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집 『육사시집』, 1946)
♣작품해설
윤동주와 함께 일제 암흑기의 2대 민족 시인이다 저항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육사는
1935년 『신조선』에서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1937년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는 등,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성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의 시작 발표는 주로 『조광(朝光)』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 활동 못지않게 독립 투쟁에도 헌신,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으며, 40세에
북경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1935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 중에
씌여졌는데, 이 때는 그가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던 때인 만큼 광활한 대륙을 배경
으로 한 침울한 북방의 정조(情調)와 함께 전통적인 민족 정사가 작품에 깃들어 있다.
대표작인 「광야」에서 보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 치하의 민족적 비운(悲運)을 소재로 삼
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점
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 시는 육사의 확고한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현실 극복 의지가 예술성과 탁월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자기극복의 치열성에 바탕을 둔 초인 정신과 투철한 현실인식
에서 출발하는 지사(志士)의식, 그리고 순환의 역사관에 뿌리를 둔 미래 지향의 역사
의식 등이 종합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15행의 5연시로 과거(1~3연), 현재(4연),
미래(5연)의 시간적 추이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데, ‘까마득한 날’에서 ‘다시 천고의 뒤’
까지의 시간의 흐름은 조국의 현실을 ‘광야’로 상징한 역사의식의 표출이다.
1연에서는 천지가 개벽하는 태초의 상황을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는 부정적
설의법을 이용하여 광야의 원시성과 신성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2연에서는 활유법을
구사하요 광야의 광활하고 장엄한 모습을 역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3연에서는 신성한 공간인 광야에서 태동한 우리 민족사의 유구한 역사와 문명을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라는 동적 이미지로써 보여 주는 한편,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신 지고’에서는 시간적 개념인 ‘계절’을 ‘피어선 지고’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감각화
하고 있다. 4연에서는 일제의 압제를 상징하는 ‘눈’과 조국 광복의 기운이다 온갖 폭
압에 맞서 싸우는 절조(節操)인 ‘매와 향기’를 대립시킨 가운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는 미래에 대한 굳은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매화 향기 홀로 아득
하니’의 ‘아득하니’는 ‘멀다’의 뜻이 아니라, ‘그윽하고 은은하다’의 의미이며, ‘노래의
씨’는 가혹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생명의 의지로, ‘씨’에 함축ㄷ히어 있즌
자기희생적 이미지를 통해 화자의 극복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한편, ‘가난한’이라는
수식어는 자기 겸손의 표현이기보다는 냉혹한 현실 상황에서 홀로 행하는 행동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 5연에서는 새 역사에 대한 소망이자 조국 광복에 대한 굳은 확신을 통하여
미래 지향의 확고한 역사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암담한 현실 상황에 화자가 뿌린 ‘가
난한 노래의 씨’를 수확하여 ‘목 놓아’ 노래 부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바로 불행
했던 역사를 몰아내고 온갖 질곡과 고통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항 찬라난 민족문화를
꽃 피울 인물이다. 그런데, 그 ‘초인’의 도래는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꽃」에서의 ‘
마침내 저버리지 못랄 약속’과 같은 확고한 믿음임을 ‘초인이 있어’에서의 ‘있어’를
통해 알게 해 준다.
따라서 이 시는 ‘광야의 원시성·신성성’ → ‘광야의 광막성’ → ‘민족사의 태동과 개
척’ → ‘현실 인식과 선구자 의식’ → ‘초인 정신과 예언자적 역사의식’의 구조로 파악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육사의 투철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지사적·예언자
적 기품과 단호하고 강인한 남성적 어조로써 신념에 찬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을 노래
한 민족사의 정화(精華)라고 할 것이다.
[작가소개]
이육사(李陸史)
본명 : 이원록(李元祿), 원삼(源三), 활(活)
1904년 : 경북 안동 출생
1915년 예안 보문의숙에서 수학
1925년 형 원기(源祺),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
1926년 북경 행
1927년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대구 형무소에 3년간 투옥됨
이 때의 수인(囚人) 번호(264)를 자신의 아호로 삼음
1932년 북경의 조선군관학교 간부 훈련반에 입교
1933년 조선군관학교 졸업 후 귀국, 이 때부터 일경의 감시하에 체포와 구금생활 반복
1935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여 등단
1943년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사망
시집 : 『육사시집』(유고시집,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