책임자로
응급실의 의사로 추락하는 비행기의 조종사인양 의식하며 살아가는 남자였다. 그런
극한 상황 속 미션의 장본인처럼 마음 졸이며 숙면을 모르는 밤을 뒤척이는 그였다.
불구덩이를 무거운 방패로 힘겹게 막다가 방패마저도 불처럼 뜨거워졌다
그렇게 그를 달래줄 만큼 손정호의 처지는 그녀의 마음을 후벼왔다.가족들이 있는 냇가 한 켠을 지켜야 할 그가 냇가 저 너머의 세계로 건너가려 몸부림치는 오리 같았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동안에는 옆을 볼 수 없게 됩니다..앞만 주로 보아야 하죠..그러나 자동차를 버리고 나면 모든 곳을 볼 수 있다.
가야 할 방향이 확정된 이후엔 열심히 자동차를 몰아야 하지만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할 시점에서는 운전대를 놓아야 해요”
머리맡에서 아기에게 타이르듯 현선은 그의 고집을 바꿔보려는 말들을 던져 보기도 했다.
주말에나 집에 오며 고시원에서 구겨 자면서 직장에서 버티고 맡은 신규사업을 살려야 하는 처지였다.
그의 아내는 무기력하게 누워 흐느적거리고 아이는 그 나무토막 같은 엄마를 잡고 보채기만 했다.그의 책 읽는 소리는 아내에게 시끄러운 소음이었고 그가 듣는 샹송은 우울함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안부 전화라고는 할 줄 모르는 장모에게 그는 입방아에 오르는 서운한 사위였다.
고시원을 전전하던 그가 안스러워 박현선은 자신의 오피스텔에 불러들이고 그가 서울 본사로 첫 출근을 하던 날 현선은 손수 정호의 와이셔츠를 다리고 있었다. 그 다림질의 시간이 몹시도 뿌듯하고 보람찼다.
정호가 그 존재의 빛을 보게 되면 세상이 한 눈에 꿰듯이 보이고 세상의 곳곳이 한가닥 언어로 꿰어질 것을 믿었고 그 빛을 정호가 앞으로 만나길 빌었다.
현선은 정호에게 휴식이 삶에서 얼마나 생명수가 되는지를 실감시켜 주고 싶었다. 동해안으로 데려갈까 하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남이섬으로 향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세상에서 외진 별천지 같은 섬으로 잠시의 도피 시간을 가졌다.
거기엔 그 누구도 수근 대며 박현선을 엿보거나 그녀의 행적을 운운할 눈길들이 없을 것만 같았다.
골수까지 저며오는 그의 몸짓에 모든 걸 벗고 맡겨 보기도 했다.
강아지풀을 간지럽히는 봄바람 같은 그의 손길 앞에서 맘이 열리고 몸도 열렸다.
묵은 갈증이 생명수를 들이키듯 자신의 몸을 삼키는 동안 그녀의 맘에 연민이 어려왔다.
그녀의 팔은 가늘어서 그의 목을 감아도 그의 머리에 눌리질 않았다. 그의 어깨 끝과 목 사이 공간이 더 컷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의 목을 감아 안아주면 그의 왼팔은 그녀의 두 발 사이를 지나 그녀의 허리에 날개를 접었다.
그 큰 몸집이 자신의 여린 몸에 이렇게 자연스레 안겨올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자신의 피붙이 아기를 배불리 먹여주듯 그의 묵은 갈증 앞에 모든 걸 허락하며 그를 살려준다는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몇 번이고 혼절할 듯하던 황홀경의 춤이 끝나자 싸늘함 자괴감이 몰려 왔다. 가정이 있는 남자와 보낸 이 시간에 대한 수치와 죄책감이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일까? 불행한 결혼이 양세나를 알게 했고 그녀를 실망시킨 은사 백교수의 실수를 계기로 보험 설계사에서 헤드헌터 회사로 전직하고 양세나의 남편 송호림을 알게 됐고 윤상 노인과 애증의 남자 정호와 인연이 닿게 되었다.
실직 중이던 정호의 잠재력을 읽은 현선의 보호 본능은 동운 그룹 지주회사인 동운테크에 엔지니어링 입사를 청탁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그녀가 혐오하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존재는 연료가 되기도 했고 길바닥의 돌멩이가 되기도 했으며 때론 폭우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그들은 부정할수 없는 자기 삶의 쳇바퀴들이었다.
[ 회사의 원죄]
갓 입사한 해외 사업팀장 손정호의 도전은 자주 장 전무가 설정해 놓은 담벼락에 자주 부딪혔다.
“사업전략 수립 단계에서 제품 개발의 초점을 어느 나라 시장 위주로 할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일본 시장에서 부터 여타 시장으로 확산하는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일본과 미국 시장은 요구하는 제품이 서로 상이했다. 회사의 제품 포트폴리오에 있어서 일본과 미국 시장에 대한 수출 아이템이 틀렸다.
"일본 제조업체의 해외 이전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어요. 이것이 물류서비스 업계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일본 마루베니 정보통신의 경우 해외로 이전하는 자신들의 고객들을 위해 해외거점형 물류 창고, 컨테이너 기지 등에 대한 전산 업무 시스템 확충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해외 생산기지의 물류를 지원할 전산 업무 시스템 확충에서 프로그래머 인건비가 저렴한 한국업체를 활용하려는 계기가 일본 기업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면서 손정호는 일본 시장에 절실한 창고 자동화 시스템 개발 일정을 앞당겨 달라고 개발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장 전무는 일본 시장보다는 미국사업의 활성화가 필요했다.
동운테크의 모회사 동운해운이 미국 서부 해안 주요 항만 운영사에 현지 합작법인 형태로 다수 소유하고 있어 그 연고권을 살려 항만 자동화 시스템에서 신규 수주를 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미국 영업 확대를 통해 현지 연락사무소를 지사 규모로 확장하여 자신이 지사장으로 부임하려는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있었다. 고등학생인 아들의 미국 유학을 장차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손정호는 일본 에이원 전기라는 업체를 현지 시장의 공급 채널로 발굴하였으나 공급 계약을 맺기까지는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아직 완성된 솔루션이 아니어서 보수적인 일본인의 상인 근성 관점에서는 용납이 되질 않았지만 정호의 열정에 그들은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그런데 회사에서 수출할 시스템을 현지 협력사에서 시범 구축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하자들이 나왔다.
공급될 시스템에 하자 투성이라며 일본 협력사는 즉각적인 문제 해결을 한국 본사에 강조했다.
정호는 영업 대표로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개발부서와 운영부서의 적극 협조를 갈구했다.
그러나 협력을 해줘야 할 부서장들은 입장이 틀렸다. 제품의 골간을 변경해야 하는 수술이 필요한 장애들이었다.
자기 팀원들을 주말 , 철야 근무까지 시켜가면서 스스로 숙제를 키워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속도 조절을 해가고 있었다.
더구나 장애 복구를 위해 필요로 소요되는 장비를 총무팀에서는 신속히 제공해 주지도 않았다.신규 구매 요청을 내면 최종 결제가 떨어지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제조업인 경우엔 자재가 있어야 생산이 들어가고 생산이 끝나야 테스트가 되고 테스트를 통과해야 출하가 되는등 앞과 뒤가 명백해서 자재 입고가 안된 상황에서 출하를 독촉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은 사정이 달라 해당 인원이 없는데도 작품을 요구하기 일쑤였다. 무형의 제품인 나머지 제품 준비 프로세스상에서 비약된 요구와 기대가 많았다.
임원진이 시장의 기회를 운운하며 대응 제품을 보채면 수 개월뒤 제품이 뚝딱 나와야 하는 과정의 비약이 다반사였다.
이런 난처함을 몇번 겪은 프로그래머 나 개발팀 관계자들은 영리하게 자기 몸을 사리게 된다.
스스로 보호막을 치고 업무 추진에 속도 조절들을 한다.과정의 부실공사를 묵인하면서라도 스스로 숨쉴 여유를 찾게 된다.
장기적 안목으로 확장성과 유연성이 뛰어난 제품을 만들 겨를이 없어 하드코딩으로 급조된 , 영업적 재활용성이 낮은 작품들을 급히 토해내게 된다.
그러한 부실과 발등에 떨어진 숙제 메우기 식으로 쌓아 올려진 성이 회사의 현실이었다.
영업 대표로서 제 아무리 부지런하게 고객을 사냥하며 다녀도 제품이 받쳐주질 못하는 형국이었다.
동운테크의 태생적 원죄 탓이었다. 건설과 중공업, 해운의 계열사들 물량을 고정확보하고 있는 그룹 지주사이자 IT 서비스 업체 동운테크는 그룹 내부 물량으로 매출을 유지하고 경영주의 금고 역할을 위해 출범한 회사였기 때문에 투자를 하여 성장 시킬 의도가 애초에 매우 제한적이었다.
동운 그룹의 IT 자회사로서 그룹 IT서비스를 전담하는 동운테크의 설립을 주도하면서 장 전무는 그룹 회장의 금고 역할을 마련함과 동시에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설립 7개월 후 유상증자로 회사 주식 수를 두 배로 늘려 발행 주식 전량을 황 회장 딸에게 배정했다. 회사 자산규모와 당기순익을 고려하면 주당 12만원의 것을 10분의 1 가격으로 싸게 발행해 차액 마진을 꾀했다.
계열사 전산 업무와 시스템 관리를 총괄시켜 계열사 용역 서비스 단가를 올리고 서비스 범위 확대로 매출을 급격히 늘려갔다.
이런 식으로 그룹사 소속 IT 자회사를 이용해 상속세 등을 피해 지분과 재산을 후계자에게 넘겨주는데 일조했다.
근본 태생이 총수 비자금을 조성하고 편법 상속 수단인 기업에서 도전과 창의적 업무 추진이 설 자리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 우리 회사는 대외 영업을 할 준비가 안돼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당기 목표 매출액 숫자를 얼마로 할것인지 보고 서류칸을 메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간 영업 회의 석상에서 정호의 폭탄 선언에 회의석상은 금새 싸늘하게 변했다.
“영업을 해도 후속 프로세스가 이어질 수 없는 시스템으로 조직이 결박돼 있어요. 팔 만한 제품이 없고 제품을 소개할 껍데기 조차 마련이 안돼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대책을 말해봐요. 이것도 저것도 다 준비 안돼있다고 말하면 여기 앉아 있는 이들은 전부 바보란 말인가?”
참다 못한 대표이사가 한마디 쏘아 붙였다.
“누가 지금 와서 그런 원론적인 얘기를 하자는 겁니까? 자꾸 첫 단추가 잘못 끼워줬다는 말만 하지맙시다. 일을 되게 하는 방향으로 방안들을 내야 하잖아요?"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사장은 짜증스럽게 정호의 말을 끊었다.
조직의 원죄를 지적하는 정호의 발언은 다들 모르는 내용은 아니었으나 누구도 공개 석상에서 말할 엄두는 내지못하고 있었다.
7개의 소프트웨어 개발 선언은 신제품 사업부를 출범시키기 위한 깃발일 뿐이었다.
그 사업본부가 생겨난 배경은 엉뚱하게도 모기업인 동운해운의 프랑스 지사에서 귀국한 임 본부장에게 본부장급 보직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꾸려졌다.
한 사람의 회사내 입지를 마련해 주기 위해 온 집안을 뜯어고친 격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뿐이었다. 장 전무는 필요한 지원을 차단했다. 마치 넓은 방은 마련해 주었으나 전기와 수도가 차단 된 것 처럼 관련 인재 충원은 인사팀에서 의도적으로 목을 죄었던 것이다.
[ 정호의 사직서 ]
이른 아침 6시부터 출근한 정호는 사무실 청소 아주머니의 인사를 겸연쩍게 받으면서 그는 마저 작성하던 사직서의 퇴사 사유란을 메워갔다.
'저는 일을 하러 왔으나 현 상황은 일을 일답게 할 수도 없고 안전지대에 머물고 싶어하는 기득권의 직원들에 의해 신규 프로젝트는 철저히 고립되고 있습니다....'
사직서를 제출하는데 손가락을 잘라내는 기분이지만 손정호는 감상에 빠질 틈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다이어리와 명함집을 정리하며 자기 자리의 개인 사물을 분주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점심 시간이 지나서 장 전무의 자리에서 전화가 왔다.
"어 나 장 전무요. 보내준 의견은 잘 보았소"
손정호는 대답했다.
"의견이 아니라 제 결정입니다.빠를수록 좋을 것 같아서요"
"결정이 됐던 의견이 됐던 저녁에 소주나 한잔 하면서 마저 들어 봅시다."
회사 1층 현관에서 만난 장 전무는 사무실 주변 식당을 놔두고 굳이 정호와 함께 택시를 타 영등포 시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택시를 고르는 방식이 남달랐다. 토스트 천막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는 두 세명 택시 기사들을 유심히 보더니 그 중 나이가 지긋한 분을 골라 행선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1500원짜리 토스트에 오뎅 국물 두 컵을 비운 기사는 입을 휴지로 대충 닦으며 택시 문을 열었다.
" 기사님! 요즘 손님은 좀 많습니까?”
“ 말도 마세요. 중산층 이 다 서민층 돼 버리고 서민층은 빈곤층이 돼 버렸어요”
경기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한마디 같았다.
“강남 사는 사람이 부자 라는 것도 실상을 모르는 얘기에요 빛없이 강남에 집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겟어요 택시 안에서 우는 사람도 있어요”
“기사님은 택시 자영업을 하시니깐 그래도 속은 더 편하시겠네요”
“맞습니다. 택시가 돈은 안 되도 속은 편해요. 저는 IMF때 다니던 회사를 정리했지만 그 때 대기업으로 옮겨가 임원까지 된 동료가 들려준 얘기는 저보다 비참한 것 같았어요.
몇 년을 부어온 개인연금 신탁을 깨뜨려 빚 잔치를 하고 수험생 자녀의 과외비 마련해 보겠다고 부인이 나선 커피숍이 적자로 이어져 어디 식당 알바 자리라도 없을까 라며 모임에서 통사정을 하는 거에요”
영등포 역 먹자골목 입구의 포장마차를 찾아 들었다
장 전무는 구운 고등어 살점을 뜯으며 소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나는 택시를 탈 때마다 기사분들에게 이런저런 세상 물정을 귀동냥한다네.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들을수 없는 내용들이 많거든.”
손정호는 술을 잔의 2분의 1만 남겨 놓은채 줄곧 마시지를 않았다.
장 전무 또한 굳이 권하지를 않고 벌써 5번째 잔을 비운다.
" 내 동생도 말이야. 지금 숭실대 입구 뒷골목에서 소규모 편의점을 하다가 최근 가계와 자신의 아파트를 매물로 내놓았지. 부부가 24시간 교대로 영업을 해봤자 빛만 늘어가기 때문이야.하루빨리 정리해 은행대출금 갚는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던게지"
" 손정호 팀장 !
대리 운전받고 가더라도 연세든 사람이면 다시 한번 뜯어 보게. 직원 인건비 라도 벌기 위해 야간대리 운전기사로 나오는 중소기업 사장도 있다네.
여기 음식 나르는 저 청년은 또 어떻고?
낮에는 대학 강사를 하면서 밤에는 지하철역 부근에서 노점상을 한다는 박사 학위 소지자들도 있다지..
내가 제일 걱정이야. 이 회사 관두면 아파트 경비원도 할수나 있을까 싶어.
아파트 경비원! 그러고 보니 내가사는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도 영관 장교 출신이야.허허."
장 전무는 새로 시킨 참이슬을 손정호에게 한잔 채워준다.
"자네는 능력도 있고 전략도 있고 포부도 있지. 내가 알아.
자네는 프로펠러 비행기에서 고생하다가 어쩌면 제트 전투기에 타 있는거야.
자네는 조정대만 잡고 곡예 비행을 하고 싶어 하겠지
하지만 이 전투기를 떠받쳐온 많은 식솔들이 내겐 보이네.
어쩌면 전투기의 쾌속 운항을 위해 일찌감치 퇴장들을 했어야 사람들도 적지는 않아.
시간이 급물살을 타고 머리가 바래어지고 심장에 생채기가 그어지는 세월의 계곡을 넘어 살아왔어.
허나 저들이 회사를 떠나면 저 나이에 과연 무슨 일들을 할수 있을까?"
장 전무의 뜻은 네 뜻만 펼칠 욕심은 접고 자중하고 기다리거라.
정호의 입장은 흐르는 세월에 도약의 힘은 쇠잔해져 가니 다시 한번 날아볼 기회를 찾아 난 내 길을 가겠소
손정호는 잔을 한번에 비우며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전무님 함께가고 함께 다 살려고 하다가 공멸하니 전무님의 경영지원조직부터 달라진 모습을 좀 보여주십시요
총무팀이 개발부,영업부,정보전략 사업팀의 예산 줄이고 업무 경비를 조이는 걸 업적으로 여깁니다.
긴축 경영이다 뭐다 하면서 적시 투자와 집행을 다 옥죄고 있어요.
그럴거면 신규 팀은 왜 만들었고 저는 이 보직을 맡기셨습니까? “
정호는 새로 채워진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며 자리를 일어섰다.
[ 산사주 ]
현선이 보기에 손정호는 그런 식으로 기성 질서의 판을 뒤흔드는 사람이었다. 간혹 그의 논조는 침묵하는 대중들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대변하는 경우가 있어 순간 그에 대한 카리스마가 높아지는 때도 있었다.
정호는 "나"를 정의 내리기에 급급했고 그럴수록 동료에겐 경계 대상이 되고 상사에겐 제거해야 할 화근거리로 여겨졌다. 그는 늘 문제를 일으켜 해결해나가며 즐거움을 맛보려는 듯 벼랑끝 외줄타기를 스스로 자초하는 삶을 고집하는 듯 했다.
9회말 타석에 역전타를 쳐야하는 선수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었다. 정호에게 일깨워 주고 싶었다. 춤추는 무용수도 될 수 있고 세상의 멋진 곳을 여행하고 있는 여행가도 될 수 있고 한낮에 낮잠을 자고 있는 사람도 될 수 있다는 것을.
“ 이 세계를 개선하고 어떤 흐름대로 이끌어간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저 받아들이시길 바래요. 그래야 개선되어야 할 바른 방향이 보일 거예요”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화되지 않음을 다른 누구도 아닌 손정호에게서 박현선은 느껴야 했다.
끝내 사직서를 내버린 정호에게 현선은 메일로 절교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신의 일상은 곡예 비행이에요. 대안 없이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며 윗사람과 극한 심리적 대결을 하고
실속 없는 페이퍼 업무라며 주간 업무 보고서를 제 때 제출하지 않은 나머지 토요일 아침부터 말단 직원의 보채는 통화에 황망해 하는 모습이 당신이군요.
앞으로도 그런 불안정한 시간을
보내게 할 일이 두려워지네요
그런 당신에게 저 스스로를 얼마나
헌신할수 있을까요.
당신과 헤어질 것을 뻔히 알아 제 마음 속 깊은 데에서 거부의 손짓을 보이는데도 당신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는 게 두려워요.’
그에게 보내는 고별 메일을 여기까지 쳐내려 가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기분이 울컥거려 산사주를 마시려고 큰 컵 하나에 다 옮겨 부으려다 엎질렀다.
그의 흔적을 소독이라도 하려는 심정으로 벌컥 마셔버리다 그만 컴퓨터 자판 위에 잔을 쏟고 말았다.
ㅅ 과 ㅇ 자음이 안 먹혀 절름발이 맞춤법으로 아픈 글자를 토해내야 했다.
어쩌면 자신은 깨어진 컵처럼 그렇게 부서지기 쉽고 한번 깨어지면 도저히 붙일 수 없는 유리그릇 같았다.
현선은 정호에게 메일을 전송하고 화면을 닿았다.
컴퓨터 바탕화면의 지중해의 백사장 사진을 보자 저 가득한 물에 넉넉한 태양을 쐬면서 휴가를 떠나고 싶던 옛날이 기억나 눈물이 더 흘렀다.
눈물을 닦아내려고 하지도 못하고 얼른 핸드폰 전원을 모두 꺼버린 채 그녀는 깊은 잠을 청하려 몸만 뒤척거렸다.
[ 사우디 유학생 ]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 지식포럼에 VIP로 방한한 사우디 리야드 대학 총장과 인사를 나눴다.
삼정 엔지니어링의 주선에 의해 서웅대 교환 학생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유학을 온 리야드 대학 공과대 학생들이었다.
아람고 정유사 프로젝트를 수주 받아 진행중이던 삼정 엔지니어링이 발주처 실력자들의 자제 중 몇 명을 선정해서 한국내 유학을 알선한 것은 지한파를 육성한다는 포석이었다.
그들 가운데 28살 나이의 무글라 무함마드는 아버지가 아람코사의 구매처장이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아람고의 주요 고객인 한국의 정유사들에 대한 동향 파악도 할 겸 한국에서 외유를 허락받았다.
무글라가 정호를 알게 된 것은 강남역 4거리에서 무글라의 아우디 승용차가 음주 운전 사고를 내서였다. 옆 좌석에 프랑스 여성을 태운 그는 경찰의 연행을 뿌리치기 위해 아랍어로 소릴 질렀고 연행이 된 뒤에도 심문 과정에서 그는 짐짓 영어를 모른다는 시침을 떼며 조사에 응하질 않았다.
국적 조회를 한 경찰의 통역 수배는 아랍어 통역사 정호에게 닿았다.
정호가 아랍어 방언까지 외국인으로서는 제법 잘 구사하자 무글라는 순간 호기심이 동했고 자신의 프랑스 친구와는 불어로 기초 대화를 하는 모습에 더욱 놀라웠다. 게다가 정호의 인문학적 언사는 무글라에게 신선한 지적인 자극이 되었다.
"난 우리 나라로 돌아가기 싫어. 전에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한국이 더 좋아요.
사우디는 숨이 막혀요. 웬지 알아요? 이런 좋은 날에도 고작 갈수 있는 곳이 스타벅스에요.
커피나 앞에 모시고 남자들끼리 담배나 피워대야하는 게 전부야"
무글라는 아람코의 대외 발주 프로젝트를 좌지 우지하는 아버지 앞에 문전성시를 이루는 여러 나라 건설사 영업 대표들의 조아림을 보아왔다.
"아람코도 이제 석유만 믿고 번영을 장담할 수 없다. 석유 사업을 기본으로 하면서 대체 에너지 등 신성장 동력 산업 활성화의 핵심 투자사로서 거듭나야지.한국에 가서 그들이 일본과 경쟁하는 모습을 배워보거라.북한과 군사적 긴장 관계 속에서도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그 억척이 자세가 뭔지를 배워보러 가”
정호가 추천한 것은 개성 자유공단이었다.
“이를 잘만 벤치마킹한 그는 이스라엘 가자 지국에 팔레스타인 인력을 고용한 공업지구 활성화를 할수 있고 사우디 아라비아가 펀드를 조성해서 관여할수 있어. 공단에 이어서 미디어 컨텐츠,테마 파크,휴양 도시 등의 건설에 아람코가 주도적인 사업 투자를 한다면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부가 중동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 이슬람의 평화정신을 실현하는 셈이 돼”
정호는 경제 공영 모델을 통해 먼저 적대적이던 두 체제간 삶의 상호 공존 비젼에 대해 포부를 밝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그리고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파키스탄,이란 이런 무력 분쟁의 씨앗을 제거하는 가장 항구적인 기반은 정치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경제공영을 만들 수 있다면 평화를 위해 알라의 뜻을 실천하는 가장 실질적인 선행이 아닐까?”
공생의 사업모델을 이식하는 국제 사업가가 된다는 비젼에 무글라도 고무되어가고 있었다.
[ 이별 아픔 달래기 ]
오빠의 기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오빠와 사별한 현선은 삶의 의미를 잃고 살아 있음조차 느끼기 어려운 20대를 보냈다. 외출을 해도 그녀의 눈에는 희뿌연 것이 끼어있는 듯 세상은 안개였다.
그녀 자신의 의미체계와 세포 하나 하나에 배어있던 기억들이 무너졌을 때 세상은 잿빛이 되어 버렸다.
그처럼 사람을 잃는다는 무서움은 공기 같고 물 같던 존재가 없어지는 만큼 뿌리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잊고 살았던 그 두려움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정호를 향한 그녀 자신의 애정이 불안하기 짝이 없고 가정이 있는 그가 언젠가는 떠날까 두려운 나머지 곁에 있어도 채워지지 않다가 끝내 짜증이 고개를 드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정호와 결별을 선언하자 비로서 숨을 쉴수 있었다. 기분이 상해있거나 우울해지기는 커녕 마치 따스한 빛이 스며드는 듯 상쾌했다.
그를 만나고서부터 몸은 거대한 사슬에 옥죄이는 듯 했고 탁한 습기에 몸이 눅진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아침에 깨면 몸이 묵직해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끊임없이 보내오는 그의 사랑의 메시지가 따스한 느낌을 주기보다는 무거운 짐덩이를 지우고 일어나지 못하고 엎어뜨리고 있었다.
헤어지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었는지 이제는 이렇게 끝낼 수 있음이 마냥 홀가분하고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병상을 지키지 않아도 되고 그의 자식들에게 나쁜 여자라는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되고
세상사람들에게 불륜에 대한 오명으로 비난 받지 않아도 되는 등 수도 없이 많은 이유로 그와의 결별이 하늘 높이 축배를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순간은 죽음을 택하는 것이 좋을 만큼 고통스러운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도의심과 인간적인 감성이 부족해 보였다. 그를 제 몸 하나인 것처럼 받아들일 때 마다 그 결핍이 가시처럼 현선을 찔러왔고 혼란과 두려움이 현선을 엄습했다.
“당신 자아의 껍질은 거북이 등보다도 딱딱하게 굳어있어. 그 껍질이 깨어지지 않는 한 당신 삶에 어떠한 변화도 비전도 없을 것이야”
게다가 신변을 아직까지 정리하지 못한 정호를 이렇게 집안에 들여놓고 지내야하는 하루 하루를 불안했다.
복도 저멀리에서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혹시 형사들이 들이닥치는 소리일까? 심부름 센타 직원이 이곳 동정을 살피는 것일까?
마침내 현선은 소리를 질렀다.
"당장 짐싸. 다신 날 찾지마. 어서 나가줘!"
정호는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힘없는 표정으로 옷을 챙겨 입고 소지품을 하나씩 가방에 챙겨 넣었다.
잠시후면 두고 떠나야할 이 공간이 아쉬워 하나라도 눈에 담아두려는 듯 짐을 싸는 손길이 어설프고 느릿했다.
그녀의 아낌을 받던 시간은 회색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부서져 날아가 버렸다.
트렁크에 자기 책과 옷을 정리한 정호는 신발장 문을 열어 자신의 신발을 챙겨 들었다. 신발장 문고리가 눈에 들어온다.혹여 이 고리를 다시 잡을 순간이 살아 생전에 있을까?
오피스텔을 문을 열고 나서는데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있었다.
담배를 피우며 격정의 내면을 간신히 추스리고 있는 것일까? 숨죽여 울고 있는 것일까?
오피스텔 복도가 길게 앞에 놓여있다.
이 길을 오고간게 지금까지 몇 차례던가? 내일 아침 그녀가 출근을 할 때면 이 장면이 그대로 그 걸음 앞에 놓이겠지.
엘리베이터 버튼 1층을 누르면서 이 버튼에 이 손길이 마지막일까?
휘트니스 센터 광고 사진이 도배된 1층 윈도우룸에 걸려 있는 동구권 모델 아가씨의 저 표정은 지금 보는 것이 마지막일테지.
그의 오른손에 이끌려 트렁크 가방이 드르륵 작은 바퀴 소릴 내며 싸늘한 정적에 얼어 붙은 테헤란로의 일요일 아침을 흐트린다.
안개를 걷어내듯 그 정적을 깨는 소리에 맞춰 그의 뚤레 뚤레 걸음걸이가 대로변으로 향해 나아갔다.
금요일 늦은밤까지 질탕하던 유흥의 소음들은 간데 없었다.
겨울나그네로 내쳐진 그의 앞에 빈속을 채워줄 아침 식당 하나 구경하기 힘들었다.
모든 가게가 점포 문을 닫아버렸다.
전철역 입구 커피 전문점 하나가 따스한 불빛을 흘리고 있었다.
손님 드믄 매장 안 벽쪽에 자리 하나를 찾아든 그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그리던 현선과의 시간은 무지개 처럼 왔다가 아침 안개처럼 순식간에 증발해 가고 그 남은 체온도 앗아가려는 듯 내리는 비가 잔인하게 느껴졌다.
빗줄기가 허공을 흔들고 가로등 불빛은 빗방울을 헤아리는 찰나에 어리는 무지개를 보았다.
땅은 비를 거부하지 않고 하늘에서 떨어져오는 눈물을 묵묵히 삼키더니 여기 저기 나무들 여린 뿌리들을
적셔준다
바다가 되어 내려오는 눈물은 그렇게 땅을 흔들고 풀들을 키워낸다
그 풀들은 이듬해 봄 슬픔을 걷힌 얼굴로 우리 앞에 거울이 될까
그는 남은 커피를 마셔 버리면서 핸드폰을 들었다. 다행히도 작년에 머물던 영등포의 고시원의 전화 번호가 연락처에 남아 있었다.
"사장님 창문 있는 빈 방 하나 있습니까?"
예전에 6개월 지냈던 곳에 연락을 해보니 다행히 창가 방 하나가 남아 있었다.
정호는 서울역앞 추억의 24시 만화방, 만화천국을 찾아 들었다. 15년만에 찾았던 그 거리엔 만화방이 거의 문을 닫았으나 그 중 한곳이 남아 있었다.
꼬질한 실내에 배인 냄새들 여전하고 여유자적 주인장은 입장료로 2000원을 불렀다.
꼬랑내 냄새 심하게 풍기며 여기 저기 잠을 청하고 있는 초췌한 이들이 눈에 보였다. 그들은 또 무슨 진한 사연들에 치인 이들일까 상상으로 그들의 세월을 어루만지며 영등포 시장통의 고시원으로 들어섰다.
[ 정호 회유 ]
장 전무가 저녁을 함께하자며 박현선을 데려 간 곳은 물회 식당이었다.
“괜히 비싸게 회집가서 먹을 필요 없어요. 이거 한그릇이면 뚝딱이에요”
장 전무는 국수를 휘리릭 말더니 능숙하게 젖가락질을 했다.
“아버지가 어부셨소.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간 날이면 밥을 따로 해먹을 겨를이 없잖아요
그래서 잡은 고기를 대충 회쳐서 초장섞은 물에 밥과 말아서 먹곤 하셨죠.
방학이면 아버지 출어를 거들곤 했는데 그때 나도 많이 먹었어요.”
그러면서 장 전무는 자신의 입사후 역정을 회고했다.
“처음 회사를 입사했는데 층층시하 상사들의 권위도 높고 문화가 매우 보수적이었어요. 더 잘하는
업무 보다는 실수를 안 하는 업무가 절대 과제였죠. 그러다가 인사팀 일을 하게 됐죠.
후퇴할 것인가 , 달려나가 받아칠 것인가
지시를 기다리는 대신 뭔가를 조심스레 미리 진행하는 방식을 취했소
진행상황을 가지고 보고하고 지시받고 하니깐 한결 수월하더군요.
한동안 장 전무는 본론 대신 그렇게 자기 삶의 두께를 암시하는 내용을 구체적 사물을 빌어 감성적 언사로 늘어놓고 있었다.
“변화하는 시류에서 뒤쳐지는 듯 소외감을 어찌할 수 없어요. 요즘은 모빌리티 비즈니스 환경이 자리를 잡아 갈수록 자신의 조직 장악력이 무너지는 것 같고..회의석에서 그 과묵하면서도 침묵을 깨는 촌철살인의 위력을 비디오 컨퍼런싱에서는 쓸수가 없더군요. 사내 IT 인프라가 개량되면서 구세대 임원들의 아날로그 리더십은 허물어져 가고 있어요”
그렇게 돌리고 돌려 말한 장전무의 요지는 손정호이었다.
손정호이라는 선수의 등판을 이 국면이 왜 필요로 하는지 . 그것이 하이파이의 사업에도 왜 연관이 큰지.
그 선수의 퇴장하려는 결심을 돌이켜 세울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현선이라는 것을 조 사장에게 일깨우고 있었다.
장 전무의 부탁은 정호를 회유하는 것이었다.
“손정호가 사직하면 회사의 해외사업 깃발도 위태로워 집니다”
동운 중공업에 임시 비정규직 200백명을 현선의 하이파이가 관리하고 있었다.
정호가 사직 의사를 만류하지 못하면 그 비정규직 관리를 다른 업체에게 돌리겠다는 것이 장 전무의 강력한 메시지였다.
[ 다시 오피스텔 입주 ]
그렇다. 우리가 살아갈 날이 얼마나 된다고 보고 싶은 이 보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는
그런 어리석은 일은 멈추자’
마음을 그렇게 정리하자 그간의 번뇌와 주저함이 없었다. 현선은 운전대를 꺽어 남이섬으로 향했다.
정호와 처음 하룻밤을 보낸 장소였다.
남이섬 어귀에 서 있는 남이 장군 묘비 앞에서 그 날 따라 정호는 한참을 서성 거렸다.
“세조의 촉망을 얻어 이십대 나이에 병조판서에 오른 엘리트였으나 훈구파 대신들의 권좌 쟁탈에 희생양이 된 인재여!”
내 보금자리 오손도손 만들어도 세상의 파고는 해운대의 쓰나미 처럼 우릴 삼켜버리지.
권력가들이 머릴 맞대고 세계를 재단하면 내가 가꾼 꽃밭도 삶의 터전도 어느새 권력의 불도져 밟히는 부조리를 청산하는 것을 우리 인생의 과업으로 삼으면 어떨까?
인재를 죽여야하고 정적을 제거해야 하고 배타적인 경쟁의 질서에서 공생의 큰 비젼을 현실화하여 서로 피 흘리게 하는 모순과 음모, 불공평한 제도의 희생이 종지부를 찍는 거야. 그런 세상을 하나의 기업에서 구현하는거지.
당신과 내가 그 과업에 매진한다면 이 불완전한 만남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불완전한 만남이 주저하다가 이어지고 이래선 안되지 하며 청산을 결심했었다.
바람에 떠는 나뭇가지만 보아도 맘이 여려져 더욱 뜨겁게 포옹하게 되고
어느 화창한 날씨 인파가 붐비는 광장을 지나치는 날 모자와 선글라스를 깊에 눌러써야하는 처지가 한스러워 오열하며 헤어지면 그날 밤
사경을 헤메는 숨소리로 베갯속을 뜯었었다.
그 불완전한 만남이 열매를 맺으면 어이 되나요.
불완전해도 격이 안 맞아도 이제는 물러설 때가 없고 이제는 가야할수 밖에 없고
그러자면 온몸에 상처를 입더라도 거친 땅을 달리고 불길에 뛰어들어야겠죠
그렇게 지켜낸 열매가 또 누군가들을 갈증과 굶주림에서 구원해줄 양식이 된다면
늘 젖어있던 그들의 눈물자국도 미풍과 따스한 햇살에 말끔히 지워질 영광의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이별의 아픔이 깊게 깊게 골수를 파먹는 동안에도 원망과 저주를 삼켜가며 지난 날 순간들을 새록새록 되새겨 그림을 그리고 옷을 엮어간다면 어느날 그 만남의 인연 앞에도 작은 오솔길 하나 미소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 출장 가는 길 ]
결국 정호의 사직서는 반려가 되고 회사는 그에게 비행기표를 내밀며 5일간의 중동 출장 일정을 명했다.
정호는 오후 6시 두바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인천 공항 버스 정류장으로 나왔다.
사우디 젯다 전기 전력 박람회에 출장을 가는 길.
겨울 나그네가 된 남자는 잿빛 거리가 아닌 하늘 비행기에서 고독의 소나타를 부르게 되었다.
회사는 전력 에너지 사업에서 신재생 에너지 분야까지 확장을 꾀하고 해외판로를 개척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박람회가 좋은 시장 진입의 돌파구를 열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중동 최대의 전기분야 전시회일세. 50여개국 800여개의 세계적 기업들 관계자들과 최대한 많은 비지니스 상담을 해오게. 이 전력전에서 우리 회사의 이미지를 확실히 심어줘야 하네”
자신의 고집에 양보를 해준 장전무의 부탁을 다시 새겼다.
6시 반 비행기가 육중한 몸을 서서히 움직여갈 무렵 창가에는 지는 해가 토해내는 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길게 땅거미를 드리우고 있었다.
활주로를 박차고 공중에 떠오른 비행기 아래로 차들이 건물들이 산들이 점점 작아져 갔고 구름 층을 통과하자 저무는 태양의 표정을 반사하는 먹빛 구름들의 상기된 표정이 드넓게 펼쳐진다.
누군가를 공항까지 배웅하던 날 지상에 서서 하늘높이 작은 점 하나로 뉘엿뉘엿 아스라히 멀어져 가던 비행기를 향해 하염없이 시선을 던지던 상황을 떠올리며 그 상황의 정반대에 자리한 지금 순간이 경이롭게 여겨졌다.
지금은 비행기 안에 앉아 있는 자신 저 아래 육지에서 어느 누군가 선망의 눈빛으로 비행기를 주시해줄 사람이나 있을까? 싶었다.
비행 고도에 이르자 식음료가 배달되기 시작했고 정호는 캔맥주를 시켜 스스로 장도에 오른 순간에 건배를 들며 비행기 탑승을 그리던 시골 어린 소년의 눈으로 고향 전경을 그려갔다.
초등학교 등하교길 그 걸어가는 시간이 지루한 나머지 눈요기를 찾다 못해 구름을 바라보곤 했었다.뭉게 구름이 흩어지는 모양새로 사람 표정을 연상하며 시선을 하늘에 고정시키고 뚜벅 거리며 걷던 시간들이었다.
‘마음이 갑갑할 때 언덕에 올라 ~ 저 산 너머 하늘 아래 그 누가 사나?...’
5일 장터이던 그의 동네를 내려다 보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산 너머 세계를 또 얼마나 동경하곤 했던가? 그러나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금 그 먼 세계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최소한 이 순간 만큼은 추억의 우수에 젖을 틈 없이 본인의 어깨에 지워진 성과의 부담에 오히려 피가 끓을 수 있었다.
전시장을 무심코 지나치는 숱한 발걸음들이 유심한 관심자의 것이 되게끔 회사의 대표 출품작인 초고압 변압기와 초고압 차단기 모형을 설명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언사를 던져 주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박람회라는 그 넓은 세계에서 나를 주지시키고 협력과 구매를 유발할 수 있게끔 무공을 세우고 싶어 전투의 그 날을 고대하는 청년 장교가 된 기분이었다.
[ 동해안 여행 ]
정호가 없는 침대 한켠에 누워 현선은 꼬박 밤을 지새웠다. 다시 고개를 들려는 그녀의 두려움은 몇 개피의 담배를 피워 물어도 금방 사그라 들지를 않았다. 전화를 할까 수십번 망설였다. 국제 전화 요금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지금 시간쯤 고객과 중요한 상담을 할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한번 그를 받아들이자 그의 모든 것이 지저귐이 되어 현선의 맥박과 함께 울리기 시작했다. 출근을 하느라 그와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그의 소리가 그녀의 심장에 머리에 가득했다.
현선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이미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옷을 고를 때 그의 옷을 샀고 식탁에서 수저질을 할 때 그를 위한 반찬을 골라 얹어 주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 자신의 마음에 얹혀지는데도 이따금 그가 한 지붕 아래서 자기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자기만의 시간에 몰입할 때는 더할 나위 없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이튿날 일을 빨리 마쳐 놓고 이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기쁨에 들떠 정호에게 국제 전화를 걸었다. 하루만 지나면 만날 남자인데도 그의 목소리를 찾았다.
“ 자기야 ! 당신 입힐 옷을 사고 당신 입으로 들어갈 음식을 만들고
당신이 편하게 있을 집안을 청소하고 그렇게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 행복하다.
자기가 멀리 있는데도 당신 심장소리와 숨소리가 들리는 듯 해.”
정호의 출장 복귀를 손꼽아 기다리던 현선은 하얀 블라우스에 하얀 바지를 입고 집에 미역국을 끓여 준비 해놓은 뒤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정호의 출장 복귀를 자축하자는 핑계로 현선은 정호에게 여행을 제안했고 이튿날 이른 아침 6시경 동해안을 향한 출발 길은 차들의 정체됨이 없어 더한층 상쾌했다.
"우리 잠시 저기에 차를 세우고 쉬었다 갈까?"
정호가 가리킨 길 오른 편은 솔밭이 길게 이어진 공터에 벤치랑 그네가 있었다.
구멍가게에 들러 캔맥주 2개를 사들고 와 높이 치솟은 소나무 아래에서 함께 마셨다. 머리 맡에 파아란 하늘에는 고추 잠자리 한 쌍이 몸을 엮은 채 허공에 떠 하나로 흘러가듯 날고 어젯밤 폭우 뒤에도 살아남은 매미들의 울음소리는 한층 힘차게 들려왔다. 매미 울음 소리의 파장은 두 잠자리의 흐늘거림을 물결의 꽃잎처럼 만들고 있었다.
문득 세상은 자신이 보고 싶은 데로 보이고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바깥세상에 비치는 것은 자기 내면의 그림자인 듯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세상에 대입하게 된다.
유년시절을 바다에서 보낸 현선으로서는 바다라는 공간 앞에 서면 가슴 바닥까지 시원했다. 어린 시절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 집을 뛰쳐 나와 해변에 앉아 수평선을 한참이나 바라만 보고 돌아가던 기억이 있었다. 바다 앞에 서면 온 세상이 자기 자리를 찾아 앉은 듯 안정되게 느껴졌고 더불어 옆에 있는 사람의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을 듯 마음이 사뿐해졌다.
동해안 맹방 해변은 비교적 인적이 적으면서도 물이 깨끗해서 현선이 맘에 들어했다.
바닷물은 차가웠지만 뜨거운 해가 수면 위에 녹아 흐르며 그 온기를 현선은 인어가 되어 맘껏 들이켰다.
하늘이 미풍으로 내려와 바다를 간지럽히고 일렁이는 파도에 그녀는 유유히 둥실거렸고 그의 든든한 근육이 성벽처럼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입가에 맺히는 바다물의 소금 맛은 5대양을 돌아 6대주의 땅을 휘돌아 왔을 물 입자의 유구한 장정을 말해준다.
무구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그 물에 둘은 함께 잠겨가는데 하늘은 바람으로 바다를 일렁이고 바다는 밀물로 땅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세상이 하나인 것을 느끼며 그렇게 밤늦게까지 정호와 하나가 되어갔다.
바다의 무한한 에너지에 충전된 두 몸은 새벽이 다가오도록 서로에게 밀물이 되고 썰물이 되었다.
그날 낮에 보았던 잠자리라는 미물들이 연출한 통합의 대사를 그날밤 정호는 현선의 온 몸에서 재생시켰다.
도공이 진흙으로 도자기를 빚어내듯 몸과 몸이 서로 부드러운 뒤척거림으로 한 몸이 되고 있었다.
"당신이 한때는 중독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중독이라기 보다는 감수성이라고 하는게 옳을 듯해”
그러나 강아지들이 화근이었다.
들뜬 맘으로 시작한 피서지 기간 내내 차에 태워진 요크셔 테리어 제롬이와 푸들 강아지 아롬이는 서로 불안함을 느낀건지 자꾸만 주인의 자리로 가려고 했다.
운전에 집중해야 하니 그의 품에 그녀는 강아지들을 부탁했으나 아롬이의 출현에 민감해진 제롬이는 기어코 그녀 무릎을 차지하고서도 고개를 쳐들고 주인을 ㅤㅎㅏㅀ기 위해 그 무릎 위에서도 수없이 허둥거렸다. 급기야 그녀는 한팔로 애완견을 달래며 나머지 한 팔로 불안스러운 핸들 조작을 해야 했다.
그 위태로움에 마침내 정호가 짜증스럽게 제롬이를 낚워 챈다는 것이 그만 1년전 부러졌던 앞발을 도지게 하고 말았고 제롬이는 죽을 듯이 차안에서 깽깽 소릴 질렀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거 같아요. 내게 그리도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인 강아지인데도 한번 품어줄 줄 모르는 당신의 그 메마른 가슴이 공포스러워요"
현선이 그렇게 유감을 표했지만 정호는 그녀를 달래줄 만큼 섬세하지도 열성적이지도 않아 보였다.
그래서 무겁고 언찮은 기분에 눌려 있던 그 날 오후였다.
정호에게 집을 나가라고 다시 소리를 친 순간이 더 빨리 다가온 것은 전남편의 전화 연락 탓이었다.
그런 와중에 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 현선아! 너 그때 생활비 한다고 내 명의로 카드론 빌린 거 1천만원 고지서가 자꾸 날아온다.좀 갚아야할 때 되지 않았니?”
10년을 그렇게 보내고 그렇게 맘 고생시키고 일도 못하게 만들었고 온 삶의 무게를 지웠던 그가
살아갈 전셋집만 달랑 하나 부모님 도움으로 장만한 것 외엔 매달마다 아내로서 용돈을 챙겨줘야 했던 남편이라는 자격의 그 남자가 그토록 골수까지 빨아들이고 나서 거의 껍질만 남은 처지의 자신에게 빚청산을 요구하자 헛 웃음이 나오고 시퍼런 청춘 그렇게 다 소비한게 억울했다.
그 순간 정호도 불안하게 느껴졌다. 이 극진한 보살핌에 저 남자도 안주하며 자기 인생에 짐이 될 것만 같았다.
사랑이라는 이름만 올려 놓으면 왕관을 쓴 거 같은가?
남자들이 그렇게 외쳐대던 사랑이라는 말은 가벼운 종이에 쓴 글자일 뿐이었다. 전남편, 백교수, 손정호 모두 마찬가지였다. 실패한 결혼을 이혼 도장 찍으면서 깡그리 청산할 줄 알았는데 불행한 기억은 현재의 악몽이 되고 미래의 두려움으로 싸늘한 표정을 발톱처럼 드러냈다. 하필 이제 정호랑 새 출발을 생각하던 찰나에 전 남편의 문자가 날아와 그녀의 기분을 망쳐 버렸다.
더 이상 약한 남성 받아주는 강한 여성의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다.
10년을 한 약한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성의 투정을 받아주느라 지쳐왔는데 더는 똑같은 일은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정호를 만나고 마치 그 시간이 재현되는 것 같아 두려웠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헌신을 강요하는 남성들에게 지쳤다.
“너도 말로는 사랑을 장담하면서 그 말만큼 과연 성숙된 모습을 보였을까
그 사랑이라는 말처럼 상대방을 배려하고 온전히 감싸 줄 수 있었을까
나로서는 너로 인해 몇 달을 제대로 일을 못했어 사랑은 이젠 나에게 하나의 사치일 뿐이야
또 다시 누군가를 돌보고 그 공백을 메우고 그러고도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져나가는 느낌을 감수 할 수 없을 거 같아. 이제 쉬고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휴식을 취하고 싶어”
더 이상의 위선과 장난은 그만하자. 너의 보챔을 거절하지 못해 받아준 침상의 시간들이 백주 대낮에 얼굴이 달아 올라!’
정호를 내치고 이틀이 흘렀으나 현선은 출근을 할 수 없었다.
하나처럼 느껴지던 그가 떠난 자리는 악몽이 숨쉬는 듯 온 몸에 열이 오르며 아파오며 물도 마시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정호가 곁에 없는 침대가 낯설고 어색했다. 몇 번을 뒤척이다가 술을 두 모금 더 마신 후에야 간신히 잠을 청할 수 있었지만 그곳은 휴식의 세계가 더 이상 아니었다.
지나온 손정호와의 순간들, 그 고조된 말초신경들이 무의식 위에서 부상하여 그녀의 온 몸을 들쑤시는 열기의 도가니가 가수면 상태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어디야? 내가 지금 너무 아프고 힘들어… 와줄수 있어? “
그녀에 의해 내쳐지고 얼마가 지나면 그녀가 그를 다시 부르곤 했다.
두 시간 가량 지나자 그의 인기척이 현관문 앞에 이르렀다.
제롬이는 원수가 다시 나타난 양 짖으며 법석을 부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자 나타난 정호에게 현선은 안겼다.
현선의 맘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불안과 두려움을 정호는 전보다 억센 팔로 떠 안았다.
그래서 아랫목 이불속을 파고 들듯 그녀를 자꾸 찾아 들었다.
그녀의 체온 속으로 부벼 들며 그녀의 심장 속으로 녹아든다면 세상 누구도 무엇으로도 갈라낼 수 없다는 믿는 듯이 부벼 왔다.
그 시간 동안만은 그녀로부터 착한 둥이라는 말을 들을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젖먹이 아가가 물었던 엄마 젖에서 떠나려 하지 않듯 그의 몸짓은 회를 거듭할수록 도를 더해 갔다.
아마도 정호에게 있어 어쩌면 그것은 주술적 행위 같았다.
함께 있는 시간 동안 만이라도 그녀의 구석 구석을 기억하고 각인하면 공간적으로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자석처럼 서로를 향할 것 이라는 믿음을 행위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 두 분 사이의 미결된 정산 작업. 그것은 어쩌면 자신과 정호 사이의 숙제와도 비슷한 게 아닐까?
그냥 모른척 방치할수록 그 업보의 질곡을 커져가 또 다른 악연으로 하늘을 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새삼 느껴졌다.
[아버지 생신]
상을 함께 차려 드리고 언니랑 동네 목욕탕엘 갔다.
“누가 너를 마흔 중반의 나이라고 하겠니? 피부가 이토록 타실타실하니 여대생이라고 해도 믿겠다. 잔병없고 올곧게 예쁘장한 몸매를 물려주신 아빠 엄마가 고맙지?”
욕탕 안에서 언니가 현선의 다리 라인을 쳐다 보면서 부러워했다.
아이를 출산한 적이 없는 탓도 있지만 폭식과 간식을 모르고 자라온 축복 때문에 마흔 중반의 나이지만 20대 못지않게 타실 타실한 피부였다. 이렇게 잔병없고 올곧게 예쁘장한 몸매를 물려주신 엄마와 보살펴 주신 아버지가 새삼 고마웠다.
“엄마가 너를 임신했을 때는 외할아버지가 잡아다 주시는 연못의 잉어를 무던히도 드셨단다.
그 비린내 심한 잉어 고운 국물을 엄마는 한번도 싫은 내색없이 매일 같이 들이키셨지”
언니의 그 말에는 남다른 회한이 묻어 있었다. 사업에 실패하신 아버지가 저녁이면 어디서 술을 거하게 드시고 귀가하시던 시절 둘째 언니는 가게 일로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씻기고 밥해 먹이던 시절에도 아빠는 유독 현선을 아끼고 돌보셨다.
현선은 긴 수염 깊은 물속에 드리우던 잉어의 차분함과 진중함을 물려받은 성품에 여러 딸 들 가운데서 가장 희다고 동네 사람들 칭찬에 오르내리곤 했었다.
반면 언니는 그런 막내의 사랑을 받아볼 겨를도 없이 그 어린 나이에 부ㅤㅇㅓㄲ일과 빨래를 세탁기 없이 하곤 했었다.
돌아오는 길 시장 분식집에서 국수를 사먹고 있는데 식당 홀의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로얄제리와 양지버섯은 국내 식약청에 의해서 건강식품에서 퇴출. 글루코사민도 전혀 효과 없다고 식약청이 공식 발표했다는 보도였다.
“큰일이네. 저 내용이 매스컴을 통해 공개됐으니 엄마는 어떻하지? 건강식품 사업에 참여하고 계신 엄마의 그 단체가 호되게 된서리를 겪었을 텐데…”
그녀가 그런 생각에 잠겨 부모님 걱정을 하는 동안 큰 언니는 그녀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유치원 교사를 하면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결손 가정. 부모들이 서로 파탄이 나서 귀가 시간이 되어도 방치되다시피 하는 아이들의 춥고 초조한 표정들을 맞닥뜨리는 거란다.”
언니의 그런 모성애는 언중유골 같은 말투로 현선에게 쏠려왔다...
"난 네가 누구보다 의연하고 냉철하다는 걸 알어. 그러나 동정심에 호소하며 치근대거나 감성적 수사법으로 지저귀는 남성들 앞에서 네가 주저 앉는 걸 다시 보고 싶지는 않구나"
언니답지 않게 직설적인 충고를 하는게 아닌가?
속 썩이는 형부, 수월찮은 시댁 어른들 앞에서 큰 며느리 역할을 하면서도 그 언니의 동생 사랑과 걱정은 잔잔했다.
" 너
요즘도 그 사람 만나니. 동정심에 호소하며 치근대거나 감성적 수사법으로 지저귀는 남성들! 너라는 아이가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의 쓰레기들이야.
난 내가 행복의 길로 들어서길 빌어. 그 길은 한가지란다.
그와의 지냈던 과거를 빨리 잊는거야.
[ 송년회 준비 ]
송호림은 코리아 리더십 클럽에 하이파이 컨설팅을 매각했다. 그가 부사장 자리를 받는 것이 조건 중 하나였다.
기업체 임직원을 상대로 리더십과 성공 강의를 해오던 업체는 인재 알선업을 하부 사업본부로 자리매김했다.
현선의 면접 준비 특강은 코리아 리더십에서 비즈니스 프리젠테이션 강좌로 돌풍을 일으켰다.
학같이 우아하면서도 명쾌하고 깍듯한 그녀의 강의 역량에 반한 사장 조형묵은 그녀를 강의 보다 대외적 행사의 얼굴로 많이 자주 투입했다.
월요일 주간 영업회의에서 현선이 편두통에 시달린 것은 조 사장이 현선에게 맡긴 송년회 준비 건 때문이었다.
준비 위원회가 꾸려졌고 더 유명한 인사들을 더 많이 참석하게 만드는 게 조 사장의 관심사였다.
그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게 현선으로서는 호화 잔치의 꽃놀이패가 되어 웃음을 파는 일에 동원되는 것 같았다. 문득 어디론가 무인도 같은 곳으로 잠적하고 싶었다.
고개를 흔들면서도 그녀는 주섬 주섬 그간 강좌를 거쳐갔던 유명인들, 기업 대표들 명단을 한켠에 두고 그녀는 한분 한분 전화를 걸어갔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이번에 연말 행사를 마련했는데 꼭 좀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행사 안내장은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교육을 받아 인생이 크게 바뀐 역전담을 발굴하고 공유하는 자리가 절실했으나 그런 진솔한 사례를 수소문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조 사장 스타일에도 맞지를 않았다. 그에게는 정상급 인사들을 모으고 규합해서 산에 가고 함께 식사하고 골프치고 그렇게 회합의 이벤트를 성대히 하고 그 로열 맴버십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었다. 로열 클럽을 강화하고 CEO나 사회적 명망가 저변을 모으는 데 더 많은 열정을 쏟는 사람
강의 컨텐츠의 쇄신과 한 사람 한 사람 수강생의 변화 모습을 발굴하기 보다는 그런 로열 클럽 인사들의 인맥들을 증식시켜 파생 사업 모델을 꿈꾸는 사업가에 더 가까웠다.
결국 로얄 사교 클럽 하나를 더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송년회날 아침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빗던 현선은 거울을 고쳐 들여다 보았으나 그저께 미장원에서 한 머리가 마음에 안 들었다. 자기다운 얼굴 표정을 살려주기엔 어딘가 그늘져 보였다.
이런 느낌이라면 사람들 시선 앞에 당당히 나설 수도 당당한 영업도 힘들 것임을 그녀느 잘 알고 있었다.
현선은 미장원엘 다시 들렸다. 햇살이 밀려오는 창가 안에 기타 반주 음악이 헤어샵을 채우고 있었다.
“머리를 더 짧게 쳐주세요”
머리를 다듬어 새로운 자기를 만들면 세계 앞에 더 당당히 설 수 있었다. 자신 있는 헤어스타일로 생생히 자신을 드러내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은 꽃피는 것을 그 옛날 엄마가 운영하던 미용실에서 줄 곳 보아온 현선이었다.
아끼던 회색 정장 원피스를 꺼내 입고 왼쪽 가슴엔 백장미 브로치를 달았다.
사무실 여직원들은 행사장인 알라바마 호텔 리젼씨 룸 입구에서 참가자들 한분 한분 가슴에 꽃을 달아 드린다.
일부 로열 회원들께는 회사에서 마련한 선물이 든 작은 종이 가방을 나눠드리는 것도 챙겨야할 사항이었다.
실크 넥타이와 고급 다이어리 세트가 참가 기념품으로 전달되었다. 조 사장은 힘주어 만면에 웃음을 계속 유지한채 손님들을 맞이하며 각 라운드 테이블로 자리를 권했다. 참가자들이 채워지고 저녁 7시가 되자 예정대로 행사는 시작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밤 행사 진행을 맡은 전 현선 입니다..."
가까스로 강좌졸업생 대표인 동운 중공업의 배용만 사장님을 연단으로 모셔서 축사의 순서를 마련해 놓고 그녀는 황급히 연단 아래로 내려갔다.
" 다양한 사회적 문제점들이 불거져 나온 다사다난 한 해였습니다. `희망`의 메시지를 구현해 내는
선봉에 우리가 서야 하겠습니다. 장벽과 소통 단절, 차별이 만연한 이 사회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하도급업체 문제 등을 통쾌히 역전시킬 갈 우리들의 열정을 모아 봅시다.”
수강생 클럽의 대표인 배 회장은 스스로 준비한 슬라이드에 고개 숙인 한 남성이 빙그레 웃음의 얼굴로 넘어가는 내용을 담아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대출금을 상환할 능력이 없어 절망뿐이던 그에게 희망이 비친 것은 중소기업청 자영업자 재기 특례보증 혜택이었다.
“우리 주변에는 사업 실패를 경험한 사업자나 개인 회생자들이 제도권 금융 지원이 원천 차단돼 재차 악성 채무의 늪에 빠져 영영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요?”
그는 수강생 클럽이 모두가 성공과 열정의 촛불을 모아 전체로서의 큰 횟불을 만들어야 한다며 그 동안 쌓인 배출 인원들의 다양한 직위와 인맥까지도 조직화해서 필요한 입법까지도 촉구할 수 있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때를 놓칠세라. 조 사장이 연단에 마이크를 잡고 힘주어 말했다.
“장차 5년 안에 저희 리더십 클럽을 거쳐가신 배출생 가운데서 이 나라의 대통령 후보자가 나오기를 기원 드립니다.”
현선은 강의장에서의 만남을 사랑했다. 그녀가 수강생들의 영혼을 주무르는 칼 없이 부드러운 수술의 시간이었다. 소심하던 이들도 자신 있는 어조로 당당히 청중 앞에서 내면을 드러내는 변화를 보여주곤 했다. 그 경이로움은 서로에게 전이되고 종강식 때 수료증을 전달할 순간에는 한 명 한 명 목이 메일 만큼 감성 지수는 극에 달하곤 했다. 수 십명 수강생들의 클래스를 수 백 차례 진행하면서 남녀 연령대별로 상황 상황에서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열려가고 사람들 앞에서의 어조가 어떻게 변화하고 눈초리가 어떻게 날이 서 가는지를 숱하게 보아온 그녀는 분위기를 불지피는 급소들을 건드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강사로서 자신이 장악한 강의장이라는 세계에 초대한 사람들을 현선은 어루만져 왔다. 별들의 성단을 헤아리는 고성능 천체망원경 같은 직관의 능력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외모를 통해 그 내면의 어두움, 꼬이거나 어질러진 성정을 감지할 수 있었다.
성공했다는 40-50대 남성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그들 마음 한구석에 울고 있는 소년을 발견한다. 한번도 불타는 소년이지 못하고, 모범생,아들, 가장으로만 살아온 자의 슬픈 초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반은 관상쟁이가 된 듯 한눈에 사람의 내면이 거의 읽혀지고 세상이 훤히 내다 보이는 통찰의 고지에 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겉만 번지레한 헛잔치의 소음같았다.
자신이 세상의 탁류에서 함께 부데끼며 살기엔 너무 취약한 1급수에서만 살수 있는 은어는 아닐까 싶었다.
때론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 고객에게 좋은 면만 강조하며 구매 자극을 해야 하는 걸 어쩌겠나 싶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다 그런 거짓 잔치에 동원되는 게 아닐까?
자신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조 사장은 이어서 배현수 상무를 연단으로 모시면서 그를 해외펀드 판매의 신화적 존재로 인사 시켰다.
보성 증권의 배현수 해외펀드 사업 본부장이 송년회 연사로 초빙된 것은 물론 조 사장의 안배였고 그 계기는 백 교수의 추천이었다.
그 무렵 보성 증권에는 펀드를 사려 온 투자자들이 항상 줄지어 서 있었다.
때맞춰서 정부도 선진국형 국제수지 구조로 체질을 개선한다는 명분이 걸고 해외 주식투자에서 발생하는 차익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주는 인센티브를 주고 있어서 해외펀드 투자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과잉 유동성을 해소하고 원화 절상으로 인한 제조업의 피해를 막자면 해외투자 펀드를 활성화해야 합니다.”
송년회 자리에서 그는 정상에서 만나는 성공 동반자로서 이미지가 설정돼 버렸다.
그렇게 송년회 자리에서 배 상무의 펀드는 현장 즉성 판매고를 올렸고 조 사장과의 반대 급부로 애널리스트 들 대상의 프리젠테이션 역량 강화 교육이 런칭되어 현선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6개월간 예정됐던 에널리스트 교육은 1개월 만에 중도에 멈춰서고 말았다. 보성 증권에 직격탄이 날아온 것은 글로벌 금융 위기였다.
인스퍼레이션 펀드가 판매된 지 3개월 후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중국 주가 6000선의 절정기에서 기대를 한몸에 안고 출범한 인스퍼레이션 펀드는 리먼이 파산할 무렵 2000 의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휴지에 가까워져 버렸다. 그 화려하던 객장은 투자손실을 입은 고객들의 아비규환장이 돼 버렸다.
그의 CEO특강 초청 강연회에서 감명을 입고 투자했던 많은 기업주들.
그리고 그의 회사에 6개월 교육을 수주한 것을 감안해 현선이 벌려놓았던 가계 설계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 사건이었다.
[ 투자 설명회 ]
사우디 유학생 무글라 무함마드의 도움으로 정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아랍에미리트 마스타르 에너지 회사의 투자 설명회에 회사의 대주주인 사우디 젯다 왕세자, 셰이크 모하메드 알나하얀이 한국엘 왔다.
중국무역촉진위원회 초청으로 베이징에서 중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아랍에미리트 투자유치 설명회에 참석했던 그가 한국 출장을 돌연 결정한 것은 정호 때문이었다.
해외 투자를 급속히 확대하는 중국의 2조6천억 달러의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눈독을 들인 그는 아랍에미리트의 우수한 투자 환경을 설명하면서 항만을 비롯한 레저.관광, 사회 기반시설, 국제자유도시 개발 투자에 중국 기업들이 큰 관심을 가져달라고 주문했다.
그 자리에서 정호는 동운 중공업 중국 법인 소속으로 참석하여 발표자에 대한 질의 시간에 아랍에미리트의 녹색 산업과 그린 시티에 대한 정책 과제 등에 대해 예리한 질문을 쏟아 내었다.
그것도 아랍어,중국어, 영어를 섞어서 하는 말이어서 단번에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만나기 어려운 실력가인 세이크 모하메드였다.
3000억달러를 들여 2030계획을 야심차게 추진 중인 사우디 젯다의 핵심 인사와 나란히 서서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는 정호의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였다.
그녀가 한때 질타했던 그의 난삽한 인문학적 상식들은 그 거물급 인사에게 '이런 사람도 비지니스 무대에서 살아남는구나'라는 신기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게다가 수년간의 현지 근무 경험 덕분에 몸에 배인 그의 노련한 구어체 아랍어 구사에 개인적 호감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의 기묘한 인생 행로와 타협하지 않은 개성이 희소한 아랍어라는 특수 외국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실력을 허락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통역자 이상의 자격으로 그와의 사담 시간을 가진 덕에 왕세자 또한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들을 자극받아 한국 체류 일정도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2일을 더 연장하였다.
왕세자는 두바이를 능가하는 위락단지인 사디야트(Saadiyat), 야스(YAS) 섬 개발건을 투자 모집 아젠다에 새로이 올렸다.
" 여의도보다 큰 사디야트 섬에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스페인 구겐하임 박물관 분소 등 총 6개를 건설하며 생태도시 마스타르(Masdar) 시티는 석유 이후 시대(사우디 젯다는 석유매장량 6위국)에 대비한 건설 프로젝트입니다"
[ 이사 ]
정호의 아내에게서 경고가 들어왔다.
“당장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당신 책 다 고물상에 팔아 넘기겠어”
정호는 달려갔다. 현선은 돌아오라고 했다. 그는 책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집 밖으로 나가는 즉시 그 책들을 다 팔아버린다는 아내의 협박에 그는 너무나 무기력한 남자가 돼 있었다.
“정호씨 ! 이 작은 오피스텔이 공간이 좁아 사람을 돌게 하는 뭔가가 있는 거 같아.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 당신 책도 다 가져올수 있잖아?”
그의 책도 다 사라져 집안에 그의 빈자리가 생기면 그제서야 정호의 아내도 현실을 실감하고 맘을 빨리 접을 것이다.
“하지만 강아지 때문에 다시 돌아가긴 힘들어. 어울리지 않는 짐승과의 동거가 부조리하게 느껴져. 그녀석들 뭔 일 생기면 당신 더 힘들잖아”
그래도 그는 굽히지 않았다. 애견과 또 무슨 불상사가 날지 두렵다고 했다. 다시 돌아오라는 박현선의 거듭된 요청에 손정호는 애완견에 대한 알레르기를 들먹였다.
제롬이를 포기할수 있을까? 전화를 끊고 현선은 한동안 고민했다. 울다 만 목소리로 한참 후 그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그럼 우리 강아지는 베란다에서 키우자.."
함께 들뜬 마음으로 함께 살 아파트를 장만했다.
그와의 항해를 시작하기로 맘을 굳히자 그것이 결국 난파선의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한동안 가라앉았다.
그가 지닌 재산을 다 긁어 모았다. 상당수 재산을 이미 그의 아내가 빼돌려 놓은 상태여서 그 액수가 많지는 않았다.
다소 한적한 곳에 창문으로 신선한 산바람이 불어오고 발코니에 호수가 보이는 곳을 골랐다.
무리하게 전세 자금을 대출받아 그의 가진 돈 전부를 합쳐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전세보증지원을 은행에서 받을 수 있게
되던 날 찬란한 수평선 넘어 낙원의 기대감이 고개를 들기도 했었다.
정호도 지닌 재산을 다 긁어 보태었고 나머지는 무리하게 전세 자금을 대출받아 그의 돈과 합쳤다.
그의 손을 잡고 하이마트에 갔었다. 가전 제품과 살림 살이를 하나씩 구매하면서 과거 전남편과 신혼살림을 장만하던 때보다 더 많이 설레이고 행복하던 시간이었다. 쇼파며 책상이며 식탁이며 구경하고 선택하는 내내 그녀는 들떠 있었다.
홈씨어터에 큰 텔레비전과 세탁기 등을 장만할 때는 신혼의 꿈이 되기도 했었다.
소가죽 쇼파를 싸게 산 날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그에게 전화를 했다.
가재도구가 좀 과하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는 그녀의 모처럼 들뜬 기분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넓은 거실과 안방을 핸드폰으로 촬영해 그에게 수 차례 전송했다.
하루는 퇴근길에 가구 재고 처분이라는 현수막 간판을 보고 외근길의 박현선은 점포에 들렀다. 대리석 식탁을 그래도 싼 값에 샀다
무거운 대리석 식탁은 함께 갈 둘의 관계가 더는 파고에 멀미를 겪지 않고 갈 형상 같았다.
들뜬 기분을 가누기 힘든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했었다 . 듣고 있던 그는 가격도 백만원 넘게 준 식탁이라는 말에 그는 내심 좀 부담스러워 했었다.
그러자 그녀가 어깨를 피며 말했다 이렇게 무거워야 이 집에서 쉽게 안 뜨고 이사가기 싫어서라도 이 좋은 집 사려고 돈도 많이 벌겠지
그렇게 무거운 식탁은 둘의 새 출발이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을 상징하는 거라며 스스로 자신감을 더해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정호와 현선이 함께 식사를 할 때면 방안에서 갇힌게 억울하다는 듯 울부짖는 강아지였다. 그 짖음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개가 저토록 우는데 한번 가서 쳐다 보지도 않는거야?'
말없는 그녀의 침묵이 그에게 이렇게 나무라는 듯 했다. 정호는 수저로 국을 입에 떠 넣으면서 현선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저 강아지의 보챔을 언제까지 모른 척 할 것인지 시간을 재는 듯 둘 사이엔 정적이 감돌곤 했다.
주인의 사랑을 ㅤㅃㅒㅤ았겼다고 발악을 하는 강아지의 집착은 둘만의 은밀한 시간 중에도 그 존재를 당당히 드러냈다. 녀석은 기어코 베개를 디딤돌로 침대에 올라와 주인의 품 안에 기어들며 정호의 코앞을 스쳐 꿈틀거리곤 했다.
침대 아래로 내려 놓으면 늦은 밤이 되도록 울고 보채고 발톱으로 침대를 긁었다.
그 미물의 정호에 대한 거부반응은 숨을 쉬는 동작마다 발산되고 있었다.
녀석은 밥을 안 먹는척했다. 박현선만 보면 애처로운 눈빛으로 동정심을 구했다.박현선이 있는 자리에서 일부러 손정호를 피하는 자세를 더 드러내곤 했다.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기어코 따라 들어가려고 주인을 보채면서 정호에 대한 거부반응을 주인에게 드러냈다.
정호를 떠밀 칠 때마다 현선 입에서 절로 이런 말들이 반복돼 왔다.
"내가 너를 이렇게 방치했구나... 이 사람 때문에..."
그녀와 함께 거실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안방 드래스룸에서 짖는 소리를 던져왔다. 시간이 흘러도 짖었다.문을 열고 나오고 싶어서 앞발로 문을 긁는 소리가 자꾸 들렸다.
그녀는 말이 없었고 정호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며 또다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정호는 말도 행동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강아지의 그 보채는 소리를 외면하는 자신이 그녀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개는 개답게 커야 하는데 인간과 안방을 공유하고 있으니 개도 눈은 높아지고 바램만 커져가는 형국이었다.그러나 인간과 함께 될 수 없기에 개도 스트레스 받고 그걸 극복하기 위한 개의 몸부림은 나름 지능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너무 귀엽지? 생명덩어리잖아?!"
강아지에 대한 그녀의 아낌과 감수성에 정호는 뭐라고 호응을 해야할지 어색한 표정에 머물렀고 그 모습을 알아차릴 그녀가 자신을 따뜻하지 않다고 생각할까 봐 염려가 되었다.
[ 경찰 연행 ]
결정적으로 그 난파선에는 그의 제 구실을 못하는 법적인 아내마저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직업의 특성상 여러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박현선의 일터 앞에서 행패를 부리겠다는 공갈을 일삼곤 했었다.
안 그래도 순항이 어려운 배 앞에 갈고리 그물을 쳐놓고 독기를 품어대는 그녀였다.
그런 와중에 백 교수가 현선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리더십 교육을 한다는 걸 알자 백교수는 그녀가 담당한 교육과정에 수강생으로 등록해 왔었다.
그 연세에 삶을 깨우치는 비젼이 목말라서가 아니라 단지 그녀를 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여기 서 계시는 우리 강사님은 실은 제가 대학 때 가르쳤던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학생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배워보러 왔습니다.”
다른 수강생들 앞에서 그런 식의 자기 소개를 하며 그녀와의 관계를 공공연히 드러내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백교수의 전화는 전보다 더욱 빈도가 높아졌다
연락을 할 명분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번 강의때 해가야 할 과제가 말이야…”
수강생으로서 강사에게 상담을 해오는 형태로 연락해 오시는 것 까지 피해갈수는 없었다.
백교수는 그녀의 존경을 받고 싶어했고 사회적으로도 자신의 영향력이 작지 않음을 , 그 영향력으로 그녀의 업무에 도움까지 줄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그녀의 회사에 수강생 자격으로 출입했고 조 사장과 저녁을 같이 먹기도 하고 대학에 교육과정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현선은 정호가 법적인 아내에게 소송을
해서라도 그 이름 뿐인 관계를 제대로 청산해 주기를 박현선은 바라다가도 그런 자신이 남의 가정을 깨트리는 하이에나가 된 듯한 모멸감에 스스로 시달렸다.
정호는 내내 주저하는 듯 보였고 생살을 자기 손으로 찢지 못하고 산 사람을 자기 손으로 바다 풍랑에 던질수 없다는 주의 같았다.
그날은 몹시 예민함과 불안함의 극치에서
현선은 자기 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었다.
손정호를 차고 때리고 그의 책을 찢고 욕을 퍼부었다.
그는 도지는 위괘양의 배를 움켜쥐고 박현선에게 그만하자고 애걸하며 구석으로 물러서고 다른 방으로 숨기도 했다 하지만 박현선의 분노는
가실 줄을 몰랐다.
급기야 손정호는 경찰을 불렀다. 말려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계속 맞고만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공격성이 격발될까 두려웠다고 했다.
자기 딴에는 급하고 급했던 모양이었다. 박현선의 동생과 식구들에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던
그였다. 식구들은 그를 미친 놈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파출소에서 폭행 현장 신고를 받고 달려왔을 때 손정호는 박현선의 동생에게 통화를 연결시키면서 경관에게 부탁했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제발 식구 중 누가 한 분이 여길 오셔서 상황을 말려 달라고 경관님이 좀 말해 주세요. 안 그러면 부득이 신고 요청에 따라 언니를 체포할 수 밖에 없다는 말까지 해주세요"
그러한 손정호의 문제 해결 방법은 박현선의 분노에 불을 끼얹어 그녀의 주먹질은 격해졌고 결국 막다가 지친 정호는 그 늦은 밤 경찰서에
최종 연행 의사를 요청하고야 말았다.
그녀 생전에 좋지 못한 일들로 그
늦은 밤 파출소라는 공간에서 웅크린 적잖은 이들의 시선 앞에 노출되는 모멸감을 생전 처음 느껴야 했다.
[ 양세나 전직 ]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지 않고서는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자신의 주변을 배회하는 그의 몸짓이 있을 것만 같았다.
양세나가 전화를 해왔다. 생맥주 한잔 씩 비워가며 각자의 고백성사를 시작했다.
“남편 송호림과 별거를 시작했어.
건축업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몇번 여행을 다닌 덕에 거리에 나서면 여자들 옷보다 길가의 건물에 더 먼저 시선이 갔지. 건축학을 전공했어”
남자들 기세가 부글거리는 종합 건설회사에서 카자흐스탄과 일본 현장업무를 3년 마치고 회사 지원으로 디자인 대학원까지 마치고 어엿한 중간 간부까지 올랐던 그녀가 자동차 영업을 나선 것은 남편의 파산 때문이었다.
남편에게 사랑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친정 재산까지 쏟아 넣은 마당에 그를 회생시크는 것은 모두가 타고 있는 배를 구하는 일이었다.
현선은 정호와의 지난 동거 시절을 털어 놓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그가 신변을 정리하기로 하고 시작한 동거였고 1년 안에 결혼 하기로 했는데 합의 이혼을 약속했던 그의 아내가 생각을 바꿨지. 나는 그가 소송 이혼이라도 시도하는 성의를 보여주길 바랬지만 남의 이혼을 바라는 내 처지가 한심스러웠지”
법적인 아내가 너무 무지하고 미련해서 이대로 가면 결혼이 공멸에 이를 것을 두려워했지만 차마 자기 손으로 소송 이혼을 하자니 측은지심이 발동한다던 정호의 감정은 현선의 분노에 불을 끼얹었다.
현선의 아픈 고백에 함께 눈물 흘리던 양세나는 장차 계획을 현선에게 털어 놓았다.
양세나는 한국 개발원조 은행의 조사역 실무진과의 인맥을 활용해 해외 사업 투자 에이젼씨로 새출발을 했다.
경협개발실 인맥이 두터워 해외 사업 아이템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수 있었는 데다가 평소 시공사 해외 사업본부 관계자들과의 업무상 인맥을 활용한 프로젝트 수주에 큰 추진력을 발휘할수 있었다.
해외 사업 개발 정보를 시공사에게 전달하고 현지 발주처와의 조정을 통해 시공 기회를 알선하는 대가로 총 공사 금액의 일부를 수수료로 받는 사업구조였다.
물론 영어가 능통한 현선은 관련 서류의 핸들링은 물론 필요하면 현지 답사 출장에도 동행하는 구조였다.
"나 이번에 세르비아로 출장 가는데 함께 가지 않을래. 아픈 기억을 씻고 밝은 햇살에 살쪄보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세나가 친구 현선에게 제안했다.
그녀가 처음 취급한 프로젝트는 세르비아 공항 확충 공사였다. 당시 공항 시설은 포화상태였다. 시설 확충을 통해 체증을 해소하면 관광산업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였다. 주 정부는 이를 통해 인근 도시의 카지노 사업 번창을 도모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총리의 지시로 경제개발위원회 장관급 인사가 개발원조사업관련 일을 총괄하는 체제였다.
친구 세나는 개발 원조 차관에 의해 진행되는 현지 건설 공사에 대한 범위와 상세설계 및 평가지원 등에 대한 컨설턴트 과업을 맡고 있었다. 나아가 시공사의 입찰준비, 공사감리, 사업진행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세나에게는 처음부터 시련이 닥쳐왔다.
세르비아 공항 사업이 정부 내부 감사에 의해 전면 백지화되면서 어렵게 짜놓았던 판이 다 깨지고 말았다.
택지 개발과 주택 건설 사업을 무분별하게 벌여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된 세르비아 주택 공사의 파산을 시발로해서 수자원 공사가 고유 사업이 아닌 지열발전 사업을 추진하다가 감사원의 시정 지시로 백지화됐다.
설상 가상으로 사업 파트너였던 현지 에이젼씨가 놀이시설의 일종인 워터파크 사업의 이용 객수를 연간 50만명 이상으로 계상했다가 실제로는 그 절반에도 이르지 못해 경영난에 허우적거렸다.
의회 선거가 도래하면서 주먹구구식 타당성 조사와 마구잡이식 사업 추진이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 야당 후보들의 견제가 시발점이었다.
그날 밤 현선이 달려가 보았을 때 세나는 이미 만취가 돼 있던 친구는 희멀건한 눈빛으로 아픈 목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약속을 지킬것인가?
의심하는 것도 막연히 믿어 주는 것도 모두 어리석은 소행이라고 봐.”
"내일 해가 동쪽에서 뜰 거라고는 장담할 수 있겠지만 내일 주가가 어떻게 되고 환율이 어찌될 것인지는 모르잖아?
내가 고객에게 약속하는 안전 성실 시공은 나 혼자만의 의지로 되는 게 아니지. 많은 하청업체들을 조직화하면서 숱한 불확실성과 싸워야만 기한 내에 준공하고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어. 약속을 이행할 공급 라인이 길고 거기에 관여하는 제 3자 들이 많을수록 약속 이행의 확실성은 떨어질 거야"
세나의 논리는 그거였다.
그 양심은 믿을 수 있어도 상황을 통제할 능력은 계속 주시해야 한다.운전석에 그를 맡겨도 조수석에 앉은 나는 함께 전방주시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내일 갚을께라는 약속은 그의 양심과 의지가 있어도 상황이 변화무쌍하면 허사가 된다.
그녀는 다시한번 자문해 보았다.
자신은 그가 신변을 정리해 낼수 있을 거라고 진정 믿었는가?
과연 자신은 얼마나 전방 주시를 함께 했던 것인가?
세르비아 공항 확충 프로젝트가 공중에 떠버리고 시공사들의 참여가 무산돼 버리자 그동안 현지 출장이며 업무상 영업 비용은 고스란히 날려버리게 됐다.
그 때 현지 파트너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세르비아 남부 도시 모스타르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모스타르의 이슬람 교각 복구 프로젝트였다. 수익성 분석 보고서가 매력적이었지만 과거 잔해들을 생존자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라 현지인과의 직접 대화 소통이 긴요했다. 세르비아 현지어를 근접하게 구사하는 인원이 필요했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정호에게 세르비아어는 유사한 슬라브어족이었다.
동운 엔지니어링이 참여를 희망했고 결국 동운이 출장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세르비아행 비행기에 양세나, 현선, 그리고 동운 직원 자격으로 정호가 동행했다.
특별히 한국 개발 은행의 유상 차관에 의해 진행할지 여부에 대해 그녀는 현장 실측을 통해 결정을 내리기고 돼 있었다.
높이 20미터 이슬람교각은 1993년 유고슬라비아 내전 이전까지만 해도 다이빙 대회의 명승지로 이름이 높았었다.
내전이 발발하자 가톨릭계 세르비아 군은 이슬람 세력의 거점인 이곳을 고립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교각을 폭파시켰다.
"저 이슬람 교각을 복원하는 것은 우리의 옛 평화를 되찾고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데 상징적 의미가 커요"
세르비아 문화재국 관리의 음성은 간절했다.
폭파된 교각의 잔해들은 돌덩이 하나 하나 번호가 매겨졌고 생존 주민들의 공청회를 통해 기억이 모아져 복구를 위한 파편 정리가 완료돼 있었다.
"교각 중심에서 좌우로 이 정도 비슴하게 다리가 휘어져 있었어요"
한쪽 다리를 잃은 남편을 부축하고 나온 키가 제법 크고 은발의 머릿 결을 지닌 여성이 옛날 교각 사진을 배경으로 한 자신과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복구반의 작업 회의에 불려 나왔다.
모스다르에는 이슬람교도, 동방 정교, 가톨릭교 제각기 다양한 신앙을 가진 세르비아 , 세브리아, 보스니아계가 살고 있었다.
큰 하천을 사이에 두고 계곡에 촘촘한 촌락들 여기 저기에선 교회당 소리, 모스크의 독경 소리, 정교회의 기도행렬 소리가 다양하게 울려 나오는 곳이었다.
“혈족도 종교도 다들 달랐지만 다이빙 대회에서는 모두가 한 마음이었지요."
소피아라는 그 중년의 여성은 교각의 재건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1992년도 대회에서 마을 대표로 참가했던 가톨릭 교도인 그녀가 다이빙 후 입수시에 충격을 받아 혼절하자 그녀를 물에서 구하고 인공호흡을 해준 사람은 이슬람교도인 현재의 남편이었다.
둘의 결혼식은 이슬람 교도인 남편 가풍을 존중해 이슬람 식으로 거행됐지만 친정 식구들 하객 중 누구도 거부감을 드러냄 없이 함께 어울렸다.
그렇게 공존의 삶이 있던 시절은 1년 후 내란으로 참극을 맞이했다.
서로가 다른 군복을 입고 상대방에게 총칼을 들이대는 비극이었다.
그날 사건에 대해 기억이 닿자 다리를 잃은 그녀의 아버지의 눈에는 피눈물이 맺혔다.
“우리는 모두 버스에 태워져 한동안 끌려갔지
바로 이 모스다르 이슬람 교각 아래 강변에 도착해서 모두 내리게 하더군
강으로 들어가라고 해서 허리까지 차는 곳까지 들어가게 하더군
그리곤 골프채로 한 명씩 뒷통수를 내려쳐가는 데 맞은 사람은 물에 고꾸라지고 선혈만 낭자해질 뿐 고개를 들지 못했지
1991년도 모스다르의 비극을 들려주는 그의 목 메인 증언에 현선도 눈물을 흘렸다.
해마다 태양이 찬란하던 여름 이슬람,가톨릭,동방 정교회 등 신앙과 혈족은 달라도 다이빙 대회라는 이름 아래에서 화합과 공존의 장이 되어왔던 이 사랑하는 강에서 무참한 살륙이 자행되는 순간이었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골프채 소리에 둔탁하게 깨어지는 두개골 소리와 물속에 파묻히는 비명소리들.
물 내음에 코로 번져 들어오는 진해져 오는 피비린내들
자신 차례가 임박해왔음을 느끼며 노인은 마지막으로 노래를 불렀다.
Bella Ciao , Bella Ciao
순간 골프채가 잠잠해졌다.
보스니아군 우두머리는 웬일인지 학살 집행을 중단시켰다.
나중에 안 사연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노인과 함께 수류탄 2개, 총 한 자루를 받고 43년도 베오그라드 유격전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였다.
아버지의 무공담을 들으며 자랐던 그는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심경의 변화를 느꼈던 모양이었다.
히틀러 독일군에 맞서 청춘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결전의 길
그 두려움과 의리를 나눴던 노랫가락이 그에게 일깨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세계와 세상의 갈등에 대한 새로운 지도가 현선의 머리에서 피어날 때였다.
“지난번 세르비아 사업의 실패 원인도 당시에 현지 건설 전문지나 관보를 해독할 수 있었더라면 미리 감지할 수 있었던 정보였어.”
그렇게 말하며 세나는 정호의 이번 동행을 몹시도 다행스럽게 여겼다.
한숨을 쉰 현선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잠시후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선 현선은 창가로 다가 노을 없는 일몰을 쳐다 보며 자신에게 일렀다.
‘ 우리가 살아갈 날이 얼마나 된다고
보고 싶은 이 보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는 그런 어리석은 일은 멈추자’
현선은 예전의 결심을 되새기며 정호를 안았다.
이제는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이 붙어 있어야지만 헤쳐갈 수 있는 격랑이 앞에 넘실거렸고 그 바다를 건너서 많은 이들을 구원해야할 인생의 미션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괴롭히던 자괴감을 압도하는 사명감이 그 사랑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허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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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장문이네요 다시한번 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