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의 공수부대들은 작전을 수행할 때 포나 지프·공병물자·의료품 같은 무거운 물자들은 글라이더를 이용해 공수했다. 하지만 글라이더 착륙 대대들이 창설되기 전 낙하산 대대들은 필요한 물자를 투하하는 방법들을 나름대로 고안해 사용했다. 또 글라이더 대대가 창설된 후에도 낙하산병이 갖고 내리기에는 너무 무거운 물자와 물품들을 글라이더와는 별도로 낙하산병과 함께 투하시킬 필요가 생겼다. 주로 낙하 후 즉시 사용해야 하는 무선통신 장치나 모터사이클, 탄환, 중박격포, 비상식량 등이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자국 저항세력들을 위해 물자 수송함을 낙하산으로 투하하고 있는 영국 공군의 핼리팩스.
영국 공군의 중앙착륙기관(Central Landing Establishment)은 각종 물자와 물품들을 안전하게 공수하기 위해 다양한 컨테이너를 실험했다. 처음 만든 것은 대나무 막대기와 누비 매트를 이용해 포켓 안에 소총과 다른 물자들을 꽂아 넣는 형태였다. 매트를 둘둘 말아 올려 한쪽 끝을 낙하산과 연결할 수 있게 길이 8.5m의 철제 바에 묶었다. 그리고 말아 올린 매트와 같은 직경의 통 안에 넣어 항공기 폭탄 투하실에 실은 후 투하했다. 하지만 이 매트는 단점이 많았다. 매트를 넣는 통과 직경이 다른 타입의 물자 수송 용기는 싣지 못했고 아주 작은 종류의 물자들만 나를 수 있었다. 땅에 떨어진 매트를 재빠르게 다시 푸는 것도 힘들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GQ 낙하산중대(Parachute Company)는 휘틀리(Whitley) 폭격기의 폭탄 투하실에 실을 수 있는 물자수송함을 만들어 특수작전부서에 다량 공급했다. 이 물자수송함은 길이 1.8m, 직경 38㎝로 한쪽 끝으로만 열 수 있게 돼 있었다. 그래서 밤이나 전투 중에도 빠르게 물자수송함을 열 수 있었다. 이후에는 270㎏의 물자를 실을 수 있게 세로로 긴 금속 통이 생산됐다. 하지만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덩치 큰 물자, 예를 들어 무선통신 장치들은 여전히 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핼리팩스(Halifax), 스털링(Stirling), 랭커스터(Lancaster)같이 더 큰 폭격기들이 등장하면서 자연히 폭탄투하실도 커져 3m 길이에 직경 46㎝짜리 직사각형 물자수송함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무겁고 위험한 물품들, 예를 들어 3인치 박격포 바닥판, 75㎜ 곡사포의 예비 포열, 뱅갈로어 토피도 같은 물자들을 위한 특수 상자도 개발됐다. 이런 물자들은 크기와 외형 때문에 어떤 폭격기의 폭탄 투하실에도 실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항공기 내부에 실어서 점핑 홀(Jumping Hole)을 통해 투하하거나 항공기 문밖으로 내던져 투하해야 했다. 이런 방법이 성공함에 따라 다코타 수송기처럼 폭탄 투하실이 없는 항공기에서도 문밖으로 물자를 밀어내 투하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낙하산을 이용한 물자공수 방법을 끊임없이 개선한 것은 영국군만이 아니어서 각국이 기술 개발에 열을 올렸다. 이는 짧은 기간 안에 격렬한 전투를 벌여 적을 혼란에 빠트리는 공수부대의 작전이 2차 대전 동안 효과를 발휘했지만 물자 공수 없이 공수부대가 제 역할을 해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군을 포함한 다른 국가 공수부대들도 유사한 외형과 크기의 물자 수송함을 사용했는데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생기기도 했다. 1943년 7월 13일 시칠리아에서 영국 제1낙하산여단이 악몽 같은 야간 투하 작전을 펼쳤을 때 한 영국군 장교가 자신의 대대 물자수송함이라고 생각하고 뚜껑을 열었는데 알고 보니 독일군 물자수송함이었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또 많은 물자가 공수부대에 투하됐지만 그에 못잖게 독일 점령 지역 내 빨치산과 레지스탕스 그리고 영국의 특수작전국 요원들에게도 투하됐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영국 공군과 폴란드 공군은 8월 4일부터 9월 21일까지 104톤의 물자를 폴란드 국내 저항세력들에게 투하하기도 했다.