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물가물 그날을 기억의 더듬어가며 적어 나간다. 말로 하다보니 글자가 툭툭 튀어 오른다. 이제 시작이다.
형님, 어디서 만나죠?
카톡에 문자를 남겼더니 한참 후에서야 답이 왔다 "카페 꼼마 3시 10분 3시 20분"
3시 20분에 커피를 마시자는 제안이었다 전화번호가 입력되어 있지 않아 보이스톡으로 대화를 한다
형님, 커피 말고 저녁이나 하시죠, 희용형님도 올 수 있데요,
그래, 판이 커지는구나, 여의도 백화점에서 보자
네 알겠습니다
그때, 눈치를 긁었어야 했는데 눈치 없이 저녁을 들이대었다. 사실 얼마전에 여의동민 단합대회 하자고 오퍼를 넣어 둔 터였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전날 과음으로 하루종일 잠과 친구 되었고, 술은 절대 안돼를 외치고 있었다.
진영형은 파주에서 사백 평의 공장을 갖고서 조명업을 하고 있다. 스카이라이프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우리가 마주치는 거리조명의 신기원을 열어젖히기도 했고, 아직도 시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조명제품 발굴에 열과 성을 쏟고 있다.
오후 다섯 시, 여의도 백화점 가니 회용형이 저만치 오고 있다. 여의도에 백화점은 더 현대밖에 없는데 잘 찾아오셨다고 실없는 농담을 던진다.
희용형은 자천타천 모르는 게 없는 언론계의 보물이다. 연합뉴스 정년 퇴임 후 언론재단 경영이사를 마무리짓고서 고정 칼럼과 기사를 연재하는 등 현역 못지않게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명저 세계시민교과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저기쯤에서 전날 과음으로 약간은 힘들어 보이는 진영이 형이 오고 있다. 그런데 여의도 백화점 가게들이 일요일이라서 문을 닫고 말았다. 지하에 오삼불고기 집을 가려했는데 들어갈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자리를 옮겨 먹자 빌딩으로 들어간다. 이른 시간인지 테이블 하나에 손님이 식사를 하고 있다. 청국장으로 유명한 삼보정이다. 그때 기준으로 사십 년 가까이 된 집이다.
최근 여의도로 잠시 이사 온 진영형은 아직 이곳의 형세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서교동을 지켜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전날의 대회전을 생각해서 속풀이 겸 불낙전골을 시킨다. 술은 술이 부르나 보다. 전날 쉬었던 희용형이 먼저 달려 나간다. 다른 사람이 거북이라면 토끼요, 다른 이가 1배속이라면 5배속은 됨직했다.
이틀 전 다녀온 자연 그 자체이자 신비의 섬 자은도 얘기로 시동을 건다. 땅을 사고 펜션이 있고 그 땅을 팔려고 하나 아니 팔린다고 한다. 옆의 둘은 연신 고개만 까딱까딱, 추임새는 빠짐없이 넣고 있다.
목포 신안 자은도가 머릿속에 그려지듯 빠져 나가듯 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오케이 목장의 혈투얘기는 손에 땀을 지게 했다. 소설이든 영화든 갈등구조가 없으면 재미없는 법, 밋밋하다는 소릴 듣는다. 자은도는 아쉽게도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얘기였다.
내가 만일 그 스토리의 작가였다면 그렇게 끝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갈등과 화해가 2회씩 교차되는 구성으로 엮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 번은 가고 싶은 곳으로 하드 속에 꼭꼭 저장해 두었다.
산악회 가입범위에 대해서도 서사가 길어진다. 노쇠화 과정에서 일상적 참가자수가 여섯으로 한정되다 보니 좀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하나 그렇지 못한 의견도 있는 법, 앞으로도 논의의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통오징어 하나를 추가로 시킨다. 얘기는 끝이 없다. 어느덧 식당 안은 손님들로 가득이다. 이른 시간에 시작해서인지 벌써 소주 세병이 줄을 섰다. 더 할 것인가, 진영형은 여기까지 하자고 한다. 한 병을 더 하고 싶어 하는 희용형을 위해 옆집 레벤호프로 이동한다. 진영형이 마지못해 따라오는 것 같아 미안스럽다.
오백 세 잔과 먹태를 시킨다. 천하의 얘기꾼 희용형은 잠들지 않는다. 형수님이 포함된 부부모임에 갈 경우 형수님에게 주의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천하의 얘기꾼에 고춘자와 장소팔도 울고 갈 만담재치꾼인데, 그걸 또 어찌하랴,
진주의 텃밭얘기, 파주의 조명얘기, 사람들 연줄 얘기까지 돌고 돌아 끝없는 인연의 실타래를 펼쳐 나간다. 희용형은 세계시민교과서 외에 또 다른 저작물이 있음을 공개한다
오백 두 잔씩에 하나 더 하려는데 진영형님 형수님의 호출이다. 가야지, 연이틀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거지, 일어섭시다,
일요일밤 간 큰 남자 셋은 그렇게 기나긴 수다잔치를 벌였다. 참 남자들도 말이 많구나, 진영형을 보내고 여의도역에서 나루역으로 걸어간다.
밤공기가 참으로 이쁘다. 한잔 더 하자는 분위기인데 내가 받쳐 주질 못한다. 전날밤 과음 탓이다. 버스정류장엔 버스가 없다. 참 희안타. 마포대교로 걸어간다고 한다. 그렇지, 걸어갈만하지, 집이 공덕이니, 그렇게 여의도 회동은 저물고 있었다.
마포에서 방어 한 접시? 희용형의 제안,
콜! 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두고두고 아쉽기는 했다,
그때가 아마 2023년 12월 10일 이었던가,
참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분들 지금 어디 계시는지 무척 궁금하다. 얼핏 듣기로는 다들 잘 살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벌써 삼십 년 전의 그날이다.
시간이 이렇게 금방 가버릴지는 정말 몰랐다. 그래도 그날 밤 한 잔의 추억이 지금도 남아있는 게 어디인가, 다들 참 좋은 분들이었다. 한 분은 스마트한 사업가였고, 또 한 분은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저널리스트였지 ,
굴지의 기업을 키워내고 은퇴했다는 얘기는 이십 년 전에 들었고, 또 한 분 저널리스트는 남미로 가서 십 년, 아프리카로 가서 십 년간 현직 활동한다는 얘기도 십 년 전에 들었는데, 지금은,
그날 그 밤, 먹태에 보리와 홉으로 빚은 물을 마셨는데 그걸 호프라고 했던가, 하여튼 그걸 술로 먹었었지, 천하의 재담꾼은 아직도 사람들 심금을 울리고 있으려나, 그러고도 남을 분이지, 남미와 아프리카 얘기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창 핫하게 돌았었지,
다들 보고 싶군,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한강 붉은 노을이 참 이뿌게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