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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님들의 이야기 스크랩 마음의 법칙 (2) / 혜원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혜인 추천 1 조회 189 12.08.18 08:30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마음의 법칙 (2) / 혜원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마음의 법칙 제 3 화 - 깨달음이 시작이다(마음의 거울) 입니다 물을 찾는 물고기여 찾는 물은 그만 두고 마시고 있는 물이나 가져오게 제 1 화에서 물을 찾는 물고기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기가 물밖에서 물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물을 떠나서 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어떻게 해야 물을 찾을 수 있을까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모르는 것을, 몰랐던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무지(無知)를 깨뜨린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이라는 이 물건을 바르게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마음의 작용은 아는 것 입니다. 마음은 스스로 아는 존재이지만 그 안다는 것은 도구를 통해서 전달되고 또 전달받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마음이 사물을 보고자 하면 눈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봅니다. 듣고자 하면 귀를 통해서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냄새는 코를 통해서, 말은 입을 통해서, 감촉을 느끼는 것은 몸의 신경을 통해서 합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것을 우리는 보통 '보고 안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귀로 듣고 안다,냄새 맡고 안다, 말하고 안다, 느낌을 안다는 표현이 있씀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 가운데 이렇게 눈 귀 코 혀 입 몸을 통해서 하는 마음의 작용을 보통 안다 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이란 본래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본래 아는 것 자체라면 마음 스스로가 보고 듣고 말하면 될텐데, 왜 굳이 눈을 통하고 귀와 입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는지 새삼 의문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참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말입니다. 다음은 마음의 작용 가운데 의식작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보통 앞에서 든 눈.귀.코.혀.입.몸은 마음이 육체라고 하는 도구를 통해서 작용을 일으켜 쓰는데 비해서 정신적인 도구를 통해서 하는 마음의 작용이 바로 '의식'입니다.의식이란 한 마디로 마음이 내리는 판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생각이라고 하면 더 이해가 빠르겠군요. 칠정(七情)이라고 해서 사람에게 의 일곱 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겁고, 사랑하고 미워하고,욕심내는 것 등을 말하는데, 이 칠정은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눈.귀.코.혀.입.몸을 통해서 작용한 결과로 얻게 되는 생각입니다. 가령, 불을 만지다 손에 대이면 뜨겁다고 느끼면서 화가납니다. 그리고 불은 뜨거운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다시 불을 만지게 되면 훨씬 조심하게 됩니다. 마음은 이러한 과정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함이란 바로 이러한 칠정을 통해서 판단하는 사람의 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마음은 일체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라고 얘기했습니다. (일체유심조를 기억하시죠?) 지금 창 밖으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도 마음이 만든 선물입니다. 수천 수억만개의 눈송이는 단 하나도 똑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같은 하얀 눈(雪)으로 보이는 것은, 같은 업(業)을 갖고있는 수천 수억만개의 마음들이 같은 업권(業圈)에서 비슷한 마음의 작용을 한 결과로써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구에 태어나고, 대한민국에 태어나고,경기도 포천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구라는 같은 업권, 경기도 포천이라는 같은 업권의 비슷한 업을 지은 결과로 여기에 태어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정과 무정이 개유불성이다(有情無情皆有佛性)." 당시에는 인도말로 하셨겠지만 이렇게 한문으로 번역된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앎이 있는 것이나 앎이 없는 것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앎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사람,동물(세포,박테리아 바이러스등등),식물등의 마음은 아는 작용이 있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종족을 번식하고,싸우고,위로하고등 참 많은 마음의 작용이 있습니다. 다만, 식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생각이 거의 없으며, 세포나 바아러스등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지만 생각이 아주 단순합니다. 그러다가 곤충 새 포유류등으로 올라 오면 생각도 다양해지고 움직임도 훨씬 빨라지지요. 인간은 어떻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앎을 보통 지식이라고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쭐대는 인간은 생각이 다양함을 넘어서 너무 복잡합니다. 인간은 그 앎이라는 생각의 도구를 아주 잘 활용해서 우조선을 타고 달나라도 가고, 컴퓨터도 만들고, 수천미터 바다밑도 다닙니다. 그러나 가공할 만한 살생무기를 들고 서로 죽이는 전쟁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있습니다.너무 발달된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되레 피곤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유정이란 이렇게 앎이 있는 존재,생각할 줄 아는 존재를 말합니다. 무정이란 무엇일까요? 돌멩이,흙,광물질,물 바람등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물질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함부로 취급하는 이러한 물질들도 다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돌멩이, 물 , 쇳덩이에게도 사람과 같은 마음이 있다니, 믿어집니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돌멩이는 마음은 있으되 그 마음의 작용이 거의 완벽하게 멈춰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부처님은 무기(無記)라고 하셨습니다. 기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돌멩이는 백날을 때려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유정무정이 다 개유불성이라고 말씀하신 궁극적인 의중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면 바로 오늘의 주제인 '깨달음'에 아주 가까이 간 것입니다. 마음 밖에는 마음이 없다. 마음을 떠나서는 단 한 물건도 설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오직 마음 뿐입니다. 그러니 이 삼천대천 세계의 삼라만상 그 어떤 것이라도 마음 아닌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만으로 꽉 차있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는 물질세계란, 업따라 윤회를 거듭하면서 몸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어 옷만 갈아 입을 뿐 그 근본은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의중입니다. 이 부처님의 말씀이 분명히 이해가 된다면 이 산승(山僧)의 넋두리가 오늘 헛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마음이란 어떤 물건인가를 살펴 볼 차례입니다. 먼저, 함허득통(含虛得通) 선사라는 분의 금강경(金剛經) 설의에 나오는 게송을 보겠습니다.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과 모양이 끊어졌고 옛과 이제를 꿰었으며 한 티끌에 있으되 온 누리를 삼켜버렸다. 안으로는 뭇 묘함을 머금었고 밖으로는 뭇 사물과 일에 응하면서 하늘과 땅과 사람에 있어서 이것이 주인이고 일만 가지 모든 법에 이것이 왕이로다. 넓고 벽 없음이여 그 비할 것이 없고 높고 끝없음이여 그 짝할 것이 없도다. 신묘하지 않은가? 허리를 구부리고 펴는데 있으며 은은히 보고 듣는데 있으니 현묘하지 않는가? 하늘과 땅보다 먼저여서 그 비롯함이 없고 하늘과 땅이 다 없어진 뒤에도 그 마침이 없으니 있다 할 것이냐 없다 할 것이냐 나 모르겠다. "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습니까?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을 나에게 보여주세요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마음을 보여 주겠습니까? 모양도 없고 어떤 빛깔도 없는 이 마음을 보여줄 재간이 있습니까? 지금 이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또 생각하면서도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물 속에 있으면서 물을 찾는 물고기의 처지와 무엇이 다릅니까? 앞에서 마음을 떠나서는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동서남북상하 그 어디를 둘러 봐도 온통 마음뿐인데, 마음을 보려고 하면 마음을 결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사라진 것입니까? 아니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 마술을 부린 것입니까? 마음은 한 번도 여러분 곁에서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마술을 부려서 흔적을 지운 것도 아닙니다. 마음은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태어난 적도 없고, 멸해서 사라진 적도 없습니다. 마음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마음의 실다운 모습(실상實相)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비슷함을 지닌 것이 허공입니다. 허공에 모양이 있습니까? 허공이 빛깔을 가지고 있습니까? 모양과 빛깔이 없는 허공이기에 허공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허공이 없는 것입니까? 만약 허공이 없다면 바람도 번개도 구름도 아니 이 산하대지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단 5분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무정한 물건으로서 가장 큰 것이 바로 허공입니다. 유정한 물건으로서 가장 큰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허공이고 허공이 마음입니까? 허공도 마음이 만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허공은 스스로 아는 그 앎의 작용이 없습니다. 마음과 허공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스스로의 앎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제 마음을 깨닫는 얘기를 하겠습니다.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비록 두 손으로 감싸서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써 말로써 보여 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을 마셔본 사람만이 그 물의 차고 더움을 말해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물에 대해서 오래 연구하고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물을 직접 마셔본 사람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깨달음은 연구하고 생각을 많이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도 안됩니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있다는 말일까요? 물을 찾는 물고기가 밖에서 물을 찾고자 하는 생각을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 밖에서 물을 찾고자 하는 뒤바뀐 착각을 쉬어 버리기만 하면 그 고기는 즉시 물을 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꿈속의 몸을 나로 아는 착각을 벗어나면 마음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꿈은 내 마음이 전개한 능력의 작용이지 실재 있는 세계는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내 육체도 마음이 부려쓰는 도구이지 몸이 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몸을 이루고 있는 눈귀코, 팔다리는 나와 가장 가까운 인연들이 내 마음을 따라 모인 것입니다. 그것들도 또한 각각의 마음이기에 인연이 다하면 제 갈길로 가지요. 죽음이란 모였던 몸의 인연들이 각각 제 갈길로 흩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되십니까? 몸이 나의 실체가 아니라는 이 사실에 분명하다면, 몸이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마치 꿈속의 세상을 실재 있는 것인양 착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반야심경( 般若心經)에 "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轉到夢想 究境悅磐)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꿈속의 뒤바뀐 생각을 여의기만 하면 곧바로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실상(實相:실다움)이 보름달 처럼 완벽하게 드러나는 그 찰나를 가리켜 '깨달았다 즉, 견성(見性)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찰나간의 체험이지만 여러분도 그러한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몸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잊고 하늘도 땅도 사라져버린 그 순간! 그러한 때, 이러한 경지를 뭐라고 이름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지금과는 다른 체험. 오직 마음이라는 둥근 달이 홀로 빛나는 것을 안다면.....,얼마나 쉽습니까? 오죽하면 세수하다 코만지기 보다 쉬운 일이라고 했겠습니까? 서산대사와 소요스님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할테니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는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소요선사란 대강백(경전을 강의하는스님)스님이 찾아 와서 마음을 깨닫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서산대사는 그 날로부터 소요스님에게 공양주노릇을 시키고, 부목,채전,원두 심지어는 시봉일까지 시키면서 부처님의 법문은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던 소요스님은 어떻게든 법문을 물어볼려고 했지만 서산대사는 그때마다 밥해라 빨래해라 나무해라등 물을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끔 불러다 능엄경(楞嚴經)한 구절씩만 말해주었지요. 그러나 소요스님에게 능엄경은 자기가 학승들에게 강의하던 달달 외는 경전이라서 귀에 들어 올리가 만무했지요. 제자보고는 궂으일만 가려 시키면서 당신은 서늘한 평상에 누워서 낮잠이나 자는데, 소요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웃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걸 보면 깨달을 수 있나해서 어깨너머로 엿보기라도 하면 얼른 주머니속에 숨겨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깨달을 날만 학수고대했는데 영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10년 째 되던 해, 드디어 소요선사는 떠나기로 작정하고 하직인사를 합니다.그 때 인사를 받고 아무 말이 없던 서산스님은 주머니에서 때묻은 그 책을 주면서, 혹연 길을 가다 살길이 망막해지면 펴셔 보라고 당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시신은 네가 화장할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하산을 하던 소요스님은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그만 학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고갯마루에서 혹심한 열과 고통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문득 서산대사가 주었던 그 책이 생각나서 얼른 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있었습니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자여 찾는 소는 그만 두고 탄 소나 끌고 오너라 이 시를 본 순간 소요스님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없어지고 하늘 땅도 온통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아!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야! 죽어가던 소요스님은 어느새 환희의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서산스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서산스님을 뵙기 전에는 이대로 죽을 수가 없다는 분심이얼마나 컸던지 일시에 그 병이 다 나아버렸습니다. 일보일배를 하면서 서산스님에게 다시 가니 서산스님은 이미 앉아서 열반에 든 후였습니다. 서산대사의 예언대로 소요스님은 서산대사의 시신을 정성껏 다비해 모셨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 여러분은 어떤 교훈을 얻었습니까? 첫째는 ,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그 지극한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깨달음에는 반드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인가(印可)를 받은 스승의 지도가 없다면 혼자 깨닫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설령 그러한 체험이 수 십번 있었다 해도 그것은 바른 견성이 아니라 십중팔구 식견(識見:아름알이)에 놀아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반듯이 깨닫고자하는 지극한 간절함이 없다면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지도를 한다해도 방문의 문고리를 열고 방안을 들여다 보는 사람은 자기자신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눈이 내린 세상은 은백의 비단을 펼쳐 놓은 듯 깨끗하고 맑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맑고 깨끗한 물건입니다. 업으로 물들어져서 그 순수함을 잃어버렸지만 그 근본은 변함이 없습니다. 마치 더러운 똥통에 황금이 들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황금은 몇 천년이 지나도 그 순수한 황금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 마음을 내가 깨닫는 다는 것은 참 우수운 일입니다. 거울속의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있씀에 안도하는 것과 같은 꼴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거울로, 알고자 하는 내 마음을 다시 비춰 보지 않는다면 깨달음이란 얻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 바로 시작입니다. 무지를 깨뜨리는 시작이고, 바른 수행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시작이고, 성불의 시작인 것입니다. 나무 비로자나불 나무 노사나불 나무 석가모니불 마음의 법칙 - 제 4 화 : 마음의 그림자 ,업(수미산을 넘다) 청정한 마음이 한 번 구르니 황금은 빛을 더하는데 무수한 사람들 빛을 쫓다 넘어지네 그 빛 남의 것 아니건만 밤낮으로 따로 구하니 하루하루 고단함이여! 업장은 수미산 처럼 쌓이고, 윤회의 물레방아는 멈추지 않네. 마음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고 ?습니다. 오직 마음뿐임을 믿는 것이 진정한 부처의 종자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의 그림자라고 해야 옳습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있는 이 이웃과 아주 오랜 동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놈은 심술도 잘 부리고, 화도 잘 내고, 욕심은 날밤을 새워도 그칠 줄 모릅니다. 웃고 울고 모난짓을 잘 하고, 어느때는 자비스런 적선도 하려 들고, 우쭐대기를 좋아하지만 감동이 넘치면 바다와 같은 아량이 넘치기도 합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 업(業) "이라는 친구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말 보다 더 많이 듣게 되는 불교의 감초, 아니 뜨거운 감자 아닐까 합니다. 업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업은 허공처럼 모양과 빛깔이 없습니다 . 만질 수도 없고 묶어놓을 수도 없지만, 시시때때로 우리의 마음에 간섭을 하고 있으니 그냥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업에 관한 단어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업장 ,업력, 업풍, 업권,업식,업보,업해 등 한결같이 부정적인 말들입니다. 이러한 업이 어떻게 생겼는지 속시원한 대답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업을 알려면 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일체 모든 것을 만드는 창조주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일체유심조인 마음은 본래 광명(光明)그 자체입니다. 광명이란 밝음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런 빛이 아닙니다. 꿈 속에서 보는 빛이 색깔있는 빛이 아니 듯, 마음의 광명이라는 것도 어떤 색으로 나툰 빛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빛이란 밝게 아는 것, 즉 지혜(智慧)를 의미합니다. 그 지혜가 밖으로 드러난 상태를 광명이라 이름지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밝음 즉 지혜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는 상태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일컬어서 본래의 마음, 태초의 마음,위음왕불(威蔭王佛)이전의 마음, 즉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은 어둠도 밝음도 아닌 '본래 있는 그러한 마음'을 말합니다. 이 '무명(無明)'이 바로 업의 근원입니다 이 무명을 쌍암쌍명(雙暗雙明)이라고도 하는데, 한 티끌 묻어 있지 않은 청정한 마음은 가장 순수한 어둠이자 또한 가장 순수한 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무명(본연한 마음)이 한 번 그 지혜의 능력을 굴리면 빛이 되고, 그 능력을 거두면 어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은 마음의 손등과 손바닥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있는 그러한 마음 스스로가 바로 지혜이자 능력인 것입니다. 청정법신(淸精法身) 비로자나불은 바로 이러한 마음을 말합니다. 이제 업이 생기는 과정을 알아 보겠습니다. 이 무명(마음)이 한 번 지혜의 능력으로 빛을 발할 때, 마음은 스스로 이 빛을 보고 즐깁니다. 그러다 그 빛을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다가 취하게 되고, 취할려는 마음이 애착이 되면서, 이 빛을 소유하고자 하는 탐심이 생깁니다. 탐심이 극에 달하면 이로 인해서 마음에 어떤 경계가 생기고, 그 경계를 밖에서 온 것인양, 실재 있는 것인양 착각하는 탐심이 지속되고 거듭 반복되면 어느새 모양(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경계에 떨어진 마음은 청정한 자신의 본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끝없이 윤회를 거듭하면서 경계를 쫓고, 수 없이 많은 경계를 쫓는 다른 마음들과 서로 다투고 돕고 주고 받으면서 이제 완전한(?) 형상(形像)을 만듭니다. 이것이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생기고 ,이 우주(宇宙)가 생긴 최초의 원인입니다. 업이란 이렇게 근본마음을 잃어버린 청정한 마음이 탐심(貪心)이라는 원인(源因)인을 양분삼아 과보(果報)라는 결과를 나타내는 힘을 말합니다. 업은 그 자체가 없지만 감싸고 도는 안개처럼 마음의 작용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업이 한 번 결정되면 좀처럼 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의식주는 물론 희노애락애오욕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좌지우지합니다. 인간관계가 꼬이는 것도 마음을 옥죄고 있는 사람들의 업력(業力)이 서로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업은 마음이 짓는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의 거의 모든 부분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업을 짓는 과정을 여러분은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말입니까? 바로 꿈을 꾸면서 마음의 능력이 어떻게 펼쳐지고 거두워지는지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꿈 속에서 보는 빛은 빛이 아닙니다. 꿈 속의 어둠은 어둠이 아닙니다. 그것이 실재하는 빛이라면 여러분은 꿈을 깨고도 그 빛을 봐야 하지만 꿈을 깨고나면 빛도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좋아하고 싫어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욕심내는 등의 온갖 일을 다 합니다. 단 5분을 꾸는 꿈속에서 한 달,아니 1년의 긴 시간을 여행하고 돌아 오기도 합니다. 꿈꾸는 단 5분의 시간에 마음은 수 많은 업의 세상을 건립한 것입니다. 다만 꿈속에서 짓는 업은 내 마음이 만든 세계이므로 과보는 없습니다. 꿈을 꾸는 것도 마음이 꿈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스스로 무궁무진한 능력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고 믿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좋아하고 애착하는 마음으로부터 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마음이 스스로 펼쳐 놓은 지혜의 빛을 바깥 경계로 알고 쫓다가 지금 이 몸에까지 온 것입니다. 중생(衆生)이란 청정한 본래의 마음을 등지고 사는 무리란 뜻입니다. 부처에서 중생으로 떨어진 원인인 탐심(貪心)의 마음이 바로 업의 시발점인 것입니다. 그 탐심이 반복되어 관념(觀念)을 이루고, 이러한 관념이 반복되면서 굳어진 습관(習觀)이 업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다 나쁘다, 더럽다 깨끗하다, 그리고 이익이다 손해다고 생각하는 판단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십니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각으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단순해지면 정신이 맑아지고 생체리듬이 원활해서 병(病)이 없어집니다. 몸의 병이란, 마음이 중심을 잃고 갈팡질팡할 때 다른 업력이 뚫고 들어오는 과정입니다. 죽음이란 , 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 스스로 지어 놓은 업보(業報)에게 백기를 들고 항복한 결과입니다. 생각의 필름이 돌아가는 길목을 잘 살펴 보십시요.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도 짓고있는 업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업이란 형체가 없습니다. 마음을 따라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 그림자에 밟혀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요. 행복하게 살아도 부족할 시간이 업에 의해서 100분의 1로 줄어들었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나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보십시요. 그리고 밖을 보는 마음의 눈을 스스로의 마음을 향해 맞추십시요. 마음을 돌이켜서 보는 놈을 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이렇게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 실체는 무엇인가?" "업으로 고통받기 이전의 나는 누구인가?" 성급하게 결론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요. 단정짓지도 마십시요. 다만 나를 찾고자, 나를 알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바라 볼 뿐입니다. 이 간절한 물음이 계속되도록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십시요. 세상에 대한 관심을 이제 이 마음의 근원을 찾는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본래 내 마음은 더러움에 물든 적 없습니다. 생각으로 복잡하지도 않았습니다. 업으로 고통받은 일도 없었습니다. 찬란한 광명일 뿐입니다. 붙잡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음이 스스로 쉬어집니다. 창공의 새처럼 자유롭습니다. 그렇습니까? 부처님은 3독(三毒)이라 하여 탐진치(貪嗔痴)를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불자라면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얘기입니다. 탐진치는 업을 키우고 살찌우는 거름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마음을 왜소하게 만들고 몸을 병들게 하는 독(毒)입니다. 근본의 마음은 본래 업에 물든 적 없고,근본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명제에 분명해야 합니다 전도된 삶을 청산하겠다는 굳센 의지가 없다면 수행은 고행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하든 참선을 하든 주력을 하든 청정한 본래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정한 본래의 마음으로 귀향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마음의 업을 없애는 지름길이자 최후의 길입니다. 부처님이 보여 주신 깨달음은, 초지일관해서 마음의 근본성품을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있다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귀코혀몸뜻으로 지어 온 수 억겁의 업을 어떻게 다 없앨 수 있겠습니까? 없애는 업보다 짓는 업이 훨씬 더 많습니다. 잡초를 박멸하려면 돌로 눌러놔서는 어렵습니다. 눌린 잡초는 언젠가는 다시 뚫고 올라 옵니다.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업을 없애려면, 업이 비롯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근원에서부터 다스리지 않으면 어떠한 처방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의 뿌리를 벗어나서 나무가지나 붙드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다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복(祈福)을 구하는 수행은 서리위에 눈을 더하 듯, 업의 수레바퀴를 더 굴러가게 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업은 눈덩이와 같습니다. 눈덩이가 자꾸 구르고 구르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산을 이루고 모든 생명을 덮어버리듯, 마음의 애착에서 시작한 업은 어느새 수미산을 덮고도 남습니다. 새해에는 업에 굴복하는 인간의 삶이 아니라 업을 조복받는 정진의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자성의 청정한 빛 보고싶은가? 하늘의 보름달 둥글고 처마끝에 고드름 길다. 마음의 법칙 - 제 5화 : 깨달음 : 자기로부터의 혁명(革命) 선 심 (禪心) 누리 삼킨 참 나를 낙화(落花)로 자각(自覺) 떨어지는 물소리로 웃고 가는 길 돌에서도 꽃에서도 님이 맞는다.(大圓禪師) 인도의 성자 크리쉬나무르티가 쓴 책 중에서 "자기(自己)로부터의 혁명(革命)"이란 제목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훌륭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상은, 인간의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황금이 만능이 되고 개개인은 자신의 참 모습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말법(末法)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고통과 암울한 현세(現世)의 원인은 바로 자기자신의 근본을 망각하고 사는 중생의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정화하고 개인의 존엄성을 회복하여 이 땅을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만들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이루어질 때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을 어떻게 몰아내겠습니까? 불로 태워서도 안돼고 태풍으로도 어둠은 몰아낼 수 없습니다. 원자폭탄을 터트려도 어둠은 꼼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을 산처럼 쌓아서 주면 어둠은 사라질까요? 어떤 방법을 써도 어둠을 단 한발짝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어둠은 오로지 '밝은 빛'으로만 몰아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에 젖어있는 무지의 어둠은 어떻게 없앨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의 지혜(智慧)가 아니면 중생의 어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로 깨달음의 지혜를 밝히는 일은 사람으로 태어난 자기자신이 이뤄내야 할 사명(使命)입니다. 깨달음으로 이 세상과 자기자신의 삶의 목적을 완성하는 것이 곧 '자기로부터의 혁명'입니다. 성불(成佛)이란, 원래 완벽한 자기존재, 자기완성을 말합니다. 불망염지장엄장해탈문(不忘念知莊嚴藏解脫門)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하는데 이 경지가 바로 가장 완벽한 자기완성의 경지요 곧 성불의 경지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완성한다는 이 모순된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말은 애시당초 없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이니 성불이니 하는 말도 있을 수 없는 잠꼬대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존재는 청정법신(淸淨法身)비로자나(比盧遮那)부처님일 뿐인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한 띠끌의 업에도 물들지 않은 태양과 같이 밝고, 허 공과 같이 무한하고,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태초에 물듦이 없는 이 자성(自性)은 영원한 생명(生命)이고, 최고의 행복(幸福)이며, 끝이 없는 즐거움(極樂)을 누리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과 여러분의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십시요. 생명이 안전합니까? 늘 행복합니까? 즐거움은 계속될 수 있을까요? 현실의 삶은 녹녹치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명은 병마(病魔)의 고통에 신음하고, 행복을 담보하기 위한 생명보험을 들어도 여전히 안심할 수 없습니다. 즐겁다는 것 또한 영화 속 얘기같아서 내일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날 사람들은 어쩌다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삶을 사는 것일까요? 오늘의 주제는 '깨달음 : 자기로부터의 혁명' 입니다.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이루는 길을 부처님은 3,000년 전에 제시해 주셨습니다. 황제의 자리가 보장된 왕자의 신분을 포기했습니다. 처자의 따뜻한 품도 버렸습니다. 궁중의 향락과 재물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홀홀단신 고행의 숲으로 들어 갔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하기 어려운 무서운 결단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철저한 자기성찰(自己省察)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이 본래 있을 수 없는 꿈속의 허깨비와 같은 것임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다 버릴지라도 참나를 깨닫는 이 사명과 맞바꿀 만큼의 가치있는 일이 없다는 절대의확신을 실행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당장 산속으로 들어가란 얘기는 아닙니다.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지금 서 있는 그곳을 극락으로 누리며 살라는 " 무혈(無血)의 혁명(革命)"을 선언한 것입니다. 꿈속의 허깨비놀음을 하면서 그것이 꿈속일임을 모르고 사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꿈깨라는 연극을 이 사바세계에서 한 번 펼쳐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팔만사천의 법문과 연기법(緣起法)과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셔서 본래의 신성한 자성을 사람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셧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성불은, 존재의 존엄성을 선포하고 존엄한 존재의 회복을 외치는 활화산같은 외침입니다. 불교는 이러한 깨달음으로 자기를 완성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의 길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중국, 한국의 불교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참선화두법 (參禪話頭法)'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청정한 자성의 실다움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을 보통 '견성(見性)'이라고 부릅니다. 견성은, 근본을 여읜 마음이 본래 청정한 그 마음의 실상(實相 : 실다움)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청정한 자신의 성품을 분명하게 깨닫고나서 햇볕에 봄눈 녹이 듯,수억겁의 업장(業障)을 제거하는 것을 '보림(保任)"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보림수행과정을 거치면서 마지막 한 티끌의 업이 다 없어져서 오로지 청정한 존재의 지혜등불이 찬란히 빛나는 경지를 '성불(成佛)'이라고 합니다. 성불의 경지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법성게(法性偈)에서 말한,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즉 아홉 세상 열 세상이 하나인 도리는 성불지(成佛地)에서 누리는 경지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안과 밖이란 경계가 서지 못합니다. 이렇게 안과 밖이 없는데서 서로 마주보고, 대화하고 행동하는데 서로가 걸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능력을 뜻과 같이 다 쓸 수 있습니다. 손오공의 여의주(如意珠)는 분명한 부처의 능력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묘유(妙有)의 세계'라 하고, 그래서 불망염지장엄장해탈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발 앞에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매일 쉼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모를 뿐입니다. 대승불교인 한국에서는 주로 참선(參禪)을 통해서 깨닫는 공부를 합니다. 선(禪)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무엇이 선(禪)입니까? 자기존재의 근원을 깨달아서, 즉 견성하여 부처의 삶을 누리며 사는 경지가 선입니다. 그러니 참선(參禪)은, 중생으로 떨어진 자성(自性)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행을 말합니다. 참선은 자기완성을 위한 깨달음의 과정입니다. 궁극의 목표는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참선을 통한 견성법을 공부할 때는 반드시 스승으로부터 화두(話頭)를 받아서 참구합니다. 화두란 깨달음을 얻고자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암호와 같은 것입니다. 군대의 암호는 (화랑하면 담배로 대답하듯)같은 편임을 확인하는 신호이자 약속입니다. 서로 그 뜻을 알고 있다면 마음으로 이미 통했다는 것이지요. 화두는 언어나 문자를 통해서 전해지지만 언어나 문자를 초월한 말입니다. 마치 달을 보여줄 때 손가락끝을 떠나야만 달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화두란 간절히 의심(疑心)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간절하게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참나를 깨닫는데 스스로 내 마음을 간절히 의심(疑心)하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의심하라는 것일까요? 나는 누구인가? 생노병사의 고통은 어디서 온 것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결국 어디로 가는가? " 이렇게 알 수 없는 존재의 근원을 의심하는 것이 바로 화두참구입니다. 무턱대고 이걸까 저걸까 분별하는 수수께끼 놀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중국의 조주(趙州)선사에게 한 스님이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조주선사는 " 무(無)!"라고 대답했습니다. 개에게도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한 마디로 개에게는 마음이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분명 "유정무정(有情無情)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무릇 생명있는 것 뿐만 아니라 초목와석(草木瓦石)도 다 마음이 있다 ' 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조주선사는 부처님의 불법을 아주 잘못 말한 것이 됩니다. 그렇지않습니까? 하지만 조주선사가 잘못을 말했을리가 없지요. (조주선사는 과거 사라수왕불의 후신입니다) 그 스님에게 "무"라고 말함으로써 묻는 스님에게 커다란 의심덩어리를 안겨준 것입니다. 그리고 물었던 스님은 "무!"라고 한 그 말이 가슴의 못이 되어서 "왜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하는 의심을 자나깨나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조주선사가 "무!"라고 한 의중(意中)은 무엇일까요? 묻는 스님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달을 보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이제 그 스님의 몫입니다. 선사가 툭 던진 말을 듣고 그 말이나 문자에만 떨어져서 헤아리면 헛수고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선사의 의중이 무엇인가를 깊게 궁구해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꽉 찰 때 밥 먹을 때나 걷고 일할 때나 쉴 때나 하루 24시간 오직 "무?"라는 한 생각만이 전부가 되어버립니다. 그 의심덩어리가 태산만해지고 숨 쉴수 조차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르면, 이제 의심하는 그놈도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텅빈 허공처럼 의심했던 마음만 덩그라니 남습니다. 허공은 스스로의 앎이 없지만 의심하는 그 놈이 바로 나임을 알았을 때, 비로소 스승이 "무!"라고 한 그 뜻이 확연히 드러나면 화두는 타파됩니다. 이러한 화두타파를 바로 '견성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수행자들은 스승에게서 화두를 한 번 받으면 10년, 20년씩 참구하면서 그 화두가 타파되어 견성에 이르도록 퇴전하지 않았습니다. 이 방법이 전통적인 화두참선법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대인들에게도 이러한 전통적인 화두참구법이 효과가 있을까요? 화두 하나를 들고 10년, 20년씩 참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세대는 그렇게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화두를 주면 자살(?)할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의 하루하루는 정신없이 빨리 돌아갑니다. 온갖 지식이 넘쳐나는 첨단의 시대여서 보고 듣는 홍수에 휩쓸려 삽니다. 땡감이 홍시가 될 때를 기다리기 보다는 금방 전자레인지에 넣고 1분안에 홍시를 만들어 먹는 습관에 길들어져 있어서 화두 하나만 붙들고 10년을 버틸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인내할 사람들의 근기(根機)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강물에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유랑하는 수행자가 많은 시대입니다. 오늘날,훨씬 많은 수행자가 화두참선을 한다고 하지만 견성도인(見性道人)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바른 가르침을 줄 눈밝은 선지식(善知識)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화두는 어디를 향해서 참구해야 할까요? 화두참구의 원리는 경계에 물든 마음을 역으로 거슬어 올라 경계를 여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음밖의 어떤 대상을 향해서 화두를 참구한다면 그것은 시작부터 틀린 것입니다. '의심하는 그 마음을 눈밖에 1미터 앞에다 두고 참구하라'(모 선사의 지도법)는 것은 온갖 경계위에서 참나를 찾으라는 것이어서 깨닫기가 요원합니다. 화두는 내면을 돌이켜서 보는 놈을 보고 듣는 놈을 보는 내관수행(內觀修行)이 되어야만 화두일념(話頭一念)의 참구가 됩니다.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는 바른 안목을 가진 스승의 지도를 반듯이 받아야 합니다. 제자의 상태를 거울 속 들여다 보듯 볼줄 아는 스승이 볼 때, 제자가 지금 하늘 땅이 둘이 아닌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고 바로 그 경지를 짚어주면 화두는 열리는 것입니다. 내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그 절정의 길목에서 스승이 "바로 이것이 너의 본래 상주불멸(常住不滅)한 마음이다." 라고 바로 짚어 준다면, 화두는 스승의 지도와 나의 노력으로 해결 되는 것입니다. 이 산승이 정진하고 있는 국제정맥선원(國際正脈禪院)은, 바로 이렇게 스승과 제자가 한마음 한 뜻으로 하는 화두참구법으로 견성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원선사(大圓禪師)의 독창적인 화두지도법으로 200여명이 넘는 수행자가 참나의 경지를 체득하고 보림정진(保任精進)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21세기 최첨단의 견성법입니다.(최첨단을 좋아하는 수행자들이 많기에) 자기로부터의 혁명은 가장 위대한 무혈의 혁명입니다. 총칼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이 지구를 낙원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깨달음의 길에 모든 사람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 영원한 행복의 열쇠를 쥐는 지름길입니다. 그 첫걸음을 여러분이 시작하십시요. 혜원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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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8.18 10:31

    첫댓글 자기로부터 혁명~~~편안한 마음으로 선물을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0_0_0_

  • 12.08.18 14:47

    지장보살님
    고맙습니다()()()

  • 12.08.19 22:16

    넘넘 고맙고 감사합니다__()_()_()___

  • 13.09.16 10:34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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