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전칭(不當全稱)의 오류
부당전칭(不當全稱)의 오류(誤謬)란 정언적(定言的) 삼단논법(三段論法)에 관한
형식적 오류의 하나로서 전제 중 하나가 특칭(特稱) 명제일 때 결론도 특칭 명제이어야 하지만
전칭(全稱) 명제로 결론내림으로서 생기는 오류를 말한다.
즉, 부분적 정의를 전체적 정의로 확대 적용시키는 오류를 말한다.
예를 들면 “어제의 정의는 내일의 불의가 될 수 있다”고 하면 얼마든지 옳은 말일 수 있다.
어제는 옳은 정의였지만 세월이 흐른 뒤인 내일은 얼마든지 그 정의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대통령”에 대한 호칭부터 과거에는 “각하”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호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대통령님”이라고 부른다.
또 옛날에는 여자가 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지를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세태에 따라 변하는 것은 시대적 정의는 될 수 있어도 영원한 정의는 될 수 없다.
따라서 만일 “각하 또는 대통령님”이라는 호칭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옳은 호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시대적 정의를
영원적 정의로 착각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부분적 정의를 전체적 정의로 확대하거나 착각하는 오류가 바로
“부당전칭(不當全稱)의 오류(誤謬)”이다.
이런 부당전칭의 오류는 쉽게 말하면 “한 가지 옳은 점을 가지고
수십, 수백 가지가 옳다고 우기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부당전칭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브로콜리(broccoli)는 비타민 C가 많기로 소문난 식품이다.
만일 이런 브로콜리를 재배하는 농민이 “브로콜리보다 좋은 식품은 이 세상에 없다”고
단언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장점을 천 가지 장점으로 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를 실감할 때가 많다.
그래서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친구를 사귀라는 충고도, 죽을 때까지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는 충고도 모두 무언가
믿는 구석을 마련해 두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인생에는 친구나 돈이나 명예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정말 많다.
특히 치료 불가능한 질병이 생기거나 벗어나기 힘든 불행이 닥치면 더욱 마음을 잡을 길이 없다.
그럴 때 신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은 큰 힘을 발휘한다.
이런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만능은 아니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광신자들은 신앙이 만능이라는 오류에 빠져 자신을 망치고
집안을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광신(狂信)도 부분적 정의를 전체적 정의로 착각하는 부당전칭(不當全稱)의 오류(誤謬)에
속하는 일이다.
정치적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이다.
진보든 보수든 그들의 주장에는 분명 타당한 점들이 있다.
문제는 그 부분적 타당성을 전체적 타당성으로 확대하고 착각하는 데 있다.
죽어도 진보, 죽어도 보수는 그렇게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정의와 진리가 될지 몰라도
결코 모두의 정의와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오직 부처, 오직 예수, 오직 알라신을 외치는 자를
광신자로 매도하는 이유도 부분적 옳음을 전체적 옳음으로 착각하는
부당전칭(不當全稱)의 오류(誤謬)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 절대 선과 절대 악이란 없다. 같은 비라도 적당한 비는 선(善)이 되지만
지나친 폭우는 악(惡)이 된다.
“다정(多情)도 병”이라는 말이 있듯 적당한 사랑은 약이 되지만 지나친 사랑은 병이 된다.
선박도 자동차도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면 넘어지듯 무슨 일이든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불행이 된다.
너무 기울어진 정치적 진보와 보수도 국가를 불행으로 몰고 갈 뿐이다.
너무 창문을 꼭꼭 닫고 있으면 숨막혀 못살 듯 너무 생각의 창문을 꼭꼭 닫고 있으면
정상적인 사고가 막혀 정신병자가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